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마치 예정조화설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 쪽으로 가지 않을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어떤 행동을 해도 정해진 대로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니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꼭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지 않을까?


알고 고칠 수 있고, 또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니, 그때 운명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즉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운명. 그것은 운명을 알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운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선 자신의 성격을 알아보는 MBTI(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가 있고, 9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애니어그램이 있고, 점과 비슷하게 타로 점이 있고, 그리고 우리나라 점, 또 주역이 있다. 


이보다 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진 방법들인데, 최근에 사주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설마 저번 대선의 영향은 아니겠지...


사주를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한다면 사주, 좋다. 그것을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주를 본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을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빠져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거울을 추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지금 내가 이래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구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사주의 의미다. 즉 사주는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같은 사주라도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이 하는 행위나 마음가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진다. 그것이 요즘 사주보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사주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닌 자세다.


그 점을 이번 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주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 사주를 보고 해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사주를 미신의 영역이나 맹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는 영역으로 옮겨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 이번 호, 사주에 대한 글들이다.


또 이번 호에서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오후 작가가 제시하고 있다. '값비싼 치료,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나'라는 글에서.


의료 문제가 붉어진 한국 사회에서 의사 문제도 문제지만, 의약품 문제도 문제다. 건강보험으로 모든 치료를 보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도 비싼 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가에서 건강보험으로 모두 보전해주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반가운 일이겠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므로, 무한정 국가가 나설 수는 없는 일.


세상에 약값이 28억 원이나 되다니... 이것을 건강보험이 보전해줘서 600만 원에 투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약들이 계속 개발이 된다면, 돈이 많은 환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지만,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더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약들은 국가가 지원해줘야 하는데, 마냥 할 수도 없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한 제약회사의 이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연구는 세계적인 협업으로, 세계정부 차원에서(유엔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하지 않을까. 이윤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한다면, 세계 각국에서 차등적으로 비용을 충당해 그런 연구를 지속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도 품어보는데...


이게 아직 안 되고 있으니, 오후 작가의 말인 '의학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거에도 건강은 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길.'(81쪽)이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런 현실이 아니길... 부가 건강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치겠지만 결정적 영향은 끼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빅이슈]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잡지가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나.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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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이후의 세계 - 챗GPT는 시작일 뿐이다, 세계질서 대전환에 대비하라
헨리 A. 키신저 외 지음, 김고명 옮김 / 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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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인공지능 시대. 이 책은 작년에 출간이 되었다. 작년.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뿐인데,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에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만큼 인공지능 부분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는 얘기다.


일년 전에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준비를 했을테니, 인공지능에 대한 책을 쓰면서 출판은 인공지능 이전 식으로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 예로 이 책에는 챗지피티-3이 나온다. 지금은 3이 아니라 4, 그리고 그 이상의 버전이 나왔다고 한다. 예상할 수 없는 분야로, 대답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라면 인공지능의 발달 역시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바로 우리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통하는데, 여기에는 사유가 필요하고 인류의 삶을 이끌어내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동감한다.


세계의 관계자들 또 지식인들, 정치인들이 모여서 인공지능에 어떤 한계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러한 제안은 낭만적으로(제안은 좋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인공지능을 군사력에 도입하면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의 정치가들이 모여 인공지능의 쓰임에 한계를 정하는, 과거 핵무기 사용에 관한 협정과 같은 협정을 맺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은 군사 분야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쓰이고 있으며, 그러한 인공지능의 사용이 인간에게 편리함과 자본가들에게는 이윤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마 알게 모르게 인공지능을 군사력과 결부시키는 나라들이 있을테지만, 대놓고는 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데, 이제 곧 대부분의 나라 군사력에 인공지능은 결합이 될 것이다. 결합이 된 다음에 대책이 나오면 인류를 파멸로 이끌 무기를 만들어놓고 사용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데, 이미 만들어진 것에 한계를 두자고 하면, 그 협정을 누가 깨는 순간 인류는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서게 되니... 이것도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런 만큼 이 책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달을 살피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고 있으며, 앞으로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또는 이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고, 인류의 생존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토론의 장을 만들고, 인공지능에 대한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 아직 인공지능이 어떻게 발달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인공지능의 사용에 대한 협정이 맺어질 가능성이 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세계에서 인공지능의 개발을 몇 달(6개월이던가?) 늦추고 논의를 하자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한 편에서는 계속 인공지능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늦으면 이윤을 확보할 수 없으니까. 따라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인류의 생존 또는 생활이라는 목표를 놓고 토의를 하자는 제안은 공염불로 그칠 공산이 크다. 오히려 예전 핵무기 협정과 비슷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들도 이러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하고 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미 대세가 된 인공지능 시대라는 생각. 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직 오지도 않은 세상을 미리 걱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가 오면 늦었을테니, 미리미리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인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고, 그 철학에 의해서 인공지능 시대의 방향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인공지능은 이제 거불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보에 맥락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된다. 그리고 지식에 소신이 더해지면 지혜가 된다. 역자적으로 볼 때 소신이 생기려면 홀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수천, 수만, 수억 명의 의견을 쏟아부으며 혼자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용기가 위축된다. 용기는 소신을 기르고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며 특히 새로운 길, 그래서 대체로 외로운 길을 걸을 때 중요하다. 인간은 소신과 지혜를 갖출 때만 새로운 지평을 탐색할 수 있다. - P89

AI는 비정밀하고, 역동적이고, 창발적이며, ‘학습‘이 가능하다. AI는 데이터를 소비하여 ‘학습‘하고, 데이터를 토대로 관찰하며 결론을 도출한다.

- P95

AI가 결과물을 생성하면 연구자가 됐든 평가자가 됐든 인간이 그 결과물을 당초 목표에 부합하는지 검사해야 한다. - P115

AI는 자신의 발견을 반추하지 못한다. - P116

AI는 반추하지 못하므로 그 행동의 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인간이 AI를 규제하고 관리해야 한다.

- P116

이 글을 쓰는 현재 AI는 세 가지 차원에서 코드의 통제를 받는다. 첫째,코드에 AI가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의 매개변수가 지정된다. 둘째, AI는 최적화 대상을 정의하고 지정하는 목적함수로 통제된다. 셋째, 당연한 말이지만 AI는 원래 인식하고 분석하도록 지정된 입력만 처리할 수 있다. - P122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정부, 네트워크 플랫폼 운영자, 이용자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본질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전제와 한계 내에서 상호작용할 것이며, 어떠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따져야 한다. - P135

AI 무기를 설계할 때와 배치할 때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잘 설정해서, 인간이 시스템을 관리하고 시스템이 본래 목적에서 이탈할 시 가동을 중단하거나 교정하게 해야 한다.

- P205

AI의 ‘학습‘ 능력과 ‘목표물 설정‘ 능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제한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 P212

개인과 사회가 삶의 어떤 측면을 인간지능의 몫으로 남기고 어떤 측면을 AI에게, 혹은 인간과 AI의 협업체계에 맡길지 결정해야 한다. - P225

설명이 가능할 때 의미와 목적이 생기고, 대중이 도덕원리를 인정하고 실천할 때 정의가 구현된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제 결론을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대중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 P227

AI 기반의 맞춤형 교육이 도입되면 인간의 평균적 능력이 향상될 가능성과 손상될 위험성이 공존한다. - P234

우리 시대의 모순은 디지털화로 인간이 이용하는 정보가 계속 늘어나지만 진중한 사색에 필요한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범람하는 콘텐츠 때문에 사유의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사유의 빈도는 감소한다.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에 맞춰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추천하는 콘텐츠나 경험은 대체로 극적이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이다. 이런 환경에서 진지하게 생각할 공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진득한 사유에 그리 도움이 안 된다. - P235

특히 AGI가 신과 같은 지능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 구조와 안에 내포된 가능성을 직감하는 초인적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 AI 시대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시대의 지침이 될 윤리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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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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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사회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곤충사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다. 왜 곤충 이야기를 하는가?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곤충에게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운다고나 할까.


이 책은 최재천 교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본인이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 의예과에 가려고 했으나 떨어져 2지망으로 동물학과(생물학과)에 입학하고, 학과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다가 유학을 결심하고, 유학해서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민벌레를 연구하고, 개미를 연구하게 되는 과정이 초반에 잘 나와 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우리들의 삶을 연결지어 이야기를 한다. 곤충 사회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협력을 한다. 즉,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협동을 통한 경쟁이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경쟁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과정을 협력을 통해 이루어나간다는 사실. 이것이 사회적 존재로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점을 곤충 사회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들은 하나의 역할만 하는 존재로 구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한 장소에 함께 있어야 한다. 같은 종 내에서도 다양한 역할이 있어야만 성공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데, 이를 확장하면 생물종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해야 한다.


다른 생물종을 파괴하면 결국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다.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 이 점은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멸종시킨 생물들로 인해 인간이 멸종할 수가 있다. 하긴 그것을 피하기 위해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주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금 살고 있는 지구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 중심의 개발을 멈추고 생물 다양성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인구 감소를 걱정하기보다는 적정한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그 인구를 유지하면서 다른 종들과도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책 전반에 걸쳐 실려 있다. 자신의 삶과 생물학 연구 동향, 성과와 그리고 우리 인류의 삶이 연결되고 있다. 하긴 인간의 삶이 다른 종들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다윈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구상에 있는 생물들은 하나에서 시작되었음을,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이 바로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삶을 추구해야 함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이렇게 답할 겁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라고요. ... 꽃을 피우는 식물은 자연계에서 무게로 가장 성공한 존재이고, 곤충은 숫자로 가장 성공한 존재입니다.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어서 성공한 게 아니고 서로 손잡고 함께 성공한 겁니다.' (15쪽)


이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을 최재천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과 생물학의 성과를 연관지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기후 위기의 시대에 생물 다양성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도 직시하고 다양한 종들이 공생할 수 있는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 말을 사람들에게로 확장해서 말하고 있다.


'생태적 전환을 해야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은 이제 집어던지고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공생적 인간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로서 다른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공생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279쪽)


최재천 교수는 이 책에서 인간과 다른 종들의 공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이 다른 종들만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라.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 위험에 처한 나라들을 보라. 여기에 좀 가지고 있다고, 힘이 있다고 없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들을 보라. 


다른 종과도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 같은 종인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다른 종의 멸종으로 인간이 멸종에 이르기 전에 인간끼리 서로를 멸종시키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 자연으로부터 배우라고 그렇게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해 자연이 보여주고 있는데, 사피엔스라고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이 기를 쓰고 배우지 않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 책을 쓴 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읽는 나도 답답했는데...


하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기후 위기에 대해서도 생물 다양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인류의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책도 나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단순히 곤충사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리 인간 사회, 아니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종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최상위에 있는 인류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최재천이 말하는 인간사회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사회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도 좋지만 호모 심비우스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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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10-22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때문에 생각났는데 딱 보여서 놀랍고 반갑네요.^^

kinye91 2024-10-22 09:45   좋아요 1 | URL
하하, 좋네요. 가끔은 이렇게 연결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얼굴을 그리다 - 초상화가 정중원 에세이
정중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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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예전에는 많이 그려졌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없었으므로. 사진이 나온 다음에는 초상화는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아니다. 여전히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다. 사진으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을 초상화가 찾아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진이 있는데 굳이 그림을? 그것도 요즘 사진이 얼마나 화소가 많아 화질이 뛰어난데...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사진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것이 아니다. 


사진도 나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때 어느 각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찍었느냐에 따라 내 얼굴이 달라진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내가 찍은 사진과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니, 사진이 나를 똑같이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림을 보면서 실물과 똑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칭찬이기보다는 창의성 없다는 말과 통할 때가 많다. 실물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이 책의 뒤에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한 이야기와 하이퍼리얼리즘을 참조하면 된다. 무엇이 정말 '나'인지...) 화가들은 똑같이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초상들을 보면 실물과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고 한다. 실물에 있는 점 하나도 빼먹지 않아야 했다고 하니... 하지만 그것은 그림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단점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지 똑같이 그렸다는 말과는 다르다.


즉 인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 그 사람을 꾸미지 않고 표현했다고 해야지 똑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 초상들은 그런 그림을 통해서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을 드러내려 했다고 읽은 적도 있으니...


이 작가도 마찬가지다. 초상을 그리되 똑같이 그릴 수는 없다고 한다. 의뢰인이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은 시시각각 변하기 나름이고, 또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뢰를 맡아 그림을 그린 과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처음에 그가 한 실수들, 그 실수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적어도 의뢰인이 만족할 만한 초상을 그리게 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초상은 똑같다를 떠나서 무엇을 드러내고 감추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그런 판단에서 초상이 그려진다는 점을 잘 알려주고 있다.


또한 초상에는 사회의 모습도 담겨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들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 또 표준 영정이라고 하는 세종대왕, 이순신, 율곡, 퇴계 등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돋운다.


세상에 표준 영정을 제정해서 다른 얼굴을 그리지 못하게 하다니... 아니 그릴 수도 있겠지. 다만 비난을 받게 되겠지만. 이는 획일화다. 다양성과 개성을 추구하는 예술과 거리가 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당시에 그린 초상이 남아 있지도 않은 조상들의 얼굴을 표준으로, 딱 이거여야 한다고 정해서 다른 상상을 막다니, 그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화폐에 들어가는 얼굴이야 나라에서 그렇게 정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밖에 다양한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양부터 우리나라까지, 그리고 초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로 초상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까지를 살피고 있다.


그가 그린 초상화 그림도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은 인물들의 초상화와 그 초상화에 얽힌 사연을 만나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이 책을 읽으니 사진 또 인공지능 시대라 해도 사람이 직접 자신의 관점, 마음을 담아 그리는 초상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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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책을 읽다가 이런 시도 있다는 글을 읽고, 어떤 시길래? 하는 생각에 읽게 된 시집.


  이렇게 기괴할 수가!!! 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세상에, 시라면 서정을 떠올리고, 서정이라면 뭐랄까? 그래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그런 상태를 많이들 떠올리는데, 이건 뭐, 정말, 작가의 말을 명심해야 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똥 핥는 개처럼 당신을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무슨 영화 시작할 때 경고 문구도 아니고, 이런 말을 시인이 직접 하다니... 정말 기괴한가 보다 하고 읽기 시작.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그런데 그런 첫시가 그나마 덜 기괴했다고 해야 할까.


시집을 읽으면 계속 나오는 성기 이름을, 똥, 구멍, 피, 죽음... 결코 순수하다고 할 수 없는, 오히려 더럽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여기에 보통 사람의 윤리의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아니 시를 읽어낼 수 없는 시들이 연이어 있다.


왜 이런 시들을 썼을까? 시가 시인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시인의 마음은 사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이 세상은 가족부터 시작하여 온통 더러움으로 물들어 있는 세상 아니겠는가.


푸름을 자랑해야 하는 나무는 말라 죽어 있고, 배설의 기쁨을 누려야 할 곳들은 기쁨이 아니라 더러움 덩어리처럼 표현되어 있으니... 정말. 우리는 이런 더러움,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까?


첫시를 보자.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제목이다. 정현종 시인의 '섬'에서 차용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시들에서는 출처를 밝혀놓았는데 이 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우리가 보통 쓰는 표현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모듬회 접시 한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난자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섬에


닿고

싶다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17년 1판 4쇄. 13쪽.


그 섬은 결코 사랑스러운, 평화로운 섬이 아니다. 죽음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죽음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섬. 그 섬의 주변에는 여전히 죽음이 난무하는 그런 섬. 왜 그런 섬에 가고 싶을까?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직시하면서, 죽음과 함께하는 삶일 수밖에 없다. 그 섬에서 사는 삶은.


그러니 결국 시인이 추구하는 삶은 비루함, 더러움, 어려움, 죽음을 멀리 멀리 감추고 사는 세상이 아니다. 시인은 우리의 삶은 이러한 비루함, 더러움, 어려움, 죽음과 함께 있다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그것이 아니라 삶은 아름다움이라고, 죽음과는 상관 없다고, 죽음은 가려져야 할 존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봐라, 이것이 네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너는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세상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네가 사는 세상은 죽음의 세상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죽음으로 둘러싸인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 '진달래꽃'을 변주한 '역겨운, 역겨운,역겨운 노래'(38쪽)라는 시를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더해 시인이 쓴 '시'라는 작품. 시인은 시를 삶에서 길어올리지 않았다. 죽음에서 끌어왔다. 



내 죽은 몸을 떠나지 못하는


내, 구더기의


영혼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17년 1판 4쇄. 80쪽.


이것이 시라니... 우리가 생각하는 시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야말로 똥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구더기, 그것의 영혼이 시라니... 


이런 시가 이 시집에 수두룩하니 나오니, 정말 비위 약한 사람, 아니면 도덕의식이 높은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할 시집이다.


하지만 어디 삶이 좋은 면으로만 이루어졌던가? 그 좋은 면이 가리고 있는 좋지 않은 면, 그것도 우리의 삶임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꿈보다 해몽' 식의 이해를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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