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쟁과 대만해협 위기 - 남북한은 동맹의 체인에 연루될 것인가
길윤형.장영희.정욱식 지음 / 갈마바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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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에서 정치 외교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겨레 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길윤형 국제부장은 과거 도쿄 특파원을 지냈을 정도로 일본 국내 정치에 대해 해박한 인물입니다. 더불어 중국에 의한 대만 사태가 발생했을 시 일본의 군사 외교적 대응에 큰 관심을 갖고 특강과 기고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중국 연구의 중요한 기점이 되고 있는 성균중국연구소의 장영희 박사는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중국 정치와 한중 관계에 대한 여러 강의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전쟁이 없는 평화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정욱식 대표는 여러 일간지와 방송에 출연해 군사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한반도 문제와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주제에 있어 그가 단독으로 이름을 올리거나 혹은 공저자로 참여한 여러 논저들이 시중에 팔리고 있기도 한데요. 어느 정도는 미국과 주한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한국을 진실로 지향하는 그는 한미 군사 동맹과 동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미군의 패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친미(親美)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용미(用美)가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그런 측면에서 한국이 단순한 친미국가로 대내외에 인식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상 상태가 될지도 모를 대만 해협의 위기 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현재 이 지역의 군사 지형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는데요. 많은 독자들이 대만의 위기는 우리와는 별반 상관없는 문제로 치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욱시 대표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는 미국과의 군사 동맹으로서 '동맹의 연루"라는 측면에서 국가 이익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가 우크라이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과연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5년 간의 정치적 선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은 대만 해협의 위기라는 주제로 앞선 3인의 짧은 글을 수록한 것으로서, 올해 7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을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구조로 나눠 본다면, 각각의 글들은 앞으로 위기로 격상될 지 모를 대만 해협의 사태에 있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내 정치적 상황과 군사 외교적 입장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서방 세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엔쉐퉁의 2023년은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앞지르게 되는 해로 인식되었는데요. 이 세계 패권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될 시기가 전세계적 코로나 사태와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외교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단순한 관여 engage 에서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계산적인 수순에 기인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현재 바이든 정권에 이르러 이제 미국은 중국을 '미국이 주도한 자유 민주주의 질서의 도전자'로 규정하고,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라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러한 국제정치적 변화의 흐름 속에 대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대만의 위기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중국 공산당이 주장하던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사실상 반기를 들고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 외교적인 정책을 감행하면서 발생한 것인데요. 이를 무조건 대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들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을 비롯 주변국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시진핑이 공공연히 대만과의 통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지역의 주요한 군사적 안정이 균열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터무니 없는 야욕과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의 긴장 강화도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대만인들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로 최근의 차이잉원 총통의 연임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치군사적으로 첨예한 분단국으로서 어느 정도 안보를 미국에 의존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주한미군의 존재나 좀 더 넓게 보면 주일미군의 존재 역시 한반도 안정에 기여한 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동안 주한미군의 역할론에 있어 과거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에게 정치적으로 확약한 바대로 철없는 한국을 제어하고 주일미군의 존재 역시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미국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밝힌 바가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주한미군이 지역 내의 군사 정치적 균형을 지속해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주한 미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북한에 대한 억제인데요. 이런 주한 미군의 기존 역할론이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욱식 대표가 우리의 제주 해군 기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사시에 미군이 동해로 진입하는 중국 해군의 뒤를 끊으며, 일종의 중국 봉쇄의 전진 기지가 될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한반도에 주둔한 이 미군이 대만 유사시에 지원 목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이유는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의 존재 때문일 겁니다.

이에 장영희 연구원은 중국이 대만 상륙에 대한 실효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는 2025년이 분수령이 되는 해가 될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국이 대만 침공을 본격적으로 결정하게 될 요인에는 '미국 정치 지도부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고 군사력 투입에 대한 가능성을 오판'할 시기가 좌우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길윤형 기자는 대만이 일본에게 의미하는 정치적 위상과 더불어 현재의 일본 평화 헌법을 우회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군사 협력에 힘쓰고 있는 일본 정치계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일 미군의 존재감 만으로도 일본 내의 자국 안보에 대한 미국 의존도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는데요. 대만과 자신들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열도가 해상에서 지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은 어떤 식으로든 대만 위기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본에게 있어 미국과의 미일안보협력지침의 3차 개정이 자신들의 안보와 지역 내의 군사적 지형에 큰 변화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전에 일본은 앞으로 이어질 중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에 있어 일본 국민 상당수와 자민당 내 정치인들에게도 신중한 접근과 미중간의 균형적인 노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동맹 외교에 있어 연루의 위협이 존재하는 데요. 만약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위에 나선다면 선제 조치로 평택의 미군 기지에 둥펑 미사일을 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가 엄연한 우리 국토임을 감안해 보더라도 우리가 베이징과 어떠한 관계가 될지는 대충 예측이 가능합니다. 물론 북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우리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습니다만 미국이 중국과의 전면 전쟁을 각오한다면 (여기의 필자들도 대만 사태에 있어 경제 제재라든지 외교적 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원치 않을 결정을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한미일 삼각 공조가 이러한 맥락이고, 일전에 바이든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에서 백악관이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 대만 문제에 대한 언급을 공동 회견에 넣자고 압력을 넣은 것도 그러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와 일본이 여전히 미국의 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졌는데요. 앞으로 미연에 있을지도 모를 대만 사태와 중국 봉쇄에 있어 우리나라의 운신의 폭이 보기보다 좁을지도 모르겠단 우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윤석열 행정부가 과연 이 외교적 부담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대만 해협의 평화적인 항행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가 이 뱃길로 움직이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은 최소한 제 1 도련선을 봉쇄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와 일본을 경제적으로 항복시켜 미국을 이 지역 내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삼 이런 부분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역외 균형 offshore balancing' 전략이 단순히 미국의 패권 유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중입니다. 물론 정욱식 대표의 언급대로 현재 미국의 패권이 예전 같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군사력이 동아시아에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외치는 균형자적 지위가 어떠한 진정성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터 자이한의 주장대로 항공모함 전력을 비롯한 미국의 군사력이 우리와 일본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의 지금과 같은 군사력 증강과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은 자신들의 욕망대로 어느 정도 동상이몽에 근거한 것이지만 우리는 일본과는 엄연히 다른 입장에 서 있습니다. 과연 앞으로 2025년이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지 우리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정부 또한 무엇보다 가장 용미用美와 용중用中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 만을 바랄 뿐입니다.



- 몇몇 분들이 오역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지난 날 부통령 시절의 바이든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리는 한국에게 베팅하고 있으니,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일종의 외교적 수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의 보수 세력이 자신들이 친미親美 그룹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유사시 대만 해협의 위기는 국익을 위한 결단의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주도의 반反 러시아 결속이 명확해지면서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외교적,경제적,군사적 봉쇄 정책이 가시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게 큰 딜레마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적 태도가 사실상 중국 편을 드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그런 이유로 대만해협을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도 모종의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대만 사회의 연론과 민심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홍콩 문제를 다루는 방식 때문에 일국양제 방식의 가능성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대만 해협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한국의 전쟁 연루 가능성이 역시 커지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 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커트 켐벨 백악관 국가 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 등이 도쿄를 극비리에 방문해 공동성명에 대만 언급을 집어넣도록 강하게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들과 미국 쪽으로 확실히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이들 사이의 내부 논쟁에서 후자가 승리를 거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만 사태는 미중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어 일본이 섣불리 개입했다간 일본열도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처럼 미국이 필요에 따라 주한미군 전력을 한반도 역외로 전개하는 것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부른다

만약 대만 유사시 미국이 오산 공군기지 등 주한미군 기지를 대만 군수지원을 위한 발진기지로 삼는다면, 한국이 미중 충돌에 연루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즉, 중국이 미국을 선제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원조 의무는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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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목동, 비평가 - 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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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졸링겐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현재 니더작센 주 뤼네부르크에 있는 공립대학인 류파나 대학의 철학 명예 교수이자 베를린에 소재한 한스 아이슬러 음악 대학의 철학 및 미학 명예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데요. 그는 독일에서는 꽤 유명한 대중 지식인이자, 철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독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2007년 출간작,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독일 내에서는 2004년까지 문학 잡지인 '리리터멘튼'의 칼럼니스트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WDR의 방송 프로그램인 '타게스자이헨'의 프리랜서 사회자로서 방송에도 얼굴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도덕과 사회'라는 주제로 여러 글을 기고하고, 몇몇 논저의 주요 소재로 자신의 철학적 관심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도 하는데요. 특히, 프레히트는 현대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지속적으로 현대 자본주의와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추인 되는 사회적 디지털화에도 비판적 인식을 갖고 꾸준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원제, "Jäger, Hirten, Kritiker: Eine Utopie für die digitale Gesellschaft"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선 저자의 소개를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점에 관해 잠시 소개를 해 드렸는데요. 마찬가지로 그의 이 책은 앞으로 높은 확률로 진행될 가능성이 다분한 기술 만능의 '사회적 디지털화'에 대해 강한 의구심과 불확실성을 논하면서, 이러한 기술경제적 진행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비판적인 논증을 수행합니다. 그는 앞선 부분과 동일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 한 가지를 던지고 있는데요. "인간이 소비 행태를 의도적으로 조종하려고 개인 정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판매하는 사람은 어떤 측면에서 국민 경제에 이익이 되는가?"라는 반문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세계의 디지털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 디지털 기업 4곳 - 구글 Google, 애플 Apple, 페이스북 Facebook, 아마존 Amazon, GAFA - 의 상대적 이익은 분명 이런 디지털화에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자 역시 기술 만능의 디지털 혁명이 소수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는데요. 더불어 이러한 디지털화를 경제적 이익만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논증을 통해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디지털화가 시장 규범을 위해 사회 규범의 범위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데요. 현재 많은 정치인들이 시장과 기업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의 앞날을 더욱 우려스럽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히트는 글 중간에서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대해 잠깐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익히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세대를 걸쳐 내려온 기존의 보수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요. 물론 많은 독자들을 위해 제가 다시 굳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많은 보수주의 정치는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소위 진보적 가치나 기존의 경제적 만능과 안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전 지구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자유주의의 적"임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저자는 아주 짤막하게 경제적 합리주의에 따른 개인주의적 사고관에 대해 그러한 역사적 맥락은 언급하고는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시장 만능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합리성과 개인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강요하고 사익 추구를 그러한 도덕적 근거로 삼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사회 재개조'에 대해 별반 진술이 없는 점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독일이 클라우스 오페의 언급대로 아직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 간의 대화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급'을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회적 디지털화가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레히트는 '레트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2040년의 디지털 시대를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자동화가 더 진행이 된다면 현재 시민이 곧 노동력이라는 수식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포드주의자들에게도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자의 우려대로 사회가 붕괴될 우려까지도 고려해야 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과거 시대의 유산이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수사를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저자도 이러한 암울한 예측에 대해 약간 상반되게 보일 수도 있는 오스카 와일드를 제법 많은 곳에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와일드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가는 수많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공장의 기계들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계는 일하고 노동자는 노래한다!"는 대목이 등장한 것이겠죠. 사실 와일드가 희망했던 계급이 없고, 자유가 충만한 사회는 결국 자본주의가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쇠퇴'라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자본주의에 걸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가 줄곧 우려하고 있는 이런 '이행'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의 우리가 맞이할 '디지털화'도 단순히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발걸음과 행동이 너무나 미적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집어 삼킬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어쩌면 아주 망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런 기술 만능의 디지털화가 초래할, 비인간화, 계몽주의의 몰락, 도덕성의 결여, 자율성의 몰락 등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데요. 따라서 이 부분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철학이 추구하고 긍정하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한 철학자의 바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거대한 디지털 시대에서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가 과연 귀환할 수 있는지는 꽤 불명확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사회가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고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부채질 했습니다.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간단하게 '저급한 이상론'으로 매도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조차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무엇을 '보수'하는지는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디지털의 범람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글 중반부에서 언급되는 시민들의 '기본 소득'에 대한 필요성은 시민의 삶에 대한 통제와 자율성을 답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민주 사회의 시민들인 만큼 앞으로 열렬한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담론 자체가 시장 우선의 자유주의가 벼랑 끝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더 이상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놔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포스트 민주주의'라는 디스토피아가 한낱 허구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로서는 발리바르보다는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가 더욱 익숙한 편인데요. 어떻게 보면 디지털화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예측도 독자들이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이 글을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지침서 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선 디지털 거대 기업들의 사업 확장은 특히, 미국 정부의 용인 아래 더욱 수월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이미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보 당국과 이들 기업들 간의 유착을 폭로한 바가 있는데요. 단순히 기업들이 정부에게 협조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라 악어와 악어새처럼 거의 공생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헌법이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 '안보'라는 문제가 이처럼 사회와 시민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와 같은 전방위적인 디지털화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와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다방면에서 소중한 정보들을 취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프레히트 역시, 디지털화를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매우 어려운 것이며, 현재로선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소 명확하지 않았는데요. 사회의 변혁이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 정치가 무능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야 하는지 저로서도 큰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저들과 결탁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은 조지 오웰의 절망보다도 더 암울한 것이기에 아직은 그런 지경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겠지요. 앞으로 10년이 우리 사회와 시민권, 그리고 주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가 '레트로토피아'라는 단어로 겨우겨우 위안을 삼고 하루하루를 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문제 많은)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후반부의 진술은 논증이 매우 명료해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제1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엎고, 예전에는 교회와 귀족이 지배하던 곳에 시민 민주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 모델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이익을 목적으로 인간들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이 비안간적이라는 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조종 가능성의 시대를 맞아 과연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정치인들은 정말 미련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고, 가능한 한 누구도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통치란 믿을 만한 숫자와 통계의 위에서만 가능하고, 정부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통계적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양극화 사회는 돈을 잘 버는 소수 계층과 경제적으로 종속된 수많은 사람들로 나뉜다

이 새로운 정보의 군주들은 강력한 친구나 우군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에 곧 지금까지 축적해 온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각자 고향 땅의 정보기관들과 상시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현재 서구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비록 자유로운 선택이기는 했으나 동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세계 혁신가들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에서 탄생한 사고 유형의 자식들이다. 이 사고는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에서 이데올로기, 즉 요지부동의 일반적인 인간상을 품은 세계관이 되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개별 국가에서 출발하고, 그 국가들의 행동이 도미노처럼 다른 나라들로 파급될 것이다

인간 존엄에 관한 우리의 복잡한 관념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그런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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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적 민주주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유용민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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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는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하고, 연세대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저자에 대한 이력을 찾기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많은 정보가 잡히지는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김해시 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방송토론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나, 요즘 여러 방송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준희 교수와 2019년에 '미디어오늘'에서 주최한 '포스트 진실' 시대와 관련한 토론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여러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언론에도 꾸준히 얼굴을 알리고 있는 듯 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미디어학을 전공한 학자가 누구보다도 방송에 참여해, 우리의 언론 지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그의 이러한 활동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의 이 책은, 2015년 5월에 분량이 적은 소책자 형태로 출간되었고, 전문적인 전공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일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정립 시키는데 어느 정도 유익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이 책의 구성과 말하고자 하는 점을 요약해 보자면,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대안 모델로 주목 받고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 agonistic democracy'를 기반으로 그동안의 무페의 논저들을 살펴보고, 이 경합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개선점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페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연한 주장은 경합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여기서는 유용민 교수의 경합적 민주주의를 대표적 주제어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더불어, 저자의 이 글은 샹탈 무페의 최근 번역된 '경합들'의 해설서로 읽혀질 수도 있고 그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생각을 담은 다른 논저들의 개론적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보이는 논증이 전반적으로 첨예하게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개념을 숙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만큼 저자의 이 글이 비교적 실용적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꽤 오랫동안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적 원칙이 정치 전반에 있어서 무력한 상황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개념도 무엇보다 다원주의적 원칙이 우선적으로 기반 되어야 했는데요. 카를 슈미트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자유 민주주의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치부 되고, 물론 이러한 인식적 결과의 총체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나치가 사회를 인종적으로 '균일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전체주의에 이르는 길'을 정치의 개선의 어떤 방향으로 생각했던 슈미트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슈미트의 이런 인식을 마크 릴라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저 자신의 '드러낼 수 없는 과거 이력'을 학문적으로 모호하게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슈미트가 내 편과 남의 편으로 규정하는 정치에서의 대결 구도가 과연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를 전반을 이런 식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이미 이 글 4장에서는 우리 정치의 모든 문제 혹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 바로 "정치의 형식과 내용이 불일치하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데요. 이것은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소위 정치적 효능감' 제대로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이고,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 전반이 정치가들과 정치 환경에서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정치 무대에 올리는 시민들의 책임도 전혀 없을 수 없다는 식의 논리적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주장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다수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표리부동'한 태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평가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에 '겸허한 도덕적 중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엘리트 계층조차도 그 지위에 걸맞는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 치중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더 이상 겸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다니엘 코엔이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시민이 '새로운 공공선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과 유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합리적인 개인'과 반대로 민주주의가 너무나 혼란스런 상황을 잉태하기 때문에 과연 시민들에게 정치가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진 바가 있습니다. 무페 역시, 신자유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도 개인의 합리성을 너무 과신한 바가 있다고 못 박고 있는데요. 그녀가 주장하는 경합적 민주주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 전반을 토론과 합의로 이끄는 힘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적 기반이 우선 되어야 하는 증거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다른 분들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를 놓고 다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무페의 평가대로 이 자유주의적 기반이 우선시 되는 정치적 환경에서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초래된 점은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글쎄요. 이를 그저 혼란스런 민주주의의가 잉태한 정치적 후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의 모습인데요. 이들 반동 세력들이 그저 도식적으로 민주주의의 환경에서 일어난 점을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몰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무페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공화주의적 가치'가 재정립 되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우리가 너무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그동안의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회의론에 내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개념처럼 아직은 이 세계에 무엇보다 진정한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그룹들을 건전한 개방성으로 이끌 수 있는 정치는 민주주의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의 이 핵심 제안이 큰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여기에서 인용된 클로드 르포르의 단정대로, 민주적 사회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역사 속으로 밀어낼 수 없는 것인데요. 이 지점에서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점은 만약 우리에게서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그저 '과두제'이거나 아니면 히틀러의 재림을 한 번 더 눈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카를 슈미트가 자유주의적 정치를 나약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저 강력한 힘에 의한 주도적인 사회 통합을 진실로 자신의 이상으로 그려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편적인 '시민권의 붕괴'를 예상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의 대두에 따른 극단주의를 그가 살아 있다면 나약한 모든 것들의 실로 살아있는 대안으로 취급했을까 어느 정도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제가 마크 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슈미트에 대한 다수의 해석과 비평에 의구심을 갖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슈미트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민들에 의한 '반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아닌가 지레짐작을 하게 됩니다. 사실 무페가 정립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건들이 꽤 이상주의적으로 여겨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극심한 이유이기도 하고 정치가 신자유주의에 점령 당한 것은 물론 이제는 거의 '쇼비즈니스'와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티비에서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정치 논쟁이 나중에는 양 진영 간의 인신공격으로 귀결된 것은 그만큼 저 '직업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가 아닌 진실로 건전한 토론이 가능하게 되는 환경을 우리가 목도 하게 될 것인지는 거의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겠죠. 더욱이 오늘날처럼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가 없었다고 본다면, 이런 아이러니는 더욱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위르겐 하버마스는 적대하는 두 정치가 진정으로 화해를 해야만 정치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헤겔이 진정으로 원한 역사적 사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마무리 되는 이 시점에 있어 무페의 정치적 대안이 그저 철지난 이상주의로 매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치에서까지 합리적 이성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치가 쓸모없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분노와 경멸 또한 이런 분위기를 부추겨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현실 정치에 내보내지 못하고, 우리가 스스로 '진실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점'도 큰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미흡한 마음으로는 진정 건전한 경합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사회에 정착하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19세기 오귀스트 콩트와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발전한 근대적 사회관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로 간주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한다

20세기 후반 많은 사람들은 자유, 인권, 평등, 평화의 시대가 번영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에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도그마적 진리와 정의로 내세우는 한편 이념적 극단성과 선명성을 추구하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 및 집단을 근본적으로 적대시하는 정치 세력, 담론들이 난무하고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과도하게 기대하고 민주주의를 절차주의적으로 한정해 버림으로써 정치를 초정치적인 중립지대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실제 현대인들의 정체성은 개인이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성 등 다양한 영역과 조건들에 다층적으로 처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연관을 통해 구성되어 가는 것이지, 어느 한 요소로 채워지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내적 모순을 지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근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자유주의 정치 이론은 정치적 주체들을 합리적, 이성적,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슈미트는 적대하는 집단들의 투쟁으로 야기되는 사회 혼란이 의회나 선거등 대의적 의사 결정 장치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인식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열망을 품는 신념 체계에 이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논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세계에 늘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무페의 자유주의 비판은 극우파의 부활, 극단주의의 범람, 민족주의 부흥 등이 가져올 위기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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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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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문호인 제인 오스틴은 1775년에 영국 북부 햄프셔 주의 스티븐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해봐도 꽤 개방적이고 유쾌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여동생인 카산드라와 함께 옥스포드로 보내지는데요. 여기의 카산드라는 오스틴에게 여동생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카산드라와 함께 레딩의 기숙 학교에 다닐 때까지 지속적으로 가정 교육을 받았고, 학교 교과 과정에 들어갔을 때, 프랑스어, 철자법, 바느질과 음악 등을 배우게 됩니다. 이후 오스틴은 14살에 습작을 통해 자신의 재능에 눈뜨게 되는데요. 그녀는 1811년에 출간한 이성과 감성을 시작으로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엠마, 노생거 사원 그리고 설득을 세상에 내보이게 됩니다. 생전에는 찰스 디킨스와 조지 엘리엇의 영향에 가려져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지만 사후 헨리 제임스에 의해 그녀의 작품이 빛을 보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특유의 정교한 개인들의 일상 생활을 소재로 리얼리즘에 입각해 글을 썼는데요. 특히 여성의 심리묘사와 당시 불합리한 시대상을 작품에 절묘하게 배치시켜 문학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신장 질환으로 추정되는 합병증을 앓던 오스틴은 41세의 이른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그녀에게 큰 명성을 얻게 해준 이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은 지난 1813년 초도 출판되었고 국내 번역본인 민음사판은 1813년의 출판된 초판본을 근거로, 1993년의 노턴 비평본을 대본으로 했다고 역자들에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번역판은 2003년 국내에 출판 되기에 이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거의 오랜만에 쓰는 소설 서평이기도 한 데요. 오스틴의 이 유명한 고전은 그럼에도 너무나 기꺼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종종 소설 서평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제인 오스틴의 이 오만과 편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니 만큼,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이 갖는 명성에 관해 한번 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엘리자베스 베넷과 그녀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언니이자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인, 제인과의 관계는 작가와 그녀의 동생인 카산드라와의 둘도 없는 우애 와도 빗대어 읽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 현란한 작품을 통해 고유한 많은 캐릭터를 곳곳에 배치하고 있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는 베넷 가의 장녀인 제인의 인품과 더불어 고결한 성품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흔히 무도회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교제와 그런 행위 자체가 중요한 의미로 인식되는 소설의 관습적 배경에서 최소한의 상식과 인격을 갖춘 인물을 찾기란 어려운 법이기도 합니다. 굳이 비틀린 캐릭터를 만들려고 하지 않더라도 '가진 바 알량한 지식조차 없이 그저 허영에 찌든 인물상'을 오스틴은 거듭 비판해 내고 있는데요. 제인은 이와는 거의 상반되게, 작중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온화하고 절대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성격"으로 훌륭한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 주변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이었는데요. 만약 엘리자베스의 곁에 이런 제인이 없었다면 엘리자베스의 겸허하고도 진정한 내면의 성장이 개연성을 상실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고로 롱번의 베넷 가(家)의 가주이자, 다섯 자매의 아버지인 베넷 씨도 어느 정도의 상식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반대로 속물적이고 지성을 거의 겸비하지 못한, 몇 가지 이상의 인격 상 결점을 가진 아내와 그녀를 필두로 다른 세 자매, 리디아, 메리, 캐서린의 인물 설정은 마치 '상식 대 비상식'의 전형처럼 2부 종반 까지 글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요한 배경으로 여겨지는 상업기의 영국은 사회 전반의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귀족 사회의 영향이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이 소설의 주요한 가문으로 언급되는 베넷 가는 당시 떠오르던 젠트리이지만 국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들이나 그 영향 하에 있던 사용인들로부터 다분히 신분적 경멸을 강하게 받습니다. 이는 피츠윌리엄 다아시가 찰스 빙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분 차이가 극명한 계급 간의 결혼'이 자신들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다아시가 오로지 특별한 사랑을 위해, 이어지는 3부에서 진정한 노력과 함께 스스로 힘든 결정을 감행한 부분은 스토리 상으로 봐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진술 과정에서 겨우 밝혀지는 인격상의 결점이라곤 "믿는 바에 따라 고집스럽게 행동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아시에 대한 작가의 초반 설정이 다소 그럴법한 이유가 될 수도 있을 텐 데요.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저 알량한 선입견으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인간의 섣부른 행위 자체가 어느 시대에서나 환영받을 수 없는 이유임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런 연유로 글에서 다아시와 빙리의 관계에 대한 여러 진술 들은 저에겐 꽤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1부 도입에서 빙리와 다아시의 여러 대화를 통해, 이들의 관계에 대한 주도권이 다아시에게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과 신뢰는 현 시대의 평범한 우리조차도 부러워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 부와 지위를 가진 젊은 신사들의 평범한 대화 자체에 어떤 중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남녀 간의 뜨거운 열애 못지 않게 이 두 남자의 서로를 향한 진실한 마음과 조언은 진지하게 고찰해 볼 정도였는데요. 많은 분들은 다소 지나치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다아시가 빙리에게 한 조언은 몇 번이나 그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충분히 그러한 발언이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당시 남녀 간의 혼인이 단순히 이 둘만의 개인적 결합이 아니라, 가문 간의 위신과 명예가 달려있는 일이니 만큼 그 시대의 관습을 고려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요.  

'얼마간의 부와 권력으로 껍데기 같은 위세를 일삼는 귀족의 잔재'에 대해 작가인 오스틴은 간혹 해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연장선 상에서 조지 위컴과 윌리엄 콜린스의 존재는 스토리 상 중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작가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잘난 체와 비굴함의 혼합"의 전형인 콜린스는 실로 과하게 비틀린 캐릭터이기도 한데요. 지역의 치안 판사 직위를 갖고 있는 캐서린 영부인의 후견으로 지역 목사직을 얻은 그는 이 영부인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한 과한 자부심은 물론 꽤 과장되고 실속 없이 껍데기 같은 언행은, 오스틴이 그의 설정에 사뭇 공을 들인 티가 날 정도였는데요. "얕은 직위로 과도한 자만에 빠져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인 양 여기는 자들의 행태는 그처럼 처연한 것이 없다"는 스탕달의 독설이 순간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콜린스는 이 작품 안에서 주된 풍자의 캐릭터로 위치하면서 부와 권력에 따른 계급 사회의 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글 전반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이고 소모적인 캐릭터라 볼 수 있는 조지 위컴은 앞선 콜린스와 더불어, 모두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인물입니다. 작품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입을 통해, "선함이 오로지 겉에만 머물러 있는" 위컴은 자신의 아버지가 다아시 가문의 충직한 청지기로 일하면서, 이 부자가 전대 가주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음에도 거의 반동적으로 표리부동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는 협잡과 다름없는 능수능란한 어투와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타고난 말주변을 갖고 있는데요. 어느 정도 주변 인물들에 대해 객관적인 통찰을 보이던 엘리자베스가 순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 능력을 입증 시킨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보이는 위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그에 반해 설득력을 보장할 수 없는 다아시에 대한 편견이 중요한 설정임은 분명한데요. 이 뿐만 아니라, 위컴이라는 캐릭터가 상반된 지점에 있었기에 다아시의 숨겨진 인품과 그의 고결한 행적이 더 한층 빛을 발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위컴이 어떤 반항적 기질을 타고나 신분 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기 위해 노력하다 끝내 매몰되는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는 상상을 해보는데요. 그래서 아쉬운 점은 그가 그저 여자 등이나 치는 인물로 그려져서 만인의 지탄은 물론 경멸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와 같은 몰락에 대한 극적인 설정이 있었더라면 좀 더 글의 개연성을 답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는데요. 저의 이런 판단에는 위컴이 악인이라기 보다는 참으로 불쌍한 인물이라는 감정의 이입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근대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의 배경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그야말로 적절한 남자를 골라야 하는 딜레마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텐 데요. 그저 삶의 안정을 위해 남편을 결정한 샬럿 루커스의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베넷 부인 역시 이러한 선입견에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는데요. 자신의 아내가 그런 여자라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자신의 딸들 중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딸을 아내와 같이 속물로 취급한 베넷 씨 역시 어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캐릭터라고 여겨집니다. 3부에서 리디아의 야반도주로 인해 집안의 큰 우환이 터지자, 그가 보인 양면적 태도는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에 반해 양식과 지성을 갖춘 엘리자베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그의 언행과 관심이 그가 본질적으로 가정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요. 2부에서 캐서린 영부인이 엘리자베스에게, 왜 가정 교사를 두지 않고 딸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고심을 해봐야 하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겁니다. 특히, 엘리자베스와 상반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메리의 인물상은 이처럼 극적이라고 여겨졌는데요. 책의 지식을 그저 자신을 드러내는데 수단으로 삼은 메리의 '지성'은 오늘날 지식인들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캐서린이 점차 정상적인(?)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으로 점차 안정적인 소녀로 이어졌다면, 메리는 그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물론 약간의 풍자를 포함해서 말이죠.

이 소설에는 소위 '계급적 차이'에 따른 철저한 인식론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캐서린 영부인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사건과 다아시가 빙리에게 전하는 충고나 빙리의 여동생인 캐롤라인 빙리가 베넷 가에 갖는 경멸도 이를 증명합니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상업 발전으로 인한 소위 중위 계급의 등장은 기존의 귀족 사회의 인사들이 보였던 그런 경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현재에 이르러서는 여느 민주주의 국가에서 계급적 인식은 거의 철폐되었지만 반대로 자본주의에 의해 돈에 의한 격차는 심각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강고한 계급적 차별 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오로지 인간으로서 사랑을 갈구한 다아시의 노력은 꽤 신선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특유의 거친 태도로 인해 주변에게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나중에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내유외강형의 인물로 설정상 거의 완벽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과오와 부적절한 편견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아시의 됨됨이을 알게 되어, 극적으로 그와 사랑으로 맺어지게 되는 이면에는 다아시의 고집스러운 인품이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이들 두 사람의 사랑 자체는 다아시의 부와 권력을 차치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현재에도 매우 드문 일이라 여겨지는데요. 이는 단순히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의 성장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매겨진 것처럼 오해를 살만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와 다아시와의 결혼이 가볍게 취급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넷 씨가 "엘리자베스 너는 스스로가 존경할 수 있는 남편을 만나야 그 결혼 생활이 수월할 것이다"는 진술이 실로 공감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힌 사람이 스스로를 완벽하게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타인에 대한 인식을 그처럼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신의 과오를 절실하게 뉘우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케이스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결합은 이처럼 개인사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 더불어 작품의 시대상에 있어 큰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합당한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일부 인물들에 대한 소위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나타나지 않아 일부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고전이 오스틴의 여러 작품들에 비해 소위 '유쾌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갖는 허영과 무교양, 무지성에 대해 여러 대화를 통해 일관되게 경멸하고 있는데요. 이는 계급주의적 시각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한 결핍을 내보이게 될 때, 그녀는 그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교육이 특별한 조치라는 위상을 갖던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에 있어서 조차 매우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기다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지성을 계발함으로써 실속 있는 내면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비굴한 성격은 머리가 나쁜 데다 사람들과 별 교제마저 없는 특유의 자만심과 예기치 않게 일찍 성공한 사람으로서 갖게 된 자부심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상쇄되었다

정상을 참작할 만한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하트퍼드셔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베넷 양뿐이었다

엘리자베스야말로 자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받아 마땅한 첫 여인,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딱하게 여겨 주었으며 자신이 경모한 첫 여인임을 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캐서린 영부인은 커피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모든 주제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말했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 특유의 단정적인 태도였다

그것은 당신의 어머님과 세 여동생이 그렇게 빈번히, 그렇게 한결같이 드러내 보인, 그리고 가끔은 당신의 부친께서조차 가세한, 완벽한 무교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에 대해서든 위컴에 대해서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으로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빠져 있었던 건 사랑도 아니고 허영이었으니

언니가 어느 면으로 봐도 그렇게 바람직하고, 이점이 많으며, 행복할 가능성도 큰 결혼을 다름 아닌 식구들의 우매함과 무교양으로 인해 박탈당한 셈이니 그야말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 두 사람 교육에 뭔가 큰 잘못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한 사람은 선함을 모두 가졌고, 다른 사람은 선함의 외양만 몽땅 가졌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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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자산에서 시작되었다 - 자산의 격차는 어떻게 개인의 삶을 가르는 핵심 요인이 되었는가
리사 앳킨스.멀린다 쿠퍼.마르티즌 코닝스 지음, 김현정 옮김 / 사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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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리사 앳킨스는 호주 출신의 사회학자로 현재 호주 시드니 대학의 교수직을 맡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핀란드 헬싱키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핀란드 아카데미의 저명한 교수였으며, 이전에는 영국 공립 연구 기관인 맨체스터 대학과 런던 골드 스미스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호주에서 사회경제학과 페미니즘 이론의 선도적인 이론가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멜린다 쿠퍼 교수는 현재 국립 호주 대학의 예술 및 사회 과학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따른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공 재정과 관련한 신자유주의적 재구성이라는 연구로도 유명한데요. 최근에는 '부활하는 극우와 금융 위기와의 관계'라는 주제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틴 코닝스 교수는 시드니 대학의 정치경제학 및 사회이론 교수로 부학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경제학과 사회이론이라는 교차되는 지점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더불어 그는 미국 금융의 역사적 발전과 그에 관한 글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본 글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 자산 소유권과 새로운 불평등이라는 공동 연구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현재 호주의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세 학자의 공동 연구물이라 볼 수 있는 이 글은 원제, "The Asset Economy"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이 책의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여기에 이름을 올린 세 연구자는 자신들이 찾아낸 학문적 결과물이 서로 유사점이 있다고 판단해, 이렇게 협업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이 세 사람의 공통 논저가 '카지노 자본주의'를 펴낸 한스베르너 진의 입장과 비슷하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 연구물의 주제를 크게 본다면, 자본주의를 198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현재의 자본주의가 단순한 '상품 자본주의'가 아닌 '자산'의 보유와 그것을 통해 불로소득과 막대한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투기적 자본주의'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글 후반부에서 하이먼 민스키를 면밀하게 인용하고 있기도 한 데요. 굳이 민스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은 '자산'과 '불로 소득'이라는 키워드에서 어느 정도 공감하실 수 있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의 4장이 꽤 집중해서 읽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들 3인은 아주 단호하고 명백하게 현재 전세계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일부 소득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산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이를 위해 영국과 호주의 사례를 들어가며, 여러 자료들을 통해 이를 입증해 내고 있습니다. 각각의 자료들을 비롯해 그것을 구성하는 상세한 진술 들은 거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할 텐 데요. 3장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 자산 중심 시대"가 자본주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는 지점에 대해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금 인용하는 것이지만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많은 학자들은 금융 소득과 부동산 소득과 같은 '불로 소득'에 대해서 명확하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아무리 증권화 Securitization 를 비롯한 최근의 첨단(?) 자본주의적 양상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명백하게 소득을 뜻하는 만큼, 자본 이득세와 누진세와 같은 조세와 관련된 최소한의 형평성이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과거 빌 클린턴 행정부의 소위 '리버럴의 배신'은 레이건 행정부가 노동 조합을 철저하게 분쇄 시킨 이후로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고통의 서막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공동 연구로 도출된 2장의 '자산을 기반으로 한 계급 분류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저자들은 기존의 토마 피케티가 분석한 계급 분류에 그 한계를 명확히 한 바가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사회적 계급주의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여전히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기까지 한 데요. 마찬가지로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폴 애들러 교수 역시 현재의 '경제적 계급 문제'에 대해 이미 심각하게 논의한 바가 있기도 합니다. 아직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실의 그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소득에 따른 계층 차이'와 '임금 노동'과 관련된 기존의 주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의 리사 앳킨스를 비롯한 공저자들은 임금 노동에 따른 상품 자본주의를 아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장에 걸쳐 논의되고 있듯이 오늘날 변화된 '자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집을 비롯한 부동산 자산이 실물 경제에서 현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노후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일부 부유층이 부동산 거래를 통해 차익을 실현하고 또한 수많은 증권 상품 등을 통해, 불로 소득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 그저 시장의 '블루 오션' 정도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이런 불로 소득이 소위 부유 계층의 권력과 부를 동시에 쟁취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할 텐 데요.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지리멸렬한 케인스주의의 그림자로 평가 절하 하는 것은 현실을 오도하는 것을 넘어 과거 케인스주의가 어찌 됐든 간에,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조합'으로 이뤄진 삼각 협상을 통해, 시민 대다수가 자신들의 권리를 자본주의로부터 상당히 보존해 왔다는 사실을 망각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를 좀 더 동일한 관점에서 거칠게 표현하자면, 시민 대다수가 그저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임금 노동에만 온 힘을 기울이게 만들어, 이렇듯 충실한 자본주의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을 도외시하는 경제학의 암울한 측면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중위 계급 혹은 중산층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는 자녀들에 대한 '증여와 양도'는 현재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살아 생전에 자신의 자산을 자식들에게 안정적으로 양도하는 것은 계급의 유지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현재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들의 임금 소득 만으로는 주택을 구입할 수 없는 상황과 아주 잘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현재의 기업들이 막대한 사내 유보금으로 부동산 거래에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들이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동산 시장이 약간의 부침을 겪더라도 진정으로 '시장의 패퇴'를 겪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부유층과 기업들의 첨예한 이익이 달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2008년의 '대위기'는 결론적으로 대마불사라는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고, 만약 부동산 경기를 비롯한 부동산 자체가 붕괴한다면 국가가 친히 나서야 될 정도로 '공적 자금 투하'라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대책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국가의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면서도 아무런 내적 갈등이 없이 '그저 매끈한 경제인'으로 사회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4장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저자들의 현실 인식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자산 소유가 이미 민주화된 역사적, 제도적 상황에서 생겨났다"는 최종적인 인식이었는데요. 비록 민주주의가 개인의 사적 소유물을 헌법을 통해 인정하고 있었고 그것이 오랜 전통으로 되었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분명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산 소유 자체를 민주주의의 역사와 연관 시키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 가운데 도출된 '주택 소유 민주주의'라는 저자들의 난감한 수식어는 현재의 우리 사회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버블을 통해서라도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일부 계층의 현실 인식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의 성공적인 창출만 가능하다면 사회 따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논리가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인간과 사회의 이익이 되기는 커녕, 이러한 극명한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데 큰 책임이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한 나라의 경제를 추동하는 거대 기업들의 이익 보존을 위해, 국가가 그 시녀 역할을 해야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나, 그러한 것에 동조하여 시민들의 권리와 심지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삶의 안정성 조차도 거래할 수 있다는 일부 시민들의 존재는 단순히 교육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 '주택 소유 민주주의'라는 괴랄한 수식어에 대해 전혀 의아함을 느끼지 못하는 현재의 우리 상황이 어쩌면 민주주의의 위기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들의 인식대로 우리가 그저 '평생 주택 임차인의 삶'을 스스로의 숙명으로 여겨야 하는지는 좀 더 사회적 고찰이 필요하다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자산의 불평등과 불로 소득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이 지금과 같이 실효성이 없은 채로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가 더욱 정치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 같습니다. 건전한 정치적 비판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산물'로 여기는 훌륭한 '종복들의 사회'가 과연 시민들에게 어떠한 이익이 될지는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 면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과거 미 카터 행정부의 끊임없는 좌절은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의 사례를 통해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레이건의 대폭적인 조세 개혁에 찬성표를 던진 보수주의자들의 일면을 봐도 정치인들의 양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여실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믿음은 상당히 무너져 버렸다

이와 같은 새로운 불평등 논리는 <금융화>라는 초자본주의적 논리와 <상속>이라는 봉건적 논리를 뒤섞어 사회 계급 구조 전체를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이 조사를 통해 찾아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영국의 계급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계급을 분석할 때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누는 전통적인 방식을 더이상 고집하지 말고 사회 구조 꼭대기에 엘리트가 있고, 가장 아래쪽에 프레카리아트가 있으며, 중간에는 좀 더 복잡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주택, 교육, 의료 서비스 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돈을 빌리는 것이 필수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현실에 주목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1981년에서 2000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지속적인 주택 가격 상승, 임금 정체, 임시 고용 방식 때문에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부의 핵심적인 원천, 즉 <주택 소유>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자산의 가치 상승에 따른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은퇴 후 대출 없이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생활을 위한 유동성 확보를 위해 집을 다시 담보물로 활용할 수 있다

자산 경제가 투기적인 자산 평가를 토대로 하는 상승 역학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과, 상품 경제라는 단기적인 시간 범위에서 벗어나 좀 더 넒고 투기적인 범위로 이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분리해 계급을 구조화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파는 것은 단순히 금전 거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적 자본을 이용해 소득을 벌어들이는 것이라는 개념을 현실로 만들었다

불안정성이라는 물결이 시장 전체를 뒤흔들 때 초대형 기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유동성 원조와 구제금융에 의존해 위기에서 벗어나곤 한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뜻을 꺾기 위해 전통적으로 실업의 위협을 들먹였지만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실업 수당이 주어진 데다 복지 혜택이 인플레이션과 연동되는 경우가 많았던 시대였던 터라 이런 방법은 더이상 먹히지 않았다

우파 평론가들이 툭하면 떠들어대는 것과 달리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미국의 빈곤층과 중산층의 조세 부담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으이가 의도적으로 불황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술적인 핑계 역할을 했다

신자유주의 통화 정책의 전반적인 효과는 전후 시대 내내 만연해 1970년대까지 이어졌던 임금 상승과 자산 가치 하락의 관계를 역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첫 번째 노동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라이시는 포드식의 대량 생산 모델과 노조는 더 이상 지켜낼 수가 없으며, 지식이 주된 가치의 원천이 되는 새로운 정보 경제의 현실에 국가 경제가 적응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특히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는 곧 평생 임차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증가하는 반면 평생 집을 소유하는 주택 소유주의 절대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주류 경제학과 현실 세계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세력은 금융 역시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그런 금융이 시장의 효율성에 관한 주장을 뒤집어 놓는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케인스 시대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로의 변화를 <가격 인플레이션 시대>에서 <자산 인플레이션 시대>로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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