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텍스트T 2
정연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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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돈다.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엄마가 돌아가신다. 충격. 아빠가 돌아왔다. 아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빠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원망만 있다.


이제 아빠 고향으로 가게 된다. 처음으로 가게 된 아빠 고향. 왜 그럴까? 소설은 여기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왜 아빠는 밖으로 돌았을까? 그는 왜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왜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부모의 죽음은 충격이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남남처럼 지내던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낯선 곳에서. 어쩌면 낯선 곳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늘 웃는 표정의 아이로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자신의 슬픔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아이. 이런 아이는 슬픔이 안으로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슬픔은 어느 정도 고여 있다가도 밖으로 흘러야 한다.


슬픔을 가둬두었다간 언젠가 댐이 터지듯 터져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슬픔의 둑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무엇이 할까? 언제까지 슬픔에 갇혀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슬픔을 내보낼 구멍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온 시. 시는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슬픔이 나갈 구멍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아이가 시를 만나면서 시를 쓰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면서 피해가지 않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시가 곳곳에 나온다. 주옥같은 시라는 표현이 식상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시들은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그런 시들을 읽는 재미, 소설의 상황에 맞게 등장하는 시는 우리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여기에 여자 등장인물, 은혜. 그야말로 은혜다. 축복이다. 이 은혜로 하여금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주인공과 반대인 듯하지만, 그런 은혜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 그 상처를 은혜는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자신에게도 현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아빠와 화해하는 장면까지 가지 않는다. 아니, 갈 필요가 없다. 그 이후는 이제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녹록치 않음을 회피로 가게 하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시를 통해서 또 은혜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본 주인공은 이제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긍정하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이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후회 속에서 사는가? 후회는 앞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면 좋지만, 과거에 나를 머물게 하면 안 된다. 주인공인 아빠, 이 사람은 후회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과거에 잡혀 있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현재를 살지 못했다.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면서 아웅다웅 하면서 살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나약함, 한때 시를 썼다는 사람이 시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현재가 다가왔다. 현실이 그의 앞에 떡 나타났다. 그 역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자식과 같이 살아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선택지가 없기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떨치고 떠난 곳. 새로운 시작은 자신이 버린 곳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현재 속에서 길고도 긴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식과 함께 하는 삶을.


이런 삶. 자식은 시를 통해서 자기 슬픔을 내보내는 길을 찾았고, 은혜라는 친구를 통해 현실에 충실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더 성숙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슬픔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 또 그 슬픔에 함께 하는 시들. 시를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


소설은 한 아이의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시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도 있고, 소설 속 시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아이는 시를 통해 슬픔을 위무하고, 슬픔을 내보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이런 시들을 곁에 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이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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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마지막 호.


  한 해를 잘 보냈다고 하고 싶지만,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지내야 한다. 내년에도 코로나19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있지만, 3년이 되어가니, 사람들이 적응을 하든, 극복을 하든 하지 않겠는가.


  두 해 동안 시행착오를 거쳤으니... 바이러스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니.


  그런 변이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니. 우리는 이 감염병에도 적응하고, 우리들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사람들을 다뤄주었던 빅이슈를 한 해 동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존재들을 빅이슈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한 해였는데...


내년에도 빅이슈를 통해서 더 많은 존재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 삶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번 호에 영국에 사는 이항규의 글이 마지막으로 실렸다고 한다. 다음 호부터는 이항규의 글을 볼 수가 없다는 서운함이 있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을 전한다.


그가 이번 호에서 쓴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밤길 운전을 할 때, 낯선 곳을 그것도 가로등도 없는 곳을 운전할 때의 두려움. 어쩌면 이것은 코로나19를 겪은 우리 인류들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낯선 곳을,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곳을 운전할 때도 도움이 주는 존재들이 있다고 한다. 앞서 가는 차들. 앞서 가는 차들의 빛을 보고 따라갈 때의 안도감. 그것은 함께 한다는 든든함이다.


우리가 감염병 시대에 겪는 어려움을 이렇게 함께 함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또 뒤에서 차가 내 속도에 맞춰 따라올 때의 고마움. 내가 늦게 간다고 씽씽 추월해가지 않고 천천히 함께 오는 차. 이것 역시 함께 한다는 고마움이다.


차만 그렇겠는가. 감염병 시대에 우리는 이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존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그들로 인해서 이 어려운 시대를 그래도 이겨나가려는 의지를 지니고 계속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빅이슈 또한 마찬가지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끌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잡지다.


빅이슈가 그러한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는 생각. 내년에도 또 그 후에도 빅이슈는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게 밀어주고 끌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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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아이들 마음부터 챙깁니다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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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자고, 단계적 일상회복 정책이 실시된 지 몇 달, 아니 한 달하고 조금 넘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들 생활에 위협으로 다가온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사람들도 이제는 백신 완료자들만 4명까지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백신 접종을 완료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밖에서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 활동을 하지 말라는 강제가 통용된다.


그럼에도 공동체라고, 다른 인간들을 위한다고 이것이 받아들여진다. 다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었고, 초규범사회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고, 또 참을성에 관해서는 거의 세계 최고 아니던가. 그러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견디고 지금 우리나라를 있게 했지.


여기에 우리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단군의 어머니 웅녀를 보자. 그야말로 인내심의 화신이다. 동굴 속에서 - 동굴은 이미 갇혀 있는, 다른 존재와 교류를 하지 않는 공간이 된다 - 쑥과 마늘로 - 얼마나 쓴가, 도대체 이것들만 먹고 견딜 수 있는가 - 버티어낸 존재 아닌가.


그런 조상의 자손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긍정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으로 받아들이든, 우리 신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으니, 우리 조상이 인내심의 화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조를 잘하고,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자 이런 인내심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다른 사람과 대면해 함께 지내면서 갈등하고 타협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어린 세대들, 젊은 세대들이 과연 이런 인내심을 획득할 수 있을까?


웅녀 정도는 아니더라도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를 내어놓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험을 해야 한다. 내가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고, 또 남도 실패하고 실수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단지 공부라는 지식 습득만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이런 학교의 중요성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시 전면 등교는 부분 등교로 바뀌었다. 다시 아이들을 온라인 속으로 가게 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우리에겐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늘 존재하는, 우리 삶에서 뺄 수가 없는 상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제목에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로 코로나19 이후를 생각하게 하지만, 실상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어른들이, 특히 아이를 둔 부모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진단과 처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처방이 있는데, 그 처방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면 안 되는데... 처방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부모들이 선택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런 처방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진단... 판단은 각자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아니 지금 이후의 세계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먼저 인정할 것은, 이 시스템 안에서 상위 1~2%에 드는 '평균적으로 시험 보는 능력이 탁월한' 아이들은 분명히 큰 이득이 있고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아이가 이쪽에 재능이 있다면 저는 당연히 지금의 흐름대로 가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98~99%의 아이입니다. (133쪽)


자,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우려하는 일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깃드는 것이 아니라, 학력 저하 아닌가. 교육부에서도 학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학력 격차가 커졌다는 통계를 전면 등교의 가장 주된 이유로 삼지 않았는가. 아이들이 온라인 학습으로, 동굴에 갇혀 사회성을 잃어간다는 사실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주된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이런 학습으로 결판나지 않는다. 극소수만 지금처럼 해도 잘살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대다수의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게 참 힘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모들은 성적, 성적 한다. 이것을 깨기가 쉽지 않다. 이런 통계가 예전부터 주어졌지만, 읽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사실 우리 아이들의 미래일 수 있는데...


머리가 좋은 아이보다, 타인을 돌보고 협상할 수 있고 나눌 줄 아는 아이가 교육 수준이 높았고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140쪽)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등교 수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학교에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하게 학교 환경을 만들고, 학생들이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느냐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실천해서 학교가 아이들의 사회화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활동을 해야 '타인을 돌보고 협상할 수 있고 나눌 줄 아는 아이'가 나타날 수 있다. 온라인 수업으로 집이라는 동굴에 갇혀서는 이런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교육부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지침을 단위 학교에서 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라도 하자고 한다.


아이의 남는 시간을 학습지로 채우지 말고 아이를 그냥 둬 보세요. 탐색하고 끙끙대고 '와, 재미있다' 하면서 혼자 해 보는 시간을 주세요. 혼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은 아이들의 마음에 두려움의 외적 동기 부여가 됩니다. 그보다는 해 보고 싶어서 해 보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일단 시도해 볼 수 있는 동기 부여의 판을 부모가 펼쳐 줬으면 합니다. ... 내적 동기 부여는 아이가 십 대에 접어들면 더욱 소중해집니다. 이때는 호기심을 가지고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보상의 힘이 두세 배 강해집니다. (155쪽)


아이들에게 심심해 할 시간을 주라는 말이다. 심심해지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간다. 이것이 바로 내적 동기 부여다. 그리고 심심할 때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런 상상력은 미래를 살아갈 때 커다란 힘이 된다. 성적이 아니라, 상상력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중요한 재능이 될 것입니다.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 조각들을 잘 꿰어서 하나의 이야기 꾸러미로 만드는 능력 말입니다. (160쪽)


다양성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삶을 만들어 갈 때 필요한 중요한 능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162쪽)


이런 상상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않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방법, 그것은 많은 실패를 해보고, 그 실패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안전하게 실패를 경험해 볼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놀이입니다. (170쪽)

 

놀이는 상상을 자극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를 주고, 규칙을 익히고 사회성을 습득하도록 합니다. 노는 것이 공부인 셈입니다. (171쪽)


놀이, 공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다. 그래서 학교는 문을 닫을 수가 없다. 코로나19 이후 시대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지금과 같은 입시교육이 주가 되는 학교가 아니라, 아이들이 함께 지내면서 규칙을 만들고 실패를 겪으며 성장해가는 학교로 말이다.


이처럼 이 책에는 진단과 처방이 명확하다. 다만, 이런 처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 웅녀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견뎠다.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밖으로 나왔다. 환웅을 만났다. 그리고 단군을 낳았다. 동굴보다 동굴 밖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민족이 존재하게 됐다. (과학적이 아니라 신화적인 이야기다. 이것을 과학으로 증명해라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신화로)


코로나19 이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동굴(온라인)로 들어가 생활하라고 할 수 없다. 동굴에도 있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야 한다.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바로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우선 읽어야 한다. 처방을 알아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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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의 교육을 말하다 - 관계 본질 변화
김용 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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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교육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이 우리들 삶에 깊숙히 들어와 우리들 삶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들 삶이 엄청나게 바뀌었음을 체감하게 된다.


인공지능이라는 인간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바뀌는 일이야 그렇다쳐도 감염병으로 인해 인간 삶이 바뀔 수 있음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현대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서는 더더욱이. 


하지만 이 둘이 연결되어 코로나 이후 우리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처럼 교육이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고, 그럼에도 코로나는 우리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던져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 교육에는 인공지능까지는 아니어도 온갖 매체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들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온라인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과학기술과 감염병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교육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코로나 이후에 교육이 온라인으로만 갈 수 있을까? 이제 학교라는 공간은 필요없고, 교사라는 직업보다는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시대로 변하게 되는가? 그런 질문을 한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교육을 말하는 이 책은 앞으로 우리 교육은 전면적인 온라인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온라인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교사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하는 수업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왜냐? 교육은 관계이기 때문이고, 이 관계는 온라인에서도 가능하지만 직접 대면했을 때 온라인보다 더 질적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본디 교육은 관계적 성격의 일이며, 수업은 교사와 학생이 교육과정을 매개로 다층적으로 대화하는 일과 같습니다. ... '관계 맺기 없이 교육은 성립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코로나가 우리에게 전해 준 큰 선물입니다. (6쪽)


왜 그러냐 하면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는 스스로 자기 공부를 찾아해야 하는 대학생들도 온라인 수업을 통해서 지식은 습득했을지 몰라도 무언가 미진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성인인 대학생들과의 수업에서조차도 교육은 정보처리의 효율만으로 판단될 수는 없었다. (43쪽)


학교는 지식을 얻어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48쪽)


이렇게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온라인과 더불어 직접 만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된 2년 동안 지속적으로 대면 수업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함께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서로에게 자극을 받고 도움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일. 또 갈등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일 등등이 교육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공간에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온라인 상에서 학습하고 발표하는 일을 더 편하게 여기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관계가 직접 만나서 관계를 맺는 일을 피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면 인간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힘들다. 인간은 함께 지낼 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모프가 쓴 소설 '로봇과 제국'이나 '파운데이션'에서 보면 서로 대면하지 않고 홀로그램으로만 소통하는 솔라리아인들이 나온다. 


그들은 고도로 발전된 기술을 사용하고, 홀로그램을 통해 서로 소통하기는 하지만, 직접 대면은 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 오래 전에 아시모프는 그런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이미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니 코로나로 인해 원격수업만 한 학생들에게는 솔라리아인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원격과 더불어 함께 만나 관계를 맺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은 언젠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예측할 수 없는 것에, 그리고 가능한 것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에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동시에, 앞선 세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세계에 새 세대가 주인으로서 거주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이 초청에서 아이들은 인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과 이중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인식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 세계와 관계 맺도록 하여 이 세계를 더욱 새롭게 갱신해 나갈 수 잇는 그 세대만의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개별적인 주체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127-128쪽)


교육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바람직한 것' 간의 차이를 규명할 줄 아는 해방적 자유를 향해야 한다. (131쪽)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아이들의 학습에도 주안점을 주지만 교사의 교육에도 주안점을 둔다. 교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자극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 교육에, 즉 배움의 장에 나오도록 초청해야 한다.


이 초청을 아이들이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교사는 초청해야 한다고 한다. 언젠가 이 초청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하여 코로나 이후의 교육은 지금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학교의 중요성을 드러냈고, 원격과 대면이 융합되는 교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원격을 통해 학생들이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대면을 통해 그 지식들을 활용하여 토론하고 심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어쩌면 이미 오래 전부터 해오던 거꾸로 학습법 같은 방법, 또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 방법은 이래야 한다고 딱 하나로 또는 몇 가지로 정리되어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학생과 교사, 또 지역에 맞게 다양한 교육 방법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그런 교육 다양성을 살리는 일이 코로나 이후의 우리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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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시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시집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없는 시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시집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시 한편 한편을 유기체로 이해하고 감상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 시들이 마음에 남아 시를 더 좋아하게 하기도 했는데, 이번 이원하 시집은 시 한편에서도 연과 연들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감정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하룻밤 꿈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그 일이 어떤 연관성도 지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꿈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충격으로 다가와 어떤 꿈은 기억에 오래 남고, 어떤 꿈은 기억에서 사라져, 꿈을 꾸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게 되는데...

 

이원하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제목이 된 첫시를 읽으면서 어떤 통일성을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렇게 감정들을 나열해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할까?

 

사람들 감정이 하나로 정리될 수 없음은 명확하고,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엄청남을 알려주고 있지만, 적어도 시인은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주어야 하지 않나.

 

무의식을 그냥 무의식으로 내보내는 역할이 아니라 무의식을 의식으로 걸러 내보내는 역할,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이원하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까? 아주 예민한 시인의 감성을 언어로 표현해 우리가 그런 감성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느끼게 하는 걸까? 감성의 넘침. 그런 시들을 읽으면서 그 넘침에 우리들이 흠뻑 젖기를 바라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를 이루는 낱말들은 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낱말들을 합치면 '새싹눈물'이 된다.

 

새싹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고, 눈물은 감정의 넘침이다. 그러니 이 시집은 전체가 감정의 넘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제목이 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가 마음에 와 닿는다.

 

제주 역시 동떨어진 섬 아닌가? 여기에 '혼자 살고'라고 했으니 외로움도 있겠고,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의 분출 또한 있을테고, '술은 약하'다고 했으니, 조금만 마셔도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 이렇게 넘치는 감정은 모든 것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의 투사가 사람들을 부드럽게 할 수도 있다. 자신만이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해야 함을, 심지어 무생물에게서도 감정을 느끼게 되니 어찌 함부로 살 수 있겠는가?

 

이원하 시집을 읽으며 그런 감정들의 넘침을 생각하는데... 이 시를 자꾸 곱씹어보게 된다.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투명해진다

 

나무는 신처럼

하늘과 가깝고 수염도 자라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물지만

내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

 

한순간도 내게

솔직해질 용기를 줄 리 없다

 

편애도 없다 편애도 없는 건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침마다 손이 따뜻한 이유다

관심을 얻기 위한 온도다

 

온도의 숫자를 하나둘 올리다가

내 손가락이 몇 내가 접혔을 때쯤

손에 불이 날까

 

불은 모르고 손은 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소리는

손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손은 모르고

나는 안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년 1판 8쇄. 118-119쪽.

 

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감상만 하면 된다. 누구든 자신의 마음대로 이 시를 감상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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