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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5
케네스 미노그 지음, 공진성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7월
평점 :
뉴질랜드의 북섬인 팔머스턴 노스에서 태어난 케네스 미노그는 어려서부터 호주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남학생을 위한 중등학교인 시드니 보이스 고등학교와 호주 시드니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시드니 대학 (USYD) 에서 수학했습니다. 1950년에 예술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당시 시드니 대학에서 언론의 자유, 세속주의, 반공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존 앤더슨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이후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미노그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와 이집트의 포트사이드를 거치며 런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잠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한 후에 미노그는 런던 교육청에서 18개월 동안 대체 교사로 일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게 됩니다. 다만, 영국 정경대 (LSE) 에서 석사 논문을 거절 당하자 그는 좌절하지 않고 같은 대학의 경제학부 야간 과정에 등록하게 됩니다. 졸업 후, 그는 웨스트 컨트리에 있는 연구 대학인 엑서터 대학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1956년 마이클 오크숏의 초대로 런던 정경대에서 조교수로 시작해, 런던 정경대에서의 이력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후, 명백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보수주의적 맥락에서 자유주의 역사관을 신념으로 견지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런던의 우파 싱크탱크인, SAU (Social Affairs Unit)의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미노그는 채널 4에서 진행하는 자유 시장 경제에 관한 6부작 TV 프로그램에도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에 그는 호주 정부가 수여하는 '호주 연방 100주년 기념', 센터 너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6월, 갈라파고스의 산 크리스토발 섬에서 주최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의에 참석한 이후, 당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 A Very Introduction"으로 지난 199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케네스 미노그의 이 글은 원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일반인들을 위한 '정치'에 관한 개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논증되는 주요 배경은 대체로 유럽과 미국으로 한정하여 서술됩니다. 짧게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연원과 이후, 중세까지 기독교가 주도한 정치적 분화, 그리고 근대의 자유와 민주주의, 전체주의적 망령을 돌아보고, 지금의 정치가 미래에도 온전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들을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몽주의자들 혹은, 합리주의에 인도된 많은 정치적 관념들은 그것의 철학적 기원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로마의 그것도 그리스인들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고대의 인류가 한정된 사회로 구축된 '국가'라는 관념에 얼마나 신비로운 이상을 부여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아니 합리적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는 그것의 정치적 유산이 실제로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앞선 기본적 서사보다 서두에 미노그가 필연적으로 지적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과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그런 연유로 12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그에게는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설득력과 근거가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몇 세대에 걸쳐 세력을 확장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이데올로그화에 대한 미노그의 비판 역시, 스스로가 오랫동안 보수주의 (혹은 우파) 학자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논증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이성적인 판단을 보이고 있는 점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4장에서 미노그는 오늘날 우리가 여실히 인지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기독교에서 유추된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유구한 역사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독교가 종래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이성의 눈을 뜬 인간'의 관념의 시작과는 다소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 볼 수 있는 '법의 필요성'이 중세의 영주와 기사들간의 봉건 계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16세기 역사에서 극적으로 '토머스 크롬웰이 법이 어떻게 전제 정권을 초월한 시급한 문제인지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로는 비참했지만 그 파국의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정치철학적 영감'을 안겨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라는 가치는 법의 범위에서 비로소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노그는 12장 이후의 논증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자유의 본질, 즉 "자유의 역설은 자유가 오직 우리가 이미 가진 소유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주목할 만한 요점은 어쩌면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에 대해 조금 에둘러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평등은 다소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진정한 평등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하며, 그것의 이상 자체는 오늘날 우리가 구축한 사회에서 현실적으로도 가능한지 매번 상대방과 다투게 마련입니다. 특히, 개인의 선호, 선택의 자유 및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라는 이름의 지배적 체제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평등과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은 역시나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일부 세인들이 평등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누명'을 덧씌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치의 발견과 그것의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배경이기도 한, '자기 이익의 추구'는 미노그가 다소 회의적으로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철학적으로 대치되는 관념이기도 합니다. 이 글 8장에서, 정치인들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이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의 폭로와 그런 와중에 우리의 공익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 치열한 논쟁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만, 그가 말하는대로, '공정성의 관념'은 많은 변주가 존재한다는 분석 자체는 저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저자는 자유 시장이라는 큰 틀안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상이고, 그런 인식의 범위에 심지어 정치인들도 비켜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요. 다만, '인간의 합리적 이성' 만큼이나 깊게 다뤄지지 않는 아니 인간의 불확실성 만큼이나 그가 회의적으로 접근하는(소위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도덕적 본성'에 대해, 모두가 한결같이 원하는 '정의'의 존재 의미를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결부지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 자체가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대로, 보다 합리적 이성의 숙고가 전제되어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세계'의 시민들이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사회의 기본 정의 관념이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미노그의 언급은 이 지점에서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그의 낯뜨거운 표현처럼 '자유 세계의 정의는 세간에 알려진만큼 문제가 크지는 않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겁니다.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노그는 사회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쪽이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부류가 극한 갈등에 놓일 때, 어쩌면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정의를 단순히 복리에 준하는 어떤 이득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인식의 파급은 정의 담론 자체를 뒤집어 엎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장의 초입에서, "인간이 천사라면 아무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는 단언과 비슷한 그의 가정은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善)에 이르는 길은 완만하지 않다는 지난 금언과 같이, 정의 역시 우리 정치의 토대이자 근간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정치관념적인 의미로 국한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현실과 이상의 명백한 괴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에서도 심심잖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기의 미노그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홉스는 때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신중하게 펼쳐냈습니다. 물론 그의 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법의 지배하에 누리는 자유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정확한 정의라고 판단됩니다. 이에 저자인 미노그는 지난 세기의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동일시 했던 인식을 다시금 언급합니다. 우리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 역시 그러한 궤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자유와 민주주의가 가히 한 몸이라고 강조될 필요는 없겠지만,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자유'란 여러모로 '소수만의 자유'로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더욱 그렇겠죠.) 제가 몇 번이나 인용했지만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용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읽히는 10장 후반부의 논증 가운데,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일정한 종류의 이상을 누릴 있다"는 문장의 본질은 이미 전술 되었던 문화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특별한 계급'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전통의 수호자들이나 기존 사회 구조적 체제를 떠 받들고 사회를 보호하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저는 저들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경제 엘리트들과 야합하는 과두제에 대해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이해 관계를 함께한 역사를 떠올려 본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당히 뿌리 깊은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은 아마도 쉽게 예상되기도 합니다. 이미 일전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가 계급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강조했으니 말입니다. 흔히 '오프 더 레코드 상'에서 일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와 과두제가 혼합된 정치체라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는 소위 자기 이익적 관념은 어떻게 보면 힘 있는 자들의 우선 순위라는 내심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법의 지배를 뼛속 깊이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이를 전혀 용인할 생각이 없다는 점은 이 글에서,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민주주의와 과두제의 혼합은 그것이 개인의 신념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민주주의 정체와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과 사뭇 역설적인 모습이라 봐도 그리 과한 상상은 아닐 겁니다.
끝으로 과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에 참여한 '학자'가 말하는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개인적 의문이 그동안 있었습니다. 만약 헨리 키신저를 떠올려 본다면 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굴절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정치적 관념이 지배적인 다수의 기득권 세력에게 민주주의와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도 큰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기존 정치와 과거의 유산을 다루는 많은 글들이 진실로 냉혹한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계몽주의적 유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기성 정치에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뻔뻔한 얼굴 정도는 이제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느껴지니 말입니다. 결국 미노그는 자신의 글의 결말에서, 다소 의미심장하게 도덕의 재부상과 같은 근래 학계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면 현실과 이론의 괴리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일견의 '정의', 즉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끊없는 일이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예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유 시장의 담론이 무력화되었던 2008년을 목도했을 겁니다. 아마도 앞선 그 미래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오판의 미래가 아니라, 추정컨대 '근대 정치의 왜곡된 재림'의 비극적인 미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혁명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는 것을 보니, 전통적인 의미에서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로 불릴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6장에서 저자인 미노그는, "정치적 인간은 권력에 의해, 경제적 인간은 부를 향한 이기적 욕망에 추동된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간접적으로 표현된 시장 자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정치가 도덕적이든 경제적이든 순수한 상태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 등은 그가 여느 정치학자들과는 다른 정치철학적 관념을 드러내는 증거라 여겨집니다.
-모든 측면에서 정치는 철학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비현실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의 본질적 의미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남습니다.
정치는 인간의 삶의 틀을 유지시켜주는 활동이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현재에 대한 비성찰적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에 대해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길 원하는 정부여당과, 모든 나쁜 것에 대해 비난을 가하길 원하는 야당들이 좋고 나쁜 모든 것이 정책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일에 공모해 왔다.
그러므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의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확실히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
폭력과 무질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됐다. 자기의 공동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강한 도덕적 감각과 법적 감각이 타자의 중요성에 관한 어떤 감각과도 병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권리와 자유는 먼저 귀족계급과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에 의해, 그리고 보통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홉스는 그런 이상주의가 젊은 학자들을 야심 있는 사람들의 앞잡이로 만들어 유럽에 엄청난 유혈참사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사람들ㅇ이 자연법에 대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근대 정부의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핵심적인 문제에 무감각했다.
그러므로 국가는 인간화될 필요가 있다. 이 두번째 시각은 국가를 일거에 지양하려는, 그리고 정치에서 불가피한 통치자와 신민 간의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 완벽한 공화국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는 정치에서 그 무엇도 순수하게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정말로 순수하게 경제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익이 개인적 비용과 이익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익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비판하는 편과 비판받는 편이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저치학의 과학적 기획이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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