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내란 그리고 민주주의 - 전쟁과 폭력, 극우와 혐오의 시대를 넘어
강성현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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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계엄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 중에서 오동석이 쓴 '계엄제도가 국가범죄 수단으로 전락한 까닭'이라는 글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12.3 내란을 비롯하여 한국 헌정사에서 계엄제도는 헌법을 보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헌법을 파괴하는 수단임이 드러났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헌법이 아니라 계엄선포권을 포함해 대통령을 촘촘히 통제할 수 있는 법률이 부재하거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고침은 물론 의회민주주의에 터 잡은 인권적이고 민주적인 입법 역량의 강화가 필요하다.' (205쪽)


왜 그런가?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계엄을 발효한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여순 사건' 때 제5여단장이었던 김백일 대령이라고 한다. 군 지휘관이 그것도 참모총장도 아닌 일선 부대의 지휘관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법도 없던 시절이라고 한다. 


세상에 법에 없는 명령을 내렸던 일. 그 뒤 계엄법이 만들어지고 몇 차례 계엄이 선포되었는데, 그것은 모두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계엄이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을 때, 민주주의가 성숙해가고 있다고 믿고 있어 계엄이란 생각도 하지 못하던 때에 다시 선포된 계엄. 민주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계엄이 2024년에 선포되었으니... 


이미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광장으로 사람들이 나왔던 것이다. 포고문을 보자.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336쪽에서 재인용)


헌법에 무어라 되어 있는지 계엄을 선포하고 집행한 이들이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포고문 1호다. 헌법에 따르면 계엄을 선포하면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고,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그때부터 계엄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국회활동을 금한다고? 말이 되나? 이는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면서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것. 모순 아닌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던 것 아닌가.


여기에 시위,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을 금지한다면, 모든 언론과 출판이 계엄사의 통제를 받게 한다면 이는 계엄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막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이 어찌 민주주의이겠는가?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겠다는 몸부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계엄의 역사, 과정,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등을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정리해서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 계엄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역사 속 계엄들이 어떻게 정권 유지에 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1부와 계엄의 제도적 본질과 반복 메커니즘, 그리고 이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응답을 고찰(16쪽)한 2부, 12.3계엄 이후 민주주의를 되묻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실천의 기록을 담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계엄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고찰하게 해주고 있는데... 미래 세대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이루어진 대화, 수업에 대한 내용도 있어서 지금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할 수도 있다.


'스스로 보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밝힌 학생은 진보적인 관점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반면 자신과 같은 입장은 교실에서 조롱받거나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자주 보는 유튜브나 커뮤니티의 극단적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교실이나 친구 관계에서 자신의 신념을 편하게 말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390쪽)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하지 못하게 되면 뒤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더욱더 자신의 생각을 공고하게 만들어간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드러내게 해야 한다.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토론이 되어야 한다. 보수에서 더 나아가 극우가 되어도 그들이 숨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극우의 문제점을 논의할 수 있게 되고, 폭력이 아닌 토론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해가게 된다.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 학교 학생이 토로한 것과 비슷한 일을 겪는다)


이렇게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겪은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다시는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 아니겠는가.


특정 이념을 지녔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닫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용인하면서 다양한 의견들이 조율되는 과정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이 12.3 계엄 이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 사회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말, 광장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했던 약속, 지켰던 말들을 다시 상기하고 싶다.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298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서울시의회에서 청소년 인권조례를 폐지하겠다는 안을 통과시켰다는 보도를 보니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이 말을 잊어버렸나? 아니면 무시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말을 잊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이 말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계엄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계엄법을 철폐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 당연히 계엄법 철폐 뿐만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 등 다양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하는 법들을 제정해야 하고. 차별금지법에 제정되어야 하는 이 때에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한다니... 참.


무엇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고, 그 의견들이 상호 존중의 토론을 통해 정립되어 가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 표현은 좋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정책이나 조례, 법 등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계엄의 역사, 과정,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생각해 보게 해주니 읽어보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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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들, 조용히 빛나는
문선희 지음 / 가망서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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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노래 ‘등대지기‘의 가사를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라는. 고공에 올랐던 마음이 바로 그 마음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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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깊어가는 만큼 내가 성숙해질 수 있을까?


  자연이 내게 거는 말들을 나는 들을 수 있을까?


  나무가 하는 일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가을이 되면 나무들이 제 잎들 색깔을 변하게 하는 것도, 세월에 따라 자신을 맞추는 방법인데,

그렇게 세월에 자신을 맞춘 나무들을 변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 아니 나무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계절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바꾸지 않으면 그 나무는 살아갈 수 없다.


  노자가 그랬던가. 죽음은 딱딱하고, 삶은 부드럽다고. 딱딱함은 경직됨이니 이는 변화를 거부함이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일 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단지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사람은 그렇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니까. 우리 역시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은 그것을 잊고 자연을 마치 없어야 할 것처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 시인이 뭐냐고, 시가 뭐냐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선생님의 말이 있다.


"시는 뒷냇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 거란다. 그리고 살구꽃이 피어 있을 때의 마음을 받아 적는 거란다. 또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는 종달새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거란다. / 그때 뒷냇물이 살구꽃이 보리밭이 종달새가 너희들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 거야. 그걸 받아 적는 게 시라고 한단다. / 모든 사물들은 다 말을 하고 있단다. 그 말을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지." (김명수, 77편, 이 시들은. '강 6'에서. 녹색평론사. 2022년. 29-30쪽)


시인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강 6'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 그렇다. 바로 이런 시인들. 꼭 시를 쓴다고, 시를 발표한다고 해서 시인이 아니다. 사물의 말을 듣고 그것을 받아 적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인이다. 


그 사람이 받아 적은 것이 시다. 그런 시인들이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다. 누가 누구 위에 있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리는 그러한 사회일 것이다.


하여 그런 시인들이 있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단지 인간들만의 평화가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평화.


아름다운 세상일 텐데... 가을,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자연이 형형색색 가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열매들과 함께. 이 시집을 읽고, 적어도 자연이 건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열고 지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참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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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열전 1 한서 열전 1
반고 지음, 신경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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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한나라 역사책. 세계사 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이름만 알고 있다가 도서관에 '한서 열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빌려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이거, 도대체 이 인물들은 나라에 충성한 거야, 황제에게 충성한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들이 백성을 위한다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충신이라 불리는 자들은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과연 이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 열전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또 황제에게 충언을 하는 내용은 나와 있는데, 그러한 충언이 백성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백성은 멀다. 황제는 가깝다. 마치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과 비슷하게, 이들은 백성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황제 곁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럼에도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건의한 사람들도 있었지. 그들을 대체로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그 점이 이 '한서 열전' 1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역사는 그러한 충신을 기리는 역할을 해서, 다른 사람들이 본받게 하고자 하겠지. 반면에 간신이라는 사람들도 열전에 기록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위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보기로서 작동하도록 한 것일 테고.


반고는 한나라 후기 사람이다. 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전한 사람이니, 그가 사기 열전에서 다루지 못한 인물들이 이 '한서 열전'에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차례를 찾아보니 2권에는 사마천도 등장한다. 그렇지. 사마천이 '한서 열전'에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


1권을 읽은 소감은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다. 좋은 행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나 나쁜 행동으로 악명을 떨친 사람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 남긴 이름이 아주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이 때 사람이 남기는 이름은 악명, 오명이 아니라 좋은 이름을 말하는데, 그럼에도 나쁜 행적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깊게 새긴 사람들이 있다. 이 '한서 열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황제의 친인척들 중에 '00왕'으로 봉해진 자들의 행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인간들이 남들 위해 군림하다니... 권력을 탐하는 자들끼리 죽이고 죽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이들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툭하면 전쟁, 전쟁이니... 전쟁에서 자기들이야 명령을 내리면 끝이지만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목숨이 걸려 있는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법에서 가장 최우선이라는 말을 명심하는 장군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 '한서 열전'에서도 흉노와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데, '이광, 이릉, 곽거병'이나 진나라 멸망 후 다시 패권을 겨누는 초한 전쟁 때 장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들 중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인 장군들도 있었으니...


이런 열전을 읽으며 전쟁의 폐해가 과연 역사에 기록된 숫자로만 인식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도 된다. 몇 천을, 몇 만을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그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냥 숫자로 남겨질 수 있을까?


숫자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하는데, 역사는 많은 전쟁에서 사람을 숫자로 대체한 경우가 많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전쟁, 그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서로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 '한서 열전'에는 이러한 죽임이 많이 나와 있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살육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에는 전쟁을 잘 수행한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한서 열전'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식에게는 이름을 남긴다.


이름과 더불어 행적도. 그러므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도 어떤 인물들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았고, 어떤 인물들의 이름이 악취를 풍기는 이름으로 남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앎에로 이끄는데 이러한 '열전'만큼 좋은 역할을 하는 책도 없다. 반고는 그러한 점을 살펴서 당시에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사실적으로 열전을 기록했다고 한다.


역사를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따라서 정리하는 것, 우리나라 실록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그러한 기록들로 인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일 권은 '진승-항적 전'으로 시작한다. 진시황이 죽고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큰 세력을 형성한 항우. 유방이 항우를 항우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항적'이라 했다고 하니, 한때 황제를 칭했던 항우조차도 죽은 뒤에는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살아서의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진승에게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말이 나왔다고, 그렇게 진나라 말기부터 시작한 일 권은 사마 상여로 끝난다. 뒤로 갈수록 장군보다는 문인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동중서'와 '사마 상여'가 대표라고 하겠다. 한나라에 유학을 숭상하게 만든 동중서. 글로써 한 무제를 감동시킨 사마 상여.


글의 힘을 깨닫게 하는데, 이 열전에는 이러한 글의 힘을 '상소문'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글로 황제에게 전해 역사에 남게 한 것들. 하긴 말로 한 주장들이 어떻게 제대로 후대에 전해지겠는가. 잘못 전해질 수도 있는데, 상소문은 원본이 남아 있는 한 그대로 전해질 테니, 글을 쓸 때 더 정성을 들여 쓰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2권. 더 많은 인물을 만날 시간이다.


아쉬운 점 

각 권의 앞에 한나라 연표와 이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표로 정리해 보여줬으면... '한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열전이면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이 한나라 역사에서 어느 왕 때에 활동했는지를 한 눈에 들어오게 해주는 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서 열전'에는 한 인물을 이야기한 뒤 그 자손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있다. 손자에 손자 대에 이르러 대가 끊겼다는 등의 서술이 있는데... 표가 있으면 더 이해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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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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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으키는 비극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 모를 수가 없는데도, 세상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자신들은 이런 비극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건지. 악마에 씌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 속에서 겪을 뿐이다. 


이들의 명령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속으로 들어간다. 눈 앞에서 그들은 전쟁을 겪는다. 이 전쟁 속에는 참여하는 사람만 있지 않다. 전쟁과 관련 없이 살아온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빠져들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게 전쟁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하는 일. 그런 전쟁을 막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만들고 국제연합도 만들었지만, 전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세계 도처에서. 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 곳도 여럿 있고.


언제까지 인류는 자신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주의 긴 역사에서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중에서도 전쟁이 없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


참... 힘들다. 커트 보니것이 [제5도살장]을 비롯해 많은 소설을 썼지만, 그가 소설을 통해 전쟁의 참담함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세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가 절망할까?


그의 아들이 펴낸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아버지에게 글 쓰는 일은 신앙과 다름없는 행위였고, 당신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믿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했지만 당신의 글이 세상일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믿은 적은 결코 없었다.' (7쪽)


그럼에도 그는 글을 썼다. 연설도 했다. 왜냐? 가능성을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글을 통해서 그는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인간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이 희망이라고 하는데, 이 희망이 바로 가능성이다. 될 수 있다는 것...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체제 전복적 행동이다. 읽고 씀으로써 전복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다. 세상이 지금 이대로여야 한다는, 당신이 혼자라는, 당신과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 고작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 다른 곳이 된다. 그런 일을 상상해보라.'(13-14쪽)


이것이 바로 그가 글을 쓰고, 우리가 글을 읽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다. 그렇게 조금 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이 조금 더 다른 '나'가 '우리'가 되면 사회 역시 조금은 변할 테니까.


하여 커트 보니것의 이 소설집을 읽는 것은 우리가 전쟁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바꾸거나 또는 더욱 확신하게 할 수 있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다'는 소설을 보면 첫부분부터 전쟁이 지닌 비인간적인 모습이 나온다.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품성을 지니고 싶어할 테니까.


'우리의 일은 제군들을 세계 역사상 가장 치사하고 비열한 싸움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 어떤 방법이든 써서 죽여라. 죽여. 죽여. 죽여라. 알아듣겠나?'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다' 중에서. 53-54쪽)


이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그런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떻게 지낼 것인가. 그들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된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아직도 전쟁을 하겠다고, 힘의 우위를 통해 상대를 무력하게 하겠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힘의 우위를 확보하려 하면, 상대 역시 힘의 우위를 확보하려 해, 군비 경쟁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에는 지구를 파괴할 무기들이 계속 쌓여갈 텐데, 그 점을 당당하게 말하는 자들이 버젓이 있다는 사실이 참. 이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쉽게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이 소설집에 실린 '1951년의 행복한 생일'이란 소설에서 만나게 된다. 슬프다. 좋은 날, 아이를 위해 나들이를 간 노인. 노인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이가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가장 멋진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이 만들어준 수레를 아이는 '탱크'라고 한다. 그리고 함께 가는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느끼기보다는 '녹슨 거대한 탱크'를 보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이렇게 아이는 아직 전쟁의 고통을 모른다. 노인은 그 고통을 알기에 아이에게 가장 평화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탱크를 찾아가고 있다. 


전쟁이 없는 자연의 평화로움을 아이는 아직 느끼지 못한다. 이 아이에게 그러한 느낌, 경험을 주려고 노력하는 노인. 아직 그것을 못 느끼는 아이.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노인이 무엇을 주려 하는지. 아이가 느껴야 하고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바로 읽기의 힘이지 않을까.


아이가 자연보다는 탱크를 좋아하는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가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두려움. 커트 보니것이 그런 두려움을 이 소설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포로로 잡혀 있는 미군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들. 또한 전쟁이 끝난 뒤 일어난 약탈 등을 묘사하면서 그는 전쟁이 인류에게 끼친 참화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보다는 풍자적인 요소가 적지만 오히려 '전쟁 속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소설들이다. 반전(反戰) 소설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쟁이 인간에게 끼치는 나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다시 서문의 말을 생각한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체제 전복적 행동이다.' 


그러니 많이 읽자. 보니것의 소설은 이 점에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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