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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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였다. 장르소설이라는 말을 거부했던 사람. 세상을 남성과 여성 또는 다른 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던 사람. 작가라는 소명 의식을 지니고, 세상을 작품 속에 끌어왔으며, 작품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보게 한 사람.


시도 썼다고 하는데,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만, 시와 소설은 분명 다르니, 르 귄이 소설에서 했던 작업과 시에서 했던 작업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을테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논픽션 글들도 썼으니,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글쓰기로 세상에 참여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읽은 작품들이 많다. 수필집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책은 르 귄의 마지막 글이라고 보면 된다. 글이라기보다는 말이라고 해야겠지. 글로 적힌 말들. 


데이비드 네이먼이라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르 귄이 대답을 한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말년의 르 귄을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르 귄의 작품을 읽었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소설, 수필집을 읽었다면 그간 르 귄이 한 말들이 정리되어 있단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르 귄의 생각을, 르 귄의 작품을 생각할 기회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르 귄은 글에는 리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글은 말을 문자로 나타내지만, 문자로도 충분히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 낭독의 중요성. 그렇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소설이든 시든 리듬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 말.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예전에 학교 교육에서는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학생들 앞에서 낭송하게 하는 활동. 그래서 글이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입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런 소리내어 읽기의 중요성.


읽기는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활동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도 낭송을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르 귄도 비판하고 있지만, 낭송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읽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시간이 주는 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국어에서도 읽기가 축소되어 있다고 한다.


시나 소설의 분량이 줄어들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이제는 구닥다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퇴출되고 있는 현실이지 않은가.


이렇게 읽기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문학작품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읽는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말(글)은 점점 줄어들고, 간략해지고, 긴 문장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또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빈 공간보다는 시각적으로 상상력을 메워주는 영상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상상은 공상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또다른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시나 소설은 상상을 다루는 예술이다. 이런 상상을 통해서 사람들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 시와 소설이 인간과 함께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때문에 르 귄이 한 말,


'미국에서 상상력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뿌리가 깊어요. 갈수록 소설을 적게 읽히는 학교들만 봐도 드러나죠. 요새 학교에서 시를 읽기는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44쪽)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83쪽)


이런 말을 떠나서 예술은 중요하다.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그런 예술에는 성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고, 장르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편가르기를 하고 담장을 쌓아 서로 교류를 하지 않는 일들은 예술의 세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상력을 죽이는 행동이다. 


르 귄의 마지막 대담집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작품만큼이나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르 귄의 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번역자가 르 귄과 주고받았다는 편지에 있던 한 내용... 세상에? 2008년에 주고받았던 내용이 지금 다시 읽으니, 이런! 이런! 한탄이 나오고 있으니...


그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이 글에 대한 감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president(대통령)는 별명이 presi-ro-dent(rodent는 설치류)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 르 귄의 답장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당신의 나라에 대해 쓸 만한 소식을 얻기가 무척 힘들어요. 우리 신문은 외국 뉴스를 거의 싣지 않고,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 '존재'하죠. 한국에서도 (이전의 우리처럼)  presirodent를 뽑았다니 유감스럽네요!'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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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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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영화로 봤다. 감명 깊게 본 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어라! 영화 원작이 있었어?'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빌려서 읽게 되었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나는 구속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9쪽)


상금이 어마어마하다.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0억 정도의 상금이 걸린 (10억 루피라고 소설에 나오는데, 인도 1루피가 15원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지금 환률로 환산하면 150억 정도 된다고 해야겠다. 150억을 상금으로 걸고 하는 퀴즈쇼는 없을테니, 10억 정도로 하자. 그래도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퀴즈쇼일테니) 퀴즈쇼에서 우승했다. 


우승한 대가가 구속이다. 자, 왜 주인공은 구속되었을까? 소설은 이렇게 첫문장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증거가 없을 때 증거를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부패한 경찰이 생각하는 수단. 지금은 고문을 하는 나라는 거의 없고, 인도에서도 고문은 아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겠지만, 부패한 경찰에게는 고문이든 뭐든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니) 순간, 변호사가 등장하여 그를 데리고 나간다.


변호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주인공. 이름이 람 모하마드 토머스. 람은 인도 힌두교에서 크리슈나 신이 환생했다는 '라마'를 의미하고, 모하메드는 이슬람교를 토마스는 천주교(기독교,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키워준 사람이 신부니까, 천주교로 하는 것이 더 좋을 듯)를 의미한다.


즉 주인공의 이름에 세 종교가 들어 있듯이 그의 삶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달랐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그리고 우연히 신부의 손에 자라지만 신부가 살해당하고 소년원(고아원)에 보내지고, 다시 팔려가서 탈출하고,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그.


그가 살면서 겪게 된 일과 퀴즈 문제가 겹치면서 소설은 12번째 문제까지 삶과 문제를 연결짓고 있다. 아니, 12번째 문제에서는 퀴즈쇼를 하는 집단의 사기를 드러내고, 각 문제마다 그가 겪은 삶이 인도의 삶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일들을 통해서 그의 몸에 각인된 지식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맞히는데 일조한다. 단순히 빈민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각 계층들의 위선적인 삶, 진실한 삶 등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찾았지만, 과연 이렇게 행복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퀴즈쇼에 나오는 지식들이 삶의 지혜하고는 거리가 먼 단편적인 지식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그런 지식들을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에게는 단지 퀴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각 문제에 해당하는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지만 인색한 사람, 가난하지만 베풀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버리는 사람, 위선적인 가학성 성애자, 그럼에도 올곧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


가난 속에서도 우정과 사랑을 잃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가려는 사람. 그래, 세상에 권선징악이 있다고 믿으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이 되겠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조금씩이라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런 희망을 주는 소설이다. 흥미진진하게, 추리 소설의 요건도 갖추면서 전개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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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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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이다.

소설이 번역될 때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영화를 다르게 봤을까 하는 생각.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인 이 소설을 읽었으니... 순서야 바뀌었지만,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공통점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했다? - 소설에서도 좀비들이 중국에서 먼저 활동하는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도 서양 사람에게 이름은 '아프리카 광견병'이라고 불린다. 특정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일, 그 지역을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 소설이 나올 때는 중국과 미국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중국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소설에서 서술이 되어 있다. 


두번째는 원인을 알 수 없다. 왜 좀비들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좀비들이 전세계에 거의 동시에 발생해서 재난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법을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좀비들이 불식되지 않았다. 좀비는 계속 살아남아 있다. 코로나19 역시 3년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번째는 격리다. 격리? 사람들을 격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좀비고 아닌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장벽을 쌓거나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코로나와 같은 비대면 활동이 많이 나오지 않으나, 만약 코로나19 이후에 이 소설이 쓰였다면 아마도 비대면 활동이 중심이 된 인류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네번째는 죽어가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강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는다. 다는 아니지만, 약자보다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모든 질병이 그렇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통점이 있지만, 코로나19는 바이러스고 좀비는 죽은 사람이 움직이는 상태니, 대처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좀비에 대처하는 방법,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좀비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설 방법은 없다. 좀비 퇴치법은 나왔다. 뇌를 없애면 된다. 


소설과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영화에서는 무언가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방법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질병이 대안으로 나온다.


즉 기생하는 존재는 자신도 살아가야 하니 건강한 숙주를 필요로 한다.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다. 숙주가 사라지면 바이러스도 사라진다. 그래서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지 못한다. 퍼뜨릴 숙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좀비를 설정한 이유는 이러한 기생(바이러스)의 특성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좀비는 아무 생각이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물리거나 좀비의 물질이 몸에 들어간 사람이 좀비가 되니, 의학 문제로 가지 않는다.


구체적인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좀비를 퇴치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둔다. 퇴치라고 했지만, 전쟁이다. 좀비와 벌이는 전쟁. 그래서 제목이 세계대전 Z다.


전쟁! 이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굴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쓰는 효과적인 전략, 전술은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좀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들이 선택한 전술은 일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좀비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미끼가 된다. 그 다음에야 군대가 좀비들을 소탕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얼마나 죽어가는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대상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이렇게 전쟁의 살벌함을, 또한 그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 역시 정신적 고통으로 삶을 유지하기 힘듦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런 좀비들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밝혀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좀비가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도 인류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밝혀내야지만 좀비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세상에 어떤 바이러스는 완전히 지구상에서 없애기는 힘드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코로나19로 고통을 받은 3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코로나를 생각하면서, 우리들 생활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월드 워 Z]를 본 사람들, 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군대 문제, 그리고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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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전집 : 시.희곡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맹문재 엮음 / 현대문학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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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내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이름이다.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이 이름이 부정 쪽으로 남게 된 이유는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이 큰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연실이 김명순과 다른 여성 예술인들의 모델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나혜석이 최근에 와서 집중 조명된 반면 김명순에 대해서는 그리 조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김명순 전집(시,희곡)이 다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김명순을 생각하게 했는데...


시는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1925년 즈음에 쓰인 시들이 대부분인데, 이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시의 초창기 아니던가.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 이상화라는 시인들이 등장하고, 서양 근대문학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근대문학이 시작되던 시기.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김동인이 자랑스러워 하던 [창조] 동인에 김명순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 또한 시 경향 역시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전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여성을 문학사에서 가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김명순이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점은 [김연실전]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니, 꼭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김연실전]은 초창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작품 아니던가. 그러니 [김연실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작가들을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요즘은 여류 소설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성이라는 성 구분이 앞에 꼭 들어갔으니, 그때 구분법을 따라서 잠시 쓴다) 쓴 작품을 읽으면 좋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1막 4장 짜리 '두 애인'이란 작품이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여인이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여인이 여러 폭력으로 죽어가게 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남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다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해도 남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그들은 하지만, 여성들은 그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란하다는, 또는 속된 말로 꼬리를 친다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김명순도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두 애인'이라는 각본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시 '유언' 마지막 구절. 95쪽)라고 당시 조선을 표현하고, '옛날의 왕자와 같이 /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 줄 알고 /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 지금 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 미련한 나! 미련한 나!'(시 유리관 속에'에서 끝부분. 96쪽)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김명순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전히 '사나운 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미련한 나'라고 자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김명순 전집을 읽으면서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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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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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하늘을 올려다 볼 틈도 없었나? 밤이 되어도 별보다도 더 빛나는 땅의 빛들로 인해서 밤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지 않았나?


내가 보지 않아도 별은 별일텐데...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이라는 말과 행성과 위성, 혜성이 다른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냥 별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별들은 이제 별 볼일 없어지고 만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낸 책이다. 천문학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된 자신의 일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천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읽을 만하다고 느끼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요즘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사실까지도.


우주로 날아간 우주선들이 보내오는 사진들로도 행성을, 별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시대라고 해도, 우리는 별에 대해서는 아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달에 대한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달 하면 무언가 그리움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듯이.


여전히 사람들이 우주로 나아가 살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달에 발을 디딘 지 오래 되었지만, 최근에야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 그만큼 우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에게 어떤 아련함, 그리움, 동경 등을 주는 존재. 그런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 천문학. 그리고 천문학자.


이 책에는 그런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 된 일들이 많이 나오는데, 드물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음도 드러내고 있고, 또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잘 기록된 자료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 천문학의 성과도 알려주고 있으며, 단지 별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땅으 이야기, 즉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이 되어서 좋다.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천문학자들의 그들의 책이나 논문에 쓰는 주체를 나타낸다는 말.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한다는 말. 이때 '우리'는 함께 연구한 과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인류'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은 특정한 한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온 결과물이라는 사실. 그 점을이 책이 알려주고 있으며, 우주로 나아가는 일들이 결국은 '인류'의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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