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빗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안 바이올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의 군인으로 소령으로 전역합니다. 매큐언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에서 보냈고, 그가 12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에 위치한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 (런던 소재 남학생들을 위한 기숙형 중등학교)을 거쳐, 이스트 서식스 주의 팔머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뒤이어 그는 노리치에 위치한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UEA)에서 논문 대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위탁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런 그의 첫 출판 작품은 단편 소설집이기도 한,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이는 197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에 '서머셋 몸 상'을 수상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몇 년 간의 단편집을 시작으로 문단에 주목을 받다가 1988년 이후, 비교적 성공적인 작가의 경력을 이어가게 됩니다. '암스테르담', '속죄', '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등의 작품들이 연달아 평단과 대중들에게 큰 찬사를 받게 되고, 특히 1998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그해 부커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매큐언은 지금까지 부커상 후보에 총 여섯 번 지명되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왕립 문학회 (FRSL). 왕립 예술회 (FRSA), 작가 협회 회원에 등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 인문주의자 협회의 저명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작품 활동 이외에, 매큐언은 공개적으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폐쇄적인 이슬람주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요. 여기에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인들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어 비판을 가했고, 2016년 6월, 영국 정부의 유럽 연합 회원국 자격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이러한 정치적 시도에 대해 매큐언은 "영국이 완전 변했다"며, 신랄하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sson"으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런드 베인스는 그의 부모라는 출신 배경과 자신이 태어난 연유에 있어, 작가인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요소가 작품의 틀로 덧대어 나타납니다. 특히, 매큐언의 모친의 첫 남편이 전투에서 전사한 후, 애인과 재혼했다는 설정과 매큐언 자신에게 입양된 형제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품에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여타 다른 평론에 있어, 주인공인 롤런드가 자신의 삶을 통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주목하고 이것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를 중요시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비교하여, 다소 다채로운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극중의 롤런드가 자신의 인생을 거치게 되는 시기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영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대처의 대처리즘적 신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냉전이 종식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거쳐, 최근인 2021년의 코로나 사태까지, 한 인간의 삶이 그저 온전하게 소급될 수 없는 그야말로 격동의 여러 시기를 작가의 평이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롤런드라는 인간을 다시금 우리 방식대로 재조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이 롤런드라는 인물을 반쯤 비극적으로 추동하게 되는 음악 교사 미리엄 코넬은 그가 14세가 되던 해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1959년에 왕립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로, 그녀는 쉽지 않은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십대 시절을 보내고 있던 롤런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어린 시절 가까운 지인이나 이웃을 통해, 불행하게도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이 그 기억 때문에, 평생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롤런드 역시, 그의 십대로 인해 결국 온 평생을 저당 잡히게 되는 혹독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미리엄이라는 인물은 후반부에 설명되는 자신의 불행을 롤런드를 통해 어느 정도 불식시키게 되는데요. 이는 이 두 사람이 '피아노 수업'이라는 매개로 나이를 떠나, 양자가 본질적으로 한쪽이 우선권을 갖는 소위 '권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당시 성인이었던 그녀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롤런드를 지배합니다. 이러한 부지불식간의 조건에서 롤런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면서, 내면적인 갈등으로 삶에 있어, 많은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이 이 때의 두 사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결핍'을 안고 있는 롤런드가 이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성적 충동, 성적 몰입에 몸을 맡기게 되면서, 성인이 아닌 십대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에둘러 '쾌락'과 비슷한 면모로 재해석 되기도 합니다. 물론 매큐언의 이런 묘사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닐겁니다.
그렇게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서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물론 미리엄이라는 선생을 통해, 그야말로 아주 작은 그의 '빛나는 시기'가 극의 1부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은 경제적 나락 그 이상의 충격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전하게 정립하고 통제하는 능력 자체를 잃게 됩니다. 이런 롤런드의 삶이 극적인 대비로 그려지는 '엘리사 에버하르트'와의 짧은 결혼 생활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남자'의 그야말로 비극적인 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큐언의 다른 작품인 '검은 개'에 등장하는 '준'처럼, 아내인 엘리사의 모친인 제인과 '딸보다 더 장모를 이해하는 사위'로 그려지는 듯했으나, 제인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삶에 있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그런 어머니의 '좌절된 꿈'과 단편적으로 자신이 이해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 이 두 사람을 경멸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의 파급은 꿈을 위한 '모성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제가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글쓰기를 위해, 남편과 아들을 버리는 엘리사의 그 가혹한 모성의 중단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기는 커녕 그저 매일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과, 다가오는 '엄마 노릇'에 자신이 매몰되게 된다면 더이상 자신의 꿈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 절박함은 이 작품을 다 읽은 이후에도 짐작이 되지 않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관습과 모성성을 파괴하는 인물인 엘리사와 크게 대비되어 그려지는 성실하고 사려 깊은 대프니 이 양자는 그만큼 롤런드의 사랑, 그리고 그의 어긋난 삶을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특히 대프니의 마지막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마지막 까지 노력하는 롤런드의 힘겨운 투쟁은 그가 마지막에 비로소 선택한 사랑에 대해 어디까지 지켜내고 헌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의 의도를 전부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3부에서 드러나는 롤런드가 직면한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어설픈 해후가 그렇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고 설득이 되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엘리사라는 인물이 표징하는 최악인 관점은 롤런드의 모친인 로절린드가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후에 용기를 내어 그가 결정한 제2의 결혼 생활의 상대인 대프니가 전 남편에 의해, 자행된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엘리사가 최근 내놓은 장편인 '그녀의 느린 몰락'에서 의도적인 인물 암시로 인해, 여주인공을 때리고 가정을 내팽개친 소설 속 남편을 롤런드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등치시킨 점입니다. (극에서 이미 규명되지만 롤런드는 한번도 엘리사를 향해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작가는 롤런드에 품에서 행복한 삶을 맞이하게 되는 대프니와 엘리사 에버하르트가 아주 명확히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구성되었고, 이 양자의 언행과 행위 자체가 오직 극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의도 역시,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엘리사는 그간의 작품 활동으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고, 이는 극중에서 현재의 평단들로부터 귄터 그라스와 토마스 만보다 더 훌륭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찬사도 받게 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치열한 신자유주의 시대 (엘리사가 자신의 꿈을 이뤄내기 위한 과정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이상과 부합한다면)에 자신의 자식들을 건사시키고 평생 현장에서 일을 놓지 않은 훌륭한 어머니이자 조언자였고, 그리고 롤런드에게 더할 나위 없던 충실한 연인이었던 대프니의 예견하지 못한 불행한 말로는 어찌됐든 뒤이어 등장하는 후반부 극의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물론, 그가 어느 정도 각성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저 납득하는 걸 넘어 안타까운 정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인 롤런드는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남성성이 배제된 인물이기도 한 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권력적 속성을 지향하고 휘둘렀던 캐릭터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타의 인물들과는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미리엄과의 왜곡된 성 경험과 그에 따른 피지배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노동당을 지향했으면서도 끝내는 소극적이었고 베를린이 분단 되었던 냉전의 시기에 그때 만난 어린 두 소녀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확신하는 그 찰나의 현실을 평생 안고 살게 됩니다. 여기에는 나치와 관련된 역사 약간의 팩션으로 쓰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매큐언의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들처럼 현대의 굵직한 사건과 일개 개인의 삶이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구를 엿보이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십대 시절의 롤런드가 그 당시 냉전의 핵무기 경쟁에서 어린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일상적인 삶 속의 공포'가 그저 허무맹랑한 무언가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극에서 이 핵무기라는 단어가 적잖게 등장하지만 어떻게 보면 일상적 삶이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조건의 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저 바등거리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냉소하기보다는 그때의 현실이 어땠는지, 절묘하게 이원적으로 서사를 도입하는 작가의 구성은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었습니다. 특히 냉전의 공포나 베를린에서 동독 당국에 의해 구금된 지인들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던 상황은 개인이 그러한 통제 범위 이외의 정치적 문제를 읽는 내내, "우리라면 어땠을까?"를 고민해 보게 만들어줍니다. 매큐언의 글쓰기는 이런 부분에 있어 매우 탁월하기에 아무리 호불호가 갈리는 서사의 틀이라고 할지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누구에게나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거나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 시도 자체 만큼이나 가혹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롤런드가 맞이하는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그 불완전한 해후는 이 작품의 옥의 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란 그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롤런드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선량한 인물이었고 물론 우리의 삶에서 속속들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행동이나 언행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롤런드로 투영되는 평범한 삶의 의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관된 무언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과거의 철인들의 삶을 본받아 대오각성에 준하는 어떤 개선을 작가가 바란 것은 결코 아닐겁니다. 그렇다고 거대한 정치적 대립과 이데올로기 투쟁에 놓여 있는 평범한 삶의 아련하고 안타까운 측면을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하나 만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극 후반부에 롤런드가 거의 홀로 키워낸 자신의 아들로부터 탄생한 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모두 채워버리는 진정한 '사랑'이 되었음을 롤런드가 말년에 깨달은 것처럼 각자의 인생에서 이러한 깨달음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여진다면 그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겁니다. 은연중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극중에서 로버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롤런드의 서사로 스치듯 보여주고 있는 장면처럼 모든 걸 속속들이 다 버리지 않아도 충분히 인생의 도(道)는 각자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본문 56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책 제목은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극 후반부에 드러나는 '세월의 레슨'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세월이 개인의 삶을 통해 가르치는 단련과 무뎌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롤런드가 미리엄 때문에 겪게 되는 삶의 파편들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하기도 했습니다.
-작품 말미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감사의 말을 적고 있었는데요. 그 마지막에는 자신이 수학했던 울버스톤홀학교를 언급하며, 그곳에는 미리엄 코넬과 같은 피아노 선생님은 없었다는 강렬한 문장에서 저는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저 문장은 그것대로 큰 위미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과 제자는 죄책감을 느끼며 서로 떨어졌고, 그는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들이 이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로 묶인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은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누구나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만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런 지옥일 뿐이다.
어떤 여자들에겐 홀로 아기를 키우는 남자가 매력적이고 심지어 영웅적으로 보인다. 남자들에게 그는 멍청이로 보일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모욕적인 질문과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는 부모님과 작별한 이후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 1984년 여름에 앨리사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읽은 후 감정 기복이 심해지며 상태가 이상해졌다.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겐 오빠가 누린 대학 교육 혜택을 별다른 고민 없이 제공하지 않은 부모님에게 "섭섭하고 심지어 분노까지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폴란드 침공 이래 그곳에서 삼십만 명의 유대인이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되었다."
하인리히 역시 자신의 고압적인 태도를, 아내는 마땅히 집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기대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최고의 삶은 풍요롭고 다원적인 것이며, 의무는 불가피하고, 황홀경에 감싸여 그것을 위해서만 사는 건 불가능함을 알았다.
지난 수년간 베를린장벽에서의 돌발적인 대립으로 3차대전이 발발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롤런드가 어렸을 때 몹시도 격렬하고 소유욕이 강하고 무서운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버지는 로절린드에게 손찌검을 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 사기친 일을 자랑하고, 모든 가족 행사를 - 대개 술주정을 부리며 - 좌지우지하고, 무자비하게 자기 생각만 반복해서 주장하고, 수전의 증오를 살 말 못할 짓을 저질렀다.
앨리사에게, 리베나우에서 눈길을 걸으며, 그녀의 소설에는 그 고백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두려움에 즉각적인 성경험을 얻으러 간 건방진 어린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