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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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죽 읽어가게 하는 소설. 박진감 있게, 결말을 기대하게,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치닫는 소설. 읽고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응어리진 채 남아 있는 소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감상을 쓰려고 하니,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는 소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데,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201-202쪽)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인한 파국을 이야기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엇에 대한 이해인가? 삶에 대한 이해. 각자 바람직한 삶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그 이해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데서 파국이 온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 사람으로부터 이해의 실패를 경험한다. 주인공 유안... 한때 유명한 무용수. 다리를 잃고 기계 의족을 단 사람. 자, 과거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인해 많은 노력을 하고 다시 무용을 하게 된다. 이게 과연 유안이 바라던 삶일까?


유안은 그 사람(한나)의 기대대로 행동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은 이렇게 남 앞에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 이 말이 나온 순간 둘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달랐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럴 때는 누구의 삶을 인정해야 하는가. 바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위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상대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도 자신의 삶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부인하고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 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뒤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동적인 삶이 된다. 자신의 삶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니 약자의 위치에 처한 사람의 삶을 자신 삶의 방식으로 끌어들이려는 행동은, 겉으로는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상대가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소설은 이런 과거의 일이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온다. 그리고 현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현재에서도 유안은 또다른 이해의 파국을 맞는다. 자신을 같은 뜻을 지니고 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믿는 레오와의 관계에서.


레오는 므레모사에서 하는 자신의 행동을 유안이 이해하고 함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오에게는 므레모사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이 혹은 자신들이 탈출해서 므레모사를 파괴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삶은 그에게는 재앙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유안에게는 아니다. 유안에게는 그런 삶이, 어쩌면 움직이지 않고 붙박혀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람직한 삶일지도 모른다. 레오는 상상도 하지 않던 그런 삶을 유안은 동경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들은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서로 다르게 이해했음에도 서로가 서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은 레오다. 그리고 레오는 자신의 이해를 의심하지 않는다. 유안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즉, 유안이 처한 삶에 대해서 유안의 처지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안의 의족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유안에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지시한다.


자, 여기서 어떤 이해가 있는가? 저 사람도 당연히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행동하겠지라는 믿음만 있다. 그 믿음은 일방적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이해의 파국이 발생한다. 레오와 유안에게 벌어지는 파국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유안은 자신의 삶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유안이 찾은 삶이 다른 삶과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움직이지 않는 삶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선 움직임이 필요하다. 내 움직임이든, 다른 사람의 움직임이든, 또는 다른 존재의 움직임이든. 그러니 내가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려면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물질('커맨드'라고 레오가 말한다)이다. 즉 커맨드로 다른 사람을 조종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해는 없다. 일방적인 조종만이 있을 뿐이다. 유안이 선택한 삶에도 결국 이해는 없다. 유안은 자신이 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삶을 선택할 뿐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는 세 가지 이해의 실패가 나온다. 과거에서 벌어지는 유안-한나의 이해 실패, 현재 므레모사에서 벌어지는 유안-레오의 이해 실패, 그리고 유안이 미래에 관계를 맺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이해의 실패. 


앞 두 부분의 이해 실패에서 유안은 수동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 한나와 레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해의 실패에서는 유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이기는 하지만. 수동적이든, 주도적이든 모두 이해의 실패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흥미진진하게, 결말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서 한 달음에 달린 소설인데... 읽고 나서 무언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이고, 또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일텐데... 무언가가 계속 무언가로 남아 있으니, 여전히 이해의 실패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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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먹을거리를 담는 밥그릇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밥그릇이 빛난다는 말을 시인이 하고 있다. 매일 닦아서 빛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바깥 부분의 빛남이 아니라 안쪽의 빛남이라면, 이는 밥그릇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하기만 하는, 텅텅 빈 밥그릇. 한번도 풍족하게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그런 밥그릇조차도 지키려고 아등바등댈 수밖에 없는 존재. 최종천 시집을 읽으며 밥그릇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풍족하지 않은 밥그릇조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그릇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한다. 내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존재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내 밥그릇이 비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주 조금밖에 주어지지 않는 밥그릇을 걷어찰 수도 있어야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투명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32-33.


노동자들의 소득을 유리지갑이라고 하기도 한다. 소득이 확연히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출 것이 없다. 사실, 얼마를 버는지 다 알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은 소득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시 제목이 '투명'이다. 


없으니 투명할 수밖에... 이제는 누구라도 자신의 밥그릇이 이렇게 빛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밥그릇이 보장된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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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 미투 운동에서 기후위기까지
리베카 솔닛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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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리베카 솔닛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읽으면서 역시 솔닛이야 하게 하는 책.


일어났지만 보이지 않았던 일들,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서 솔닛은 보여주고 말하고 있다.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솔닛에게 진실은 말해져야 한다. 


그런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자인가, 강자인가? 책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의 이야기인가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고 있었지만 모른 체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도 있겠고, 반대로 그렇게 힘없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을 했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 '누구'란 말에는 강자와 약자 쪽,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야기를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강자다.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약자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강자는 이야기를 하고, 약자는 이야기를 억압당해 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조차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약자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이끌고, 또다른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온다.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제는 강자에 의해 입을 다물고만 살지 않겠다는, 삶의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자 행동이다.


이런 점에서 미투 운동도 나왔고, 또 다른 많은 운동들이 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자들은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약자들의 이야기는 강자들의 관점으로 굴절된다. 강자들이 변형시킨 이야기들만을 진실인양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솔닛은 이 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강자가 왜곡시킨 말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말잔치가 벌어질 때가 있다. 선거 때면 온갖 말들이 난무한다. 그런 말들이 나돌아다닐 때, 솔닛의 이 말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약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이야기인가? 약자에 공감하는 이야기인가, 약자를 억압하는 이야기인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런 조작된 이야기들의 사례가 많이 나온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미국에서 이런 거짓들이, 이런 폭력들이 행해지고, 이 행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사실에서, 최근에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해서 만나게 된다.


한편 한편의 글들이 다 좋지만, 그 중에 이런 말이 나오는 글 '영웅의 등장은 일종의 재난이다'를 읽으면 뛰어난 개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다. 이 중에 이런 말...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뛰어넘기보다 그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변화는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닌 공동 작업에서 비롯된다. 이때 필요한 자질은 전통적으로 남성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라 여겨졌던 특징, 스포츠맨보다는 모범생이 갖춘 자실이다. 즉 경청하기, 존중하기, 인내하기, 협상하기, 전략과 계획 짜기, 이야기 만들기 등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독하면서 특출난 영웅을 좋아하고, 주먹 싸움과 멋진 근육을 사랑한다.' (228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바로 이것이다. 손잡고 함께 행동하기. 이런 일들을 말끔하게 해결해줄 헤라클레스는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그에게 넘겨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솔닛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묻혀버렸던 수많은 약자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우리에게 들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젠 이야기의 주인공이 강자가 아니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편견과 혐오,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된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누군가가 막아서는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 솔닛이다. 이 생각을 또 하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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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는 플레이리스트다. 음악 모음이라고 해야 하나, 내 마음에 들어오는 음악들을 모아놓고,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게 하는 그런 플레이리스트.


  핸드폰이 일상화된 요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언제든 들을 수 있는 시대.


  그만큼 많은 음악이 유통되고 있고, 다양한 음악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많은 음악들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리해서 들으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너무 많으면 없는 것과 같을 때가 있는데, 이를 정리해 놓으면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그런 경우라 하겠다.


또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하는 많은 통로가 있으니, 찾으려고만 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고, 여기에 자신이 고른 음악을 더할 수도 있으니, 음악은 우리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릴 때가 많다. 우리 귀는 보는 것보다 많은 활동을 하기 때문인데, 가령 카페에 들어가도 카페에서 틀어놓은 음악을 들을 때가 있으며, 방송을 보다보면 꼭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음악이 바탕에 깔려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내 상황에 맞는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더 자주 듣고 싶고, 또 그와 비슷한 음악을 찾아 듣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면 많은 도움이 된다. 아니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찾으면 되고.


어디 음악뿐이랴. 우리 삶 많은 부분에서도 이런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놓으면 좋을 때가 있다. 가령 마음이 우울할 때 가고 싶은 곳이라든지, 기쁠 때 함께 하고 싶은 존재라든지, 혼자 있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 등등.


많은 부분에서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놓으면 삶이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한다. 내가 빅이슈를 읽는 이유도 이 중에 하나다. 책을 읽는데 다양한 분야 중에서 잘 만나기 힘든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빅이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이슈는 내 간접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평소에 만나지 못하는 부분을 만나고 싶을 때 읽는 책 목록에 빅이슈가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 다룬 플레이리스트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내 삶에서도 나만의 다양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도.


모두들, 이제 봄이다. 봄은 자연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하는 때다. 더불어 우리들 삶도 풍요로워졌으면 한다. 때로는 이렇게 빅이슈를 통해서 힘을 얻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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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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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이란 제목에는 강제라는 말이 들어 있다. 희지 않은 존재를 희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백에는 자기 뜻에 반해 변화된다는 의미를 포함되고 있다. 그렇다면 희게 되는 존재는 누구일까? 세대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성세대는 아니다. 이미 기성세대는 희게 되었든, 그렇지 않든 제 색깔을 지니고 또는 잃고 살기 때문이다. 이는 제 색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제 색깔에 대해서 고민하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잇는 세대다. 젊은세대다. 젊은세대는 기성세대의 뒤를 이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자기 색깔을 지니고... 그런데 이미 사회에는 기성세대가 자리잡고 있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서 젊은세대에게 자신들의 뒤를 이으라고 한다. 어떻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세대갈등이라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젊은세대가 기성세대를 잇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의 성공사례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는가. 대다수가 그렇다면 굳이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 희소한, 뉴스 거리가 될 만한 일이어야 다룬다. 


이렇게 젊은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어려워졌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원하는 색깔에 맞춰야 한다. 자기 색깔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색깔.


그런 색깔이 무엇일까? 소설은 흰색이라고 한다. 제목이 표백이다. 하얗게 만드는 일... 하얗지 않는 존재를 인위적으로 하얗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다. 이 제목에 따르면 젊은세대는 결국 기성세대의 뜻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바꿔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진출하더라도 과연 제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그들 후대에게도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라고 할 수 있을까?


장강명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도 빠른 속도로 읽힌다. 그가 쓴 소설들은 망설임이 없다. 결론을 향해서 치닫기 때문에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어내게 된다. 그런 다음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왜 제목이 표백일까? 이미 표백된 세상에 나온 젊은세대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하고 있나?


소설에서는 세연을 중심으로 자살하는 청년들의 모습,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 자기 색깔을 잃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동화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려 죽음을 택하는 모습들...


읽으면서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각자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겠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색깔을 잃고 다른 색깔들과 합쳐질 수밖에 없다. 우린 빛과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회에서는 제 빛을 내지 못하고 결국 흰색으로 수렴되고 만다.


표백된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나를 잃어간다고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색의 삼원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색, 빛을 자연이라고 신이라고 하고, 색을 인위적,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신은 흰색이 되고, 이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나를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색의 삼원색을 합친다면, 이는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의 세계는 검정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세계가 암담한 세상이라는 뜻일까?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 신과 인간의 대비...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대비. 흑과백. 세상은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다. 이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신의 세계인 종교가 지배적인 사회는 흰색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다른 색깔을 용인하지 않는다. 빛도 삼원색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다 합쳐진 흰색만 인정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기성세대가 짜놓은 세계에서 더이상의 변화를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젊은세대가 만나는 일은 바로 이런 흰색의 세계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흰색의 세계에 대비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려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 때, 서로 다른 삶들을 인정해주고, 그 삶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삶이라고 여겼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려고 한다. 그런 다 다른 색들을 인간세상에서도 합치려고 한다. 그럴 대 나오는 색깔은 검정색이다. 죽음의 색이다.


젊은세대가 자살로 가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흰색의 세계도 거부하지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인지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가지고 있는 색들을 합쳐 죽음의 검정색을 만들어낸다.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하는듯이.


소설은 여기서 검정색이 젊은세대가 택할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서술자가 거리를 두고 자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은 각자의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들을 하나로 합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흰색도 검정색도, 자신을 잃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일이므로,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 함을, 그 삶이 비록 힘들고 비루하게 느껴지더라도 소중한 자신만의 색깔임을, 표백을 거부하고 또 검정이 되기를 거부하는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세대의 좌절을 보여주고 있지만, 거기서 머물러 기성세대에 편입되거나 또는 자신의 색깔을 잃고 검정이 되는 삶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렇게, 우리 삶은 자기들의 색깔을 잃지 말아야 함을, 결코 표백되지 않아야 하고, 또 남들과 합쳐져 검정이 되지도 말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재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픈 곳들을 건드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지금까지 읽었던 장강명의 소설은 그랬다. 남은 작품들도 찾아 읽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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