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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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반극단주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줄리아 에브너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사와 관련된 석사 학위를, 중국 북경대에서도 국제 관계와 관련해, 마찬가지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 런던의 소재한 반극단주의 조직인 전략대화연구소 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 에서 상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함께 여러 국가들에서 폐쇄적인 급진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소위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적 맥락이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와 차별에 있지 않음을 신뢰하면서, 이러한 극단주의적 흐름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에 지속적인 연구를 해오고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 역시, 에브너의 지난 2년 간의 활동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구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Going Dark"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 카스 무데의 논저와 함께, 에브너의 이 글 역시 일종의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훌륭한 논저 역시, 저자가 지난 2년 동안 '대안우파'와 여러 백인인종주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극단주의 단체들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포함한 동시 잠입 취재를 통해, 현재 유럽과 미국에 불고 있는 극우주의와 초자유지상주의 운동을 거의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정치학에서의 포퓰리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시도된 것은 최근 몇 년 간의 일입니다. 아직도 포퓰리즘의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은 실정이기도 한 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극우 포퓰리즘과 우파 극단주의가 어떠한 차이를 갖고 있는지 다소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 흐름 전반이 서로 경계가 불명확하고 주장하는 바가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민주주의 정치 내에서 이들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나 다원주의적 측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의 발언대로 이들 모두가 '반민주주의 세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지난 대전大戰 에서의 서구 자유 진영의 승리는 '자유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일소'한 의미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진보에 반하는 거대한 반동을 비로소 정상화 시킨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리버럴리즘에 의한 날조라고 주장하는 저 극단주의자들을 어떤 식으로 사회가 용인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그것의 실현 가능 여부를 떠나 실로 인간의 처절한 비상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익의 차원에서 진행된 지난 날의 전세계적 신자유주의화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 오늘날 극단주의 세력의 대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건전한 토론 없이 사회 비용의 절감이라는 순전히 자기 기만적인 이익 관념의 지배가 우리의 사회 전반을 장악한 결과로써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불안을 틈타 극단주의자들의 토양이 구축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지난 미국 대선에서 몇 대에 걸쳐, 산업이 쇠퇴하고 시민 사회 조직이 붕괴한 '러스트 벨트'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불길은 도널드 트럼프를 워싱턴 D.C.로 보내는 것 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변형된 극우주의자들이 소위 '민주주의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국가와 사회에 받아 들여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역시 이 글에서 소개되는 더닝 크루커 효과 Dunning Kruger Effect 처럼, 어떤 주제에 별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판단에 지나친 자신감이 기반이 된 것이 과거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와 동일한, '인종분리주의'입니다. 미국 대안 우파의 대부 리처드 스펜서도 그렇거니와, 소위 사교적으로 세련되었다고 보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도 바로 흑백 간의 '인종 분리'입니다. 이것은 유럽의 '정체성 정치'와 마찬가지로 인종끼리 완벽히 분리되어 각자가 다른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진화론적인 입장이든, 사회 구성론적인 입장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철썩 같이 내면화시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유구한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슬람 혐오와 나치 독일이 주장한 인종적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연대에 나선 것이 실로 놀랍지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흐름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이득이 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도저히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를 그저 고귀한 관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한낱 극단주의 무리들에게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민주주의가 이용되는 상황은 참으로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영국수호연맹의 설립자이자 이슬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인물인 스티븐 약슬리레넌 (다른 이름은 토미 로빈슨)은 요즘 우리 극우주의자들이 짭짤하게 수익을 얻고 있는 유튜브 모델처럼 영국에서는 파괴적인 발언력과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저자인 에브너에 의하면, 그는 일종의 '극우 셀레브리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서 연예인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많은 팬덤을 지닌 인물입니다. 로빈슨이 후에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식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반대 입장에 있는 반극단주의 인물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강제적인 낙인 효과를 덧씌우고자 하는 점은 명백히 현대 극우의 하이브리드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저자인 줄리아 에브너 역시 이 극우 슈퍼 스타에게 단단히 찍혀 직장을 잃고 고초를 당한 경험을 이 글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저들의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충분히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협력자이자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스티브 배넌은 수차례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무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라고 부추겨 오기도 했는데요. 비상식적이고 인간의 충동적인 본능에 호소하여 순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동하는 자들이 사회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어떤 가치관 따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는데요. 주변의 정치적 의견이나 논쟁 따위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과대 포장하여 그것을 통해 오직 경제적 이익 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실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이유가 있고 그것이 사회가 억압할 수 없다는 관점은 극단주의자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자유주의가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겠느냐는 지금도 주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기도 합니다만 저들이 진정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일견 터무니 없는 일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저들과 그 궤를 같이하는 초자유지상주의자들이 사회를 어떻게 개조하고 싶은지는 이 글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급을 나누고 그리고 철지난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을 통해 인간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마땅히 구분되면서 차별이 정당하다는 요지의 주장들이 그저 보수 따위도 아닌 '반동'이거니와 그야말로 역사를 퇴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심각하게 아이러니 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대어 자신들의 그와 같은 발언에 대한 자유권을 무엇보다 쟁취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토록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마땅히 민주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이죠.

이 글 전반에 다소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극단주의 세력 전반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까운 시일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점은 믿음의 여부를 떠나 소름끼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600만이나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주의 전반과 그것에 기인한 아돌프 히틀러의 "살 가치가 없는 생명 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1939년의 연설 문구는 그것이 사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극단주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 이뤄지고 있는 '나치 콘서트'와 같은 문화 동일체적인 수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저자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지식과 사회적으로 축적된 정보들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도가 개방된 사회에서 어찌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그저 개탄스런 기분인데요. 또한 사실의 증명 여부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수많은 음모론들이 넷상에서 범람하고 확대 재생산 되어 무슨 절대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소명이 무슨 '신성한 사도'와 같이 동일시하는 저들을 보자니 과연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깊은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에브너의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인지하게 되는 것이지만 극단주의와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아마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절단날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크나큰 불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2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MI6를 M16으로 번역한 것은 실로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기본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 H. 카가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이 심각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에 팽배해 있었다고 진술했는데요. 여기에 드러나는 소위 '대안우파'식의 파시즘에 대한 낭만주의는 실로 너무나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오로지 하나의 수단으로 균질화시켜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에 당위를 갖는 그러한 반동주의가 어떻게 낭만적인 외형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파시즘에 대해 갖는 유럽 각지의 이번 세대의 낭만은 앞으로의 미래가 어떠할지 불안감을 더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이 과연 정치적 변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목격한 혐오 콘텐츠의 규모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대했고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한 젊은 사람들의 수는 낙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빨간 약을 먹는다는 말이 급진화를 뜻한단다면 대부분의 인터넷 공간은 빨간 약 공장이 되었다. 백인 민족주의자들이 내놓은 최악의 빨간 약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다.

강령에 따르면 세대정체성의 목표는 동족 사회, 즉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섞이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분열을 초래하는 콘텐츠를 퍼뜨려 중립을 취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략적 양극화‘다.

4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유사 사건에서는 엘리엇 로저 Elliot Rodger가 총기를 난사해 여섯 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저는 선언문에서 스스로를 ‘고결한 신사‘로 칭하며 자신에게서 섹스를 박탈한 모든 여성을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

로빈슨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과거에 영국국민당 당원이었으며 그의 지지자 중에는 히틀러식 경례를 하고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네오파시스트가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독일계 미국인 교수인 야사 뭉크는 저서 <사람 대 민주주의>에서 서구 민주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정치인과 정치 제도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생활수준의 침체와 다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 소셜미디어의 대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자체엥 대한 믿음까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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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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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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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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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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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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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고든 프랭크퍼트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철학자로 모교인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에 에일대와 오하이오 주립대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도덕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행동철학과 자유의지 및 평등론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요 철학자들 사이에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관련한 고유 해석으로도 유명한데요. 거기에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이라는 과제를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개인들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동체 사회내에서의 서로간의 배려와 존중을 매우 중요시여기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윤리철학이 학자들 사이에 다소 논쟁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철학 전반이 식자들에 의해 해석상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On Inequality˝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4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보통 평등이라는 가치는 민주주의적인 원리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사회학 등에서 18세기 이후로 학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치열한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최근의 냉전 시기를 비롯,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이 평등은 현재에도 광범위한 오해로 인해 일정 부분 터부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글에서 저자인 프랭크퍼트 역시 평등과 관련해, 자신이 철학자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저명한 도덕철학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는지 일반 독자로서 개인적인 호기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소위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서 불평등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진 부자를 원칙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프랭크퍼트는 단순히 경제적 평등에 대한 저간의 요구를 먼저 불식하면서,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우선되어야 하는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뮤얼 모인과 거의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시민들에게 스스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참된 욕구, 이익, 목적들을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이 보편적으로 각 개인들이 보유하는 어느 정도의 ‘화폐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분명하고, 그런 차원에서 ‘충분한 소유‘에 대한 원리가 좀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이 글에서 명시되기에 이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심각한 빈곤의 상황에 처한 시민들에게 현 상황을 타파할 지원이 필요한 것은 이 글의 논리로 보건대 큰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언급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체제의 건전한 존속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통제력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도덕적 수준의 요구를 강조한다는 것이 현시대에서는 거의 의미없는 일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일종의 수단으로 삼아 사회 각 전반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으로 몰아 사회를 극명하게 분리시키는 점은 도덕적 기준이든 뭐든 간에 우리 정치 전반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완벽한 소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가장 잘 통제하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들이 더이상의 ‘소유‘를 중지하고 자신의 건전한 삶을 위한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소위 ‘20 대 80의 사회‘도 그렇거니와 오늘날의 유산 계층이 자신들의 부를 되물림하려는 강한 경향으로 봤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부를 소유한 계층 역시 불완전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불안정을 위해 더 많은 안전 자산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쉽게 꺾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크퍼트가 이 글에서 차용한 ‘한계효용의 법칙‘은 자신의 말마따나 그 한계를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원칙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바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그 자원의 기준˝은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정이 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일전의 데이비드 코츠의 비판대로 신자유주의적 돛을 단 자본주의가 스스로 AI처럼 적절한 통제력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츠는 지금의 자본주의 자체가 좀 더 많은 자원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자본이 쏠리게 될 것으로 본 것인데요. 자본주의 나름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뻔뻔한 얼굴로 절대 선이라 규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그것의 논리로는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적절한 통제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텐데요.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 근본주의‘를 내세워 국가와 사회 전체 그리고 세계 전반을 거의 제멋대로 주물렀던 점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논리 가운데서 단순히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광범위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많은 시민들에게 ‘내재화‘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겠죠.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큰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삶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매번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빈곤한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도움과 국가의 배려를 요청할 수 있는 점도 마찬가지로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개인의 마땅한 이익추구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개인주의가 기존의 사회 원리를 침해하는 지경에 이르는서는 안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등과 관련해 한가지 확실한 점은 빈곤 상태에 있거나 가진 바 사회적 자원이 빈약한 사람이 평등을 제약하는 발언을 하는 것보다 상당한 자원과 동시에 엄청난 화폐를 가진 사람이 평등 자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평등이라는 문제를 사회에서 더욱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려는 의도를 가진 그러한 기득권 층의 숨은 의도가 더 위협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모든 기득권층들의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어떠한 불만이 없는 자들이 평등 자체를 자신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으로 오도할 수도 있겠는데요. 더욱이 아직도 전반적인 상황에서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보지 않고 이미 의미가 없는 사회주의의 산물로 취급해, 이데올로기적 공격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극우주의를 다른 건전한 의견들처럼 같이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는 일각의 목소리와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이 곳의 저자처럼 도덕적 우위를 통해 펼쳐나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의 경제적 평등에 대한 요구를 그저 도덕적 원리주의 차원에서 취급하고 저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들을 단순히 이론과 현실의 괴리처럼 취급한다면 사회가 어떠한 지경에 이를지는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프랭크퍼트는 일반 시민들과 거의 모든 자원을 손에 쥔 부유층과 기득권 층의 힘의 차이를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어보이는데요. 더불어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냉정한 비판을 기반으로 경제적 평등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서로간의 존중과 이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만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상황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 조차 없으며, 현재의 상황 자체를 현실을 왜곡하는 부류들의 철지난 주장쯤으로 여기는 세태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무분별한 합리주의가 거의 절대 선으로 취급하는 판단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는데요. 합리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 그리고 시장 근본주의가 어떠한 메커니즘 상에 있는지를 사회학적으로 한번이라도 고려해 봤다면 저자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지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질베르 리스트의 위와 같은 연계의 인식은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빈곤과 과도한 풍요를 모두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 결과는 분명 불평등의 축소일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또한 평등의 추구는 보편적인 경제적 충분성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일 수도 있다

경제적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평등과 자유의 충돌이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고, 이런 가정은 화폐의 평등 분배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타인들의 가용 화페량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것과는 직접적 관계가 전혀 없다

자신이 소비해온 것에 싫증이 났다 해도, 아직 소비해보지 않은 것 중 앞으로 좋아할 만한 것은 항상 남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전체 인구 중 일부가 가진 것이 충분한 양보다 적으면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현재 그가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향상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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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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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언어학자로 알려져 있는 존 맥스웰 쿳시는 2회에 걸친 부커상 수상을 비롯해, 200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데요. 그는 세계 문단에서 인종차별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에 저항하는 주제를 통해,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텍사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취득의 기회를 얻게 되고 1969년에 예상대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1983년과 1999년에 부커상을 2회 수상하고 그의 사회 비판적인 주제가 노벨 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200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여받는데요. 그리고 2005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에 의해, 공화국 최고 훈장이라고 불리는 마풍구브웨 훈장의 수여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쿳시는 대내외에 익히 알려진 바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차별 정책인 아파르헤이트를 철폐할 것을 요구했고, 스스로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 아님을 매번 강조해 왔지만, 문학을 통해 사회의 모순과 인종 갈등 등을 거의 가감 없이 다뤄 왔습니다. 그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두 번째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기도 한데요. 따라서 원제 "Disgrace"로 1999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두 판 모두 절판 된 상황입니다.

잠시 낮에 황학동에 구경을 나갔다가 발길에 잡혔던 어느 헌책방에서 존 쿳시의 이 작품을 손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가격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했고 책 상태도 매우 양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다 일독하자 마자 들었던 상념은 긴 한숨과 함께 이어지는 커다란 체념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글의 화자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문제 의식인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부대적 의미"라는 것이 어떻게 개인을 짓누르는지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요. 여기에서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는 바이런을 연구하는 꽤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능력 있는 학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두 번의 결혼 실패로 인해 약간의 자포자기를 더하여, 55세라는 현실적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적지 않은 여자들을 그저 '섹스'대상으로 삼는 삶을 소일 거리 삼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의 눈에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 20세의 어린 여학생, 멜라니 아이삭스와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담보하게 되는 아슬아슬한 육체적 게임을 시작하기에 이르는데요. 글 후반부에 드러난 멜라니의 어린 동생의 발언으로 유추해 봤을 때, 결국 그의 인생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단'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나이 든 사람은 설사 그것이 누명에 가까운 소란일지라도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의지 만을 남기고 데이비드는 그렇게 정든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의 어느 마을에서 조그마한 농장을 꾸리며 살고 있는 딸인, 루시에게 몸을 잠시 의탁하게 되는데요. 현대적 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도시 여자로서의 백인 여성인 루시가 주변의 흑인들과의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중,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리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 지척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데이비드는 딸의 거의 체념한 듯한 반복된 말들을 듣고 스스로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요. 저는 거의 2부라고 봐도 무방한 '루시의 사건'이 주인공인 데이비드의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겪게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원되는 대사들도 그렇지만 루시의 사건 자체가 인종과 인종 간의 단순히 문화적 차이라든지, 이들 간의 강제적인 정치사회적 괴리가 개인들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위 부작용으로써 매몰되고 작용되어 왔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스로 지난날의 비참한 사회사가 단순히 인종 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두 개의 사회로 극명하게 분리 시킨 것으로 읽혀졌습니다. 전날 자신이 가르치는 여대생과의 추문이 스스로의 아무런 의욕 없는 삶에 대한 단죄라고 해석한다면 딸의 참담한 불행은 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게 되는 절망을 데이비드에게 안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가 유신론에 심취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간혹 데이비드에 의해, 매도되는 인물로 그려지는 '흑인' 페트루스는 처음에 그가 단순히 악한 면모의 인물이라고 취급되기 보다는 전형적인 구시대적인 인물이자, 흑백 간의 섞일 수 없는 증거로 양자 간의 증오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사실상 흑인 사회의 외로운 섬이 되어 힘들게 삶을 꾸려가는 도회지 출신의 백인 여성에게 그저 도움이랍시고 내미는 황당무계한 손길과 어쩌면 그 참혹한 사건을 조장했을 수도 있고, 더욱이 그것이 얼마나 죄악인지도 인지하는 것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인물로 페트루스는 묘사되는데요. 그의 선의가 매우 경계가 흐릿한 것도 물론이거니와 여성은 마땅히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대변하면서 그것의 의무로서 육체적 결합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의 부족주의적인 속성과 맞닿아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합리주의적인 백인들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흑인 전통 문명에 있어 거의 물과 기름과도 같은 것으로도 읽힙니다. 다만 극히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거래에 있어 모든 것을 잃은 딸 루시는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체념과 다름없이 어떤 의지조차 보이지 않게 되는데요.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데이비드는 더할 나위 없이 처연하고 애달픈 부성애를 몸소 겪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크게 변하게 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생과 인간관계에 대한 그간의 인식조차 무너지는 상황 같은 것들을 전부 포함해서 말입니다. 


쿳시의 이 작품을 통해 저는 이질적인 두 인종이 이루는 사회가 단순히 인종 간의 융합이라든지 아니면 사회가 분열되지 않고 서로 간의 최소한의 이해를 통해 그저 외형적인 수준에서라도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자체로서 그리고 극명한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헤이트가 어떻게 서로 간의 증오를 더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작품 후반에서 도출되는 루시의 "인종 간의 증오가 그렇게 유전되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체념한 듯한 대사는 아버지의 애절한 도움을 손수 뿌리치면서까지 그녀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는지는 지금에서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간혹 단순하게 스토리 라인을 받아들인 분들은 주인공인 데이비드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업보라고 말씀들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마치 교활함과 어리숙함을 뒤섞은 듯한 캐릭터인 페트루스의 복잡한 인물상 만큼이나 그 시대의 사회적 실상이 쉽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한 차례의 대사로 등장했지만, '이 곳은 아프리카다"가 의미하는 바가 과거 에드워드 즈윅의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대사 "TIA, This is Africa"가 다시 뇌리를 스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새뮤얼 헌팅턴의 그 같은 이질적인 소위 문명론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감으로도 받아 들여지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곳곳에 띄어쓰기 오류가 보였는데, 아마도 크게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쾌락을 얻고, 그 쾌락은 어김이 없다. 어떤 점에서는, 이것이 주고받는 애정이라고 믿는다. 애정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의 사촌쯤은 된다

"왜냐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

"여러분이 눈먼 장님이라면, 여러분은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냉정하고 분명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 보고자 할까요?"

"심각하다는 게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거나 더 좋게 만듭니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모든 연애는 심각한 겁니다. 심장마비처럼 말입니다."

루시는 정말로 여기서 그녀의 삶을 살고자 하는 걸까? 그는 그것이 단지 하나의 과정이기를 희망해본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모르겠어요.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고, 죽어갈 준비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스스로에게 이른다. 이것은 매일, 매 시간, 매 분,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순간,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 포로로 잡혀 있거나 머리에 총알이 박혀 협곡 밑에 있지 않을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루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특히 루시가.

처녀를 강간하는 것보다 더 나쁘고 더 충격적인 레즈비언의 강간. 그들은. 그 남자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악취나는 닭털과 썩은 사과 더미 가운데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로부터 고갈되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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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27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학동에서 22년 전 보물을 건지신 셈이네요^^

베터라이프 2022-09-03 00:29   좋아요 0 | URL
얄라님 댓글이 늦어져서 너무 죄송합니다 ^^;; 비오는 날 황학동에서 이 책을 건졌는데 읽으면서 메모하느라 책이 많이 더러워졌지만 그럼에도 잘 보이는 서가에 꽂아 놨습니다. ^^; 얄라님 잘 지내고 계시죠??

얄라알라 2022-09-03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베터라이프님
^^ 메모 하며 읽는 독서가 제맛인데요. 저는 조금 전에도 제가 작년 가을 메모해놓은 쪽지를 옮겨 적으며 제 글씨를 못 알아봐서 한탄(?) 좀 했습니다 ㅎ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베터라이프 2022-09-03 01:12   좋아요 1 | URL
저도 책에 밑줄 그으며 쓴 글자를 못 알아볼 때가 많습니다. ^^;; 워낙 악필이어서요. 얄라님도 꼼꼼하게 메모하시는 습관이 있으시군요. 진작에 진지한 독서인이신줄 알고 있었죠. 이렇게 누추한 서재에 와주셔서 다시금 감사드려요~~ 주말 잘 보내시고. 환절기 건강 잘 챙기세요~

yamoo 2022-09-2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거 있습니다. 쿳시의 추락...표지는 다르네요. 쿳시의 작품 4갠가 더 있는데 어딨는지 몰겠지만, 쿳시의 작품은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네~ 그렇고 말구요^^

베터라이프 2022-09-27 11:27   좋아요 0 | URL
쿳시 이 작품의 결말이 제게 큰 울림을 가져다 주어서

틈틈이 쿳시의 다른 다른 작품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우리 안의 파시즘 2.0 -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임지현.우찬제.이욱연 엮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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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주간해 당시 출판계와 학계에 높은 인기를 누린 '우리안의 파시즘'의 임지현 교수가 다시 기획한 것이 이 '우리안의 파시즘 2.0'입니다. 임교수는 서강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한양대 사학과에서 연구 교수로 활동하다 최근에 자신의 모교인 서강대로 돌아왔는데요. 그는 해외에서도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고 국내에도 꽤 진보적인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학문 전반의 포스트모던 뿐만 아니라, 오랜 시기 동안 사회전체적으로 이식된 그와 같은 관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진보는 사실상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보와 보수는 속살을 까보면 다 마찬가지로 망가져 있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논법 구사에 저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우리안의 파시즘'의 새로운 확장판으로 임지현 교수가 자신과 같은 서강대 교수들과 일부 외부의 인문사회학 연구진들을 규합해 만든 일종의 시론(時論)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은 거의 최근인 2022년 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먼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예전부터 하고 있었던 생각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 '우리안의 파시즘'과는 약간 상이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요. 오늘날 불완전하게 이식된 능력주의적 관념,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보다 좀 더 과격해진 우리의 정치 그리고 사회 전반의 소통 부재와 아직도 철이 지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적 대치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요.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상당히 공감했던 부분은 정희진 작가의 '민주주의가 진영을 나누는 핵심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문장이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한 폐해를 다룬 이진우 교수의 글에서 '민주사회에서도 계급이 발생한다'는 그의 인식에서 보충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민주주의가 평등과 경제적 재분배 필요성의 약화에서 초래된 결과가 지금의 능력주의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민주주의가 평등의 원리를 중요시 생각하는 원리임을 감안해 본다면 '기회의 균등' 같은 신조어는 사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닐 겁니다. 다만, 능력주의의 왜곡된 사회 이식으로 발생한 오늘날 세대 간의 극심한 반목과 이철승 교수가 언급하는 "청년 남성들이 아버지와 삼촌과 형이 누렸던 혜택을 맛도 못 본 채 구직 대열에 오랫동안 서있었다"는 얼마간의 명확한 분석은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인식을 정확히 드러내는 분석이라 여겨졌습니다.

앞선 이 교수의 명확한 분석은 다음에도 이어지는데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586의 무능과 더불어, 반대편의 국민의힘 일각에서 그들의 포퓰리즘적 속성 즉,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는 맥락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간단합니다. 그 당의 인사들은 여전히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강고한 능력주의자이자 신자유주의자들인 그들 자신이 명목상이든 뭐든 간에 현재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좀 더 평등하고 모두에게 권력과 부를 획득할 확실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전반적인 체제 변혁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이철승 교수의 짐작대로 그저 청년층의 지지와 표를 위해 공언무시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것은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내재된 목적성 및 전부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가치관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보수라고 일컫는 자들의 그 면면들이 정작 흔들리지 않는 민주주의와 오래된 전통에 대한 수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 제도에 대한 안정을 위한 노력 및 종교적 윤리 의식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사익 추구로 점철된 왜곡된 정실 자본주의와 우리의 예에서 과거 개발 독재의 이익을 살뜰하게 나눈 집단 이익을 본질적 이익으로 주장한다는 것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더 강고하게 사회를 양단시킨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로 반대의 목소리를 사실상 막아버린 것이 그 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사법 살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를 무조건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곳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신자유주의가 가장 잘 이식되어 나타난 국가가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우선적으로 '이익'이라는 관념 체계와 그에 따른 결과물만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제는 모두가 명확하게 인지해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존의 여러 부침을 겪은 우리의 진보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도 인정할 만한데요. 기존의 강준만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여기에 집필진으로 참여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의 비판은 우리 역시 매우 귀담아 들을 필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권분립이라는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주권을 너무 과대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큰 가치로 치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는 박상훈씨의 평가에 저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인데요. 이것은 일반적인 시민 기본권과 함께 고찰해 볼 수 있는 사안으로 과거 계몽주의적 맥락에 기반한 공화주의 가치가 상당히 유명무실해졌다는 오늘날 현실적 측면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오로지 자본주의적 잣대만이 강화되고 강요되어 성역화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장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헌법 상의 기본권과 국민주권을 도식화하여 분류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양자는 우리 여전히 우리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 이며, 이러한 관념은 인권의 의미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진우 교수가 엘리트 중심의 능력주의가 취하는 미래가 '소위 능력으로 일어난 자들이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음울한 전망이 실로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즉, 능력주의로 일어난 저들이 사회 권력층이 되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또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도태시켜야만 한다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 사뭇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두 개의 사회를 발생시키는 것 못지않게 사회 전반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국민주권을 강조한 민주 체제가 남보다 더 많은 자원과 높은 목소리를 가진 자들의 '승자독식 정치'를 고착화 시킬 것이라는 논리적 전개가 딱히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보수 우파 일부에서 대의 민주주의를 아주 교묘하게 자신들의 이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여러 연구물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안을 연구해 볼 수 있다는 점은 명백히 직접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가능성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공상 속의 이론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토착 왜구'와 '빨갱이'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화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격멸의 대상이라는 것에는 십분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기득권을 전혀 놓지 않은 채, 권력과 부를 그대로 승계 받은 친일 세력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더욱 반응했던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과거 친일부역자들의 후손들이 해방 이후에도 호의호식하며 지냈던 것과는 반대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억울한 '용공' 누명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법정 살인을 당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설사 그것이 우리 역사가 지닌 오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자신들의 이익과 일부 계층의 소위 '20 대 80'의 사회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 및 무늬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보수주의에 반해 이익을 추구해 도덕성을 상실한 진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보여할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아예 걷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 사회에 있어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함께, 이데올로기는 철지난 관념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회 전반에 이익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법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일부에게는 불편한 소리로 들리겠죠. 이처럼 누구에게는 이 사회가 지상 낙원인 것 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권력의 기울기가 극명한 시점에서 그것을 가진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 시민들 간의 논쟁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씨와 윤석렬 씨 모두 박정희를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 경제와 정치에서 전두환의 업적을 언급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풍경은 참담하기만 하다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능력주의만은 힘껏 붙잡고 있다

한편에는 개인의 능력만을 사회적 자원의 분배 기준으로 삼는 능력주의가 매우 공정하다는 유토피아적 시각이 있다

엘리트 계급과 나머지 계급 사이에는 이제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공정사회라는 유토피아로 이르는 길인 동시에, 능력의 폭정이라는 디스토피아로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정치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

기본권이 시민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다, 주권이 시민총회의 결과물이라면, 기본권은 국민주권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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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위한 투쟁 / 법감정의 형성에 대하여 - 너는 투쟁을 통해 너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루돌프 폰 예링 지음, 심재우.윤재왕 옮김 / 새물결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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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모든 법학자들이 사법 私法의 정신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읽는다는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과거 하노버 왕국의 아우리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아우리히는 독일 니더작센 주州 의 동부 프리지아 지역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는 뮌헨의 유서 깊은 대학인 괴팅겐에서 공부했고,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예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로마법에 대한 상당한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마찬가지로 법역사학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예링이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를 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명저인, 이 '권리를 위한 투쟁'이 데이비드 흄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영국인들의 경험주의 철학이 그의 법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이 글 중후반이 '법률에 대한 법률의 투쟁'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서술들이 여러 곳에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일관된 그의 논증이 풍부한 수사를 통해 진술되고 있다는 점도 법에 대한 여느 논저중에서 일반인과 사법 관료 할 것 없이 '법의 진정한 가치'를 이토록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예링의 이 저서를 무엇보다 먼저 세상에 다시 내보이려고 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예링의 이 책은 원제, "Der Kampf ums Recht'로 지난 1874년에 출간되었고, 최근에 작고한 고려대 심재우 교수의 번역과 라드브루흐가 편집한 판본(1965)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국내에는 윤재왕 교수가 심재우 교수의 번역을 이어받아, 지난 2016년 10월에 다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대학에서 교양 수업을 위해, 이 예링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 기억으로는 사회와 법철학과 관련된 강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제 서가 한 켠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그때 읽었던 판본은 범우사(1997) 판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책 제목을 통해 어느 정도 내용을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이에 저자인 예링은 "국가도 역시 개인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각 개인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우리의 법의 대한 건전성을 답보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대변하는 것은,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라는 신념 어린 문장입니다. 그래서 글 서두에 예링은 자신이 권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법의 본능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측면에서의 여러 법규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권리와 맞물려 해석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법이 갖는 아주 극명해 보이는 속성, 즉 시민을 법률로 통제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를 유지시키는 야경 국가라는 의미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예링이 진정으로 밝히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의 경험에만 의존해 사회를 규명하려고 했던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이력을 같은 독일의 대중 지식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도 어느 정도는 경험주의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법에 대한 태도 전반이 세대와 세대를 거친 경험주의적 측면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각인되어 왔는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 자신들을 위한 법을 그 누구보다도 친숙하고 실용적으로 대면해야 함에도 현재는 오로지 변호사들과 사법 관료들 만을 위한 '특수한 분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링은 이러한 변화를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시민이 법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두려움을 갖지 말고 "끊임없이 법률과 대화를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이는 시민이 법제도를 이루는 근간이라는 점과 모두의 소위 공익(저의 해석이기도 합니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절대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법과 사유재산에 대한 관념이 유사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연유에도 양가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기심 자체에 대한 예링의 전반적인 불신을 이 글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명예, 윤리, 도덕적 의무를 시민이 저버린다면 예링이 특별하게 인용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다음의 피 토하는 절규와 다름 없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는 게 낫겠다."

민주 사회에서 법 자체는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링의 주장을 현 시대에 대입해 본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다투고 투쟁할 유일무이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한 것이데요. 장 자크 루소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겸허한 중재자'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부분도 중요한 맥락이고, 고대 로마법에 의해 부패한 재판관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지난날의 기록은 이처럼 법이 계층과 지위 그리고 신분을 따지지 않아야만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독일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법정의 문을 두들겼다는 사실과 상반되게 오늘날의 우리의 법정은 과도한 권위와 권력으로 덧칠해져 있습니다. 사법 관료 즉, 판사와 같은 자들이 스스로 준엄한 사법 제도의 수호자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근간인 시민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지위임은 분명한 것인데요. 대의적인 측면에서 제도의 뼈대를 제공하는 선출권을 가진 시민들이 오늘날 사법 제도 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글에서 중요하게 인정되는, "법이 수단과 목적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그것의 주체는 마땅히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공화주의의 아버지들이 사법 체계 자체가 이런 식으로 시민들에게 폐쇄적이 될지는 예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권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취급하는 "오로지 알량한 이익 만을 탐하는 자가 권리의 신성한 의무를 알 길이 없다"는 취지의 맥락은 이를 더 악화시킨 요인이기도 할 텐데요. 개인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사법 제도 자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에 대한 예링의 선견지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국가의 명예와 권리가 달린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예링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링의 진술을 소개해 드린 대로, 국가는 개인들이 모인 총합이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데 노력하는 데 들어가는 희생이 도덕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권리를 위한 투쟁과 관련해, 예링은 먼저 악법과 정치 권력의 사법 지배 상황을 상정하고 "모든 독재는 사법에 대한 공격, 즉 개인의 권리 박탈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후에 진술 되는 국민의 당당한 명예와 같은 자부심과 그에 준하는 윤리적 힘을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게 독재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법 제도가 일으킨 '사법 살인'에 대해 예링은 무엇보다 죄악이었다고 일침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법 관료라면 이미 누구나 한번쯤은 그를 일독했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예링의 경고를 그저 '있을법한 주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텐데요. 우리 역시도 과거에서 사법 제도가 독재에 지배를 당하게 되면서 숱한 '사법 살인'을 지근 거리에서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악법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있다는 것은 권리의 연장선 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그래서 우리는 예링의 글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되는 각자 스스로의 선연한 권리를 양심과 윤리의 측면에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거듭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는 그의 경고를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개인에게 사실상 '과도한 권리' 따위는 없다는 예링의 설득력 높은 논증은 여러 수사들을 통해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데요. 결혼에 대한 수사나 후반부에 로마법을 통해 전개되는 여러 인용들은 그 시대에선 나름 최선의 설득력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이기심과 사유재산에 대한 그의 논증들에 대해 일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들을 위해 오독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애덤 스미스에 관한 거의 의도된 오역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현재에 있어 개인의 이기심이 무엇보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여겨지고 있으니, 이를 의도적으로 권리와 혼용하거나 오히려 전자를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인데요. 바로 하이에크가 그런 의미에서 크게 재미를 봤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법이 보장하는 측면에서 권리를 규명해 나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의 예링이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했던 점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권리라든지 시민의 주권이라는 것들이 계몽주의에서 도출된 것이고, 그러한 몇 세기의 진보하는 역사가 또 공화주의를 잉태하게 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초적인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의무는 법의 존재 의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권리 투쟁이 결국에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도 맞물리게 되고, 그것을 망각한 이익에 물든 국가의 국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거래하려 든다면 그 국가의 존망이 아주 위태롭다고 봐도 무방할 것인데요. 그래서 도를 넘은 권력자가 대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으려고 든다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저항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민주주의가 그토록 요구하는 시민들의 야생성인지도 모르겠는데요. 따라서 예링이 말하는 '권리' 자체를 의식적으로 가늠해 보자면 결국 이는 우리의 사활적인 민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법의 역사가 인간의 의미와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와 법은 모두 야누스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어떤 이들은 이쪽 면을, 다른 어떤 이들은 저쪽 면만 보는 나머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인상을 품게 된다

민족들에게 법은 그저 아무런 노력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얻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만 한다

이 투쟁들이 고도의 노력을 경주할 가치가 있는 재화를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아둔한 자도 얼마든지 이해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왜 양보하지 않고 투쟁하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재산을 법적으로 주장할 때 지침이 되어야 하는 유일한 동기는 내가 재산을 취득하고 사용할 때 나를 규정하는 동기와 똑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유권이 노동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아주 간단히 또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어들수록 소유권의 물줄기는 갈수록 흐려지고 마침내는 증권투기와 주식사기 같은 진흙탕에 빠져 이 물줄기가 맨 처음 시작된 원천이던 노동은 흔적을 감추고 만다

만일 어떤 삶의 철학이 그러한 안일한 심정을 설교한다면 그런 철학은 비겁함을 찬양하는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이러한 고통을 겪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설령 로마법대전을 모두 외우고 있다 할지라도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윤리적 세계질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본능 가운데 가장 고결한 본능 중의 하나를, 어떤 이들에게는 조잡한 감각적 쾌락을,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또 어떤 이들에게는 소유욕을 자극해 움직이게 만든다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

윤리적 분노는 도덕적 세계에서 나타는 우레와 같은 현상으로, 그 형태는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분출되며, 그 윤리적 폭발력은 폭풍과 같이 근원적이로 모든 것을 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 앞에 굴복시킬 정도로 강렬하다는 점에서 숭고하고 장엄하다

우리 언어가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법살인은 법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악이다. 법률의 수호자이자 파수꾼이 법의 살인자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권리를 용감하게 방어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전체의 권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바치겠다는 절절한 욕구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는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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