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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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들다.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또 소위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한때 평화운동의 상징이었던 사람 등등이 눈 감고 있다는 사실에.


전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시 강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아직도? 라는 비탄으로 끝난다. 아직도, 여전히? 이런, 참.


전시 강간은 전쟁 범죄와 같다. 분명 이는 반인도적 범죄 행위이고,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그런데도 지금 전시 강간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전시 강간을 전쟁 범죄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쟁 범죄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겨우 재판정에 세웠는데,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 적은 부분을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범죄에 대해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진행형이다.


일본이 배상을 한다고 했지만, 그건 정부 차원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생색내는 행위에 불과했기에 피해자들이 거부했던 것. 그 이후 일본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아니, 뻔뻔하게 그런 일은 없다고 하고 있으니, 이런 일본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작자들도 있는 현실이니...


우리나라뿐이 아닌 것이다. 전 세계에서 제대로 된 처벌이 없고, 오히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이니...


이 책에서 전시 강간을 다루면서, 범죄자들을 재판정에 세워 정의를 이루려고 했지만, 많은 경우 아직도 제대로 된 처벌이 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피해자들에게 정의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있다.


정말 많은 나라에서 전시 강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에 살고 있던 야디지 족,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졌던 보코 하람의 만행, 버마에서 일어났던 로힝야 족에 대한 범죄, 여기에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일. 르완다. 보스니아, 2차세계대전 직후의 소련군.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들,  아프리카 콩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벌어진 강간 등등.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이것이 20세기, 21세기에 이 지구에서 벌어진 일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어떻게를 실천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증언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함께하려는 사람들, 재판정에서 진실을 밝히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응징하는 분위가가 형성되도록 하는 사람들이 비록 갈 길은 멀지만 정의를 실현하려고 '어떻게'를 채워가는 사람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전시 강간이 벌어지고 있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미신을 위해서 아주 어린 사람들을 강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함께해야 할 문제다.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든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전쟁 범죄를 언제든 처벌하듯이, 전시 강간 또는 강간을 기한을 두지 않고 처벌해야 한다. 또한 처벌을 강도를 높여야 한다.


강간은 반인도적 범죄이고, 인격 살인이기 때문이다. 전시 강간은 전쟁 범죄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행위에 가담한 사람은 전쟁 범죄자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불관용 원칙이 적용되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국가가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야 한다. 이 책에 나온 여성의 이 말. 이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도 더 힘든 일이에요." (476쪽)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범죄를 묵인하는 행위다. 지금 전세계가 권력자들이 이렇게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경우, 전시 강간 또는 강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묵인하는 것 역시 범죄에 동조하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고, 국가 또 권력자 또 전세계가 이러한 강간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에게 첵임을 전가하는 행위 역시 금지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지니게 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를, 그렇게 유발한 권력자들을 응징해야 한다. 우리가 겨누어야 할 방향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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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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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야기의 효용 자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세계를 상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423쪽. 작가의 말에서)


다른 삶의 이야기, 그것이 소설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않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겪게 된다. 다양한 경험. 다양한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거기서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오는 경험. 그것이 소설이 주는 경험이다. 재미다. 


소설이 재미 없으면 읽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 연구자가 아니면 누가 재미 없는 소설을 읽으려 하겠는가. 하여 읽히는 소설은 재미 있는 소설이다. 이 재미를 통해서 다른 세계,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때 재미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이 알던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나는 재미, 그리고 자신이 알던 세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만나는 재미가 소설이 주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환상 문학 단편선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다. 제목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인데, 이런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요즘 나오는 소설집이나 시집들을 보면 제목이 된 소설이나 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읽으면서 도대체 이 제목은 어디에서 왔는지 찾는 재미도 있다. 


이 소설집은 'Nessun sapra'라는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다. 영어 제목도 아니고, 어떤 말인지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설인데, 읽다가 끝에 가서야 이 뜻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이 '이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많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완전한 행복'이라는 소설에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하는 구절을 만났다.


'잘못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여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나 자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의였다.' ('완전한 행복'에서. 416쪽)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과연 그것이 혁명일까?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고 했다는 아나키스트도 있다고 하는데, 내가 행복한 사회, 우리가 행복한 사회여야 한다.


한데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면서 자신은 혁명을 위해, 즉 대의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의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사람은 있어야만 한다는 사고. 그러면서 자신은 당당하다고 외치는 사람. 혁명에서도 그러한데, 혁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눌렀음에도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말이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소설이 주는 경험, 재미 아니겠는가. 나 대신 누군가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는 일. 그런 사람, 환경,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바로 소설가.


'어쩌다 보니까 나는 본의 아니게 복수 전문 작가가 된 것 같은데 많은 경우 화가 나서 글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작가의 말에서. 421쪽)

'전쟁이 빨리 끝나고 나쁜 놈들이 얼른 몽땅 죽어서 전부 늑대에게 뜯어 먹히기를 소망한다.'(작가의 말에서. 425쪽. 참고로 늑대에게 뜯어먹히는 인간이 등장하는 소설은 '완전한 행복'이다. )


하하, 복수라? 소설 속에서 복수를 하는 인물들이 제법 나온다. 이 소설집에 실린 첫번째 소설 '나무'가 그렇다. 장난이 죽음으로, 복수로 치닫는 과정을 쓴 소설. 그렇다. 작은 일이 죽음으로까지 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용서'를 생각한다. 용서를 빌 여지도 주지 않고 처벌을 한 경우가 이 소설이라면, 아예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용서를 빌 마음도 없는 소설이 '완전한 행복'이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지 않는 것도 비극을 초래하지만,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는 존재를 용서했을 때도 비극이 일어나니, '용서'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했던 인물, 그러나 용서받았다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사면을 받았으니, 그런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산'이다. 이제 채 20년도 안 된 과거지만, 현재형이기도 한, 산을 깎고, 강을 막고 파헤쳐 자연을 훼손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정부.


그런 일이 어떤 일을 초래하는지, 그것은 전쟁과도 같은 역할을 함을 '산'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는 그간 발표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읽는 재미를 느끼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고 있다. 좋다. 단편선2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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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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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직업에 귀천을 따졌기 때문에 이 말이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다면 말도 없었을 테니까.


문제가 없었기에, 문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귀천이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말로만 또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종 직업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인 일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귀천을 따진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와 직업에 성별이 없다를 연결시킨다면, 직업에도 성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예전 책들을 보면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늘 특정 성별이 선택되곤 했으니까. 그만큼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별을 따지는 것이 인권을 위배하는 행위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당연히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성별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없다고 여기는 사회라고 봐야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특정 성별에게는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또한 알게 모르게 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하다.


이제는 그런 압박을 없애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못할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냐 없냐로 따져야지 성별로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직업에 귀천을 따져서도 안 된다. 귀천을 따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특정 성별, 특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하기 힘들었다고 여기던 일들을 한 여성들이 있다. 열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택한 직업을 보면, 화물 노동자, 플랜트 용접 노동자,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 청소 노동자, 레미콘 운전 노동자, 철도차량정비원,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 주택 수리 기사, 빌더 목수가 있다.


여전히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만 이제 이 직업들은 여성들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아니다. 당연히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이들이 그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겪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성차별도 차별이지만, 우선 화장실 문제.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화장실이 없을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 자체가 가장 큰 성차별 아닌가. 화장실 문제가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성차별 문제 역시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조를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노조가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노조를 무슨 '건폭'이라고 폭력배 취급한 사람이 있었으니... 노조에 속한 건설 노동자들의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지도자인 양 하는 시대는 갔으니, 이제 노조를 범죄시하는 그런 시각들은 사라질 거라 믿는다.


처음에 시작한 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당당하라'다. 주눅들 필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참여하라고. 못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부딪쳐 보라고. 그리고 남들이 무시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또한 직업에 성별도 없다.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빌더 목수의 말로 맺는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엄청 멋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노동'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요.' (빌더 목수 이아진 편에서.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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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카프카 씨 - 카프카 서거 100주기 기념 앤솔러지
한유주 외 지음 / 카프카의방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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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작년은 카프카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하여 카프카 서거 100주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여러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책도 여러 권 나오고.


죽어서 더 명성을 누리게 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 카프카일 텐데, 그만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형용사까지 지니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행사나 책이 나왔겠지만, 이 책은 카프카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실었다. 네 명의 작가가 각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카프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로 섰다.


한유주의 '암담'은 제목 자체에서 불안함, 불명확함, 불확실성 등이 느껴진다. 암담하다는 말을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쓰기 때문이다. 사실 카프카 작품들이 이러한 불안, 암담함을 많이 드러내고 있기는 한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유주가 받아서 쓴 것.


배경은 인도다. 낯선 곳이다. 아마도 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란 다른 세계, 그들이 탐험하고자 했던 세상이기도 했으리라. 물론 카프카 생존 시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탐험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또 영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는 낯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인도는 지금 우리에게도 낯선 나라이니까.


낯섬과 만나는 불안함.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모습을 '암담'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인도'보다는 카프카 소설 중에서 '실종자'를 더 많이 떠올렸으니...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 이야기.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함,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 그런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실종자'이고, 한유주가 쓴 '암담'을 읽으면서 '실종자'에 나오는 카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카알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암담'이었으니... 어디 그만 그런가? 이제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미래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카프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불안감이나 한유주가 확장한 암담함은 지금도 우리 삶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 문학의 현재성!


김태용이 쓴 '카프카 씨, 영화관에서 울다' 역시 불안함,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1913년 11월 20일에 쓴 일기'영화관에 있었다. 울었다,'(52쪽에서 재인용)라는 내용에서 착안한 소설이라고 한다.


카프카가 영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김태용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풀이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관이 어떤 곳인가? 남과 소통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로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곳 아닌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영화관 아닌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나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영화관을 생각하면, 우선 어둡다. 그리고 단절된 세계다. 나만의 의자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혼자 곱씹으면서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오면 이제 현실로 돌아온다. 다른 세상에서 현실로...


물론 김태용의 소설은 다르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구두를 가져간다. 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간접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는데...


민병훈이쓴 '예언자의 꿈'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다리'를, 김채원이 쓴 '더블'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공동체'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카프카가 다리를 서술자로 삼고 있다면, 민병훈은 그 다리를 찾아 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중간중간에 소설 '다리'에 나온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서술자가 달라졌으므로,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더블' 역시 카프카 소설에서 배제되는 여섯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카프카는 여섯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내용으로 이미 존재하던 다섯을 중심으로 썼다면 김채원은 나중에 온 여섯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리'나 '공동체' 모두 번역된 소설집에서 두 쪽짜리 소설이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소설 나같은 경우는 읽고는 그냥 잊고 말았는데, 소설가들은 그러한 소설에서도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소설을 쓴다. (이 소설들 덕분에 다시 카프카의 두 작품을 찾아 읽었다. 정말 짧았다. 이 짧은 소설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작가들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을 그냥 넘기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다시 재탄생 시키는 작가의 모습들. 그것이 바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이렇게 우리 곁에 있고, 또 다른 작가들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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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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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글이다. [자미]를 읽고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은 다음에 읽게 된 글. 두 책을 이미 읽었기에 로드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함을, 그런 점을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흑인이고, 어머니, 시인이자 전사였던 사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으면 전사가 되려 했을까? 아니 전사가 되었을까? 전사로서 싸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오드리 로드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행동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차이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감동적이다. 특히 첫글에 실린 이말.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포스터에 실린 말을 로드는 인용한다. '그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형제입니다!' (36쪽)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서는 차이를 무시하려 한다. 왜 흑인이 아니라고 하나? 물론 흑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흑인인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흑인이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뭉뚱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드는 이 문장을 바꾼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37쪽)


'그'에서 '나'로 주체를 바꾸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형제, 자매라는 말로 함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함께함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차이를 품고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오드리 로드의 이 말이 바로 이러한 차이의 인정, 함께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 속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두 가지는 차이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77-178쪽)


이것, 차이를 다리로 만드는 법. 이것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치려는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가 배제와 적대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했던 것.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행동의 원료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분노에 양분을 대는 바로 그 억압적 환경을 바꾸는 행동의 원료로 분노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63쪽)고 하고 있으니, 이 말에서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36쪽)라고.


그렇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습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무너져 가게 될 테니까.


이렇듯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으면 고정관념에 갇힐 새가 없다. 고정관념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차이가 들어온다. 차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다리가 된다.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오드리 로드가 시인이자 교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로드의 이 말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다른 무엇보다 배움의 장치이다. 진실한 감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배우는 것들이 있다. 함께 소통한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참된 시를 쓴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145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차이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차이들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될 수 있음을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서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로드의 말처럼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오드리 로드의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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