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부엌
김지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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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부엌'


제목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부엌하면 요리를 떠올리고, 음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음식은 한 종류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의 음식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음식은 우리 몸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그럼 책들의 부엌은? 요리되는 존재가 음식이 아니라 책이다. 다양한 책들을 요리하듯이 접하고,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책도 음식이다.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듯이, 책은 마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발터 뫼르스가 쓴 소설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는 부흐링 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책을 음식으로 먹는다. 책읽기가 음식먹기다. 마음을 살리는 음식이 아니라 몸을 살리는 음식이 책이다. 


이 책은 그 소설과 다르다. 물리적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책을 통해서, 마음을 치유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언가 응어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응어리를 풀어내는 역할을 책이 한다. 


여러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 그들은 어느 순간 북스 키친에 와서 지내는 동안 나름대로 치유를 하게 된다.


자연과 더불어, 책과 더불어 지내는 시간, 책을 통해서 풀어내는 시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풀어낸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도, 요리를 먹는 사람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요리가 한다. 


북스 키친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북스 키친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리 책이 있어도 치유는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책이 있고, 그 책을 통해서 그들은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게 된다.


결국 책에 관한 책이지만 더 나아가 사람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환대란 무엇인지, 그리고 환대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따스하게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듯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무 때나 훌쩍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이렇게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이 간과하고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관계가 비틀린 시대에 이런 따스한 소설은 위안을 준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조금은 쉴 수 있도록 하는 소설.


부엌에서 음식을 먹으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듯이 이 소설을 읽으며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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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 인민군 소년병
문영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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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이 지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도. 그렇지만 그동안 해결이 안 된 일들이 너무 많다. 특히 이산가족 문제는 더 심하다. 가족들끼리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상황.


남북이 모두 유엔이 가입이 되어 있음에도 사람들 간의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때 이산가족 상봉을 상례화하자는 말도 있었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진 상황. 더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 그리움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특히 전쟁터에 끌려나온 소년병들 이야기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소년병들 중에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지만, 남한을 선택해 남은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들은 이산의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갔을테니... 이산의 아픔뿐만이 아니라, 북한 출신이라는 차별도 받았을텐데...


이 소설은 어떤 소년병의 수기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사실에 기반해서 쓴 소설이다. 그 소년병은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다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온다.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도 못하고, 이는 제대로 된 군인도 아니라는 말이다, 탈주해서 집으로 가려 한다.


그러다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힌다. 당연히 집으로 보내줄 줄 알았는데, 차일피일 시일을 미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게 되고 그곳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남에 남을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으로 갈 것인가.


결국 남에 남기로 결심한 소년병. 그가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이 수기에 담겨 있고, 소설은 액자 형식으로 그 사실을 전개하고 있다.


전쟁의 참상...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전쟁. 과연 지구에서 전쟁이 사라진 때가 얼마나 될까? 문명이 발달했다는 21세기인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 전에도 많은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했는데...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는 있지만, 휴전 상태니, 잠재적인 전쟁 상태라고 해야 한다. 소년병이 겪었던 일들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사람들을 피폐하게 하는지 알 수 있는데...


여전히 남북한에는 군사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전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한번 겪었으니,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 책에 나온 주인공처럼 소년병이 되어 남한에 남은 사람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도 해주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남북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평화가 정착되어서 서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교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전쟁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임을, 가족 중에도 이런 전쟁을 겪은 사람이 있음을, 액자 형식의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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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읽다가 불현듯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가난은 가난을 치장한, 보여주기식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방송에 나오는 가난은 이상하게도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난의 냄새를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인해서 극명하게 갈린 빈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냄새.


  이들은 아무리 행복하게 지내도 가난의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몸에 배인 그 냄새는 향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도 사실 가난의 냄새는 절실하지 않다.


반지하에 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행복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서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집이 침수되고 물건들이 못 쓰게 되었을 뿐, 그들은 가난에도 행복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가족들이 풍기는 그런 행복의 냄새. 과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럴까? 그런 집도 있다. 물질이, 돈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가난의 냄새는 행복의 냄새로 덮어지지 않는다. 행복의 냄새를 가난의 냄새가 압도한다. 그리고 처절하다. 처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더 처절하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을 체험한다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빼앗아간다고 나와 있지만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틀린맞춤법으로 읽는 도둑맞은 가난, 알라딘 비매품, 75쪽.)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한 글이 바로 박현주 글 '가난이 드러날 때 감춰지는 것들'이다. 이 글 마지막 부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렇게 진짜 가난은 뒤로 더 물러나고 숨겨진다. 나는 드라마가 그려내는 건 대체 어떤 가난인가 생각하게 된다.(16쪽)'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집이 가난하지 않다. 물론 가난을 상대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오는 반지하 생활과 실제 반지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경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았을 을지로의 풍경들.32-37쪽)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번 호에 실린 지수의 글 '반지하 SOS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에서 말하고 있는 '개발주의를 내세우며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리는 지금, 불평등이 곧 재난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은 인권이다. 주거권은 생명이다. (57쪽)'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가난은 포장될 수 없다. 방송에 나오는 가난이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처절한 가난, 이는 화면으로 보여주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가난을 덮는 그런 가난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삶, 거기서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똥파리'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영화에서 가난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그런 가난의 냄새, 불행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런 영화, 드라마를 방송에서 보고 싶단 생각.


이번 호를 읽으면서 그래서 반지하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들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집, 홈리스, 빅이슈. 그리고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 나라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제는 사라져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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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인생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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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반전. 또는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내용 전개. 짧은 소설임에도 다양한 생각들을 이끌어 낸다. 기존 김동식 소설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다만, 삶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어떤 삶이 좋을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사회면 좋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토론거리로 적당한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이 된 '성공한 인생'만 봐도 그렇다. 과연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런 삶이 성공한 삶일까? 성공만을 위해 내달린 인생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공이란 목표를 하나 정해두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든 상관이 없단 말인가. 아니 목표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욕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어 명문대 진학하는 일. 고시나 또는 잘나가는 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잘 버는 일. 예쁘고(잘생기고) 착한 사람과 결혼하는 일.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혹시 자신을 잃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귀신에게 일주일에 하루 하루를 내어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주인공. 결국 그에게는 주말만 남는다. 주말,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주말만 의식할 수 있는 그의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표만을 향해 달렸지만,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하루 하루를 잃어가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거상의 거래법'이라는 소설도 이득 앞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결국 이윤만을 추구하다간 자신을 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사회로 확장하면 '악한 사업'으로 연결이 된다. 이윤을 위해서 지구를 파괴하는 사업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업들을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규제가 안 되는데, 소설 속에서는 상상을 빌려 규제를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동식 소설의 묘미다. '장난감 총'에서 보여주는 반전도 그렇다. 아이들을 위한다면서 아이들을 획일적으로 교육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을 장난감 총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반전에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2인 1조'란 소설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이야기했던 과거에는 사람들이 둘씩 묶여 있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여기에 더해서 페미니즘을 떠올리기도 했고.  이 소설은 미래에 외계인의 힘으로 사람들이 둘씩 묶인 상황을 만든다.


남-남, 여-여, 남-여. 가리지 않고 묶인다. 이들은 함께 살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회 시스템도 2인 1조를 기준으로 재편되었다. 이동수단, 생활용품, 편의용품…모든 것들이 2인용이 기본이 되었다.

  서로를 3미터 밖으로 튕겨냈기 때문에, 모든 건물과 거리, 도로들이 매우 넓어졌다. 도심 지역의 멀미 나는 밀집도 사라졌고, 의외로 인간들은 여유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모든 교육은 서로를 배려하는 법과 존중하는 법을 최우선으로 교육했다. 모든 방송에서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한 솔루션을 자주 내보냈다. 모든 사회 분위기가 배려, 존중, 사랑, 우정 같은 가치들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았다.' (127쪽)


그렇다. 서로 배려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외계인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다시 외계인이 사람들을 떼어놓은 상태에서도 이런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작가가 바라는 세상이기도 하겠다.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다른 소설들도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그것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서 우리를 바람직한 세계로 이끈다.


소설이 지닌 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전이 그런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함께 살악가야 하는 인간들. 어떻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남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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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이매진의 시선 6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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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답답한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됐다고 떠들어댄 게 얼마 전인데...이런 일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아주 특이한 일이라고. 우리나라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홍보한 적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진국이라는 말을 어떤 지표로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선진국이란 국민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더위로 죽지 않는, 즉 생계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나라 아닌가. 병에 걸렸다고 방치되지 않는 나라, 장애가 있다고 배제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우리나라가 선진국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봄을 가족에게 맡기는 나라, 그것도 먹고 살기 힘든 젊은이가 부모 봉양을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그나마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제대로 지원도 받기 힘든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선진국인가?


지금 거리를 지나다 보면 무슨무슨 요양병원 간판이 많이 보인다. 병원만큼 요양이라는 이름을 단 병원이 많이 생겼다. 요양병원, 가정에서 돌보기 힘든 분들을 모신 곳. 그런데 가정에서 돌볼 수 이들이 얼마나 될까.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이런 말이 나오는 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돌봄을 실현할 수 있는 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돌봄에 가정을 제일 먼저 앞세우고 있다. 돌봄은 가족들이 먼저 하는 일. 사회는, 나라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아버지 나이가 50이 되기 전에 치매에 걸렸다. 경제 능력이 없다. 일을 할 수는 없는데, 병원에서 치매 검사를 하면 초기라고,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고, 치매라고 할 수 없다고, 그냥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은 노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치매환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치매 진단이 이토록 형식적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이 느끼는 치매와 의사가 진단하는 치매 수준이 이토록 다를 수가 있나?


거기에 노동능력이 있고 없고를 판별하는 공무원들, 또 기초생활수급자냐 아니냐를 판명하는 공무원들과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괴리. 이 책에서 너무도 잘 느낄 수가 있다.


겨우 20대. 아직 자기 자리로 잡지 못한 나이. 그런데 졸지에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나도 아직 직장을 못 잡았는데, 생활이 안 되었는데 아빠는 생활할 수가 없고, 내가 봉양해야 한다. 아니 나밖에 봉양할 사람이 없다. 졸지에 부양가족,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의사 진단으로는 아니란다. 충분히 생활핧 수 있단다.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어가는데, 돈은 없는데... 기껏 전세보증금을 빼내어야 겨우 낼 수 있는 병원비. 나아지지 않는 아빠 상태. 그렇다고 돈이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직업을 갖지 못한 나.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큰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도 문제다. 그런 절망에서 이 책은 쓰였다. 그리고 그 절망이, 절망 속에서 피어낸 희망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 결국 나는 아빠의 보호자로 살아야 한다. 아직 사회에서 자리잡지도 못했는데... 이것이 과연 개인의 책임일까? 가족의 책임일까? 사회가 나라가 해줄 일은 없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자가 되기보다는 시민이 되겠다고. 효자, 이는 개인에게, 가족에게 돌봄을 맡기는 말이다. 사회는 뒤로 한 발 빠져 있고, 돌봄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 개인에 묻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저자가 효자임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다.


이제 돌봄은 개인, 가정을 떠나 사회가 나라가 떠맡아야 한다. 그게 선진국이다. 읽으면서 저자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과연 저자가 희망적으로 말한 것이 이루어졌을까 하는데는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사회ㅡ나라가 돌보지 못했던 사람들, 가족이나 개인이 돌보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소중하다. 정말로 돌봄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바로 사회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돌봄에 개인, 가족을 들먹여서는 안 된다. 그건 사회, 나라의 책임이다. 그 점을 너무도 잘 드러낸 이 책.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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