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나는 여성학 강의를 들은 적도, 관련 책을 본 적도 없다.
아는 여성학자는 정희진, 오한숙희, 박혜란 세 명 정도인데 오한숙희는 매체를 통해, 박혜란은 이적의 엄마로, 정희진은 알라딘 풍월로 알게 되었다. 최근 여성학 관련 서적이 잇달아 출간되면서 읽어보겠다 생각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웃들이 포스팅하는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이대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닌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대이기 때문일 거다.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알게 된건데, 나이 든 남자건 젊은 남자건 이대를 참 좋아하더라. 다들 까기만 하더니, 우스웠다. 나이불문 이대생들을 까면서도, 만나고 싶어 하더라는 얘기다. 그와 다르지만, 나도 편견을 갖고 있었다. 〈여대〉이기 때문에 대학생활 중, 어떤 면에서는 결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어렸고,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된장녀〉는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이 신드롬은 〈개념녀〉 신화를 만들어냈다. 원치 않았지만, 〈된장녀〉 이미지의 대표가 된 건 이대생들이었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이화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 중, 〈후려치기〉를 당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과연 몇 명이 될까.
예를 들어, 자기 주장이 강하면 〈기 센 여자〉가 된다. 주장의 세기는 누가 결정하는가? 내 경험상, 대부분 남성들이 결정했지만 때론 동성인 여성들이 명명하기도 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아니다. 피하고 싶은 낙인이다. 장동민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는 잘못된 거다. 바람직한 여성상이 아니다.
이대생들은 〈기 센 여자〉였고 〈페미니스트〉였으며, 〈된장녀〉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담론이 형성될 때, 나는 침묵했고 그 침묵은 동조였다. 나는 이화인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여성학 강의를 피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페미니스트〉를 여성우월주의자라 생각했던 것이다. 흔히들 페미나치FemiNazi라 부르지. 잘못된 생각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올해 초,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 출연 중인 코미디언 아지즈 안사리가 《데이빗 레터맨 쇼》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의 모습은 굉장히 의외였다. 드라마 속 아지즈는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기 때문이다.
아지즈는 〈페미니스트〉의 잘못된 용례를 이렇게 얘기한다.
"네, 전 의사고 주로 피부병을 다뤄요."
"그럼 피부과 의사시군요?"
"아니요, 그 말은 너무 과격하네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페미니스트〉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그 단어가 이상하게 사용돼서 사람들은 이제 페미니스트 뜻이 어떤 여자가 자기에게 소리지르는 거라 생각해요. 프레셔스의 엄마가 당신에게 물건을 던지려는 것처럼 말이죠. (...) 이런거죠. 오, 저 미친 년이 나한테 물건을 던지려고 하는 건 원치 않아요. 됐거든요."
"양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믿는다면, 누군가 당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해야 해요. 단어란 그렇게 쓰이는 거니까요."
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다. 단어는 그렇게 쓰는게 맞다.
〈된장녀〉신드롬이 대한민국을 휩쓴지 10년이다. 많은 이들이 〈개념녀〉가 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여성 혐오는 견고해졌다. 온라인으로도, 오프라인으로도 수많은 여성 폭력을 경험한다. 광고에서 여성을 즉물적 존재로 그리는 것도 신물이 난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진 나도 신물이 난다.
대한민국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원한다. 내가 만난 남성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
"다시 태어나면 〈예쁜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 〈몸매도 착한〉."
나는 꼭 다시 묻는다. 예쁘지 않은 여자는 어때? 그들은 대답한다. 그럼 남자로 태어나야지.
그들도 안다. 여성의 삶이 어떠한가를.
살을 빼서 날씬해진 여성 희극인들은 어디 있는가?
외모를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고, 예뻐진 여성 희극인들은 브라운관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세월을 핑계대지 않고, 그들이 개그 프로그램의 간판에서 밀려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센스 넘치는 남성 희극인들은 계속 출연한다.
더 이상 젊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여성의 존재 가치는 어디 있는가.
때로는 생각한다.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 이 말조차 폭력이다. 이렇게 정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아름답다.〉 혹은 〈모든 존재는 아름답다.〉라고.
뿌리깊은 남녀차별, 시월드, 후려치기, 여성의 존재를 창녀/어머니로 이분하는 것...
시간이 해결하겠지, 저런 발언을 하는 사람은 소수다. 지각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여성 혐오〉는 견고해졌고, 여성을 〈보지〉로 지칭하는 표현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 요즘은 〈보적보〉라고 하더라. 보지의 적은 보지라나. 이 시대 여성은 〈성기〉로 지칭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만 그래. 그럴까?
페이스북에서 인기가 많다는 만화에 대한 기사 발췌다.
만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성이 “자기야! 우리 벚꽃 보러 가자”고 말하면 남성이 “아가리 여물어 OOO야”라며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식입니다. 여성이 “오빠,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라고 물으면 남성이 다시금 “아가리 여물어, OOO야”라며 얼굴을 가격하지요. “오늘 점심 메뉴는 너다”라며 여성을 모텔로 끌고 가기도 합니다.
이를 유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비판한 기자에게 들어온 경고, 그리고 기자의 답변기사다. (발췌도 같은 기사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564626&code=61121111&cp=du
이런 와중, 진보논객들의 데이트 폭력을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논하면서, 데이트 폭력이라... 인기 많다는 그 만화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얘기를 하고 싶어 글을 썼다.
여성학을 알면 무엇이 달라질까.
오늘 새벽,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주문했다. 순전히 〈성매매〉 때문이다. 모님과의 대화에서 팝업한 이 주제는 내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성매매 여성들을 사회적 약자로 볼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 때문이다. 광의에서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맞다. 폭력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방, 오피스텔 등의 장소만으로 연상되는 인스턴트 성매매를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성을 사고 파는 행위는 이제, 착취에서 선택으로 이동하는 것 같아 보인다. 여성 인권을 떨어뜨리는 그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 노동자로 불리고 싶다며 시위를 한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혐오감을 제하고, 진지한 사유를 통해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스탠스에 서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답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껏 여성학을 외면했다. 오해했다. 침묵으로써 손가락질에 동참했다.
나름대로는 저항했다. 열심히 생각했지만 그게 다였다. 올해, 불과 몇 달 사이 나는 사회와 나 자신에 실망했고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가슴 벌려, 여성학을 환영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페미니즘은 지금, 내게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