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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극단에 서는가 - 우리와 그들을 갈라놓는 양극화의 기묘한 작동 방식
바르트 브란트스마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10월
평점 :
양극화를 경제문제로써만이 아닌
인간관계와 심리관계가 가진
역학적 측면에서 바라보게 돕는 책이다.
양극화가 존재하기 위해서
크게 5가지 역할을 상정했다.
이는 이론적 접근과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고
궁극적으론 갈등해소를 위한
실질적인 양극화 전략을 채택하는데도
가시적인 도움을 준다고 판단된 도구다.
5가지 각각의 역할엔 모두 장단점이 있다
기회와 함정 등 각 역할의 작동방식마다
장단점이 대가처럼 따른다.
역할에 옳고 그름은 없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한번쯤
그 모든 역할을 다 해보았다고 생각될 만큼
고정적이지 않은 입장을 대변하니까.
그렇기에 그냥 역할의 작동방식을 보여줌으로써
각 역할을 선택할 때 조금더
타인까지 배려하며 고심할 수 있게
도우려는 것 뿐이라 밝히는 저자.
무심결에 선택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선택이 되리라 희망하면서.
1. 주동자
양 극단의 가장 끝부분에 존재.
해당하는 극단적 사고에 연료를 공급하는 임무를 띤다.
극단적인 양 극의 리더역할이 주동자다.
유의하면 좋은 건,
그 반대쪽 극(polar)엔 반드시
똑같은 일은 하는 반대사고의 주동자가 존재하기 때문.
양극은 생각은 아주 확고하며,
대부분 도덕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음으로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결코 99%도 아닌 100% 자신이 옳다고 생각으로 선동함으로써.
이런 확신이 같은 극쪽엔 에너지를 공급한다.
주동자는 토론이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가능한 새로운 이슈를 양산해
자신의 정당성을 지속하고 제시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반대쪽은 정반대로 공통점이 없다는 것만 부각시켜
어느 쪽에 설지만이 선택사항인 비교대상일 뿐.
주동자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면 리더 역할을 잃게 되므로
상대를 고려하는 주동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주동자가 행동을 바꾸는 것은 체면을 잃는다는 것과 다름 없기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단점은 이런 주동자는 항상 눈에 띤다는 것.
그로인해 때론 본인의 희생이 요구될 수 있다.
주동자의 심리는 매우 독특하기에
도덕적 독선은 동기를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과 타인의 에너지가 되지만,
양극단 안에서 벌어지는 자체 역학의 변덕은
주동자의 앞날마저 알 수 없게 만들수 있다.
자기들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희생을 요구하니
애매한 상태에서는 환영받을 수 없는 요소다.
2.동조자
양 끝단의 주동자와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긴장구역을 만든다.
주동자가 흑백논리를 펴고
긴장구역에서 선택하게 만들 때
동조자로써 활약이 생긴다.
동조자는 완전한 찬성이 아닌
일단 양 극단 중 한 영역을 선택한채 활동을 지속한다.
극단적이지 않고 주동자와 차이가 있음을 스스로 표출한다.
주동자가 요구하면 일부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나
주동자와 동조자는 역할 분리가 돼 있다.
장점은,
양쪽 진영에서 최고의 것만 취할 수 있고
양극화의 바깥쪽에 존재하면서 지지자에도 속할 수 있다
완전히 극단적이지 않아 언제나 토론할 준비가 돼 있다.
이건 동조자 스스로가 후하게 스스로를 평가한 것이고,
이들은 순진하지 않으며,
위기가 임박하면 행동에 나서
한쪽에 뼈를 묻는 선택을 한다.
단점은,
결국 자신의 색깔이 드러남으로써
어디를 지지하고 어떻게 느끼는지가
상대 진영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정해진 후 주저함과 망설임은 배신행위로 보일 수 있기에
마치 주동자의 태도와 위치처럼 일방통행에 동의하지만
주동자가 너무 멀리 갔다고 판단시엔 거리를 두며
자신의 독립적 사고와 판단 능력을 잃지 않으려 한다.
동조자의 분위기와 열기는 주동자가 가장 잘 판단한다.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에서
흑백사고를 이해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해야
생존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에서,
동조자란 이런 생물학적 반사작용에
굴복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위험이 다가오면 안전하기를 바라는게 인지상정이라
홀로 서기 보다는 무리에 둘러쌓이길
선호하게 되는 면도 생긴다.
논거로 정당화 하기 바쁘고
상대의 부정적인 정보만 채택한다.
또다른 동조자의 특징엔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걸 동의하는
그런 사람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결국, 주동자와 동조자는
생산적인 토론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적으론 중간지점에 도달해야
모두의 관점에서 중심이 될 수 있는 대화 가능성이 있고
그래야 모두 공감할만한 질문과 딜레마가 형성 될텐데,
이들의 사고방식은 본인들을 위해 2분법적이여야 하므로
합리적인 토론이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음 나올 방관자의 필요성이 생긴다.
3.방관자
양 극으로 치우친 주동자와 동조자 사이에서
거리를 두면 그 중간지대가 생기고,
여기엔 어느 편도 들지 않는 회색지대가 있다.
간단하게 이를 무관심이라 표현한다.
어떤 극쪽의 주동자의 말에도
감명받지도 않고 귀담아 듣지도 않고
게임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혹은 반대로, 너무 강한 참여의식 때문에
명확한 선택을 주저하는 게 방관자로 나타날 수 있다.
방관자들을 움직이는 건 뉘앙스지
방관하게 만드는 무관심이 아니다.
즉, 중간에 있는 이들은
선택적이고 의도적으로 중간에 머문 이들다.
차이와 참여로써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중립성으로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부류.
주동자들은 이들을 목표로 삼지만 반드시 원하진 않는다.
왜냐면 자신과 다르게
흑백논리로 접근하지 않는 사람이라
동화되지 않는 눈엣가시이기도 하니까.
방관자 자체는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냥 단순히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방관자란 무리로 묶이게 된다.
흑백논리의 장점은 가시성인데
이게 정체성과 확신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다.
이런 가시성은 사람들에게 동기가 되어주고
궁극적으론 의사소통의 촉발선도 된다.
결국 어느 한쪽의 흑백논리에
선의를 갖고 접근하느냐가 방관자의 존재적 딜레마.
4.중재자
앞의 3가지 역할은 긴장지대에 속하지만,
중재자는 양극화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부류로써
관찰하고 결함을 찾아낸다.
결함을 이유로 개입하고 대화를 주선하고자 노력한다.
합리적이라면,
항상 정반대끼리는 견해와 비전을 교환하는게 가능해야 하고
서로의 분명한 차이점과 유사성도 이해하듯 알고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재자의 무기는 '반대 담론'이란 치유법이자 도구로,
반대의견을 다각적으로 고려하게 만들어
주동자와 동조자가 중재적 입장을 취하도록
노력하고 유도해서 만들려 한다.
주동자가 반대담론의 발언권을 인정한다면 그건
중재자들이 자극이 되줄 원인제공도 할 수 있어서이지
그들의 순수함에 동화됨이 아니다.
대화의 기회는 주동자에게만 있는데 중재자가 오해하는 건,
협곡 중간에 붕 뜬 상태의 다리를 짓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공중에서 중간쯤 시작된 붕뜬 중재는 마무리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즉, 성공할 희망이 없는 임무와 같다.
중재자의 활약은 결국 주동자의 단독발언만 확장시키기도 한다.
중재자와 비슷한 역할엔 언론이 있는데
미디어는 양극화의 기폭제 역할도 한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가시성 라인을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토론이 아닌 논쟁만을 보여줄 뿐임에도 말이다.
즉, 연료공급 역할을 하지 않는 본질적인 중재자 역할도 필요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존재다.
5.희생양
양극화가 과도해지고 심각해질때 생겨나는데
양극화의 역학이란
동조자가 많아지면 중간자는 감소하는 식.
기세가 강해진 동조자는 새로운 주동자가 되어
기존 주동자가 통제력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일종의 내전이다.
이럴땐 중간지대는 접근 금지구역이 된다.
중간지대 허용범위를 기준으로
양극화 압력을 측정할 수 있는데,
그 허용도가 '0'이 될 때 희생양이 생긴다.
즉, 반대측에 관용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는 말.
희생양이 양극단에 존재하지 못하는 건
거긴 오직 적의 존재만 있지
희생양이란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가 있을 중간지대엔 중재자가 존재하므로
중재자들이 희생양 후보에 딱 맞는다.
올라간 긴장도에 첫 희생자는 결국 중재자가 되고
이런 시기의 중간지대는 위험지대다.
변덕과 조바심 때문에 주로
공격해도 주로 방어만 한다고 여겨지는
공적인 위치의 중재자들이 희생양이 된다.
죄책감과 분노를 해소하는
비운의 안전장치로 활용되는 셈.
희생양이 되어가는 중재자는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닿기 바라지만,
양극화 된 분위기 안에서의 의견전달은
오로지 주동자와 동조자가 원하는 말만 해야 존재한다.
양극화 때 중재자의 의견은 주동자 쪽에서 들을 땐
마치 비판하거나 반박하는 적의 전령처럼 보이기에
희생양의 운명은 생존이 희박해진다.
결국 이런 5가지 요소로 그려볼 수 있는
양극화 각 진영의 구도와 대립은
해법을 위해 갈등의 구조를 가져와 풀어보고 있다.
갈등과 양극화는 수면에 떠있는 빙하로 표현된다.
떠서 눈에 보이는 건 갈등,
수면 아래의 빙하는 양극화.
갈등의 성장 및 쇠퇴 사이클은
양극화에 적용가능한 이론으로 보며
갈등은 다음과 같이 크고 줄어든다.
준비→강화→악화→유지→재연결→인정→화해
산 정상을 타고 내려오는 그림으로 상상할 때
유지가 꼭대기 정상이 될 것이다.
평화상태의 반대가 갈등은 아니라고 설명하는 저자.
만일 그렇다면 갈등은 대하기 싫은 부정적 의미만 있을 뿐이기에
생각의 전환이 꼭 필요한 대상이 갈등이라고 전한다.
양극화를 막기 위해선 타이밍이 전부일 수 있고,
변화시키기 위해선 어젠다를 바꾸는 식으로
목표, 주제, 위치, 어조
이 4개 항목의 변화로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 느낌은 변화보다는 상쇄의 느낌에 가까웠다.
혼자선 쉽게 해 볼 수 없는 이론을 접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