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읽다가 불현듯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가난은 가난을 치장한, 보여주기식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방송에 나오는 가난은 이상하게도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난의 냄새를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인해서 극명하게 갈린 빈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냄새.


  이들은 아무리 행복하게 지내도 가난의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몸에 배인 그 냄새는 향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도 사실 가난의 냄새는 절실하지 않다.


반지하에 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행복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서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집이 침수되고 물건들이 못 쓰게 되었을 뿐, 그들은 가난에도 행복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가족들이 풍기는 그런 행복의 냄새. 과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럴까? 그런 집도 있다. 물질이, 돈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가난의 냄새는 행복의 냄새로 덮어지지 않는다. 행복의 냄새를 가난의 냄새가 압도한다. 그리고 처절하다. 처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더 처절하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을 체험한다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빼앗아간다고 나와 있지만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틀린맞춤법으로 읽는 도둑맞은 가난, 알라딘 비매품, 75쪽.)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한 글이 바로 박현주 글 '가난이 드러날 때 감춰지는 것들'이다. 이 글 마지막 부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렇게 진짜 가난은 뒤로 더 물러나고 숨겨진다. 나는 드라마가 그려내는 건 대체 어떤 가난인가 생각하게 된다.(16쪽)'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집이 가난하지 않다. 물론 가난을 상대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오는 반지하 생활과 실제 반지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경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았을 을지로의 풍경들.32-37쪽)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번 호에 실린 지수의 글 '반지하 SOS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에서 말하고 있는 '개발주의를 내세우며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리는 지금, 불평등이 곧 재난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은 인권이다. 주거권은 생명이다. (57쪽)'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가난은 포장될 수 없다. 방송에 나오는 가난이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처절한 가난, 이는 화면으로 보여주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가난을 덮는 그런 가난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삶, 거기서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똥파리'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영화에서 가난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그런 가난의 냄새, 불행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런 영화, 드라마를 방송에서 보고 싶단 생각.


이번 호를 읽으면서 그래서 반지하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들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집, 홈리스, 빅이슈. 그리고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 나라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제는 사라져야 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