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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멀리 보이는 인수봉 암벽 위에 찍힌 점(點)들은 가까워지면서 사람의 형태로 바뀐다. 벽을 마주보고 있는 그들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듯이 보인다. 위치는 좀처럼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손과 발은 홀드를 찾기 까지 바위 여기저기를 더듬고 뻗고 당기고 나아가는 중이다. 암벽은 살아있는 듯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한다. 반복되는 “빌레이 준비”, “출발”, “빌레이 해제”의 외침 사이에서 긴장된 선택과 동작을 하며, 자일로 서로의 몸을 확보하고 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맡긴 자일 파트너다.
랜드의 자일 파트너 캐벗, 두 사람은 미국의 캘리포니아 어느 암벽 위에서 우연히 만난다. 랜드와 캐벗은 한 팀으로 유럽의 산을 올랐었다. 2년 동안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함께 올랐던 사람들과 소식이 단절된 상태로 랜드는 떠돌아다니고 있다. 안주할 수 없었던 그는 그 만남을 계기로 캘리포니아를 떠나 샤모니를 향한다. 랜드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마을을 벗어나 산기슭에 텐트를 치고 고독에 지치도록 혼자 지낸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다.
랜드는 다시 만난 캐벗과 프티 드뤼에 오르고, 캐벗은 머리에 부상을 입는다. 악천후를 만나고 번개가 치는 오버행 밑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는 캐벗과 함께 암벽을 타면 항상 자신은 암벽에서 떨어져 캐벗보다 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고 말한다. 등반에도 관계의 역학은 존재한다. 두 사람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루트를 만드는 선등자가 되어야하고, 때로는 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살아 돌아온 그들은 유명인사가 되었으나 랜드는 사람들을 피한다. 두 사람의 등반과정을 실은 기사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인 그들은 잠시 헤어진다. 캐벗이 아이거 북벽 등반 파트너로 다른 사람을 구했다는 소식에 랜드는 배신감에 휩싸인다. 서로의 생명을 맡기는 자일 파트너 역시 인격, 기질, 삶의 방식에 의해 균열이 생길 수 있는 인간관계다. 이 때 자일은 서로를 침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구속이 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자일 파트너란 등산에서 인연을 끊게 되는 마지막 사람(라인홀트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131p)”이라고 했다. “뺨을 맞은 것(132p)”같은 랜드의 충격을 공감하게 하는 말이다.
그는 드뤼에서 조난당한 두 명의 이탈리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영웅적인 구조 등반을 한다. 그가 구한 두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 구조대에게 “이들은 우리 겁니다(192p)”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에게 남아있던 욕망을 자신에게 들키는 순간이다. 그는 스스로가 역겹다고 고백한다. 다들 아이거를 오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올랐기를 바라는 것(132p)”이라는 그의 말에서 업적주의와 명예욕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산을 오르려는 것일까? “그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고 한 것은 방해받지 않고 혼자 나아가는 것이었다.(121p)” 조명은 그의 가장 자유로운 행위를 구속할 것이다. 결국은 철저한 고독만이 그를 자유롭게 함을 깨닫게 되고, 자연스럽게 단독등반을 한다.
그랑드 조라스 워커에 단독으로 오르던 그가 포기하고 중도에서 하산할 때,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느낄 법한 체념이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231p)” 추락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캐벗을 찾아가, 총을 들이대며 일어나라고 위협하는 것은 서른한 살에 힘을 잃은 자신을 향한 절규다. 캐벗처럼 산을 오르지 못하는 때가 올까 두려웠던 것일까? 쿠르드 딤베르거가 “나는 산을 떠나선 살 수 없다(쿠르드 딤베르거 『산의 비밀』 17p)”라고 말했듯이 랜드 역시 산을 오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합니다.(195p)”라고 말한다. 계속 살아갈 이유를 거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산을 포기하면서 등반가 랜드는 죽었다. 암벽을 오르며 피톤을 뽑아 자신이 올라간 흔적을 지우듯, 삶의 자취를 지우고 익명성 속으로 사라진다. 샤모니에서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처럼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122p)” 임금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견디는 일이다. 그가 개리 헤밍과 같은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다.
랜드의 모델이 된 개리 헤밍(1933~1969)은 히피 알피니스트다. 1960년 알프스에서 그의 등반은 당대 최고의 것이었고, 프티 드뤼에서 조난자들을 구하기 위해 벌인 영웅적인 등반과 사투는 샤모니의 전설이 되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의 상처로 인해 그는 정신착란과 우울증을 앓았고 사회 부적응자로 떠돌았다. 그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신만큼은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바위였고, 그에게도 로열 로빈스라는 자일 파트너가 있었다. 그는 대부분 단독등반으로 무명의 험봉을 올랐다. 미국으로 돌아가 막노동을 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거기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자살로 36세에 삶을 마감한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심산 『마운틴 오디세이』 203p)”이라고 했던 그는 산 위와 달리 산 아래에서는 길을 찾지 못했다.
랜드에게서 개리 헤밍 뿐 아니라 라인홀트 메스너나 헤르만 불의 영혼을 느낀다. 메스너는 낭가 파르바트를 단독으로 오르는 이유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독행은 자유와 고독의 극치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메스너는 “고독이란 누구나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낭가 파르바트 단독등반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인홀트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70p)”고 말했다. 고독을 이용하는 경지, 거기에 존재로서 진정한 자유함이 있다.
발가락과 손가락에 온 신경과 힘을 집중시키며 암벽에 매달린 그들에게서 시시포스의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과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를 본다. 상승보다 하강은 더욱 위험하고, 산 아래서 잠깐의 휴식은 다시 오르기 위해 내쉬는 숨과 같다. “암벽등반은 신화로 통하는 입구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암벽등반에 끌린 사람들에게 등반은 인생이 된다.(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275p)”
누군가의 실존적 행위! 나에게 그것은 독서다. 책을 읽을 수 없는 몸의 상태가 두렵다. 산을 오를 수 없으면, 사막을 건너고, 글을 쓰는 라인홀트 메스너에게서 그 힌트를 얻어 본다. 열심히 읽다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던 길이 그때는 열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