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기 힘든 시절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무언가에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지? 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더 많은 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 권력에 걸맞는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


  '농단'이라는 말. 국정농단이라는 말이 있었고, 탄핵이 있었는데, 농단이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던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농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나 한다. 그들에게는 이익, 권리는 명백한데, 책임과 의무는 없다. 책임과 의무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지는 것.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의무나 책임에서 멀어지는 것. 아니 관계 없어지는 것. 그러니 나 몰라라, 나는 책임이 없다. 다, 밑에서 움직인 사람들 잘못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이런 시대에 시는, 감정이입을 필요로 하는 시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 닫혀버린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요즘에 시가 멀어지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는 닫혀버린 사람의 마음을 열려고 한다. 시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치면서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김수영 전집2.-민음사) 


닫힌 시대, 답답한 시대에 시는 권력자들에 맞서 침을 뱉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닫힘을 열림으로 만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시는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횃불 역할을 한다.


진은영 시집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이다. 사랑! 삶을, 세상을 지탱하는 요소. 그런데 사랑에는 밝음만이 있지 않다. 사랑에는 짙은 슬픔이 있다. 사랑하기에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 때문에 버려야 할 것들은 우리가 지니고자 욕심부리는 것들이다. 그런 욕심들을 버리는 일이 힘들지만, 버려야만 사랑을 이룰 수 있다. 짙은 슬픔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런 사랑을 진은영의 시 '청혼'에서 본다.


'청혼'하면 밝고 긍정적인 미래가 펼쳐지리라 예상하는데, 이 시는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슬픔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즉, 청혼은 함께 하자는 말이고, 무엇을 함께 하냐면 기쁨만이 아니라 상대가 지니고 있는 슬픔까지도 함께 하자는 말이다. 온전히 당신의 슬픔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표명, 그것이 바로 '청혼'이다.


이 '청혼'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로만 보지 말고 다른 모든 일로 보면, 시인이 말하는 청혼은 바로 시에,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하는 '청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 이 시를 그렇게 읽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년 초판 8쇄. 9쪽.


그냥 읽는다. 더 말이 필요없다. 읽으면 시에서 느껴지는 운율이 마음을 두드린다. 반복되는 어구, 비슷한 말들의 반복. 별과 벌. 그리고 '-처럼, -게'의 반복. 마음을 은은하게 두드린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입 속에서 나온 말들이 마음을 울린다. 이것만으로도 시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적어도 마음을 두드리니까.


시를 읽기 힘든 시대, 그럼에도 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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