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먹을거리를 담는 밥그릇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밥그릇이 빛난다는 말을 시인이 하고 있다. 매일 닦아서 빛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바깥 부분의 빛남이 아니라 안쪽의 빛남이라면, 이는 밥그릇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하기만 하는, 텅텅 빈 밥그릇. 한번도 풍족하게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그런 밥그릇조차도 지키려고 아등바등댈 수밖에 없는 존재. 최종천 시집을 읽으며 밥그릇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풍족하지 않은 밥그릇조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그릇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한다. 내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존재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내 밥그릇이 비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주 조금밖에 주어지지 않는 밥그릇을 걷어찰 수도 있어야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투명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년. 32-33쪽.
노동자들의 소득을 유리지갑이라고 하기도 한다. 소득이 확연히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출 것이 없다. 사실, 얼마를 버는지 다 알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은 소득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시 제목이 '투명'이다.
없으니 투명할 수밖에... 이제는 누구라도 자신의 밥그릇이 이렇게 빛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밥그릇이 보장된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