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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주디스 버틀러는 1956년 2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헝가리계 유대인과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특히, 외할머니 가계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모친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부친은 개혁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요. 어린 시절 버틀러는 히브리 학교에서 유대교 윤리와 연원을 배웠고, 그곳에서 최초의 철학 교육을 받게 됩니다. 버틀러는 청소년기 교육을 거쳐 예일대에 편입하기 전, 버몬트주 베닝턴에 위치한 사립 리버럴 아트 칼리지인 베닝턴 칼리지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일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대략 1년간, 독일 관념론과 현상학을 공부했습니다. 1993년 버클리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기 전에 웨슬리언 대학,조지 워싱턴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젠더 연구학자로, 정치 철학은 물론, 제3세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문학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런 그녀의 작업 전반은 보수주의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전환과 권리 보장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버틀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법적으로 레즈비언의 삶을 살고 있고, 파트너 역시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웬디 브라운입니다. 이들은 현재 버클리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What World Is This?"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본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이 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지난날 전세계 팬데믹 사태와 그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당시의 전염병 상황을 주디스 버틀러는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논증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물음은, "과연 처분가능한 인구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라는 소위 비극적 논답이었습니다. 그동안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언급된 '부수적 피해'(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주 인용했던 구조적 문구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부수적 피해와 맞물려서 말이죠.)와 오버랩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분석과 그 영향을 철학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에 대해 저 역시 동의하는 편인데요. 여기에 저자인 버틀러는 이러한 '극명한 몰락'에서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만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현상학의 계보 가운데, 특별히 메를리퐁티를 인용하며, 우리 인류에게 몰아닥친 팬데믹 사태를 앞선 수단으로 고찰해 보고 있는데요. 바로 1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꼭집어 언급한 '처분 가능한 인구'에 대해서도 '용인 가능한 죽음'이라는 매개로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국가 의료 보험 체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의료보험의 유무로 위태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버틀러의 가정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아주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 펜데믹 사태가 그동안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역사적 부침들과 같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떤 맞이한 현상에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에는 이렇게 마주치는 현실에 있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삶을 온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그 부분을 숙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버틀러는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현 세계를 어떤 계층들은 만족스럽고 살만하다 느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의 절망을 몸소 체험하여 흡사 대비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그레이스 블레이클리가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는 인간 사회의 격차와 차별을 뚜렷이 드러냈고, 이는 자본주의의 무비판성과 맞물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후설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그의 특별한 개념인 '시간화'는 팬데믹 사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뒤이어 도출되겠지만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결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이 다른 개인과 접촉하게 되는 시간화의 과정은 펜데믹이 왜 쉽게 근절되지 못했는가를 밝혀주는 주요 수단입니다. 그런 연유로 여러 현상학의 개념들이 메를리퐁티의 현상에 이르러,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현상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현상을 우리 인류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등장한 "행복한 자들의 세계는 불행한 자들의 세계와는 다뭇 다른 세계이다."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좀더 비상한 철학의 유용을 마련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를 마치 요구하는 것 같은데요. 이것을 단순히 격차가 있는 삶을 표징하는 문장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혹은 계급주의적 논리로 그저 비하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처럼 이제는 체제와 세계를 그런 식으로 돌이켜 볼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버틀러는 철학이란,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후반부 논증에서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겪고 난 후, "무엇이 우리가 살만한 세계인가, 무엇이 살만한 삶의 조건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이것은 투박한 공리주의의 겉핥기식 논법 만은 아닙니다. 버틀러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세계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있지만, 2장에서 다시 인용된, 메를리퐁티의 '상호 얽힘'과 같이, 세계는 우리가 만지고 접촉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매개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단순히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세계가 이런 현상학적 과정 자체로 작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대체적인 관조에도 불구하고 저는 2장에서 언급된 하나의 모습에 비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한시도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는데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보험 유무를 체크할 계재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생계 수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도드라지는 단면일 겁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살만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반복적인 논법으로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미 1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덕적 책무를 감당하고 이행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적 토대 위에 있는 관념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이런 도덕적 책임, 타인에 대한 관심,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우리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 등은 결국 우리가 비극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1장의 철학적 도출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팬데믹은 저자의 분석대로 우리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기능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우선하는 자들이 소위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와 같은 단면을 언급하며 그저 "어떤 이들"이라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티브 배넌과 도널드 트럼프를 그 범주에 포함하고 싶습니다. 혹자들은 팬데믹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를 과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조지 W. 부시로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팬데믹 시기의 트럼프는 그 태도와 결과물은 완전히 상이했습니다. 거의 최악으로 말이죠.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한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는 소위 언론 기사적 평가는 지난 201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평등이 팬데믹 시기에 차별적인 죽음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을 놓고 봐도 말입니다. 비록 저자가 지면을 따로 할애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인도한 이 '위대한 사회'를 복합적으로 비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신자유주의가 팬데믹 시대에도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정체성이나 존엄한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 우위에 놓여 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사활적인 분위기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과 살만한 환경을 위해, 3장 이후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포용"으로서의 사회적 유대라는 이상주의적 관념을 다시금 소개하고 이것이 더 나은 삶과 살만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방향타가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2장 이후로, 버틀러는 작금의 세계가 진정한 '공동의 세계'라고 볼 수 없고 명확히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과 집단적 가치와 욕망을 실행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얼마 전에 읽은 패트릭 J. 드닌 역시, 종래의 개인주의 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언급한 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아니, 스스로 지각이 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시장의 자유'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공동의 삶을 목표로 수많은 개인들이 복잡하게 상호 얽혀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그 대안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전에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인류애를 강조했던 저자 답게, 현상학에서 말하는 이런 얽혀듦을 매개로 우리의 본성과 더 나아가 세계와 지구의 안전을 모색해보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4장은 바로 이러한 대안 제시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성 주도성의 문화'에 대해 완벽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사회가 이런 성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기계적 합리성에 전도되어 왔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어떻게 보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과 공동을 위한 삶을 몇십 년에 걸쳐, 상실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제안대로 펜데믹 시기에 뜻하지 않게 희생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깊은 애도와 주변에 하나하나 모인 이런 개인의 삶이, 곧 사회적 삶의 집합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과거보다 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전부 '살아남은 자들'이지만 '여기 그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얽혀든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바로 이러한 비극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훈을 찾는다는 말이 역시나 비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난 사람들을 맘 깊이 애도하고, 또한 개인성과 무비판적인 합리성을 극복하여, 우리 스스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가 대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런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저 견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가에 대한 논증 가운데 들어가 있는 문장이지만, 이것의 의미는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수단은 결코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그저 세계의 한계들만을 변화시킬 뿐 사실이나 언어로 표명될 수 있는 사물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세계가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도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전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세계를 거쳐왔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 단수적인 것의 문제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구성 자체에도 관계되어 있다."
국가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주장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기본소득 보장과 단일 의료보험 부과체계 법안에 대한 심리 가능성은 보다 더 높아졌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면, 살 만한 삶을 버리는 대가로 자유를 즐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오히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의 삶 자체가 그저 견딜 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
마치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혼자 지내고 있는 개인들은 가장 위험에 처한 이들에 속한다.
무엇이 삶을 살만하도록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배타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삶들, 즉 보다 일반적인 삶의 과정들을 위해 살만한 삶을 만드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체로 체현된 자아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서 주위 환경 및 타자들 안에서 그 자신을 벗어나 영향받고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할은 감추어진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보다 정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매우 근접한 것,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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