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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해설과 그림이 있는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릴랜드 라이큰 글,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4년 2월
평점 :

이야기를 읽기 전에,
글의 형식으로써 설명되고 강조된
이 책의 컨셉 '우화'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우화]
:동물이나 무생물을 의인화 해서
그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풍자와 교훈을 줄 목적하에 만들어진
짧은 이야기들
짧은 이야기들이 주로 우화의 형식이라면
천로역정은 긴 스토리니 좀 다른건가 싶었다.
하지만, 하나씩 여행기처럼 읽어가니
결국 하나의 여정 안에 여러 만남과 스토리가
우화형식으로 들어있다 보니 결국은
짧은 우화들이 긴 우화로 연결된
결합의 우화로 봐도 될 거 같았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도
그냥 이야기였지 형식으로 느꼈던 바는 없었다.
이렇게 우화의 정의를 일부러 찾다보니
왜 이솝이 만든 그 이야기도
왜 우화라고 불렸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여우가 말을 하고 자기 상황을 변명하고,
강에 비친 개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짖다가 뼈를 놓치고.
결국, 의인화 된 동물들이였지만
모두 현실성 있는 우화 형식의 캐릭터들였다는 것도
이제서야 어른의 감성으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천로역정의 이야기 중, 낙심의 늪과 절망거인도
결국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위한
우화적 장치들이었는데 그 둘을 돌아보고자 한다.
주인공인 크리스천은 묻는다.
가라고 해서 간 길이었고
통과할 문을 가리키기에
그냥 향해 걸어갔을 뿐인데,
자신은 이 늪에 빠지고 말았노라고.
그 질문을 받은 도움이란 인물은
크리스천에게 왜 디딤판을 안 밟았냐고 묻자
크리스천은 엉뚱한 답을 해온다.
두려워서 피해 걸으려다 보니
늪에 빠지게 됐노라고.
늪에 빠진 크리스천...
그는 도음을 만났을 때,
단숨에 끌어 올려지길 우선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왜 먼저 나간 후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가?
빠져있는 상태에서 왜 빠져 있는지부터 먼저 설명하려 하고
그게 일장연설이 끝난 후에서야
다 들은 도움이 손을 잡았으며
그 늪 속에서 타의적으로 끌어올려진 건가?
빠진 자가, 구해줄 수 있는 자를 만났는데
끌어 올려지기 전에 자신의 푸념부터 토해 놓았다.
늪에 빠져있었다면 점점 더 빠져들어 위험한데
사정얘기가 그에겐 구출보다 먼저인 그 모습...
해설에서 이 낙심의 늪은,
어리석어 빠진 함정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늪이 만들어진 원리는
오물처리장 같은 더러운 것들의 종착지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의 거룩함과 자신의 죄를 인식함으로 인한
좌절같은 기운들이 모여
낙심의 늪이 만들어진거라 그려졌다.
밟지 않았느냐 물었던 그 디딤판은
죄의 사함을 의미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찬은 그 디딤판을 밟지 않고
오히려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요행을 바란 그.
디딤판 없이도 늪을 밟지 않을 수 있다 믿었고
눈에 보이는 발밑을 보며 자신의 인지를 따라
늪을 피해 통과할 수 있으리라 믿은 그다.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보단 자신을 믿었고
결국 그러다 빠진 늪 안에서도
자신의 처지부터 열심히 설명하는게 먼저였던 그.
손을 먼저 내밀어 건져지지도
자신의 급한 사정을 호소하며 도움부터 청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 늪에서 나온 크리스천은
늪 속에서 해대던 질문과는 다른 질문을 시작한다.
왜 자기같은 사람들의 통과를 위해
늪을 안전하게 건널 조치를
미리 더 확실하게 해놓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도움은 아무리 개선한 들
늪을 뒤덮는 찌꺼기들은 어떤 디딤판이라도
덮여 버리고 만다고 설명해줬고,
그대신 어떻게든 이 늪을 건너
안내받은 좁은 문에 다다르면
그 곳은 디딤판이 필요없는
단단한 땅의 시작이라 얘기해준다.
이 우화에선 건너기까지의 위험함만이 주제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빠지고 말 늪의 개선을 꿈꾸지 말고
건너서 발디딜 곳이 충분한 땅이 있는
좁은 문에 도착함이 나을거란 얘기를 우선 해주는 것.
그런데 그 좁은 문...
그 좁은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 있어보인다...
또 하나의 이야기, 절망거인.
의심하는 성의 주인 절망거인은
주인공 크리스천과 소망을 만나자 가두고 구타한다.
마지막엔 스스로 자살하라 강권하기도 하고.
그런 고난 속에 소망은 크리스천을 독려해 주지만
절망거인은 매일 찾아와 이들을 괴롭힌다.
그러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빠져나갈 열쇠가 있음을 알고
의심하는 성을 빠져나와 다시 길 위에 나선다.
그리고 자신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절망거인의 구역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메세지를 남겨둔다.
처음 이 거인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땐
잭과 콩나무의 거인처럼 종국엔
잭이 이겨 없어지는 거인역할인가 상상하며 읽어갔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거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거인의 마지막은 없었고
계속 고통받다 탈출하는 주인공과
그 벗어남으로 거인과의 인연이 끝났음만 그려진다.
주인공도 살고 거인도 살아있는 결론.
이 이야기를 마무리 해주는 장치로는
다른 이의 발길은 이 성안으로 닿지 않도록
선경험자인 크리스천이 경고하는게 다였다.
천로역정은 여정 속 어떤 고난이던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 경험했고 지나가는게 다다.
그리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거나
경험한 이가 후에 올 누군가를 위해
조심하란 경고 정도를 해주게 다다.
모두의 경험은 각자 새롭겠지만
결국 그 길 위에선 하나고 반복을 만들어내는 여정.
그 상상력과 각자에게 맡겨진 해석 때문에
이 책이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본다.
달라지는 해석들로 저마다
여러번 읽게 되는 책이라 칭해진 거 같고.
우화인 줄 알고 읽었지만
현대적인 우화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신의 섭리를 주제로 했기 때문일까?
깊고 경건해지는 바가 분명 존재한다.
인간으로써의 외소함을 일깨워주는 울림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