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걸이에 걸린 양'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양의 털로 옷을 만드니, 옷걸이에 걸린 양은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이다.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하면. 옷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옷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옷보다는 양이 더 좋겠고, 양털은 식물성보다는 동물성을 의미하니, 이때 양을 양털로 만든 옷이 아니라 바로 그 옷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옷걸이에 걸렸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하지만 제약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옷걸이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옷걸이는 옷장 속에 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옷장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옷장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옷장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현대문명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산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사고 쓰고 버린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현대문명의 한 부분이 아닐까? 현대문명이 그렇게 할 수밖에 만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들을 보면. 시들이라고 한 이유는 특이하게도 [옷걸이에 걸린 양]이라는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7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같은 제목의 시를 계속 반복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처럼 돌고돌고 하는 삶일 뿐이다. 옷걸이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옷걸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 시인은 이렇게 내용을 통해서도, 또 형식을 통해서도 현대문명의 삶은 결국 옷걸이에 걸린 삶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벗어나 살 수 없듯이 결국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인데,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틀 속에서 다른 삶을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시 속에서 찾기 힘들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며 틀 속에 갇힌 삶이긴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두더지 앞니


  앞니의 성장이 멈춘 두더지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산언덕 아래 살았다 마을의 지하 생활자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무료하게 지하 셋방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달빛도 없는 밤 족제비를 피해 바위 아래에서 한없이 자라나는 이빨을 갈아 없애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 두더지는 어느 밝은 대낮 지상으로 나왔다가 눈멀어 잡혔고 장독대의 빈 작은 항아리에서 살다 죽었다 나는 지하의 집과 지상의 집과 항아리의 집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었다.


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 문학과지성사. 1998년. 82쪽


이 시에서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라는 말... 이는 옷장에 갇혀 있는 삶, 항아리 속에 갇혀 있는 삶일지라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말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대문명에 갇힌 삶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희망으로 시집을 맺고 있다. 


한편 한편의 시들이 현대문명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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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장판에서 푸코읽기]에서도 소제목으로 ˝양떼들˝이라는 비유적 단어를 쓰기에 ˝양˝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했었는데 kinye님께서 ˝옷걸이에 걸린 양˝ 뜻풀이 너무나 공감가게 해주셨네요^^

kinye91 2022-02-05 1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22-02-0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6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오'라는 감탄사부터... 무엇에 대한 감탄인가? 이때 감탄이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다. 마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소리. '오'


  '그자'라는 말에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자'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니 '그자'라고 한다. 


  '입을 벌리면'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났다. 앞의 주어인 '그자'와 연결지으면 결코 긍정이 될 수가 없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내게는 해로운 감정,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 그러니 제발 그자의 입을 다물게 하라.


  이렇게 외치고 싶지만 그자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자는 끊임없이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토해낸다. 뱉어낸다. 입은 언어를 제외하고는 안으로, 밑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반대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무척 부정적이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지닌다.


생각해 보라. 입에서 안으로, 또 내려가지 않고 밖으로 위로 나오는 물체들을... 이럴 때 쓰는 말, 내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왜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기나. 그만큼 그자는 입을 벌리고 수많은 것들을 뱉어내지 않았던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어떤 고백


  고백컨대 나는 그를 저버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뼈마디 앙상한 손으로 내 심장을 숙주 삼아 동맥과 정맥의 뒤바뀐 운명을 노래하는 그를 저주해본 적이 있다 듬성듬성 이 빠진 폐허를 과부 가랑이마냥 벌리고 헤벌쭉 웃는 그를 오, 심장 따위를 헐값에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개도 아니고 권태도 아닌 것들이 쥐 썩는 냄새처럼 속절없이 부풀어올라 내 망루 끝을 새나갔다 그때면 세계의 바깥이 암담하여 미래의 애인마저 저주스러웠다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문 저편에서 죽은 자들이 죽지 못해 구더기처럼 기어올라왔다


  썩은 내장을 거슬러 위장을 지나 식도를 타고 사력을 다해 터져 나오는 독거미 독거미들, 기어코 존재의 망루 밖에 게워지는 천 년 전의 어떤 고백, 만 년 전의 어떤 비명이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김지혜,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열림원. 2006년. 41쪽.


해석은 포기다. 이해도 포기다. 그런데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이 시가 마음에서 머리로 올라올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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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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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되는 시를 찾아본다. 어떤 시집은 제목이 된 시가 실려 있고, 어떤 시집은 시구절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다. 


  이 시집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시를 찾아보았는데, 시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삼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이란 시에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나'로 시작했으니 '사랑'이라고 쓰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시집 제목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보다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라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만큼 이 시집에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이 시집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죽은 별'은 과거다. 과거를 건지는 일은 현재에 과거를 가지고 오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 그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는 일. 어쩌면 시인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잊고 묻어버린 과거를 다시 살려내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역할. 그 일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이 시집 1부에는 시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시로 쓴 가족사라고 할만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시인 '지킴이의 노래'가 1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좋다.


시집 2부로 가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속도에 집착해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우리가 뒤에 두고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속도로 인해 다른 존재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2부는 부제를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정하고, 한 편 한 편 속도로 인해 잃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세상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이런 '속도에 대한 명상' 연작을 쓰게 했다고 할 수 있따.


3부에 실린 시들은 풍자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많은데, 역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는 곧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풍자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시인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이 중에 속도에 관한 시... 속도로 인해 생명이 얼마나 속절없이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짤막한 시.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1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화시학사. 2003년 1판 7쇄. 59쪽.


지금까지는 이래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제동이 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그래서 이 시가 더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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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별다른 불편 없이 또 별다른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두려운 세상이라면.

 

  공정한 세상라고 할 수 있나? 그럼에도 내가 느끼지 못했다고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내가 느끼지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러운 세상일 수도 있다. 바로 내가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두운 거리를 어두움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또는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에게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두려운 세상에서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당하거나 했던가. 그런 세상을 마치 없는 듯이 아주 극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듯이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

 

기사로만 접하는 사실과 시로 만났을 때는 느낌이 다르다. 이소호가 쓴 시는 예전 황지우가 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로 끌어와 쓴 황지우. 신문기사를 모아서도 시로 만들어냈던 그의 모습을 이소호 시에서 보게 된다. 이 시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이란 시도 그렇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기사화 됐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냥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시를 통해서 누구의 삶이 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 누구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각 번호마다 설명이 달린 주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시를 복사한 그림을 보면, 시 내용 곳곳에 있는 숫자들이 그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칼, 창과 같이 느껴진다.

 

주가 없을 때보다 주가 있는 시로 보는 편이 시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인쇄가 약간 삐딱하게 됐는데... 그래도)

 

 

 

 

 

 

 

 

 

 

 

 

 

 

 

 

 

 

 

 

 

 

2021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20년. 181쪽. (주는 182-184쪽에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섬뜩해진다. 아니 부끄러워진다. 여전히 이런 일이 뉴스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시에 있는 주가 38개인데, 38개의 칼을 맞는다면 사람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언제 어디서라도 칼이 날아올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는 이런 세상이 있음을, 그것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런 세상을 우리가 바꾸어야 한다고.


누구는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이것이 꼭 특정 성별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라고. 특정 성별, 또 성적 지향 때문에 이렇게 공포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의 어제와 오늘은 이럴지 몰라도 내일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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