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우울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힘있는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이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친다. 이들에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그보다 높은 곳에 있지만 보통 사람들, 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아도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더니...
정작 누구로 인해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역설적인 표현이 생각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또는 노래 가사였던가, "별일 없이 산다"
별일이 없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지도 않은데, 아무 일도 없는 척, 별일이 아닌 척,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이 현실...
마음이 어지럽다. 그래서 시집을 펼친다. 제목부터 따뜻하다. 이기철의 "가장 따뜻한 책"
시인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다. 사람 사랑하는 일도 연습을 해야 한다. 슬프게도 이제는 이런 사실을 시인해야 하리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람이 싫어진다는 것보다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중략) 사람의 귀중함을 노래처럼 뇌면서 사람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중략) 시를 읽고 산문을 읽고 한 줄의 편지를 쓰는 일은 마침내 사람으로부터 멀어져간 마음의 실 꾸러미를 내게로 팽팽히 당겨오는 일이니...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년. 107-108쪽)
그래, 사람이 미워짐에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미움이 증오로, 증오가 분노로, 분노가 파괴로 가서는 안된다. 오히려 미움이 사랑으로, 사랑이 창조로, 건설로 가야 한다. 그러기에 시를 읽는다. 더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서 따뜻한 책, 그러한 책. 그것이 바로 시집이다. 이 시집은 아주 따뜻하다.
따뜻한 책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16쪽
하여 시는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는 그런 창조된 세계에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세상을 만끽한다.
시법
시는 말의 피다
한 방울 수혈로 꽃피는 언어들
시는 언어에 피를 돌게 한다
필통마다 담겨 있는 연필처럼
갈피마다 담겨 있는 마음의 모세혈관들
언어를 켜는 것은 마음을 켜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성냥불처럼
나는 언어를 켜고 시를 쓴다
잠든 책이 언어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의 쌀독 여는 소리가 세상을 깨운다
언어를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이여
그것은 신도 눈치 채서는 안 된다
핏줄의 막힌 곳을 뚫고 선혈이 돌 때
없던 세계가 탄생한다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년. 21쪽
말은 피다. 말은 우리를 살게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도 역시 우리를 살게 한다. 그러나 이들이 잘못 쓰였을 때, 이들은 무서운 흉기가 된다. 무기가 된다. 무서운 것이 어디 핵폭탄뿐이랴. 오히려 이러한 말들이 잘못 쓰였을 때, 제 이익만을 위해 쓰였을 때 말은 핵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 말을 힘있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잘못 썼을 때 그것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가 된다.
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 시로써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시로써 없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러한 세계를 힘있는 자들의 말이 파괴하고 있다. 우리의 따뜻한 세상을. 시를 읽을 낭력이 없는 사람, 시에 마음 한 귀퉁이를 떼어줄 줄 모르는 사람, 그들이 정치를 하면... 참...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주어진 것이 희망이라면,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면 우리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어둠은 곧 밝음을 예비하고 있으니, 이 어둠, 이 혼란, 이 막막함이 다시 밝음으로, 안녕으로, 우리의 행복함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
미래는 저녁 창문처럼 금세 어두워지지만
작별해 버린 어제가 모두 탕진은 아니다
모래의 시간 속으로 걸어온 구두
밑창의 진흙은 숙명을 넘어온 기록이다
내 손은 모든 명사의 사물을 다 만졌다
추상이 지배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명백한 것은 햇빛밖에 없다
죄마저 꽃으로 피워둘 날 기다려
삶을 받아쓸 종이를 마련하자
가벼워지고 싶어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모든 노래를 받기 위해서 입 다무는 침묵처럼
오늘은 단추 한 칸의 가슴을 열자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년. 51쪽
이런 희망이 시인으로 하여금 '슬프다고만 하지 말자'고 하고, 또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 우울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그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