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리커버 에디션)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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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 참 좋은 말이다. 누구에게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공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다. 우리는 공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공정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공정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공정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그 공정을 실현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기회의 공정이다. 누구에게도 기회를 박탈하지 않고 동등하게 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공정하다고 한다. 기회의 공정을 넘어서, 결과의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의 공정은 너무도 다양한 해석을 나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단지 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물의 평등도 추구해야 한다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자. 결과물을 평등하게 공유한다? 이것이 공정인가?


아니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에 결과물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논쟁이 시작된다.


기회의 공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시대는 신분에 따라, 인종에 따라, 또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기회가 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과는? 기회가 공정하다면 결과는 불공정해도 좋다. 아니 이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자신이 한 행위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 여기에 기계적인 평등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은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회가 공정하니, 결과가 다르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말은 자명하게 들린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샌델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결코 기회의 공정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기회조차도 공정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는데, 능력주의가 이를 가리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명문대 입학률이다. 대부분 부유층이거나 기득권층의 자녀들이 입학을 많이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미국의 입학시험인 SAT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아주 공정하게 동일한 시험을 봐서, 자신이 얻은 결과로 대학에 진학하게 하는 일. 얼마나 공정한가?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다.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는가? 학생들의 처지에 따라서 시험을 보기 전에 주어진 기회가 같을까?


다르다. 다르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누군가는 고액 과외나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로지 학교 수업으로만 시험을 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과연 기회의 공정인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같은 기회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미 출발선에 서기 전에 다른 경험을 했다. 다른 능력치를 부여받았다. 출발선이 같다면 결코 결과가 같아질 수 없다. 그럼에도 공정하다고, 다른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승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패자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즉, 능력주의가 만연하면 사회는 공동체를 이루기가 힘들다. 누군가에는 깊은 패배감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샌델이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폐해다. 경제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결과물도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패배감만 심어줄 뿐이다.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자신은 실패자일 뿐이라는 생각. 이것이 능력주의가 보여주는 문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정을 능력주의와 연결짓는다.


능력에도 우연이 많이 작동함을, 따라서 자신의 결과물을 나눌 수도 있어야 함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처음부터 분석은 명쾌하다. 왜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지, 미국이라는 나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별로 없다. 샌델 역시 일반적인 이야기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쉬운 답은 없기에... 거꾸로 말하면 답은 너무도 쉬운데,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샌델의 주장은 이렇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353쪽)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삶의 결과물은 어쩌면 운칠기삼(運七技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상들이 자주 말하던 '운칠기삼' 이 말을 명심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과물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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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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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불펜의 시간'이라니. 불펜은 마운드가 아닌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곳 아닌가. 어떤 선수는 불펜 투수라는 이름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도 하는데...


불펜은 그래서 밝음과 어둠으로 굳이 나눈다면, 어둠 쪽에 가깝다. 물론 프로야구에서 불펜 투수를 한다는 사실은 프로가 되지 못한 다른 선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남에게 주목받지 않는 삶. 그런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불펜을 마운드에 오르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를 불펜이라고 한다면, 불펜의 시간은 노력과 기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화려한 마운드의 삶을 보여주지 않고, 불펜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마운드에 서려고 하지만 설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마운드에 선 사람들도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불펜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불펜의 도움으로 자신들이 더 빛날 수 있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이 불펜의 고충을 알까? 불펜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까? 어쩌면 불펜은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설 수밖에 없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설에서 말하는 불펜의 시간은 그래서 마운드에 서기 위해 준비하는 미래의 영광을 대비하는 노력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한다.


본래는 밀려난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혁오를 통해서 불펜의 삶이 타의에 의해서 밀려난 삶, 능력이 부족해서 밀려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까지 최고의 투수였던 혁오는 진호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왜 소수의 선수만 프로가 되는 거야?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거야? 왜 굳이 연장 게임을 해서까지 승패를 가리려는 거야? 연봉과 성적은 왜 다 공개하는 거야? 왜 모두 승자가 될 수 없는 거야?' (157쪽)


'그래서 혁오는 결단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의 야구를 하기로.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를 하기로. 어제까지의 세계, 프로야구 역사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가장 꿈꾸었던 기록과의 대결과 포기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리그를 개설하기로.' (158쪽)


프로라는 세계는 경쟁의 세계, 야구가 기록과의 싸움도 되지만, 다른 선수와의 경쟁도 치열하다는 사실. 그런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야구계에서 은퇴해야 한다는 사실. 소수만이 프로가 되는 비정한 현실을 깨달은 혁오는, 자신만의 경기를 하기로 한다.


승부와 관계가 없는,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하는 야구. 그는 중간 계투로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간다. 불펜 투수인 것. 불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데, 이를 자신의 의지로 해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비난해도 그는 밀려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독립리그에서 프로선수가 되기를 꿈꾸지 않고 야구를 하는 혁오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런 혁오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 경쟁, 남보다 앞서 가겠다고 아등바등 특종에 혈안이 되어 있던 기현이라는 기자. 그 역시 신문사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그렇다. 꼭 남에게 잘 보이면서, 굽신거리면서 사회 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기현도 신문사에서는 '불펜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편집장과의 갈등으로,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으로부터, 기현은 불펜이 아니라 퇴출이 될 위기에 처한다. 물론 퇴출이 아니라 퇴사다. 스스로 나온다.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남 눈치를 보면서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현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지내는 새롬이 한 말, '작아도 단단한 것,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것.' (238쪽)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주인공 준삼에게도 '불펜의 시간'이 다가온다. 혁오는 야구장에서, 기현은 신문사에서, 준삼은 대기업에서 '불펜'으로 내쳐진다.


견뎌내지 못한 준삼에게 혁오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모습은 그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준삼의 마음에 찾아왔다.' (  251쪽)


이렇게 소설은 불펜의 시간을 보내던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낸다는 희망으로 끝난다. 희망이다. 절망에 겨워 '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만 내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것을 펼쳐보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그렇게 되기 위해 '불펜의 시간'을 거쳤을 그들을 소설은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세 사람이 야구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아니 혁오를 통해 준삼과 기현이 마운드의 삶이 아니라 불펜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은 어느 새 끝나 있다. 그리고 '불펜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모처럼 마음이 청량해지는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연꽃'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무더위에 그다지 깨끗한 물이라고 할 수 없는 연못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혁오의 삶이 바로 연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엉킨 마음이 풀리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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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폭식 사회 : 기술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가?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2023년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우수과학도서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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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공지능에 환호하고 있을 때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이나 인공지능이나 또는 메타버스나 다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진보라고 보고, 이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다른 나라보다도 더 빨리, 더 강하게 디지털화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학교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학습을 시켜야 하며, 칠판은 전자칠판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과서는 디지털 교과서가 되어야 하며,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하나씩 보급해야 한다.


대면으로, 서로 몸을 부딪히며 경험해가는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하던 장면에서 이제는 중간에 디지털 기기가 끼어들어 교사는 디지털 기기를 작동시키고(또는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를 작동하며), 학생들은 그 기기를 통해 배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미래 교육의 모습이다. 과연 좋을지?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졌음에도, 학교라는 공간에 나오더라도 학습은 디지털 기기와 하는 비대면 교육이 강조되고 있으니, 가히 디지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학교가 이런 정도에 이르르면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는 더욱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교육은 어떤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을 우선시 하는 태도는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인수공통감염병조차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는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런 사회를 '디지털 폭식 사회' 또는 '기술 폭식 사회'라 부르고 있다.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기술 폭식 사회는 이렇다.


'기술 폭식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사회가 기술에 매달리고, 기술 그 자체를 사회문제의 직접적 해결책으로 보고, 자본주의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성찰의 여유가 적을 때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다.' (205-206쪽)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신들의 생활 형태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 또 그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추진한다.


이런 사회에서 기술을 통제하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좋아요' 아닌가. 팔로워 숫자와 좋아요 숫자로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빠르고 쉽게 유통시키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몇 해 동안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술 권력의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도덕성, 개인의 책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기술 권력의 문제는 곧 기술을 오남용하는 사회에 대한 급진 정치적 개입이나 기술 실험과 연결되어야 문제의 해결 지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인의 데이터 역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에 대한 개인 성찰 능력에 더해, 묵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의 도시설계 속 배합과 앙상블, 거의 모든 연령과 세대에 두루 친숙한 기술의 보편적 접근과 사회 공통의 보편적 '기술 감각' 마련,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 도입 시 시민 숙의 과정의 정례화, 풀뿌리 대안 생태 기술의 장려 등 기술 대안의 상상력을 동시다발적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236쪽)


이런 주장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에 대해 과연 시민 숙의 과정을 거친 적이 있었던가?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다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더욱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여기서 잠시 멈추고 디지털 사회가 초래할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주장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소수에게서 나오고 있지만,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 지지자를 획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술 권력을 쥔 자들이 이런 주장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은 쉽게 퍼뜨리지만 반대하는 주장은 묻어두는, 그

런 행태. 이것이 바로 기술 권력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지금. 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가 겪었던 큰일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겪었던 감염병이나 기후 재앙보다 더 심한 일들을 겪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모두가 우 몰려 가는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한다.


특히 이런 기술 개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더욱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그리고 디지털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저자는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기술 개발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에서만은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연-사회 생태계에 걸쳐,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의 문제를 전면화한 채 인공-자연, 생명-기계, 가상-실제, 물질-비물질 사이의 기술 배합 비율을 적정 수준에서 조절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곳곳에 만연한 기술 독성을 치유할 자율 능력을 우리 스스로 익히는 길이기도 하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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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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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건축물이다.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건축들. 그렇지만 아직 나는 한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건축들.


유현준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또는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축물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 건축물이 왜 대단한지를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어서, 글을 읽다보면 그 건축물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 건축물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친절하게도 시대 순으로 건축물을 소개하지 않고, 공간 순으로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어서 나중에 그 지역을 여행하게 되면 건축물을 찾아보기 편하도록 소개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시작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한 '빌라 사보아'로 시작한다. 건축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인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그는 현대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가 건축한 빌라 사보아 역시 현대 건축에 영향을 준 건축물이고.


그러니 빌라 사보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 책의 구성상 옳다고 볼 수 있다. 빌라 사보아로부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공간은 유럽부터 시작하게 된다.


근대 건축과 더불어 고대, 중세에도 유럽에는 다양한 건축물이 있어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런 과거를 더욱 풍성한 미래로 만들어낸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은 무조건 칭찬만 하지 않는다. 빌라 사보아가 현대 건축을 이끈 선구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당시 재료나 기술의 한계가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방향, 지표를 제시했다는 데서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고 한다. 가장 현대적인 건축을 표방했던 르 코르뷔지에가 나중에는 '롱샹 성당'같이 다른 방향의 건축을 했고, 그 건축 또한 위대한 건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유럽의 건축에서 북아메리카로 넘어갔다가 아시아로 끝내고 있다. 아시아에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건축물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한계를 넘어선 건축과 또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 등 다양한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따르고 싶은 건축,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해비타트 67'이라는 건축물이다.


아파트라고 다 똑같은 아파트가 아닌 그런 건축. 지금 우리나라도 같은 아파트에도 내부 구조가 다른 아파트들이 많이 생기고는 있지만, 이 건축은 내부구조만이 아니다. 외부도 다르다. 즉 지금 우리나라 아파트가 지니고 있는 '베란다(발코니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정원과 같이 사용하는 그런 건축은 아직 없다.


'해비타트 67'은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건물들을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는, 다른 층의 지붕을 정원으로 쓸 수 있게끔 설계한 그러한 건축이다. 그러니 아파트 생활을 하지만 자연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건축인 것이다.


이런 건축은 우리에게 아파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세상에 이런 아파트가 1967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냥 상자같은 아파트만 짓고 있지 않았나.


정책입안자들이 반성해야 하지 않나? 어디서 봐도 비슷한 아파트들만 난무하는 나라에서 무슨 다양성, 창의성이 길러지겠는가? 또 자연을 차단하고 기껏해야 옥상에 흙을 가져다 놓고 식물을 심고 있으니, 유현준이 소개한 이 건축물을 생각해 봐야 한다.


아시아에서 주목할 만한 건물은 바로 홍콩에 지어졌다는 'HSBC 빌딩'이다.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1층을 비워야 하는 제약을 건축공법으로 극복한 건축물. 이렇게 지어진 이 건물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가사도우미들이 일요일에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하니, 대도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렇듯 다양한 건축이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하나 들어보면 왜 그 건축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지 알게 된다. 한번쯤은 직접 그 건축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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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가을호 - 통권 1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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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을 읽다. 길을 잃은 시대에 길찾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는 녹색평론에 응원을 보낸다.


후쿠시마 오염수...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처리수라고 하자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흘러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제 나라니까, 자기들 이익이 걸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익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쌓여갈 뿐인 우리나라에서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기는커녕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으니...


무엇이 과학인지 정말 알고 떠드는지 궁금하다. 원자력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쓰고, 핵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집단에서, 인체에 해롭지 않은 피폭량이 있다고 하는 말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몸에 들어온 방사능물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나? 아주 작은 양은 몸이 견뎌낼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이 과연 과학적인가?


진정 과학적이라면 아주 적은 양이라도 인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검증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주어진 자료만 보고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핵 오염수부터 시작하여 기후재앙, 그리고 정치의 후퇴 등을 다루고 있는데, 진정 민주주의라면 과학이라는 이름을 오용하면서까지 국민들 정서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너무도 후퇴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국한시킨 결과이기도 하겠고.


문제는 경제야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당연히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적인 사람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4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늘 함께 할 수 있는 민주주의, 남에게 자신의 권리를 맡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또한 국회의원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제대로 하지 않는 선거법 개정, 예전에 이루어졌으리라.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형식마저도 하나하나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 후퇴는 삶의 퇴보를 부른다. 아니 퇴보가 아니라 위기다. 재앙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재난을 보라. 이는 정치의 퇴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향을 잃은 정치인데, 견제를 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공론을 모으는 일을 하지도 않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지금 정치의 모습, 또는 경제 성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이제석 광고가 떠올랐다.


앞으로, 적에게 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총구는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광고..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6-157쪽.>


이것이다. 성장을 외치는 지금의 모습은 이렇게 앞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성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성장, 성장 하고 있을텐가? 지금의 삶을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후재앙을 벗어난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 성장이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 광고처럼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8-159쪽.>


그러니 우리는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녹색평론 이번 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자급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공업이 아니라 농업을, 그것도 소농 중심의 농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큰집단보다는 작은집단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곳에서 생활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다. 계속해서.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바위가 언젠가는 뚫리고 깨진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녹색평론을 꾸준히 외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한편 한편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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