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등산가의 호텔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 현대문학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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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독자들이 고정관념을 깬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소설 내용이 궁금했다. 책을 읽고나니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스포 하지 않으려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기존 추리소설의 고정관념을 깼다는 말이 틀리지 않지만 과연 추리소설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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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4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왠지 오거서님께 죄송한 ㅎㅎ 저도 스포는 못하고 *^^*

오거서 2021-11-24 20:40   좋아요 2 | URL
미니님이 스포를 못한다는 말이 새삼 기억나네요. 책을 읽어보니 난감한 상황이 이해되네요.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요. ㅎㅎㅎ 감사 드립니다. ^^

페크pek0501 2021-11-25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궁금해지는 걸요...^^
 

나는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창가로 갔다. 나는 혼자였다. 은혜로운 하늘, 자애로우신 하느님, 마침내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말을 입에 담거나 심지어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단 일주일만이라도, 단 며칠만이라도,
단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 되기가 그만큼 어렵다! 물론 나도 내 아이들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며 내 친지들에게단 한 점의 악감정도 없다. 내 친구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예의를 알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일 매시간 그들이 서로서로 교대를 하듯 내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면, 이런 번잡함을 끝내고 모두에게서 벗어나 어딘가에서 두문불출하며 혼자가 될 가능성은 눈곱은 고사하고 전혀 없다…… 내가 직접 읽은 건 아니지만 내 아들은 현대에 들어 인간의 가장 큰 재앙이 고독과 소외라고 주장한다. 나는 모르겠다. 과연 그런지 의심이 든다. 이 모든 것이 시적인 허구이거나, 내가 그만큼 운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2주 동안의 고독과 소외는 마침 내게 꼭필요한 것이다. 내가 꼭 처리해야만 하는 일은 없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지낼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군가 내 코앞으로 들이밀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담배 한 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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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금요일 밤에 나한테 한쪽 눈을 다치는 일이 생겼다. 안과 검사 결과로 큰 이상이 없었다. 천만다행. 약물 치료 덕분에 지금은 정상적인 시력을 거의 회복했다. 그럼에도, 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줄어들고 거의 정상에 가까운 상태로 회복하는 데 이 주일이나 걸렸다.
TV 시청을 일절 아니 하였고, 아이폰을 보면 눈이 따끔거려서 하루종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전화기로만 사용했는데 이름값을 한 건지 못 한 건지… 그러다보니 너무 심심했다. 가끔 눈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상하게도 눈이 아프니까 책을 평소보다 더 읽고 싶어지더라. 지난 이 주일 동안은 여느 때보다도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었다.
양눈이 예전처럼 멀쩡해졌으니까 이달에 나온 신간을 구경하러 나섰다가 마침 몇달 전에 나온 <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를 보았다. 건강을 회복한 직후라서 책 제목을 보고서 모른 척 하지 못하겠다.
저자 김은섭은 대장암 3기로 판정이 나서 암환자가 되었고 투병하면서도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처럼 자신의 투병기를 책으로 써냈다.

“발병 사실을 안 오늘,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입이 무척 쓰다고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금식하느라, 그리고 발병에 놀라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데다 위내시경 검사를 위해 마신 쓴 약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 한 컵을 가득 담아 마시다가 문득 ‘이제는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얻은 닉네임이 불청객처럼 언짢기만 하다. ‘나는, 암환자다.’


저자의 암 투병에 결코 미치지 못하지만 나도 일시적인 장애를 겪음으로써 독자의 일상과 경험이 저자와 동조하는 울림으로 변조되는 것 같다. 아무튼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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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19 22: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거서님 안부 궁금했는데
어쩌다 눈이 ㅠ.ㅠ
시력을 회복 하셨다고 해도 당분간 장시간 책 읽기는 무리 일 것 같습니다.

당분간 오더블 북으로!

오거서 2021-11-19 22:46   좋아요 5 | URL
scott님의 조언을 꼭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11-19 22: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ㅜㅜ 책좋아하시는분에게는 눈이 핵심인데~ 괜찮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오거서 2021-11-19 22:47   좋아요 5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

mini74 2021-11-19 22: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거서님 다행이에요. 저 또한 오거서님 음악이야기나 유쾌한 글들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그냥 바쁘신가보다하고 말았는데 ㅠㅠ 고생많으셨겠어요. 원래 못 하면 더 하고싶지요 ~ 회복되셨다니 다행이에요 *^^*

오거서 2021-11-19 23:09   좋아요 3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
눈을 배리면 개고생합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페넬로페 2021-11-19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거서님께서 많이 바쁘신줄 알았는데 눈이 불편하셨던거군요. 그나마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갈수록 눈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오거서 2021-11-19 23:05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

물감 2021-11-19 23: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거서님, 당근 엄청 많이 드세요. 시력 좋아집니다. 제가 산 증인! 마이너스에서 1.5까지 올라갔답니다🙂

페넬로페 2021-11-19 23:34   좋아요 4 | URL
물감님! 실화이신거죠?
낼부터 1일1당근 실천하겠습니다^^
먹는 방법은 더 좋은것이 있나요?

물감 2021-11-19 23:45   좋아요 4 | URL
그냥 쌩으로 먹는게 최고지만, 저는 주로 갈아마셨어요ㅋㅋㅋ

오거서 2021-11-20 00:12   좋아요 4 | URL
물감님 감사합니다! ^^ 매우 유익한 정보를 주셔서 기대감과 희망이 부풀어 올라요 ㅎㅎㅎ

scott 2021-11-20 00:57   좋아요 4 | URL
1일 1당근 실천 저도! 🖐^^

하길태 2021-11-20 0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거서 님, 큰일 날 뻔하셨군요.
조심하세요, 눈이 보배라는데......ㅠㅠ

오거서 2021-11-20 08:31   좋아요 2 | URL
하길태님 감사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1-11-20 08: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바쁘신가 보다!싶었는데...이런 일이ㅜㅜ
뒷탈 없도록 눈 건강 잘 챙기시구요.
오늘도 평안한 주말 되시길요^^

오거서 2021-11-20 08:32   좋아요 3 | URL
책읽는나무님 감사합니다. ^^
편안한 주말을 보내시길!

막시무스 2021-11-20 0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만다행이십니다! 계속해서 관리를 잘 하시구요! 즐거운 주말되십시요!ㅎ

오거서 2021-11-20 08:42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
즐거운 주말 되시길!

라로 2021-11-20 1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에 후딱 왔다가 후딱 가는 사람인데도 오거서님 안부가 궁금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나이 들수록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되더라구요. 다시 시력 회복을 하셨다니 넘 다행이에요,, 어떤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건강하시기를..^^

오거서 2021-11-20 20:49   좋아요 1 | URL
라로님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눈이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나는 내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장의사인 빌 프레이저가 제공한 사랑스러운 나무 관 안에 누워 인버네스의 톰나후리크 묘지 위쪽 언덕에 묻혀 있다. 아버지가 자신이 누운 관을 보았다면 분명히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그 관을 사용하라고 허락해주셨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관을 이제는완전히 붕괴해버린 할아버지의 관과 할머니의 관 위에 올렸다.
지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은 뼈와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지니고 있었던 치아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떠나지도, 멀리 가지도 않았고 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죽었다. 사실 아버지로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딘가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골치가 아픈 일이고 사려 깊지 못한 일이다. 아버지의 인생은 끝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수사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아버지를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일은, 아버지의 삶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출생은 삶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이 단지 존재의 다른 단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면 어떨까? 물론 종교는 대부분 죽음을 다른 세상의 시작이라고 전제하고, 현세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니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런 믿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세속화하면서 그런 믿음이 사라진 자리를 죽음과 그것의 과시적인 요소들을 근거 없이 혐오하는 고대의 직관적인 생각들이 차지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건 간에 삶과 죽음은 동일한 연속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 분리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죽음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으며, 현대의학이 아무리 개입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죽음이 승리한다. 어떻게 해도 죽음을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을 개선하고 음미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법의병리학 forensic pathology과 법의인류학forensic anthropology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법의병리학이 - 여정의 끝인 - 죽음의 원인과 방식을 밝히는 증거를 찾는다면 법의인류학은 여정 그 자체인 인생 전체를 재구성한다. 우리 법의인류학자는 살면서 형성된 정체성과 죽음 속에 남은 육체의 형태를 다시 결합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법의병리학자와 법의인류학자는 죽음에서는 물론이고 범죄 수사에서도 파트너로 함께한다.
영국에서 법의인류학자는 법의병리학자와 달리 의사가아니라 과학자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사망 진단을 내리거나 사망 원인을 입증할 자격은 없다. 점점 더 확장해 가는 과학 지식의시대에 법의병리학자가 모든 내용을 아는 전문가가 될 수는 없으며 법의 인류학자도 죽음이 관여된 심각한 범죄를 수사할 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의인류학자는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줄 단서를 찾아내 법의병리학자가 피해자가 죽게 된 이유와 죽음의 방식을 정확하게 밝힐 수 있도록 돕는다. 법의병리학과 법의인류학은 부검대 위에 서로 상보적이면서도 독특한 기술을 내어놓는다.
그런 부검대 앞에서 나는 한 법의병리학자와 함께 상당히 부패한 사람의 사체 앞에 선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머리뼈는완전히 깨져 마흔 개가 넘는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전문 의료인인 그 법의병리학자의 역할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그 확신을 입증해줄 증거가 필요했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탁자위에 놓인 수많은 흰색 뼛조각에 당혹해하면서 "나에게는 이 뼈들을 모두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이 조각을 모두 식별할 능력이 없어요. 그건 당신이 할 일이에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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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언젠가부터 꼰대질이 될까 봐, 더 솔직히 말하면, 꼰대로 여겨지기 싫어서, 누군가 충고나 조언을 청해도 의식적으로 피하며 산 지 꽤 되었는데 (네 번 청하면 응하는 것으로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꼰대가 아닌 걸까? ‘타인에게 충고하는 행위’가 꼰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워낙 많이 꼽히다 보니,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 꼰대 아님’ 인증서를 손쉽게 획득하려는 마음이 기저에 있는 건 아니고? 마치 충고만이 꼰대의 전부인 것처럼. 사실 꼰대의 특징 중에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 지식만이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상태’ 또한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특징이 극복하기 더 어렵다고 느낀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이게 가장 두렵다.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나만을 믿고 살 수는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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