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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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7쪽)로 소설은 시작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주어와 서술어를 꾸며주는 말이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 간단한 문장에 여러 수식이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문장이 들어갈 수 있다. 소설은 그렇게 많은 문장들이 이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의 일들을 말해준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감정들. 


그러다 소설은 첫문장의 주어인 아버지를 꾸며주는 말로 끝난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265쪽)


결국 죽은 사람은 어떤 수식어로 지칭되는 사람이 아닌, 그의 삶이 어떻더라도 내게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수식어로 불리던 아버지가 그 많은 수식어를 지니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이 소설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인데, 소설은 아버지가 해방이 되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서술자의 기억을 통해 듣는 과정이 전개되지만, 결국은 바로 서술자 자신이 해방되는, 아버지를 규정하고 있던 수많은 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첫문장인 '아버지가 죽었다'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 신념, 평가 등을 다 떨쳐내고, 내가 규정했던 아버지가 죽었음을, 이제 내게서 그런 아버지가 떠나가고 그 모든 것을 지닌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왔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떤 삶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어떤 해방을 찾으려고 했을까?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이다. 이념으로 갈라진 우리나라 현대사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아버지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닐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니까 겪게 되는 일일 뿐이라고 한다. 사람이닝께란 말. 이 말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읽으면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되는데, 아버지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가는 서술자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춰졌던 진실들이 드러나고, 또 현재 우리나라 현실도 함께 드러내면서 소설은 아버지의 삶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문장의 간결함을 메워주는, 자주 나오는 부사어가 있다.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하나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삶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수식해주는 말을 찾으라면 나는 '하염없이와 항꾼에'를 찾겠다.


하염없이 :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


어떤 의미여도 상관없다. 이 소설에서는 비슷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빨치산 투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런 '하염없이'라는 부사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또는 기다리면서 또는 그 가족으로 인해 사회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하염없이'라는 말로 꾸며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염없이'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장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좌파, 우파 가릴 것이 없다. 여기에 이주민의 아이까지 나오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하는 자리가 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빨갱이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보수와 진보, 그리고 이주민까지 함께 하는 모습.


소설은 이렇게 '하염없이'로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아버지를 꾸미는 많은 말들을 떼어놓고, 아버지,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순간, 여태까지 아버지를 꾸미고 있었던 수많은 수식어들은 버려야 할 수식어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 속에 들어가 있는 말이 된다. 


그냥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아버지였고, 나의 아버지였음을 서술자는 깨닫는다. 그 말을 이 소설에서 찾으면 '항꾼에'라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함께'라는 말의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함께 한다.


이 소설에는 이 '항꾼에'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함께 하는 삶.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도 여러 모습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그 다양함이 바로 사람임을,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고 받아들일지 멀리 할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돌아와 빨갱이라고 감옥생활까지 한 아버지의 삶은 바로 이 '항꾼에'에 담겨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세상도 바로 그런 세상이었을 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모습. 그런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흔적 곳곳에 뿌리는 서술자, 자신들의 머리 위로 뿌려지는 유골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어떤 수식어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그 모든 수식어가 '항꾼에' 담겨 있는 사람임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서술자는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소설을 읽으며 그 점을, 지금까지 '하염없이'처럼 의지와 의식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항꾼에'와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 그 전환에는 바로 어떤 특정 말로 사람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양함이 함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의 뒷부분에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우리와 항꾼에.'(263쪽)


이 문장들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이렇게 또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고, 한면만 보이던 아버지의 다양한 면이 보이고, 그런 면이 모두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나의 해방일지로 나아간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닫혀 있던, 하나라고 믿고 있던 세계에서 열린 세계, 다양한 세계로 함께 나아갔으니까.  


재미있게 그러나 감명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이런 좋은 작품 앞으로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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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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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였다. 장르소설이라는 말을 거부했던 사람. 세상을 남성과 여성 또는 다른 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던 사람. 작가라는 소명 의식을 지니고, 세상을 작품 속에 끌어왔으며, 작품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보게 한 사람.


시도 썼다고 하는데,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만, 시와 소설은 분명 다르니, 르 귄이 소설에서 했던 작업과 시에서 했던 작업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을테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논픽션 글들도 썼으니,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글쓰기로 세상에 참여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읽은 작품들이 많다. 수필집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책은 르 귄의 마지막 글이라고 보면 된다. 글이라기보다는 말이라고 해야겠지. 글로 적힌 말들. 


데이비드 네이먼이라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르 귄이 대답을 한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말년의 르 귄을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르 귄의 작품을 읽었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소설, 수필집을 읽었다면 그간 르 귄이 한 말들이 정리되어 있단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르 귄의 생각을, 르 귄의 작품을 생각할 기회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르 귄은 글에는 리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글은 말을 문자로 나타내지만, 문자로도 충분히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 낭독의 중요성. 그렇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소설이든 시든 리듬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 말.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예전에 학교 교육에서는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학생들 앞에서 낭송하게 하는 활동. 그래서 글이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입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런 소리내어 읽기의 중요성.


읽기는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활동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도 낭송을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르 귄도 비판하고 있지만, 낭송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읽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시간이 주는 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국어에서도 읽기가 축소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 소설의 분량이 줄어들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이제는 구닥다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퇴출되고 있는 현실이지 않은가.


이렇게 읽기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문학작품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읽는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말(글)은 점점 줄어들고, 간략해지고, 긴 문장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또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빈 공간보다는 시각적으로 상상력을 메워주는 영상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상상은 공상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또다른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시나 소설은 상상을 다루는 예술이다. 이런 상상을 통해서 사람들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 시와 소설이 인간과 함께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때문에 르 귄이 한 말,


'미국에서 상상력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뿌리가 깊어요. 갈수록 소설을 적게 읽히는 학교들만 봐도 드러나죠. 요새 학교에서 시를 읽기는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44쪽)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83쪽)


이런 말을 떠나서 예술은 중요하다.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그런 예술에는 성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고, 장르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편가르기를 하고 담장을 쌓아 서로 교류를 하지 않는 일들은 예술의 세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상력을 죽이는 행동이다. 


르 귄의 마지막 대담집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작품만큼이나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르 귄의 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번역자가 르 귄과 주고받았다는 편지에 있던 한 내용... 세상에? 2008년에 주고받았던 내용이 지금 다시 읽으니, 이런! 이런! 한탄이 나오고 있으니...


그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이 글에 대한 감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president(대통령)는 별명이 presi-ro-dent(rodent는 설치류)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 르 귄의 답장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당신의 나라에 대해 쓸 만한 소식을 얻기가 무척 힘들어요. 우리 신문은 외국 뉴스를 거의 싣지 않고,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 '존재'하죠. 한국에서도 (이전의 우리처럼)  presirodent를 뽑았다니 유감스럽네요!'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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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두 번째 빅이슈. 그동안 만나왔던 이야기들이 이번 호에는 없었다.


  노숙인들 이야기, 사라지는 건물들 이야기 등등. 그럼에도 그렇게 다름을 느끼지는 못했다.


  여전히 빅이슈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따스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행복을 주고 희망을 갖게 한다.


  빅이슈를 읽는 사람들이 빅이슈에서 그러한 위안과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잡지니까.


뜨개질에 관한 글이 실렸다. 뜨개질, 실과 실이 만나 다른 존재로 변한다. 실이 주는 감촉도 좋지만, 그것들이 만나서 옷이 되거나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어도 좋다.


우선 느낌이 좋고 또 우리를 따스하게 품어준다는 감정을 지니게 하니까. 사람들 사이도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실일 수가 있다.


실 종류가 다양하듯이 사람 역시 다양하고, 그 실들이 모여 다른 형태로 변하듯이 사람들도 서로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모습의 삶을 만들어간다.


가끔 뜨개질을 하다가 잘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너무 서두르다가 또는 잘 몰라서 실수를 할 때가 있는데, 그 실수를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경우 완성된 물건에서 그 흠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작은 흠이라고, 그냥 무시해도 될 흠이라고 생각해서 고치지 않고 진행을 했는데, 결국은 그 흠으로 인해서 그 물건과 멀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그래서 뜨개질을 잘못했을 경우, 잘못된 부분으로 돌아가 그 부분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그러면 조금 느려질지 모르지만 더 만족하는 물건을 만나게 된다고. 우리 삶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실수를 인정하기 힘들어 그냥 넘어가는 경우에, 그 실수로 인해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 실수인 줄 알았으면 바로 고쳐야 한다. 더 진행되기 전에.


이런 뜨개질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과제를 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뜨개질에 남녀 구분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말자. 누구나 할 수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뜨개질이니.


국회의원들과 행정부 또는 사법부 사람들, 소위 말하는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 한 해에 한 번씩은 뜨개질을 해서 완성된 작품을 제출하게 하는 의무 법안. 꿈같은, 말도 안 되는 법안이라고 하겠지만, 이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작은 실수가 불러오는 결과, 또 그 실수를 그때 그때 바로잡아야만 더 큰 잘못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지니는 수많은 권리에 이 정도 의무를 더하는 일이 그리 힘든 일일까? 하긴 다른 일들로 너무도 바쁘신 분들이 한가하게 뜨개질이나(?) 하라는 의무 법안이 있다면, 입법부에서부터 당장 그 법안을 상장하지 않겠지. 무슨 돈키호테 법안이냐고 하겠지.


하지만 빅이슈 이번 호 뜨개질에 관한 글 읽어보라.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는 이런 뜨개질에 관한 글 말고도 생각을 하게 하는 글들이 역시 많다. 다른 호들과는 다른 방향의 글들이지만, 방향은 다를지라도 추구하는 지점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의 삶이 따스하게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 그러한 마음이 빅이슈 이번 호에 담겨 있다고 느껴진다. 새해에는 좀더 따스하고 평안한 삶들을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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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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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영화로 봤다. 감명 깊게 본 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어라! 영화 원작이 있었어?'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빌려서 읽게 되었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나는 구속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9쪽)


상금이 어마어마하다.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0억 정도의 상금이 걸린 (10억 루피라고 소설에 나오는데, 인도 1루피가 15원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지금 환률로 환산하면 150억 정도 된다고 해야겠다. 150억을 상금으로 걸고 하는 퀴즈쇼는 없을테니, 10억 정도로 하자. 그래도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퀴즈쇼일테니) 퀴즈쇼에서 우승했다. 


우승한 대가가 구속이다. 자, 왜 주인공은 구속되었을까? 소설은 이렇게 첫문장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증거가 없을 때 증거를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부패한 경찰이 생각하는 수단. 지금은 고문을 하는 나라는 거의 없고, 인도에서도 고문은 아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겠지만, 부패한 경찰에게는 고문이든 뭐든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니) 순간, 변호사가 등장하여 그를 데리고 나간다.


변호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주인공. 이름이 람 모하마드 토머스. 람은 인도 힌두교에서 크리슈나 신이 환생했다는 '라마'를 의미하고, 모하메드는 이슬람교를 토마스는 천주교(기독교,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키워준 사람이 신부니까, 천주교로 하는 것이 더 좋을 듯)를 의미한다.


즉 주인공의 이름에 세 종교가 들어 있듯이 그의 삶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달랐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그리고 우연히 신부의 손에 자라지만 신부가 살해당하고 소년원(고아원)에 보내지고, 다시 팔려가서 탈출하고,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그.


그가 살면서 겪게 된 일과 퀴즈 문제가 겹치면서 소설은 12번째 문제까지 삶과 문제를 연결짓고 있다. 아니, 12번째 문제에서는 퀴즈쇼를 하는 집단의 사기를 드러내고, 각 문제마다 그가 겪은 삶이 인도의 삶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일들을 통해서 그의 몸에 각인된 지식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맞히는데 일조한다. 단순히 빈민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각 계층들의 위선적인 삶, 진실한 삶 등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찾았지만, 과연 이렇게 행복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퀴즈쇼에 나오는 지식들이 삶의 지혜하고는 거리가 먼 단편적인 지식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그런 지식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에게는 단지 퀴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각 문제에 해당하는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지만 인색한 사람, 가난하지만 베풀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버리는 사람, 위선적인 가학성 성애자, 그럼에도 올곧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


가난 속에서도 우정과 사랑을 잃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가려는 사람. 그래, 세상에 권선징악이 있다고 믿으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이 되겠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조금씩이라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런 희망을 주는 소설이다. 흥미진진하게, 추리 소설의 요건도 갖추면서 전개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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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으로 구입했다. 

  김소월하면 우리나라 근대시를 개척한 시인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 아니던가. 

  그런 김소월 시문학상 수상작품집인데, 그것도 1회 작품집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구입.


  목차를 보니, 이름 있는 시인들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심사평을 읽어보니 40대를 전후한 중견시인들로 대상을 제한했다고 한다.

  물론 문학상이 그해 발표된 모든 작품과 모든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기는 힘들지라도 이렇게 중견으로 제한한 것은 문제가 있단 생각이 든다.


시를 꼭 20여년 정도 쓴 시인들이라야 잘 쓴다고 할 수 있나? 단 한 편의 시로도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고, 평생동안 꽤 많은 시집을 냈어도 그 시인의 시 단 한 편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인도 있는데...


시가 나이와 또 시를 쓴 경력과 같이 가지 않음을 심사위원들이 더 잘알텐데, 왜 이런 결정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수상작을 선정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소월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는데,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하여간 그런 심사경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수록된 시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상을 받은 오세영의 그릇 연작 중에서 그릇1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좋았는데... 중간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릇이 깨지면 칼날이 된다고, 사랑은 온전한 그릇으로 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깨졌을 때는 사금파리가 되어 사랑을 깨게 된다고 할 수도 있는 시.


그렇지만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 무엇이나 깨진 것은 / 칼이 된다.'(오세영, 그릇1.4연. 이 책 17쪽)고 하는 시 구절은 우리들 삶을 생각하게 한다.


그릇,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데, 깨지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히려 다른 존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지금 이 시대 깨진 그릇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상하게도 기를 쓰고 자신들의 그릇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


아니, 자신들의 그릇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그릇도 빼앗아 깨버리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이 시를 읽으며 씁쓸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내 그릇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겠지만, 다른 존재의 그릇도 깨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태도, 그러한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송수권의 '하느님의 아이들'도 마음을 울린다. 8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데, 이미 그때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한탄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서다.


지금은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코로나19로 인해서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더 멀어졌으니, 이 시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느님의 아이들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일까

  캔 음료도 색깔로만 마시고 사는 요즈음의 아이들

  어찌 하느님을 닮았다 할까


  식목일에 무궁화 삽목을 하고 싶어

  몇 아이에게 가지를 쳐오라 했더니

  꽃이 지고 없는 개나리 가지를 쳐 왔다

  그림 속의 꽃은 잘도 구별하던 애들이

  하느님의 영토 안에서 자라는 싱싱한

  나무들의 이름과는 이렇게 멀어져 간다.


  어느날은 창 밖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흘러 들어 발을 절며

  아이들의 심장에다 불을 놓았다

  모두가 책상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서고

  나의 수업 시간은 엉망진창이었다

  E.T하고는 잘 놀던 애들이

  하느님과는 가장 눈이 닮았다는 메뚜기와는

  왜들 이렇게 원수 보듯 하는 걸까


  나는 메뚜기 한 마리를 들고 서서

  혼자서 길 잃은 아이처럼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논둑길을 가로질러 벼가 익어 가던 벌판은

  온통 나의 성(性)이었다

  한 되들이 됫병에 갇힌 메뚜기들은

  그때 얼마나 할 말이 많았는가

  ......얘 꼬마 녀석, 그러다간 하늘에 못 간다.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일까

  요즘은 자구만 아이들이 싫어진다

  냉장고 속에서 다람쥐처럼 크는 아이들

  밤 하늘 은하수를 잊고 산 지도 오래다

  어느 길목에서 하느님의 옷자락을 놓아 버린 것일까


  지난 일요일에는 낚싯대를 메고

  나 혼자 들로 나갔다

  진달래 산천을 지나 민들레가 핀

  보리밭둑을 넘어

  살구꽃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옛날의 밝은 마을을 지나

  종달새 앞장 세우고 하늘 끝까지 걸어갔다


  깜부기로 하느님의 턱밑 수염을 그리며

  나는 탈판 속의 말뚝이처럼 한 바자기 우물물을 퍼 마시고

  한 시대의 풍경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87년도 제1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5년 2판 1쇄. 

송수권, 하느님의 아이들.154-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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