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장의사인 빌 프레이저가 제공한 사랑스러운 나무 관 안에 누워 인버네스의 톰나후리크 묘지 위쪽 언덕에 묻혀 있다. 아버지가 자신이 누운 관을 보았다면 분명히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그 관을 사용하라고 허락해주셨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관을 이제는완전히 붕괴해버린 할아버지의 관과 할머니의 관 위에 올렸다.
지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은 뼈와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지니고 있었던 치아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떠나지도, 멀리 가지도 않았고 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죽었다. 사실 아버지로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딘가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골치가 아픈 일이고 사려 깊지 못한 일이다. 아버지의 인생은 끝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수사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아버지를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일은, 아버지의 삶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출생은 삶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이 단지 존재의 다른 단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면 어떨까? 물론 종교는 대부분 죽음을 다른 세상의 시작이라고 전제하고, 현세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니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런 믿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세속화하면서 그런 믿음이 사라진 자리를 죽음과 그것의 과시적인 요소들을 근거 없이 혐오하는 고대의 직관적인 생각들이 차지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건 간에 삶과 죽음은 동일한 연속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 분리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죽음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으며, 현대의학이 아무리 개입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죽음이 승리한다. 어떻게 해도 죽음을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을 개선하고 음미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법의병리학 forensic pathology과 법의인류학forensic anthropology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법의병리학이 - 여정의 끝인 - 죽음의 원인과 방식을 밝히는 증거를 찾는다면 법의인류학은 여정 그 자체인 인생 전체를 재구성한다. 우리 법의인류학자는 살면서 형성된 정체성과 죽음 속에 남은 육체의 형태를 다시 결합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법의병리학자와 법의인류학자는 죽음에서는 물론이고 범죄 수사에서도 파트너로 함께한다.
영국에서 법의인류학자는 법의병리학자와 달리 의사가아니라 과학자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사망 진단을 내리거나 사망 원인을 입증할 자격은 없다. 점점 더 확장해 가는 과학 지식의시대에 법의병리학자가 모든 내용을 아는 전문가가 될 수는 없으며 법의 인류학자도 죽음이 관여된 심각한 범죄를 수사할 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의인류학자는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줄 단서를 찾아내 법의병리학자가 피해자가 죽게 된 이유와 죽음의 방식을 정확하게 밝힐 수 있도록 돕는다. 법의병리학과 법의인류학은 부검대 위에 서로 상보적이면서도 독특한 기술을 내어놓는다.
그런 부검대 앞에서 나는 한 법의병리학자와 함께 상당히 부패한 사람의 사체 앞에 선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머리뼈는완전히 깨져 마흔 개가 넘는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전문 의료인인 그 법의병리학자의 역할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그 확신을 입증해줄 증거가 필요했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탁자위에 놓인 수많은 흰색 뼛조각에 당혹해하면서 "나에게는 이 뼈들을 모두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이 조각을 모두 식별할 능력이 없어요. 그건 당신이 할 일이에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