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한인정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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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이라는 말로 여러 책이 나왔다고 한다. 이 어딘가에는 이란 말에는 우리 삶 주변 어디에서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아직도 자신들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최근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만해도 싸우는 사람들 많다.


다만, 그 싸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권리가 인정받기는커녕 권력을 쥔 집단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파업이 합법이라고 인정받는 경우가 드문 우리나라,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몇 달째 이동권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지만, 그들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은 아직도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시위하는 역은 무정차로 지나가겠다는 소리만 흘리고 있는 현실.


지하철 한 역에서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그 이유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시위라고 몰아붙인다면, 비난의 화살이 누구에게 갈까? 무정차를 결정한 자들에게 갈까? 아니면 시위를 한 장애인들에게 갈까?


한 역이 서지 않는다면 그 역에서 내릴 사람, 또 탈 사람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게 된다. 그것도 출근시간이라면 짜증과 분노에 차게 된다. 가뜩이나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지하철을 타는 일도 고역인데, 서지도 않고 지나가 탈 수 없게 된다면...


그러나 장애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야 할까? 오히려 가장 약한 사람, 가장 불편한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대중교통 아닌가. 그런 시설, 편리함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장애인만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요구해야 할 일 아닌가.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니.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정치인들, 고위관료들이 출근길 그 고통을 알까? 장애때문에 그런 지하철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까? 그래서 이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이 생각났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겪어보지 않았기에 너희들도 겪어봐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공감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런 망상을 해본다. 대통령을 비롯한 장,차관 및 국회의원, 지자체장 및 시의원 등과 같은 정치인, 5급이상 고위 관료, 대기업의 임원급들, 또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최소 일주일에 2번 이상은 출퇴근 시간에(7시부터 8시 30분까지) 대중교통을 반드시 이용할 것. 이용했다는 증명을 할 것이라는 규정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그러면 대중교통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인권감수성이다. 그런 감수성이 있다면, 요구하기 전에 마련하려는 시도를 했겠지. 하지만 인권감수성이 먼 정치인들, 고위 관료들이 많은 사회에는 요구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이주여성들, 힘들게 살아왔는데, 자기들 힘듦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던 그들이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소리를 내야 한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려는 옥천 이주여성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았다. 그들이 겪어온 일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이 누리려는 권리 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주여성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모두 함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는 책이다.


그들은 이주여성이라는 틀에 갇히기보다는 사람이라는 개별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가족이라는, 그것도 한국 전통적인 가족 관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들도 동등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단지 희망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김새,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기본이다. 그런데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뜸 반말부터 하는 태도들, 돈만 보고 왔다고 생각하는 태도들, 당연히 우리말을 익혀야 하고, 우리말만 써야 한다는 관점들이 왜 문제인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싸우기 위해서 뭉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나온 이 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남편의 폭력에 관한 말 중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 될 말. 


'애기도 있고 먹고사는 것도 어렵고 그러니까 그냥 참다 참다 죽거나 도망치는 거죠'(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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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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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결코 편한 소설이 아니다. 읽으면서 무언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소설 내용도 그렇다. 명확하게 무어라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 저것 사이에 있는 무엇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악인인가 하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인가 하면 그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만큼 인간이 단면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여러 면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삶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런 삶, 즉 겉으로 보이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삶,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첫소설부터 그렇다. '남쪽 절'

미술전시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관에 들어가는 주인공.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비난받을만한 작가에게 출판을 의뢰하는 주인공. 그 과정에서 용산참사가 분명한 그 장소를 지나면서도 그들의 삶을 외면하려고만 하는 주인공.


출판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늘진 삶을 외면하고 자신의 밥벌이에 충실하려는 출판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길잃음이 '파견 근무'에서 더 잘 나타난다. 판사라는 자리. 지방 판사. 유지 중의 유지.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자리. 누구보다 올곧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카지노에도 하고, 피의자가 흘린 정보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에게 정의보다는 현실이, 자신의 감정이 더 앞선다. 자, 이런 세상에 정의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법조인들이 마냥 정의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판결은 또 공정할 거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판결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결국 삶은 이것과 저것으로 명확히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쪽 절'과 '파견 근무'를 연결지어 보면 바람직한 삶은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은 미술의 '스푸마토' 기법처럼 뭉개져서 경계가 흐릿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들 삶이 어떻게 무엇이다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인물들이 지닌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집의 제목이 된 '프랑스식 세탁소'를 보면 그렇게 이것이다라고 편가르기 힘든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실의 인물과 잡지 속의 인물. 잡지 속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의 삶에서 감춰져 있던 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깨닫게 된다.


남들이 보면 성공적인 삶,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좋지 않은 모습드을 소설은 드러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요리를 했던 요리사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받자 자살을 한다(이런 결말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다른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식 세탁소'에서는 두 죽음이 나온다. 소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죽음과 소설에서의 죽음. 소설 속 이야기에서는 당사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죽음을 선택한다.


하나는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이 죽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죽음은 드러내기 위한 죽음이다. 최선을 다한 삶. 그런 삶을 드러내는 죽음이 소설 속 이야기의 죽음이라면, 소설 속 죽음은 감추기 위한 죽음이다.


주인공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죽음. 죽음으로써 주인공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그런 죽음. 결국 이 죽음은 최선의 삶이 아니라 보이는 삶, 보여주는 삶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다른 죽음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그 죽음이 주인공에게서 떠나지 않는 한 주인공은 감추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살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정미경 소설은 삶은 이거다 저거다로 나눌 수 없고, 무엇이 정의고, 정의가 아닌지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다른 삶들이 있음을,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야 함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서서히 올라온다. 이게 편하게 읽히지 않는 정미경 소설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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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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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가는 작가다. 존 버거는. 그의 작품을 헌책방에서 만나면 우선 구입하고 본다.. 읽느냐 읽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고 한다. 편지라는 매체가 지닌 속성은 허구보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읽으면서 이것이 과연 소설일까?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존 버거의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단순하다.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는 남자에게 밖에 있는 여자가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편지를 통해서 바깥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밖에 있는 여자가 약국에서 일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약국에서 일하는 사람. 다친 사람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다친 사람은? 그 사람들은 바로 세계에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주거지에서 쫓겨난 사람들,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폭격으로 집도 가족도 잃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인 아이다는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다. 그렇게 연대하는 모습을 편지를 통해서 감옥에 있는 사비에르에게 보낸다.


세상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연대밖에 없다. 그들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인간띠를 만들어 헬기나 탱크의 폭력에 맞서는 힘.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사랑하는 의지밖에 없다.


아이다가 편지에 쓴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어요. 그런 삶을 강요한 자들이 오히려 우리의 불규칙성을 두려워하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담장을 세워요. 하지만 모든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긴 담장은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는 길은 있기 마련이죠. 위로든 아래로든.' (216쪽)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편지의 내용을 보면 사비에르는 약자들과 연대했을 것이다. 그러한 죄로 감옥에 갇혔을테고. 


그런 그의 모습은 편지에 있는 그가 적어놓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분명 반대하고 있다. 또한 약자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런 죄로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아이다로 인해서, 그는 갇혀 있다고 할 수 없다. 아이다는 약국을 통해서 약자들을 보듬어준다. 


이 소설이 과연 소설로만 그칠까? 우리 역시 기다란 담장에 갇혀 있지 않나? 담장을 만들고 있는 족속들이 있지 않나? 담장을 통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다 가릴 수는 없다. 어디선가 새어나온다. 아이다의 말처럼.


우리 역시 위로든 아래로든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눈 앞의 길이 장벽으로 막히면 돌아가면 된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존 버거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소설에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임을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진실과 사랑을 가둘 수 있는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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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세계 - 우리가 모르는 우리말 이야기
석주연 지음 / 곰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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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긴다. 우리말이다. 내가 말하고 쓰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국어시험을 보면 수두룩하게 틀린다. 또 한국어능력시험을 보면 웬만한 사람들, 심지어 국어교사들조차도 틀리는 문제가 많다.


그럼 우리는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한국어능력시험이나 수능과 같은 또다른 시험들이 우리말에 대한 앎을 제대로 측정하고 있을까?


우리말에 대한 앎을 측정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 우리말 전반에 대한 앎을 어떻게 측정할 수가 있을까?


애초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한 언어를 측정할 필요가 있을까? 의식하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말을 왜 측정해야 하지?


측정한다는 말은 비교를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이 우리말로만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다른 언어들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말에 대한 앎은 곧 다른 말에 대한 앎과 통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우리말에 대한 앎은 다른 언어와 비교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 책은 우리말에 대해서 시간, 공간, 침묵, 비밀, 이주민, 세계의 언어라는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모든 언어에서 같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그 나라의 문화, 역사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몸짓 언어나 침묵과 같은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표현조차도 다르게 쓰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자신들만의 소통을 이끌어가는 은어에 대한 설명이 비밀의 언어라는 항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 비밀의 언어에서는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나오기도 한다. 조선시대 때 한어(한족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왜 청어(청나라 언어)를 배워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비밀로 할 때는 청어를 쓰기 때문이라는 말.


즉, 언어는 소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특정 집단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집단이 자신들만의 은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언어는 단일성을 고수할 수 없다. 다양한 언어가 섞이게 된다. 이주민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현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 우리말이 지니는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옛날에는 두 나라는 강대국이었고, 우리나라는 잘 모르는 작은 나라였으니)이 언어를 쓰지 않고 굳이 한국어를 쓰느냐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고? 우리들의 생활이나 생각을 표현할 문자가 필요했으니까. 그 점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말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주고 있어서 우리말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우리말에 대해서 조금 거리를 두고 살필 기회를 주는 책. 그래서 우리말에 대해서 더 애착을 갖게 하는 책이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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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오지 않을 듯하다가, 며칠 동안 혹독한 겨울살이를 했다.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가, 몸이 견디기 힘들었다. 독감에, 코로나에, 세상에 유행하는 질병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이럴 때 따스한 방안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사람들은 작은 행복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방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은? 그들에게 겨울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주거의 문제. 이것은 생활이전의 생계다. 생존이다.


  적어도 국민들 생존은 해결해줘야 하는 기구가 국가 아닌가 하는데, 여전히 노숙인들이 많고, 자기만의 방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으니...


  지금보다 더 혹독한 겨울이 오면 그들이 어떻게 지내라고. 빅이슈 288호를 읽으면서 여성 홈리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몸을 누일 공간, 자기만의 방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봤다.


이번 호에는 인터뷰 기사가 많다. 사회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경험하게 해주는 일.


그리고 그들이 빅이슈의 취지에 공감하고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위안을 느낀다. 여러가지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그들이 마냥 받는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텐데.


이번 호에서 특히 생각해보고 싶은 글은 '돈이 필요 없는 마켓, 가능해'(64-67쪽)이다. 보틀팩토리에서 운영한 '바꾸장'이라는 활동을 한 사람에 대한 인터뷰인데...


돈이 만능인 시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에 돈이 없어서 재미있게 행복하게, 그리고 부족함 없이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세계 도처에서 굶주리는 사람,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 버려지는 음식, 넘치는 물자들이 있지 않은가. 분배의 문제, 균형의 문제인데... 이를 다시 돈으로 환산하면 분배나 균형에 문제가 생긴다.


돈이 개입되지 않고 필요를 바꿀 수 있을까? 예전에 유행했던(?) 지역화폐를 이 '바꾸징'이 이어받았다고 보면 된다.


딱 그때만 쓸모있는 '바꾸'라는 화폐. 이는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철저하게 그 장소, 그 시간에만 통용이 된다. 그 장소와 그 때를 벗어나면 '바꾸'라는 화폐는 그냥 종이에 불과해진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밖에 없고, 이 '바꾸'를 얻기 위해서는 쓸모있지만, 내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바꾸'와 교환해야 한다.


이는 교환가치를 활용하지만 사용가치를 우선에 두고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이 많아지면 쓰지 않는 물건이 많이 줄테고, 기존의 돈을 떠나서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빅이슈가 추구하는 일도 바로 이런 일이겠지.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무엇을 채우게 해주는 역할. 


추운 겨울에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 방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 그런 역할. 빅이슈가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차가운 겨울,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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