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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언어학자로 알려져 있는 존 맥스웰 쿳시는 2회에 걸친 부커상 수상을 비롯해, 200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데요. 그는 세계 문단에서 인종차별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에 저항하는 주제를 통해,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텍사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취득의 기회를 얻게 되고 1969년에 예상대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1983년과 1999년에 부커상을 2회 수상하고 그의 사회 비판적인 주제가 노벨 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200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여받는데요. 그리고 2005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에 의해, 공화국 최고 훈장이라고 불리는 마풍구브웨 훈장의 수여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쿳시는 대내외에 익히 알려진 바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차별 정책인 아파르헤이트를 철폐할 것을 요구했고, 스스로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 아님을 매번 강조해 왔지만, 문학을 통해 사회의 모순과 인종 갈등 등을 거의 가감 없이 다뤄 왔습니다. 그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두 번째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기도 한데요. 따라서 원제 "Disgrace"로 1999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두 판 모두 절판 된 상황입니다.
잠시 낮에 황학동에 구경을 나갔다가 발길에 잡혔던 어느 헌책방에서 존 쿳시의 이 작품을 손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가격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했고 책 상태도 매우 양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다 일독하자 마자 들었던 상념은 긴 한숨과 함께 이어지는 커다란 체념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글의 화자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문제 의식인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부대적 의미"라는 것이 어떻게 개인을 짓누르는지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요. 여기에서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는 바이런을 연구하는 꽤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능력 있는 학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두 번의 결혼 실패로 인해 약간의 자포자기를 더하여, 55세라는 현실적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적지 않은 여자들을 그저 '섹스'대상으로 삼는 삶을 소일 거리 삼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의 눈에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 20세의 어린 여학생, 멜라니 아이삭스와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담보하게 되는 아슬아슬한 육체적 게임을 시작하기에 이르는데요. 글 후반부에 드러난 멜라니의 어린 동생의 발언으로 유추해 봤을 때, 결국 그의 인생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단'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나이 든 사람은 설사 그것이 누명에 가까운 소란일지라도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의지 만을 남기고 데이비드는 그렇게 정든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의 어느 마을에서 조그마한 농장을 꾸리며 살고 있는 딸인, 루시에게 몸을 잠시 의탁하게 되는데요. 현대적 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도시 여자로서의 백인 여성인 루시가 주변의 흑인들과의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중,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리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 지척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데이비드는 딸의 거의 체념한 듯한 반복된 말들을 듣고 스스로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요. 저는 거의 2부라고 봐도 무방한 '루시의 사건'이 주인공인 데이비드의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겪게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원되는 대사들도 그렇지만 루시의 사건 자체가 인종과 인종 간의 단순히 문화적 차이라든지, 이들 간의 강제적인 정치사회적 괴리가 개인들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위 부작용으로써 매몰되고 작용되어 왔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스로 지난날의 비참한 사회사가 단순히 인종 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두 개의 사회로 극명하게 분리 시킨 것으로 읽혀졌습니다. 전날 자신이 가르치는 여대생과의 추문이 스스로의 아무런 의욕 없는 삶에 대한 단죄라고 해석한다면 딸의 참담한 불행은 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게 되는 절망을 데이비드에게 안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가 유신론에 심취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간혹 데이비드에 의해, 매도되는 인물로 그려지는 '흑인' 페트루스는 처음에 그가 단순히 악한 면모의 인물이라고 취급되기 보다는 전형적인 구시대적인 인물이자, 흑백 간의 섞일 수 없는 증거로 양자 간의 증오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사실상 흑인 사회의 외로운 섬이 되어 힘들게 삶을 꾸려가는 도회지 출신의 백인 여성에게 그저 도움이랍시고 내미는 황당무계한 손길과 어쩌면 그 참혹한 사건을 조장했을 수도 있고, 더욱이 그것이 얼마나 죄악인지도 인지하는 것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인물로 페트루스는 묘사되는데요. 그의 선의가 매우 경계가 흐릿한 것도 물론이거니와 여성은 마땅히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대변하면서 그것의 의무로서 육체적 결합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의 부족주의적인 속성과 맞닿아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합리주의적인 백인들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흑인 전통 문명에 있어 거의 물과 기름과도 같은 것으로도 읽힙니다. 다만 극히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거래에 있어 모든 것을 잃은 딸 루시는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체념과 다름없이 어떤 의지조차 보이지 않게 되는데요.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데이비드는 더할 나위 없이 처연하고 애달픈 부성애를 몸소 겪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크게 변하게 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생과 인간관계에 대한 그간의 인식조차 무너지는 상황 같은 것들을 전부 포함해서 말입니다.
쿳시의 이 작품을 통해 저는 이질적인 두 인종이 이루는 사회가 단순히 인종 간의 융합이라든지 아니면 사회가 분열되지 않고 서로 간의 최소한의 이해를 통해 그저 외형적인 수준에서라도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자체로서 그리고 극명한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헤이트가 어떻게 서로 간의 증오를 더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작품 후반에서 도출되는 루시의 "인종 간의 증오가 그렇게 유전되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체념한 듯한 대사는 아버지의 애절한 도움을 손수 뿌리치면서까지 그녀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는지는 지금에서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간혹 단순하게 스토리 라인을 받아들인 분들은 주인공인 데이비드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업보라고 말씀들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마치 교활함과 어리숙함을 뒤섞은 듯한 캐릭터인 페트루스의 복잡한 인물상 만큼이나 그 시대의 사회적 실상이 쉽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한 차례의 대사로 등장했지만, '이 곳은 아프리카다"가 의미하는 바가 과거 에드워드 즈윅의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대사 "TIA, This is Africa"가 다시 뇌리를 스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새뮤얼 헌팅턴의 그 같은 이질적인 소위 문명론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감으로도 받아 들여지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곳곳에 띄어쓰기 오류가 보였는데, 아마도 크게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쾌락을 얻고, 그 쾌락은 어김이 없다. 어떤 점에서는, 이것이 주고받는 애정이라고 믿는다. 애정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의 사촌쯤은 된다
"왜냐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
"여러분이 눈먼 장님이라면, 여러분은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냉정하고 분명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 보고자 할까요?"
"심각하다는 게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거나 더 좋게 만듭니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모든 연애는 심각한 겁니다. 심장마비처럼 말입니다."
루시는 정말로 여기서 그녀의 삶을 살고자 하는 걸까? 그는 그것이 단지 하나의 과정이기를 희망해본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모르겠어요.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고, 죽어갈 준비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스스로에게 이른다. 이것은 매일, 매 시간, 매 분,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순간,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 포로로 잡혀 있거나 머리에 총알이 박혀 협곡 밑에 있지 않을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루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특히 루시가.
처녀를 강간하는 것보다 더 나쁘고 더 충격적인 레즈비언의 강간. 그들은. 그 남자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악취나는 닭털과 썩은 사과 더미 가운데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로부터 고갈되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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