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열 가지 키워드로 읽는 21세기 극우의 현장
카스 무데 지음, 권은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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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무데 (혹은 카스 머드)는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정치학자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모국의 레이던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도미하여 조지아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데는 주로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와 같은 극단주의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포퓰리즘과 관련한 연구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 있어 극단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 연구를 위한 유럽 컨소시엄 (ECPR)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스 무데라는 학자의 존재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보니, 극우주의자들에게 어떤 린치를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안전을 먼저 챙겨야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The Far Right Today˝라는 원제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무데의 논저를 이처럼 문제없이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먼저 감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총 10장의 소주제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에는 독자들을 위한 약간의 보론도 실려 있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꽤 일관된 논지를 갖고 있어 배경 지식이 다소 없는 분들이라도 쉽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데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된 내용은 ‘극우 정치와 우익 포퓰리즘‘에 대한 역사와 해석 및 앞으로 이들의 대한 대응이 되겠습니다. 그는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및 2015년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 사태를 들면서 거의 모든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았다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조직적으로 그다지 변변하지 못한 극우 세력과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익 포퓰리즘이 일어서는 사회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극우 정치 (Far Right)와 우익 포퓰리즘을 구분하기에 앞서, 무데는 6장에서 우익 포퓰리즘의 극단화로 인해 이 양자간의 정치적 스탠스가 많이 좁혀졌다고 인정하는 부분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극우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 antisemitiism, 역사수정주의 historical revisionism, 인종차별주의 racism˝ 와 여기에 반지성주의를 더하면 극우를 설명하는 완벽한 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극우적 폭력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소수민족, 이민자, 난민) 또는 타락한 도덕성 (페미니시트라고 여기는 사람, 동성애자, 좌익, 노숙자)를 그 범주˝로 두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무데는 독일을 포함한 상당수의 공권력이 이들 극우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며, 실제로 해당 경찰들이 다수가 이 극우와 연관이 깊다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집단 린치를 당한 사람들이 심지어 경찰에게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맡기는 것을 사실상 꺼려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야합니다. 이와 같은 극우주의의 폭력적 행동에 있어 과거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선임 고문이었던 스티브 배넌 Steve Bannon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선동 정치인들이 어떻게 저들을 이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게 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을 외국인 혐오자로 부르게 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을 이민 배척주의자라고 부르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모욕을 명예로운 훈장으로 착용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카스 무데와 더불어 포퓰리즘 연구를 지속했던 폴 태가트는 ˝이 포퓰리즘의 현상을 정치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상당수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엘리트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이면서 기존 체제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비난을 해대면서도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등 거의 파시즘만도 못한 배경 때문에 이것을 정상적인 정치적 현상이라 여기고 학문에 포함해야 할지 난감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 이제는 극명한 정치(실질적으로는 반정치)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되었기에 그가 6장에서 트럼프를 그저 평범한 극우 정치인 수준으로 인정한 것은 다소 이런 인식적 배경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저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5장에서 파악되는 이들 정치 세력의 평가에서 ˝오늘날 가장 성공한 극우 정당들은 주류 우익에서 우익포퓰리즘 정당으로 탈바꿈한 정당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는 명확히 인정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극우 정치와 우익 포퓰리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융합되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포퓰리즘적 우익 정치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포함하여) 줄곧 앵무새처럼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고 있지만 이 이면에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그저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포퓰리즘 현상을 대중들이 실질적인 민주 정치의 회복이라든지 자신들의 선거권과 정치 참여가 좀 더 실효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열망을 그저 이용하는데 급급한 이 포퓰리스트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대‘를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오판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무데는 민주 정치 대부분이 어떤 걸출한 정치 지도자에게 의존하기 보다는 갖춰진 조직과 연대가 그러한 정치의 실질적인 모습이라고 해석하는데요. 저자의 이런 의견은 충분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정치적 선동가에 가까운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어떤 민주적 의식이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념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금권 정치하에 자본과 밀접하게 연관된 보수든 극우든 이런 정치인들이 말로는 쉴새 없이,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떨떠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유권자들의 표를 위해 그런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지 엘리트주의가 몸에 박힌 이런 직업 정치인들이 다수의 정치를 긍정한다라, 매우 믿기 어려운 것이죠.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노동 계층의 붕괴, 프레카리아트의 양산, 하루 벌이를 고민하는 취약 계층의 확대로 말미암아 이미 미국과 유럽은 전방위적인 이들 시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급격하게 반정치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점을 미국의 티파티 운동과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자들이 매우 유용하게 이용했으며, 현재의 경제적 시스템을 긍정하고 있는 관료들과 경제엘리트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저들 경제엘리트들에게 어떠한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동안 강조했던 견고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운운하기 전에 민주적 권리를 갖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 삶을 안정화 시켜야 저들 역시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편협한 시선으로 큰 맥락을 보지 못하는 엘리트들의 단순명료한 사고관이 신자유주의적 파행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승자 독식과 약탈 경제와 같은 불균형적인 경제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하더라도 그 기반이 더욱 취약한 부분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하는데, 자본의 승리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회가 구조적으로 이미 정치 경제할 것 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경제학자들이 평범한 시민들의 가난의 굴레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 시장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순수함이든지 맹목적이든지 하여튼 그런 독특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일방적으로 민주주의가 약화 되었기 때문에 극우 정치가 출현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긴 했지만 그보다 약탈 경제에 의거한 소모적인 경제학과 이를 추종하고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들 무리 그리고 각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 이것에 이득을 얻는 관료들과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러한 상황을 동시다발적으로 악화시켜 왔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근본적인 파행의 근거에는 과거의 공화주의적 전통과 민주적 정치의 충분한 믿음 없이 그저 정치 자체를 수단으로 삼은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겁니다. 그래서 누스바움의 의견대로 ‘진정성의 결여‘는 이처럼 터무니 없는 과오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극우 정치의 도래는 현실 문제의 부조리들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다수의 정치와 공정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행태들을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되었기에 이 ‘분노의 정치‘를 먹고 사는 거머리 같은 극우 정치를 발생시킨 것이겠죠. 여기에는 무데가 약간 과소평가하고 있는 반지성주의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트럼프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의 선구자로 그는 엘리트 지배체제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지식 시스템과 전문 지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반지성주의 자체는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미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반지성주의와 결합한 것은 반정치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 정치를 기존의 정치 세력에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포용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을 것로 여겨지는데요. 사실 극좌가 혁명의 문제로 기피되었다면 오늘날의 극우는 슈미트 식의 우리편 아니면 전부 대적이라는 의미로 쉽게 표출되는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제도적으로 공언받지 않는 집단 리치와 같은 폭력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본성으로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설사 저들에게 폭력성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극우 정치는 이미 ‘교육 받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어떠한 인종들도 대등한 정치적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남녀 차별은 저들에게는 사소한 문제이고, 전반적으로 극우 정치가 민주주의 정치에 위반되고 포용할 수 없는 것임은 명백합니다. 여기서 연급되는 리처드 스펜서의 대안 우파 (alt-right) 역시, 그저 온라인상에서만 암약하고 있지만 저들도 교육 받은 백인 남성의 국가라든지, 헝가리의 극우 정치가 똑같이 강조하는 백인들만의 국가는 확실히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정치입니다. 물론 이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

극단적 중도파라는 논저를 쓴 티크 알리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자 평범한 시민들에게 극우 정치를 명백히 밝혀내는 무대의 이 논저는 실로 귀중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각지의 극우 정치는 정치적 세력이 보잘것 없는 관계로 기성 정치에 나타나지는 못했으나, 현재는 프랑스의 르펜 사례로 말미암아 의미있는 대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저들을 수월하게 도태시키지 못한 책임도 분명 있을 겁니다. 물론 현실 정치에 약삭빠른 언론인들은 이들 극우 현상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대다수 민주 정치의 기반인 시민들에게는 분명 안좋은 현상임은 분명합니다. 단순히 벤자민 바버와 같이 현실 정치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더 확대시키고 이를 긍정하는 시민이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저 극단의 정치가 설자리를 잃게 될지는 아직은 불명확해 보입니다. 뭔가 극우 정치를 도태시키자고 말하면 뭔가 파시스트가 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만, 매번 강조하는대로 이 극우 정치 역시 우리의 민주 정치에 위협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좌절에 빠진 취약 계층의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지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미 극단의 정치가 자생할 토양은 충분하니 말입니다.

-본문에서 카스 무데는 손수 극우 단체 모임에 수차례 참석해 저들을 관찰했다고 하는데요. 그의 용기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무데는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극우가 어떻게 21세기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히틀러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반칙이자 더러운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극우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파시즘으로, 이는 좌익과 우익에게서 반민주주의 anti-democratic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혼합주의적 syncretic 이념이다

인종차별주의나 민족다원주의로 알려지든 간에, 극우의 핵심적인 이념의 특징 중 하나이자 현대 우익포퓰리즘의 지배적인 특징은 바로 이민 배척주의다

극단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적 평등과 다수결에 의한 정부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한편, 우익 포퓰리즘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소수의 인권과 법치, 삼권분립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와 가치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최근의 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트럼프 유권자를 구별했는데, 미국 보존론자들 American Preservations(20퍼센트), 견고한 보수주의자들(31퍼센트), 자유시장주의자들(25퍼센트), 반지성주의자들(19퍼센트), 예측불가(5퍼센트)로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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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맞선 이성 -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
노엄 촘스키 & 장 브릭몽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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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엄 촘스키는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큰 명성을 얻은 학자로 사회비평가이자 정치운동가 및 철학자로 92세의 고령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학계의 거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권위주의적이라거나 상아탑안에서 자신만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인물은 아닙니다.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 내각에 암약했던 네오콘들은 그가 빨리 죽었으면 한다고 빌었다는 일화도 너무나 유명합니다. 더욱이 촘스키는 CIA에 감시를 받기까지 했었는데요. 당시 기성 권력이 얼마나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는지 짐작할 만한 부분입니다. 예전에 제가 지나가는 투로 한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타계하기 전에 이 두 노대가가 현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놓고 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간혹 상상해 보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촘스키의 이 절판된 책을 뒤적거리다가 여지없이 앞선 아쉬움이 깊게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aison Contre Pouvoir˝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원서와 관련해 참고할 부분은 아마도 벨기에에서 불어판으로 출판된 원전을 국내에서 번역한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역자인 강주헌씨가 불어를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영문판으로 나온 것을 번역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요. 구글에서도 정확한 서지 정보가 잡히지 않아 추가적인 내용을 적어 봤습니다.

이 글을 간단히 소개한자면, 노엄 촘스키와 벨기에 루벵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의 대담집을 엮어 편찬한 것입니다. 이 대담의 형식상의 구성은 장 브릭몽이 촘스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주제에 대해 약간의 반문을 보이면 이에 보충 설명과 비슷한 촘스키의 해석이 나오는 식입니다. 일단 도입에서 대담을 진행한 브릭몽 교수가 이 책의 제목 ˝권력에 맞선 이성˝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거의 촘스키의 저작과 일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언급합니다. 만약 쥘리앙 방다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그가 주장한 지식인의 겸허한 의무를 촘스키의 일생이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존경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조차도 기존의 기득권 정치를 옹호하면서 촘스키와는 다른 결을 산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 이후 어떤 사람의 가진 부가 명백한 권력이 되고 이러한 사회적 연계 방향의 최소한의 비판적 분석을 지식인들이 하지 않음으로써 식자 층의 의미 변질은 이 시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때론 부에 때론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건전한 사회와 대안이 될 수 있는 책무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 부합하는 촘스키의 논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떤 한 편으로는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데, 인류의 역사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는 아주 많습니다. 특히 유럽의 왕정 시기에 쓸데없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전쟁들 그속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떨 때는 인명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피와 살육을 즐기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석해 버리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인식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 시대를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고 이기적인 본성에 부합되는 실로 적절한 사회 체제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을 우리는 그들이 터무니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느 누군가에겐 이 시대가 지옥이고 반대로 어느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없는 천국일 수가 있는데, 촘스키는 아무리 인간이 경험적인 동물이라 할지라도 생득의 조건에서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이 신자유주의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연민과 동정, 보살핌과 같은 본연의 인간성을 사실상 거부하는 데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실 제가 봤을 때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거의 한 몸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자신이 보수주의자지만 신자유주의를 경멸하거나, 신자유주의자가 보수주의를 철지난 헤게모니로 보는 경우는 거의 목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전통성과 가치, 공화주의적인 담론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될 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시장 자유와 극한의 개인의 이기심을 추종하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찌됐든 개인의 신념체계에 있어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증명이 되었을 때 이를 철회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누구나 말하는 성인의 단계가 저런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논외로 촘스키가 정명한 수학의 법칙이나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는 말에 이런식으로 인간의 발달 정도가 차별화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기주의를 낱낱이 논하고 싶은 심정이야 굴뚝 같습니다만, 저는 촘스키의 문장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중심이라고 근거 없는 이론들이 그들에게는 편할 것이다. 그래야 다른 동네의 병약한 과부를 먹이고 돌봐야 하는지, 또 건넛집 아이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지 등을 따지는 일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몇개의 문장들입니다. 원래는 유럽의 계몽주의가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 건설들로 부침을 겪에 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공교로운 흐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차례의 대전을 거쳐 비로소 진정한 계몽주의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 계몽을 바탕으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좀더 발전된 민주주의와 (본래는 공화주의적 담론이었지만) 생활 양식의 발전을 가져다 준 경제적 번영이 서로 절묘하게 인간 사회를 더 진보의 영역으로 이끈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던 애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라고 밝히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유 시장 주의의 화신으로 읽히고 있는 교조 애덤 스미스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요. 촘스키가 논하는 이 애덤 스미스의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본래 진정 전통적인 경제학은 바로 인간의 진보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경제학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진보는 지갑이 두둑해지는 진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지금에서야 촘스키가 인정하는 데로 이 신자유주의가 너무나 민주주의를 공격해대서 만신창이가 된 상황입니다. 물론 그는 이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만 저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찍이 대니 로드릭을 통해 경제적 번영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은 정치,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회복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이를 얼마나 숨기는 데 급급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미국 시민들에게 크나큰 기대감을 갖게 했던 버락 오바마가 당선 이후 월스트리트를 개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월가의 경제인들의 눈치만 봤다는 사실은 꽤 유명한 일화입니다.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놀이를 했던 경제 인사들의 후일담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과연 저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았는지 의문입니다. 과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사실상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을 혐오하면서도 사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특정 계층에 대한 합리적인 대처 방법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모른 척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오래전 시대의 협소한 인식 상황을 한계로 여기며 실제로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이해하는 식의 변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주의와 이를 통한 ‘손에 안잡히는 돈들‘의 이익 체계는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건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은 당연히 축적되기 마련이니 이를 그냥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뛰어나가 깃발이라도 들어야 될지 인식과 행동의 차이는 오늘날 재빠른 네트워크 시대에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에 촘스키는 바우만과는 약간 다른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그는 그래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많은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우만도 많은 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지만 말년이 되었을 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파행을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듯 합니다. 뭐 이 점은 아까도 언급했지만 누구에게는 이러한 체제가 천국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촘스키는 그러면서도 인간이 정의와 자유의지, 평화를 갈구하는 것은 그것에 어떤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고 단어하는데요. 물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글 말미에 드는 생각은 이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 정치가 과연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을지에 대한 매우 궁금한 호기심이 드는데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결여된 상태의 인간을 인간 본성의 불확실한 측면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이기심을 마음에 푸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지 어떤 사회학자가 이 지독한 연구를 해줬으면 좋겠군요. 끝으로 촘스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논하면서, ˝비열한 프로파간다라고 할지라도 진실 하나쯤은 섞는다˝는 주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습니다. 대범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모든 시민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로 타락시킨 그 자유 시장 논리와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지독한 편견은 뭔가 촘스키가 말하는 프로파간다와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4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에게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영국민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 특히 ‘유럽인들의 야만적이고 불공정한 결정‘에 피해를 입은 다른 곳의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 생각했다

이기주의를 찬양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염려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가정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틀렸다는 증거는 역사와 경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국민건강보험 요구처럼 덜 급진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핵무기로 진압할 수 있을까?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면 억압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주된 목표로 공격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대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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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회 - 평등이라는 거짓말
대니얼 리그니 지음, 박슬라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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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텍사스 주에 소재한 세인트메리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대니얼 리그니는 로버트 머튼과 군나르 뮈르달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회복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보편적으로 사회 정의에 집중하는 학자들은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평등과 관련된 보장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저자가 연구 분야를 포함해 문화사회학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왠지 피터 싱어와 학문적 유사성을 보인다고 여겨지는데요. 다윈주의적 사회학에도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이 책은 원제, ˝The Matthew Effect : How Advantage Begets Further Advantage˝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국역으로 된 책 제목과 관련해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제를 그대로 적용했으면 좀 더 의미전달이 잘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평등이라는 거짓말‘도 그렇고 제목까지 독자들이 책을 펼치기 전에 뭔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뉘앙스이지 않나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입에 유명한 마태복음의 한 구절로 시작되고 있는 이 글은, 전반적으로 로버트 머튼의 ‘마태 효과‘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마태 효과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본다면 ˝우위와 열위의 양자 비교에서 그 격차가 터무니없이 벌어질 수가 있는데, 이를테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과 그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빈익빈 부익부와 양극화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윈의 도태론을 접목시켜 불평등의 문제속에서 그 메커니즘이 사실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러한 불평등 문제가 사회를 좀 더 발전시키는 추동 요인이 되고, 각자 개인들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는 이론일텐데요. 제가 경제학자들의 저런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회학적으로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저 인간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극히 자연스러운 부분‘이라고 인정하고 크게 문제를 삼지 않으면 일부 세력이 현상을 오도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에밀 뒤르켐이 모든 사회학에서의 주장들이 마땅한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절로 수긍이 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이 글은 이 마태 효과를 기반으로 과학과 기술분야, 경제분야, 정치와 공공 정책의 분야,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의 우위와 열위를 기본으로 어떻게 경제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해당되는 적절한 여러 사례들을 취합해내고 있습니다. 이미 1장 후반부에서 ˝사회적 삶의 다양한 면에서 빠짐없이 마태 효과가 발견되고 있고, 대항력이 부재할 때는 사회적 결과에 대해 잠재적으로 강력한 결정 인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3장의 경제학 분야의 마태 효과를 조금 살펴보자면,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이 마태 효과에 대해 다소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경제학자들이 무지하다기 보다는 마태 효과를 규정하기 전에 매우 불확실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일종의 규정의 어려움으로 판단하는 듯 보입니다. 특히 마태 효과는 ‘자원 분배의 불균형‘으로 설명하려는 요인이 있기에 특히 부자들과 빈자들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앞선 수단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수긍하게 됩니다. 어차피 이미 나와 있는 수많은 사회학적 이론에 의해 격차가 크면 클수록 그 반대 급부는 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실 구태의연하다는 종속 이론을 살펴봐도 북반구가 남반구를 종속에 불과한 상태로 몰아넣으면 그만큼 북반구에게는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이 칠레를 사실상 엘리트 들에 의한 과두제에 처하게 만드는 등의 일종의 정치 모략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일련의 개입들이 이러한 맥락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사실 소설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확산시키겠다는 대의를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CIA를 통해 더러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해당 국가의 엘리트들을 지원하여 친미 정부를 세우는 등의 국가 헤게모니를 적극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마태 효과가 ‘착취의 효과‘로도 읽혀지는데요. 이 글 3장과 뒤이어 4장에서도 ˝가난하 자들의 처지를 더욱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에게 커다한 이득이 되어 왔다˝고 전반적으로 논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역효과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 그동안 자유 시장주의의 함의로 인해 분배의 문제, 특히 사회적 자원 분배의 불균형이 상황을 악화시켜 왔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다만, 저자는 약간 완곡한 어조로 ‘현대 자유주의의 영향‘이라고 일단 해석하고 있는데요. 아니 그냥 신자유주의의 여파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현대 자유주의로 갖다 쓰는 점이 다소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꽤 신중한 면이 있기도 한데요. 그런 연유 때문인지 아니면 좀 더 면밀히 이론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세련된 버전과 같은 수사적 표현을 갖다 붙인 것은 불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6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 마태 효과에 대한 여러 분파들의 판단에 대해 불평등을 그저 불가피한 자연법칙이자 사회적 편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하고 그러면서 이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인식도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앞장에서 절묘한 비유로 넣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좋아하는데요. ˝야구로 치면 3루에 있는 자가 원칙적으로 3루에서 태어난 것에 불과한데 자신은 스스로 이 3루를 쟁취했다고 여긴다˝는 표현은 이처럼 극적입니다. 즉, 이미 부자인 사람들은 부모를 잘 만났거나 상당한 유산을 받은 케이스들이 많을 텐데 그보다 반대의 경우, 가난한 사람이 정말 엄청난 노력과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될 확률은 현 사회와 경제적 상황에서 거의 소수 점대에 수렴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의 계층적 강고화가 보유한 부에 따라 강화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텐데요. 자본주의가 계급주의적 상황을 긍정한다고 볼 수 없는 이데올로기인데, 이미 교조의 법칙을 부정하는 상황이 현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에 따른 번영으로 자신과 자신 가족의 운명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이 거의 허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금융 자본주의로 자본주의가 한번 더 변화하게 됨에 따라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꽤 선명한 인간 발전의 자화상은 더이상 목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태 효과로 설명되는 현 시대의 자화상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의 실종과 관련이 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을 약화시키는 것은 일종의 ‘거세된 민주주의‘라고 여깁니다. 저자는 이 글의 6장에서 ˝누진세와 사회보장제도, 메디케어, 인권운동과 여성평등운동이 없었다면 과연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라고 반문합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이러한 번영이 인간 사회의 선결 조건이라 여기는 듯 하지만 실상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인간답게 그 권리를 항유하게 된 연유에는 기본적인 평등의 정신과 인권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경제학이 이런 중차대한 가치를 뒷받침해 왔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젠 시장의 공정성을 믿는 자유주의 철학이 철회되어야 함은 마땅합니다. 아주 단적으로 돈이 더 많은 자들이 훨씬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유의 빈곤을 받아들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아예 ‘승자 독식‘의 기조를 강화시켜 더욱 불균형 사회로 만드는 데 이바지 한 것이 바로 저 자유시장 이론이 아니었습니까.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침을 하고 있는데요. 경제학자들은 이미 사람들을 가난이라는 덫에 가두는 다양한 인과적 순환을 알고 있다고 명백하게 글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 시장의 공정이라든지, 선순환 내지는 모두의 경제적 번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이를 이미 경제학자들은 인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끝으로,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이 마태 효과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이론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자주 바우만을 인용했습니다만, 그는 ‘경제학이 인류의 태동과 함께 등장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자주 강조해왔습니다. 더욱이 가난한 자들을 배를 곯게 해야 스스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허버트 스펜서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회의론자들을 비롯 이러한 체제에 달콤한 과실만 먹은 이들은 전혀 현 상황의 부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온건주의자라고 잘 알려져 있는 조지 소로스조차도 이 자유 시장체제에 대해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시민들에게 인내를 발휘해 줄 요구만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던 애덤 스미스를 교조적으로 만든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기에도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시민들 중 대다수는 ‘계몽적 이기심‘과 같은 말도 안되는 수사가 판을 치는 마당에 권력의 불균형 상태 마저도 이를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쳇바퀴 같은 현실에서 실낱같은 개선의 가능성을 보려 노력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진보는 지리멸렬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고 보낸 햇수만 40년이 넘습니다. 사실 평등이 뒤집어 쓴 허위와 다름없는 오욕을 걷어내는 것만 해도 이미 숨이 벅찰 지경인데 해결해야 될 문제는 이미 산적해 있습니다. 저는 정치가 경제와 대결해서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기 보다 후퇴한 정치의 영역을 다시 회복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금권 정치의 문제, 이익화 된 정치인, 더욱 가중되는 경제적 불평등은 자꾸만 현실을 도외시하는 시민들을 잉태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결론에서도 ˝부자들의 이익은 가난한 자들이 얻는 이득을 크게 능가한다˝고 입증하면서 경제 성장 자체의 명암을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과연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인도할지 불안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마태 효과에 대한 연구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특히 선행적인 우위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모든 사회적 제도는 어느 정도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가물들이 자연스럽게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된 불평등은 억압된 계층들 사이에 불평불만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사회적 불안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주장은 마태 효과가 엄연히 실재하며, 사회적 삶의 다양한 면에서 빠짐없이 발견되고 있고, 대항력이 부재할 때는 사회적 결과에 대해 잠재적으로 강력한 결정 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다 발전된 사회에서는 비교적 민주적이고 공평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경제지배층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정치적 절차를 좌우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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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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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소재한 뉴 스쿨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낸시 프레이저는 정치철학자이자 비평가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녀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더욱 소홀히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정의에 대한 완고한 지지자로 자신의 정치철학이 성숙해짐에 따라 마찬가지로 여러 저술 활동을 통해 이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낸시 프레이저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스트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를 주지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아마 프레이저를 전형적으로 뜻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의 제목은 지금의 시대상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 책은 지난 2019년,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죽는날까지 전세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회의적 전망을 철회하지 않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문장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글의 초반이 시작됩니다.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기저에 정치의 문제라기 보다는 특히 경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를 거치고 난 후, 흔히 민주주의와 자유 진영의 승리라는 폭죽을 터뜨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있었기 때문에 금융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전방위적인 헤게모니 획득이 여러 사회 문제 내지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대적의 이데올로기, 대응의 신념 등과 같은 서로 직접적인 균형에 따른 시스템의 긴장을 야기하면서도 그 속에 사회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특별한 논리에 마찬가지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획기적인 경제 정책의 입안과 좀 더 노동력을 탈피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포함한 첨단 금융화는 ‘더욱 가깝고 밀접한 세계화‘를 주장한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요. 이 신자유주의가 일부 자유 진영과 선진국에게 크나큰 이득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개도국들도 이런 혜택을 받기도 했었죠. 사실 굳이 사회학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의 이면에는 또 심각한 문제들이 감춰져 있기 마련입니다. 북반구가 남반구를 경제적으로 착취한다든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아프리카의 심각한 빈곤 문제, 굴뚝 산업을 비용 합리화는 미명하에 개도국에 이전시키는 행위 등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외형적인 경제 규모의 획기적인 증대를 추동한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이라는 미명하에 초효율과 초집중으로 수식되는 고도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신자유주의의 파급 효과에 따른 사회진보적 측면을 논하면서 이른바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분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형용 모순이라는 말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1980년 ‘정치적 진보세력의 사실상의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인정‘과 투항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그룹은 과거 빌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성공적인 민주당 세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이런 측면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뭔가 ‘강남 좌파‘가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프레이저 식으로 ‘알맹이 없는 훈계 운운‘하는 것으로도 느껴지는데요. 저로서는 저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해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80년대 이후 서구 사회가 신자유주의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봐도 무방한 판국에 경제 전반의 발전과 이를 통한 사회 진보 및 시민의 의식 변화와 같은 신자유주의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물만을 가지고 진보세력의 신자유주의적인 수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것은 마치 막대한 부를 부유층들이 간혹 기부활동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을 보고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분배에 직접적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어쩌면 프레이저는 무페와는 다른 식으로 진보 좌파의 몰락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다소 엉뚱하게 건전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미 공화당 출처의 반동적 신자유주의를 구분하여 후에 후술될 트럼프 주도의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일종의 정치 변화를 중점으로 논증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도널드 트럼프는 평생에 걸쳐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지만, 집권기에 월스트리트에 어떠한 개혁안도 제시하지 않은 인물이고 또한 이미 희망을 잃고 좌절한 백인 노동계층의 분노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그야말로 반지성주의와 반체제에 화신이기도 하죠. 그런 가운데 프레이저가 정확히 짚고 있는 이 파편화의 원인, 즉 ˝전지구적이고 금융화된 현행의 자본주의˝라는 점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관점에서 트럼프의 정치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 건 사실이죠. 그래서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무능˝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진보적 포퓰리즘과 같은 새로운 정치 현상으로 사실상 개선시키고자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냥 정치의 많은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경제 전반의 문제를 민주적 통제로 회복시키면 될 일입니다. 그러한 어젠다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그런 취지의 공감대를 설득시키고 정부가 두번 다시는 사회를 배신하지 않도록 민주 정치의 균형과 견제의 가치를 다시 확립하면 될 일이지요. 물론 트럼프의 탄생은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의 사실상 실패라고 볼 수 있으며, 인종 혐오와 성차별 옹호 및 소수자 인권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우파 포퓰리즘과 같은 괴물과 더불어 대안 우파와 같은 비정상적인 정치 세력을 낳은 것은 전체적인 그림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거대한 자본의 권력이 정치를 전혀 개선시키지 못한 것이죠.

다만, 프레이저가 이 글을 통해 트럼프의 출몰과 그에 따른 미국 정치의 파행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분석해 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자포자기한 백인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물이며, 시민이 제대로 된 비판과 그에 따른 숙고를 하지 못하게 된 연유에도 바로 신자유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같은 결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프리드먼주의자들과 이에 동조한 금권 정치, 일반 노동자들의 경제적 건전성이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노동 조합 자체를 악마화 시켜 이에 동조한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겠죠. 바우만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누누히 강조한 것이고, 더 많이 확대되고 강화된 민주주의 만이 이를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일 겁니다. 이것은 샹탈 무페 또한 동의한 부분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동안 1세기에 걸쳐 너무 과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부터 비판의 재갈을 물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승리와는 아무런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프레이저의 실로 놀라울 만한 양심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인용하기에 앞서 민주주의에 헌신하지 않은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이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뼈아픈 시민들의 반성과 다시 정부에게 정당한 정치를 되돌리기 위해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거대한 금융 자본주의의 독선을 막는 실효적인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론으로 수록된 대담집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습니다.

-1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같은 거대한 출판사가 오타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문에 역자가 쓴 좌파와 우파의 선동가라는 문장에 대해 약간 이견을 내고 싶은데요. 전후 맥락은 아마도 저자인 프레이저가 진단하고 비판한 현 상황의 정치경제적 모순과 파행의 현실 진단 정도로 쓰신 것 같은데, 엄밀히 따지면 좌파 선동과 우파 선동은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좌파 포퓰리즘을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극심한 인종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격리, 다른 종교에 대한 배격 및 시민의 분노를 조장하는 우파 및 극우 포퓰리즘을 차베스의 그것과 동일 선상으로 보는 관점은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과거 티파티 운동의 초기에는 미국 내의 진보세력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점은 좌파 세력에게 혁명 운운의 철지난 스탠스를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제 요점은 저 우파 포퓰리즘은 이미 전체주의와 다름 없다고 보는 시각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사회학의 카테고리 내에서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용어 조차도 동의하기 힘들지만)의 인식적 대응은 한쌍으로 동등하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현 지배체제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대응하려는 좌파적 정치 운동을 죄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이념 덧씌우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애초에 포퓰리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훈계 두기가 이 문제(인종주의)를 다루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모든 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을(노동계급)을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된 병적 증상(분노에서 비롯되어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와, 연대 의식이 사라진 골육상쟁의 세계에서 폭력 분출에 뒤따르는 엄청난 억압)속에 침수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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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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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는 영국 출신의 진보적인 사회철학자이자, 비평가, 문화이론가 및 저명한 언론인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사적인 측면에서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영국의 여러 현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마트한 글쓰기‘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뜻하는 ‘k-punk‘는 꽤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진보적 언론인 로버트 미지크와 비슷하게 공통된 관심사,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인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언론사에 직접 칼럼 형식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편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셔는 스스로 우울증 증세로 인해 48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이에 역자 역시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논하면서, 영국의 우울증 관련 치료비 청구가 이미 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있다면서 몇번이나 이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피셔 역시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물론 극복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 글에 대한 특별한 헌사를 남기고 있었는데요. 촉망받는 학자이자 사회학 이론가가 이리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적잖이 불행한 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영국에서 그의 유고집이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국내에도 빨리 번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비교적 의미심장한 부제인 ˝대안은 없는가˝는 약간의 중의적인 의미로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젝과 바우만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과 대체로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는 유명무실한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지금의 시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보모 국가‘, ‘거대한 정부‘에 대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논하면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무치하게 2008년 적극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맹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견고하고 내면화 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면, 일찍이 거대한 거품을 안고 있던 금융시장을 경고한 누리엘 루비니와 라구람 라잔을 일언지하에 일축한 저들이 천연덕스럽게 정부의 ‘특별한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과거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무너트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 ‘역사의 종말‘과 매우 비슷한 어감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모순을 안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수많은 ‘안정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정부와 시민들에게 사실상 강요한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양껏 비판하면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자본주의적 거래에 쉽게 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일침은 많은 사람들의 부실한 양심을 칼로 난도질 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겠죠. 사실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따른 파행과 사회의 파편화에 대해 오로지 ‘건전한 비판을 상실한 좌파의 몰락‘이라는 핑계로 그동안 죄의식을 애써 떨쳐 왔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체제 안정주의자들은 우선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병리적 현상을 애써 무시하면서, 자신의 양심과는 아랑곳 없이 이러한 현상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적당히 인정하고 타협하며 ‘적잖은 자본을 소유‘ 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안정주의와 반대의 격렬한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 구분되기도 합니다. 마크 피셔는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면서 어쩌면 신자유주의 자체의 문제는 오로지 이익을 맹종하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로서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및 신념을 쓸모없는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몰아세우는 데 있을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밝힌, ˝신자유주의 자체가 시장에서 정치를 몰아내는데, 온갖 파렴치한 노력을 기울인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인 ˝레이건주의적 인간 homo reaganus˝이 시사하는 바는 그래서 극적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러한 논증보다 더 관심을 끈 부분은 왜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와 쉽게 결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앞선 물음에 대해 마크 피셔 만큼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는 해석입니다. 즉, 오늘날의 각지의 보수주의는 바로 민주주의 내에서 소유한 자본으로 인정받는 일종의 특권 정치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첨예화 된 능력주의 meriotocracy 와 연계되어 있으며, 자본 이익의 극대화와 이기적인 소양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회적 작업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 경제학의 화신으로 만드는 작업‘도 이 지점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과거 자유주의의 이행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강요는 이처럼 완전히 다른 체제일텐데요. 전자의 이행은 계몽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인간을 진정한 해방에 이르게 하는데 힘쓴 것이며, 후자는 다수 시민의 자유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 오로지 돈을 가진자들의 자유, 시장을 완전히 법으로부터 탈피시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는데요. 무슨 묵시록과 같은 음모론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이행된 자본주의의 유일성은 그렇게 간절히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병리현상 내지는 심각한 모순을 초래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에 극도의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및 사회적 격차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주의적 관점과 민주적 통제를 손쉽게 제거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 민주적 통제에 경기를 보이는 경제학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많은 정치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반해 우월한 위치를 획득함으로써 먼저 자본주의를 고려할 것을 모든 정부들이 강요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를 완벽히 타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공들여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이론적 잣대와 정치적 가능성들을 배제시켜 왔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마크 피셔가 몇번이나 영국 내에서 우울증을 건강보험공단의 헤택을 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자체가 시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수년간 누적되어 온 이러한 결과들이 사회와 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래의 사회 계약과 시민의 삶을 위해 정부가 필요한 당위성 등을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위태롭게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시장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마땅한 비판을 거부하는 행태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마크 피셔가 경제학적인 인간의 태동 같은 것을 마땅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점은 꽤 특별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의 또다른 독창적인 연구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인데요. 지젝이 그만큼 라캉에 대해 연구하고 알린 것만큼 ˝많은 시민들이 그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게 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젝의 작업은 마땅히 찬탄을 받을만 하며, 이러한 지식인의 존재는 전세계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논의를 더 이어가자면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비롯된 관료주의적 이식은 ˝자본이 필요한 데로 정부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경제사회적 매커니즘은 모든 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 보여지고 있고, ‘복지의 다운사이징‘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의 축적 가능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거대한 소수 자본가들에 의해 세계 체제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단순히 오늘날의 세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다른 용어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앞선 1장에서 간략하게 의미를 밝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안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독트린이 야만스러운 자기-충족의 예언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관점을 자본주의에 새롭게 강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일부의 사상적 움직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인 거부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결국 지젝의 예언대로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보다 전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라는 뭔가 앞뒤가 바뀌어 버린 것 같은 건전하지 않은 의구심을 정립시키는 것 같은데요. 전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본주의가 바뀌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일침하고 애초에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자체를 배격하는 것에는 사실상 이들에게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양가성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문제는 이들의 힘이 이미 너무나 거대해 일반 시민들이 최소한의 견제에 나설 수 있는 토양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피셔의 논의대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어떠냐로 시작해 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로 종결될 만큼 녹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를 더 강화시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의 개선의 필요성은 있으나 참고 기다려라 라거나, 시장 자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배격한다 는 양자간의 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역사적 진보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생산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비약적인 발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청사진을 기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의 사회상은 역시 그를 고양시켰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당시 설익은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도덕‘을 제외시키는 것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식인들이 어용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로버트 미지크가 비판한대로 자본에 종속된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대량 살상 무기 만큼이나 일방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피셔의 이 책은 귀중한 글이며,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지금의 정치적 변화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개선 가능성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피셔는 이에 대해서도 소위 종래의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 ‘힙한 문화‘ 조차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단하고 그저 이 세계가 매트릭스 따름이 아니라는 자포자기로 끝나기 전에 뭔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의 보모 국가와 관련해 당시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유포한 복지의 여왕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대처와 레이건은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조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큰소리로 외쳤던 악명 높은 ‘역사의 종언‘에 우리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종종 하향식 관료주의가 계획경제에서나 볼 수 있는 제도적 경화증과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며 맹비난했다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이같은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리의 분할이 그 특징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는 불신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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