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2.0 -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임지현.우찬제.이욱연 엮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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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주간해 당시 출판계와 학계에 높은 인기를 누린 '우리안의 파시즘'의 임지현 교수가 다시 기획한 것이 이 '우리안의 파시즘 2.0'입니다. 임교수는 서강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한양대 사학과에서 연구 교수로 활동하다 최근에 자신의 모교인 서강대로 돌아왔는데요. 그는 해외에서도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고 국내에도 꽤 진보적인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학문 전반의 포스트모던 뿐만 아니라, 오랜 시기 동안 사회전체적으로 이식된 그와 같은 관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진보는 사실상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보와 보수는 속살을 까보면 다 마찬가지로 망가져 있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논법 구사에 저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우리안의 파시즘'의 새로운 확장판으로 임지현 교수가 자신과 같은 서강대 교수들과 일부 외부의 인문사회학 연구진들을 규합해 만든 일종의 시론(時論)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은 거의 최근인 2022년 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먼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예전부터 하고 있었던 생각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 '우리안의 파시즘'과는 약간 상이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요. 오늘날 불완전하게 이식된 능력주의적 관념,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보다 좀 더 과격해진 우리의 정치 그리고 사회 전반의 소통 부재와 아직도 철이 지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적 대치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요.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상당히 공감했던 부분은 정희진 작가의 '민주주의가 진영을 나누는 핵심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문장이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한 폐해를 다룬 이진우 교수의 글에서 '민주사회에서도 계급이 발생한다'는 그의 인식에서 보충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민주주의가 평등과 경제적 재분배 필요성의 약화에서 초래된 결과가 지금의 능력주의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민주주의가 평등의 원리를 중요시 생각하는 원리임을 감안해 본다면 '기회의 균등' 같은 신조어는 사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닐 겁니다. 다만, 능력주의의 왜곡된 사회 이식으로 발생한 오늘날 세대 간의 극심한 반목과 이철승 교수가 언급하는 "청년 남성들이 아버지와 삼촌과 형이 누렸던 혜택을 맛도 못 본 채 구직 대열에 오랫동안 서있었다"는 얼마간의 명확한 분석은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인식을 정확히 드러내는 분석이라 여겨졌습니다.

앞선 이 교수의 명확한 분석은 다음에도 이어지는데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586의 무능과 더불어, 반대편의 국민의힘 일각에서 그들의 포퓰리즘적 속성 즉,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는 맥락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간단합니다. 그 당의 인사들은 여전히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강고한 능력주의자이자 신자유주의자들인 그들 자신이 명목상이든 뭐든 간에 현재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좀 더 평등하고 모두에게 권력과 부를 획득할 확실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전반적인 체제 변혁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이철승 교수의 짐작대로 그저 청년층의 지지와 표를 위해 공언무시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것은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내재된 목적성 및 전부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가치관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보수라고 일컫는 자들의 그 면면들이 정작 흔들리지 않는 민주주의와 오래된 전통에 대한 수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 제도에 대한 안정을 위한 노력 및 종교적 윤리 의식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사익 추구로 점철된 왜곡된 정실 자본주의와 우리의 예에서 과거 개발 독재의 이익을 살뜰하게 나눈 집단 이익을 본질적 이익으로 주장한다는 것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더 강고하게 사회를 양단시킨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로 반대의 목소리를 사실상 막아버린 것이 그 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사법 살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를 무조건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곳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신자유주의가 가장 잘 이식되어 나타난 국가가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우선적으로 '이익'이라는 관념 체계와 그에 따른 결과물만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제는 모두가 명확하게 인지해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존의 여러 부침을 겪은 우리의 진보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도 인정할 만한데요. 기존의 강준만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여기에 집필진으로 참여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의 비판은 우리 역시 매우 귀담아 들을 필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권분립이라는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주권을 너무 과대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큰 가치로 치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는 박상훈씨의 평가에 저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인데요. 이것은 일반적인 시민 기본권과 함께 고찰해 볼 수 있는 사안으로 과거 계몽주의적 맥락에 기반한 공화주의 가치가 상당히 유명무실해졌다는 오늘날 현실적 측면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오로지 자본주의적 잣대만이 강화되고 강요되어 성역화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장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헌법 상의 기본권과 국민주권을 도식화하여 분류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양자는 우리 여전히 우리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 이며, 이러한 관념은 인권의 의미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진우 교수가 엘리트 중심의 능력주의가 취하는 미래가 '소위 능력으로 일어난 자들이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음울한 전망이 실로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즉, 능력주의로 일어난 저들이 사회 권력층이 되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또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도태시켜야만 한다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 사뭇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두 개의 사회를 발생시키는 것 못지않게 사회 전반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국민주권을 강조한 민주 체제가 남보다 더 많은 자원과 높은 목소리를 가진 자들의 '승자독식 정치'를 고착화 시킬 것이라는 논리적 전개가 딱히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보수 우파 일부에서 대의 민주주의를 아주 교묘하게 자신들의 이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여러 연구물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안을 연구해 볼 수 있다는 점은 명백히 직접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가능성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공상 속의 이론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토착 왜구'와 '빨갱이'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화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격멸의 대상이라는 것에는 십분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기득권을 전혀 놓지 않은 채, 권력과 부를 그대로 승계 받은 친일 세력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더욱 반응했던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과거 친일부역자들의 후손들이 해방 이후에도 호의호식하며 지냈던 것과는 반대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억울한 '용공' 누명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법정 살인을 당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설사 그것이 우리 역사가 지닌 오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자신들의 이익과 일부 계층의 소위 '20 대 80'의 사회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 및 무늬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보수주의에 반해 이익을 추구해 도덕성을 상실한 진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보여할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아예 걷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 사회에 있어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함께, 이데올로기는 철지난 관념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회 전반에 이익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법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일부에게는 불편한 소리로 들리겠죠. 이처럼 누구에게는 이 사회가 지상 낙원인 것 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권력의 기울기가 극명한 시점에서 그것을 가진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 시민들 간의 논쟁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씨와 윤석렬 씨 모두 박정희를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 경제와 정치에서 전두환의 업적을 언급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풍경은 참담하기만 하다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능력주의만은 힘껏 붙잡고 있다

한편에는 개인의 능력만을 사회적 자원의 분배 기준으로 삼는 능력주의가 매우 공정하다는 유토피아적 시각이 있다

엘리트 계급과 나머지 계급 사이에는 이제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공정사회라는 유토피아로 이르는 길인 동시에, 능력의 폭정이라는 디스토피아로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정치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

기본권이 시민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다, 주권이 시민총회의 결과물이라면, 기본권은 국민주권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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