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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양장) ㅣ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봤다. 정말 재미있게.
앤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실수투성이인 그 행동들이, 상상에 빠져 다른 것들을 잊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나 할까?
어쩌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앤이 대신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앤의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들을 찾곤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소설로 읽었다. 번역을 다시 했을테지만, 이 책의 특징은 만화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화의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과거를 되살려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가령 마릴라 같은 경우는 마른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에는 '마릴라는 큰 키에 몸에 굴곡이라고는 없이 꽤 마른 편이었다'(20쪽)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마릴라를 마른 몸에 큰 키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뚱뚱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마 만화를 보지 않았다면 마릴라를 성마른 사람으로 상상하면서 읽었을테다. 하지만 만화가 먼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이 번역된 소설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떠올리면서 읽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과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만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앤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웃고 울고 하게 된다. 그만큼 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앤과 같이 지낸 매슈와 마릴라는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 흑백의 삶에 앤이 들어옴으로써 화려한 칼라로 바뀐다. 한꺼번에 바뀔 일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된다. 앤으로 인해서 자기 의사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게 된 매슈, 그리고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앤에게 유행을 따르는 옷을 만들어주는 마릴라.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마릴라는 자신의 감정을 앤에게 표현한다. 무뚝뚝한 마릴라가 변한 것이다. 린드 부인이 마릴라가 부드러워졌다고 할 만큼. 그리고 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앤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린 시절의 감수성, 상상력은 권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쩌면 우리 교육은 앤보다는 다이애나를 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 하지만 다이애나처럼만 살면 변화와 성장은 없다.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주어진 길만을 갈 뿐이다. 다른 길을 볼 생각도 없이. 과연 미래 세대에게 그런 길로만 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앤처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주어진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앤과 같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감수성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앤은 성장해 가고, 그런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즐겁게, 재미있게,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러다 문득, 앤의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나이로 16세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고 하니, 우리 나이로 치면 겨우 17세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는 하나, 11살에서 16살까지 앤이라는 고아가 겪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일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싶은 그런 나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어린 시절에 붙박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여기는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앤처럼 실수하고, 그 실수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앤처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테니. 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앤과 같이 감수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절을 거쳤을 테니.
그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 어른이 되어 앤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속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마릴라가 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옷들을 앤에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게 어른들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