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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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가 쓴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가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기억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내가 읽는 작품은 작품이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한때는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이 무엇이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소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애트우드의 추천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첫소설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작업실'이란 소설인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집이 아닌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여성의 말. 이 작품이 꽤 오래 전에 쓰였는데, 지금도 집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일기도 하고.


조금은 나아졌으려나? 이 소설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생각해 보자.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에서. 13쪽) 


하지만 작업실을 얻었다고 해도 집에서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 임대해 나간 작업실에서도 주인은 남자다. 여자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남자 주인은 여성 임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허락을 받는 일, 형식적인 허락이야 받지만, 언제든 마음대로 여성 임대인의 작업실을 드나들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여성 임대인이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태도가 돌변한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여성 임대인을 비난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된다.


결국 집이든 작업실이든,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겠지만 먼로의 소설 당시는 그렇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이 소설집에는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다. 그만큼 여성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란 소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그리 하지 않는다. 집안일에도 물론 어느 정도의 분리는 있지만, 계집아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을 막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성에 따른 일의 구분이 생기고, 행동에도 차이가 난다.


말을 도살하는 장면에서, 말이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동안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던 딸은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 문을 열어둔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순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닫히지 않고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면, 그동안 소심했던 남동생은 반대로 행동한다. 말을 도살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문을 닫지 않은 누나를 비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성차를 확인하게 한다.


"계집애일 뿐이니까."('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227쪽)


이 성차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이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살레스 선생님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꾸준히 살아간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딱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서술자는 딱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각박한 세상에 행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386쪽. 코뮈니케-문서에 의한 국가의 의사 표시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외교상의 공문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를 이른다.고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그런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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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3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표지가 좀 많이 화사해졌어요^^
전 구판으로~~좀 칙칙했죠
저도 이 책 보면서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저 녹색 원룸들 위 옥탑방 한칸 나만의 비밀장소로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매일 거기로 출근도장 찍는 상상이요. 거기서 책보고 화분키우고 점심 해먹고 내방아 잘 있어 이러면서 걸어서 집으로 퇴근하는 그런 상상이요. 상상하게 하는 힘이 삶을버티게 해주는 앨리스 먼로의 책이 었어요.

kinye91 2023-03-13 19:57   좋아요 1 | URL
꽤 오래된 소설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고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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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얼굴을 본 적은 있다. 안치환 시노래 콘서트에서. 그때 정호승이 나와서 시를 낭송했다.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데, 시도 좋지만 노래도 좋았다. 거기에 정호승이 직접 낭송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2007년이었다. 서강대에서 이루어졌던. 그렇게 정호승을 시로만이 아니라 노래로도 만났다. 그때 받았던 안치환의 사인. 여기에 정호승 시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와 산문이 하나가 된 책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정호승의 시가 먼저 한 편 나온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와 산문.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음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도 좋지만 시와 관련된 산문을 읽으면서 시인 정호승이 아닌,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정호승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가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한편 한편의 시와 산문이 다 좋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을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정호승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시인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를 통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산문을 통해서 짐작을 할 뿐인데, 이 책은 정호승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서 산문으로 풀어내주고 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 그렇게 정호승은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정호승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고, 또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보려는 자세가 나타나 있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삶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첫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온전한 삶만이 삶이 아니라 깨어진 삶도 삶임을,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삶이고, 그것이 온전한 삶임을. 꼭 온전한 삶을 찾으려 헤맬 필요가 없음을.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정호승의 시하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그렇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데 시와 산문을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곁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으면 좋을 책.


덧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윤동주에 관한 글이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는 글에서,, 류기천 씨의 말이라고 하는데...


"... 윤동주의 친어머님은 일찍 죽고, 그 후에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중풍을 일으켜..." (440쪽)


내가 알기론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해보니, 어머니 김룡(김용) 씨는 1948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용정에 있는 류기천 씨의 이 말에 대해서 책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윤동주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못 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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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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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다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는 만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좋겠지만, 이 다름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냥 다르다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퇴라는 말은 과학기술에는 없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 난관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하고, 식량위기가 닥치면 화학농법이라든지 또는 대체육과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식량 개발을 하고, 기후 위기에 봉착하면 또다른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속 발전되는 과학기술.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이 지금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대체육이라는 개념까지도 나오고, 스마트팜(스마트농장이라고 흙과 관계없이 농사를 짓는 기술)도 운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까? 역사를 보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유토피아란 명목으로 디스토피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경우를 보면서도 '다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그 다름을 용인해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세계니, 판단을 유보하고 한번 지켜보자고 해야 할까? 결과나 나타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텐데도.


이 소설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현생 인류가 너무 많다고,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 (완벽하게 조작된 유전자를 타고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갈등도 없는, 오로지 채식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런 존재들) 지구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별칭이 크레이크이고, 그가 만든 새로운 인류를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현생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유포한다. 급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류는 속절없이 죽어간다.


세상은 폐허가 된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크레이크의 친구. 그가 크레이커들과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진행이 된다.


온갖 유전자 조작들이 성행하고, 다양한 변종 동물들이 만들어졌지만, (소설에서는 이 동물들 이름을 늑개, 너구컹크, 돼지구리 등으로 부른다)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과, 그 집단에 끼치 못한 일명 평민층이 존재하는 세상. 


이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크레이크의 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류인 크레이커들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죽었으므로.


과학기술로 차별이 이루어진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마도 과학기술은 그것을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차별할 것이다. 또다른 차별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사회를 없애겠다고 현 인류를 모두 죽게 만드는 방식 또한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르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역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찬동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이런 과학기술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위 평민층들은 이유도 모른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다름'이 인정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최근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세계를 팬데믹이 빠뜨린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해서 인류를 위험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체육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종을 파괴한 인류의 기호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종들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크레이크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현생 인류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인류에는 지도자도 신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들 역시 우리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하게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은 과하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다름'이라고 다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과학기술은 과정과 예측 결과까지도 공유되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이끌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아담'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부다. 1부부터 애트우드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권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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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는 '갓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봤더니, 신의 뜻하는 '갓'과 인생을 뜻하는 '생'이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신의 인생?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이 갓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좋은 삶, 또는 최선을 다하는 삶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 우리는 두 번 살 수가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기에 지금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충실하게. 그렇다면 갓생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하게 산다는 뜻이리라.


어떤 삶이 충만한 삶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이 만족하는 삶. 또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삶을 살면 된다. 물론 여기에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이 갓생이 되기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처럼 살려고 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 갓생일 수 있다.


이번 호에 갓생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 글이 실려 있는데, 꼭 그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충만하게 살라는 뜻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떨 때는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도 있다.


그런 희망이 바로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도록 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나를 부추기는 것.


험한 산을 오를 때 멀리 보기보다는 바로 발 앞을 보면서 한발 한발 내디디면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현재를 사는 삶이 바로 '갓생'이 아닐까 한다. 


이제 봄이다. 그렇게 나도 갓생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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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09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갓생!
입력!
 
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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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봤다. 정말 재미있게. 


앤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실수투성이인 그 행동들이, 상상에 빠져 다른 것들을 잊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나 할까?


어쩌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앤이 대신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앤의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들을 찾곤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소설로 읽었다. 번역을 다시 했을테지만, 이 책의 특징은 만화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화의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과거를 되살려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가령 마릴라 같은 경우는 마른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에는 '마릴라는 큰 키에 몸에 굴곡이라고는 없이 꽤 마른 편이었다'(20쪽)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마릴라를 마른 몸에 큰 키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뚱뚱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마 만화를 보지 않았다면 마릴라를 성마른 사람으로 상상하면서 읽었을테다. 하지만 만화가 먼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이 번역된 소설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떠올리면서 읽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과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만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앤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웃고 울고 하게 된다. 그만큼 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앤과 같이 지낸 매슈와 마릴라는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 흑백의 삶에 앤이 들어옴으로써 화려한 칼라로 바뀐다. 한꺼번에 바뀔 일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된다. 앤으로 인해서 자기 의사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게 된 매슈, 그리고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앤에게 유행을 따르는 옷을 만들어주는 마릴라.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마릴라는 자신의 감정을 앤에게 표현한다. 무뚝뚝한 마릴라가 변한 것이다. 린드 부인이 마릴라가 부드러워졌다고 할 만큼. 그리고 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앤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린 시절의 감수성, 상상력은 권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쩌면 우리 교육은 앤보다는 다이애나를 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 하지만 다이애나처럼만 살면 변화와 성장은 없다.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주어진 길만을 갈 뿐이다. 다른 길을 볼 생각도 없이. 과연 미래 세대에게 그런 길로만 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앤처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주어진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앤과 같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감수성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앤은 성장해 가고, 그런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즐겁게, 재미있게,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러다 문득, 앤의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나이로 16세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고 하니, 우리 나이로 치면 겨우 17세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는 하나, 11살에서 16살까지 앤이라는 고아가 겪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일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싶은 그런 나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어린 시절에 붙박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여기는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앤처럼 실수하고, 그 실수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앤처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테니. 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앤과 같이 감수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절을 거쳤을 테니.


그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 어른이 되어 앤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속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마릴라가 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옷들을 앤에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게 어른들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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