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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 ㅣ 창비아동문고 233
김소연 지음, 장호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평점 :
하늘의 절반 또는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여성이 절반의 대접을 받았던가. 세상의 절반이 아니라, 남성의 부속물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남성과 동등한 여성이라는 인식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평등을 지향한다는 서양에서조차 여성이 참정권, 즉 투표권을 얻는 데는 엄청한 노력이 있었고, 또 인류의 역사를 보면 바로 얼마 전에서야 이루어졌다. 이만큼 여성은 남성에 속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라고 예외일까? 아니다. 우리나라는 봉건시대를 거치면서 여성의 권리는 한없이 줄고, 남성의 권리는 한없이 늘어만 갔다. 여성이 이름을 지니고 사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냥 무슨 무슨 씨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여성 앞에 세 가지 문제가 닥친다. 하나는 식민지 문제이고 하나는 근대화 문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에 관한 문제.
이 소설은, 아니 동화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식민지가 막 시작된 1910년대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의 사회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자기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개화된 사람이라도 여성은 결혼하면 그뿐이라는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식민지에서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차별에 여성이라는 차별이 중첩되어 있었으니,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데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소설의 주인공 명혜는 자신의 이름을 갖기를 원하는데, 이 이름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어른들은 명혜라는 이름 대신 아기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을 대한다. 이는 아직 명혜가 완전한 한 사람인 명혜로 존재하지 않고, 집안에 속한 남성의 세계에 속한 아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 동화는 명혜의 성장을 보여주는 성장동화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서 또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화.
굳이 동화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성장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처음부터 흥미롭게 읽히고, 나름대로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데... 결국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찾느냐에 있다. 우리가 소설이나 다른 글들을 읽는 이유는 그런 내용이 있구나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참고자료로 삼는데 있기 때문이다.
문정희의 시 중에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란 시가 있는데, 이 땅의 명혜들은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해본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남성의 분야, 여성의 분야로 딱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다인 세상이다. 여성들은 명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남성들도 역시 명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