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기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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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었지만, 바우만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폴란드인임을 일찍이 자각했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했을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후 바우만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콜버그와 베를린 전투에 참가합니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바우만은 군내 정보 보안대인KBW (Korpus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 에서 복무하고, 당시 KBW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KBW에 복무하는 동안, 바우만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처음 사회학을 접하게 됩니다. 1953년에 바우만은, 그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촉한 이후, 갑작스럽게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부친과는 다르게 시오니즘과 선을 그었고, 오히려 반시오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항변은 당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업 상태가 된 그는 이 기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부터 1968년까지 바르샤바 대학에 강사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에 영국 런던 정경대 (LSE)에 기회가 닿아 로버트 맥킨지 밑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에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포괄적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의 그 첫번째 주요 저작이 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유지했고, 이러한 이행이 초래한 시민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그러한 속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체제의 불안과 자본에 종속된 정치의 문제들을 규명하는데 온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가 출간한 논저들은 거의 30여권이나 되었으며, 이것들의 공통된 주제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근대성, 소비주의, 도덕의 성찰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quid Fear"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역은 2009년에 이뤄졌으나, 이번 판본은 사실상 개정판으로 최근인 2025년 4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유명한 모 북튜버의 소개글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김호기 교수가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지 못해서 그런 제한된 인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바우만의 이 책은 그저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논의를 담은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이 쓰여진 2005년 당시 대표적인 뉴올리언스를 비롯, 미국 남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촉발된 미국의 재난 안전 대비가 아주 극명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여기에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볼 수 있는 마이클 D. 브라운이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이었는지 여실히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재앙이 어떻게 전세계 성공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이런 맥락으로 바우만은 서장에서 정치학자 존 던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 "이기주의적 질서 시스템"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허리케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모조리 빼앗긴 사태에서, 미 연방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와 더불어, 한 국가에서 참혹한 재해에 이르러서도 왜 백인과 흑인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가를 저자인 바우만도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회학자들 역시,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능력과 배짱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반대의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합니다. 후에 5장에서 바우만은 "현대 민주주의 발전은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유발하는 잇따른 원인을 없애거나 제한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기심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의 '보모 역할'에 그쳐, 오늘날 벌어지는 '병든 사회 국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부나 사회가 더 이상 '보모'로 자임할 수 없다던 과거 마가렛 대처의 발언이 오버랩 되는 것은 그저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인간성의 발로에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듯, 두려움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일전에 토머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사회 계약의 측면에서 증명했기에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에서 불을 지펴온 계몽주의가 비로소 태동하여,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등장 속에 무엇보다 계급주의적 권력과 사실상 기형적으로 존재했던 과두제가 '다수에 의한 지배'에 의해 어느 정도 타파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의 성과는 몇 문장의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진행의 맥락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모두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고, 스스로 삶의 온존을 위해, 가능한 충분히 그 자원을 제공 받을 권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바우만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좀 더 수월하게 확장될 수 있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이행'의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과 그것에 기반한 아이디어 전반은 지금까지 철회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바우만은 5장에서, "그동안 사회가 유발한 두려움에 대항해 오랫동안 투쟁한 결과 실업, 장애, 질병, 노령 등 개인이 겪는 불행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보장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고 서술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 국가'라는 미명하에, 그동안의 체계를 뒤엎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폭로하는데요. 일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전세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행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 경제 체제의 지배적인 역할과 기능을 한 체제는 결국 소수 계층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을 둘러싼, 소위 특별한 이해 관계의 연합으로 '특권화'가 되었다고 여기 그의 논증을 통해, 여실히 비판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기존의 노엄 촘스키조차도 비판했던 내용이기도 한데요. 어찌됐든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사회적 역사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이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선 부분과 관련해 여기서 인용된 맥스 헤이스팅스는 "가진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세계화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업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전히 동조하고 있고 (2008년 악몽과도 같은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이 숱하게 경고했던 바대로,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수적 피해'도 사회가 무조건 감당해야 되는 몫으로 강요 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 부수적 피해에 아랑곳 없이, 자본주의로 미화된 자아 실현, 소비주의, 능력에 따른 분배 등은 외형적으로 심지어 노동자들조차 거부할 수 없게 만든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건전한 제휴는 이미 철회된지 오래이고, 어기서 드러나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지식인들이 스스로 역사의 노정에 놓여 있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면 사회학이 밝혀내어 결국 병폐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 일련의 논의들이 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주제여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 글에서도 '사유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비판 의식을 보이지 않는 지식인들이야 말로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가 캔자스에서 규명한 일반 노동 계층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실종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 반기는 일이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결국 이러한 사례가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2장에서 보이는 바우만의 일관된 논증은 작금 우리 세계가 보이고 있는 패착과 그로인한 수많은 '시민들의 불안'이 결국 일정 부분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바우만이 이 역사적 과정의 인과를 무시하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책임의 다른 주체인 권력과 그것을 맹종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이익을 건네주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함께, 추동한 이 체제의 문제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첨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우리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사유'를 잃었으며, 인간의 직관이 충분한 사유에서 비롯되지 않고, 나아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탐구하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숙고한 '진리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철학적 테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찬가지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파시즘이 초래한 절망스런 교훈에 대해 후세의 우리가 충분히 반면 교사를 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저변에 깔려 있는 '불안'을 매개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엘리트 관료들과 나날이 소수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적 민주주의의 엄혹한 모습을 짚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계로 과거 조지 W. 부시가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과 그것을 위해 움직인 정보 당국, 그리고 미국 사법부의 FISA가 법에 근거한 비판적 검토 없이, 비상시기라는 이유 만으로 당국과 협업 했던 점은 무엇보다 법원이 시민의 자유에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가치이고, 이 자유를 무엇보다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최후 보루는 체제 내에서 어느 기관보다 사법부라고 지칭할 수 있겠는데요. 법의 기본 원리를 떠올려 본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장 이후, 바우만이 짚어내는 바와 같이, '이기심의 권력화'에 있어 과연 우리 사법부는 마지막 방패막이 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바우만의 이런 회의는 안보 불안마저도 이득으로 삼을 수 있는 자들과 구축된 조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안보 불안과 시민의 자유, 기본권이 대립하게 될 때 과연 민주주의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하게도 말이죠.

사실상 이 시대의 중요한 맥락인 '현대의 이성'이 바우만의 일관된 평가대로,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하는 데 특히 적합하고 명민하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규범과 이 현대적 이성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에 더해 현대적 이성이 결국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 유지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적용받는 '동일한 규범'이 거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집중된 자원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법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우만의 확장된 논의대로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다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스스로 '초월적 이성'이 이기적으로 작용되는 세계 체제, 또는 계급적으로 배타적 사회 규범이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일독했던 이안 브레머의 논의와도 아주 유사할 정도의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3장 역시, '재난의 계급화'와 함께 불안도 계급별로 재분배된다는 적나라한 논지를 바우만은 펼치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카트리나가 인간 폐기물의 처분을 도운 건 아닐까?"라는 노골적인 질문은 당시 희생된 대다수 흑인을 비롯한 스패니쉬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구축한 체제 - 때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듯한 - 가 결국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유인했다고 본다면 이는 그저 과장된 수사일까요. 

인간의 불안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놓고 본다면 그저 본성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결국 C. 라이트 밀즈가 거의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대 관료제, 혹은 엘리트 관료제의 출현과 더불어 우리는 더이상 사유를 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종속된 국가적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것으로 시민의 비판적 의무를 사실상 제한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 국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공화정이 사실상 과두제와 다름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도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곳에서 과두제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주 수월하게 본심과 외면을 포장할 수 있듯, 이 인간들이 구축한 사회 체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일반적인 정치의 측면에서 권력의 지배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외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과거에 볼 수 없던 후안무치한 정치가 비로소 드러났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간 정치에 내재되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뉴딜 시대'를 거친 과거에는 결코 꺼낼 수도 없었던 비상식적인 언사와 주장들이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3장에서 바우만은 포괄적으로 이 현대적 관료제와 정치의 세속화 혹은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발로'라는 공익과 도덕의 회피를 마찬가지로 함께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엘리트 관료제가 견제 받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정치로부터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이미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적 관료제가 과연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떠올려 본다면 이런 구조가 어떠한 원리 속에 놓여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다음 4장의 세계화가 초래한 '이 지경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러한 인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4장 서두에 바우만은 "지금까지의 세계화는 부정적 측면만 있었다"고 단언하고 사실상 그 '긍정적 측면'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합니다.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은 아직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며 일부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예측한다"는 말의 핵심은 거의 확실합니다. 이처럼 세계화가 더 이상 영토 주권과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반대 급부로 우리는 과도한 개방성과 그것의 알량한 이익이 결코 다수에게 향하지 않는 지난 수십 년간의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구축된 세계화를 마치 부정하는 듯 보이는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나 탈이민 대책은 거의 극명한 인지부조화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데요. 한때는 아니 거의 최근까지 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의 결과물이자 전세계 곳곳에서 이익 추구를 가능케하는 아주 합당한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지젝은 신자유주의가 쇠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바우만은 그와는 명확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화가 모두의 불안과 불행을 초래했다는 핵심 주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거의 신자유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실행된 중동에서의 전쟁, 그로인해 파급된 테러 위협은 "겉으로 보기에 선진국은 안전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2001년부터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가적 안보 함의에 따라,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사법적 대응으로 나타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보는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영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장면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세계화에 따른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축적, 그리고 그것이 소수에게만 향유되어 국가와 정부를 초월하는 특권 계층의 모멘텀이 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미국의 중동 개입, 911 테러와 전면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 말미에 바우만은 앞으로 다가오는 세기가 궁극적인 재앙을 맞이하는 시대가 되거나 혹은 지식인과 이제 인류 전체를 뜻하게 된 대중이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이를 실현하는 제2의 계몽주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간절한 바람처럼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미래에 전제 되어야 할 가정은 '우리가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자본주의가 지금의 안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인정과 경쟁의 지속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본주의는 소수의 특권층과 여기에 연계한 지식인들, 그리고 소수 중산층들만의 체제로 유지된다면, 역시나 제2의 카트리나와 같은 부수적 피해를 넘어서는 '인간 쓰레기 취급'과 같은 격리와 배제로 더 크게 왜곡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시민, 성찰 하지 않는 노동자,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맞물려, 이런 왜곡된 체제가 가속화 된다면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모두의 '불안'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파시즘과 더 나아가 과두제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목도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디스토피아적 예견은 결코 소설 속의 장면만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그가 죽는 날까지 남아있는 시민들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기까지 했는데요. 그 유명한 "우리가 모두 손을 잡고 다같이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개선이 없는 체제의 일방향성은 스스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더 이상 사유와 비판, 성찰이 없다면 말입니다.  

- 제가 그동안 읽은 많은 사회과학,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제학과 관련된 논저들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지식인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에둘러 표현하거나 경제적 기조의 한 방편으로만 해석되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실체를 언급하는 것이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글 4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 적시하는 듯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할 수 있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은 개인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거나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다니며 자신감을 가졌다가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을 잃고 ‘유연한 노동 시장‘이라는 리스크의 굴욕에 노출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고 자원을 재배치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유혹적이었다.

이성은 인간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이지만, 이성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지는 어떤 도구를 사용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제 몫을 하는 훌륭한 관료라면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한계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그 특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규범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겼고 실제로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에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아우슈비츠. 굴라크, 히로시마의 가장 무서운 교훈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괴물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발전‘이란 주로 과거와 현재에 발전 속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직접적이거나 ‘부수적인‘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행복 추구를 보편적 인권으로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적자생존을 외치던 정부의 관심과 정치적 의제에서 변방으로 쫓겨났다.

도덕적 판단을 폄하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를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한 탓에, 도덕적 판단의 힘은 상당히 약해졌다.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파시즘, 테러리즘 같은 위험한 부산물을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에 발맞춰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위성 기구들과 함께 펼친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어티는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사법부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진보적 이상주의자들과 의도는 좋지만 그와 비슷한 착각에 빠진 사람들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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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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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그레이엄 그린은 1904년 영국 허트퍼드셔의 버크햄스테드 기숙학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사감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넷째로, 남동생 휴는 BBC의 사장이 되었고, 위의 형인 레이몬드는 저명한 의사이자 산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찰스 헨리 그린과 모친인 메리언 레이먼드 그린은 사촌 지간으로, 그린 킹 양조장 소유주 및 은행가, 정치가를 아우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린은 캠브리지셔에 있는 삼촌 그레이엄 그린 경의 스턴 하우스에서 보내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대한 흥미와 본격적으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1910년 부친인 찰스 그린이 버크헴스테드 기숙 학교의 교장이 되자, 그레이엄 그린 역시, 이곳의 학생으로 수학하게 되는데요. 그의 기숙 학교 생활은 최악에 가까워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의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학부생 시절 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지만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기의 그린은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겪었고 대체로 혼자 지내는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잠시 저널리즘에 관심을 갖다가 1929년 첫번째 소설인 '내면의 남자 The Man Within'를 출간합니다. 이 작품이 비교적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요. 이후 그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격인,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내면의 갈들이 상충하는 주제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내는 시대적 자화상, 특히 냉전과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문제"를 써 나가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작품 활동을 기반으로 그린은 1961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3인중 한명이었으며,1967년에도 동일한 기준에 올랐고, 1974년과 1980년에도 후보에 고려되었으나 끝내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그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20세기 가운데 주요한 소설가들 중 한 명으로 꼽혔고, 25편이 넘는 소설을 포함해, 도합 67년간의 집필은 현대 세계의 인간들이 보여온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특유의 해학과 냉소를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권력과 영광'은 1941년에 영국,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작가에게 매년 수여되는 문학상인, 호손든 상을 수상했고, 다른 작품인 '사건의 핵심'은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그리는 1968년에는 셰익스피어 상을, 1981년에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The Quiet American"으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의 바탕이 된 본은 2004년에 출판된 제이드 스미스 판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3년 4월에 이뤄졌고, 번역은 안정효 선생이 맡았습니다.

극 중에 몇 번이나 '한국 전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 이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베트남 독립 전쟁의 시발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극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적 배경으로 읽혔습니다. 극의 주요 화자이자 주인공인 토머스 파울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 대한 야욕, 즉 철지난 제국주의의 허상을 부여잡은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 파견된 종군 기자입니다.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지난 대전에서 간신히 국체를 지킨 프랑스 공화국의 현실을 이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화두였던, '사회참여적 지식인 담론'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자신의 마음 내부에는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과 그리고 삶과 스스로의 모습을 무척이나 냉소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결혼의 실패'라는 문제와 그 귀책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소위 '자유 연애'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여러 사람의 입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유 연애 이면에는 도덕적 비난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본국과는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 파견을 나온 상황에서도 그는 '후엉'이라는 미모의 베트남 여성과 동거중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던 베트남 여성들은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는데, 그녀를 만난 초기에 파울러는 이것을 고민합니다. 과연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곁에 있는지를 말이죠. 이 때의 베트남은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토호 군벌, 그리고 반군 등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라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수많은 민간인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어디에서든 보장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후엉과 같은 베트남 여성은 이 혼란스런 시기에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할 수 있는 '보장'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요. 여기에 경제적 보장이 불확실하고 또한 정치적 불안기였기에 프랑스 식민 정부와 그 군대의 존재는 베트남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주변을 맴도는 유럽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이죠.


극을 이끄는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올든 파일은 명목상 미국 영사관에서 베트남 지원과 상무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관료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체는 CIA 요원입니다. 그는 저명한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동아시아에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고 있던, 극 중에서 허구적 인물인 '요크 하딩'의 추종자이기도 했는데요. 파일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프랑스의 패착이 바로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인식하고, 이런 정치적 혼란이 결국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 시대 여타 지식인들의 공통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파일은 특유의 이상주의적이면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면모, 매사를 신중하게 말하는 언행을 보이는 등, 그레이엄 그린이 이 미국인이라는 캐릭터에 들인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매큐언의 '이노센트'에서 보였던 영국인 특유의 미국인들에 대한 서사는 그린의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당신들 유럽인들과 우리 미국인들은 다르다는 차별화된 인식과 자신들이 전세계를 위해 분명 일을 할 수 있다는 일련의 자신감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파일이 프랑스와 같은 구대륙 국가들이 보이는 철지난 인식과 보수주의적 관념을 비판하듯, 마찬가지로 여기에 등장하는 프랑스인들과 앞선 파울러 역시, '아메리카', '아메리칸'이라는 극명한 단어로 이들에 대한 이질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파일을 가리키는 '조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례적으로 이 작품에서 5번 이상이나 등장하는데요. 이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때론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한발 물러선 채로 객관적인 듯 아니면 중립적인 듯 말하지만 뒤로는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식의 서사들 말입니다. 이는 "말을 잘 꾸며내는 미국인들을 쉬이 믿지 말라"는 금언이 생각날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작고한 그린이 쉽게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파일이 벌이는 그 '수작'을 보자마자, '통킹만 사건'이 바로 뇌리에서 떠올랐습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는 베트남 내부의 권력 공진을 꺼낼 필요도 없이, 그 이전 시기의 베트남은 파울러의 말마따나, "봉건시대'와 다름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돈에 따라 베티밍(혹은 베트민)과 정부군에 오가는 '테'장군의 존재나 카톨릭과 여러 종교를 뒤섞어 만든 토착 종교의 소위 교황이라는 자 역시, 정치적 술수를 부리고 심지어 사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파울러와 같은 종군 기자들은 베트남에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질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가운데서 '제3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 파일의 계획(아니면 미국의 작전)은 그저 민간인의 희생만 초래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미국이 파트너를 고르는 능력은 극히 평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고,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거의 확신하는, 이상주의자의 순진하고 나약한 '정의'는 결국 이 베트남에선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파일의 인물상은 작가 자신이 명백하게 의도한 인물 조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시대의 역설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낳는다는 오래된 옛 이야기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처칠의 제2의 대영제국 건설이 사실상 루스벨트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영국은 종래의 식민지 운영이라는 모험을 하기가 더 곤란해 집니다. 프랑스 4공화국 역시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요. 곧 이어지는 수에즈 침공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그레이엄 그린은 여기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차례 등장시키며 베트남인들에게 왜 저런 구호가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바로 이어지는 서사와 프랑스 식민지 군과 베트남 반군과의 전투를 통해 여실히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그동안 미국이 이 민주주의라는 대의명제를 들어, 타국에 사실상 개입해 왔던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내법 조차 어기는) 불법적 행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명분이 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린이 폭로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편견과 그것을 내면화 해 느끼는 우월감은 결국 베트남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역사, 종교, 문화를 통틀어) 전형적인 식민지주의적 폭력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느 민족과 국가를 미개하다고 인식하는 점은 그 저변에, 이 지역 전체를 관리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그저 최선의 길이며, 이들의 삶에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식민지 경영의 참모습과 같은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그린은 여실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에서 당시 베트남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후엉과 하이 자매의 거의 매매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몰이해에 가까운 극단적인 서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도 민간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설명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놓인, 어쩌면 성 노리개로 불러야 될 정도로 이들이 처한 상황이 실로 녹록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북베트남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기질이 다르다는 점도 이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저는 "베트남이 무너지면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위태롭다"는 극중 서사에 얼마간 집중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냉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아마도 그런 연유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겠지만 "중국인들이 베트남 반군을 돕고 있다"는 묘사도 그렇거니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문맥상에만 이해될 평범한 일만은 아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념적 대립 한 가운데 놓인 민족의 안위는 물론, 이들의 일상의 삶조차, 정말로 위태로운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글 말미에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데요. 극 중에서 빵 한 조각을 미처 먹지 못하고 죽은 소년의 시체를 적은 문장을 더듬어보니, 전쟁의 원인은 결국 누군가의 탐욕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그가 단골로 삼는 또 다른 주제였는데 -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하여 그가 일갈하는 확고한 관점들은 정말로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보다 살해되기 전에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었던 그의 진짜 활동 배경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하여 사실대로 자세히 알렸다가는 영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가 크게 틀어질 터이므로 공사로서는 매우 언짢아할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고, 단골 코카콜라 가게와 휴대용 의료 장비와 지나치게 큼지막한 자동차와 별로 신식이 아닌 총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 아메리카 패거리 모두에 대하여 짜증이 치밀었다.

베트남은 중세 유럽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족들의 반란이 준동하는 나라였다.

이 전쟁에서 유럽인의 얼굴이란 일종의 혜택이었으므로, 일단 유럽인이라면 적의 첩자이리라고 의심 받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 밑으로 한입 물어뜯었지만 미처 먹지 못한 빵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전쟁이 정말 싫어.‘

그러면 파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인들은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지만 아메리카는 중고품 헬리콥터조차 보내주지 않는다.‘라고 떠들어 대겠고요.

그 질문은 민주주의와 명예에 대한 개념을 영국과는 다른 시각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물려받는 미국인들의 대단히 단순한 심리 세계에나 어울리는 명제였다.

독일군 공습이 벌써 증명한 바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겁에 질린 상태로 살아갈 순 없으므로 일상적인 직장 생활과 우연한 만남과 막연한 불안감이 폭격처럼 이어지는 와중에도 누구나 개인적인 두려움을 잠깐 잊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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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푸른빛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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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는 1897년 9월,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빌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조제프-아리스티드 바타유로 그 지역의 세금 징수원이었고, 모친은 앙투네트-아글라 투르나르드로 비교적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1898년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랭스로 이사하고 그곳의 유서 깊은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부모님이 행한 세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별한 종교적 자각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하지만 1914년부터 약 9년 동안 누구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됩니다. 이때 바타유는 잠시 사제가 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고, 실제로 가톨릭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후 바타유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École Nationale des Chartes PSL를 다니기 시작해, 1922년 2월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이때에 바타유는 러시아 실존주의자인 레프 셰스토프와 교류를 시작했고 동시에 학문적으로는 니체, 도스트예프스키, 플라톤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학업을 마친 그는, 여러 저널과 문학 그룹 창립에 관여하고 경제, 시, 철학, 예술, 에로티시즘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동시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비록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신비주의 옹호자로 비웃기도 했지만 미셸 푸코, 필립 솔레르, 자크 데리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 Bleu du ciel "로 초고는 1935년에 완성했지만, 프랑스 내 출간은 1957년되어서야 시도됩니다. 또한 국내 번역은 2017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앙리 트로프만은 어느 정도는 작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한 캐릭터입니다. 그렇지만 극에서는 상당히 자기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실제 조르주 바타유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면 여기의 트로프만은 비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등, 지식인의 터울을 두르고 있긴 하지만 세상에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프만은 화류계 여성이나 평범한 여성을 가릴 것 없이, 여자들을 희롱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나락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가 걸핏하면 내뱉는 '죽음'이라는 단어,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심각한 자기 비하에 빠지는 점도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인물 조성을 통해, 마치 시대적 허무를 냉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스페인으로부터 카탈루냐가 독립을 시도하는 1934년 10월, 그 즈음으로 여겨지는데요. 다만 소설의 극적인 요소를 위해, 바타유는 나치 독일의 시기를 후반부에 앞당겨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음울하고 어두운 편이며, 여주인공인 도로테아(약칭으로서 디르티)가 유럽에서의 전쟁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물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수위 높은 성적 묘사와 앙리와 디르티 간의 아주 노골적인 섹스신은 어떻게 보면 에로티시즘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절망적인 서사 가운데, 시대를 개인의 타락과 대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칼 마르크스가 투영된 소년이 몇몇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의미로 등장하고 다른 여주인공인 라자르가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에서 혁명의 투사로 그 본신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트로프만으로 규정되는 개인의 타락과 시대와 철저히 괴리된 인물상은, 아마도 조르주 바타유 본인이 실제로 겪은 시대적 절망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디르티는 트로프만으로 하여금 '순수함 속의 방탕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끊임없이 과도한 욕망에 몸을 맡기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녀와 트로프만은 끊어지지 않는 서로 간의 유대로 연결되어 있고 특히 디르티는 트로프만의 불확실한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을 분절시키는 그러한 '악'의 가운데, 그야말로 내쳐진 인물의 자포자기함과 극도의 자기파괴적 행동은 작품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그를 둘러싼 또 다른 두 여인이 등장하는데요. 앞서 진술했듯이, 라자르는 공산주의와 혁명에 전도된 여성으로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부르짖는 자들은 전부 유대인들'이라는 전형적인 인종적 요소가 마찬가지로 '혁명을 이해하는 한계'로 대치시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특히 트로프만이 라자르를 향해, 그녀야말로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삶의 지향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트로프만은 그런 라자르를 향해, 육체적으로 끌리는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그는 오늘날 애정이 전혀 없는 남녀간에 나눌 수 없는 진실한 고백들을 라자르에게 만큼은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내 자신이 라자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이 서사 속의 의도된 진술이라 할지라도 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디르티와의 그것 만큼이나 트로프만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라자르와는 다른 의미로 트로프만에게 중요한 여인이 된, 크세니는 가진 돈이 많은 상당히 부유한 여성이지만 따로 하는 일이 없이 바깥을 전전하는 여성입니다. 특히 여기 크세니는 작가인 바타유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자기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표징하는 인물입니다. 트로프만이 특유의 비틀림과 자기 혐오로 일관해, 보통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분명 질색할 남자지만, 아마도 여성 특유의 모성애와 아픈 그를 병간호하고 싶은 선한 의도와 일관된 애정을 견지하는 캐릭터입니다. 더욱이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혁명의 기운이 오를대로 오른 바르셀로나로 찾아와, 개인적 비극을 겪게 되는데요. 결국 서사의 분명한 전환이 되는 그녀의 희생을 통해,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재차 연결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그 짧은 시간동안 서로만을 향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바타유의 이 작품에는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여성의 성적 부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러한 구조적 요소는 극단적인 두 남녀의 파괴적 행위에 반하는 내면의 자기 연민과 처연함을 드러내는 쓰임을 갖고 있어, 단순히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의 전형으로 국한지어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 부조리와 악에 대한 트로프만의 자기 혐오적 이해와 그런 시대의 혁명과 계급 투쟁이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작가의 자기 고백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했습니다. 절정을 치닫는 디르티와 트로프만의 무덤에서의 섹스 장면은 죽음과 새로운 삶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엄청난 충격이기도 했는데요. (트로프만의 충격적인 성적 취향은 서사의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니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크세니를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프랑스 아방가르드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해줘야 할 것 같군요."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눈물이 뺨 위를 지나 입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내가 런던에서 디르티와 함께 저질렀던 온갖 추잡한 짓을 최대한 노골적으로 라자르에게 설명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라자르처럼 추하게 생긴 처녀들을 비웃고 경멸했다.

"그래요 방탕함이 그것으로 먹고사는 창녀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그 방탕함 때문에 그 여자를 고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과, 죽음과 관련되는 것을 혐오한다던 라자르를 결합시켜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너무 부자라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처녀일 뿐이었다. 크세니의 접시 앞에는 그녀가 늘 들고 다니는 녹색 표지의 아방가르드 잡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녀의 넓적다리에 입을 갖다대고는 흐르는 피를 빨았다.

난 역겹지는 않지만 파멸한 인간이었다. 원했던 대로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신열과 극도의 두려움에 지쳐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나 자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쓰레기였고, 내 자신의 악의에 운명의 악의가 덧씌워져 있었다. 언제나 불행을 내 머리 위로 불러들였고, 이제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외로웠고 비겁했다.

나는 앓는 내내 그녀를 그럭저럭 참아냈지만,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는 일이라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여자 쪽이 더 견딜 만하다. 매춘부들과 잠을 자는 데는 진저리가 나 있었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여자이지만, 프랑스대혁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스페인 노동자들 역시 대혁명을 이해하고 있다고.

결국 라자르와 관계를 맺고 있던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쳤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파리에서는 내가 사태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르셀로나에서는 사태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투를 벗어버리고 내 품에 안긴 디르티는 나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의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진홍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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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박만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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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존 네빌 케인스는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 과학 강사였고, 모친인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스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적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메우 사려깊고 세심했으며, 케인스 본인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요. 더구나 그가 이튼에서, 장학금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코칭 프로그램의 지원도 부친이 도맡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수학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1897년 케인스는 영국 버크셔 주의 이튼에 소재한 13세에서 18세 사이의 남학생들을 위한 수준 높은 기숙 교육을 제공하는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 고전, 역사 등 다양한 분양에서 특별한 재능을 드러냅니다. 또한, 1901년에 그는 수학 부문에서 톰라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02년이 되자, 케인스는 좀 더 수준높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합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요. 당대 가장 영향력있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셜이 그에게 강력하게 경제학자가 되라고 조언하지만, 반대로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윤리 체계를 포함한 철학에 끌리게 됩니다. 이후 학업을 마치고 케인스는 1906년, 런던에 소재한, 인도 행정을 총괄하는 인도 사무소의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알프레드 마샬과 아서 세실 피구가 개인적으로 지원한 경제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확률론'을 연구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1909년에 더 이코노믹 저널에서 세계 경제 침체가 인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기사를 발표하고, 이곳의 산하에 '정치경제 클럽'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연유로 1911년 케인스는 더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가 되고, 1913년에는 자신의 첫번째 논저인, "인도 통화와 금융"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후 요동 치는 유럽 정세속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1월에, 영국 재무부에서 공식적인 정부 직책을 맡습니다. 1919년이 되자 비로소 대전이 종식되고 이어지는 전후 처리와 관련된 영국 재무부 재정 대표로 케인스는 임명되는데요. 바로 그의 이 논저는 베르사유 평화 회의와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전쟁배상금과 관련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conomic Consesquences of the Peace"로 지난 1919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을 위해 쓰인 판본은, 1973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본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판은 2024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서두에서 혹여 글이 장황해질 수 있어, 케인스의 1920년 이후의 이력은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평론과 해당되는 비평에 따라, 케인스의 이 글은 꽤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인상받은 부분은 케인스를 향해, "당신 노골적인 친독파 행세를 하는거냐"라는 거의 인신공격과 다름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 베르사유 평화 회의의 결과로 나온, 독일의 징벌적 전쟁 책임은 사실상 카이저의 퇴임과 시작된, 독일 민주주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멸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오스트리아인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유화적으로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대다수 국민의 증오를 정치적으로 부채질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전을 다시 한번 답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베르사유 회의가 비이성적인 측면으로 치달은 원인을 꼽는다면,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의 독일 제국을 향한 프랑스인을 대표하게 되는 그 증오와 혐오의 감정, 그리고 계속 파행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우물 안의 이상주의자'였던 미 연방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정치적 무능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인들의 마음 속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카이저와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선포는 이 시점의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짓밟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연합국의 한 축으로서의 프랑스의 지위, 특히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국가의 총리라는 인물을 중재하지 못한 것은 유럽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전후 처리가 모두에게 패착이 되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이를 과거 역사에서 도출해 본다면 이런 평화는 결국, 케인스의 말마따나 "카르타고식 평화'라는 수식 자체는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되는 고결한 학식이라든지 종교적 신념 혹은 원초적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의 원천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의 막대한 채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 연방 대통령이라는 신분이라면 본인이 그리는 유럽의 미래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유럽(특히 서유럽)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적 이익을 따질 계재는 분명 필요했을 겁니다. 이것을 현실적인 측면이라고 본다면 윌슨이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그야말로 현실과 이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해야만 합니다. 물론 주요 강대국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수사가 매번 이성적이지는 않겠지만 특히 윌슨의 그 우유부단한 본성 자체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유럽 평화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점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는 다른 여타 민족들에 대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관점을 주장한 인물이 도덕을 부르짖지만 스스로의 웅변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로 일관한 것은 엘리트 정치인의 전형적인 무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베르사유 회의로 도출된, 소위 14개조 조항은 일반적인 맥락에서 '전쟁 방지'를 추인하고 있습니다만 명시적으로 알자스-로렌 지역과 관련한 1871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육상, 해상, 공중에서 연합국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가해진 모든 피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추가 주장'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조항 문구 등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폴란드의 독립이 공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가 왜 동맹 관계(물론 서류상의 동맹이지만)에 이르렀는지, 어느 정도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과거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곳곳에 넘치는 혁명의 기운이 폴란드인들에게 자신들의 독립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변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대, 그리고 이들의 동맹이 추후에 자신들에게 어떠한 여파를 끼치게 될지 고민한 영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조항은 그저 허망한 정치적 결과로 남은 국제 연맹 창설의 의의였습니다.


케인스가 이 글 4장에서,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듯, 독일은 과거 농업 생산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영국을 위협할 정도로 2차 산업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루르 지역, 고지 실레시아, 자르 분지의 풍부한 탄전을 기술적으로 훌륭하게 개발하여, 놀라운 산업적 성취를 얻은 것인데요. 조약에 따라 앞서 언급된 루르 탄전이 15년 간의 국제연맹의 관리 끝에,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석탄과 철광이 기반이 된 산업이 국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독일 역시, 탄광을 통해 비약적으로 산업 개발을 달성한 후발국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석탄은 국민들의 난방과 취사를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케인스는 무엇보다 '독일의 내부 수요'에 대해 주목합니다. 이는 독일 국내의 석탄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연합국 배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주요 논점은, 앞서 대전에서 독일이 끼친 연합국의 민간인 재산 피해에 대해 이것을 연합국이 피해 배상에 나선다면, 이미 경제적 붕괴에 이른 독일 경제가 끝내는 독일인들의 사유 재산을 통해 이를 갚을 수밖에 없다고 피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적 연원을 갖고 있는 서유럽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게 일반적인 정의의 입장에서 독일인들에게 합당한 것이냐는 점을 되물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독일을 향한 모호한 전쟁 배상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이라는 문법을 내세워,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입힌 피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이 아드리아해에서 입힌 피해와 관련해 과연 독일이 배상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케인스는 이렇듯 주장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요망한 전쟁 배상 책임이 "독일이 그 지급 능력의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 청구 총액에 대한 과학적이고 정확한 추산의 기초가 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프랑스의 의도대로 이 사악한 독일이 후에 더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이참에 아예 이들을 회생불능의 상황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법학자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국가가 전쟁을 통해 감당해야 될 '배상'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와 그렇다면 국민들 모두가 이 배상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는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의 한계를 명시할 어떠한 이유가 있는지 거의 무지와 가까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반 독일 국민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윌슨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한 다른 정치인들도 갖고 있었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케인스는 여실히 밝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소극적인 정치적 접근은 당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가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무능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전쟁 배상과 조약 협약에 따른 영국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그 여론과 다음 권력을 위해, 다시금 표를 얻어아먄 하는 결단 사이에서 로이드 조지 역시, 무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케인스가 당시 영국의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는 '총리가 자초한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독일로부터 전쟁의 전반적 비용을 확보하겠다는 선거 공약은 역사상 영국의 정치인들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가장 심각하고 무모한 정치적 행동 중 하나"라고 케인스는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영국 수상은 이러한 국내외적 기대감과 이를 조정하는 정치적 무능에 빠져, 독일과 체결할 조약에 불공정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경제적 근거를 내세우고, 윌슨 대통령과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당시 엘리트 정치권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관되게 독일의 배상금 지급의 불가능성을 강조한 케인스는 현재의 붕괴된 독일 경제와 산업 기반 시설이 실질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문제에, "독일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독일 마르크화는 평가절하될 것이고, 이 평가절하는 독일의 미래 배상 전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독일의 신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독일 마르크화가 적정 수준 이하로 평가 절하된다면 그 자체로 유럽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는 독일 경제를 회생불능으로 만드는게 미국과 서유럽에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추정되는 독일이 갚아야 할 배상금이 50억 파운드로 일부 제시되기도 하지만, 케인스는 이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연합국 측이 독일에 요구할 배상금이 실제적으로는 80억 파운드가 초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합니다. 이것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 붕괴를 자의반 타의반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은 이전과는 다른 산업 발전의 규모로 시민들에게 있어 삶의 풍요로움이 증대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이 미래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가 점차 대세가 되기도 합니다. 인류의 이런 진보가 서로간에 더이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긍정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생산 수단의 발전과 그로 인한 소비의 증대, 시장의 발전은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통해,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경제학자들의 완고한 아이디어와도 꽤 맞닿아 있는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참혹한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순진함을 깨뜨렸고 전후 유럽인들의 사고관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대전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의 아주 지독한 인명 경시는 몰론이거니와 자신들이 겪은 전쟁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케인스는 과연 앞으로의 세대가 살아갈 유럽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주지되는 결핍과 분노,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와 교묘한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미래의 유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전후의 대책에 있어 그만의 해법을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기도 하는데요. 일종의 '처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은, 전반적인 이 '평화조약 개정'을 제시하고, 최소한이나마 독일 산업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그는 조언합니다. 특히 이러한 관계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의 서로간의 이해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당시 요건으로도 꽤나 이상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이합집산에 놓인 유럽 정치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요. 조약이 철저하게 이행되었던 그 결과는 그것이 주된 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음 대전을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인들이 바랬던 연합국의 최소한의 배려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독일의 패전 책임은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허위와 다름없는 발언과 국가간 이해관계에 매몰된 국제관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안일주의에 기반한 전후 체제는 다시금 인간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 국내의 식량 수요에 따른 식품 수입이 연합국에 의해 전면적으로 용인되지 않아 대다수 독일 국민들이 기아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충격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전쟁의 범위 그 자체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종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 하더라도 패전국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누구보다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은 고정적 부와 자번 개선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부의 분배에서 존재한 불균등이었다.

다만 지금 나는, 불평등에 근거한 자본 축적의 원리는 전쟁 이전의 사회질서에서,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가 이해하던 의미의 진보 개념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원리가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좌우되며 이 심리적 상태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일인은 협박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협상에서 어떤 관용이나 후회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을 기회 삼아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도 서슴지 않고, 명예나 자존심이나 자비심이 전혀 없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프랑스와 클레망소의 정책은, 구질서는 항상 똑같은 인간 본성에 기초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므로 국제연맹으로 대표되는 원칙은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 1870년 이후 독일이 발전하면서 이뤄놓은 것은 모두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연함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비정상적일 만큼 내성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도덕적으로 자기와 동등하기를, 또는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주요 연합국 및 관련국 사이의 조약에서 확정될 국경의 범위 안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엄격히 존중한다. 독일은 국제연맹이사회의 동의가 없는 한 이 독립이 양도 불가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에 더해 독일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경우 향후 5년 동안 매년 최대 20만 톤의 선박을 연합국이 지정하는 형태로 건조해 연합국에 양도하며, 이 선박들의 가치는 독일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 총액에서 차감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채무 권한을 실현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이드 조지는 여러 조언자의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간극 뒤에 자신을 숨긴 채, 독일이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의 정확한 크기는 자신이 조국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다뤄야 할 미해결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이전에 영국이 엄숙하게 선언한 약속, 바로 그 적국이 무기를 내려놓을 때 믿고 있던 약속과는 다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을 자신과 영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

독일의 재정적 파탄이 너무 심해서 독일은행의 금을 제외하면 당장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상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독일을 한 세대에 걸쳐 노예 상태로 격하하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퇴화시키며, 한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서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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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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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미국 뉴욕 주의 서퍽 카운티의 헌팅턴에서 태어난, 에번 토머스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헌팅턴 인근의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인근의 앤도버에 위치한 사립 남녀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거쳐, 하버드 대학, 그리고 최종적으로 버지니아 대학의 로스쿨을 졸업합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었음에도 1991년부터 24년 동안 뉴스 위크에서 기자, 작가, 편집자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의 기자 경력은 뉴저지 북동부에 있는 더 버겐 레코드 The Bergen Record 에서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경력과 관련해, 특별했던 경험은, 1992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이츠가 에반 토마스에게 CIA의 기밀 파일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접근 권한을 부여했던 일입니다. 특별한 작가 경력을 더한, 그는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글쓰기와 저널리즘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작가로서의 이력으로 두 권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도합 11권의 단행본을 출판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Road to Surrender : Three Men and the Countdown to the End of World War 2"로 2023년에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원제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듯이 에번 토머스에 이 글은,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종적으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의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미국 전쟁 장관이었던 헨리 L. 스팀슨과 미국 육군 항공대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인 칼 앤드루 스파츠, 그리고 일본 제국 외무대신인 도고 시게노리, 이 3인의 행적을 통해, 일본이 종전에 이르는 길을 마찬가지로 짚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이미 인류 역사에서 참혹한 무기로 드러난 '맨해탄 프로젝트'의 코드명, S-1인 '원자 폭탄'과 이 인류 절멸의 폭탄이 어떻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는지, 그 정치적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자인 토마스는 앞선 스팀슨과 스파츠의 일기와 비망록을 비롯, 개인 기록을 검토했고, 일본 쪽 자료 역시 세밀하게 분석해, 작금의 이 책을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인류 최악의 대공황과 이후 두번째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서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매우 정력적인 인물로 그의 지지 기반인 뉴딜주의자들과 다수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대통령이었지만, 종전을 바로 앞두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초당적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 출신의 연방 대통령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으로도 귀족적 풍모와 자부심을 풍기고 있던 헨리 L. 스팀슨은 오늘날 공화당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물론 개인적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뛰어난 엘리트이기도 했는데요. 저자인 에반 토마스가 분석한 스팀슨의 개인 기록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쟁 장관이었던 그는 전쟁 상황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포함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했던 관료였습니다. 특히 스팀슨은 무고한 민간인 2만명 이상이 희생된 드레스덴 폭격의 효과에 크게 확신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게 될 신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뢰하지 못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저자에 의해 밝혀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그간 알려지지 않은 모습(정치적, 개인적 면모를 포함한)은 쉬이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민주당의 대중 영합주의자이자 열렬한 뉴딜주의자였던 동시에, 스팀슨에 따르면, "골칫거리이자 신뢰하기 꽤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데요. 또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각자가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지만 그 이면에 서로를 향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이는 스팀슨이 함께 일했던 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임 대통령인 트루먼은 제임스 F. 번즈 전 국무장관과는 막역한 사이로 그와 포커를 치며, 사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 의견까지 나누며, 특히 번즈의 조언은 그가 꽤 귀담아 들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다 포츠담 회담 중에 번즈가 트루먼과 스팀슨 사이를 사실상 방해했다는 풍문은 이들 간의 개인적 호불호 관계를 넘어서 꽤 심각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더욱이 트루먼 개인은 청렴했고 돈에 있어 상당히 거리를 두었지만, 캔자스 정치에 오랫동안 몸담은 그가 돈과 이권이 거래되는 상황에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기도 했던 처세술의 달인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 부패할 수 없는 자'로 알려졌던 막시밀리앙 로비에스피에르가 타인의 이익 추구와 권력 욕구에 대해 무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신임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닳고 닳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기존 정치 무대는 교육을 받았거나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을 그런 식으로 통달하게 만드는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트루먼 입장에서 스팀슨이 뉴딜주의자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애초에 느끼고 있었고, 공화당 출신의 귀족적인 변호사이자 도덕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스팀슨이라는 겸허한 인사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특히 전쟁 종식과 관련해 부득이한 민간인 살상에 있어 두 사람의 근본적인 도덕적 접근 방식 차이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에 스팀슨은 핵폭탄을 투하하게 될 그 전후 시점의 미국, 그리고 그런 미국의 "도덕적 위치"에 무척이나 고민하게 됩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누군가 원자 폭탄이 초래할 수많은 인명 피해의 정확한 수치를 제시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한동안 이 신임 대통령에까지 프로젝트는 기밀 사항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나중에는 트루먼 대통령도 "그 계획"에 대해 인지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당시 미군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있었던 일본군이 강제로 투입시킨 민간인들과 함께 벌인 처참한 자살 작전에 따른, 극심한 인명 피해로 그 여파가 정치권을 포함한 군부 모두에게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살 작전은 유럽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20여 개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들"이라는 본문에서 인용된 스팀슨의 우려스런 시나리오와 맞물려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군부가 일왕을 위해, 1억명의 일본 국민들이 미군에 맞서 옥쇄한다는 그 '일억옥쇄 一億玉碎' 저항론이 일본 군부의 허장성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왕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바치겠다"는 자살 특공대를 고려해 본다면 상상 만으로 끔찍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본을 빨리 종전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앞선 S-1의 일본 내 투하가 고려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스팀슨 역시, 시급한 종전과 더이상 불필요한 미군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민간이 희생이 초래될 수 없는 핵폭탄 사용에 대한 잠정적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가 매번 미국의 도덕적 위치를 고민하고 그 내적 갈등에 힘들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과거 부계의 뿌리가 조선에 있었던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그런 그의 가계까지 조사해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머스는 도고를 향해, "일본인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도고는 대학에서 독일 철학을 공부했고, 괴테와 쉴러, 유럽의 고급문화에 관한 토론을 즐기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공연히 히틀러의 나치를 악당이라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는 유별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일왕을 필두로 한, 신도神道 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군부가 우선되는 소위, 이런 국체國體의 보존이 지상 목표로 여겨지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즉, 일왕은 일본인들에게 그 자체로 신적인 존귀한 존재로 과거 야마토 문명의 적손이자 그리고 승계된 전통적 체제는 메이지 유신의 더할나위 없는 정치적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국체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미국 언론인의 시각이 꽤 인상 깊었는데요. 사실상 일왕이 군부의 꼭두각시였다는 점과 일왕 히로히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성을 보이고 있던 일본 군부 전체가 실상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신적인 관념의 일왕제와 히로히토, 이 양자가 필수불가결한 공생관계였다는 저자의 본질을 꿰뚫은 관점이었습니다.

이런 일본 내부의 정치는 정치와 군부, 주요 인사 6인으로 구성된, 총체적 권력의 '6인 회의' 였는데요. 이들의 정치적 기반은 매번 발생했던 고질적인 우익의 물리적 폭력과 군 내부에서 수차례 시도된 쿠데타 음모로, 정치적 구조에서의 정상적인 권력 체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군부 통제도 이뤄지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앞선 '6인'이 일왕의 성스러운 결단을 바탕으로 그 권력을 대행하는 정당한 권력이었는지는 정치 역학적인 면에서 다소 불명확하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체제의 기원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 그 특유 일본인들의 왜곡된 심상과 과거 쇼군 체제에서 비롯된 비상식적인 '숭무'는 결국 사회 전체를 왜곡하는데 일조합니다. 이런 정치 체제의 모순은 일왕을 신격화하고 그런 맹신의 신도 체제가 군부의 야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특히나 민간의 군부 통제를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1945년 8월 8일, 히로히토의 내각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당시 소련과의 중립 조약 유지에 모든 외교적 수단을 기울였다가, 스탈린이 만주로의 진격 결정을 그저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이들의 무능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책에서 아주 숱하게 등장하는 '일본인의 정신'이 패전을 앞둔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1억 명의 일본인들을 분사시키더라도, 자신들의 국체를 수호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일방적인 정신의 수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가 자신이 모시던 일왕 히로히토의 인간적 본성을 간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개인으로서' 히로히토는 군부의 과격분자들이 점차 소름끼치게 되었고, 도쿄에 미 공군의 소이탄이 쏟아질 때마다 자신이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옥죄는 그 극명한 정체성, 즉 이대로 계속 군부의 손아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과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은 에번 토머스의 입으로 재차 설명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여전히 일왕의 위에 있던 히로히토는 197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이 때 히로히토는 자신의 입으로, 미국과의 "영원한 우애"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그의 제스처와 몹시 상반되게도 1978년에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히로히토는 알게 되지만 이 전대 일왕은 결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문지상으로 익히 접하고 있었던, "일왕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답게, 전범들의 위패가 놓여 있는 야스쿠니에 참배를 할 수 없었다"가 진면목이 아니라, 그저 치욕스런 패전의 기억과 결국엔 십 수 년간 자신을 손아귀에 넣고 흔든, 그 시절 지독한 군부 통치의 기억과 그런 체제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묻힌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기 싶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평화를 사랑한 일왕의 본질이라는 측면은, 마찬가지로 대전을 면밀히 고찰한 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사실상 역겨운 일왕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을 겁니다. 

군부와 내각을 설득하여 최종적으로 일본을 종전으로 나아가게 만들겠다는 도고 시게노리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최종적으로 S-1의 사용을 전쟁 수뇌부가 결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투하 지점의 후보지로 일본의 옛 고토였던 '교토'가 고려되기도 했지만 스팀슨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되는데요. 그는 교토가 일본에게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옛스런 건물들과 문화가 있던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양심상 탐탁치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일왕의 궁이 있던 도쿄는 이미 막대한 소이탄 투하로 온전한 건물이 몇 채, 남아 있지 않은 폐허지가 되었기에, 군수 공장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른 도시들을 미 군부에서는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현지의 기상 조건도 함께 포함된 내용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칼 스파츠는 방사능 폭탄의 투하를 민가나 민간인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도시 외곽의 한 지점으로 삼고 일종의 경고성 투하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군부는 국내 여론에 있어 강한 종전 요구를 압박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전문가들로부터 민간인 희생이 대략 3만 내외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로 끝내 군부는 신무기인 '핵폭탄 투하'를 사실상 불가피한 일로 만듭니다. 또한, 두 기의 핵폭탄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의 제스처를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아 세번째 폭탄의 조립도 이미 승인이 되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앞으로 있지도 모를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군이 상륙하게 되어 초래될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 가능성을 인식한 미국 정부는 사실상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고려할 수밖에 없던 상화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결전에서 초래된 막대한 미군의 인명피해가 여전히 이들 군 수뇌부의 머리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선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행적을 통해, 빠른 종전의 방해자로 해석되는 육군대신 이나미 고레치카는 과거 일본의 군사 교육을 받은 초창기 우리 군 장성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왕에 대한 사적인 깊은 충성심은 차치하더라도 육군 내부의 신망이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라게이'라는 과거 유산의 신봉자이자, 실제적으로 중대한 위기 앞에 우유부단했던 인물입니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최소 10만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심이 어떻든 간에, 군부에 총력전을 부르짖습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과거 젊은 장교들에 의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이나미가 갖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여기에 그려지는 일본 군부의 내부 분위기를 짐작해 봤을 때, 실질적으로 군부내 다수 강경파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말미에 저자는 사실상 이나미가 '자신의 총아'라고 불리는 하타나가 겐지의 쿠데타 기도를 조장한 것이 아닌가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일왕의 충심에 배반했다는 이유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자신들이 강조하는 군부의 대의는 일왕을 정점으로, 종교 및 정치적으로 구축한 체제에 대한 종말을 용인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국체의 핵심인 일왕이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 사령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다는 게, 자신들의 영광스런 일본 제국에게 있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현실을 아득히 넘어서는 왜곡된 관념이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겠죠.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일본이 두 발의 원자 폭탄 투하를 맞고 USS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저에 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친미 국가인 우리 나라에게 이 '미국의 결단'과 그것이 초래한 국제정치적 영향에 대해, 진실을 위한 본질적 접근을 해보는 것이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분명합니다. 두 기의 핵폭탄 투하가 초래한 정치적 파급의 문제도 종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1945년 8월 초까지 일본 외교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소련의 참전을 막고자 했던 시도가 무산되어, 만주가 고스란히 소련군의 진공에 놓인 점도 역시, 일본 지도부의 종전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아마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스탈린이 실질적으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미 그리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분할 점령 시도는 미국이 쉽게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이미 새롭게 권력을 이어받은 해리 트루먼에게 스탈린은 점차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치적 신화처럼 트루먼이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을 통해,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를 가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동맹국이었던 불확실한 소련의 정치 권력이 남은 임기 내내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퇴임을 앞둔 스팀슨이 비망록을 통해 밝힌,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폭탄의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자는 발상 자체는 공화당 보수주의자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 일본 극우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만큼 메이지 유신의 그 맹목적 아이디어는 단순히 교묘히 숨겨 놓은 개혁의 이미지가 아니라, 예전처럼 다수 국민들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두고 전국 시대에 특수 계층으로 군림했던 사무라이 지배 체제의 그 단순하고 폭력적 기반에 저들이 매료된 근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금의 일본 정치의 전통적 근원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그렇기에 일본 극우와 현실 정치권이 매우 지근거리에서 서로에게 야합하게 되는, '고래로 이어진 동질감'은 민주주의 체제 안의 지지층과 정치권이라는 단순한 양자 관계로 치부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런 진술 가운데 상당히 놀라웠던 부분은 그 당시에도 미국 정치권이 이런 일본 내부를 여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국체의 보존'이라는 미끼로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그 과정 자체가 미국에서 이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과거 일본 제국이 추동한 대동아 공영을 이유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인명 피해가 2천만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투하된 핵폭탄 두 기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심지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 참혹한 전쟁의 수괴라고 볼 수 있는 히로히토가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린 그 '종전의 결과'가 단순히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기반한 문제로 쉽게 치환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역사가 그만큼 자신들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의 민도民度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까지 합니다. 역사를 배반하는 식의 아주 비극적으로 말이죠.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폭탄의 실사용에 대해 불길해 하고 심지어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면서도 그가 임기 내에 사실상 초안한, MAD Mutual Assured Destructrion, 즉 핵무기에 의한 상호 확증 파괴를 확립한 인물로 분석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정치인의 도덕적 근원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어쩌면 "인간의 역사와 투쟁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처음 접하게 된 내용이지만, 일본도 전쟁 중에 핵폭탄을 제조하려고 어느 정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14일 늦은 오후 (일본 날짜로는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도쿄에 세 번째 핵폭탄을 투하할 수밖에 없다고 동맹국인 영국에 전했다.

7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히로히토 천황은 그를 신으로 숭배하는 궁정 신하들에 의해서 장막에 가려진 채로 여전히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존 매클로이는 나중에 상관(스팀슨)이 핵폭탄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매클로이는 이렇게 답한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예의 그 잔학행위는 독일 정부가 살인과 질식 등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수많은 러시아인과 폴라드인, 유대인, 기타 그들이 보기에는 살 가치가 없는 집단을 몰살하려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스팀슨은 그로브스에게 교토의 세월을 뛰어넘는 찬란함을 다소 상세히 설명한다.

어쨌거나 소련은 나치의 지배에서 막 해방된 폴란드에 민주주의를 허용하겠다는 얄타 회담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25년도 더 지난 1945년 7월, 대통령직을 수행한 지 3개월째에 덥어들 때 트루먼은 오키나와 섬의 치열한 전투로 인한 미군의 사상자 숫자에 소름이 끼친다.

중간급 장교들이 혈맹단 따위의 이름으로, 주로 대령이 중심이 된 비밀 결사를 만들고는 일본에 봉건 시대의 영향을 되찾아주려는 자신들의 고귀한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자라면 누구든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아나미)는 정신적인 순수함에 관한 격언을 들먹이며, 손에 잡히지 않는 지정학을 논하느니 차라리 죽도를 들고 싸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차를 타고 뼈대만 남은 베를린을 둘러보고 얼빠진 생존자들을 목격한 스팀슨은 핵폭탄이 일본의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트루먼과 마셜은 소련이 너무 많은 영토, 즉 만주와 한국, 어쩌면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일본에 항복을 강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웰러스틴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부 장관이 너무도 강경하게 교토가 민간인 거주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곳과는 달리 히로시마는 "순수하게 군사적인"표적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트루먼이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는 것을 내키지 않아하던 아이젠하워의 태도는 스팀슨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크렘린의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를 만나 고노에 공작의 강화 임무를 논의하기로 한 시간인 8월 8일에 일본이 점령한 만주를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영국은 주간에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의 표적에 마구잡이로 폭격하는 방식을 그만두고 자신들처럼 야간에 "구역폭격", 즉 "주택 파괴"에 나서서 독일군의 사기를 꺾자고 미국에 집요하게 권했다.

스파츠는 아널드에게 자신은 민간인의 대량 살상을 초래하는 도시 폭격에 반대한다고, 늘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가와베 장군은 일본이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했으나 너무도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포기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고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의 수용에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애초에 가망 없는 짓이며 미국이 즉각 이를 거부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트루먼의 기본적인 준거는 친절한 신사의 시골 농장이 아니라, 유력한 정치인들과 상원 휴게실이다. 뒤통수를 맞을까 경계하는 대통령은 히로히토를 못된 전범으로, 일본 국민을 교활한 자들로 본다.

매클로이의 일기를 보면, 스팀슨은 일본의 강경파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어서 추가 핵폭탄 투하까지 포함하는 더욱 강력한 조치가 요구된다는 현실에 대면한다.

1978년 히로히토는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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