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안 살 수가 없는 시집이었다. 전태일. 잊혀지지 않는 이름.


  이런 전태일을 기리는 시집이기도 하겠지만, 당신이,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라고 하는 시집이라니, 어찌 안 사겠는가.


  읽으면서 숱한 전태일들을 만났다. 예전에 알던 이름들을 시집에서 발견하고는 과연 그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진 세상으로 왔는가 하는 생각도 하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날. 시인은 자신의 아내가 이날 태어났다고 했다. 역시 노동자로, 또다른 전태일로 지내게 되는 자신의 아내가 태어난 날.


그런데 전태일의 분신으로부터 지금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떤가? 당시에는 없던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생겨서 노동자끼리도 계급이 나뉜 사회가 되지 않았나.


중대재해처벌법이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지는 의문이고,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


불의의 사고로, 아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로 죽음에 이른 많은 청년노동자들. 노동자들. 이제는 힘도 없어진 노동조합. 그런 노동조합을 여전히 강성 노조라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


시집을 읽으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 청계천에 갔다가 전태일 동상 앞에 선 적이 있다.


전태일이 원하는 세상이 왔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또다른 전태일들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들이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전태일 동상 앞에 놓여진 작은 꽃다발. 그렇게 우리는 전태일을 잊지 않고 있지만, 진정 전태일을 잊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그가 바라던 노동자들이 법대로, 사람답게 대우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좋은 세상 아닌가. 그것이 바로 전태일들을 만들지 않는, 전태일을 잊는 방법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자신을 선전하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런 세상이.


표성배 시집 [당신이 전태일입니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 시집에 나온 한 시... 아, 정말, 이렇게, 우리가, 또, 전태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시.


젠장, 전태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아니, 우리가 전태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가 여전히 쓰이고 있으니... 이런 시를 쓰게 하는 세상이니. 그가 과연 전태일 동상 앞에 설 자격이 있을까? 


전태일은 살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묵념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정작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0시간 노동이라며

주 52시간제 폐지를 생각했을까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며

4백만 손발 노동자 등에 칼을 꽂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을까

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방해하는

일체 규제를 없애겠다

임금 체계를 연공서열에서 직무급제로 바꾸고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임금 차이가 없으면 정규직 비정규직이 

큰 의미가 없다며

수많은 젊은 노동자 미래를 짓밟고

150만 원 받고도 일할 사람 많다며

최저임금제 폐지를 생각했을까

하루에 일하다 죽어가는 노동자가

육칠 명이나 되는데도

중대재해처벌법을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온몸으로

검은 장벽을 걷어 내고자 했던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동조합을 미래 약탈 세력이라고

언론노조를 강성 노조의 전위대라 씹으며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잇는 전태일을

갈라치기하며 쾌재를 불렀을까

2022년 3월 10일 새벽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날

이 땅,

살아 있는 전태일은 전의를 불태우고

죽은 수많은 전태일이 일제히 부활했다


표성배, 당신이 전태일입니다. b판시선. 2023년 초판.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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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 '신동엽의 좋은 언어'라는 말을 생각한다. 언어면 언어지, 좋은 언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쁜 언어가 있다는 말인데...


얼마 전에 끝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너무도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런데 그 말들 중에 좋은 언어가 얼마나 되었을까? 오히려 국가의 선량(善良? 選良?)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썼던 언어는 '선량'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한자어 어느 쪽을 쓰든 이번 총선에서 난무한 말들은 절대로 '선량'이 아니었다.


한 국가의 정치를 좌우하는, 4년을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자신을 뽑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이렇게 수준이 떨어지다니...


단지 수준만 떨어지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수준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언어는 나쁜 언어였고, 혐오 발언이 넘쳐났다.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면서 정치를 하면, 그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상대와 함께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버렸다는 말이 된다. 그냥 상대는 배제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런 대상과 협치를 할 수 없다.


나쁜 언어들이 넘쳐나는 현장에서, 좋은 언어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이르다. 아직 22대 국회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썼던 나쁜 언어, 혐오 발언들을 직시하고, 좋은 언어에 대해서 고민을 할 시간은 있다.


한 달이라는 (지금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시간 동안 과거를 반추하면서, 미래를 만들어가려 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들이 썼던 나쁜 언어들을 좋은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좋아진다. 정치를 한다는 말,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는 말, 그 말은 곧 좋은 언어를 쓰는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바로 좋은 언어를 쓴다는 말이다.


삶이보이는창 137호, 봄호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봄이 온다는 것은 바로 좋은 언어를 쓰는 사회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언어가 우리를 봄으로 이끈다. 봄은 좋은 언어의 세상이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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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긴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역시 시를 좋아하는 태도는 아니겠지만.


  시는 짧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길면 굳이 왜 시로 쓰나 하는 생각도 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길어야 하는 시도 있다. 짧게 끝날 수 없는 시들.


  김혜순 이번 시집은 길다. 시들도 길지만, 시가 계속 연결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처럼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하지도 않다.


  흐릿한 가운데 긴 시를 읽어나가야 한다. 시를 읽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다. 시인이 써놓은 시들이 독자에게 다가갈 때 어떤 시들은 곧장 다가오고, 어떤 시들은 빙빙 에둘러 다가오고, 어떤 시들은 아예 다가오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 시집, 그냥 흐릿하다.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생각하게 할까? 두 단어에서 생각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두 단어에서 시집을 관통하는 무엇을 얻고자 했으나 역시 길을 잃었을 뿐이다.


두 단어는 '새하다'와 '환상통'이다.


'새하다' 무슨 뜻인지 모른다. 새는 동물,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 달린 동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보통 새가 되다라는 말을 쓰지, 새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되다라는 수동형을 하다라는 능동형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새처럼 자유롭지 못한 삶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주체적으로 새 삶을 찾겠다는 의미로 '새하다'라는 말을 썼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새하다'라는 말을 했음에도 시집에는 능동적, 주체적인 강함을 느끼기 보다는 상실, 아픔 등을 느끼게 된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자연스레 '환상통'이란 말에 끌리게 된다. 환상통이란 있던 것이 사라졌을 때, 없는 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통증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날개 환상통이란 날개가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통증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날개가 있었다? 새하다 이전에 이미 새였다는 말이다. 새였다가 날개를 잃었다. 그리고 그 날개를 잃었기에 환상통을 겪는다. 자신이 날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날개가 있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 날개를 잃었다는 것은, 환상통으로 말해지듯 속박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


이럴 때 환상통을 느끼면 자신이 날개 있었던 시절을 깨닫고, 그 날개 없음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날개 없음이 당연하지 않다면 날개를 달아야 한다. 다시 새가 되어야 한다. 새해야 한다. 그렇게 결핍의 상태에서 충만의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날개를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었을 때보다 더욱 힘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새할 수가 있다. 이것이 누구의 삶인가?


새하는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 새하는 존재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 그것이 바로 김혜순의 시집일 수 있다. 


첫시 제목이 '새의 시집'이고,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 새하는 순서 / 그 순서의 기록' 

...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김혜순,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8쇄. '새의 시집'에서)


내게는 여전히 흐릿한 시집이다. 시들이다. 많은 말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시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길 잃음 속에서 두 단어를 지향점으로 삼아 나아간다.


'새하다'와 '환상통'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찾아야 함을 아프게 꼬집는 시.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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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다.


  아직 더 살아계셔도 될 나이인데... 누군가가 '나이 70이 넘으면 자연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요즘 나이 70은 자연사할 나이가 아니다. 기대수명이 80을 훌쩍 넘은 이 시대에 70대에 세상을 뜨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홍세화 선생도 그렇다. 1947년 생이라고 하니, 아직 더 이 세상에 있어도 좋을 나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급하다고 세상을 떴는지.


'세화'라는 이름이 세계 평화의 줄임말이라고 하던데, 그러한 세계 평화가 오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선생을 더욱 힘들게 했는지...


그동안 해온 마음고생들이 수명을 단축시키지는 않았는지, 저 세상에 가서는 마음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그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살아온 이력도 그렇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프랑스를 통해서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도 좋게 읽었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이 프랑스혁명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이런 좌파와 우파를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갈등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를 꼭 남북으로 가르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종북좌파라는 말이 살아 있으니, 좌우가 남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의 책에서 기억나는 말은 바로 '똘레랑스(관용)'이다. 이 똘레랑스를 지니는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자세를 지녀야 너와 나가 적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했던 말.


좌우나 남북이나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접점을 찾아 공통분모를 점점 넓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관용' 아닐까 하는데...


이러한 관용을 이야기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상대는 함께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밀어내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부음을 듣고 다시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있는데, 이 말이 있음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상대를 배척하기만 하고 있는 현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 말이 우리 사회에 정착할 날이 언제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간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많은 화두를 이어받아 그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생이 원하는 후배들의 모습이겠지 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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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틈이 있다. 이미 있는 틈을 메워도 시원찮은데, 하나로 되어 있던 곳을 헤집고 파헤쳐 기어코 갈라놓는다.


 서로 닿아서는 안 되는 듯, 이 편과 저 편이 극명하게 나뉜다. 둘을 이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과일 이름까지 동원해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 아니 밝히라고 한다. 틈 사이에 서서 양쪽을 당겨서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런 역할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그냥 갈라져 있는 편이 좋단다. 애초에 하나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나였는데, 하나였음을 잊어버리고,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런 힘겨루기 상황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 옷을 입을 때 이 편과 저 편을 각각 집어넣지만 마지막으로 양 쪽을 이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없다.


더워서 또는 멋으로 양쪽을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한때일 뿐. 본질은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단추다.


그런데 손택수 시에서는 이런 꽃이 단추 역할을 한단다. 시인의 상상력은 역시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니... 꽃이, 이제 봄!


땅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이렇게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는 꽃단추라는 생각을 하니, 더 귀하게 여겨진다.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2010년. 11쪽.


우리 사회에 많은 일들이 있다. 봄! 봄! 지상과 지하를 채워주는 꽃단추들이 많이 나오는 때.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에 봄이 왔는가?


각자 자신의 영역을 고수한다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면서 이 틈과 저 틈이 벌어져서 그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데도, 틈과 틈을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


꽃단추가 아니라 사람단추가 필요한 때인데, 사람단추에 달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 편과 저 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좋다고, 그대로 가자고, 단추는 필요없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단추는 필요하다. 단추를 채우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단추를 채워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람단추가 더더욱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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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2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네요. 단추에 대해 생각하는 글...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kinye91 2024-03-26 18:4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가 좋아요. 손택수 시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