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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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부부가 된다고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한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을 전제로 부부를 이야기 한다. 언제까지 변치 않을 사랑을 간직해야만 하는 관계.


당위다. 의무다. 상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래야만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세월이 흘러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고 왜 함께 사는지 모른다고 느낄 때도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소위 '쇼윈도 부부'라고 해서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보여지는 부부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이 경우에 사랑은 없다. 그리고 부부 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도 없다. 부부 간에 상대에게 무한히 헌신하는 사랑도 없다.


무한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신이 피조물들에게 주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치고, 자, 부부들 간에 사랑이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지내야 함께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위기를 겪는 부부 두 쌍과 이미 아내와 사별한 식료품점 주인, 그리고 자식을 잃은 노부부, 여기에 두 쌍의 부부 모두의 친구가 등장한다. 부수적인 인물로 가정부가 등장해서 사랑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정부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을 강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이탈리아 휴양지로 여름 휴가를 떠나온 다섯 친구. (사라/자크, 지나/루디 두 쌍은 부부고 다이아나만 남편이 없다) 이들은 더위에 지쳐 권태로움에 빠진다.


늘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만 서로를 떠나보낼 수 없는 부부인 지나/루디 부부는 이 소설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들의 다툼은 결정적인 위기로 치닫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로 치닫는 부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해지고 있는 사라/자크 부부다.


한 남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사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자크.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렇지만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


소설은 '사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쩌면 사라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부 생활을 하면서 흔히 겪게 되는 일, 그런 일을 겪어가는 사람. 사라.


누가 부부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하겠는가. 이 소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부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 아마 그게 제일 형편없는 지식일걸." (52쪽-다이아나의 말)


아마, 자신이 부인에 대해, 남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서로에 대한 증오로 치닫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감출 수 있고 또 감춰진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지 않고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순간,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 (295쪽 - 루디의 말) 


이런 말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에게 갇혀 있는 관계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갇힘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무뎌지는 관계. 사랑이 없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는 관계.


"세상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 갇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90쪽 - 자크의 말)

"커플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야. 어느 커플이든." (263쪽 - 자크의 말)


피곤하지만, 사실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모험이 바로 결혼 아니겠는가. 상대와 함께 살기로 한 것, 나와 남이 합쳐져 우리가 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237쪽 - 자크의 말)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평생을 살아가면서 처음에 느꼈던 사랑이 평생을 지속하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만들어가는 관계. 처음 느꼈던 사랑에 더하기를 하는 관계. 상대를 구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하는 사랑. 


어쩌면 이 소설은 부부의 사랑 형태를 보여주면서 부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 번쩍하는 황홀한 감정에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함께 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소설의 말미에 에트루리아 고분에 있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러 가기로 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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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되는 시를 찾아본다. 어떤 시집은 제목이 된 시가 실려 있고, 어떤 시집은 시구절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다. 


  이 시집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시를 찾아보았는데, 시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삼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이란 시에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나'로 시작했으니 '사랑'이라고 쓰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시집 제목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보다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라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만큼 이 시집에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이 시집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죽은 별'은 과거다. 과거를 건지는 일은 현재에 과거를 가지고 오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 그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는 일. 어쩌면 시인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잊고 묻어버린 과거를 다시 살려내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역할. 그 일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이 시집 1부에는 시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시로 쓴 가족사라고 할만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시인 '지킴이의 노래'가 1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좋다.


시집 2부로 가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속도에 집착해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우리가 뒤에 두고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속도로 인해 다른 존재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2부는 부제를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정하고, 한 편 한 편 속도로 인해 잃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세상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이런 '속도에 대한 명상' 연작을 쓰게 했다고 할 수 있따.


3부에 실린 시들은 풍자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많은데, 역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는 곧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풍자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시인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이 중에 속도에 관한 시... 속도로 인해 생명이 얼마나 속절없이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짤막한 시.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1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화시학사. 2003년 1판 7쇄. 59쪽.


지금까지는 이래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제동이 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그래서 이 시가 더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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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번 버스 - 두 명의 십대와 그들의 삶을 바꾼 그날의 이야기 생각하는 돌 25
대슈카 슬레이터 지음, 김충선 옮김 / 돌베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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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라고 한다. 읽으면서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종다양성을 존중하고 있지만, 인종 차별 역시 여전한 나라라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하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언제 경찰에게 총을 맞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고도 하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불안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바로 미국 사회 아닌가 한다.

 

버스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공공 운송수단에서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불을 지른다?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인종, 경제력, 성별을 막론하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당한'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문제가 된다. 무엇이 합당한 처벌인가? 법전에 나와 있는 대로 판결하고 집행하면 합당한 벌을 준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은 없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사건에 같은 형량을 구형하고 판결해야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버스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불을 지른다. 그 사람은 하체에 심각한 화상을 입는다. 불을 지른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할까?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또한 피해자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정이 화두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공정인가와 맞물리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주변 친구들, 가족들 이야기를 펼쳐간다. 여기서 가해자를 알려주자. 가해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라 할 수 있고, 학력은 고등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못한, 학교를 성실하게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그에 대해 서술하면 가해자에 대한 동정심이 많이 줄어든다. 가해자는 사고를 많이 친 사람이구나. 앞으로도 더 많은 사고를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가해자를 교도소에 보내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결정하기 쉽다.

 

경찰이나 언론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공정인가? 이것이 과연 가해자에게 합당한 판결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피해자를 말해 보자. 피해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 성에 속하지 않는 에이젠더다. 피해자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규정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외모는 남성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는 치마를 즐겨입는다. 사고가 난 그날도 피해자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피해자 역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혐오 표현에 쉽게 노출될 수도 있다. 피해자가 살고 있는 도시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열려 있는 도시고, 피해자가 다니는 학교 역시 성에 대해서 고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악당 쪽으로 인식되기 쉬운데, 피해자가 성소수자다.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혐오 범죄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성소수자를 혐오해서 불을 지른 사건. 그렇다면 가해자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가 된다. 아직 성인이 아니라고 처벌을 약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인처럼 죄를 물어야 한다.

 

사건은 이렇게 전개된다. 피해자, 가해자에 대해서 더 알아보지도 않고.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많은 사실들이 감춰져 있다. 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혐오 감정을 지니고 불을 지른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몰아간다. 그에게 과연 어떤 처벌이 '합당한' 처벌일까? 이 책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청소년 범죄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자, 그런 청소년을 감옥에 가둬두면 '합당한' 처벌일까? 이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뉴욕 대학교 산하 범죄사법연구소의 소장이자 혐오죄 관련 법률 전문가이기도 한 제임스 B. 제이콥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혐오죄 법안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대량 투옥 정책의 열렬한 반대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러니 위에 새로운 아이러니들이 쌓여 갑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구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교도소야말로 반사회적인 태도를 양성하기에 딱 좋은 인큐베이터라고 할 수 있거든요." (204)

 

이 말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은 가해자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감옥에서 달라져 가는 모습으로 감형을 받은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피해자는 대학에 진학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 대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이 달라지는데, 이들의 삶이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 우리는 이들의 삶이 만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고, 그런 사회가 바로 가해자에게는 '합당한' 벌을, 피해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57번 버스에서 일어난 사건, 이 사건을 둘러싼 언론과 경찰, 재판 과정.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친구,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무엇이 '합당한'지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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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랜드 -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위대한 여정
스티븐 코틀러 지음, 임창환 옮김 / Mid(엠아이디)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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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책 표지에 적혀 있지만, 공상이라는 말보다는 상상이란 말을 쓰는 편이 좋다. 상상은 공상과 다르다. 터무니 없는 생각이 아니라 언젠가는 가능한 상상. 그렇다. 인간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각해 낸 무엇은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 낸 무엇에 윤리적이지 않다면, 나중에 현실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상상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의 윤리를 기술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무한대로 기술은 확장되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이 책에 나온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생물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서 질병을 치료한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 유전자 정보를 이용해서 표적 테러를 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하니,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환각제 사용도 마찬가지다. 환각제라는 표현은 순화된 표현이다. 우리는 이를 마약류로 분류한다. 인간에게 해롭다고 금지한 약물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다른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환각제를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용한 사례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의학적인 처방으로 사용했을 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고 하니, 구체적인 사례들을 검증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지금까지 상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것과는 반대되는 주장들이 이 책에 많이 나와 있다. 환각제에 관한 이야기, 스테로이드제에 관한 이야기, 핵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좀더 구체적인 증거들을 찾고, 사례들에 대한 연구를 접하고 이 책의 주장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놀라운 과학기술 성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인공관절이라고 할 수 있는, 절단된 신체를 보강하는 기술. 우리 몸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하는, 그야말로 옛날 텔레비전에 나왔던 6백만 불의 사나이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시각장애인들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각임플란트라고 하는 기술도 발전해서, 거의 상용화되고 있다고 하니,이런 놀라운 기술발전은 인간에게 이로운 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도 실현되고 있다니.

 

이제 영화에서나 보던 하늘을 나는 자동차들을 우리 실생활에서도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 몸에 대한 이러한 기술의 발전말고도 우리 밖의 기술 발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고, 그동안 생각 못했던 점들을 알게 해준다.

 

소행성 광산업이라는 말도 이 책에서 처음 듣게 되었다. 소행성에서 광물을 채취하겠다는 계획이 있고, 어느 정도는 실행되고 있다고 하니, 참...

 

하지만 기술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 책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정자 은행에 관한 장에서는 수많은 이복형제, 자매들이 태어날 수 있고, 이들이 서로 모른 상태에서 맺어질 수도 있다는 점. 자칫 잘못하면 기술발전이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지만, 이런 과정에서 책임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어차피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이미 인간이 상상했다는 사실에서 현실이 배태되어 있으니... 그러니 이러한 과정을 공개해서 책임에 대해서 공론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투모로우랜드, 미래의 땅, 약속의 땅이 될지 아니면 '멋진 신세계'가 될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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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22-01-05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네요. 이런 시대적 전환점에 태어난 세대는 어떤 면에서 축복 받은 것일 수도, 위기에 놓인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1-05 12:50   좋아요 1 | URL
이하라 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전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축복과 위기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고 나아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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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제목을 보면서 '나'가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 아니면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존재가 바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는 대부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좋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나도 저런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지금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다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면서 '나'를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임을,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를 지워가는 과정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설을 읽는 중간에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는 가해자가 다른 사람이고, 여성에게는 남성이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게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이 여성을 다른 사람으로 여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섬뜩하게 시작한다.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본다. 그렇다면 피해자로 지내기보다는 다른 존재로 지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비난을 받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잘 일어난다.

 

그렇게 데이트 폭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자, 이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데이트 폭력을 공개한 피해자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대략 예상은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피해자를 두둔하는 댓글과 피해자는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그런 댓글들이 동등하게 달리지는 않는다. 동등하게 달리더라도 피해자의 눈길을 끄는 댓글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다.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피해자의 눈에는 그런 비난 댓글이 더 잘 들어온다.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다.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최근에 읽은 시, 이소호가 쓴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을 보라.)

 

이런 전개는 상투적이다. 이런 피해자가 비난 댓글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힘을 잃을 것이다.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물들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 맺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로 진아, 수진, 유리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강현이 등장한다. (이 이강현은 생물학적인 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삶의 양태로 보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남성 인물로는 류현규와 김동희가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의 서술자인 진아를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게만 만들지 않는 단아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는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느 당찬 젊은이인 김이영, 서술자인 진아를 서술로 이끈 이진섭이라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서술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진아, 수진, 유리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겪은 일들이 그렇고 대응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들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나'를 지우고 이 '나' 위에 '다른 사람'을 덧씌우려 했다.

 

물론 성공하기도 한다. 수진은 언뜻 보면 성공한 삶을 사는 듯하다. 그렇지만 아니다. 수진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수진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임을 의식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삶. 이런 삶에서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존재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관계맺기에 실패한다. 바로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 때문이고, 이런 '나들'이 바로 자신을 나약한 존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진도, 유리도 서술자인 진아의 '나'에 해당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나'가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역시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강간당하는 사람보다는 강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해결책일까? 이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가 가해자처럼 군다고 해서 내 피해가 사라지는가? 아니다.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해는 내 속에 더 깊이 남아 있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을 규정한다. 내 행동, 내 말투 등등을.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피해를 당한 것을 내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잘못한 일을 왜 피해자에게 돌리는가. 잘못은 가해자가 했고, 책임도 가해자에게 돌려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아왔다.

 

바로 피해자들의 '나'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나 피해의식 있어.'라는 말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도돌이표.

 

이 도돌이표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나'로 살아가는 길을 찾았을 때 멈출 수 있다. 이는 바로 피해의식이 있다고 하는 그 말들이 바로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가 또다른 '나'와 연대할 때, 비로소 '나'와 대척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가 '나들'로 굳건하게 연대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소설은 유리를 통해서 이런 '나'가 '나들'이 되는 과정, 그리고 젊은 세대인 김이영이라는 학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진아는 뒷세대인 김이영을 통해 '나들'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이제 과거의 인물이었던 유리가 현재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다음부터는 우리들의 몫이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다. 소설은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가해자는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너 피해의식 있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소설을 읽어보자. 서술자인 진아의 처지에서 읽어도 좋지만, 거꾸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희의 처지에서 읽어보아도 좋다. 왜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긍정적인 면이 류현규라면 그 반대 얼굴이 바로 김동희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 우리는 또다른 김동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설은 중반을 지나면서 추리소설의 면모를 띠기도 한다. 문체의 박진감과 사건 전개의 속도, 그리고 누가 누구를 괴롭혔을까 하는 추측으로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렇게 끝을 향해 소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이끈다. 끝에 도달했을 때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유리의 보고서 제목이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알게 된다.

 

소설에서 남자가 한 말을 진아가 돌려주는 장면이 있다. 끝부분에서 진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23쪽- 이진섭의 말)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329쪽-진아의 말)

 

도돌이표인가? 아니다. 이는 앞의 말을 이겨낸 '나'의 말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다른 사람'의 그늘을 벗어난 '나'의 말. 그러니 이제 소설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그런가? 소설 읽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여행이다. 이 소설 읽기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바로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이제 그 길은 소설 밖에 있다. 새로운 길로 우리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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