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나 있는 존재. 귀신.
제목이 눈길을 끈다. 귀신의 왕. 세상에 귀신에게도 왕이 있나? 귀신의 세계는 평등하지 않나. 이미 죽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데 이들에게도 왕이 있다고 하면 참...
그런데 어디에도 이런 위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귀신의 왕이란 말을 진짜 왕이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보면 안 된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된 시 '귀신의 왕'을 읽어봤더니, 맞다. 왕 이야기는 없다.
귀신의 왕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지만 시는 골목을 이야기한다. 골목, 현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존재. 도시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골목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골목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만났다. 그래서 삶이 있는 곳이었는데, 현대인에게 골목은 죽은 곳. 귀신과 같은 곳이다. 만날 수 없는 곳.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속한 곳. 그런 곳이 바로 골목이다.
이 시집은 귀신 이야기가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시와 마지막 시 제목이 '미메시스'다. 미메시스, 쉽게 말하면 모방이다. 모방이란 실제가 아니다. 실제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쓰기다. 여기서는 '시'다.
'시'는 실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귀신이다. 골목과 같이 우리 삶을 품고 있었던 존재... 그런데 '시는 귀신이다'라고 해놓고 보니, 시가 실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실재한다. 그런데 실재하는 시가 무엇이지? 시가 도대체 어떻게 실재한다는 거지? 시라는 형식을 빌려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결국 모방에 불과한 것 아닌가. 사라진 것,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 그래서 '미메시스'라는 시로 시집의 앞뒤를 장식했고, 결국 귀신 이야기와 같이 시 역시 실재 세계의 뒷편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방이 실재와 같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귀신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이미 언어로 표현이 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잃어버렸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역시 실재의 삶에 무언가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말해지지 않던가. 그러니 시 역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우리 눈 앞에 불러내려 한다. 언어로... 그 언어가 모방의 세계든 아니든 상관없다.
시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 자체가 실재가 되고, 그것이 우리 삶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귀신 역시 마찬가지다. 실재든 아니든 귀신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 시집에는 잃어버린 것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시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을 귀신으로, 다시 언어로 불러내는 미메시스로 만나게 된다. 과거는 현재가 불러내는 귀신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는데...
귀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막 살 수가 없다. 과거를 불러내어 환기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삶을 돌아본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게 이 시집을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보여주는 시들이라는 관점에서 읽었다. 그러면서 내 과거, 내가 잃어버린 또 잊어버린 것들이 무엇일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시집이 마음에 드는 것은 시집 뒤에 실린 글들이다. '시인 노트, 시인 에세이, 발문, 김언에 대하여'가 실려 있는데, 시인에 대해서 좀더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시인의 말을 하나 인용하면서 끝낸다.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은 산문시도 많고 또 산문시가 아닌 시들도 대체로 길어서 인용하기는 좀 힘드니... 시집을 찾아 읽으면 좋을 것이고...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그것들이 들어와 웅성거리는 것을 듣는다. ... 한 발짝 그들 속으로 발을 옮긴다. 거기에서 펼쳐지는 것들은, 실상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게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의식이 지워버린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곧 쓰기이기 때문이다.' ('시인 노트에서'.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