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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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이다.

소설이 번역될 때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영화를 다르게 봤을까 하는 생각.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인 이 소설을 읽었으니... 순서야 바뀌었지만,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공통점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했다? - 소설에서도 좀비들이 중국에서 먼저 활동하는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도 서양 사람에게 이름은 '아프리카 광견병'이라고 불린다. 특정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일, 그 지역을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 소설이 나올 때는 중국과 미국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중국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소설에서 서술이 되어 있다. 


두번째는 원인을 알 수 없다. 왜 좀비들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좀비들이 전세계에 거의 동시에 발생해서 재난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법을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좀비들이 불식되지 않았다. 좀비는 계속 살아남아 있다. 코로나19 역시 3년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번째는 격리다. 격리? 사람들을 격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좀비고 아닌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장벽을 쌓거나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코로나와 같은 비대면 활동이 많이 나오지 않으나, 만약 코로나19 이후에 이 소설이 쓰였다면 아마도 비대면 활동이 중심이 된 인류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네번째는 죽어가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강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는다. 다는 아니지만, 약자보다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모든 질병이 그렇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통점이 있지만, 코로나19는 바이러스고 좀비는 죽은 사람이 움직이는 상태니, 대처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좀비에 대처하는 방법,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좀비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설 방법은 없다. 좀비 퇴치법은 나왔다. 뇌를 없애면 된다. 


소설과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영화에서는 무언가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방법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질병이 대안으로 나온다.


즉 기생하는 존재는 자신도 살아가야 하니 건강한 숙주를 필요로 한다.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다. 숙주가 사라지면 바이러스도 사라진다. 그래서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지 못한다. 퍼뜨릴 숙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좀비를 설정한 이유는 이러한 기생(바이러스)의 특성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좀비는 아무 생각이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물리거나 좀비의 물질이 몸에 들어간 사람이 좀비가 되니, 의학 문제로 가지 않는다.


구체적인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좀비를 퇴치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둔다. 퇴치라고 했지만, 전쟁이다. 좀비와 벌이는 전쟁. 그래서 제목이 세계대전 Z다.


전쟁! 이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굴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쓰는 효과적인 전략, 전술은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좀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들이 선택한 전술은 일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좀비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미끼가 된다. 그 다음에야 군대가 좀비들을 소탕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얼마나 죽어가는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대상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이렇게 전쟁의 살벌함을, 또한 그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 역시 정신적 고통으로 삶을 유지하기 힘듦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런 좀비들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밝혀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좀비가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도 인류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밝혀내야지만 좀비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세상에 어떤 바이러스는 완전히 지구상에서 없애기는 힘드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코로나19로 고통을 받은 3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코로나를 생각하면서, 우리들 생활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월드 워 Z]를 본 사람들, 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군대 문제, 그리고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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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전집 : 시.희곡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맹문재 엮음 / 현대문학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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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내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이름이다.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이 이름이 부정 쪽으로 남게 된 이유는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이 큰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연실이 김명순과 다른 여성 예술인들의 모델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나혜석이 최근에 와서 집중 조명된 반면 김명순에 대해서는 그리 조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김명순 전집(시,희곡)이 다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김명순을 생각하게 했는데...


시는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1925년 즈음에 쓰인 시들이 대부분인데, 이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시의 초창기 아니던가.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 이상화라는 시인들이 등장하고, 서양 근대문학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근대문학이 시작되던 시기.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김동인이 자랑스러워 하던 [창조] 동인에 김명순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 또한 시 경향 역시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전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여성을 문학사에서 가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김명순이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점은 [김연실전]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니, 꼭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김연실전]은 초창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작품 아니던가. 그러니 [김연실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작가들을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요즘은 여류 소설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성이라는 성 구분이 앞에 꼭 들어갔으니, 그때 구분법을 따라서 잠시 쓴다) 쓴 작품을 읽으면 좋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1막 4장 짜리 '두 애인'이란 작품이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여인이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여인이 여러 폭력으로 죽어가게 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남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다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해도 남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그들은 하지만, 여성들은 그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란하다는, 또는 속된 말로 꼬리를 친다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김명순도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두 애인'이라는 각본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시 '유언' 마지막 구절. 95쪽)라고 당시 조선을 표현하고, '옛날의 왕자와 같이 /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 줄 알고 /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 지금 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 미련한 나! 미련한 나!'(시 유리관 속에'에서 끝부분. 96쪽)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김명순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전히 '사나운 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미련한 나'라고 자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김명순 전집을 읽으면서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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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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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하늘을 올려다 볼 틈도 없었나? 밤이 되어도 별보다도 더 빛나는 땅의 빛들로 인해서 밤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지 않았나?


내가 보지 않아도 별은 별일텐데...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이라는 말과 행성과 위성, 혜성이 다른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냥 별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별들은 이제 별 볼일 없어지고 만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낸 책이다. 천문학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된 자신의 일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천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읽을 만하다고 느끼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요즘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사실까지도.


우주로 날아간 우주선들이 보내오는 사진들로도 행성을, 별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시대라고 해도, 우리는 별에 대해서는 아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달에 대한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달 하면 무언가 그리움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듯이.


여전히 사람들이 우주로 나아가 살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달에 발을 디딘 지 오래 되었지만, 최근에야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 그만큼 우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에게 어떤 아련함, 그리움, 동경 등을 주는 존재. 그런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 천문학. 그리고 천문학자.


이 책에는 그런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 된 일들이 많이 나오는데, 드물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음도 드러내고 있고, 또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잘 기록된 자료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 천문학의 성과도 알려주고 있으며, 단지 별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땅으 이야기, 즉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이 되어서 좋다.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천문학자들의 그들의 책이나 논문에 쓰는 주체를 나타낸다는 말.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한다는 말. 이때 '우리'는 함께 연구한 과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인류'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은 특정한 한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온 결과물이라는 사실. 그 점을이 책이 알려주고 있으며, 우주로 나아가는 일들이 결국은 '인류'의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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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것들, 그러나 기억되어야 하는 것들.


  새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지만, 또 많은 것들이 생겨날 것이다.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 잊혀지지는 않는다. 이번 빅이슈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렇다.


  정년이. 웹툰으로 완결이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나 창극으로도 만들어질 거라고 한다.


  이렇게 한 장르에서는 끝났지만, 다른 장르로 옮겨져 계속 기억되고 있다. 삶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우리는 너무도 쉽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잊는다. 기억 속에서 지운다. 많은 사고로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때 분노했던 마음들이 어느새 사그러들고,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다시 반복된다. 반복... 잊혀짐은 반복을 부른다.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노력을 한다.


이번 호에 실린 홈리스 추모제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 그들처럼 그렇게 떠나가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추모제를 연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고쳐나가려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공간이나 기억공간을 만들어낸다.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재개발로 인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재개발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 되도록 재개발로 인한 문제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지금도 많은 장소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으니...


빅이슈의 좋은 점이 바로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라도 기억하려고 하는 점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지만, 다시 많은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예전의 것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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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 곽재식의 기후 시민 수업
곽재식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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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에 대해서, 기후위기라고 하기도 하고, 기후재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가 힘들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 책은 분명히 말한다. 기후변화로 지구가 힘들어지지는 않는다. 지구는 그만큼 많은 기후변화를 겪어왔다. 다만, 힘들어지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힘들어진다? 모든 사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힘들어지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소위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끔 텔레비젼을 보다보면 광고로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 물이 부족해서, 영양이 부족해서 너무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자는 광고가 나온다. 참 많은 단체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서 일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여전하다.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그들 삶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데에는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 작용이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이라고 모두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는다. 그 나라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힘든 삶을 살아간다. 생활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자신들의 생명 유지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약자다. 또 기후변화가 지구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 어느 지역에 또 어느 때에 갑자기 폭우, 폭설, 폭염, 가뭄, 강추위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난 기후재앙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변화는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사람이 사람을 함께 사는 존재로 여긴다면, 기후로 인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덜 고통받도록, 또 고통받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이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이윤을 포기할 수 없기에, 기후변화 역시 대응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 사는 나라들이 함께 기후변화에 대응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책은 그것이 왜 어려운지를 역사적 대응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경제가 개입되면 함께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또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현재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면 선진국은 책임에서 멀어지고, 개발도상국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사고는 선진국이 치고, 뒷감당은 개발도상국들이, 그것도 개발도상국에서도 사회적 약자가 덤터기를 쓰게 된다.


그러니 기후변화를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말자고 한다. 그냥 바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한다.


지구를 살린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바로 우리 이웃과 함께 살자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기후변화는 당장 닥친 우리의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이란, 무슨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선행 같은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미래에 우리와 우리 이웃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더 긴박하고 현실적인 문제다. 기후변화에 대해 고민한답시고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난 자연의 섭리 같은 평온하고 흐릿한 관념에 빠져 있던 세상은 이미 갔고, 이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찾아왔다. ...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을 생각할 때, 귀여운 북극곰들이 당황하는 모습만을 떠올리기보다는, 급작스러운 집중호우에 배수가 역류하는 도시의 반지하 방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인지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439쪽)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할 말이다. 책이 좀 두껍기는 하지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또 읽으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이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도 우리가 친환경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과연 기후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인지도 생각하게 하고.


이런 글이 이 책에 나온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탄소발자국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고, 어떤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치즈가 반도체보다도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안 좋은 쪽으로) 하는 통계 수치도 있다고 하니까. (428쪽)


'비닐봉지는 워낙 만드는 데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기 때문에, 면으로 만든 가방을 하나 만들 정도면 비닐봉지를 131개 만들 수 있다. 이 계산은 영국환경청의 2011년 발표인데...'(418-419쪽)


비닐봉지를 쓰지 말자고 많이들 말하는데, 면봉지가 더 문제일 수 있다는 주장. 이렇게 기후변화에 관련되어서는 다양한 관점, 다양한 통계가 적용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계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더 정확한 통계를 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체로 공유되고 있는 방법들,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확충하는 방법, 주택을 단열이 잘 되도록 짓는 방법 등등을 살리고, 정부가 기후변화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후변화로 인해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적어지도록 정책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전기차와 수소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 자료와 과학적인 내용을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어서, 그것들이 지금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도, 왜 전기차만이 아니라 수소차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도 소개하고 있고, 그것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알려주고 있어서, 기후변화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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