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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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부음을 들었다. 돌아가셨다고. 그가 쓴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의 형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 남아 있었는데, 지금 기대수명으로 따지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서경식. 내게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기억하게 한 사람.


그가 오래 전에 낸 책이다.


화가와 작품과 역사가 나오는 그런 책.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는데, 예술 속에 작가의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에 예술가의 생물학적인 삶은 짧겠지만, 그의 예술적 삶은 길다.


서경식과 같은 작가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글들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말했듯이 삶은 곧 기억이다. 기억이 계속되는 한 삶은 지속된다.


이 책에는 많은 작가들이 나와 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서양 사람들이 '벨 에포크'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기도 했지만, 주로 전쟁으로 점철된 시기다.


아름다운 시절 역시 무언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민감성이 작품 속에 시대가 녹아들게 한다.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시대를 녹여낸 작품들도 있지만, 시대에 편승한 작품들도 있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군국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그린 작가도 언급한다.


왜냐? 그런 작가를 기억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작은 제목이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지만 아닌 화가가 한둘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악몽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악몽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니, 다룰 만하기는 하다.


이제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우리 곁에 남아 있으니... 그의 글 중에서 지금 우리가 새겨야 할 말을 인용한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역사의 천사라고 설명하는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클레의 이 그림을 발터 벤야민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의 일이다.



'벤야민이 죽은 뒤, 인류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벤야민이 예감했을 뿐 실제로 목격하지 못한 이 사건을 '역사의 천사'는 목격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새로운 피해자를 낳는 암울한 변증법까지 목격했다. 진보라는 강풍에 날리는 천사의 눈에 지금은 어떤 폐허의 풍경이 비치고 있을까' (106쪽)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역사의 천사들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늦게나마 서경식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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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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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인데 제목이 '유년기의 끝'이다. 유년기라고 하면 어린 시절 아닌가. 그런 유년기의 끝이라면 성장이 되는 시기인 청소년기를 말해야 하는데, 청소년기는 어른에게서 독립해서 나아가려는 시기로 정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유년기란 무엇인가? 행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시기.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유년기의 끝은 인류에게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때가 왔다는 말인데...


그런 시기에 닥친 인류는 행복할까?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 중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에 사람은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그런 시기를 거치는 인간은 개인이다. 다들 이런 시기를 보편적으로 거치지만 경험은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즉 잘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청소년기부터는 자아라는 개인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즉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소설은 반대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보편적인 인간처럼 개성을 잃어가면서 행복하게 살던 시대가 중간에 나온다.1부가 '지구와 오버로드'이고 2부가 '황금시대', 3부가 '최후의 세대'다.


지구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그들은 인류에 개입한다. 즉 전쟁을 없애고, 지구연합을 결성하게 한다. 선의를 지닌 독재자가 된다. 그들을 인류는 오버로드라고 부른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연합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좋겠지만, 개별성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인간의 자율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국경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폐해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버로드의 뜻대로 지구연합을 결성한다.


그것이 1부다. 지구엔 이제 전쟁은 없다. 살육도 없다. 굶주림도 없다. 그야말로 황금시대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일하고 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이런 황금시대에도 그런 행복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스스로 찾아낸 행복이 아니다. 오버로드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다. 이런 결과에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자율 공동체를 결성해 살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2부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여기에 오버로드들과 교류하는 인간도 나오고, 도대체 오버로드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몰래 오버로드의 별로 가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3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은 기존 어른들과 다르게 성장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변해간다. 즉 의식의 공유라고 해야 하나. 개별적인 몸이 그들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가족이란 개념도 이제는 사라져야 할 시기다. 유년기의 끝이다.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에게는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시기라면, 이 소설에서 유년기의 끝은 개별자로 존재했던 인류가 보편적 인간이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제 개인 인간은 없다. 의식을 공유하는 보편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지구는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2부에서 오버로드들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행성까지 갔다 온 잰이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서술한다.


이렇게 소설은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지구의 시간으로 하면 100년이 넘는 시간. 그 과정에서 인류가 살았던 지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인류는 우주에서 계속 살아간다. 오버로드를 통제하고 있는 존재를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 정신을 다른 우주로부터도 계속 충원하고 있는 존재를 부르는 말이다.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인데, 이것을 디스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외계인에 의해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지구가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행복은 외부에서 올 수가 없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다면, 또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들의 운명에 개입하지도 못하고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인류보다 고도로 발전한 지성체인 오버로드들도 오버마인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오버마인드가 왜 인류를 새롭게 개조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불확실만이 현실인 세상이다. 


아마도 1950년대 역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작가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여기서 길을 잃으면 인류의 종말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소설에서처럼 우주 개발을 오버로드들에 의해 하지 못하게 되었던 인류가 아니라 다시 달을 기지로 활용하고자 달에 가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달을 기반으로 삼아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문명이 있을 수 있지만, 발전된 문명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비록 느릴지라도 서서히 탐구해나가는 것이 인류의 본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처럼 외계 생명체에 의한 행복이 과연 황금시대라 될 수 있을지 그런 오버로드들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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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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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시집이다.


카프카가 시를 썼다고?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카프카 작품이 있단 말인가?


호기심. 그가 쓴 소설들이 결코 단순하지 않기에, 시도 역시 살아 있을 적에는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을테니, 곳곳에 남겨진 그의 글들 속에 시라고 포함되어 있었을 듯.


그런 작품을 찾아 하나로 묶어 책으로 내었으니, 다시 카프카다.


어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작가. 이 시집에는 카프카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런 그림을 보는 재미도 있고.


왼쪽에는 독일어 원문이 있고 (카프카는 현재로 말하면 체코 작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체코 작가 하면 떠오르는 세 사람. 한 사람은 카렐 차페크 - 그는 체코어로 작품을 썼고,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했고, 밀란 쿤데라는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오른쪽에 한글로 번역된 작품이 있다.


원문 시와 번역된 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장점이다. 독일어를 몰라서 독일어로 해석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문이 있는 시집이 좋다.


그냥 읽는다. 무슨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기억해 놓으면 된다. 그래서 몇 작품 적어 놓는다. 내 마음에 든 작품들.


지금 시대와도 연결이 되기도 하는 시들이니.


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69쪽)


51

사랑은,

당신이 내게

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 칼로

내 마음을 들쑤신다. (77-79쪽)


68

가시나무 덤불은

옛날부터 길을 막아 왔다.

네가 계속 나아가려면,

가시나무 덤불은 불태워져야 한다 (123쪽)


69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123쪽)


92

진실의 길은

공중 높이 매달려 있는 밧줄이 아니라,

땅바닥 바로 위에

낮게 매달린

밧줄 위에 있다.

그것은 걸어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161쪽)


92라고 붙은 시. 진실을 알았을 때 그 진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걸려 넘어져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진실의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하기 위해서는 68라고 붙은 시처럼 가시나무 덤불을 불태워야 한다. 


대낮에 별이 보이지 않겠지만 가시나무 덤불은 보이니, 69라고 붙은 시에서 말하듯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51시처럼 내 마음을 들쑤시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한다. 43시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지만, 그 망설임 속에서도 우리는 가야 한다. 우리는 길 위에 있으므로.


가끔 책을 펼쳐 아무 부분이나 읽고 생각에 잠기고 싶어지는 그런 시집이다. 여전히 카프카는 매력적임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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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4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1번 시詩가 내 무릎을 치게 합니다. 대학시절, 날 버린 여인은 내 마음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거든요, 결국 그게 나의 욕심임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kinye91 2024-03-24 06:40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이 극복한 경험을 카프카의 시가 떠올리게 하고. 호시우행 님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지 않았나 싶네요. 이런 시를 만나면 저는 좋더라고요.

호시우행 2024-03-24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명시라고 평가받지요.

그레이스 2024-03-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카프카의 시집이네요!

kinye91 2024-03-25 20:54   좋아요 1 | URL
네. 카프카 시를 모아놓았더라고요. 카프카 시집이라니 생소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맨홀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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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합*체]는 경쾌하다. 키 작은 아이들의 키 크는 프로젝트로 봐도 좋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으니, 청소년들에게 부담 없이 읽으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 [맨홀]은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쉽게 읽으라고 권하기 힘들다. 경쾌함, 발랄함과는 거리가 먼 질척거리면서 계속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고,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고, 이런 인물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성찰의 힘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야 한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 점을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알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사는 엄마, 여기에 함께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죽도록 아빠를 증오하게 되는 남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가 죽는다. 소방관이던 아빠는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는다. 우습다. 다른 사람을 구하는 직업을 지닌 아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빠가 가족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표상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표상이 된다. 그런 아빠가 죽었다. 구원이다. 구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빠는 죽어서 영웅 소리를 듣는데, 이제 가정을 폭력으로 휘감던 폭력이 사라졌는데, 평화가 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폭력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구멍만 파 놓은 상태. 엄마는 계속 무력한 상태고, 누나는 집을 나가 자신만의 생활을 한 상태.


어린 시절 누나는 이를 연극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연기를 한다고 했다. 그 상황을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모습이지만, 이것은 극복이 아니라 봉합이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그냥 상황을 넘기는 모습. 그러니 기회가 되자 연극을 한다는 명목으로 집을 나간다. 탈출이다. 극복이 아니라 탈출.


그래도 누나는 남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 누나는 자신의 가슴에 뚫린 맨홀에 뚜껑을 닫아버렸다. 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메워버렸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연극을 통해서 즉 누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객관화 할 수 있는 힘을 서서히 얻었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어렸을 때 아빠에게 반항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아빠로 인해 마음에 구멍이 생겼지만, 누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구멍을 메우고 뚜껑을 닫아버릴 수 있었다.


그런 힘을 연극이 주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제 삶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빠에게 한번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또한 주인공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늘 어정쩡한 자세로, 이도 저도 아닌 자리에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주인공의 마음에는 큰 맨홀이 생겼다. 결코 메울 수 없는, 뚜껑으로 덮어버릴 수도 없는. 주인공은 사람의 몸에 구멍이 몇 개냐고 질문하지만, 이는 물리적인 구멍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구멍 외에도 마음에 뚫린 구멍, 결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구멍은 메울 수 있다. 그 구멍을 제대로 응시한다면. 그건 제 삶을 성찰하고 실천했을 때 간능해진다. 그래야 하는데 주인공은 결심은 하지만 실행은 못한다.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늘 끌려다닌다. 남에게도 그렇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구멍으로 늘 빨려들어간다.


그 결과가 뜻하지 않는 살인이다. 의지로 행한 살인이라면 나았으려나? 아니다. 살인으로 가는 길은 이미 자신의 구멍에 침식당한 경우다. 주인공은 스쿠터의 맨 뒷자리에 간당간당 앉아가면서도 손을 놓고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도 단 한번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실행할 의지가 없다. 아니 의지가 맨홀에 갇혀버렸다. 그 맨홀 뚜껑을 스스로 열고 스스로 닫고,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냥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자신이 이유 없는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맞서는 경험을 한번이라도 했어야 하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가 연극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주인공이 살인까지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에 시달리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다. 그나마 누나에게 마음을 여는 주인공은 어린시절 누나와 함께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 의지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 폭력에 맞서는 방식으로 또는 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감싸고 위로해주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가정폭력을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누나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해결을 한다. 그렇게 남아 있는 주인공에게는 그 상황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구멍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길밖에는 남는 방법이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돌게 되는, 겉으로는 성실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구멍은 철저히 뚜껑으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을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매번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르게 살리라고 결심하지만 막상 현실에 닥쳐서는 예전과 같은, 그것도 자신이 미워했던 아빠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엄마가 아들이 무섭다고 하는 말에는 바로 이런 진실이 담겨 있다. 가장 큰 폭력이 사라졌지만 그 가족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자신들이 폭력에 맞서지 않을 때 폭력은 재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끝까지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해야 마음 속 구멍을 메울 수 있을까? 그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구멍을 어떻게 발견해낼 수 있을까?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구멍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폭력이 얼마나 많은 마음에 구멍을 내는지, 그 구멍들이 메워지지 않고 구멍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우리는 그런 보이지 않는 구멍을 찾아 메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참 힘든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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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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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적 지식이 많이 필요한 소설. 그냥 재미로 읽어도 되지만 과학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 이 소설의 개연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하고 조직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일한 존재일 수가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이 소설에서는 수축과 확산이 나온다. 수축은 우리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면 확산은 자신을 널리 분산시키는 가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났는데, 수축은 실제 인간, 즉 가상 세계에 접속하지 않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확산은 가상 세계에 접속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확산된 상태에서 인간은 어느 곳에든 갈 수가 있는데, 그런 확산 상태가 수축이 되면 실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수축이 될 때 누가 실제 인간이냐는 문제는 남는다. 즉 확산된 존재인 '나'는 수많은'나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들' 중에 살아남은 '나'가 수축된 나이고, 이런 나가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확산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수없이 확산시킨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수축시킨다는 의미가 될까?


함께 확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를 둘러싼 버블이 우주로부터 지구를 가려버렸다. 제목이 '쿼런틴(Quarantine)'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는 격리되었다. 왜? 인간들이 지나치게 확산해서 우주의 생명체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인간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기도 한다. 수축된 인간, 자각이 돌아온, 지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인간은 많은 확산된 인간들의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인 것이다.' (343쪽)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들' 중에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나'를 제외하고 많은 부분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져버리게 되니, 이를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과연 인간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을까 궁금했다. 하나의 세포가 바로 '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세포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고 있으니... 또한 우리 몸에서 수많은 세포들이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고 하니, 이 소설에서 아주 빠른 시간 동안에도 많은 '나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우리 몸 세포들이 죽어가는 과정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축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일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을 지워버린 현재의 나라는 생각. 현재의 나는 미래를 알 수가 없고, 현재도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경험하고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축된 인간은 현재의 인간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동안 많은 부분들을 묻어버리게 되니, 이는 다른 죽음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버블이 필요할까? 인간을 격리하는 버블을 왜 설정했을까? 인간의 확산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버블을 누가 설치했을까?


소설은 버블이 설치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닉의 관점으로 진행이 된다. 닉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과정에서 수축과 확산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버블을 누가, 왜 설치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버블이 인류에게 필요할까? 소설은 버블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는데, 그것은 인류의 무한정한 확산이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격리는 필요하다. 이때 격리를 가둬둠으로 해석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 둠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인류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사라지는 생명들도 있음을, 그렇다고 무조건 격리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인류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생명들의 죽음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거리,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말하는 '쿼런틴(버블로 상징되는)'이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읽었고, 이렇게 양자역학이나 또다른 과학 지식에 무지해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읽기를 멈추려는 생각도 했는데,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자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니,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워졌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나들'이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우주는 단일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도 생각하면서, 또 엉뚱하게도 [장자]의 '호업몽(胡蝶夢)'도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말이 뭔데? 하면서 읽었다.


아마도 이 소설을 곱씹으면서 읽으면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많은 '나들'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 이런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 많은 '나들'이 사라져야 했음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나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혼란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당한 수축, 즉 격리가 있어야 한다고, '나'를 많은 '나들'로부터 수축해서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나들'을 다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이 '나들'이 '나' 속에 융합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으니...


다만 지나친 확장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생명체에게도 좋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덧글


소설을 읽으면서 '아바타'도 생각났고, 홀로그램도, 또 서유기의 손오공도 생각이 났으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을까, 이 공간과 시간은 유일무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공간과 시간이 다양하게 이곳에 중첩되어 있는가 등등...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모르겠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소설로 읽을 수밖에.


궁금해서 인간의 몸에 세포가 몇 개나 있을까 찾아봤더니, 인터넷의 특성에 걸맞게 많은 수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30조에서 60조까지 벌어지니... 실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세포 수마저도 잘 모르니, 인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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