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기 힘든 시절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무언가에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지? 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더 많은 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 권력에 걸맞는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


  '농단'이라는 말. 국정농단이라는 말이 있었고, 탄핵이 있었는데, 농단이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던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농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나 한다. 그들에게는 이익, 권리는 명백한데, 책임과 의무는 없다. 책임과 의무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지는 것.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의무나 책임에서 멀어지는 것. 아니 관계 없어지는 것. 그러니 나 몰라라, 나는 책임이 없다. 다, 밑에서 움직인 사람들 잘못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이런 시대에 시는, 감정이입을 필요로 하는 시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 닫혀버린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요즘에 시가 멀어지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는 닫혀버린 사람의 마음을 열려고 한다. 시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치면서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김수영 전집2.-민음사) 


닫힌 시대, 답답한 시대에 시는 권력자들에 맞서 침을 뱉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닫힘을 열림으로 만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시는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횃불 역할을 한다.


진은영 시집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이다. 사랑! 삶을, 세상을 지탱하는 요소. 그런데 사랑에는 밝음만이 있지 않다. 사랑에는 짙은 슬픔이 있다. 사랑하기에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 때문에 버려야 할 것들은 우리가 지니고자 욕심부리는 것들이다. 그런 욕심들을 버리는 일이 힘들지만, 버려야만 사랑을 이룰 수 있다. 짙은 슬픔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런 사랑을 진은영의 시 '청혼'에서 본다.


'청혼'하면 밝고 긍정적인 미래가 펼쳐지리라 예상하는데, 이 시는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슬픔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즉, 청혼은 함께 하자는 말이고, 무엇을 함께 하냐면 기쁨만이 아니라 상대가 지니고 있는 슬픔까지도 함께 하자는 말이다. 온전히 당신의 슬픔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표명, 그것이 바로 '청혼'이다.


이 '청혼'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로만 보지 말고 다른 모든 일로 보면, 시인이 말하는 청혼은 바로 시에,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하는 '청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 이 시를 그렇게 읽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년 초판 8쇄. 9쪽.


그냥 읽는다. 더 말이 필요없다. 읽으면 시에서 느껴지는 운율이 마음을 두드린다. 반복되는 어구, 비슷한 말들의 반복. 별과 벌. 그리고 '-처럼, -게'의 반복. 마음을 은은하게 두드린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입 속에서 나온 말들이 마음을 울린다. 이것만으로도 시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적어도 마음을 두드리니까.


시를 읽기 힘든 시대, 그럼에도 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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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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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말이 없는 시대의 소설


고전소설은 권선징악이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래서 잘 먹고 잘살았다더라로 끝난다. 그러니 너희도 잘살아야 한다. 교훈을 주려고 한다. 도덕을 이야기를 통해서 주입시키는 경우가 많다.


악은 반드시 처벌된다. 선은 복을 받는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젠간 복이 찾아올테니. 


고전소설들은 이런 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소설에 들어와서는 이런 틀이 많이 깨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행복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권선징악 정도는 지키려고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아니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대에도 법은 힘센 자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는 사람에겐 거대한 힘으로 다가온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소설이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소설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냥 사건 기사를 쓰면 되지. 아니면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리얼리즘 소설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치들이 없을 때 소설은 소설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권선징악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한다면 누구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도 팍팍한데, 소설까지 그렇게 팍팍하다면 누가 읽겠는가? 그러니 소설은 여러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 소설집, [저주토끼]는 바로 이렇게 팍팍한 현실을 소설 장치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복수가 성공해도 시원하지가 않다. 다른 불행이 따른다. 친구를 위해서 저주를 걸어둔 저주토끼를 만든 할아버지. 저주토끼는 성공하지만, 할아버지 역시 저주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주는 받는 사람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거는 사람도 걸린다.


물고 물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기계와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소설에'안녕, 내 사랑'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이 만든 첫로봇과의 기억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로봇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을 계속해서 저장하는 새로운 로봇들.


쓸모없어진 로봇을 폐기하려고 할 때, 로봇들이 인간을 해치고 사라지는 모습. 결국 일방은 없다. '머리'라는 소설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자신의 배설물이 만든 존재가 결국 자신을 배설물의 자리로 돌려보낸다는 설정.


여기서 환경오염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게모르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을 수도 있고, 그 업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된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을 때 그 잘못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모습을 '덫'에서 만날 수 있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설정으로 소설을 이끌어가지만, 그런 소설적 장치들을 통해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가 괴물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런 복수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229쪽. '흉터'에서)는 서술처럼 그런 괴물을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흉터'란 소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이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라는 소설.


읽으면서 기괴하다는 생각. 이렇게 행복한 결말하고 먼 소설이 있을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소설. 읽고나서 자꾸만 전혀 현실성이 없는 소설들임에도 (변기에서 머리가 나온다든지, 귀신이나 유령이 나타나고 보인다든지, 여우의 몸에서 금이 나온다든지 등등) 현실을 생각하게 하고 있는 소설집이다.


이런 느낌, 작가의 말에서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말이 아마도 이 소설집을 읽고 난 느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와 독자는 엄연히 다르게 소설을 읽을 수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326쪽.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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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 단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게 하라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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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다. 국사 시간에 배운,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이 혼란해질 때, 그 삼정의 문란 가운데 환곡이 잘못 운영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환곡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하려는 취지에서 어긋나 백성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쓰였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이러한 환곡을 조선의 복지제도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제도라고 하고 있다.


즉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백성들의 삶을 생각함은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정책이 바로 환곡이라는 점이다.


먹을거리가 없을 때 빌려가서 추수가 끝난 다음에 갚는, 그것도 아주 싼 이자를 지불하고 갚은, 지금 말로 하면 저이자 대출을 받아 생활할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생각해도 좋은 제도다. 그런데 쌀을 어떻게 빌려주지? 빌려줄 쌀이 있어야지. 그러한 쌀을 확보하는 방법은 환곡과 세금의 연결이다.


환곡이 세금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환곡과 세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즉, 국가의 곳간이 차 있어야 베풀 수도 있는데, 그러한 곳간을 채우는 수단이 환곡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곡은 늘 일정한 수준이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풍년이 들어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도 환곡은 창고에서 썩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태라면 환곡은 흉년이든, 풍년이든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보태서 받아야 한다.


그런 제도, 즉 늘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야 하는 제도라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모두가 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조선초기에는 그럭저럭 싼 이자로 운영이 되던 환곡이 조선 중기부터 이자가 많아지더니, 후기에 가면 아예 환곡으로 인해서 사회가 휘청거릴 정도가 됨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바로 세금과 환곡을 연결시킨 데서 나온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환곡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리, 부패 등이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증세를 했느냐 하면 하지 않았으니, 세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지출은 늘었으니, 그 사이에 온갖 비리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한다.


왕-지방관-백성의 처지에서 환곡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지방관들 역시 환곡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환곡이 바로 지방재정이니, 그것을 유지 관리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필요할 때 빌리지도 못하고, 또 쭉정이를 받아와 알곡으로 갚아야 하는 현실이 되기도 했다고 하니.


복지제도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작용을 하기도 함을, 조선시대 환곡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다.


저자는 조선시대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복지제도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자고 한다. 과거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 지금도 논쟁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환곡은 증세 없는 선별복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던 제도라고 하면서,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 환곡 제도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복지제도를 생각하자고 한다.


자신은 보편복지가 옳다고 생각한다지만, 독자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시대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는 것, 지금 우리 시대 복지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복지제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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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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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예전 만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름. 그런데 소설에 마법소녀가 등장했다. 환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마법을 부린다. 미래를 보는,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거대하게 변하는 등등의 마법을 부리는 소녀.


그런데 왜 소녀일까? 한때 만화영화 중에 '세일러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가? 아니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나?


물론 소설에서 마법소녀들은 자신만의 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마법을 각성한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만의 마법 기물을 가지고 다닌다.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 마법소녀가 나타나, 당신이 시간의 마법소녀라고 말한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소녀.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 재앙을 해결할 수가 있단다.


기후 재앙으로 지구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질 때 그를 시간의 마법소녀가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그렇다. 위기에서는 늘 영웅이 나타난다.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벤져스'가 나타나지 않던가. 어릴 적 보았던 마징가Z나 태권V, 또는 세일러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위기를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초한 위기를 특정한 영웅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법 기물, 주인공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는 사실도 잘 믿지 않지만, 또한 기물(소설에서는 '마구'라고 나온다)로 받은 것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는 데서 실망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은 변신도 잘 못하고.


마법소녀들의 일에 관객으로 참여하기도 하니, 참... 그러다 자신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 마법소녀에게 인류는 지구의 악이다. 척결해야 할 존재다. 어차피 망해가는 인류, 그 시간을 좀더 앞당기려 한다. 그러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법소녀들과 대결하게 되고... 주인공이 어찌어찌해서 시간의 마법소녀를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마법소녀에서 은퇴한다.


참, 환상적인데... 가만히 보면 현실을 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우선 '마구'로 나오는 마법 기물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가 될 수 있다. 어떤 일에도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신용카드, 눈에 돈이 안 보이지만 쓰는 순간 어디에선가 돈이 빠져나간다. 결국 공짜는 없다. 지구에 기후 재앙이 몰아닥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한 행동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힘의 집중과 분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제로섬 게임, 총량이 같다고 가정하면 누군가가 지닌 막강한 힘은 다른 사람들은 힘이 약화되었단 얘기다. 반대로 누군가가 지녔던 막강한 힘이 소멸된다면 그 힘이 소멸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이야기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공짜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상을 바꿨다가는 그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한다.


그러니 마법소녀는 은퇴해야 한다. 마법소녀가 마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 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소설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그 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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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 지친 마음에 힘이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 자기탐구 인문학 5
태지원 지음 / 가나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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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필요한 시대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호모 데우스가 되어 가고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보면 정말로 위안이 필요하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분노와 불안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제자리 걸음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뒤로가는 상황이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게다가 사회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살기 편해진 세상이 아니라, 더 살기 힘들어진 세상이 되었다. 재화는 늘어났지만, 불평등은 심해졌고, 민주주의를 이루었다지만, 그것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토의나 토론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법에 의존하는, '법대로' 공정을 외치는 사회가 되었다.


안전?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인간 생활이 편리해졌다지만, 그만큼 과연 우리 삶이 안전해졌나? 산업현장에서는 여전히 안타까운 죽음들이 생겨나고, 축제 현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마음을 위로해줄 때가 지금이다.


이때 마음에 콕 들어오는 책을 만났다.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우선 밤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밤,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때. 많은 것들을 가려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때. 여기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적인 자기에서 정적인 자기로 돌아오는 때.


밤과 캄캄함. 캄캄하다가 불안하다가 아니라 쉬다와 연결이 되는 단어가 '밤'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때.


밤에 더해서 그림이다. 그림은 정적이다. 움직임이 없다. 이 움직임이 없는 대상을 내가 끌어와 내 맘 속에 담는다.


그림에 내 마음을 담고, 내 생각을 담는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 밤과 같은 그림에 나만의 무엇을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그림 앞에서 나는 고요해진 나를 만난다.


그러니 그림으로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 밤과 그림이다. 어떤 그림?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해지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눈에,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가민히 보고 있으면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또 그림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저자도 그랬다. 그런 과정을 글로 담아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꼭 따라갈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두고 그림을 보면 된다. 


그림에 자신을 담으면 된다. 그러면 위안을 받는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를 보자. 이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작은 제목을 '부적응의 세계를 건너는 법'이라고 붙였다.


부적응의 세계. 남들은 다들 적응을 잘하는데 난 왜?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부적응이 남들에게 뒤떨어진 것일까?


마네는 당시 화단에 부적응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그림은 그를 온갖 비난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포기했던가. 남들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던가. 아니다. 그는 그냥 당시 사회에 적응하길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그렇다고 그가 세상 전체로부터 버림받았는가? 아니다. 마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에 부적응의 대명사였던 그 그림들이 지금은 명화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저자가 한 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힘껏 노력해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시간이 부적응의 무게를 해결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노력으로도 적응할 수 없는 일이 간혹 존재하는 법이다. 부적응이 반드시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당신 내면의 규칙과 기준이 완전히 잘못되거나 틀린 것도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나와 맥락과 문법이 맞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부적응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기와 세상을 건너는 일.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281-282쪽) 


난 열심히 노력했는데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저자처럼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아니면 다른 그림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아도 좋겠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세계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그림에 자신을 담는다는 것이니까. 움직임이 없는 그림에 마음의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가 된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고민,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읽으면서 그림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 위안을 받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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