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 전집 : 시.희곡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맹문재 엮음 / 현대문학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김명순, 내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이름이다.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이 이름이 부정 쪽으로 남게 된 이유는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이 큰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연실이 김명순과 다른 여성 예술인들의 모델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나혜석이 최근에 와서 집중 조명된 반면 김명순에 대해서는 그리 조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김명순 전집(시,희곡)이 다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김명순을 생각하게 했는데...


시는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1925년 즈음에 쓰인 시들이 대부분인데, 이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시의 초창기 아니던가.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 이상화라는 시인들이 등장하고, 서양 근대문학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근대문학이 시작되던 시기.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김동인이 자랑스러워 하던 [창조] 동인에 김명순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 또한 시 경향 역시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전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여성을 문학사에서 가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김명순이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점은 [김연실전]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니, 꼭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김연실전]은 초창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작품 아니던가. 그러니 [김연실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작가들을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요즘은 여류 소설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성이라는 성 구분이 앞에 꼭 들어갔으니, 그때 구분법을 따라서 잠시 쓴다) 쓴 작품을 읽으면 좋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1막 4장 짜리 '두 애인'이란 작품이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여인이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여인이 여러 폭력으로 죽어가게 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남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다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해도 남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그들은 하지만, 여성들은 그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란하다는, 또는 속된 말로 꼬리를 친다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김명순도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두 애인'이라는 각본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시 '유언' 마지막 구절. 95쪽)라고 당시 조선을 표현하고, '옛날의 왕자와 같이 /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 줄 알고 /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 지금 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 미련한 나! 미련한 나!'(시 유리관 속에'에서 끝부분. 96쪽)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김명순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전히 '사나운 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미련한 나'라고 자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김명순 전집을 읽으면서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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