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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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가 아닌 지구인들이 개척한 행성. 그러나 아직 외계 생명과 접촉하지 못한 인류가 등장한다. 


컴퍼니는 콜로니라고 개척한 행성에서 살기 힘들어지자 다시 이주를 결정한다. 이때 그곳에서 40여 년을 살아온 오필리아는 이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이도 들었고 또 자신이 직접 땅을 만지고 재배할 수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몰래 홀로 남는다.


홀로 남은 오필리아는 자유를 만끽한다. 남들의 시선에, 자식들을 부양하는 일에,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되어 있던 오필리아는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 세계에 다른 생물이 들어오게 되는데... 괴동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학자들은 객관적인 용어랍시고 '자생종'이라고 하기도 하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이동해서 오필리아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오는데... 이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공존이냐 죽음이냐? 그들은 오필리아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필리아 역시 두려움이 있지만 그들에게 생활공간을 내어주고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알려준다. 자연스레 그들은 공존하게 되는데...


이 공존이 인간들과 지낼 때 오필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게 만들던 것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의 자유를 존중해준다. 이렇게 오필리아가 잘 지내고 있을 때 떠난 콜로니에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안 인류가 탐사대를 파견하고...


탐사대와 만난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지내는 종족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필리아는 인간과 그들을 잇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데...


주변부 인물이 중심 인물이 되는 과정.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는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오필리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주부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오필리아는 어떤 특정한 관념에 싸여 있지 않다. 외계 생물을 괴동물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자신이 처음 본 생물이었기 때문이고, 이 용어를 비하나 적대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공존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오필리아. 또한 그들과 최선을 다해 소통을 하려고 한다.


소통이 바로 공존의 기본 아니겠는가. 말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마음으로 어느 정도 통한다. 서로가 적이 아님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하여 다름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노력을 한다. 이는 서로 교류를 하되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 다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이 그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수 있다는 것. 존중이다. 이 존중이 꼭 상대를 따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지키되 상대의 것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 공존의 기술이고 소통의 원칙 아니겠는가. 그들 종족에게서 아이가 태어나고, 오필리아는 그들에 의해 아이를 돌보는 존재, 즉 둥지수호자로 인정받는다. 둥지수호자. 그렇다. 이는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행성에 남겨진 오필리아가 다른 생명체와 만나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둥지수호자가 되어 인간과 그들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 겪게 되는 오필리아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 사회에서 나이 들었다고, 여성이라고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던 오필리아. 이는 우리 사회의 척도 아니겠는가. 지혜와 지식을 혼동하여 학위가 있으면 전문가고, 실생활에서 얻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현상.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전문가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책에서 본 내용을 읊조리기나 할 뿐, 실제 해결은 생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나서서 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회에서 어리석고 쓸모없다고 제외시켰던 사람들이.


이는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동양 고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콜로니를 건설하는 사람에게 나이든 사람은 또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은 비용만 드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 겪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쓸모없다고 여겼던 존재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남들을 쉽게 배척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은 경험이 있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받아들이려는 마음, 소통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들을 내치려하지 않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그들의 다른 면을 보게 되고, 서로가 잘 지낼 수 있는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의 갈등 상황이 달라지는데, 홀로 남아 괴동물을 만나 함께하는 장면과 여기에 다시 본사(지구)에서 파견한 탐사대가 와서 겪게 되는 일로, 앞부분이 오필리아의 공존기라면 뒷부분은 오필리아가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명심하고 싶은 구절이다.


'좋은 둥지수호자는, 파란 망토는 말했다. 새끼들이 모든 것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기를, -열광하기를- 바란다. 나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계속 같은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그들이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368쪽)


우리 역시 둥지수호자가 된다. 어떤 둥지수호자가 될 것인가. 오필리아는 전자를 선택했다. 자, 지금 우리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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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허수아비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9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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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이야기. 오즈라는 환상의 나라에서만 일이 펼쳐진다면 소재가 끝이 보일 텐데... 오즈는 그만큼 갈등이 거의 없는 나라. 평화와 공존, 행복의 나라. 


이야기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 사건이 있어야 이야기로서 흥미를 끌지 않겠는가. 모두 천사인 나라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오즈 역시 마찬가지다. 천사들과 같은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오즈의 바깥에서다. 오즈라고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교류가 없는 곳이다. 이곳으로 낯선 존재들이 와야 한다.


낯섬.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발단이다. 낯섬은 우리에게 그동안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낯섬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만나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트라트와 빌 선장이다. 이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오즈로 가게 된다. 오즈로 가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다음 번엔 어떤 방법으로 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모험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도와주는 존재도 있지만 위협을 가하는 존재도 있고, 여기서 또 친구들을 만나고, 이번에는 오크라는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가 아니다. 하늘을 나는 꼬리에 프로펠러가 달린 새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랑의 위기에 빠진, 폰과 글로리아 공주를 구하고, 허수아비를 만나 - 그렇다. 이제 도로시가 다시 오즈를 모험하는 일이 없으니, 외부 세계에서 온 존재는 그동안 오즈의 마법사에 나왔던 인물들 중 하나와 만나야 한다. 틱톡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허수아비다 - 나쁜 왕과 사악한 마녀를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이들은 오즈마 공주와 도로시 일행을 만난다.


모험은 낯섬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나오는 '빛나는 단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편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는 트라트와 빌 선장이다 - 그가 하는 역할은 길 잃기다. 


길 잃기.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들을 쫓다가 길을 잃는다. 수시로,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길을 잃는 것은 잠시고, 그는 다시 돌아갈 것을 믿는다. 그러니 길을 잃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행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빛나는 단추'를 보면, 낯섬이 새로움이라는 것. 그것은 자신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낯섬을 마주하는 마음가짐. '빛나는 단추'에게서 그 점을 배울 수 있다면, 낯섬은 곧 모험이 되니, 이것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권장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서 아이들은 모험을 생각하게 되고, 낯선 것들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자세를 익힐 수 있게 된다.


간접 경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음 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생각하면 좋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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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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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지 않다. 그에 대한 책도 읽고 싶지 않다. 그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 생각하는 것 자체도 짜증이 난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서 모르고 지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정치도 퇴행시켰기 때문이다.


알아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왜 전두환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한 일을 성찰하지 못했을까? 그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였다면 그에 대한 반감이 지금보다는 조금 줄었을 것이다. 그를 좋아할 순 없겠고, 용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용서를 구하지 않고 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도 그가 지은 죗값을 치르게 단죄를 했으면 어땠을까? 재판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해 놓고 사면해 버려, 자연인으로 살다가 죽게 만들었으니...


이 전례를 생각하는 또 한 사람이 있을 테니... 사면,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적어도 사면을 할 수 없는 범죄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는 있어야 한다. 어떤 범죄를 사면하면 되지 않을까? 바로 전두환 같은 내란죄를 저지른 사람들과 같은 경우는 사면하면 안 되지 않을까.


전두환은 감옥에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되었다. 마찬가지로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들 역시 그리 오래 감옥 생활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전두환의 사례가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경우일 것이다.


지금 또 한 사람이 있다.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국민들 모두가 그의 죄를 보았으니, 전두환에 준하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물론 전두환과는 달리 인명을 살상하지도, 고문을 하지도 않았다지만, 육체적인 고문은 없었다 해도 정신적인 고문, 그리고 국민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 행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던 비상계엄 선포 등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하는 행위가 이상하게 전두환을 연상시킨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당신들이 나를 음해하는 거야. 난 억울해. 이것이 전두환이 죽을 때까지 한 말 아니던가. 그는 의식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의 내면, 무의식 속에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거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고 왜곡하는 것은 그의 자아가 어린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한 일도 부정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그가 제대로 성숙할 과정을 거치지 못했음을, 자신의 자아 속에 갇혀 남을 볼 수 없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그를 우리는 용서해야 할까? 그가 성숙하지 못했다고 넘어가야 할까?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자아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인정하게 해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했기에 그는 마지막까지도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죽을 때까지도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그에게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했기에 우리는 비슷한 인물을 또 만나게 되었다. 그때 한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또다시 전두환을 사면했던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전두환이 죽을 때까지 변명으로, 자신은 정당하고 억울하다고 강변했듯이, 누군가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인간들을 또 만날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전두환 한 명이면 된다. 그를 자연인으로 살다 죽게 한 후과를 우리는 너무도 크게 겪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왜 그가 사과를 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지, 그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내면을 추측하고 있다.


성장하지 못한 자아, 자기중심적이고 극도의 행동주의적 성격 등등. 그래서 저자는 '전두환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특별한 가벼움이라고'(101쪽)한다. 이 특별한 가벼움을 조금 더 설명하면 '1)일을 저지르고, 2)후과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166-167쪽)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런 사람은 이제 전두환 하나면 된다. 더이상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묻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공동체 구성원이 다 같이 지켜가겠다고 합의해 일정한 '선'을 만들고 그 선을 지켜나가는 것은 '근대화'에 포함된 여러 요소 중 가장 정신적이고 고급스러운 요소'(356쪽)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 비상계엄과 같은 일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는 사회적 '선'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인물이 저지른 행동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 그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니, 전두환을 통해서 적어도 이 선 하나는 합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전두환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을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자. 이것이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뉘우치지 않고 간 거악(巨惡)의 존재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각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갈 토대로 삼을 수 있게끔 방향을 설정하는 법,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현실에 적합한 선에서 이상을 지혜롭게 실현하는 법,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설정해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법과 같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유해야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313-314쪽)


자,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갈림길에 서 있다. 또 하나의 거악을 그대로 두는 두 번째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선'을 넘어서는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전두환에게 했던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다시는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역사를 반복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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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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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속도가 있을까? 속도는 이동이다.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도 속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속도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어둠이 움직임일까? 어둠은 정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다가 어둠도 움직임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둠이 그냥 오지 않으니까. 어둠은 빛과 상반되어 나타나니까. 그런데 빛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둠을 인식해야 하니, 소설의 인물이 말한 것처럼 어둠의 속도가 빛보다 빠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어둠을 비유로 쓰면? 안 좋은 것을 어둠이라고 한다면 안 좋은 것은 좋은 것보다 빠르다? 그럴 수 있을까? 부정을 어둠이라 한다면 부정은 긍정보다 빠르다? 어둠을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밝혀진 것보다 늘 앞에 있다. 


우주는 암흑으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빛을 본다.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 와 있는 존재인 어둠이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일까? 정상을 빛이라고 하고 비정상을 어둠이라고 한다면, 비정상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정상을 생각할 수 있나?


정상 가족이라는 말은 비정상 가족을 상정하고 하는 말일 테니, 이미 존재하는 것 중에서 정상이라는 말을 한다면 다른 것들은 비정상이라는 개념에 갇히고 말 것이다.


하여 요즘엔 정상 가족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가족의 다양한 형태일 뿐이라고... 수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을 뿐인데, 그 중 어느 가정의 유형을 정상이라고 하면 나머지는 비정상이 되어 버리니까.


가정이 그렇다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상인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비정상인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보면 사람을 틀지우게 된다. 이 틀에 맞지 않으면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그런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정상의 범위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그들의 어둠을 빛으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수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곳, 우리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우주의 대부분이 암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은 그만큼 어둠 속에 있다고, 먼저 그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빛을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어둠을 안 좋은 쪽으로, 바꿔야 하는 쪽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면서 그 다양함에 감탄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인 루 애런데일을 서술자로 선정해서 소설을 이끌어 간다. 


덕분에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의 사고 방식으로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의미 없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돌아보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내 틀에 집어넣고 그 틀 속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틀을 지니고 살고 있음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지...


루 애런데일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은 각자 고유한 자기들의 삶을 살고 있음을,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함을 생각한다. 그들을 치료할 기술이 나왔다고,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때도, 외부에서 당신들은 치료를 받아야 해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올리려는 회사(관리자)와 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들의 고민, 그리고 선택. 


그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변화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과거와는 다른 자신이 될지라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고, 알지 못했던 어둠을 향해 자신이 스스로 나아갔다. 


이런 루 애런데일을 따라가면서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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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삶이 보이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한 불안감은 생활을 안정되게 하지 못하는데...


예측 불가능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게 하는 것. 이렇게 하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는 믿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창의적인 활동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면 마음껏 도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이 보이는 삶 아닐까.


삶이보이는창을 읽으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 역시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만, 낙관이다. 좋아질 거라는 믿음. 적어도 삶이 보인다는 믿음을 보이는 사람들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읽게 된다. 앞이 안 보인다고, 삶이 막막하다고 할 때도 창이 있다고, 문이 있으니 열고 나오라고, 우리는 살 수 있다고, 생존을 넘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고 있으니. 또한 그런 삶을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 사회 각지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할까. 고민에 빠져 있을 때도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이 돈이 많이 드는 일도 또 우월한 누군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바로 삶이 보이는 사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번 호에서 '물구나무종과 권영국'이라는 글을 읽어보라. 거꾸로 된 세상을 보는 법. 거꾸로 서서 보는 것. 


꼭 거꾸로 설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는 있다. 주어진 것을 주어진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볼 수도 있음을, 그럴 때 세상이 더 바르게 보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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