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적인 표현이 제법 많은 시집인데... 


  가령 소금쟁이를 '저수지의 옷을 수선하는 수선공'(92쪽)이라고 표현한다던지, '쥐의 여행'라는 시에서 고스톱 치는 장면을 '아버쥐, 똥 먹어/아버쥐, 그냥 죽어/아버쥐, 쌌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 대신 아버쥐라고 한 표현도 재미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 '아버쥐, 인분 드시죠/아버쥐, 그만 작고하시지요/아버쥐! 사정하셨습니다'(85쪽)라는 표현에서는 안 웃을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상(성)스러운 말이 오가는 고스톱 치기에서, 쥐가 등장하고, 그 쥐를 통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런 재미 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시인데, 이는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소위 썪은 미소(썩소)만이 넘치는 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제공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


그럼에도 슬픈 시들도 많은데, 집값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단합하는 모습을 그린 시 '공범'(87쪽)에서는 박완서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보다 집값을 우선하는 물신시대. 그런 시대를 시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 있지만 이 시집에서 '페로몬'이라는 시를 읽으면 장인수 시인은 우리에게 웃음 페로몬을 내뿜어, 그 웃음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 제목이 된 유리창이라는 시는 정지용의 유리창을 떠올리지만, 정지용의 유리창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비통함을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지만, 장인수의 유리창은 그 죽음을 승화하고 있다. 물론 장인수 시에서 죽음은 새들의 죽음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 그러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23쪽)


그러니 그의 시는 죽음이라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있다. 그 다음이 있으니 우리는 절망에서 허우적대서는 안된다. 비극을 딛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우리를 이끈다. 


    페로몬


카페이 앉아 있는 남녀 고등학생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남녀 고등학생

담배를 피우고, 이어폰을 꽂고,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들에게서

성페로몬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하나님을 갈구하는 예배당에 모인 신자들의

영혼에서도

주님을 향한 길안내페로몬 향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의 몸에 돼지 수컷 페로몬을 바르면

암컷 돼지들이 난리를 피우며 따라붙을 것이다

이끌림의 에너지인 페로몬 향기처럼

생애의 물꼬가 터졌으면 좋겠다


장인수, 유리창,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2쇄. 93쪽.


보통 어른들이, 특히 교사들이 일탈행위라고 하는 고등학생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 않고 성페로몬이 발동했다고 하고, 종교적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서도 페로몬을 발견하며, 자신에게도 그런 페로몬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시의 화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우리에게 페로몬을 발산해 그 페로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삭막한 시대에는 더더욱 '생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도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설 때가 있으니, 시인들은 이렇게 페로몬을 발산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인수 시집을 읽으며 그 페로몬이 시인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페로몬을 지니고 있음을... 그래서 그 페로몬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페로몬에 이끌려 함께 가기도 한다.


함께 함. 이게 바로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긍정 페로몬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사는, 아니 굳이 이끌 필요도 없다. 그냥 함께 있어도 좋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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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2021년 봄보다는 뒤에 나온 계절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하긴 소설을 꼭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 계절에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소설을 실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이 계절에 따라 읽기 적합성을 띤다면, 그 소설이 어떻게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겠는가? 좋은 소설은 계절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들 아니던가. 그래야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 될텐데.


이 책에도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편집자들이 엄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이번 책에도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이 한 편 있다. 그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김멜라가 쓴 '나뭇잎이 마르고'란 소설이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소설. 단편임에도 첫 문장을 보자마자 아, 읽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소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든데, 여성이자 장애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체를 받아주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


왜 체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에서 양귀비 씨앗을 뿌릴까? (이들이 뿌리는 씨앗이 양귀비 씨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와 관련지어서 양귀비 씨만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예전에는 약으로도 쓰였던 양귀비라는 식물이 아편의 재료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재배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 되었는데, 양귀비는 그대로인데, 그가 어떤 시대에 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이 사회에서 양귀비나 체나 변두리로 밀려나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체는 당당하다.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산다. 그렇다. 양귀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띠는 곳에서는 재배를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자라게 된다.


우리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을 더 많이 보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사람의 신체조건이라든지 사회, 경제, 교육 상황 등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우리가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낯설게 보게 하기.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낯선 세상을 만난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세상이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위수정이 쓴 '은의 세계'가 바로 그렇다. 지환에게 낯선 환경(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에서 다가온 하나. 그 하나와 함께 살지만 하나의 가족(사촌)은 또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하나 역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또 하나의 낯선 세계,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상황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낯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환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환. 이는 정말 낯선 세상이다. 서로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서로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지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하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낯설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나인가?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은 끝나는데...어쩌면 단편소설이 지닌 매력일 수도 있다. 여백이 많은 소설들. 그 여백을 독자가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다른 작품에서 그 여백을 채우고 또다른 여백을 남기는 그런 과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렇게 두 작품은 주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읽어가면서 빨려들어가는데,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소설이 바로 나일선이 쓴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다. 1959년과 2018년이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제목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또 우리나라 소설이면 우리나라 말로 제목을 달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갈고 닦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 너무 고루한 생각인 듯 싶다가도 작가들 마저 이렇게 영어를 제 나라 말인양 쓰면 나중에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이 남아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우겠지만.


지금 노래들을 보면 영어가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설에도 이렇게, 비록 제목만이기는 하지만, 들어왔으니,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토막토막, 무의식 속에 있던 일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열된 느낌. 어쩌면 그런 나열 속에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야 하겠지만, 마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을 곱씹어야 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런 소설은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들의 현란한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원재료가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에게는 아니다. 그냥 이상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독자처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니, 궁금한 사람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을 읽어보거나 직접 작품을 읽어보기를...


그래도 이렇게 짧지만 계절마다 꾸준히 소설이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좋겠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분량이나 가격 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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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가능성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고정이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의 모습. 또 청소년들의 마음. 그들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또 굳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딱딱함, 굳음은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특정한 형태로만 있으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청소년에게서 생동감을 빼앗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시집을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청소년보다도 어른들이, 기성세대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문학을 통해야 한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청소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우선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지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전달이 되거나, 또는 어른들 구미에 맞는 말을 늘어놓는 청소년들의 말을 듣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청소년시집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들의 내밀한 마음들을 상상을 통해 표현한다.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던 소소한 감정들을 시로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시인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을 표현해낸다. 


시인이 꼭 청소년일 필요는 없다. 청소년시라고 해서 청소년이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청소년의 마음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써야 한다. 그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청소년의 마음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청소년들의 마음이라는, 그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고, 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과거나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게 됐다. 제목도 '마음의 일' 아닌가.


그런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 마음의 가소성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졌다


내가 쓰고자 했던 것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릴 수 없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도

쓰거나 말할 수 없다

온전하게는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뒤에 나도 나무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맞으며

아, 행복하다

여기가 따뜻하구나

여기가 시원하구나

따뜻하면서 시원할 수 있구나

말할 수도 있다


현장의 나만 아는

그때의 나만 아는

내 몸에 새겨지고 있지만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는


나이테가 있다

지문이 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안에 있어야 보이는 바깥 부분이 있었다


내뱉고 나면 사라지고 말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꿈이 있었다


나는 아직 창 안에 있다

창 안에 있기에

백지 위에 한가득

창밖을 상상할 수 있다


오은, 마음의 일. 창비. 2020년. 초판 2쇄. 53-54쪽


청소년을 고정시키지 말자. 어떤 한 역할로 국한시키지 말자. 그들을 기대라는 이름으로 틀에 가두지 말자.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일, 그들이 '백지 위에 한가득 / 창밖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청소년들, 청소년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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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미래 -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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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군더더기 없는 주장이다. 공간이 사람들 삶에 영향을 주니,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고, 적절한 공간을 만들어내야 미래 사회에서 특히 감염병이 창궐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양한 분야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종교 시설, 학교, 직장, 도시, 도로, 그린벨트 개발, 상업 시설, 청년들의 주거 문제, 국토 균형 발전 등에서 필요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중에 아파트를 살펴보면 유현준은 포스트 코로나 아파트의 5원칙을 주장한다. 첫째, 1가구 1발코니, 둘째, 소셜 믹스 공원, 셋째, 기둥식 구조, 넷째, 복합 구성, 다섯째, 친환경적인 목구조 사용이다.


거실이나 방을 확장해서 발코니를 없앤 아파트가 많은데, 그런 구조가 사람들을 더욱 삭막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니 발코니를 통해서 자연을 주거 공간 안으로 들여와 안과 밖이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단 주장이다. 이것이 되면 자연스레 소셜 믹스 공원은 해결될 수 있고, 기둥식 구조나 다양한 분야의 시설들이 들어오게 되는 복합 구성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목구조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주장대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이런 책을 읽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우화가 떠오르곤 한다. 당연한 주장이고, 좋은 주장인데, 그런데 어떻게 실행하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실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쥐들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는 좋은 의견을 냈지만, 어떻게 달 것인가에서 실행 단계로 가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탁상공론에 불과하게 되었지 않나.


유현준의 주장도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주장을 과연 어느 부처에서 검토할까? 국회에서 관련 법을 개정하려 할까? 주무 부서라고 할 수 있는 국토행정부나 중소기업벤처부나 뭐 이런 부처의 관료들이 이 책을 읽고 고민을 할까?


아님, 이러한 전문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의견을 정치권에 전달할까? 그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말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실행이 될까?


유현준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안-> (   )->실행'으로 가는데 그 빈 칸이 하나가 아니라 너무도 많은 (괄호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괄호 안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도 명확해야 하는데, 유현준의 책에서는 이 괄호에 들어갈 단계들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문득 이 괄호를 주장하는 사람이 채울 수 있다면 우리 사회 공간 구조가 지금처럼 되어 있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괄호를 채우게 할 사람들은 바로 그 공간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유현준이 주장한 내용을 자신들의 공간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그 공간에 살 사람들이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이것도 그렇게 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내가 살 만해야 그 다음, 우리가 살 만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책 곳곳에서 유현준은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니다. 우선 내 배가 불러야 한다. 내 배가 부르면 남 배 고픈 줄 모른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만, 아니다. 내 배가 불러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생각도, 행동도 내가 우선 살 만해야 한다.


이 점에서 유현준은 청년 주택 정책이 임대 위주로 가지 않고, 청년들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한다. 괄호 안을 채울 수 있는 하나의 단계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책을 펼치게 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괄호가 필요하지만, 우선 방향에 대해서 공유를 하면 비어 있는 괄호들을 채우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하는 유현준의 주장은 귀기울 만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실천한 건축들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보여주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다만, 건축에 적용되는 수많은 법규들을 현실에 맞게, 또 미래에 맞게 개정하는데는 국회가 나서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면, 중간에 비어 있는 괄호들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유현준의 주장이 정리되어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의 계층 간 이동 사다리를 만들려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오프라인 세상에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은 사람 간의 '만남의 밀도'가 높아지면서도 동시에 전염병에 강한 도시 공간이다. ... 선형의 공원, 자율 주행 로봇 전용 지하 물류 터널,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규모는 작아지고 다양성은 많은 학교, 다양한 부도심, 특색 있는 지방 도시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이 문제는 비전 없는 부동산 정책들과 세금 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도시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358쪽)


이 제안과 실행 사이에 있는 많은 괄호들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남아 있지만, 우선 이 주장들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 속에서 괄호들이 하나하나 없어지게 되겠지. 


덧글


목구조 건물에 대한 이야기. 아파트 이야기를 하면서 앞부분에서 유현준은 목구조가 우리나라 아파트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무들을 접합해서 건축을 하기 때문에 나무들도 강도 높은 건축 자재가 된다고... 그래서 노르웨이에서는 2019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85미터 높이의 19층짜리 목조 건축물 '미에스트로네'가 완성됐다(50-51쪽)고 한다.


그런데 347쪽에 보면 전통 건축을 이야기하면서 목재 구조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전통 건축물이라고 한정할 수도 있지만, '더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했다. 철이나 콘크리트는 목재나 돌보다 단위 면적당 압축력을 받아 내는 힘이 크다. 근대 건축에 접어들어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나오고 나서야 수십 층 높이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앞에서 아파트 논의에서 목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현대에는 목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으니, 목재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칫 잘못 읽으면 목구조 건축을 미래 건축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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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4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화할 때 아주 유용한 책 같아요 ㅎㅎㅎ
전 후 반부에 유교수님이 출마하시나 생각했어요 ㅎㅎ

kinye91 2021-09-14 08:0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 같은 선거철에 각종 공약이 난무하는데, 이 책에 나온 제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것의 타당성, 실현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별 별 사이 - 소년소녀 X SF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동식 외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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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xSF'라고 한다. '청소년xSF'라고 하지 않은 편집자의 고심이 느껴진다. 특정한 성이 특정 연령대를 대표하고 있다는 느낌을 청소년이라는 말은 준다. 그렇다고 청소녀라는 말을 쓰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언어가 사고를 대표한다고 하면, 청소년이라는 말에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남성중심주의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특정한 연령대를 독자로 상정하고 작품을 내놓은 출판사에서 용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소년소녀xSF'라고 했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 네 편의 주인공들은 주로 중고등학생 정도의 연령이라고 보면 된다. 중학생 정도의 연령 13세에서 18세 정도를 사춘기로 잡으면 사춘기에 들어선 사람들이 주요 등장인물이고, 독자들도 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여기면 된다.


그렇다면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주로 경험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 친구 관계, 또 성장통(소위 사춘기 반항이라고 하는), 성적(공부), 사랑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쓴 소설도 많지만, 이 소설은 SF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상상이 발현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상상력에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SF소설의 매력이다.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고, 그 거리만큼 현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주영이 쓴 '별 별 사이'는 친구 관계를 다루고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 온라인 수업은 부유층 아이들이 주로 하고, 오프라인 수업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주로 하는. 


같은 학교 학생이지만 서로 별과 별처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그런 사이들. 이렇게 먼 존재들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친구가 되어야 함을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엄마의 가출, 부유한 친구의 제안, 그 친구는 엄마와 아는 사이 등등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예전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욕을 하면 경고가 나오고 어쩌고 하는 장면을 이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발한 상상력으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친구는 경제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서로가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부딪치며 지내는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친구가 된다. 그런 과정... 예전 어른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친구가 되려면 밥을 함께 먹고, 목욕을 같이 하고, 잠을 같이 자야 한다고. 그렇게 경제적 차이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SF라는 형식을 빌려 작가가 보여주고 있다.


김동식 소설 '이상한 미래의 사춘기'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발한 상상력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화학요법에 의존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그런 세상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지의 가족을 통해서.


사춘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그 격정적인 감정을 이용해 감정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다는 발상, 그러나 모든 아이가 사춘기를 거치지는 않는다는 사실. 아니 사춘기가 있다면 거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를 보내는 모습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예지 역시 사춘기를 요즘 말로 하면 쉽게 보낸다. 


소설 속에서 의사가 말하는 어려운 집안 아이들은 가족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춘기도 빨리, 조용히 넘긴다는 말은 슬픔을 자아내지만, 그렇지만 그런 집안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면서 웃으며 지내는 가족이 있음을, 마냥 슬프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예지와 예지 엄마의 관계 역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냥 웃으면서 읽을 수도 있지만, 소설 속에는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가 몇 있다. 과연 인간의 감정을 외부 요인에 의지해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한 그런 감정조절이 된다면 왕따와 같이 피해를 보는 학생에게 기쁨 에너지를 쏘여 기분 좋게 하면 일이 해결되는가? 사춘기와 갱년기라고 꼭 지칭하면서 특정한 행동을 하리라고 예측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등등.


전삼혜가 쓴 '토끼와 해파리'는 슬프다. 물론 소설은 전혀 슬프지 않다. 이게 SF소설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분명 슬픈 내용임에도 읽으면서는 슬픔을 느끼기 어렵다. 다만 읽고 나서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어렸을 때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 자기 또래와의 생활을 건너뛰고 어른이 된 모습. 그러나 지식의 발전 속도(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면 천재라고 찬탄을 하다가, 성인이 되어서 남들보다 특출하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가 어렸을 때와 달리 어른이 되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아이를 설정한다.


자기 또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또래 아이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건너뛴 아이를 천재라고 찬탄만 해야 하는지... 오히려 그런 아이일수록 또래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 '어메이징 메리'를 보라. 무엇이 행복인지,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소설은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홍지운이 쓴 '그냥 그런 체질이라서'는 사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 이야기다. 사랑에 빠지면 흥분하기 쉽고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그 점을 용족과 결혼한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반인반수도 아니고, SF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그렇지만 재미 있다. 과거 우리나라 왕족들은 대부분 용들의 자손이 아니던가. 그러니 SF라고 없던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 전통의 계승이다. 이 소설은) 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불을 뿜어낸 소년 이야기다.


그냥 웃음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사춘기의 사랑은 앞뒤 안가리고 불붙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웃음을 유발하면서 넘기고 있지만, 자신이 조절 못하는 사랑으로 상대가 다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끝내는 소설이 아니다.


네 편 모두 사춘기에 겪을 만한 일들을 주제로 다양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읽기보다는 웃으며, 깔깔거리며 읽을 수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설정이다.


그렇게 웃으며 읽다가 무언가를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네 편의 소설에는 웃음 속에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SF소설은 전혀 현실과 같지 않은 상상력 속에서 현실을 바로보게 하고 있으니...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 소설집에는 재미 있게 읽고, 웃으며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 사춘기를 겪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작품들이 실려 있으니,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 또는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 읽으면서 낄낄거렸으면 좋겠다. 낄낄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올라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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