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이란 무엇인가 2 - 교정학자가 묻고 사형수가 답하다 감옥이란 무엇인가 2
이백철 외 1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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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이지만 주관적으로 쓴 서평입니다] 


교정시설, 즉 교도소 안의 삶을

그런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들이 

바르게 이해하기란 불가능 하다.

이런 류의 책에 담긴

저자와 토크 상대방이 되어준 

한 사형수의 대담을 못 접해봤다면 더욱 더.

 

미리 밝힌 이런저런 집필의도와는 달리 

독자에게 와닿는 것이 의외로 많았는데,

보여주려 한다는 책초반 내용소개엔

가능한 오해나 억측은 피해달라는 첨언이 담겼고

이 조차도 오해를 살까 매우 조심하고 있는 것도 특이점.


어떤 진심이건 독자로써 일단 

책을 읽고 판단하기로 미뤄뒀는데,

읽는 내내 놀랐던 건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상식이란 범주 안에서 

많은 것들이 짐작으로 존재했을 텐데

내가 모르는 현실을 알게됐다는 것과

이 사형수가 보낸 시간이 묻어있고

그간 경험으로 되살아난

그의 지혜섞인 해석들이 참으로 놀라웠다.


교정시설 안의 삶에 큰 관심도 없었고

처우개선이나 진실한 교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안 믿는다기 보다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믿는 편으로

책을 읽은 후에도 획기적인 변화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케이스 바이 케이스' 속 어떤 케이스를 바라보는

고정관념만은 매우 크게 바뀐거 같다.


책을 펴낸 저자는 

교정시설을 드나들 수 있는 외부 전문가지만,

실제 책내용을 채우는 건 

그 안에서 30년째 수형 중인 사형수의 육성이다.


가볍게는 이 한사람의 인생과 

그가 저지렀던 중범죄가 어떤 것이었나를 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겪어 온 몇십년간의

교도소 내 환경 변화나 음식, 인적구성요소, 자정능력 등

매우 세세한 것들까지 이해해 볼 수 있는 글들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사형수의 식견이나 표현 능력.


적어도 60대 전후의 연령일거 같은 이 사람은

읽어온 수많은 책들을 바탕으로

사건사고나 변해 온 시대 풍조에 관해

교정전문가와 의견을 나누며 

자신만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지식이 뒷받침 된 사견이라 

무게실린 말들에 경청하게 된다.


표현 중 특이한 게 있었다, "몸부림"이란 표현.


많은 범죄의 배경엔 

그들에게 부여된 삶에

자기 식대로 몸부림치며 살아온 측면이 있는데,

실은 스스로도 형언 못할 

삶이 부여한 족쇄가 있었던거 같다고 설명할 때

몸부림 같은 단어를 여러번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해왔던 수많은 일탈들을 말하며 

그런 과거에 대해 고백하며 평하길,

이런 모든 선택 후엔 항상

최종적으로 행복이 아닌 공허거 남아

가장 힘들고 더 자신을 타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들이 아주 특별한 경험들이라서가 아니라,

외롭고 소외되고 무시받고 

인정받고 싶던 자신의 결핍을 

당시엔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삶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결국 마음놓게 된 시점은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려 

도망다니고 몸부림 쳤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잡혔을 때란 점도.


그럼에도,

독자로써 판단할 때 

이런 모든 긍정적 변화의 구심점은,

고독한 수형생활이 줬을 성찰의 시간과

그 안에서 주어진 시간을 

독서와 지혜로 채울 수 있는 선택을 한

그의 어떤 갈구가 크게 다가왔다.


보통 이런 모습을 회개라고 한다.


하지만 책 안에서

누구도 이런 말을 구체적으로

자주 쓰려고 하진 않는다.


결코 자기 변명을 위해서나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처럼 보이려는 듯

깨어난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분명 피해자는 존재하는

원죄를 저지른 당사자임은 분명할진데 말이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서만은

변화된 무언가는 확실히 느껴지고

죄를 지으며 살 동안은 모호했고 부정적이던 

세상을 향한 시선 또한

철저히 고립된 공간 속에서 

일정부분 긍정적으로 발휘되도록

변화되어 온 측면이 있는 건

수감자임을 떠나 인정해주고 싶어진다.


1997년과 2000년을 기점으로 많은게 바뀌었다는 

교정시설 안의 삶들도 알 수 있었고,

그 안에서 겪은 그들만의 코로나 사태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건 저자나 이 사형수 모두

피해자들에게 가해자가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오해는

다른 식의 2차 가해가 될까봐 조심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죽음을 죽음으로 갚지 않았다는 점이

많은 사람에게 불합리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그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그저 공짜로 주어진 의식주란 측면으로 

과분한 행복이라 분노하기에는 

기존 상식이 바뀌는 부분들도 많았다.


살아가는 공간으로 감옥을 이해해 본 

책이 준 특별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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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자기 확신에 관하여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솝희 옮김 / 레디투다이브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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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속도가 나야하는 보통의 뚜께임에도 

한권을 다 끝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이미 읽었던 단행본 '자기신뢰'와 

같은 저자의 책인 이 책의 차이가 

과연 뭔지 의문을 갖고 이해하려 읽고보니 그랬다.


일단, 나와 같은 의문에서 

이 책을 출발할 사람들을 위해 선험자로써 

그 질문에 대한 팁을 주겠다.


유명한 책 '자기신뢰'는 이 책 중 

한 챕터만을 차지하는 부분으로써,

더 정확하게는 1841년 출간된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집 

'First Series' 중 일부가 '자기 신뢰'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읽고 싶던 건, 

단순 '자기신뢰' 때문이 아닌

'자기 확신'이란 제목을 가진 이 책이

자기신뢰 이미지와 비슷한 듯 

보완적 뉘앙스를 띄기에 읽고 싶었던건데,

아쉽게도 이런 제목은 원제 '1st 시리즈'와는 관계없이

독자의 선택과 이해를 위해 붙인 제목이라 이해된다.


하나더 이 책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에 관한 정보나

그가 쓴 저작들에 관한 정보를 따로 다루는 부분은 없다.

이런 부분들은 오히려 전에 읽은 

단행본으로부터 다시 얻을수 있었는데,

그로인해 이번 원본과 이전 책을 비교하며

의미있는 독서를 해볼 수 있었고,

'자기신뢰'를 먼저 읽어 봤거나

나처럼 그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겐

'자기신뢰'가 담긴 원전 전체를 읽어 본다는

그런 의미는 줄 수 있는 구성이겠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란 이름은

수많은 책들에서 아무 관계없이 

어떤 한 챕터를 열기전 뜬금없이 마주칠 수 있는

명언과 그 말을 한 인물로 등장했던 걸 

기억력 좋은 사람이라면 떠올려 볼 수 있을 이름같다.


나에게는 그 정도 인연의 모르는 누군가였지만

반년 전쯤 읽었던 꽤 괜찮았던 자기계발서에서

그 저자가 매년 한해의 시작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으며 시작한다는 말에

책 자체를 읽어보게 됐는데,

그때나 지금 이 책을 읽기 전까진 그 '자기신뢰'란 책이 

이 에세이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은 몰랐었고.


유명한 이 '자기신뢰' 이외에도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들은 명쾌하다.


저자 자체가 추구했고 담고자 했던게 '자기 신뢰'로 대표되는 

'아무리 신을 믿더라도 자신을 놓고 쫓아가듯 믿지 말고

자신에 관한 믿음을 지닌채 달려가라'는 주장을 담기에

문장마다 실린 거의 모든 뉘앙스들은 

읽는 독자들 본인들이 1인칭 시점에서 자신만의 판단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힘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기에 그러하다.


책 속 유명한 설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하는데

이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내가 이해하는 바가 

다소 차이나기에 정리겸 해본다.


'길거리에 술을 먹고 쓰러져 잠든 한 남자...

그를 업어와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힌 후

공작의 침대에 공작과 같은 매무새로 단장시켜 눕혀놓았다.

술에서 깨 일어난 후 그 남자는 말한다.

"이제서야 내 누군지 알겠다"라고...'


책 자체에서 전달하는 바는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제정신을 차린 인간에 대한 비유이기에.


하지만, 술취한 남자가 공작의 침소에서 깬 후

자신을 공작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마냥 정상적인 깨달음처럼 와닿지만은 않았는데,


원래 자신의 가치를 망각하고 살던 누군가가

우연히 고귀한 자리에 놓여지자 

자신이 원래 그리 고귀한 자임을 깨닫는 것인지,

아님, 술에 취해 인사불성으로 떠돌던 실제 공작 자체가

지인들의 수고로 자기 집으로 옮겨져 와서는

술이 깬 후 순수하게 읊은 말인진 알 수 없겠으나,

공작의 모습으로 그 침대에서 깨어난 걸 

깨달음이란 은유로 표현하고 싶어한

랄프 왈도 에머슨의 뜻이 얘기와 같이 이어지니

정확하게 의미하고자 하는 분명할 것이고.


하지만, 책은 

처음부터 술취한 자를 공작이라 칭하지 않았고

공작이던 아니던 공작처럼 깨어났을 때

공작같은 신분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고결성만을 부각시켰다.


만일, 이 남자가 공작이 아닌 사람이란 전제를 완전 무시해야만 한다면

이 이야기가 주려는 교훈엔 억지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리플리 증후군'이나 '뮌하우젠 증후군' 등

현실의 나와 이상적인 나와의 간격이 모호한

해리된 판단능력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나,

술과 공작이란 대비가 깨달음으로 치환되기엔

술은 완벽한 타락이고 공작은 선이란 동의가 쉽지 않아서.


'자기신뢰'란 챕터와 그 전체를 담은 책이 가진 상징성을 넘어

자기 확신, 자기 신뢰, 회복탄력성 같은

비슷하지만 분명 묘하게 다른 

뉘앙스들의 참뜻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겐

한번쯤은 거쳐가면 좋을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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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리트들은 사주를 보는가? - 서울대 출신 IT 전문가가 알려주는 사주풀이
김대영 지음 / 어깨위망원경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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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흐르듯이 말하듯이 서평을 써보고자 한다.


사주란 말을 꺼내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말을 꺼내는 나도 사주는 배워 봤음에도

누군가가 사주를 믿냐 안믿냐만을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아쉽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답 대신

나만의 정확한 답을 내놓고 싶다.

내놓는 답은 '믿지 말라'지만

내 안의 답은 '믿는다'라는 이율배반적일 대답으로.


저자는 정해일주를 가진 

서울대 출신 공대생의 이력을 가진 삶을 살았고

지금은 전업 역학자로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있는 듯'이라고 해보는 건, 

저자의 약력이 소개된 부분에

역학관련 SW개발자나 유튜버로써의 부분들은 있지만

굳이 역학자로 소개하려한 부분은 없는듯도 해

독자로써 역학자로 확정지어 부르는 게 좀 그렇다.


책을 폈을 때 

내게 가장 처음 들어오던 건 영화 '파묘' 언급이였다.


아주 신기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 읽기 하루 전 봤던 이 영화를

책첫장에서 다시 만났다는 우연은 있었다고는 해야겠다.


보고는 싶었던 영화라 처음에 봤을 땐 

대강 보고 나중에 다시 봐야지 했다가

어제에서야 2번째 기회를 가진 셈...


마지막 장면쯤 주된 갈등이 해결되는 장면에서

최민식은 오행원리를 담은 대사를 쳤다.

일본에서 한국에 심은 인간 대못이라는 설정을 모티브로.


영화가 아주 오컬트 하지만은 않다는 

의외의 반증이 될 대사도 있는데,

한국에서 발견된 일제시절 박힌 쇠못들이

단순 측량을 위해 필요했고

그게 와전됐다는 조사가 이미 있다고

영화 내에서 언급하기 때문이다.


영화야 이 쇠못이 원래 떠도는 부정적 설대로 

한국정기를 끊는 용도라 말하는 소재임에도,

쇠말뚝이 지적도를 위한 측량도구였다는 

연구와 이론도 소개해 놓음으로써

2개의 가설을 다 모르는 사람들이나

1개의 설 중 하나만 아는 사람들에겐 

매우 큰 판단근거를 던져주기도 한건 

처음 볼 땐 놓쳤었던 장면.


이야기가 다소 샜는데, 

최민식의 이 장면속 마음속 독백이 

의미하는 바가 이 책과 연계해 좀 보면

의외로 좋겠다 생각해서 꺼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 보려한다.


1만명의 적을 벤 큰 키의 일본무장은

일본 음양사에 의해 한국에 심어지는 

'인간 대못'이 됐다는 설정이고,

게다가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이 죽은 무장의 존재는

금(金) 즉 칼로써 철을 의미하는 동시에

화극금인 불타는 칼로도 설명되었다.


여기에 죽음의 위기에 놓인 최민식은

이 무사를 상징하는 오행 요소 금(金)을 극하는 무기로

자신의 부러진 곡괭이 자루를 움켜잡는다.

금을 극하는 목(木)으로써.

사실 원리로는 되려 금극목으로

금이 목을 극하는 관계설정이라야 맞겠지만

그냥 대칭관계로써 금과 목이 서로 

상극관계로 설정한 듯 싶다.

화극금이고 금극목이지

단어배치상 목극금은 아닐테니까.

그래도 여기서는 목극금...


이 설정에 하나를 더 더해,

백말피에 자신의 피까지 섞인듯한 핏물들로

나무쐐기로 쓰일 자루에 손으로 피를 바른다.

피를 물(水)로 말하며 이걸 바른 후 

'물에 젖은 나무'라 일컫는 최민식...

즉, 불타는 칼(화금)은 젖은 나무(목수)로 무찌른다는...


사주가 아닌 오컬트 장르라 불렸던 영화지만

결국 오행이 설명으로 들어갔을 땐 

사주에 쓰이는 오행요소들을 이해 못한다면

쉽게 와닿지 않을 영화적 요소였다.


이 책은 서울대 공대를 나와 

관련 엔지니어 생활을 했던 저자가

일반인들에게 사주에 대한 상식을 공부시켜 주며

사주에 대한 본인의 열정과 믿음 또한 

정리하는 관점에서도 쓴 책처럼 보인다.


매우 기본내용을 꼼꼼하게 잘 정리해 다뤄

사주를 한번 배워봐야지 했던 사람들에겐

알아야 할 한자나 용어의 장벽은 가급적 없이

유용하게 사주란게 뭔지 접해볼 수 있는 

현대적 서술을 내용으로 담았다.


12운성을 다룬 운지법은 

백영관 씨 책에 실린 내용으로 봤던거 같은데

워낙 여기저기 많이 쓰인 그림이니

원전을 말하기엔 내 기억도 가물거리고 

사실 내가 아는게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 운지법을 말해보는 건

저자 김대영씨가 이것까지 실어

삽화로 보여주고자 했다는 그 정성 때문이다.


근묘화실, 12운성, MBTI, 

하물며  SWOT까지 언급하려한 기타의 노력들에서

저자가 해온 공부의 방향들과 정성이 느껴진다.


정해(丁亥)...저자의 일간이다.

책의 몇페이지를 할애해 저자가 느낀

본인 사주 속 대운과 실제 벌어진 일들을 매칭했다.


보면서 신기했던 건

임자가 연주가 아닌 월주였다면 

어땠을까란 나름의 다행인 구조,

그리고 해(亥)란 글자가 자꾸 눈에 밝힌다는...


전체적으로 물이 과하다는 느낌이나

그로인해 극약하다는 말은 사실은 

사주풀이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의 삶에서 

아주 중요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저자의 사주로만 봤을 땐

사주를 중히 여기며 자세히 해석하며 살아야 할 

특별한 사주구조가 아니라는 느낌과

굳이 지살을 사고수 설명 등이 기억에 남는다.


난 저자처럼 사주에 전문성도 없고

그만큼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보지도 못했으나,

사주란 도구에 대한 애정은 있는 입장에서

소개된 많은 내용들에 공감하며 읽었다.


주로 초보자들을 위한 내용이기에 

책 자체가 아주 정교한 학술적 내용일 순 없지만

사주를 멀리했던 사람들에겐 일종의 정서적 환기를

사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교양서로써 충분히 좋은 내용들이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별자리 점성술(astrology)에 대한 기사를

서양권이 사주를 다룬 내용으로 언급한 건 다소 오류가 아닐까 싶다.

오히려 사주가 아닌 자미두수를 연결해서 소개했다면 

나름 관련성 있게 매칭됐을 텐데도 싶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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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불안한 인생에 해답을 주는 칸트의 루틴 철학
강지은 지음 / 북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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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사실 은근히 유명하고 대중적인 철학자다.


그가 살았던 동네에선 매일 일정한 시간 산책하던 

칸트가 만들어 놓은 매일의 루틴이 동네 주민들에겐 

정각을 가늠하는 시계추 같은 역할을 했었단 얘기는

한편의 우화처럼 너무도 유명한 소설스토리 같은 팩트다.

이 이야기가 설령 칸트의 일화인지도 몰랐거나

그가 철학자로써의 남긴 업적 또한 모르더라도,

산책하는 칸트와 그 동네 사람들간의 이 이야기 정도는

한번쯤 들어봤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테니까.


이 책의 내용은 어려운 칸트의 철학얘기가 아닌

칸트를 전공한 한국의 한 철학자가 

그가 소개해 보고 싶은 방향으로

일반인들이 소화한 쉬운 언어로 

이 시대에 맞는 칸트 철학 일부를 

대화의 소재처럼 말해주려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편안한 에세이를 읽는 듯한 흐름 안에

칸트의 일상이 주는 긍정성을 소개하기에 

칸트란 유명한 철학가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고는

의식하지 않는다면 크게 의식하지 못할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시대의 화두를 어쩌면 불안이라고 보는듯 하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위버맨쉬(초인)란 철학 등도

결국 서로 대치하는 보여도 자신의 이론들 안에서

불안의 대처법을 각자 언급했던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저자 강지은은 이들의 이런 직접적인 철학적 메세지란게

현실에선 괴리감이 있음을 은연중에 칸트를 부각시킴으로써 

대중에게 부드럽게 이해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는 이들이 주지 못한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정확히 구분해 놓은 답은 아쉽지만 없다.

하지만 정답 대신

칸트철학의 정수를 전공자로써 정밀하게 보여주는 대신 

칸트의 삶 자체를 같이 짚어 봄으로써

그가 살아간 자신만의 방식이 뭐였는지 관찰자가 되어 본다.


칸트가 보여준 일상이 철학이 될 수 있고 

철학자 칸트 자체를 하나의 모범사례로 

쉽게 알려주고 싶었다는 느낌을 주는 책.


이 책 전에 쇼펜하우어, 니체를 읽었고

그 바로 전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은 건

그냥 우연이라기엔 책들간 묘한 연결성을 느꼈다.

최소한 철학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살아간 이들의 모습 속엔

그 자체로 정반합 논리의 예시가 되어주는 듯 하다.

이사람의 모습이 저사람의 모습과 

합쳐지거나 또는 나뉘기도 하면서.


저자는 칸트의 삶을 굉장히 모범적으로 소개하는데

죽는 순간조차 평소의 루틴대로 

좋아했던 와인을 물에 묽게 희석해 마시고는

좋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떠난 칸트.

신체적으로 장애에 가까운 체형을 가진 그였음에도

의학이 지금보다 뒤떨어졌던 그 시절에

왠만한 건장한 남성보다 훨씬 장수한 삶은

모든 면에서 칸트를 이 시대에 소개할 만한 

사례로 봄은 계속 느껴지고.


불안을 루틴으로 이겨낸 칸트의 실천적 삶을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견주어 보여줬다면,

한 사람의 인생면에선 애덤 스미스와 비교해봐도 좋겠다.


11명이 넘는 형제 중 4째였던 칸트는 

건강상의 문제와 더불어 집안적으로 넉넉지 못했다.

다만 운이 좋았던 건 그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일찍부터 도움이나 환경은 주어졌다는 점.

저자는 칸트를 흙수저라고 칭하였지만

이런 면에서 그는 결코 흙수저라고 볼 수 없겠다.

40대가 넘어서야 정식 교수가 되었고

그 전까지는 개인과외나 강사로 생업을 이어간 것이

한가로운 삶이라 보기 분명 어렵겠지만

흙수저라고 확정짓거나 낮춰 부르기엔 

어느정도 격이 유지됐던 삶이었기에...


앞서 저자는 철학자에 대한 한가지 오해로

생각이 많으면 생업은 소홀히 할 수 있을거 같으니

많은 철학자들이 굉장히 어렵게 살았으려니 싶겠지만

삶이 의외로 풍족했던 철학자들이 많았고,

반대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단 걸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리 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는 반로일 수 있고

이미 생업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닐 수 있었다는 반증으로 이해해 본다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는 부분들이라 말은 건내기도 하는데,

칸트가 그 정도의 여유를 누렸던 철학자는 아니였을지라도

흙수저로 뭉뚱그려 그 삶 자체를 설명하기엔 

평균 이상의 삶이라 보여진다.


애덤 스미스를 칸트와 비교하고 싶었던 것은

크게 살아온 자신의 루틴을 가졌다는 면에서 비슷했고

죽을 때까지 그리 살다간 모습 자체도 비슷하지만

세세한 면에선 분명 구분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으면서

어머니와 살다 간 남자가 아닌 아들의 삶이었다.

교수였고 철학과 경제학에 큰 족적을 남긴 스승이 됐지만 

개인으로써는 아이었고 철저히 외로웠다고 봐야한다.


헌데 칸트는 요즘말로 해석하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 분명했던 남자이라서

그냥 간략한 삶의 겉모습이 루틴화란 면에서

애덤 스미스와 매우 유사하지만 다른 느낌이니까.


그렇기에 이 두 철학자 간의 유사성 비교는

저자가 말하는 루틴의 중요성을 따져보는데 유의미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큰 차이를 가져서 나름 중요해 보인다.


불안을 누를 철학으로 루틴을 가진 삶이라...


그리 살아간 칸트 자체가 평생 실천한 그런 모습과 더불어

그만의 루틴은 자신만의 호불호가 덧대진 

일상성이었기에 의미있다고 봐야하진 않았까?


불안은 해법으로 다룰 수 없음을 단언하면서

저자는 해결이 아닌 일상의 루틴화로

많은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독자를 설득하는 책같다.


같은 하루를 비슷하게 매일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그 자체 하나로 보통의 사람들에겐 

불안이 아닌 자신감과 건강을 허락한다는 논리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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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창 찬가 -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은 ‘죄’
김학필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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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의인화 시킨 그 실체를 확정짓기 어려운

여러 생명체들의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바구중바구,

주인공인 '나'는 하쿠피루란 이름으로,

그리고 주인공 만큼이나 많이 언급되는 조우성우,

아누태큐,

노호중우,

배구상열우,

추서노우,

저누형우 기타 등등...


기억나는 이 이름들 이외에도 

좀더 되겠지만 그 이름들의 면면은 아주 중요한 요소는 아닌 듯.

그러나 여기서 먼저 흥미롭게 살펴볼 

저자의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한 작명법은 한번 돌아보면,


이 외국어 같은 이름들이 실제 다 한글들이고

실제 사람이름들을 외국명사인 듯 

혀를 굴리며 발음한 것 같은데,


이를테면,

저자인 이름과 동명이인인 듯한

책 속 주인공 하쿠피루는 저자 김학필의 이름 중

'학필'을 '하쿠피루'로 늘려 불렀음을 알수 있겠고,

조우성우 또한 비슷한 원리로 늘려 불렀을 이름이겠다.


헌데, 바구중바구란 이름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 중요이름 중 하나이고

전개상 상상되는 이 역할의 느낌도 

개인적으론 와 닿은건 있었으나

약간은 미완의 또다른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처음에 난 

이 소설 속 의인화 된 존재들이

쥐나 바퀴벌레가 아닐까 상상을 하며 읽었고,

굳이 더 추측을 해봤을 때 쥐나 바퀴 중

쥐보단 바퀴벌레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었던 건

많은 등장인물 이름들 중 바구중바구 때문이었다.


책에선 왕처럼 등장하는 이 캐릭터가

혹여나 영어로 '바퀴벌레 중에 바퀴벌레'란 뜻으로

마치 '킹 오브 더 킹'이나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같은 느낌을 주려고

그런 느낌으로 다른 작명법이 발휘된 이름은 아닐까 싶었서였다.

그러니 당연히 쥐는 아닌 일종에 바퀴벌레의 의인화 아닐까 싶었던 거고.

하지만, 다른 이름들처럼 이 바구중바구 또한

'박OO'이란 누군가의 이름일 수도 있겠으니 이쯤에서 상상은 접는다.


그러다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일 수 있겠으나

146페이지 정도를 지날 때면 

스스로 자신들이 쥐가 아니라는 설명이

무심코 지나가듯 언급되는 부분이 등장하고,

또다시 책의 말미쯤 도달하면 

쥐와 자신의 종족 설명을 한번 더 하면서

과연 이 의인화 된 생물들이 무엇일지

좀더 명확하게 와닿는 나레이션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책의 주제와 맞닿은 최종결말 같아 이정도에서 생략한다.


이 이외에 쉽게 이해되는 배경설명 또한 많다.


협곡이라 불리는 곳이 아마 하수구나 배수로일거란 느낌이나,

푹풍이 몰아치고 물이 차오르는 것이 

단순 진짜 폭풍우 치는 날씨나 비의 묘사라기 보단

일종에 몰려 살아가는 약한 생물들이 눈과 피부로 느끼는

인간으로부터 부여받은 환경일 수 있겠단 생각도 충분히 가능했다.

물이 들이치는 푹풍 또한 

철거 현장에서 먼지를 안 날리게 뿌려대는

살수효과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식당 물청소시 쥐나 바퀴벌레들에겐 

통로로 쓰일 하수구에 물이 쏟아져오는 느낌을 

이리 표현했을수도 있다는 상상도 해보게 되니까.


어쨌건 이 책은 독자의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


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세상이란 느낌 또한

실제 인간이 쥐들과 비슷하게 느끼고 사는

생존과 사투현장으로써 더 극적으로 보이려 만든 

몰입과 이입으로 느껴지기도.


웃는다는 표현마저 겅상도 사투리로 뱉어대는 대사와

전우애 같은 우정, 걱정, 죄책감 등을 언급하는 모습에서도,

사람으로써 최소한의 목숨연명은 하면서 살아야하는

어떤 지점에서 스스로를 인간인지 쥐인지 모르고 사는

쥐가 아닌 듯 쥐같은 나를 그래도 다른 존재로 믿고 살아온 

세월 속 최면을 어느 순간 스스로 깨고 

억지로 인지해야 하는게 아닌가도 싶기 때문이다.


책에서 쥐는 '이방인'으로 묘사된다.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식량확보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야 할 때

쥐들 또한 살아가기 위해 여러 생명체들이 뒤섞인 

환경의 어디 쯤에서 서로 비슷한 활동을 해나가며 

경쟁자처럼 존재하는게 '쥐'들이기도 하면서.


쥐들이 죽거나 회색털이 날리는 모습엔

제3자로써 다른 생명체의 생사여탈 여부를 바라보는 시점이나

어느 순간 모든게 깨지며 많은게 동일시 하는 부분 같기도 하다.


이방인은 결국 쥐이지만

그 이방인이 자신이자 종족일 수 있다는 흐름은

독자에게 던지는 결론짓지 않은 상상의 발로일 수 있고.


영도자란 단어...

한국에서 이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북한쪽에서 쓰일만한 단어를 굳이 쓴 느낌이지만

저자가 그냥 구사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듯.

영도자라...

이 생명체들이 사는 곳은 책 제목처럼 시궁창이니

시궁창이 결국 영도자와 이어지는 뉘앙스일까도 싶지만...


책 속 살아가는 배경을 꼭 집어 

시궁창이라 명명하는듯한 느낌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설명을 이해하려다 보면

당연 이들이 활동하는 그 곳은 시궁창일 것이란 추측만은 가능.

이야기의 결말로 들어서면 폐허가 시궁창인지 

시궁창 또한 폐허가 되어가고 

그 잔해가 또다른 시궁창이 됐는지도 나름 미지수.


협곡이란 이름으로 배수로였다면,

한 번 들어봤던 듯한 애킨스란 폭풍이름도 

살려고 도망치는 이방인이나 동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포크도

은유하는 바가 다들 있었다고는 느낀다.

쓰다보니 포크는 '포크레인'인가도 싶은.


여하튼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며 읽게 되는 책은 맞다.


어른을 위한 동화 같지만

쥐가 등장한다하여 아이들이 공감할

라따뚜이 같은 작품으로 상상한다면 그건 오해같다.

쥐란 등장요소로 충분히 어림짐작 할 수 있을만한 건

남들은 이미 버린, 

용도가 다 지난 쓸모없는 것들이라도

경쟁하며 정해진 시간 염두에 두고 확보해야 할 

존재들과 이를 둘러싼 삶인

쥐와 이방인을 떠올려야 할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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