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의 공포, 사라지는 한국 - 아이가 있는 미래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1
정재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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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와닿는 문장은

'냄비 속 영문 모르고 삶아지는 개구리 신세'였다.


이미 초저출생이며 초저출산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다.

초저출산은 여성 1인이 낳는 아이의 수를,

초저출생은 전체 인구대비 신생아 탄생 숫자다.

출산은 개인, 출생은 집단적 시각의 단어.

일순 단어 놀음 같지만 이 부분부터 와 닿았던 건

개인문제가 모두의 문제라 자각되기 때문 같았다.


저자의 의견을 보고 있으면

함께 간추려 놓은 이미 지나온 한국의 

인구관련 기사들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2000년대의 20년치 인구 감소를 통계로 보고 있자면

아까 말한 냄비속 개구리란 말은 더 실감난다.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 오면서

1.05이던 출생률이 1점대가 깨져 버렸더라.

사람의 존재가 1이하라는 건 

숫자로만 가능한 회계상에서나 가능한 느낌.


60만 대군이라는 자연스런 문구도

50만을 기점으로 사라진지 오래라 하고

이젠 30만도 간당간당.

그나마 예전 60만 시대엔 현역 징병률이 

50%였다는 점도 놀라운 기사였다.

2명 중 1명은 현역인 시대였다는 사실보다

반은 현역으로 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왠만하면 

현역으로 입대한다는 말 속에선,

성인 남자가 부족하니 그렇다고 수긍은 되면서도

군대의 질을 생각하는 게 사치가 되버린 걸

자연스러워 해야하는게 아직 상식적으론 안타까웠다.


자세한 출생률 기록은 2000년을 기점으로 보여줬지만

실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 건 1984년부터였다는 한국.


아마, 조금이라도 낮은 출생률에 대한

이 걱정에 공감대가 있는 사람이라면,

책에서 어떤 해법이 제시되어 있을지

사뭇 기대가 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도 거의 우리와 같은 수준이다.

더 정갈하고 학술적인 묘사를 선보이고는 있지만

'아 그렇구나' 싶을 정도의 해법으로 느낄 순 없었다.  

제시한 게 방법들은 효과는 있을 수 있겠구나 정도는 느끼지만

정말 이게 최선의 답이란 면에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만일 누군가에게 혹은 독자인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통용될 출산율 극복방안을 

고안해 보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저자가 제안한 방식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으리라 본다.

그만큼 우리가 이미 정책이나 기조에서

접해봤던 류의 해결법들이 결국 다인거고 그뿐이란 거.

다만, 그 실천에 있어서 쏟아붇는 양을 늘리고

자발적 변화에 대해 머리를 맞대보자는 식의 얘기 자체가

애매모호한 희망만을 말하고 있진 않다는 건 알겠더라.


내용을 진중하게 기억해야 하는데

책을 덮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저자의 한마디는

오히려 다른 부분에 있었다.

저마다 현재의 초저출산률에 대한

분석을 말해보라 말한다면,

천편일률적이 아닌 가지각색일거란 말.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자기만의 

삶과 가치관이 담긴 얘기가 쏟아질 테니까.


나도 읽으면서 생각을 안해볼 수 없었다.

정말 경제력, 경력단절, 남녀차별이 주된 문제란 말인가?


난 그냥 안 낳는거 같다,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 그게 다인거 같다.

자신으로 살아가는게 익숙하지

우리로 살아가는게 편치 않은 세상이 된 것 같다.

부모도, 노약자도, 가족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으로 구성된 삶.


어느 책에선가,

미국을 모델로 개인주의의 장점을 

바람직하게 설파하던 풍조가,

우리로써가 아닌 자신만의 삶만을 우선시 하더라도

바람직하게 봐도 좋단 방향쪽으로 급선회하게 해줬단 얘길 읽었다.

뉘앙스 면에서 기억되는 얘긴데 인정되는 바가 있었다.


나도 결국은 저자가 말한 수많은 의견 중 하나일 것 같고,

경제적인 뒷받침이 된다면 나아질 거라는 

그 부분도 분명 효과는 있을 것이라 생각은 든다.

하지만 '효율'이란 측면을 봤을 때도 그러할진 모르겠다.

모두가 지원을 받는 삶이라야 

애도 낳을 수 있고 행복해진다는 말 같기만 하니까.


책의 말미에선,

인구감소로 인한 지방별 편차를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삶을 현실로 만들어

인식전환과 출산률의 변화를 이끌면 좋겠다는 바람도 실었는데,

어느 정도 환상적 기대 같기도 했지만

가능만 하다면 이런 방법이 많은 이에게 

희망이 될 수 있으리란 상상도 저자처럼 해보았다.

책의 지향점은, 

정책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와 같은 의견도 첨부된 거라 보면 좋을 수준이지만,

영화 '성혜의 나라'를 책에서 먼저 언급한 후 나온 말이었기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 쪽이 가능하다면 그나마 좋겠다고 바랬을지 모른다.


영화 '성혜의 나라'는 나도 봤던 영화고

상영된지는 조금 오래된 영화인데 소개하자면,

편의점 알바를 주로 하던 성혜의 

반복되고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게 메인인 영화였다.

그러다, 부모의 차사고로 받게 된 보험금이

그녀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꾸게 했었는지는

이 책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영화가 굳이 이 책에서 언급된 이유는,

이런 성혜와 같은 불행이 

횡재가 된 영화같은 반전이 없다면,

대다수의 청년들의 경제적 풍요는 

힘들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자 함이었다.

출산율의 중심이 되어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

실제 경제적 현실과 인식전환이란 측면을 

영화 2편으로 소개했다고도 보여줬다고도 느꼈고.


책을 덮고나면 몇일내 

인구감소에 대한 걱정은 희미해질 것이다.

늘어나는 불완전한 쓰레기처리, 

안 좋아지고 있는 환경문제처럼 말이다.

그래도 한국내 인간으로써 같이 살아가는 인간들이

점차 멸종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인지하는 건 참 불행하다.

멸종이 아닌 감소일 수 있지만 말이다.

더 정확히는 인간자체가 아니라, 

노년기에 접어든 인간의 수는 늘어가고

아기만 사라지는 우선은 일부 멸종이지만 말이다. 

어쨌건 전부 달아오르는 냄비속 

개구리로는 살 수 없는건데 착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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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론 : 성공을 위한 내려놓기
다카모리 유키 지음, 원선미 옮김 / 힘찬북스(HCbooks)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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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발상을 다양한 소재로 많이 다룬 책이다.

그리고 독특한 그 발상들은 내용면에선 다소 짧다.

설명의 가짓수는 많고 그 설명의 양은 간소.

 

여러 이야기중 

승인의 양과 관여의 양이 비례한다는 

주장이 담긴 챕터부터 소개해 본다.

승인과 관여.

얼핏보면 일종의 법률 용어처럼도 첨엔 느껴졌다.

하지만, 읽어보니 그랬던 느낌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단어적 느낌은 조금 달랐는데,

상대를 승인해 줄 수 있다면

점점 상대의 관여를 끌어낼 수 있어 좋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상대를 향한 승인이란 일에 자율성을 준 것이고

상대의 관여란 승인을 허함으로써

점차 승인받은 이가 스스로의 자발적 움직이므로

관여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더 쉽게는 풀어 설명해 보자면,

상대를 향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타인을 위한 일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

저자는 정말 우수한 사람일수록 지는 척을 잘 한다며,

이게 시합에서는 졌지만 승부에선 이기는 전략이고

이렇게 룰 전체를 지배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이해한 사람이기에 

진짜 졌다기 보다는 진 척을 한 셈이 된 것으로 

상대가 이긴 느낌을 받게 함으로써 생긴 결과는 

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좋은 상황이 될 거고 

긍정적으로 이런 움직임은 결국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런 식의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서 

어느 부분에서 읽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울림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역발상이라 느껴지는 느낌들이 많아

일상이고 습관이던 본인의 많은 것들을

되집어보는 과정을 마주하게 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얻게 된 깨달음들이라면

마음에 들 부분은 분명 발견하리라 생각한다.


책제목으로 쓰인 항복론이란 뜻도 한번 집어봐야 좋은데,

이는 내려놓으란 뜻의 통칭이라 느끼면 좋겠다.

많은 얘기 자체를 들려주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지난 상황을 보여주며

거기에 비추어 이야기 해나가는데,

그럼으로써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신이 그 정도 밖에 안된다는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부분이 핵심.

하면 된다. 노력하면 된다.

열심히 해라. 믿어라로써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며,

가급적 빨리 한계를 설정짓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객관적 자기보기를 

성찰해 실시하는 제시라면 제시.


성공하는 방법이나 결과를 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나 교육이 지천인 세상에서

결과를 내는 사람이 소수라는 건

그 얘기들에 맹점이 있다는 소리라 설명하는데,

열심히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란 

어쩌면 환상이고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고 일깨운다.

6년간 안타를 1개 밖에 치지 못했다던 본인의 야구선수 시절.

오래해 왔지만 선수로써의 능력치를 인정하기 보다는

구력으로 들인 노력으로 자신을 보려했기에 버리지 못했다는 과거.

결국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컨설턴트란 업무로 전환한 후에서야 비로써 

자신의 한계 인정이 준 새로운 길이 열였다고 들려주는 그의 사연.


환상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늘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 만들어 주지만,

그 허망한 반복 속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이제 어떤 것은 그만 내려놓으라고 명명하는 그.

현재의 나로써는 영원히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그 점에

스스로 항복할 수 있을 때라야 아이러니하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고 열린다고 덤덤히 말해준다.

다만 희망적이라면 희망의 빛이

자신에겐 '단숨에' 보였었다는 경험이 덧붙여 지면서


자기계발서는 분명하지만 

용기보다는 성찰을 이끄는 책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내려놓기 보단

이 책 저자가 말하는 내려놓기가 더 와닿는 걸 보면 

난 좀더 세속적인 기준이 맞는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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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 깊은 내면의 ‘나’를 만나는 게슈탈트 심리상담 EBS CLASS ⓔ
김정규 지음 / EBS BOOKS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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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이론이 주장하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속성이자 착각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객관적 자기 것이 아닌

어릴 적 스스로 적응하기 위해 창조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 표현에서 주목되는 단어는

적극적과 능동적이란 말들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니,

인위적 변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그 발상에 핵심이 있겠다.

따라서, 저마다의 생각은 정답이 없다.

그저 듣는 이의 인내심과 통찰력이 필요할 뿐이지,

불가역적인 인지오류로 접근할 필요도 없고

그럴 듯 하더라도 냉철하게

실제 존재하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했다고 공감하는 것도 보류해야 한다.

묻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정확한 상황파악이 가장 중요했다.


누군가는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창조해 낸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이 있으니,

누군가의 자기 설명이 됐건

그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해 들어줄 필요가 있고

속단 보다는 시간과 복기의 강약도 필요한데,

저자는 어떤 생각이던 충분한 지지가

상담 중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보는 측면도 있었다.


읽다보면 이게 게슈탈트 이론인지

저자가 다른 이론과 융합했다는 것들 중

불교적 색채의 콜라보인지 헛갈리는 것도 다수 있었지만,

이질적이지 않고 음미해 볼 결과물이라 느껴졌다.

예를 들어, 많이들 이야기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로써,

현재를 잘 사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를

어떤 책보다 와닿게 설명한 부분이라 느꼈다.

  

요약해 보자면, 무언가 추구만 하는 삶을 산다면

결코 현재를 맛보는 삶은 없다는 게 핵심.

현재가 부정당하고 미래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삶...

그런 현재가 부정적이고

미래 또한 밝지 못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그려지는 미래란

결국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세계란다.

내가 이해한 이 말의 뜻은

현재는 없고 다가올 미래만을 기다린다는 말 같았다.

언젠가 다른 서평에서도 인용한 거 같은데,

홍수로 물에 잠긴 집을 탈출하고자 

지붕 위에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면서

고무보트로 구조하러 온 구조대를 보내고

하늘에서 내려올 구원의 헬기나 신의 손길을 기대하는

간절한 바램과 비슷하진 않나를 떠올리게 됐다.


저자는 말한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절대로 올 수가 없다.'


시간이 존재하는데 물리적으론 옳은 말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추론해 볼 땐 맞을만한 논리다.


노력하면, 

언젠가 때가 오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미래의 그 시점에 난

행복해 질거야라는 믿음...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 실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지금 뿐.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그 다가올 미래는 언젠가 현재가 될거니까.


행복은 지금 이 순간과 접촉하여

삶과 연결될 때 느껴져야 하는 

살아있다는 스스로의 느낌이어야 한다.

평생, 현재를 그냥 보내고

미래의 어떤 순간 어떤 포인트를 행복으로 기대하며

먼훗날로 자신의 기대치를 미루고만 산다면, 

어느 날 성공이 현재로 찾아왔을 때 행복해질까?


행복이 미래의 꿈이라면

그날이 오더라도,

자신이 찾는 행복은

다시 미래로 연기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라는 해석.

무서운 말이다. 

결국은 미래는 현재가 되고

다시 미래만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구조니까.


저자는 말한다.

이런 생각구조를 갖고 사는 이유는,

지금 그대로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더불어 또하나의 매우 세속적인 고민거리 하나를 다룬다.

그건 '오해를 받는 것'.

살면서 이런저런 힘든 일을 많이 겪는 것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지며,

인간관계에서 받는 오해가 가장 큰 일이라 평했다.

한 말 또는 진의가 곡해 돼 발생했거나

누군가의 악의적 의도로 발생됐을 수도 있었을텐데,

만일 오해받는 입장이라면 이는 정말 괴로운 일이라 말한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 당하는 결과를 줄 수 있고

무엇보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는

수많은 내담자들을 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만족되기는 커녕

진심이 닿지 않는 억울한 상황...

좌절이 마음속에 쌓이는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고

병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게슈탈트 전문가로써 해법도 제시해 준다.

해법이 상황자체를 해결하는 쪽은 아니지만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구절이 이 책의 제목이다. 


'이해받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이해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


이걸 저자는 타성에 의해 

개인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 문구라고 봤는데,

난 다음 정리해 본 내담자의 해석에 좀더 동의가 됐다.

즉, 이 학술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된 

누군가의 자의적 해석에서.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무의식적인 반복들에서

상처를 입거나 상처를 주기도 한 내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옭아매 왔었다.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결국 안되는 것인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문제인가?'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


그러다 들은 이 니체의 말에서 그녀는,

아무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 못한다고 느끼는게

자신의 모순이 아니라고 느꼈던 듯 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상대의 한계이며 나아가 인간의 한계다'


그대로 온전한 존재일 수 있는데

편견, 욕심, 미해결 과제, 언어소통의 한계 등으로 인해

그럴 수 있는 상황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그로인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작위적 해석이 위로와 안심이 돼 줬다는 결론.


니체가 말한 '이해'는 

어쩌면 여러 단어로 쓰일 수 있을거 같다.


소통, 공감, 연민, 동정, 교류...


일방일수도 쌍방일 수도 있는

타인이 타인에 대한 감정의 흐름들.

이해가 소통을 유도하고,

이해가 공감을 만들고,

이해가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이해가 간당간당 교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으니. 

이는 너무 확장된 해석일까?


고요하고 차분한 강의같은 내용들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실제 저자가 한 EBS강의도 있는 걸로 아는데

한번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책의 분량으로 봤을 땐

강의보다 책이 더 많은 것을 담았을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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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 간신학 간신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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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들의 고사와 사례들을 읽어나다 보면,

직관적으로 바로 와닿는 이야기들도 많지만

일부 이야기들에서는 좀더 음미도 해야하고,

실제 제시된 상황에서의 

속는 자와 속지 않으려는 자로써의 

상반된 입장차도 구분해 가보며 

여러 방향으로 이해해 보는게 쉽진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필요한 책으로 보인다.


책이 주는 가장 큰 전제라면,

누가 속고 싶어서 속겠느냐는 

상식적인 생각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꼭 중국의 옛날 이야기 속이 아니더라도

거짓임을 알거나 이해 안가는 선택임을

알고서도 받아들이고 즐기는 사람도

실제 적지 않음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간신들이나 했을 교묘한 술수나 술책과 함께

속임을 당해도 행복해하는 

특별한 소비주체가 있음도 

한편으론 떠올려 보게 된다.


이 책은 '사기'연구와 책들로 유명했던

김영수 저자의 간신 3부작 중 하나인데,

3부작 중 유독 이 '간신학'에 만큼은 

더 흥미가 생겨 이 시리즈의 순서 무시하고

읽어보고 싶은 생각에 선택했다.

아마, 다른 간신이야기에선 사례들이 주를 이뤘다면

이 책은 그 '수법'들을 다뤘다는 측면에서

정리된 학설같은 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같은 주제에 관해

이해가 엇갈리는 듯한 부분도 자주 발견된다.

깨어있는 지성이라면 가차없이 간신의 접근을

멀리하고 단죄하는게 맞고,

본능적으로 간신의 정체도 알아보는게 필요하며

당연 멀리해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의 다른 요지에선,

간신이 적이라면 그 적을 이해하고 

내가 가진 요소가 없는 적을 이기기 위해

더럽다고 멀리만 할게 아니라 

이들의 술수를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려는 적극성도 가져보고 

어느 순간엔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니까.


물론 여기에 담긴 함의는 충분히 이해 가능하겠다.

하지만, 멀리하는 것과 배우는 것

상반되는 2가지 모두를 멀티로 받아들이는 건

좀더 분별력, 능숙함, 절제미를 요구하는 듯 한 부분이었다.

이게 만일 싸움으로 비유하자면

공격이냐 수비냐의 일도양단적인 결정은 아니라

공수를 겸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니

엇갈리는 듯해도 접점이 생겨야 할 부분을 언급한 것이고, 

인간관계 속 사회성이나 적응능력을 뜻하는 바도 크니

이해 못할 부분까지는 아니겠지만,

지금 이걸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상반된 2가지 경향성을 한몸에 장착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책엔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해봤던

하나의 고사를 소개해 본다.


요언공명(謠言共鳴).

유언비어가 공감을 얻는다는 뜻으로

헛소문을 퍼뜨림으로써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작용을 설명한 파트다.

흔한 수법의 하나로 설명되는데

여기서는 이 뜻 자체보다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사례가 더 마음을 움직인다.


'사기'에 등장한 고사로

이름난 효자 증삼(曽參)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 증삼은 공자의 효경을 지은 저자라고도 언급된다.


어느 날, 동명이인인 다른 증삼이

살인을 벌인 사건이 동네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 증삼이 이 증삼이라 생각해 전하기 시작.

이 얘기를 듣고 효자 증삼의 이야기인 줄 안 누군가는

가장 먼저 증삼의 어머니에게 찾아와 

아들사건이라며 급하게 알려준다.


'당신 아들이 사람을 죽였소!'


베를 짜고 있던 증삼의 어머니는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잠시 후, 또다른 사람이 찾아와 재차 알린다.


'당신 아들이 사람을 죽였소!'


이또한 어머니는 믿지 않았고 하던 일만 계속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전하는 상황...


'당신 아들이 사람을 죽였소!!'


이번엔 그의 어머니는

문도 아닌 담장을 뛰어넘어 아들을 찾으러 달려 나간다.


'사기' 속 이 이야기에 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 글귀를 실었다.


'증삼도 어질고,

그의 어머니 또한 자식을 믿었지만,

3명이 의심하고 전하자 

그 어머니도 결국은 두려워 하였다'


살면서 보여온 행동이 있고

다름아닌 지척에서 그런 자식을 보아왔을 어머니였지만,

3명이 똑같은 사실을 알려오자 

결국은 안 믿을 수 없었다는 것.


사실, 이이야기가 '유언비어'라는 

많이 알려진 고사성어와 

간신의 흔한 술수의 예로 소개됐지만,

독자로써는 다른 방향의 생각꺼리도 갖게 되었다.


현대적 시각으로 사건을 조금 변형해 보면

흡사 보이스피싱을 겪는 상황과도 유사했다.

꼭 거짓에 속은 상황이나

믿기 어려운 상황에 타인으로 의해 노출돼,

주입 되버리듯 믿어버리게 되는 상황으로써 

국한짓기 애매한 부분도 보였고.


책 속 다른 이야기들 중에

간신의 술수를 피할 수 있게 해 줄 태도로

크로스체크 즉, 교차검증을 언급한 사례가 있는데,

위 증삼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도

단순히 유언비어의 사례로써만 아니라

교차검증이 필요한 상황 속에 빠진 경우일 수 있겠고,

현명한 판단이나 생각만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결정을 내리긴 어려운 경우라 보여졌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찌 흘렀던

2번이나 믿지 않던 어머니였음에도 

진짜 대문도 아닌 담을 넘어 뛰쳐나갔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3번째 모습이 결론이 됐다면,

아마도 1번째 2번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베짜는 일을 손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본인 정신은 잃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겠다 싶었고,

그런 판단이 단순 속임을 당한게 아닌

모르는 상황파악과 걱정에 만들어 낸

상식적인 대응일 수도 있다고 본다면

더욱 생각할 꺼리는 많아지겠다.


하지만, 책의 의도대로만 우선 보고 

누군가 믿지 않을 수 없게

3번의 거짓을 전해온다면, 

굳건한 믿음도 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고사이기에

책이 전하는 의미가 분명한 이야기이긴 하다.


책은 간신의 여러 술책을 논한다.

직접적으로 이 책 내용이 더 와닿으려면

이젠 존재하지 않는 왕과 신하의 시대이지만

국가적인 업무와 관련된 직업의 사람들이거나

관직에서 결정을 내리는 위치의 사람이어야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주는 귀감은 결국,

간신 그 자체가 아닌

간신과 같은 사람이 가진 본성과 

간신과 같은 사람과 엮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지점에서

일반인들에게 또한 효용이 있을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나 스스로도 그런 마음으로 읽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상황을 안 만나고

이런 인물들과 안 만나는 인생이 최적이겠지만,

아쉽게도 타인 뿐만이 아닌

가족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이 이 책 속 이야기들처럼

충언을 올리는 신하는 내몰리고

교언영색하는 간신같은 이들만이 

살아남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 당사자들 중 간신만을 제외하고는

어떤 스탠스를 갖춰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지

관찰자로써 드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쨌든 좋은 책내용에서 받은 영감으로

어두운 환경에 매몰되지 않을 

자구책을 모색할 줄 아는 삶이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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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해설과 그림이 있는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릴랜드 라이큰 글,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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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읽기 전에,

글의 형식으로써 설명되고 강조된

이 책의 컨셉 '우화'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우화]

:동물이나 무생물을 의인화 해서

그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풍자와 교훈을 줄 목적하에 만들어진 

짧은 이야기들


짧은 이야기들이 주로 우화의 형식이라면

천로역정은 긴 스토리니 좀 다른건가 싶었다.

하지만, 하나씩 여행기처럼 읽어가니

결국 하나의 여정 안에 여러 만남과 스토리가 

우화형식으로 들어있다 보니 결국은 

짧은 우화들이 긴 우화로 연결된 

결합의 우화로 봐도 될 거 같았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도

그냥 이야기였지 형식으로 느꼈던 바는 없었다.

이렇게 우화의 정의를 일부러 찾다보니 

왜 이솝이 만든 그 이야기도 

왜 우화라고 불렸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여우가 말을 하고 자기 상황을 변명하고,

강에 비친 개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짖다가 뼈를 놓치고.

결국, 의인화 된 동물들이였지만

모두 현실성 있는 우화 형식의 캐릭터들였다는 것도

이제서야 어른의 감성으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천로역정의 이야기 중, 낙심의 늪과 절망거인도 

결국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위한 

우화적 장치들이었는데 그 둘을 돌아보고자 한다.


주인공인 크리스천은 묻는다.

가라고 해서 간 길이었고

통과할 문을 가리키기에 

그냥 향해 걸어갔을 뿐인데,

자신은 이 늪에 빠지고 말았노라고.

그 질문을 받은 도움이란 인물은

크리스천에게 왜 디딤판을 안 밟았냐고 묻자 

크리스천은 엉뚱한 답을 해온다.

두려워서 피해 걸으려다 보니 

늪에 빠지게 됐노라고.

늪에 빠진 크리스천...

그는 도음을 만났을 때,

단숨에 끌어 올려지길 우선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왜 먼저 나간 후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가?

빠져있는 상태에서 왜 빠져 있는지부터 먼저 설명하려 하고

그게 일장연설이 끝난 후에서야

다 들은 도움이 손을 잡았으며

그 늪 속에서 타의적으로 끌어올려진 건가?

빠진 자가, 구해줄 수 있는 자를 만났는데

끌어 올려지기 전에 자신의 푸념부터 토해 놓았다.

늪에 빠져있었다면 점점 더 빠져들어 위험한데

사정얘기가 그에겐 구출보다 먼저인 그 모습...


해설에서 이 낙심의 늪은,

어리석어 빠진 함정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늪이 만들어진 원리는 

오물처리장 같은 더러운 것들의 종착지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의 거룩함과 자신의 죄를 인식함으로 인한

좌절같은 기운들이 모여

낙심의 늪이 만들어진거라 그려졌다.

밟지 않았느냐 물었던 그 디딤판은

죄의 사함을 의미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찬은 그 디딤판을 밟지 않고

오히려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요행을 바란 그. 

디딤판 없이도 늪을 밟지 않을 수 있다 믿었고

눈에 보이는 발밑을 보며 자신의 인지를 따라

늪을 피해 통과할 수 있으리라 믿은 그다.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보단 자신을 믿었고

결국 그러다 빠진 늪 안에서도

자신의 처지부터 열심히 설명하는게 먼저였던 그.

손을 먼저 내밀어 건져지지도

자신의 급한 사정을 호소하며 도움부터 청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 늪에서 나온 크리스천은

늪 속에서 해대던 질문과는 다른 질문을 시작한다.

왜 자기같은 사람들의 통과를 위해

늪을 안전하게 건널 조치를 

미리 더 확실하게 해놓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도움은 아무리 개선한 들

늪을 뒤덮는 찌꺼기들은 어떤 디딤판이라도

덮여 버리고 만다고 설명해줬고, 

그대신 어떻게든 이 늪을 건너

안내받은 좁은 문에 다다르면

그 곳은 디딤판이 필요없는 

단단한 땅의 시작이라 얘기해준다.


이 우화에선 건너기까지의 위험함만이 주제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빠지고 말 늪의 개선을 꿈꾸지 말고

건너서 발디딜 곳이 충분한 땅이 있는

좁은 문에 도착함이 나을거란 얘기를 우선 해주는 것.

그런데 그 좁은 문...

그 좁은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 있어보인다...


또 하나의 이야기, 절망거인.

의심하는 성의 주인 절망거인은 

주인공 크리스천과 소망을 만나자 가두고 구타한다.

마지막엔 스스로 자살하라 강권하기도 하고.

그런 고난 속에 소망은 크리스천을 독려해 주지만

절망거인은 매일 찾아와 이들을 괴롭힌다.

그러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빠져나갈 열쇠가 있음을 알고

의심하는 성을 빠져나와 다시 길 위에 나선다.

그리고 자신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절망거인의 구역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메세지를 남겨둔다.


처음 이 거인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땐

잭과 콩나무의 거인처럼 종국엔 

잭이 이겨 없어지는 거인역할인가 상상하며 읽어갔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거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거인의 마지막은 없었고

계속 고통받다 탈출하는 주인공과

그 벗어남으로 거인과의 인연이 끝났음만 그려진다.

주인공도 살고 거인도 살아있는 결론.

이 이야기를 마무리 해주는 장치로는

다른 이의 발길은 이 성안으로 닿지 않도록

선경험자인 크리스천이 경고하는게 다였다.


천로역정은 여정 속 어떤 고난이던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 경험했고 지나가는게 다다.

그리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거나

경험한 이가 후에 올 누군가를 위해 

조심하란 경고 정도를 해주게 다다.

모두의 경험은 각자 새롭겠지만 

결국 그 길 위에선 하나고 반복을 만들어내는 여정.


그 상상력과 각자에게 맡겨진 해석 때문에

이 책이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본다.

달라지는 해석들로 저마다

여러번 읽게 되는 책이라 칭해진 거 같고.


우화인 줄 알고 읽었지만

현대적인 우화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신의 섭리를 주제로 했기 때문일까?

깊고 경건해지는 바가 분명 존재한다.

인간으로써의 외소함을 일깨워주는 울림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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