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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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1956년 2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헝가리계 유대인과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특히, 외할머니 가계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모친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부친은 개혁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요. 어린 시절 버틀러는 히브리 학교에서 유대교 윤리와 연원을 배웠고, 그곳에서 최초의 철학 교육을 받게 됩니다. 버틀러는 청소년기 교육을 거쳐 예일대에 편입하기 전, 버몬트주 베닝턴에 위치한 사립 리버럴 아트 칼리지인 베닝턴 칼리지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일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대략 1년간, 독일 관념론과 현상학을 공부했습니다. 1993년 버클리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기 전에 웨슬리언 대학,조지 워싱턴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젠더 연구학자로, 정치 철학은 물론, 제3세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문학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런 그녀의 작업 전반은 보수주의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전환과 권리 보장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버틀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법적으로 레즈비언의 삶을 살고 있고, 파트너 역시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웬디 브라운입니다. 이들은 현재 버클리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What World Is This?"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본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이 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지난날 전세계 팬데믹 사태와 그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당시의 전염병 상황을 주디스 버틀러는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논증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물음은, "과연 처분가능한 인구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라는 소위 비극적 논답이었습니다. 그동안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언급된 '부수적 피해'(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주 인용했던 구조적 문구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부수적 피해와 맞물려서 말이죠.)와 오버랩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분석과 그 영향을 철학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에 대해 저 역시 동의하는 편인데요. 여기에 저자인 버틀러는 이러한 '극명한 몰락'에서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만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현상학의 계보 가운데, 특별히 메를리퐁티를 인용하며, 우리 인류에게 몰아닥친 팬데믹 사태를 앞선 수단으로 고찰해 보고 있는데요. 바로 1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꼭집어 언급한 '처분 가능한 인구'에 대해서도 '용인 가능한 죽음'이라는 매개로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국가 의료 보험 체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의료보험의 유무로 위태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버틀러의 가정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아주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 펜데믹 사태가 그동안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역사적 부침들과 같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떤 맞이한 현상에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에는 이렇게 마주치는 현실에 있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삶을 온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그 부분을 숙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버틀러는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현 세계를 어떤 계층들은 만족스럽고 살만하다 느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의 절망을 몸소 체험하여 흡사 대비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그레이스 블레이클리가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는 인간 사회의 격차와 차별을 뚜렷이 드러냈고, 이는 자본주의의 무비판성과 맞물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후설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그의 특별한 개념인 '시간화'는 팬데믹 사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뒤이어 도출되겠지만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결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이 다른 개인과 접촉하게 되는 시간화의 과정은 펜데믹이 왜 쉽게 근절되지 못했는가를 밝혀주는 주요 수단입니다. 그런 연유로 여러 현상학의 개념들이 메를리퐁티의 현상에 이르러,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현상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현상을 우리 인류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등장한 "행복한 자들의 세계는 불행한 자들의 세계와는 다뭇 다른 세계이다."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좀더 비상한 철학의 유용을 마련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를 마치 요구하는 것 같은데요. 이것을 단순히 격차가 있는 삶을 표징하는 문장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혹은 계급주의적 논리로 그저 비하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처럼 이제는 체제와 세계를 그런 식으로 돌이켜 볼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버틀러는 철학이란,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후반부 논증에서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겪고 난 후, "무엇이 우리가 살만한 세계인가, 무엇이 살만한 삶의 조건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이것은 투박한 공리주의의 겉핥기식 논법 만은 아닙니다. 버틀러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세계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있지만, 2장에서 다시 인용된, 메를리퐁티의 '상호 얽힘'과 같이, 세계는 우리가 만지고 접촉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매개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단순히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세계가 이런 현상학적 과정 자체로 작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대체적인 관조에도 불구하고 저는 2장에서 언급된 하나의 모습에 비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한시도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는데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보험 유무를 체크할 계재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생계 수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도드라지는 단면일 겁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살만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반복적인 논법으로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미 1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덕적 책무를 감당하고 이행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적 토대 위에 있는 관념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이런 도덕적 책임, 타인에 대한 관심,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우리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 등은 결국 우리가 비극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1장의 철학적 도출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팬데믹은 저자의 분석대로 우리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기능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우선하는 자들이 소위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와 같은 단면을 언급하며 그저 "어떤 이들"이라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티브 배넌과 도널드 트럼프를 그 범주에 포함하고 싶습니다. 혹자들은 팬데믹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를 과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조지 W. 부시로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팬데믹 시기의 트럼프는 그 태도와 결과물은 완전히 상이했습니다. 거의 최악으로 말이죠.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한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는 소위 언론 기사적 평가는 지난 201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평등이 팬데믹 시기에 차별적인 죽음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을 놓고 봐도 말입니다.  비록 저자가 지면을 따로 할애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인도한 이 '위대한 사회'를 복합적으로 비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신자유주의가 팬데믹 시대에도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정체성이나 존엄한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 우위에 놓여 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사활적인 분위기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과 살만한 환경을 위해, 3장 이후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포용"으로서의 사회적 유대라는 이상주의적 관념을 다시금 소개하고 이것이 더 나은 삶과 살만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방향타가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2장 이후로, 버틀러는 작금의 세계가 진정한 '공동의 세계'라고 볼 수 없고 명확히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과 집단적 가치와 욕망을 실행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얼마 전에 읽은 패트릭 J. 드닌 역시, 종래의 개인주의 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언급한 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아니, 스스로 지각이 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시장의 자유'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공동의 삶을 목표로 수많은 개인들이 복잡하게 상호 얽혀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그 대안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전에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인류애를 강조했던 저자 답게, 현상학에서 말하는 이런 얽혀듦을 매개로 우리의 본성과 더 나아가 세계와 지구의 안전을 모색해보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4장은 바로 이러한 대안 제시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성 주도성의 문화'에 대해 완벽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사회가 이런 성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기계적 합리성에 전도되어 왔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어떻게 보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과 공동을 위한 삶을 몇십 년에 걸쳐, 상실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제안대로 펜데믹 시기에 뜻하지 않게 희생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깊은 애도와 주변에 하나하나 모인 이런 개인의 삶이, 곧 사회적 삶의 집합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과거보다 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전부 '살아남은 자들'이지만 '여기 그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얽혀든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바로 이러한 비극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훈을 찾는다는 말이 역시나 비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난 사람들을 맘 깊이 애도하고, 또한 개인성과 무비판적인 합리성을 극복하여, 우리 스스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가 대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런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저 견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가에 대한 논증 가운데 들어가 있는 문장이지만, 이것의 의미는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수단은 결코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그저 세계의 한계들만을 변화시킬 뿐 사실이나 언어로 표명될 수 있는 사물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세계가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도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전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세계를 거쳐왔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 단수적인 것의 문제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구성 자체에도 관계되어 있다."

국가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주장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기본소득 보장과 단일 의료보험 부과체계 법안에 대한 심리 가능성은 보다 더 높아졌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면, 살 만한 삶을 버리는 대가로 자유를 즐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오히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의 삶 자체가 그저 견딜 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

마치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혼자 지내고 있는 개인들은 가장 위험에 처한 이들에 속한다.

무엇이 삶을 살만하도록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배타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삶들, 즉 보다 일반적인 삶의 과정들을 위해 살만한 삶을 만드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체로 체현된 자아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서 주위 환경 및 타자들 안에서 그 자신을 벗어나 영향받고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할은 감추어진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보다 정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매우 근접한 것,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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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민들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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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J, 드닌은 1964년 7월 21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카운티에 있는 윈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네티컷 주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드닌 가(家) 역시, 아일랜드에서 도래했습니다. 아일랜드 인들 특유의 가톨릭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드닌은 1986년, 뉴저지 주의 공립 연구 대학인 럿거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 다시 모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시카고 대학의 '존 U, 네프 사회 사상 위원회'에서 대략 1년 동안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터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 정보국 정보국 (USIA) 국장인 조셉 더피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특별 고문으로도 일하는데요. 2년 뒤인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교수로 강의했고, 2005년에는 조지타운 대학의 정교수에 합류하여 2012년까지,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정부학 부교수를 역임합니다. 또한 같은 대학의 정부학과에 소속된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에 관한 토크빌 포럼'의 창립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진에 합류했고, 2018년에는 대학측으로부터 그는 정교수로 채용되기에 이릅니다. 드닌은 포괄적으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여러 고전 및 현대 정치 사상, 그리고 미국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정치적 지향으로 미국 내에서 저명한 보수주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는 5권의 논저를 집필했고, 3권의 주요 공동 저자이며, 등재된 수많은 학술 논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여름 독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이 책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2018년에 미국 내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2019년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보수주의 대회 (National Conservatism Conference)에서 그는 주요 연사로 나서, 국가적 보수주의를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반하여 미국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이자 성취였다는 주제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드닌은 2020년에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두 차례나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Liberalism Failed"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이듬해인 2019년에 번역이 되었고, 지금 서평을 쓰는 판본은 2025년 6월에 새롭게 나온 2판인자 개정판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 처음 번역된 판본을 통해, 서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당시 부족한 이해와 그에 따른 낯 부끄러운 내용으로 말미암아, 이번에 다시 개정판을 잡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의 이력을 짧게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보수적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인물입니다. 이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종래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혼용 되어 쓰이고 있고, 일반 미국 시민들이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이 논저 자체는 꽤나 논쟁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몇 마디 말로 이 책을 쉬이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저자가 바라 본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자유주의가 그 유구한 전통의 옆 길로 벗어난지 오래되었으며, 수많은 미국의 (정치학자들을 비롯) 사회학자들이 자유주의의 목표에 헌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유주의가 초래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밝히는 부분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목이기도 했던, "자유 의지가 배제된 인간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가 던지는 질문은, 마치 그동안 자유주의가 걸어온 노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미국은 지난 1776년,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기치로 건국해, 마치 구시대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선망하는 국가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들'이라는 기치로 새롭게 목도한 '자유주의 국가'의 탄생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국가적 체제 하에 자유주의가 증명한 부분은, "실정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사회 계약의 의미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3장에서 상세히 논증되겠지만, 이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구축했던 것은 '법을 통한 자유'였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혹자들에 의해 존 스튜어트 밀이 마치 보수주의자의 기원으로 오역되기도 하지만 그가 원했던 자유와 그것이 보장된 사회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부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단순한 상업 발전과 그로 인한 부의 증대가 시민의 자유에 이바지하게 되는 점을 중심으로 두고,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하는 규약들을 밀은 논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했다고 이해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미리, "공화주의적 자유"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타인들의 자유를 좀 더 인식하는 자유"와 혹은 "타인의 자유는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한 협력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공동체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 논증에서 알렉시스 토크빌이 과거 타운에서 보았던 미국인들의 공동체적 가치와 그런 협력에 대해 다소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이 자유주의가 초래한 병폐의 기본적 사항은 무엇보다 이런 '가치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특별한 개인주의의 강조, 그리고 이기심과 내재되어 있는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권력에 제약받지 않는 개인주의적 토대는 어느 정도 중요한 얼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이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 역시, 쉽게 긍정할 만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저자가 2장에서 확인하고 있듯, "보수주의자들이 그 목표를 국가가 비교적 적게 개입하는 가운데 시장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보다 더 공정하게 이익을 분배하고 자원을 지원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표면적인 대립에 있습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양자의 힘의 차이는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 텐데요. 비록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그저 단 한 차례만 등장하지만 이 신자유주의가 오로지 "제약받지 않는 시장 자유'와 반대로 '정치적이면서 가치 지향적인 대다수 시민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실상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어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적 우위를 선점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이행에 자유주의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굳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애초부터 한 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언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이행과 그 기조 위에 올라탔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는 아주 특별하게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세계 대공황 그 이전과 혼란이 사그라드는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거나 그에 비견되는 성취를 얻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 자유라는 관념이 무엇보다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자의 논증 가운데 7장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두고,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변경할 뿐 아니라 유구한 정체를 사실상 정반대되는 정체로 즉 인민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사적 개인(혹은 사사주의)으로서 물질적으로 안전한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 정체로 재구성한다는 분석"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민주주의가 메디슨이 그 실체를 드러낸 소수의 공화주의로 덧씌워졌거나, 혹은 자유주의에 부분적으로 예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자유 진영의 모멘텀이 되었던 신자유주의 역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정치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즉, 이러한 자유주의 하에 몇 세기에 걸쳐, 함양되고 심지어 강조된 개인주의와 그 토대 위에 발현된 이기심, 욕망 추구, 남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감정 등은 전면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적 정체를 보이고 있는 저자 역시, 시민 사회에서 만연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떠한 파국을 일으키게 될지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핵심 목표이기도 한, "관습과 심지어 법까지 제거하여 우리들 개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믿는 관념 역시, 비틀린 시야를 많은 시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접두사가 붙은 이데올로기와 가치 지향 등이 시민들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일성을 주입하고, 그동안 자유주의적 유산이 사회와 시민들에게 끼친 병폐 및 문제점을 백안시하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판과 같이, "그저 2~3세기에 불과한 경제학이 우리 삶에 강력하게 스며들어, 우리를 주인처럼 부린다."는 서사가 마땅히 자유주의에도 해당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할 수 없는 자유주의"는 그만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하에, 점진적인 인문학의 쇠퇴와 비판적 시민성을 잃은 현 체제를 일찍이 샹탈 무페도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저자 역시, 5장에서 현재 미국의 교육 현실과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소위 대학 교육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자가 언급하는 '자유학예' 자체는 학문의 틀을 옥죄지 않는 인문학적 토양과 전문 분야의 교육과 함께 더불어 상생해야만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고착화된 엘리트 지배체제의 보다 큰 개선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능력 만능주의'나 '독식주의'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주의가 개인의 능력과 그에 따른 능력주의를 긍정해온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지향이 정치적 체제 이전에 주요 관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개인들을 능력의 여부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것,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주의를 강화시켜온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역시,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삶의 통제력을 상실한 다수의 개인들을 오로지 그들의 책임으로 치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부조에 대한 일부 계층의 지독한 반발심과 증오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새로운 귀족정'이라는 제목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시켜온 자유주의가 어찌됐든 배타적인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긍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 하에서 사회적 상향 이동과 하향 이동이 세계화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계급이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시민들이 이런 세계화 상황에서 심각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일 텐데요. 더욱이 소위 지유주의적 지배 계급이 다수 시민들의 경계에서 거리를 두고 그들만의 요새를 쌓고 있으며, 힘과 부를 가진 소위 엘리트 지배 계급이 자신들은 그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 체제의 불안성과 부실한 토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몹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국가가 체제의 뒷편에 있는 하층 계급과 지원이 필요한 시민들에 대한 부조 자체를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표면상으로는 나서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위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수의 부유층과 경제 엘리트들의 안위와 무엇보다 직결되어 있던 2008년 시장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있는 점은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정치적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시점에서 이러한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우리가 자유주의와 그것이 추동한 체제에 대해, 사실상 어떠한 성찰도 없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가혹한 현실은 일정 부분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저자의 점진적 평가대로 오늘날 자유주의가 초래한 많은 병폐와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성공했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와 그로인해 부정할 수 없는, 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오로지 법에만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의 조언대로 도덕이 시민들의 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내에서 덕과 이기심의 배치는 실로 교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쪽이 기세를 잃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도덕감정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 조차 현대에 이르러 귀결된 이런 체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아예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결국 저자는 7장에서 지목된, 정치에 있어 대중의 관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예속된 민주주의' 앞에서, 간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에게 있어서도 투표는 하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민을 옹호하는 현상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사실 저 역시도 시민 정치를 긍정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존 듀이조차도 시민들이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점은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존 듀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깎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처절한 노력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이후에 과연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이 책의 결론에서,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걸음을 옮기려면 우선 자유주의의 호소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자유주의가 대개 약속만 했던 감탄스러운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를 변론하는 이들은 "심각한 불만, 정치적 기능 장애, 경제적 불평등, 시민간 단절, 포퓰리즘적 거부 반응 등을 체제의 원인과 무관한 부수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면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마찬가지로 결론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완성해갈수록, 고질적인 병폐를 감추기 위해 미봉책과 장막을 만들어내는 역량 이상으로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병폐를 유발한다"고 대미를 장식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입니다. 그동안 자유주의가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이론들이 결국은 과거의 공동체 관념과 덕을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 것도 사실이고, 스스로 자유주의의 대변자라고 하는 자들 마저, 오로지 장밋빛 전망만 내세우는 데 급급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도출된 역설적 이해에서, 우리의 자유주의는 어쩌면 대적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회를 '야만'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저자의 대안과 같이, 사적 목적이 더불어 공적 목적과 함께 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막대한 불평등은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며, 낱낱이 깃들어 있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은 어떤 식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지, 이는 지배 체제(사회의 주가 되어버린)의 논리에 거듭 반하게 되는 양상이니, 어떠한 전환이 가능할지 지금으로선 의문이 들 따름입니다. 이미 저의 뇌리에 박힌 인용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시초인 하이에크가 이 자유주의 사회가 기존 질서 못지 않은 끊임없는 불평등, 어쩌면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겠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진보를 약속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모두의 지지를 얻을 것이며, 거의 초월적인 양적 성장이 앞으로 초래될 불평등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아주 순진하게 기대했다는 부분은 기존의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글 말미에 질베르 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저자는 글에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한계를 갖는 의제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규제 완화와 세계화,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이익에 매몰되는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지, 아니면 금권 정치에 편승한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그런 행태가 부정적인 모습의 최대치인지 아니면 더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한 편인데요. 이러한 현실 모습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력하지만 지금도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존 듀이의 익히 그 '좌절'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 보이는 '퇴화된 시민들'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시의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노엄 촘스키의 '분절된 시민들'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성찰의 '퇴화'로는 설명되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러한 수많은 위협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자인 드닌 역시, '자유주의 실패' 이후,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쇠퇴 뒤에 실질적인 '과두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는 미리 구상한 정치적 계획에 순응하도록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뜯어고치려 시도한 최초의 정치적 구조물이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나타나는 정치적 견해는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신념과 공명한다. 교육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어야 하고, 사고방식이 비슷한 대학 졸업생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고소득 직업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신념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힘겨운 과제는 자유주의 사회의 병폐를 더 많은 자유주의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신념은 비록 언제나 한결같이 인정되고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중세 유럽의 철학적 성취였다.

인간의 욕구를 다스리거나 제한하려 애쓰기보다 근절할 수 없는 이기심과 물욕을 인정함으로써 그런 욕구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의 성공 자체가, 현재 자유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이 자유주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성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계시장은 비인격적 거래의 가치 없는 논리, 이제껏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왔고 오늘날 세계시장 자체를 파탄 내고 있는 논리를 강요함으로써 다양한 경제적 하위문화들을 대체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소유욕 강한 측면을 유익하게 활용할 경우 경제적, 과학적 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자연현상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역량을 키움으로써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홉스와 로크 모두 우리가 사회계약을 맺는 까닭은 단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더 안전하게 행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 팽창에 불굴의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공동체의 삶에서 시장의 역할을 제한할 수도 있는 지역적인 통치 형태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시장과 국제 시장을 보호하는 국가의 능력에 줄곧 의지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그들이 근래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질서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에만 역사의 시간 차원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이 쇠퇴하고, 사회에 만연한 현재주의가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다시 말해 특히 소비와 쾌락주의, 단기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 의지를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규범과 경제적 규범을 해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겨우 10년 뒤에 생명공학과 ‘인류 이후의 우리 미래‘에 관해 쓴 책에서 후쿠야마는 동일한 과학적 논리가 인간 본성 자체까지도 바꿀 수 있고, 그 결과로 이 논리가 지탱해 온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인정했다.

로크처럼 하이에크도 급속히 발전하며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사회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미 빠른 데다 가속까지 하는 발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18세기 메디슨의 견해에서 정부는 개인의 이익 추구와 그런 추구의 결과를 ‘보호‘하기 위해, 특히 불균등하고 다양한 재산 획득 정도로 나타나는 개인 간 차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결국 퇴화된 시민들마저 자유주의 질서의 계몽된 족쇄를 벗어던질지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특히 정부와 경제, 기술, 세계화 세력의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병폐가 자유주의 질서의 성공에서 비롯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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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냐 삶이냐 - 팬데믹 시대의 사유
장 피에르 뒤피 지음, 이충훈 옮김 / 산현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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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장 피에르 뒤피는 유년 시절을 보낸 뒤, 1965년까지 에콜 플리테크니크 (Ecole Polytechnique) 와 에콜 데 마인 (Ecole des Mines)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1982년에는 장 울모의 예비적 고찰을 바탕으로 장 마리 도메나흐와 함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인지과학 및 인식론 센터 (CREA)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 대학의 언어 및 정보 연구 센터 (CSLI)에서 프랑스어 교수이자 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이와 연계되어 그는 2006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사회 및 정치 철학과 기술 윤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반 일리치와 르네 지라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앞선 일리치와는 남다른 우정을 쌓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뒤피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의 환경 및 사회 붕괴의 위험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그러한 가운데 "계몽적 파국주의"라는 연관된 주제를 개념화 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계몽주의가 인간 진보와 사회 발전을 위해 추동했지만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오히려 문명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대목에서 칼 포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이런 생각은 도구적 이성의 문제를 다룬 과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에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Catastrophe ou la vie : pensées par temps de pandémi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뒤피의 이 책은 지난 코로나 펜데믹 시절인 2020년 12월 이후의 일기 내용 (펜데믹 사태에 대한 글쓴이 본인의 인문사회학적 분석 등)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장 서두에, 글이 쓰여진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뒤피 본인이 후반부에 이것이 일기 형식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다만,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펜데믹 시기에 드러난 프랑스 정부의 사실상 무능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확산 초기 트럼프 행정부의 미흡한 대응 혹은 의도된 늑장 대처로 벌어진 미국내 25만명의 희생자와 그것과 버금가는 브라질 정부의 막장 대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다른 논저인, 『경제와 미래』에서도 드러나듯, "경제가 먼저이냐 정치가 먼저이냐"라는 근본적 물음과 비견될 수 있는 "생명이 먼저이냐 경제가 먼저이냐"를 비판적 사회철학자이자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약간 비통한 심정으로 읽히기도 했는데요. 책 중간에 언급되는 사이버네틱스 논쟁과 여러 자연 과학자들의 무지도 문제로 꼽힐만하지만 그럼에도 전세계에 자유를 방패로 삼아 몰아치고 있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지적을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지난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하필 도널드 트럼프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내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이 코로나 펜데믹을 민주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유서 깊은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로 엄중한 펜데믹 상황에서도 사회 전반을 위한, 소위 '긴급한 보건적 조치'에 대해 이들은 극렬히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거의 예외가 없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3장에서 비판적으로 논증되는 보편적 생명을 대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의 대표적 표징이기도 했던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을 기반으로 펜데믹 시대에서 보여졌던 민낯을 저자는 여과없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명성을 쌓아 올린 아감벤은 보건적 조치인 격리로 인해, "인류와 야만을 가르는 억제선이 무너졌다"고 일종의 악에 바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난날 무솔리니의 통치에 이탈리아적 열정으로 저항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에 일부 유럽 지식인들이 두드러기처럼 느끼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감이 간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감벤 역시도 그 위기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유독 그 시기에 지고한 가치로 격상시키기에 이릅니다.

펜데믹 시대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론 그외 단행된 격리조치는 이어지는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이라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펜데믹 초기에 미국 시민들은 이 마스크 착용을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강제'로 이해하기도 했는데요. 국가와 정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느냐는 말과 함께 말이죠. 이에 저자는 개인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비말을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것이 마스크이고 이 마스크를 거부하는 일부 시민들이 실제로 안전해질 수 있는 원인은 자신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이라고 군더더기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인용하여,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바이러스이다"라는 절묘한 수사로 덧붙이고 있는데요.또한 앞선 9장에서 인용된 루소의 말인 "결과가 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의 결과인 사회정신이 제도 자체를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들은 어떤 가치를 앞서 강조하는 테제들이 결국에는 가치전복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기 위해,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어떤 미국 보건 관계자가 희생된 고령의 환자들이 "어쩔 수 없는 피해" 혹은 다른 말로 "콜래트럴 데미지"와 같은 책임지지 않는 수사를 더하는 것이 그 나름대로는 손쉬운 방책이긴 하나, 펜데믹 시기의 수많은 희생들은 진실로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앞선 양차 대전에서 도합 7천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대목은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일반 사람 머리로는 거의 가늠이 되지 않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1961년에 전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쿠바 사태에서도 핵폭탄의 투발로 초래될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역시, 이제는 그저 건조한 추정치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뒤피가 성찰하는 바는, "정치 권력이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방법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단언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를 궤멸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종의 종말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정확한 분석에 지리멸렬한 것은 전문가들의 그 과학이 어쩌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일정 부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히 면역 체계를 붕괴시키는 에이즈 바이러스와 유사한 병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애써 들고 있지만 세계 의학계가 이를 쉽게 인정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추정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전세계 펜데믹에 대한 성격 규정마저도 조직과 단체의 알량한 이익과 권위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백신 생산과 관련된 담론들에서 말이죠.

글 중간에 뒤피는 만약 이반 일리치가 살아 있었다면 이 펜데믹을 어떻게 사유했을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대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일리치가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어떠한 말들을 읊어댔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결국 바이러스의 자기증식적 한계와 그 변이가 극적으로 우리의 기대만큼 우리 면역계에 덜 영향을 끼치는 쪽으로 틀어졌기에 인류는 그 고난의 시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량한 인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죠. 이는 각 국가가 보유한 의료 체계나 성숙한 시민 의식 내지는 자기 희생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류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우리에게 '인간의 생명'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펜데믹 시기, 그렇게 이행된 사회적 결과로 일종의 의미 부여를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때 희생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원할한 경제 활동이라는 은폐된 이기심의 발현이 과연 역사에서 어떻게 쓰여질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겠습니다.



- 이미 본문에서 자의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노인들과 병에 걸린 약자들이 주로 코로나에 희생을 당했다는 식의 기사와 통계들은 여전히 본질을 가리고 있고, 오히려 2020년 3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사망자의 25%가 45~75세라는 연령대에 집중되었다는 인용은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앞선 사례는 프랑스의 예이기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초래한 인명 피해와 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프랑스 정부 당국의 법적 책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자괴감까지 효과적으로 떨치게 만드는 통계적 장난으로. 이러한 편의주의를 우리는 앞으로도 쉽게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디서나 어떤 이들을 오늘날 인류가 처한 일에 단순한 ‘독감‘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이 책 첫머리에 파스칼을 인용했지만,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미국과는 다르게 지식인들 절대다수, 특히 철학자들 절대 다수가 외곬으로 문학 교육만 받는다.

허울 좋은 논변을 내세워 재앙의 결과를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정말이지 시민정신이 결여된 행동이다. 사유 능력,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시민의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삶과 경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인들이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선과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그 원칙을 말하는 이들이 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복음서의 메시지가 이보다 더 나쁘게 타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희생은 그것만으로는 진리와 정의의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

그들에 따르면, 펜데믹을 타개한다는 이유로 이 국가 기구들이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고 이른바 ‘봉쇄‘조치를 강제하면서 기본적 자유를 제한했던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기사는 펜데믹의 심각성을 전형적으로 최소화하면서 시작한다.특히 노인들과 질병에 취학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같은 전염성 독감이 정말 온 국민을 유린하는 질병들과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한 인간 생명의 가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된다. 그 가치는 오늘날 300만 유로로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이들은 자기들이 국가 전체를 바이러스가 최단 시간 안에 퍼질 수 있는 국소세계로 만드는 데 성공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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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8-08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이반 일리치라면?‘ 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언급이 있었네요.

베터라이프 2025-08-08 08:52   좋아요 0 | URL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보건의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뒤피가 그것에 응했던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마 두 사람만의 공감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개인적 사연들도 소개되니 학문과 연구의 공동작업이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22세기 민주주의 - 알고리듬이 선거가 되고 고양이가 정치인을 대체한다
나리타 유스케 지음, 서유진.이상현 옮김 / 틔움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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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일본 도쿄도에서 태어난 나리타 유스케 (成田悠輔)는 일본의 데이터 전문가이자 기업가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 내에서 데이터 알고리즘과 관련해, 전문성을 인정 받고 있는데요. 이런 저자는 도쿄대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2011년 도미, 그로부터 5년 뒤에,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일본 이치바시 대학의 특임 준 교수, 스탠포드 대학의 객원 조교 등을 역임하고, 2008년 여름에는 도쿄의 리먼 브라더스 일본 지사에서 인턴으로 일한 경험도 있으나 2주일 후에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하기에 이릅니다. 그 유명한 2008년 뉴욕 발 세계금융 위기의 전조였습니다. 이런 그가 대표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둘러싼 발언에서 "고령자는 더 노화가 되기 전에 집단 자결, 집단 처분과 같은 일을 스스로 하면 좋다"고 반복했고, 이는 뉴욕 타임즈의 큰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일본 특유의 사회 분위기, 즉 타인과 사회에 누를 끼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그의 발언에 많은 이들이 겉으로든 속으로든 동조를 했던 것은 명백한데요. 이는 서구의 철저한 합리주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 여파를 끼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22世紀の民主主義 選挙はアルゴリズムになり、政治家はネコになる"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나리타 유스케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이 책과 관련해, 스스로가 데이터와 관련된 IT 지식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치학자가 철저히 분석한 '민주주의 담론'이 아니라, 다른 업계에서 경력을 인정받은 비 전문가가 민주주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쓴 글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자본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 그룹에 속한 이들이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전반을 조지프 슘페터의 생각을 기초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리타 유스케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조지프 슘페터를 면밀히 읽고 이해했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민주주의가 "위선적 리버럴리즘과 일부러 결점을 드러내는 포퓰리즘의 롤러코스터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경련'과 '열화'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하며 논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이 책이 종전의 가렛 존스와 유사한 민주주의의 양적 체제를 줄이기 위한, "과잉 민주주의"와는 그 궤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의 병리적 상태'를 진단하는 방법과 분석에 문제는 있지만 민주주의를 보다 격리시켜, 자본주의적 체제 이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극단주의적 발상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텐데요. 다만, 이 '민주주의의 열화 과정'에서 나리타 유스케가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듯, 자본주의에 있어 승자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이런 독점적 체제가 온전히 민주주의 만의 문제라고 취급할 순 없을 겁니다. 이것은 최근 역사에서 현실 사회에 어떤 대안과 개선안을 제시하지 못한 '좌파의 무능'은 물론, 고도화 된 자본주의가 무엇보다 자본의 축적과 권력의 집중을 강력하게 용인해 왔다는 점에서, 이 체제를 원할하게 '공급'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무턱대고 비난만 하고, 그 한계를 편파적으로 수용하는 점은 그저 무지한 시민들에게만 먹힐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언설'이라 생각합니다.

매우 공교롭게도 저자는 나치 독일의 '교활한 언론 선동'을 1장에서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가히 목도하고 있는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 정치의 실질적인 폐해에 대해선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개인의 정치적 발언의 자유 및 개방성을 실로 자기들만의 전유물인 양, 악용하는 저 선동 정치인들을 그저 민주주의 한계에 다다른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여실히 '지능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특히나 저 포퓰리스트들이 입에 발린 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점을 우리는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글의 2장 이후, 저자가 선거 제도의 한계에 대해 쓰고 있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브라질과 같은 문맹률이 적지 않은 국가들에게서 단순한 선거제의 운용은 현실에서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자 자신이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학력의 일반 시민들이, 다수의 기대에 야합하고, 쉽게 휩쓸리는 '동조 현상'을 가리키는 '중우 정치'에 반감을 갖게 되는 점은 맥락상 유사한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사회적 재교육을 통해, 정치적 변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건전성에 시급한 부분이지, 그저 이 문제를 싸잡아 교육의 제한적 기회로 몰아가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이에 쉬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지식 독점에 준하는 소수의 학력 집중에 대해 많은 사회학자들이 우려를 표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나 전문가 정치에 따른 민주주의 하에, 엘리트 지배 체제가 더욱 일반 대중과 멀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민주주의가 평등의 기초에 의거, 일반 시민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닐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저자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인용하며, 체제가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내몰린 것이,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문제이면서, 애초에 대다수 시민들에게 주입되는 수많은 인터넷 정보들이 그 진위 여부가 불명확하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위기에 놓여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1980년대 이후, 일방 통행의 자본주의 (이를테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그저 시녀로 거느리고, 사회 전반을 획일화 시켰다면,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부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은 앞선 신자유주의가 신념화했던, "아웃소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3장 이후, 밝히고 있는 중국의 WTO 가입이 초래한 세계 경제의 변화, 값싼 노동력을 향해 빠져 나가는 기업들의 아웃소싱이 신자유주의의 분명한 이념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 많은 생산비 절감, 그리고 그에 따른 이윤 추구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비효율성과 연계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그런 현안들은 애초에 분석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정치적 비전문가가 인식하는 한계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뒤가 깔끔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결말이자 소위 대안이라고 적어 놓은 4장은, 다른 데이터 전문가에게는 인정할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일견 추측해 봅니다. 이익과 돈에 연관되어 있는 '데이터'가 과연 건전한 현실 정치, 내지는 민주주의에 어떠한 도움이 될 것인지는 어느 정도 자명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더구나 탈진실, 대안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트럼프 현상'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점과, 이렇게 의도적인 진실 왜곡과 주장에 편승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한 소위 '만들어진 사실'들이 현실 세계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은 이 한 가지 부분 만으로도 민주주의의 더할 나위 없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2008년 리먼 브러더스로 대표되는 금융위기 초기, 자업자득으로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을 그래도 구제하는 게 옳은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거대한 무능에 빠진 금융 자본주의가 초래한 전세계적 몰락을 목도했음에도 그래도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조력이 필요했다는 저자의 간접적인 판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 거대한 도덕적 해이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잔치를 했던 소위 엘리트 금융인들이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는데요. 저는 그 시점에서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나 민주주의는 정보력이 부족한 빈자의 나라에만 남아 있는 비효율과 비합리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제휴는 기묘하다. 자본주의는 강자가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구조, 민주주의는 약자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터넷에 가짜 뉴스와 음모론 그리고 혐오 발언이 확산했고, 이들이 선거를 잠식하면서 남미와 유럽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늘었다.

가난한 전제정치 국가들이 부유한 민주국가를 맹추격하기 시작했다. 정치제도와 경제성장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그동안 민주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예전보다 위축됐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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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성공회 교구의 목사였던 부친과 지역 내 저명한 가문 출신인 겸허한 모친 밑에서 자라납니다. 특히 그녀의 부모인 조지 오스틴과 카산드라 리는 결혼전에도 사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스티븐턴에 정착한 조지 오스틴은 1773년부터 1796년까지, 가외로 농사를 챙기로 한 번에 3명 정도 되는 소년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783년이 되자 제인과 그녀의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포드로 보내지게 되는데요. 그해 가을 두 자매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집으로 돌아갔는데 특히 제인은 거의 죽다가 살아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제인의 교육은 아버지가 스스로 챙기면서 독서를 통해, 그녀는 대부분의 소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문학 활동 전반은 22세 이전에 주요 작품들이 쓰여지지만 본격적인 출판은 35세가 되던 해부터 이뤄지게 됩니다. 특히,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에마'는 그녀가 살아있던 시절에 겸손한 성공을 안겨다 주지만 생전에는 위의 작품들이 그녀에게 크나큰 문학적 명셩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관통하는 주제들은 18세기 말 전근대적인 귀족 의식과 결합된 소위 영국의 지주 계층에 대한 해석과 더나아가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시대의 세태, 관습 등을 여성의 시각으로 관조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Persuasion"으로 그녀의 사후인, 1818년에 출간되었고 출판사 문학동네에 출판한 이 번역본은 처음에 양장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번역본 출간은 2010년 8월이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3년에 나온 1판 3쇄본입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바로 "숭고한 사랑과 영원한 절개"라는 쉽게 변색되지 않는 개인과 개인사이의 중요한 가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불어 주인공인 앤 엘리엇을 통해, 작가는 "분별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극명한 대비"를 표출하고, 자기 만족과 오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태를 사람간의 관계를 매개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고전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인간의 계몽"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비슷한 연유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폭로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꽤 조밀한 서사 속에 드러나는 어리석고 거의 사욕에 매몰된 인물들이 보여지고 있는데요. 더욱이 오스틴의 인물 조형 자체가 매우 입체적이고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의 캐릭터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것 자체가 고전으로 얻을 수 있는아주 사소한 이득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서머싯셔 켈린처 홀의 월터 엘리엇 경은 저물어가는 영국 귀족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개인적 허영과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의 인생을 저당잡혀 사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계급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계급의 표상'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각각 다른 개성의 딸이 셋이나 있습니다. 첫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날이 저물어가는 가세에서 예전만 못하게 누리지 못하는 삶에 대해 어느 정도 고통을 받고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세인들이 자신을 향해 말하는 "엘리엇 양" 혹은 "레이디 엘리엇"이라는 지칭에 묘한 자부심을 보이고, 그녀를 통해 당시 영국 사회를 얼추 엿볼 수도 있었는데요. 저는 앞선 월터 엘리엇 경과 그의 큰딸인 엘리자베스가 요샛말로 아주 전형적인 속물 캐릭터라고 여겨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인물 설정에 대해,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주변에서 착안을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작품의 서사 내내 이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에 대해 묘한 기시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적인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앤 엘리엇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벗인 레이디 러셀이 인정했을 정도로 겸허하고 분별력을 갖췄으며,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양식을 갖춘 인물입니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는 이 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친인 엘리엇 경은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여전히 시들지 않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둘째 딸인 앤은 그의 말대로, "저물어버렸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일차원적인 삶을 사는 저 부녀가 옆에서 의미있는 조언을 하는 앤을 어떻게 여겼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직간접적인 묘사들에 있었는데요. 물론 이런 연유에는 자신의 집안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앤의 연인이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에 대한 반감과 딸까지 모멸차게 취급했던 과거의 행적이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스틴의 이 작품에서 일견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로 어느 정도 각 캐릭터들을 분리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사람이 갖춰야 할 분별력을 갖고 행동하는 인물들은 바로 웬트워스 대령과 앤이었는데요. 이들은 세태에 얽히지도 않고 자신이 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를 버리지 않으며, 일관된 의지를 갖고 살아갑니다. 과거 엘리엇 가를 보잘것 없다고 여긴 향사 윌리엄 월터 엘리엇이 엘리자베스와의 혼사를 거절하고 돈많은 여성과 결혼한 그에 대한 작품 내의 비판적인 평가와 입지는 아주 극명하게 프레더릭과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더욱이 후반부에서 앤에게 있어 새삼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스미스 부인이 윌리엄 엘리엇의 '정체'를 그녀에게 폭로했을 때, 호시탐탐 월터 경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던 클레이 부인의 의도까지 덩달아 밝혀지며, 동시에 극 전반도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과거 프레더릭 웬트워스는 진정으로 앤을 사랑했지만 월터 엘리엇 경과 엘리자베스의 반대에 부딪쳐 해군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배경이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시점이니, 아마도 웬트워스 대령은 서인도 제도에 혹은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했거나 아니면 스페인 등지에서 활약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하지 않는 군경력과 동시에 2만 5천 파운드의 당시로서는 막대한 재산을 쌓게 되는데요.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앤과 엮이지 않아도 좋은 혼처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의도를 갖고 앤에게 접근하는 윌리엄 엘리엇과는 다르게 웬트워스 대령은 그 "영원한 절개"에 부합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밝고 싹싹하면서 동시에 미모를 갖춘 여성의 매력에 흔들리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남자'를 그려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더릭 웬트워스라는 캐릭터 자체는 '남자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기에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영국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8년이나 넘는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은 '노생거 사원'과 유사하게 약간 아쉬운 결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앤과 프레더릭 사이에서 다소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는 월터 엘리엇 경과 엘리자베스의 한풀 꺾인 태도는 서사에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고, 다른 등장 인물들인 윌리엄 엘리엇과 클레이 부인의 소위 '야합'은 뭔가 개연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분별과 합리적인 이성을 보이는 인물들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공격과 그런 행태들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제인 오스틴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제인 오스틴의 다른 대표적인 네 작품들을 비교해 봤을 때, 이 설득이라는 작품이 문학적인 측면과 사회해학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말미에서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앤 엘리엇의 모습은 한 개인의 본질이 그저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전체를 아우르는 선한 내면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는데요.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온갖 인간군상들 가운데 표면적인 모습을 초월하는 진정한 본질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일관되고 남들과 다른 빛을 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값어치가 정해지기 마련이며, 그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가여운 껍질에 불과하다는 고래의 교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 오스틴의 이 작품은 후세에도 그 명성이 이어질 만큼 중요한 마스터피스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이 작품에서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적으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태에 대한 고발이면서 그녀가 얼마나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책 제목인 '설득'은 월터 엘리엇 경과 '레이디 엘리엇'인 엘리자베스와 같은 부류에 대한 풍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소위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냉소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 일부분은 남과 다를 바 없으며, 그런 냉혹한 관계에서 가족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교훈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레이디 러셀은 그녀가 부친의 집에서 겪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서 벗어나 자기 집 근처에 자리잡게 된다면 크게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클레이 부인이 자리에 없을 때면 아버지는 번번이 그녀의 주근깨며 뻐드렁니, 그리고 볼품없는 손목을 심하게 흉보곤 했다.

그녀는 타고난 자질에서는 맏언니보다 나았지만 앤 같은 분별력이나 성품을 갖지는 못했다.

그의 시선이 스치듯 앤에게 머물렀다. 반짝이는 눈빛을 머금은 그 시선은 마치 ‘저 사람이 당신에게 반했나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역시 앤 엘리엇다운 모습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앤 엘리엇과 같은 여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듯했던 남자가 팔 년 뒤 루이자 머스그로브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월터 경은 이것으로 완벽히 해명이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유연한 마음, 위안을 구하는 성향, 흔쾌히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서 자신을 잊게 해줄 일거리를 찾는 힘은 오로지 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따금씩 아주 흥미롭고 감동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기도 하니까요."

늘 평정심을 유지하여 단 한번의 말실수조차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이따금 경솔하거나 성급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진실성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네. 표정이 다 말해주는걸요. 지난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호감가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세상 사람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람과 같이 있었다는 걸."

"겉만 번지르르하고 들여다보면 오래가지 못할 가족 간의 화합일지라도 지킬 가치는 있어 보이지요."

요즘 세상에 살다보면, 남자든 여자든 돈 때문에 결혼하는 일이 너무 흔해서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요.

클레이 부인 같은 사람이 항상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그보다 더 음흉한 위선자까지 더해지니 모든 평화와 안락이 깨져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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