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위기 -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안병진 지음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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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 출생으로 서강대 사회학과 서울대 정치학과를 거쳐,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 담았던 미국 뉴욕의 사회학 명문 뉴스쿨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뉴욕 시립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 2003년 귀국해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병진 교수는 최근까지 TV토론 방송을 비롯 시민들을 위한 정치 프로에 간간히 출연해,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 바가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안 교수가 소위 미국내에서 리버럴이라고 불리우는 좀 더 상식적인 중도와 유사한 지형의 지식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안교수의 발언을 담은 기사들을 봐도 민주당쪽에도 쓴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여느 학자들과는 다른 스탠스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안 교수의 활동에 일정 부분 지지하는 편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동안 그가 자신의 여러 논저를 통해, 미국과 한반도를 둘러싼 틀에박힌 정치외교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점은 꽤 신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동일한 제목으로 지난 201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미국 외교학계에 극명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이엄 앨리슨을 다소 '순진한 생각의 소유자'로 여기게 만드는 듯한 제목은 단순히 저자가 학계 주류를 관통하는 학자를 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면에서 이 글 2장에서 인용된 딘 러스크의 어느 대학 강연 자리에서 "여러분은 저처럼 유화책과 고립주의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라고 호소하며 눈물까지 보였다는 일화는 실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2장 전반에서 논증되는 "전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고간 1962년의 13일의 위기"에 피델 카스트로가 뜬금없이 흐루쇼프에게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 자체를 몸소 깨닫게 만듭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감행해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이는 카스트로라는 정치인의 존재감은 핵전쟁의 위협이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합니다. 이와 관련해, 안 교수는 여느 정치학자와는 다른 관점으로 글 서두에서 의미심장한 '베두인의 전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칠면조를 훔쳐간 자들이 자신의 딸까지 강간하고야 말았다"는 베두인 족의 교훈은 1962년의 카리브해 쿠바섬에서 초래된 어쩌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었던 "핵전쟁의 문턱"을 곱씹게 만듭니다. 저자의 고유한 해석대로 이 베두인 전설의 딜레마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던 문제와 매우 닮아 있는데요. 역시나 2장 말미에 등장하는 "국가간의 위기는 불완전한 정보에 기반한 상호 오인의 무덤이다"와 일맥상통한다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그레이엄 앨리슨과 같은 현실주의에 경도된 학자들이 무슨 과학 법칙과도 같은 단순한 논법으로 해석해 마지 않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마치 막 서막이 펼쳐지려고 하는 미중간의 패권 투쟁에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오버랩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2차 대전의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로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과도 유사한 처지가 된'서베를린'은 미국과 서유럽에 있어 전세계에 자유 체제를 담보하는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는 의도와 그 목적 자체를 광범위하게 이해하기 위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서, 충분히 근거를 세울 수 있기도 한데요. 당시 케네디 정부에게 있어서 베를린 문제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문제였고, 동시에 소련의 봉쇄 이후에도 미국과 서유럽이 서베를린을 정치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봐도 이 도시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중대했는지 미뤄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쿠바섬의 13일 사태에 대한 많은 외교 문서가 각국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만 흐루쇼프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동이 베를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일하게 3장에서 보여지는 당시 워싱턴은 이러한 소련의 복합적인 도발에 일견 분노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외부에 다소 온건해 보이기까지 한 케네디 대통령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는 후일담은 막대한 핵무기를 보유한 양국에 의해, 우발적 핵전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됩니다. 물론 혹자들은 터키의 미사일 배치를 언급하며, 흐루쇼프 역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대변합니다만 냉혹한 전쟁광으로 이해되기까지 하는 르메이가 당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과 자신의 상관인 케네디 대통령까지 끝내 경멸했던 것으로 보아, 미국의 매파와 소련의 호전광들이 양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 요소였으며, 최근 국내 정치인의 주장만큼이나 "대통령의 자리는 전쟁이나 선제 타격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얼마만큼 위기 관리를 잘 해 낼 수 있느냐"를 매번 시험 받는 자리라는 해석이 실로 정확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바로 상반된 이 지점에서 케네디의 정치적 미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그에 관한 정치적 호불호의 감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패권국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을 짓밟힌다 하더라도 파국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전쟁을 최종적으로 기피하기로 했던 결심이 포함된 정치적 결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최근의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위한 '바로미터'로 살펴보고자 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안 교수에 의해서도 꽤 훌륭한 논저로 평가받고 있는 마이클 돕스의 논저, "1962"년 또한 국내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린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돕스의 이 글을 접해본 많은 독자들도 조차도 "설마 핵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겠어?"라고 당연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강조하고 부분은 북한의 핵문제를 앞선 단순한 논법과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여러 정치적 해결 방안들은 분명 북한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카스트로의 이익과 현재 김정은이 추구하는 이익은 그 본질이 꽤 유사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카스트로가 소련 대사를 향해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에둘러 말한 것은 자신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쿠바가 설사 미국에 의해 잿더미가 되더라도 마치 전세계의 안위 따위는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김정은의 평양 역시 핵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잃을 것이 북한보다 현저하게 많은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후견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이 자신들의 군대를 북한에 투입할 가능성이 희박다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처럼 중국은 1962년의 소련보다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정권이고, 무엇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소련보다 더 호전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배경들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들이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안교수도 역시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에게 진지하고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에 이릅니다. 이는 1962년의 케네디 행정부가 선보인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해상봉쇄'와 같은 방법이 항상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점과 최근에 조지 W. 부시가 맹신했던 설익은 '북한붕괴론'과 같은 성급한 예측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 위에 두고 있는 현실에서 악화를 막기 위해 최소한 고려해야 하는 점들을 4장 말미에 몇가지 사례를 들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논의된 안교수의 제안들이 하나같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김정은을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외길 낭떠러지로 몰아서는 안되며, 이것이 실패했을 때 벌어지는 핵미사일을 통한 전쟁 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쟁의 참혹한 댓가 마저도 결국은 전적으로 우리만의 몫이라는 가정입니다.

미국과의 평화협상이 어찌하여 시간 끌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사실상의 답변을 담고 있는 4장은 북한 핵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번 워싱턴의 주인이 바뀔때마다 벌어지는 일관되지 않은 국제외교적 정책과 특히 쿠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 정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국가들을 대화 상대로 조차 취급받지 못하게 만드는 미국의 혐오감정과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중남미 아메리카에 대한 그동안의 놀라우리 만큼 비열했던 CIA를 통한 공작 정치의 유산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과거 미국의 이러한 '공작과 작전'들은 이것을 면밀히 연구한 미국의 적성국들에 의해 미국에 대한 신뢰를 답보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치부됩니다. 여기에는 제2차 이라크 전쟁을 위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수행한 '후세인이 각종 생화확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허위 주장이 나중에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고려해 보면 저들이 어떤식으로 교훈을 얻었는지 대략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쿠바와 북한 등에 있어 미국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결과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과 같은 오인의 문제는 단순히 우스개 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엄연히 현재까지도 미국내에 각종 외교적 현안에 있어 군사적 개입을 주장하는 매파가 존재하고 있고, 국내 정치 전반에 있어 상당 부분 해를 끼치는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나날이 영역을 넓히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대로 행정부와 양당의 엄연히 구분되는 정책 때문만으로는 반자유주의 국가와의 신뢰와 평화 문제의 딜레마를 이해하기란 다소 어려운 법입니다. 여기에서 거듭 논의되는 북한 정권의 문제는 만약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저 핵무기 만으로 북한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웠을것이라 추측됩니다. 그만큼 북한의 문제는 쿠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가 잔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대단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러 제언들 가운데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대화 창구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이며, 적대국에 준하는 국가와의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군사적 개입에 대한 손쉬운 유혹에 있어 세계 패권을 갖고 있는 유일무이의 민주주의 정부가 오로지 자신들의 국익만을 위해 이를 방편으로 삼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도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일례를 통해 핵확산 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선례를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전세계에 미국의 국제외교적 정책에 의문을 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알게된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 정보 당국이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과 북한의 핵무기 커넥션을 오래전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연유에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뭔가 음모론으로 읽혀지기도 했습니다만 과거 이삼성 교수의 논저에도 이와 같은 부분이 언급되었기에 충분히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그와 같은 우려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님을 입증했던 바가 있는데요. 예를들어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군산복합체와 관련 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글의 여러 교훈들 가운데 제가 극명하게 느낀 점은, "일개 국가의 위신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핵전쟁의 참혹한 결과물보다 명백하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끝모를 당위였습니다.   



베를린 대전략 가설에서도 드러났지만 케네디와 같은 리버럴 엘리트는 합리적 사고와 이를 근거로 한 설득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카리브해 위기의 책임을 소련과 쿠바의 군사모험주의 탓이라고 하는 우파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탓이라고 하는 촘스키 같은 좌파의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1962년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강대국에 대한 배신감을 키우면서 자주 노선과 핵무기 개벌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인지심라학적 개념 중 국제정치학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인 오인은 위기 사례 분석에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다. 로버트 자비스는 "부정확한 추론, 결과에 대한 계산 착오, 정책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판단 착오"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오인이 의사결정에서 중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쿠바 미사일을 둘러싼 위기의 핵심 교훈은 앨리슨의 주장과 같은 전쟁을 각오하는 태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강압 전략이 우발적 전쟁의 가능성과 얼마나 맞닿아있는가다

로버트 케네디의 자작극 제안은 후에 린든 존슨 행정부가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 리버럴이 보여준 비윤리성이 예외적이라기보다는 통상적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평화적 해법에 대한 흐루쇼프의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신‘인 핵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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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귀환 -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붕괴하는가
로버트 케이건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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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후손인 로버트 케이건은 역사가로 알려진 친부의 영향으로 예일대와 하버드 대를 거쳐, 연방 공인 연구 대학인 아메리칸 대학에서 미국 역사와 관련한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이 책의 저자나 그의 논저를 번역한 출판사는 저자인 로버트 케이건의 한가지 수식어를 빼먹고 있는데요. 그것은 그가 네오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케이건이 공화당 당적을 포기하고 무당적으로 있는 것을 흡사 네오콘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그가 '네오콘'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가 공화당 당적을 정리하고 같은 당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의 정치적 노선을 바꾼 것으로 취급될 지도 모르겠지만 '무지의 베일'도 아니고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2010년 9월 브루킹스 연구소의 미국과 유럽 센터의 선임 연구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고, 힐러리를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원제, "The Jungle Grows Back : America and Our Imperiled World"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역자와 관련해 한 가지 개인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어느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 출연한 역자를 발견한 것인데요. 그래서 한동안 출연한 사람이 역자와 동일 인물인지 여러모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영상은 소위 유럽의 좌파 사회학자들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었는데요. 그곳의 내용들은 거의 대안 우파들이나 주장할 법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블로그에서 역자의 정치적 성향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역자가 번역한 책들을 찾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위 뻔해 보이는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논저를 누구보다 잘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진영을 지지하는 번역가인가 라는 고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케이건의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저자가 분명하고 확고하게,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세계"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될만합니다. 작게는 미국에서 자유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크게는 미국 자신이 국제 사회에 항상 강조하고 투영하는 것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자유주의가 이룩한 역사적 진보라는 것 또한 거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글 전반에 흐르는 논리적 맥락에서 소위 '민주 정체(마땅히 민주주의로 불려야 합니다만)' 역시 원대한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뭔가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의해 그 소명을 다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요. 제가 이론적 현미경을 들이대고 일일이 다 따지고 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부분도 역시 실망스러운 지점이었습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 이 글의 9장에서 저자는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을 위한 발언으로 보이는 "개입주의와 제국주의는 엄연히 다르다"는 문법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많은 진보 좌파들이 미국의 패권 개입을 가지고 제국주의라는 맥락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저 역시 다소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세계가 오로지 미국의 지대한 헌신과 어떤 역사적 사명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과거의 냉전이 저자가 인용한 존 르 카레의 "절반의 천사와 절반의 악마"와 같은 초월적인 선악론이 아니라 그런 대결에도 인간적인 이기심과 도덕적 무절제의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의 5장에서 "선한 명분에도 이기적이고 타락한 측면이 있고 적도 적 나름의 사연이 있으며,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고충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서술은 이를 명확히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자유주의가 갖는 인상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고매한 이상과 순결한 도덕론 따위를 언급할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미국이 선도한 자유주의 세계' 자체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는 사실이겠지요.

2차대전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전에 전세계가 유럽에 암운을 드리우던 전체주의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실로 문제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케이건은 이에 정치권의 무분별한 '파시즘의 전도'는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익을 얻고 있던 자본가들과 산업 기반 소유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동경은 빼먹고 있습니다. 저자가 1920년대의 자본주의에 다소 경도되기 시작한 자유주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자 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3장부터 일관되게 논증되고 있는 이 '자유주의'가 대전 이후의 유럽에 만연되어 있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망령을 미리 억제한 공로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적으로 모든 유럽인들과 자유 세계의 공통된 이익을 위해 경주하게 된 원인이라 저자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연유에는 오늘날 점차 머리를 들고 있는 인종주의적 극우주의와 이슬람 이민을 상대로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의 위기로까지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는데요. 케이건이 다소 흥분이 담긴 어조로 쓰고 있는 듯한 인상까지 받은 "이 자유주의가 과거 인류의 '계몽과 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자유주의가 어떻게 배타적 이데올로기들을 시민들 사이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지 그러한 연관성에 누구나 설득당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까지도 불필요하게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면서까지 전세계의 안보에 미국이 희생을 해야하는 하느냐에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종래의 고립주의와도 유사한 미국 국민들의 이러한 불만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다만, 전후 구축된 미국과 서방 그룹의 이 자유주의적 세계는 인간 본연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이런 재구축된 세계 자체'가 미국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냉전 시기에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CIA의 더러운 군사작전과 정치적 개입을 자신들의 동맹과 일절 상의도 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자인 케이건은 이러한 문제와 직면해, 여느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마무리짓고 있습니다만 적지않게 도덕적 신뢰에 타격이 되었던 비민주주의적 행태를 안고 갈 수 없을 만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것이죠. 뭐 큰틀에서야 저자의 강조된 문구처럼 미국이 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게 만드는 유일한 패권국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프로파간다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도 분명합니다. 후쿠야마식대로 냉전의 종말을 눈으로 경험했던 많은 세대들에겐 미국이 서방세계라고 불리우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를 지지하는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남들도 하기 쉽지 않은 국방력의 총투사로 이러한 토대를 지켜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다만, 냉전의 훌륭한 종결이 근 40여년간의 전세계에 대한 핵전쟁의 위협을 깡그리 잊게 만들정도는 아니며, 인류를 몇번이나 절멸에 이르게 할 핵무기를 머리 위에 놓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몰빵하면서 그룹 모임에 있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과 같이 '그래도 적당히 안전한 세계'였다고 자위할 정도가 되는 것일까요.

이즈음에서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에서 다시금 발견해 낼 수 있던 것은 이 체제가 일견 보여주는 어감처럼 실제로 나약하지는 않다는 사실일겁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유 세계의 리더가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줬고 관타나모에서의 포로들에 대한 고문은 이 점을 아주 명확히 했습니다. 저자인 케이건은 스스로 네오콘이라 불리우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사실 그에게 리버럴적인 양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중동 관여를 언급하면서 위에 언급한 점들을 꺼내지도 않은 것은 적잖이 실망스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이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진보주의와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에 대해 그 이중성을 지적하면서도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여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첨단의 미국 군대에게 아무런 비판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앞선 존 르 카레의 논법을 그가 맹렬히 추종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뒤이어 글 3장에서, "자유주의 질서에 속한 국가와 사회들은 자국의 국민을 대할 때, 그리고 심지어 범죄인을 대할 때조차도 보다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라는 진술은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왜 그러지 못했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이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숭고한 의미를 단순히 먹고 살만해지고 자유롭다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국제 외교와 같은 것들에 논리적 선명성 따위를 지지할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갖고 있어야 하겠죠.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이 없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의 "미국이 월등한 지위를 유지하지 않는 세계"는 폭력이 난무하고 무질서하고 민주정체와 경제 성장이 후퇴하는 세계로 이어진다는 논법은 과거 영국이 가진 패권과 지금의 미국이 얼마나 입장이 다른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용인하고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묵인하는 것처럼 미국 자신도 스스로의 국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패권국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더이상의 핵무기 확산을 억제하고자 했던 오마바 행정부의 노력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고 아마도 기존의 질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하고자 하는 수동적인 러시아와 매우 적극적인 중국의 부상은 말 그대로 다음 세대의 확실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자의 강조래도 "자유주의 체제가 중국을 번영케 했다"면 이것의 양면성은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업들과 유럽의 자본가들에게도 마땅히 이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강대국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유주의가 이에 산파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보기에 따라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의 행동에 대한 논리적 예측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정말 미국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개인과 시민의 자유'가 그토록 귀중하고 숭고하다면 중국의 배타적 부상을 제대로 관리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제가 평소에도 미국의 외교 정책과 정치 일반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나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대해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이익계산에 따라 대만을 희생할 건지 아닐 것인지와 같은 주변의 동맹국들에게 매우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것만큼은 자제하는 편이 미국의 국익에 옳다고 여겨집니다. 저자가 인용한 라인홀드 니버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에 대해 '안일한 양심'을 지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 만약 정론이라면 정말 작금에는 치열하고 아주 명확한 대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들과 미국 정부가 자신들이 이룩한 이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하고 변치않는 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케이건은 글 중간에 노엄 촘스키를 인용하고 있었는데요. 저로서는 뭔가 자명한 기분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단순히 진영 논리에서가 아니라 촘스키에 대한 과거 네오콘들의 수많은 공격들을 되짚어 본다면 말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의 불행은 미국과 소련의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무력화 된 것과 더불어 앞으로 부상할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미국이 주저한 댓가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자국의 방위와 생존은 스스로가 답보해야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그러한 당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지정학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한된 국가'의 전형일겁니다. 국제체제 역시 이들에게 등을 돌리려고 하는 작금의 시점은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뭐가 다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미국인은 자국이 무엇 때문에 세상만사에 그토록 깊이 관여하고 중동과 같은 구제불능의 지역에 인명과 돈을 쏟아부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독일, 일본, 남한과 같은 부유한 동맹국들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국방의 부담을 더 짊어지지 않으며, 미국은 무엇 때문에 자국의 경제와 안보 이익과 직결되지도 않은 문제들 때문에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해리 트루먼 같은 이들은 1930년대에 세계질서가 붕괴한 까닭은 미국이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늘 독재체제 정부가 민주정체 정부보다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왔다

영국이 지탱해왔던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는 사라졌다. 따라서 세계는 무질서로 빠져들든가, 미국의 국익과 원칙에 적대적인 나라들의 지배를 받든가 둘 중 하나였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분괘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과 비밀 작전을 수행했는데, 보통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참여한 다른 나라들의 승낙을 구하지 않았고, 때로는 많은 동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기도 했다

그해 새뮤얼 P. 헌팅턴은 "미국이 월등한 지위를 유지하지 않는 세계"는 "폭력이 난무하고 무질서하고 민주정체와 경제 성장이 후퇴하는 세계가 된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월등한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미국 국민의 복지와 안보, 그리고 세계의 자유와 민주정체와 개방경제와 국제질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자유 세계가 이들이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그리고 이러한 무기를 발사할 미사일"을 갖지 못하게 막지 않으면 이들은 "한층 더 치명적인 적"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날 문제는 지정학이 귀환한 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이 한동안 중단했던 과거의 야망을 다시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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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 - 불황, 예산전쟁, 몸의 정치학
데이비드 스터클러 외 지음, 안세민 옮김 / 까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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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시니어 리서치 리더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터클러는 본디 옥스포드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했으나 의외로 보건 의료쪽에 관심을 보인 학자입니다. 현재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 있는 사회과학과 경제학 전문 대학인 보코니 대학에서 경제학, 정부조직 및 헬스 케어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산제이 바수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의학과 조교수로 만성 질환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역학자로서 명성을 알라고 있는 학자입니다. 앞선 데이비드 스터클러가 바수와의 이와 같은 혐업에 큰 만족을 느꼈다는 소회를 비친것으로 보아 그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역량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바수는 유엔을 비롯해 세계보건기구, 세계심장연맹, 미국심장협회 등에 전문가 조언을 비롯한 자문 패널로 일하고 있으며, 의외로 의료인치고는 경제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원제, "The Body Economy : Why Austerity Kills"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국역된 책 제목을 다소 자극적으로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일하게 책에 대한 이슈와 판매고를 위해, 원제와 거의 상관없는 맥락으로 번역된 제목들의 사례가 우리 출판계에 많이 널려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국역 제목은 아주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정도로 일정 부분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른 결론일수도 있겠지만 거의 의문형이라 봐도 다를바 없는 제목의 문법에 대한 답변은 역시 '그렇다'입니다. 요즘 아예 외래어의 의미로 정착한 '밸런스'라는 단어에 제가 일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경제학자와 의학 분야의 권위자가 함께 노력을 기울인 이 책의 가치는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체적인 글의 형식은 각국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보건 의료 르포르타주'라 지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공저자들은 약간의 겸손의 의미로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논저가 사회와 출판계에 혁명적인 문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고 있지만 분명 이 글은 충분히 출판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입장에서 1997년 당시의 IMF의 '독약 처방'에 대한 일종의 사회경제학적인 본질을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선 부분에서 제가 '독약 처방'이라고 한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2012년에 IMF 측에서 인정한 부분을 언급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처방이 상대국에 가혹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말합니다.

2008년에 시작된 전세계적 금융 위기의 원인과 결과 모두 익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제 위기들은 1997과 1998년 전후에 시발된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의 동아시아 사태와 2007년 전후 아이슬란드와 그리스를 그리고 공산권 붕괴 이후, 진행된 전방위적인 자본주의화에 따른 과거 폴란드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인데요. 당시 경제 위기속에서 해당국들의 보건 의료의 추이를 분석함에 있어 이들 공저자들은 실질 데이터를 기반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논증들의 대부분은 사실적이고 한 국가의 경제 붕괴와 그로 인한 강제된 개혁의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의 보건 의료가 사치제의 범주에 들어가 시민 보건 자체를 극단으로 내모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시민들을 위한 광범위한 보건 의료 지원에 대해, 아이슬란드의 경제적 개혁을 주도했던 IMF가 정부의 의료 지원 자체를 사치제로 규정하고 비용 절감과 같은 개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데요. 물론 아이슬란드의 경우는 여기서 논의되는 그리스와는 달리 외부의 개혁 논법에 대한 실행 여부를 '국민 투표' 넘겨 개혁 전반이 해당국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하는 쪽으로 반전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1997년에 말레이시아가 IMF의 개혁 프로그램을 일절 수용하지 않았던 사례와 대척점에 있기도 합니다.

일전에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의 입으로 "소련 체제의 소멸 이후, 앞으로 러시아인들이 무얼 해야하는지에 대해, 첫째도 민영화, 둘째도 민영화, 셋째도 민영화"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후에 자신이 틀렸다고 소회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위대한 민영화주의자"라고 이 글에서 강조되는 대처의 수식어를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수의 이익과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사회 보장 프로그램과 공중 의료를 삭감시키며 공공 기업들을 민영화하여 전반적인 시장 자유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아주 일관된 매커니즘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금융 자본주의하에 주주적 자본주의의 배타적 이익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강고한 신자유주의에 어떠한 민주적 토론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폐쇄성을 엿볼 수 있겠는데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이것의 또다른 의미로서 자리하는 것이고 자유주의 사상 전반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특정 계층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강화되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 경제 엘리트들에 의한 공중 보건 의료의 대대적인 후퇴는 일차적으로 공익과 공공성에 대한 일개 분야의 엘리트들의 과도한 권한이라 볼 수 있으며, 금융 위기 당시 그리스의 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에 처해있으면서 다수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마약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제가 마약의 터무니없는 유용성을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불안 계층이 비위생적인 주사기 사용으로 말미암아 HIV 바이러스까지 그리스 국내에 만연하게 된 것은 순차적으로 이러한 파행이 기름을 부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저자들은 이 글의 결론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의 진정한 회복, 즉, 소수가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회복을 달성하기에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고 말하는 것에 작금의 보건 의료 사태의 중요한 함의가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미국의 보건 의료 체계의 전반적인 민영화에 따른 사기업들의 엄청난 수익에 감명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 정부 당국에 의한 '각 제약회사들의 특허권 보장과 배타적 권리'등을 옹호하는 것을 자본주의적 개혁으로 보는 관점에는 이와 같은 졸견들이 기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미국 의료 체계를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 만들고 자신들의 오래된 '개인의 자유라는 함의'에 몰빵해서 어떠한 반론이나 토론을 거부하고 오로지 의료 민영화의 장미빛 상황을 확고부동하게 유지해 온 사회적 역사가 외형적으로는 이러한 쳬계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는 의료 사기업들의 안정적인 무대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사실상 많은 의료인들 조차 "의사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냐"는 개인의 직업 선택권에 완전히 매몰되어 의료 체계 전반이 그 사회나 국가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스스로 사회학적 편협함과 이와 같은 사회 안전 보장이 결국 무엇보다 엘리트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빈곤과 사실상의 기회의 박탈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술을 구입할 돈이 없어 공업용 알콜로 하루를 연명하거나 앞선 그리스의 사회 문제화가 된 시민들의 마약 중독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한 민영화'의 이행 가운데 발생한 '부수적 피해'로 치부해야 되는지 소위 IMF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엘리트들에게 다시금 되물어 보고 싶군요.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자신의 지난 논저에서 금융 시장의 안정을 위해 투입된 공적 자금이 수십억 파운드에 달하는데, 왜 그보다 더 중요한 사회 보장과 보건 의료에 그 만큼의 돈을 투입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1997년 당시 우리 한국의 사례에서 제대로 된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준비되지 않은 한국은 IMF의 강력한 개혁 프로그램에 사회 안전망이 유명무실해졌으며, 이 당시에 유아사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점을 일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IMF 관료들조차 당시의 한국 국민들을 고통에 이르게 한 것을 뒤에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개혁 프로그램과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의 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역사의 사례로 남아 베이징이 이를 회피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오히려 중국이 미국에 준하는 국력을 서서히 갖추는데 이득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즉, 이 시대의 중국의 굴기라든지 중국의 열망은 거의 반절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것이며, 초반 중국의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공장화에 미국을 연고로한 막대한 다국적 기업들이 이득을 취한 것을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익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소위 명징한 가치주의는 그 국가의 군사와 보건 및 전반적인 시스템 전반에서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공저자들 역시 이와 같은 배타적 관념에 대해 저항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민주적 통제와 종래와 같은 시장에 대한 터무니 없는 자유는 이제는 시급한 토론과 그것의 주제로서 정상적인 정치경제적 차원에서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국가의 애주가들은 남성용 로션, 구강 세정제처럼 알코올을 함휴하지만 음용에는 부적합한 제품에 이용되는 알코올로 만들어진 술을 마셨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례적인 정치학"의 시가를 낳았다. 세계은행의 이행기 경제팀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커다한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민영화 프로그램은 논란을 가장 많이 일으키고 고통이 따르는 정책이기도 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를 시장 경제로의 이행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다

영국의 위대한 민영화주의자 마거릿 대처 총리는 충격요법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재임 기간이 11년 동안에 약 20개에 달하는 영국의 거대 공기업을 민간에 이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부패는 급진적인 민영화 이후에 더욱 만연했다

IMF의 처방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동아시아의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이후에 나타나게 될 결과를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의 태도는 17세기 철학자 존 로크와 도처에 존재하는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사람의 사상을 대변했다

아이슬란드 은행업자들은 "대마불사"를 믿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그들의 이런 믿음을 외면했다

기자들은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이 그리스가 지난 10년 동안 EU로부터 실제로 빌린 금액의 규모를 감추기 위한 거래를 주선하는 조건으로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 수억 달러를 지급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스 스위대는 아이슬란드와 마찬가지로 구제 금융에 관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2012년아 되자, 동아시아와 아이슬란드의 금융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IMF는 긴축 정책이 초래할 피해를 과소 추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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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8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8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융 도둑 - 99%는 왜 1%에게 빼앗기고 빚을 지는가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안세민 옮김 / 책세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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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카운티의 베이싱스토크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공동 교육 독립학교인 로듣 완즈워스 대학 (LWC)을 거쳐, 옥스포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서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의 세인트 안토니스 칼리지에서 아프리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얼마간의 경영 컨설턴트 경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2019년에 뉴 스테이츠먼이라는 잡지에 경제 해설로 칼럼과 팟캐스트 등에서 활약하고 드디어 그녀의 이력에 중요한 시점이 된, 논저 "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을 출간합니다. 이 책은 영국 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평론가인 마이클 갈란트는 "사회주의자와 회의론자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높은 비판"이라 평가를 하였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출판과 영국 국내의 상황을 돌이켜 보건대 신기하게도 콜린 크라우치와 비슷한 사례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야 글을 완독하고 나서 들었던 첫 느낌은 현재 체제에 대한 그녀의 예측과 분석이 라구람 라잔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 글은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논저라고 감히 판단해 봅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으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의 중요한 점이라 생각되는 것은 과거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그 시기의 다소 상반된 영국에서의 짧은 케인스주의적 시대를 지나치며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시티 오브 런던'과 이익을 함께하는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신자유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마거릿 대처가 일부 보수층에 의해 현재까지도 추앙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전통적인 노동당 식의 정치를 극도로 경멸했으며, 특히 노동 조합에 대한 엄청난 증오를 블레이클리의 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로버트 달의 중요한 관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달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대치해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적대시 하지 않고 사회와 건전한 정치를 위해 각자가 다원주의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대처와 같은 보수주의 정치인이 스스로의 입장과 정치적 신념으로 그 반대에 있는 다른 정치인을 개인적 인상을 포함해, 그저 혐오하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하버마스 식의 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당위와도 같은 문제입니다. 물론 대처가 카를 슈미트를 일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식의 대결 구도와 경멸적 태도는 오늘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인종주의적 행태와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프랭크 푸레디는 그러한 "공포와 혐오를 매개로한 정치가 어떠한 대안도 마련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레이건과 함께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규정될 수밖에 없는 신념 체계가 어떠한 맥락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신자유주의가 영국인들 대다수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블레이클리가 강조하는 브레턴우즈 체제 후반의 비판적 맥락은 종전 이전의 자본 이동을 엄격히 금지한 체제에서 내심 자본가들이 요구한 소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용인함으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금융 자본주의를 잉태한 꼴이 되었는데요. 이것은 종래의 리밍치 교수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로 하이브리드화 된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에 기본적으로 블레이클리는 이후 전사회적으로 시행되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들이 외형상으로는 국가들간의 경제적 성장을 견인하기도 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성장의 혜택'이 오로지 소수의 상위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갔고, 일종의 지대로서 이익을 창출하는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출현과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이 만나 의외로 일부 중산층에게도 그들 소유의 집값 상승을 추동해, 그러한 결과로 꽤 많은 수의 영국 시민들이 대처 정권을 지지하는 지지 세력으로 탈바꿈했다고 밝힙니다. 종래에는 영국 사회에서 많은 중산층들이 노동자계층의 이익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권력 관계'를 면밀히 인식하고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 편을 들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체제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화가 되었고 그로 인해 각 시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가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관점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시민 전반의 이익 추구를 중점으로 세운 것 보다는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포함한 배타적 자본 축적과 사회와 정치가 이들의 이익 추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일종의 '인위적인 개조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사실 그 이전의 사회에서는 케인스주의적 체제로 인해, 무엇보다 사회적 부조와 공공의 이익에 가치를 두고 정치와 경제 전반이 이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는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마거릿 대처가 노동당 정권의 스스로 경멸감에서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적 시도를 추진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시티 오브 런던의 자본가 그룹을 비롯한 상위 계층에 대한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지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냉엄하게 불어닥친 민영화의 광풍과 광범위한 금융 자본주의적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었던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물론 이 부분도 다소 결과론적인 입장이긴 합니다만 밀턴 프리드먼이 주구장창 강조한 '사적 이익의 (거의 무한정대의) 추구'가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 우파들의 기득권 모임인 '몽펠리에 소사이어티'의 주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듭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한 자본가들과 이를 인지했으면서도 시장의 규제에 실패한 미국 당국의 때늦은 후회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히 비틀린 슘페터의 논법이기도 합니다만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이 시장 독점으로 귀결될 경우, 경쟁이 없는 시장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라 불릴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블레이클리는 이 글 4장에서 일종의 사례로써,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 해협 밑의 터널 공사에도 당시 대처 정부가 '민영화'를 강조하게 된 맥락은 분명 기업의 손해가 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이를 보증하겠다는 일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라고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만 조만간 이어질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다시금 국가가 시장을 구원해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입이 닳도록 주장했던 "공공 지출을 삭감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것"등의 금과옥조를 휴지조각으로 돌린 것과 같은 사태였지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과 금융 자본가들 및 경제 엘리트들은 매우 태연하게 당연하듯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들이 신봉해 마지 않았던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콜린 크라우치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이미 초기 금융 자본주의화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은 체제가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면 일정 부분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데이빗 코츠가 분석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제로 원하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낙수 효과라든지, 자본에 의한 주주 자본주의의 필요성과 금융의 첨단 기법 등 온갖 미사여구로 이를 치장해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칭송하고 시민들에게 이를 주입하는 데 꽤나 열성적이었지만 그것의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블레이클리는 이 당시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굴복해,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지젝과 미지크를 비롯한 좌파들이 자본주의의 이런 파행적 이행을 전혀 비판하지 못하고 겨우 숨만 이어간 점은 실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사적 이익에 경도된 보수 우파를 방치한 죄이자, 시민을 위해 사회를 건전한 비판을 다하지 못한 책무의 유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굳이 케인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자본주의에서 노동 조합의 필요성과 특히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시민들이 자본가들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보루가 존재해야만한다는 주지의 사실은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이 노동 조합을 거의 '금세기의 최대 악'으로 규정, 영국의 탄광 노조 사태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들 노동 조합을 일거에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파행적 이익 추구와 관련해, 많은 경제이론가들과 학자들은 자본의 이익 창출을 위해 어느 정도 거품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 이전의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의 거품은 투자 은행들이 이익만을 위해 무분별한 증권화를 무릅썼으며, 신용평가기관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한 몫을 챙겼습니다. 시장의 거품 상황이 가용할 수 있는 많은 돈을 가진 자본가들에게는 분명 이익을 단단히 챙길 기회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 지점에서 분명한 사실은 거품은 언젠가는 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 전반과 체제에 해악이 될 수 있는 거품이 꺼진 이후에 발생할 고통은 과연 누구의 몫이 될까요? 여기서 굳이 사적인 안전망을 두루 갖춘 부유층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고통의 몫은 그저 공적 자금을 쥐어짜내고 삶의 기반마저 뒤흔들리게 될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사적 이익 추구에 마땅히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이 아니라면 정치학과 사회학이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죠. 이를 그저 시장에 대한 정치의 무간섭주의나 및 비개입으로 신봉해 어떠한 통제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소모적인 민주주의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해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밀턴 프리드먼을 그리워하고 신봉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사회나 국가 체계 전반을 시장의 이익만을 위한 시녀로서만 여긴다면 다수의 이익은 어디서든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의 무쓸모를 강조시켜, 사회 전반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우리의 민주주의의 경제적 비용들을 과대 포장해, 엘리트들만의 편리한 '과두제'로 귀결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5장은 2008년의 뉴욕 발 금융 위기를 거침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주택 금융 채권에 대한 무분별한 증권화가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다들 여실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후 사태에서 조지 W. 부시의 뒤를 이어 수습의 책임을 가진 정치인이었던 오바마는 결국 실망스럽게도 단 한 명의 법적 기소도 없이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끝내 월 스트리트를 회복시켰습니다. 당시 책임에 있던 많은 자들이 공적 자금으로 무분별한 은퇴 자금 파티를 벌이고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죠. 저는 바로 그 시점에서 '오바마의 정치적 선명성'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대선 캠페인에서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을 차치하더라도 공적 자금을 신중하게 다뤄야만 하는 최상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재무부 각료들을 비롯한 월 스트리트의 요구대로 백기 투항을 했던 것이죠. 오바마에 이어 여전히 발만 잘 뻗고 살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천연덕스런 상황은 덤으로 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다소 상반된 인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글 5장에서 저자인 블레이클리는 당시 영국의 상황을 불행한 구렁텅이에 빠져든 영국인들로 처연하게 그리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그녀 역시 사건의 앞 뒤 맥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월 스트리트와 시티 오브 런던은 한 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중소 은행 한 곳의 뱅크런은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이미 미국과 영국을 공동 운명체로 만들었기에 (동일한 맥락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은 이들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 엘리트들 모두였기에) 그 참혹한 결과 또한 공유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시장과 정부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 이러한 주장에는 정부보다는 시장의 권리와 원칙이 여전히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과거 볼커가 기습적으로 금리를 인상해 전세계 시장의 돈을 끌어 모은 것과 같은 사례들을 차근히 손에 올려보면 이와 같은 논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개 체제 자체가 너무나 과도한 힘을 갖는 것은 일상적인 시민 사회와 우리 정치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된 금융 자본주의가 시민의 건전한 삶과 지속적인 안정된 삶을 지탱했던 과거의 사회적 부조와 노동 조합을 악으로 치부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그러한 논법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보다 1970년대 이후의 그 짧은 시간에 자행된 자본주의의 일방향 독재와 같은 파행들이 결국 시민 사회와 우리의 삶을 고통에 빠트리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솔직한 평가대로 자본주의가 어떤 왜곡된 이행을 거친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한자에게 붙은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이 점은 그녀의 다른 논저인 '코로나 크래시'에서 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자본주의에 대한 시민의 저항을 막고 있으니 자유주의가 좀 더 시민 권리에 가까운 쪽으로 변하던가 아예 시장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을 도태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민의 정치적 분별력이 이 즈음에 통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본연의 삶의 통제력을 위해 시장 전반을 공익을 위해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반자본주의적 논법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앞으로 시장에는 마땅히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며, 인간에게조차도 완벽하고 무한정의 자유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시장 자유를 그러한 위치에서 해석함은 정치와 시민의 권리를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만을 위한 배타적 체제로 이미 심각하게 변질된 상황이며, 다수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체제적 모순을 시정하고 개선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조차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이 근 50여년간의 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글의 7장에서 금융의 사회화를 비롯한 몇가지 대안을 저자가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시장에 마땅히 '통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것은 다수의 자본가들을 위해서라도 시민 사회의 안정과 점진적인 사회 안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물론 로버트 미지크와 같은 좌파들 또한 크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문 89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다른 논저들과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부유세에 대한 논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유층이 공익도 아닌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정부와 공공 기관을 동원하고 있기에 이것의 사회적 합의 단초조차도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토록 우리의 민주주의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죠. 


이 두 기관(정부와 기업)은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이것이 ‘자유‘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 브레턴우즈 회의는 국제 금융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를 제도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자본의 이동성 증대와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식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변했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무자빕한 이윤 추구가 기업의 유일한 책무라는 사상이 만연했다

자본주의가 1980년대의 변화에 의해 왜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강한 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적응했을 뿐이다

1980년대에 이러한 문제들이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영국에서는 주주 가치 이데올로기에 제약을 가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융 주도 성장 정책의 핵심은 가계가 물질적 행복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결정 요소로서 임금을 부채와 개인의 자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과거에 사회가 부담하던 부분을 개인보험에 의존하게 되면서, 복지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에게 제공하는 각종 혜택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보다는 오히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시티오브런던 법인의 이해관계와 영국의 이헤관계를 합치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금융 주도 성장이 초래한 불평등의 일부를 해소하고 경기순환의 상승과 하락을 완화하기 위한 공공 지출을 민영화하려고 했다

글로벌 노스에서 자산 소유의 민주주의가 자산 소유의 과두제로 썩어들어가는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금융자본주의가 기반을 둔 정치적, 경제적 합의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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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2-01-1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급하게 글을 작성하느라 비문이 너무 많습니다. 빨리 수정하겠습니다.
 
미국은 그 미국이 아니다 -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
안병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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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사회학과를 거쳐 서울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수여받고,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을 담았던 뉴스쿨(New School)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뉴욕 시립대에서 미국 정치를 가르치다 2003년에 귀국하여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우선 그는 전세계적으로 진보주의 학계에서 꽤 의미있게 통용되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재교육'과 건전한 여론 형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여러 매스컴들을 통해 북한 문제와 같은 여러 이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기도 한데요. TV 시사 프로그램과 라디오 교양 프로에 출현하면서 근래 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을 알리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다른 논저인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의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고 몇년전에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안 교수의 발언 내용을 주의깊게 시청한 바가 있는데요. 꽤 온화한 외모에 조리있게 말을 건네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국내에 2021년 5월 출판되었습니다.

안병진 교수의 이 글이 어떠한 의도하에 기획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에 대한 비평을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닌 좀 더 쉽게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각 장의 서두에 뮤지컬과 영화를 인용하면서 독자에게 저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일정한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이 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였는데요. 사실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우리에게는 유독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충분히 인지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일단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한반도에 급격한 전운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다행히 별 위기 없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저 정체되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안 교수의 말마따나 지금은 트럼프의 모든 것이 낱낱이 분석된 글들이 서점가에 넘쳐나 그의 행보와 정치적 성격이 이미 폭로되었지만 초기에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예견에 너무나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에 대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일개 시민으로서 정말 당시엔 우려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저자는 미국 정치를 전공한 학자답게 그저 트렌드와 경향에 급급한 다른 글들과는 달리 꽤 논리적이고 논증 과정에서는 높은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촘스키식 글쓰기'로 이해하고 있는 최신의 자료들과 다수 논저의 인용과 적지 않은 관련서들의 소개는 저자 스스로도 끊임없는 독서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일종의 샤머니즘과 다름없는 예단과 추측으로 일관된 국내의 다른 글들과 달리 이 부분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이 책의 부제대로 저자는 현재의 미국의 정치가 세 갈래의 정치적 흐름으로 갈라져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러한 미국 정치의 상황이 그들의 국내 정치적 모습 뿐만 아니라 점차 정치경제적으로 중국과 대결에 나서려고 하는 작금에서 독자들이 앞으로 2~30년간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각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즉, 달리 말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미국의 헌법과 자유주의를 계승하고자 하는 '토크빌주의자들'과 작고한 새뮤얼 헌팅턴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극명한 문명적 대결로서 미국의 유일주의를 내포한 '헌팅턴주의자들' 그리고 이 헌팅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짐 체인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국 사회주의 정치 운동의 연원인 '데브스주의자들'이 저자가 분석한 오늘날 미국 정치 세력의 분화입니다. 물론 제가 느끼기에는 다수의 토크빌주의자들 대 나머지 소수의 헌팅턴주의자들과 데브스주의자들의 구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과거 예상하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출현은 미국 예외주의와 미국 자체와 자신을 동일시한 괴랄한 인물의 탄생으로 어느정도 세력화가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판대로 "정치인이라면 자기 내키는대로 아무거나 입밖으로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아주 상식을 무색하게 한 도널드 트럼프는 아무래도 미국 정치의 새로운 서막(물론 아주 부정적으로)을 밀어제낀 인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토크빌주의의 향수로도 읽혀지는 이 글의 2장은 엘리트주의의 면모를 보여준 알렉산더 해밀턴과 그의 대척점에 섰던 토마스 제퍼슨의 일화로 대략 요약될 수 있습니다. 후세에 많은 이들이 토머스 제퍼슨의 '제퍼슨주의'만을 열렬히 신봉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한데요.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일각에서도 알렉산더 해밀턴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도 합니다. 즉, 저자는 2장 초입에서 "해밀턴과 매디슨 등 연방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내재한 소유적 개인주의, 엘리트주의는 공공의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 공화주의 가치 측면에서 결함을 내포한다"는 의미가 이를 설득력있게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시 미국의 건국 이념이 루소에 의해 기인한 '공화주의'로 인식해 이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실상은 내면에 지독한 엘리트주의와 부유층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배타적 권리 등으로 기록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영국 등 귀족주의적 정치에 매몰되었던 유럽에 있어서 미국의 건국 이념은 그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공화주의란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무지와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해밀턴식의 엘리트주의자들이 이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의회제도가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발상으로 돌아가고 있고 실제로 고등학교 학력의 소유자나 일반 노동자 및 하급 계층에서 자신들의 계층을 대변할 정치인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골적인 금권정치 내에서 제한적인 기회조차 기대할 수 없는 극명한 미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진정한 진보주의 정치가 미국 정치에서 실종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1912년 이래로 제대로 된 사회주의적 정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 미국에서 '한 줌도 안되는 진보주의 역사'를 고려해 봤을 때, 아마도 이것은 미국인들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와 노골적인 완벽한 자유에 경도된 자유 지상주의와 다름없는 '자유주의'를 내면화해 다른 정치적 주의가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이 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미국에서 진정한 공화주의가 숨을 쉬고 있느냐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시에 그러면서도 새뮤얼 헌팅턴이 넘긴 예외주의의 유산이 트럼프를 통해 실제로 체현된 것은 미국 정치에 있어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분노를 먹고 사는 이런 극단주의적 논법과 배후에 암약해 있는 이 정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트럼프 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읽히는데요. 미영 전쟁이 한창이던 1814년에 백악관이 영국군에 불태워진 이후, 2021년 극우 민병대에 의해 미국 의회 건물이 점령당한 사건은 저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분노의 정치'에 물들어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분노를 통한 정치' 자체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데요. 안 교수의 논증대로 미국의 공화주의에 있어 시민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점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존 듀이가 말한대로 '시민들의 끊임없는 재교육'이 자신들과 사회를 위해서 필요함에도 시민들이 이미 오랜 세월동안 자본주의적 요구에 매몰되었고, 현재의 미국 선거제도가 모두에게 실질적인 실효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정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로 소모된 것은 분명 불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헌팅턴주의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분석은 크게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네오콘들이 이를 널리 인용하고 끝내 미국의 패권을 후퇴시킨 결과를 초래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4장에서는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페미니즘과 다원주의의 부단한 확장에 불쾌감이나 어색함,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우리식 현상으로 얼마나 '일베적 사고'에 물들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을 베격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배타족 인종주의로 대응해, 이것을 스패니시가 없는 오로지 백인들만의 '하나된 미국'으로 승화시킨 것은 최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상황을 오버랩하게 하는데요. 저는 오래전부터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 정치를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반동 우파들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던 바가 있습니다. 앞선 후쿠야마의 경고대로 과연 "인종주의를 자신의 양심으로 승화시켜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주의나 주장"으로 표출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치의 모습일까요. 다만 한가지 저로서는 안교수의 평가와는 달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미국 내에서 갖고 있는 위상이 현실 정치에 있어 아직은 심각하게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리버럴들에 대한 자정 능력이 크게 상실되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으로 연방정부에 대한 회의를 주장하거나 헌법과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수면에 잠겼다는 점에서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급격한 SNS의 발달로 인해 헌팅턴주의자들을 포함한 무분별한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시대의 표상이라 할만 합니다. 리버럴을 극도로 혐오하는 티파티들의 일원이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계층이 이 음모론들을 이용해 기성 정치를 맹렬히 공격했었는데요. 물론 모든 음모론들이 어떠한 정치적 연결고리를 위장하며 현실 정치에 폐해를 일으킨 건 아니지만 '이 SNS의 시대'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의를 확장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믿었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크게 벗어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또한, 이는 정치의 건전화를 말하기에 앞서 거대 인터넷 기엄들의 배만 불렸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해외에선 러시아 해커 그룹에 의한 영국 브렉시트에 대한 개입처럼 서구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데 이 SNS가 동원되면서 앞으로 민주주의에 있어 또다른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발견한 것일텐데요. 내부적으로 차라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금권 정치 하에 우파를 지원하는 기업들과 개인들의 돈줄을 노리고 있는거라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KKK단이 자신들의 신분이나 외형을 세탁하는 기본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있는그대로 거리를 활보하는 셈이니, 극우 포퓰리즘과 다름없는 저들이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요. 어느 누구도 냉전 이후 미국의 정치가 이런 식으로 귀결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끝으로, 데브스주의에 대해선 제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과연 미국 내에 순수한 진보주의 운동이 있는지에 대해선 저는 아직도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에 일단 저자의 분석으로만 갈음하려고 합니다. 다만, 앞으로 기후 위기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국가간의 여러 문제들은 데브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제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학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잉"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소명할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해법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기후 문제와 같은 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막는 원인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의 저개발 국가로의 아웃소싱 그리고 그로 인한 해당 지역의 환경 파괴와 하이에나처럼 저노동을 따라 이동하는 이들의 행태는 기존의 민주주의적 논법과는 아주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악명은 스스로기 짊어지지 않고 회피해 해당 국가가 오명을 쓰게하는 영리한 정치적 작업은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논리가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해밀턴식의 위장한 공화주의는 어느 나라나 하이브리드화 된 자본주의와 우파의 결탁으로 외형을 바꿔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의 평가대로라면 그저 A라는 엘리트의 다른 B라는 엘리트로의 제도적인 교체 정도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미국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토크빌주의나 헌팅턴주의의 분류가 아니라 미국의 '금권정치'전반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코크 형제와 같은 거대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그것이 먼저 낱낱이 분석하고 어떻게 이러한 돈이 오고가는 정치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해밀턴식의 정치 구조에서 너무나 왜곡되어 과두정치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글 3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아마도 하워드 진의 주장으로 기억합니다만 이제는 정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자유주의와 동등하게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을 위해 사회제도와 시민의 교육 등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애초에 민주적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부정적 의견을 갖고 있는 시선들이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적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기에 더 이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시녀로 국한되지 않도록 어느 사회나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악시오스 Axios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민주당의 5분의 1일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공화당의 54퍼센트는 민주당이 악의에 차 있고, 민주당의 61퍼센트는 공화당이 인종주의자이고 편견에 가득 차 있거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반면 좌파가 보기에도 미국의 통합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동적 우파는 기존 황혼에 찬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하리라 본다.

원래 공화주의는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 혁명은 토크빌과 아렌트가 찬양한 공화주의의 동등성 가치가 경제 영역여에서는 거의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낸시 프레이저 교수의 지적처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 설정을 모호하게 회피하는 담론이다

미국 건국 시조들의 사상적 배경은 인간 이성의 특권적 힘과 과학에 대한 믿음과 중요성을 가진 계몽주의가 깔려있다

아이켄베리가 보기에 과거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위험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방어하려던 윌슨의 고민은 오늘날 미국 지성의 고민으로부터 부활했다. 미 안팎으로 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전체주의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생존이 다시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피즘의 원천적인 에너지는 바로 기득권에 분노한 인민들의 반란으로서, 급진주의적 함의를 가진다

트럼프는 단지 이들을 자신의 나르시시즘 Narcissism 과 이익 목적에 이용해 단물만 빼먹는 스타일에 능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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