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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낙원』은 이주의 서사를 가진 작가의 실존적 정체성과 그 정서(심리)의 원형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이름은 유수프(يوسف 요셉의 아랍어)이다. 성서에서 형들에 의해 대상에게 팔려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요셉은 꿈꾸는 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 꿈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 동족을 구했다. 유수프 역시 꿈을 꾼다. 요셉은 주인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옷자락을 벗어두고 도망치고 그로인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유수프 역시 상인의 집에서 같은 일을 겪는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서 이주자, 팔려간 자, 망명자의 상징과 서사를 배치하고 있다. 소설의 서사는 작가의 것이 아님에도 그의 삶과 정서가 보인다. 그래서 쿳시가 “모든 글은 자서전”이라고 했을 것이다.
동아프리카의 무슬림 가정의 소년 유스프, 그가 기차역에서 처음 본 두 유럽인, 인도인 신호수는 19세기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해안지대의 무슬림들은 내륙의 아프리카인들(토착민)을 ‘와센지’,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독일인들을 위해 철로를 건설하는 날삯꾼으로 일하는 인도인은 이 무슬림들을 무시한다. 인종으로 인도인, 종교적으로는 무슬림,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인이나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작가의 정체성을 지시하고 있다.
유수프는 아버지가 아지즈 아저씨에게 진 빚 때문에 볼모로 보내어 진다. 아지즈의 가게에서 일을 익힌 후 그의 대상 행렬에 함께 한다. 아지즈의 내륙여행은 물품과 짐꾼들을 모으고, 무장하고 떠나서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내륙의 사람들과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마을에서 장사하며 자신에게 돈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아이들을 볼모로 데려오기도 한다. 유수프, 아지즈의 집과 가게를 관리하는 칼릴, 아지즈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칼릴의 누이가 바로 그런 아이들이다. 아지즈는 철저한 장사꾼이다. 내륙으로 여행 하며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상단이 차투의 나라에서 물건을 빼앗기고 그 대장 모하메드 압달라가 구타를 당하고 대치 상황에 있을 때, 유럽인이 그 지역에 들어오면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 세 자루의 총을 제외한 물건의 일부를 돌려받고 그곳에서 나오는 장면은 앞으로 그들의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전망하게 한다.
이 소설은 마을로 들어온 독일군이 강제로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을 유수프가 목격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독일과 영국이 동아프리카 땅을 두고 대치하던 시대다.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 지역의 경우, 1885~1916년간 독일 보호령 하에 있었으나, 1916년 영국군의 탕가니카 점령 후 1919~1961년간 영국 위임통치를 받았다.)
유수프는 독일군들이 행진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나올 때 기차 안에서 생각했던 ‘비겁’을 다시 떠올린다. 유수프는 마을을 방문하는 아지즈아저씨를 동경했었고, 그로부터 10안나 동전받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 아지즈아저씨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기차를 탔다는 신선함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집을 떠나왔다는 생각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30p) 울고 싶어졌다.
그가 기차에서 꾼 꿈속에서
“어머니가, 예전에 기차 바퀴에 깔려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애꾸눈 개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꿈에서 자신의 비겁이 산후(産後)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비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늘 속에 서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도 그것이 숨 쉬는 것을 보았다.”(33p)
“산후의 점액으로 뒤덮인 비겁”이라는 상징 이미지는 강렬하게 생각을 사로잡는다. 토착민을 야만인이라 지칭하면서, 인도인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유럽인들을 두려워했던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온 원초적 감정은 ‘비겁’이다. 세련된 아지즈 아저씨를 동경했던 죄의식, 부모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지는 두려움들이 응집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기차의 소음 때문에 잠을 못이루던 그 밤의 기억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강제노역을 위해 잡혀가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던 유수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비겁(cowardice)이 산후(産後)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버림받은 것(abandonment)에 대한 첫 번째 두려움의 탄생이었다.”(322p)고 말한다.
한편, 이 ‘비겁’은 작가의 전이된 감정으로 읽힌다. 1698년 오만이 지배한 이래 내륙과 함께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던 잔지바르에서 1948년에 태어난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정복자, 약탈자의 후손이었다. 1964년 혁명이후 인종탄압의 대상이었다. 1968년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던 20세 이후 그는 이민자이다. 그는 아프리카를 떠나며 아마도 죄의식과 두려움, 비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았던 심상-윤동주의 부끄러움과 같은-들이 겹쳐진다.
아지즈의 대상 행렬이 차투의 나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길안내자를 원망하고 의심한다. 기어코 그 무리의 지휘자 모하메드 압달라는 안내인을 구타한다. 그 폭력을 방관하는 상인 아지즈의 태도는 분노의 제물이 된 희생양을 지켜보는 냉혹함을 연상케 한다. 드디어 숲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으며 “자신들의 경솔함이 당황스러워 고개를 저으며”(202p) 웃는 사람들에게서 수치를 덮는 군중의 부도덕과 무책임을 본다.
여행 중 도시를 벗어난 야영지에서 본 경관과 아름다운 킬리만자로 일몰의 초록빛은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유수프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아지즈의 정원 역시 '낙원'을 지시하는 상징어이다. 담으로 둘려져 있는 사각의 공간에 네 개의 수로와 과실수와 관목들은 천국을 상징하는 이슬람 전통 정원이다.
<충직함의 정원> 바부르의 책, 1593년
"이슬람 정원에서는 부정적인 상징은 모두 배제되고 오로지 한 가지 상징만을 위해 모든 요소들이 역할을 한다. 네 개로 구분되는 세계를 상징하는 정형적인 사분원 형태는 직교하는 두 개의 수로가 수반에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수반은 ‘세상의 배꼽’이며 신이 준 생명의 원천이다. 이 이미지는 낙원이 하나의 샘으로부터 나와 네 갈래로 나뉘어 동서남북 방향으로 흘러 대지를 적신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26p,『예술의 정원』 루시아 임펠루소)
이 정원에서 독일 군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유수프의 모습으로 소설은 마치고 있다.
“그가 정원에서 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여전히 행진하는 행렬이 눈에 보였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따끔거리는 눈으로 그 행렬을 뒤쫓았다.” (322p)
'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는 아마도 아지즈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일 것이다. 이 낙원에서 추방을 알리는 소리이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그(유수프 또는 작가)에게 낙원이 될 수 없음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작가는 유수프의 서사와 그의 시선을 통해 동아프리카의 19세기 상황을 들여다보게 한다. 토착민들, 불법적인 거래로 이익을 취해왔던 연안의 무슬림 정착민들, 군대를 앞세워 점령지를 늘려가는 유럽인들과 그들에게 노동을 파는 인도인들이 뒤섞이고 있는 그 땅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과거 이슬람인들과 유럽인들이 그 땅에서 벌였던 수탈과 착취의 역사를 찾아보게 된다. 아마도 그 아프리카를 자신의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작가의 에두른 글 뒤에 숨은 비판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대상들의 길, 특히 동아프리카와 인도, 이슬람문화권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고찰할 수 있었던 내게는 기억될만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