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 깊은 내면의 ‘나’를 만나는 게슈탈트 심리상담 EBS CLASS ⓔ
김정규 지음 / EBS BOOKS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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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이론이 주장하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속성이자 착각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객관적 자기 것이 아닌

어릴 적 스스로 적응하기 위해 창조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 표현에서 주목되는 단어는

적극적과 능동적이란 말들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니,

인위적 변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그 발상에 핵심이 있겠다.

따라서, 저마다의 생각은 정답이 없다.

그저 듣는 이의 인내심과 통찰력이 필요할 뿐이지,

불가역적인 인지오류로 접근할 필요도 없고

그럴 듯 하더라도 냉철하게

실제 존재하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했다고 공감하는 것도 보류해야 한다.

묻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정확한 상황파악이 가장 중요했다.


누군가는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창조해 낸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이 있으니,

누군가의 자기 설명이 됐건

그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해 들어줄 필요가 있고

속단 보다는 시간과 복기의 강약도 필요한데,

저자는 어떤 생각이던 충분한 지지가

상담 중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보는 측면도 있었다.


읽다보면 이게 게슈탈트 이론인지

저자가 다른 이론과 융합했다는 것들 중

불교적 색채의 콜라보인지 헛갈리는 것도 다수 있었지만,

이질적이지 않고 음미해 볼 결과물이라 느껴졌다.

예를 들어, 많이들 이야기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로써,

현재를 잘 사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를

어떤 책보다 와닿게 설명한 부분이라 느꼈다.

  

요약해 보자면, 무언가 추구만 하는 삶을 산다면

결코 현재를 맛보는 삶은 없다는 게 핵심.

현재가 부정당하고 미래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삶...

그런 현재가 부정적이고

미래 또한 밝지 못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그려지는 미래란

결국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세계란다.

내가 이해한 이 말의 뜻은

현재는 없고 다가올 미래만을 기다린다는 말 같았다.

언젠가 다른 서평에서도 인용한 거 같은데,

홍수로 물에 잠긴 집을 탈출하고자 

지붕 위에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면서

고무보트로 구조하러 온 구조대를 보내고

하늘에서 내려올 구원의 헬기나 신의 손길을 기대하는

간절한 바램과 비슷하진 않나를 떠올리게 됐다.


저자는 말한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절대로 올 수가 없다.'


시간이 존재하는데 물리적으론 옳은 말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추론해 볼 땐 맞을만한 논리다.


노력하면, 

언젠가 때가 오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미래의 그 시점에 난

행복해 질거야라는 믿음...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 실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지금 뿐.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그 다가올 미래는 언젠가 현재가 될거니까.


행복은 지금 이 순간과 접촉하여

삶과 연결될 때 느껴져야 하는 

살아있다는 스스로의 느낌이어야 한다.

평생, 현재를 그냥 보내고

미래의 어떤 순간 어떤 포인트를 행복으로 기대하며

먼훗날로 자신의 기대치를 미루고만 산다면, 

어느 날 성공이 현재로 찾아왔을 때 행복해질까?


행복이 미래의 꿈이라면

그날이 오더라도,

자신이 찾는 행복은

다시 미래로 연기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라는 해석.

무서운 말이다. 

결국은 미래는 현재가 되고

다시 미래만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구조니까.


저자는 말한다.

이런 생각구조를 갖고 사는 이유는,

지금 그대로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더불어 또하나의 매우 세속적인 고민거리 하나를 다룬다.

그건 '오해를 받는 것'.

살면서 이런저런 힘든 일을 많이 겪는 것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지며,

인간관계에서 받는 오해가 가장 큰 일이라 평했다.

한 말 또는 진의가 곡해 돼 발생했거나

누군가의 악의적 의도로 발생됐을 수도 있었을텐데,

만일 오해받는 입장이라면 이는 정말 괴로운 일이라 말한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 당하는 결과를 줄 수 있고

무엇보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는

수많은 내담자들을 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만족되기는 커녕

진심이 닿지 않는 억울한 상황...

좌절이 마음속에 쌓이는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고

병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게슈탈트 전문가로써 해법도 제시해 준다.

해법이 상황자체를 해결하는 쪽은 아니지만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구절이 이 책의 제목이다. 


'이해받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이해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


이걸 저자는 타성에 의해 

개인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 문구라고 봤는데,

난 다음 정리해 본 내담자의 해석에 좀더 동의가 됐다.

즉, 이 학술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된 

누군가의 자의적 해석에서.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무의식적인 반복들에서

상처를 입거나 상처를 주기도 한 내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옭아매 왔었다.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결국 안되는 것인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문제인가?'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


그러다 들은 이 니체의 말에서 그녀는,

아무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 못한다고 느끼는게

자신의 모순이 아니라고 느꼈던 듯 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상대의 한계이며 나아가 인간의 한계다'


그대로 온전한 존재일 수 있는데

편견, 욕심, 미해결 과제, 언어소통의 한계 등으로 인해

그럴 수 있는 상황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그로인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작위적 해석이 위로와 안심이 돼 줬다는 결론.


니체가 말한 '이해'는 

어쩌면 여러 단어로 쓰일 수 있을거 같다.


소통, 공감, 연민, 동정, 교류...


일방일수도 쌍방일 수도 있는

타인이 타인에 대한 감정의 흐름들.

이해가 소통을 유도하고,

이해가 공감을 만들고,

이해가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이해가 간당간당 교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으니. 

이는 너무 확장된 해석일까?


고요하고 차분한 강의같은 내용들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실제 저자가 한 EBS강의도 있는 걸로 아는데

한번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책의 분량으로 봤을 땐

강의보다 책이 더 많은 것을 담았을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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