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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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큐언은 1948년, 영국 햄프셔 주 올더숏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동 계급으로 군에 입대해, 소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매큐언은 아버지의 주둔지를 따라, 영국 밖에서 생활하다, 12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는데요. 그는 서퍽의 런던 소년들을 위한 중등 문법학교인 울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고, 1970년에 이스트 서식스 주 팔머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소설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6번이난 부커상 후보에 오릅니다. 1998년에 바로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2011년에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하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에는 서식스 대학이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매큐언에게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2020년에는 독일 문화원이 "독일어와 국제 문화 관계에 뛰어난 공헌을 한 비독일인에게 수여"하는, '괴테상'을 수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1917년에 영연방 왕국 훈장인 '명예 동료 훈장'과 예술과 과학에 기여한 영국의 기사 훈장인 '대영 제국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msterdam"으로, 지난 1998년에 출간되었고, 다만 이번 판의 번역에 쓰인 것은 2016년의 출간본입니다. 국내 초도 번역은 1999년 7월에 있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3년 5월의 개정판 2쇄 본입니다.

이 작품은 '몰리 레인'이라는 여성의 갑작스런 장례식과 함께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됩니다. 영국 내각의 고위 관료이자, 외무부 장관인 '줄리언 가버니', 시사지인 저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와 영국을 넘어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심포지엄 작곡가인 '클라이브 린리', 그리고 앞선 몰리의 법적 남편이라고 볼 수 있는 조지 레인' 등 이들은 극을 진행하는 데 있어, 주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앞선 몰리라는 여성은 앞에서 열거한 인물들과 한때 연인 관계였거나 혹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이 어떠했는지는 앞선 이들의 대화나 회상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앞에서 열거된 두 사람은 명백히 아내가 있었기에 이는 달리 말하자면 외도라는 측면에서, 부도덕한 불륜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몰리는 사망 당시 46세로, 어쩌면 그녀는 당연히 건강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은 현 남편인 조지 레인에 의한 독살이나 사고사를 대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작가가 한발 물러서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몰리의 생전 마지막 상대가 외무장관 줄리언 가버니라는 점은 극에서 상당히 중요한 설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일종의 인종주의자이자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극의 배경인 1996년 이후의 영국 사회에서 대두된 한 쪽의 정치 세력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버니는 소위 입지전적인 인물로, 아내인 로즈와 함께 가정을 일구었고 의사인 아내의 경력에도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은 외조도 드러나고 있는데요. 그가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정치 경력을 통해 내각의 장관이 된 이력은 전문직과 고위 정치인이라는 자신만의 성공한 성을 쌓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이 된 몰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심지어 극 중반에 그의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몰리가 가버니는 물론 아내와도 직접적인 교류를 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슈베르트를 경멸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베토벤을 향한 애정과 그런 악곡의 창작에 대한 예술을 천직으로 삼고 있던 클라이브 린리는 극 초반에는 상당히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내면은 다소 나약하고 어느 정도 충동적인 일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술가들에게 이런 충동적인 측면은 당연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가 읊조리는 예술과 삶에 대한 관계와 이것들을 통한 자신의 지향, 여기에 고통스런 노력을 통해 탄생되는 작품에 대해 스스로가 갖는 자부심 등은 예술가들이 흔히 갖는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분주한 생활을 영위하는 와중에도 그는 오랜 친우인 버너를 향한 배려와 도의는 꽤나 놀라운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불어 그 역시도 지난날 몰리와 뜨거운 사랑을 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연인으로서, 그녀에게 청혼을 고민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중견 시사지인 '저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는 직장 내에서 쉽게 적이나 친구를 만들지 않는 그만의 처세술로 사내 요직인 국장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친구인 클라이브에 대해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듯, 치기 어린 모습도 보이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이 두 사람의 어느 정도 불협화음이 잡히기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진정으로 우정을 나눈 사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데요. 다만, 앞선 클라이브가 한동안 일이 없던 버넌에게 보인 우정 이상의 호의는 꽤나 특별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약간의 논외지만, 우리가 쉽게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친분이나 우정관계라는 것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배려, 그리고 호의만이 있다면 그 관계는 실로 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데요. 물론 매큐언의 이 작품은 많은 상징과 사회적 관습, 통찰을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클라이브와 버넌, 이 두 사람의 지난날 함께한 막역하고도 서로 간의 밀접한 기억들은 이런 관계의 불균형이 지속된 상황에서 서로가 순간 분을 못 참고 벌인 충동적인 행동이 극의 충격적인 마무리를 장식한 것은 어떻게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의도된 희극과 유사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극의 주요 변곡점이었던, 버넌이 왜 줄리언 가버니를 쓰러트리려고 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런 몰리를 향한 연민과 동시에 줄리언을 향한 사적인 질투가 이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부분을 자신의 이익과 절묘하게 결부시킨 조지 레인이 그 시점을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의 말대로 버넌은 '치솟는 감정의 노예'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누구보다 스스로 노력해, 치열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 자부심과 국장이라는 지위에 올라서도 신중한 처세를 추구했지만, 경쟁지와 비교해서 실적이 하락하고 있는 현실과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앞선 조지 레인의 의견을 수락한 것은 그의 경력과 삶을 배경으로 했을 때는 큰 패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 조지 레인의 야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또한 신자유주의 하에 있던 소위 경쟁적 기업이라는 맥락에서, 다른 사람의 몰락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등의 합리주의로 포장된 이기주의를 이 부분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이런 서사는 개인의 추락을 떠나 상당히 비극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매큐언은 일종의 치정극을 기반으로, 당시 영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의 갈등, 지금에서야 성정체성과 관련된 LBGT 문제가 전사회의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그려지는 당시 영국 사회의 성담론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념은 여전히 고심해 볼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즉, 줄리언에 대한 버넌이 주도한 위기 혹은 그 음모가 성소수자 코스프레로 순간을 모면하긴 하지만 이것은 결국 그의 정치적 경력을 끝장나게 만드는데요. 매큐언은 이 장면을 유독 콕 집어 세르반테스 식의 우스꽝스러운 연출로 비꼬면서, 가히 한편의 코미디 극으로 만들고 있었는데요. 이는 우선적으로 우리 세태에 대한 극명한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그런 이슈가 어떻게 한 치의 고려도 없이, 어느 정도 사회가 경직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성담론에 무조건적으로 투항하는 모습을 매큐언은 우리 사회를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회고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읽은 매큐언의 이 작품은 제가 읽은 어떤 장편들보다 극의 짜임새와 사건의 진행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클라이브가 버넌과 다툰 뒤, 충동적으로 감행한 산행에서 맞닥뜨리게 된 그 사건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독창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클라이브가 버넌에게 본심을 드러내어, 마치 데이비드 흄이 애덤 스미스와 맺었던 우정의 한 진면목처럼 부탁하는 그 장면이, 나중에 그렇게 비극적으로 이용될 줄은 저 역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매큐언의 영리한 글쓰기의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뒤이어 조지 레인이 이 두 사람의 몰락을 지켜보며, 마치 아내의 부적절한 정부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처럼 구는 행동 역시, 냉혹한 기시감과 더불어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 사회에서 한 축을 맡게 된 놀라울 만한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보다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점은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임은 아마도 누구나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사회적인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런 승리감에 부적절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개인적 나약함과는 그저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매큐언은 바로 자신의 이 작품에서 마치 커다란 복지와 사회적 지원의 수혜를 받으며 성장한 68세대가 결국 뒤이어 등장한 마거릿 대처에 적절히 대항하지 않고, 점차 기득권에 안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도덕적 기준과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저 전문직이라는 이유와 고위 직업군의 종사자라는 자격만으로 본성이 범한 과오가 면책될 수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은 복합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기까지 했는데요. 이는 1980년대의 미국 드라마가 아주 대놓고 성공한 경력을 보유한 중산층들의 외도와 불륜을 극의 소재로 삼은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대미를 포함한 후반부의 전개 과정이 단순히 남녀 간의 치정이 얽힌 복수극을 다룬 심리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인데요. 여기에 작가 본인도 후반부의 서사를 통해, 인간이 불가해한 존재라고 인정했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몰락에 이르게 하는 길은 자신에 대한 과신과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안일함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정극이라는 허울을 쓴 이 주요 인물들의 몰락 과정에서도 여실히 자신의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냉혹한 현실과 이를 기민하게 해석할 수 있는 유럽 합리주의의 위태로운 양면적 속성은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극의 대미 즈음에 매큐언은 그 비극적 사건을 두고 "이것이 그들 운명의 희극적 성격이었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에너지, 그런 행운,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 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그는 외국인 혐오와 과도한 형벌이라는 뻔한 노선을 앞세우며 정치판에서 이력을 다져왔다.

"옳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린리 씨. 이 세상에 오류가 없는 사법체계란 없습니다."

쉽게 기억할 수 있고, 유행을 초월하며, 저물어가는 한 세기와 그 시기의 무분별한 잔혹성을 애도하는 한편 눈부신 창조의 업적을 기리며 폐부를 찌르는 아름다운 멜로디. 먼 훗날 천 연주의 흥분이 충분히 가라앉고 불꽃놀이와 평가분석, 간추린 역사 서술과 더불어 새천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끝난 후, 이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는 사라져간 세기의 엘레지로 남으리라.

유럽에서 음악은 줄곧 인간 본성이 불가해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온 인본적 전통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서른 살 때나 지금이나 몸은 결국 별 차이가 없었고,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었다.

이름을 기억하는 버릇은 노회한 정치가의 처세술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렇다 빛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공공의 선이 하나되어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단호한 손길로 국가라는 기관에서 종양을 잘라낼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견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널리즘이란 어느 면에서 자연과학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기사는 적수인 반대의견들을 물리치고 살아남는 기사이며,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집니다.

그 목소리의 설득력은 그녀가 속한 계급이나 장관의 아내라는 위치보다는 전문직 종사자의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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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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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1873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인 욘의 생-소베르-앙-퓌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쥘-조셉 콜레트로 전쟁 영웅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녀들이 태어난 생-소베르-앙-위세에서 세무 징수원의 직책을 맡게 됩니다. 콜레트는 어려서 공립학교에서 수학하고, 1893년에 '윌리'라는 필명을 사용한 작가인 헨리 고티에-빌라르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의 첫 네 편의 소설은 그의 이름으로 출간됩니다. 그러다 이 콜레트와 윌리 부부는 1906년에 부부 관계를 청산했지만 그들의 이혼은 1910년까지 확정되지 않습니다. 1912년에 콜레트는 르 마탱의 편집자 헨리 드 주브넬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콜레트와 주브넬의 결혼 생활 역시, 1924년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요. 이때의 이혼 책임은 부분적으로 콜레트에게 있었는데요. 당시 그녀는 의붓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1925년에는 유대인이었던 모리스 구드케와 재혼하고 그는 그녀의 마지막 남편이 되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 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다행이게도 독일 대사의 프랑스인 아내가 중간에서 관여해, 콜레트의 남편인 구드케는 바로 석방되지만, 독일군 점령 내내 이 부부는 다시 체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전쟁 기간을 살게 됩니다. 1944년에는 콜레트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작품인 지지 Giji가 줄판되었고, 1948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지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열 한번째 장편소설인 셰리는 원제,"Cheri"로 지난 1920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2월에 번역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쇄본으로 2025년 1월 판본입니다.

일부 해외 서평 블로거들에게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인 누누(레아 드 롱발 부인)가 '사교계 고급 창녀'로 이해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 사회가 당시 귀족 계급의 마지막 잔재를 고려해 봤을 때, 창녀라는 표현은 조금 많이 나간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작품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수식어로 등장하는 '적대적 여자들끼리의 우정'이라는 표현은 샤를로트 플루 부인과 레아의 관계 를 언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벼운 여자들의 적대적 친교'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사교계의 미망인들과 과부들의 서로를 향한 형식적인 모습은 꽤나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앞선 샤를로트 플루 부인의 아들인 '프레드 플루 주니어'가 바로 레아가 그를 향한 지칭이자,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셰리"인데요, 이는 사교계 여성이 그 시대의 젊은 남자 애인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들 중 하나입니다.

레아는 극중의 시점에서 49세의 미망인 혹은 이혼녀로 보이는 여성으로 그 또래의 여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 자신이 속한 사교계에선 특별히 가십거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콜레트는 자신의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늙은 여자'라는 세간의 단어와 그 의미를 빗대어 서술하는 문장들을 여럿 볼 수 있었는데요.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20대 가량의 젊은 여자들이 간혹 30대나 40대 여성에게 '늙은 여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 여자들 세계에선 상당히 모욕적이고 심지어 멸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작게는 말다툼이나 크게는 몸이 엉켜 큰싸움으로까지 벌어지는 장면을 숱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콜레트가 논하는 '늙은 여자'에 대한 의미는 어떻게 보면 본래적이면서도 여주인공 레아를 향한 좀 더 변형된 의미로도 읽힙니다. 육체적 젊음이 시들어 자신이 더이상 남성들에게 매력이 되지 못한다는 얼마간의 서사와, 그것에 대한 예민한 태도를 보이는 레아의 모습은, 어느 사회나 이 '늙은 여자'에 대한 투영된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중 레아에게는 그런 '유지되는 젊음'외에도 그녀 스스로 적지않은 부를 소유하고 있어, 그 시대에서도 상당히 보기 드문 배경의 여성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제 갓 20대를 바라보는 셰리는 어머니의 지나친 양육으로 인해, 혹은 자라면서 아버지의 감화와 영향을 받지 못한 것인지, 상당히 제멋대로 또한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그에게는 우연히 6년 전에 인연을 맺은, 누누라는 이름과 그 기대가 딱 들어맞는 여주인공인 레아가 곁에 있습니다. 물론 모두에게는 쉬쉬하며 만나고는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둘을 둘러싼 사교계의 인사들은 거의 알고 있는 눈치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과 이들이 서로 나누는 어색하면서도 때론 친밀한 감정적 분위기 속에, 남자로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셰리가 특히, 레아의 품안에서 가장 편안히 잠을 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20대 남자의 때도 없이 불타오르는 정욕에서 세간의 편견처럼, '다루기 쉬운 늙은 여자'를 손쉽게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레아가 그에게 제공하는 편안함, 사려 깊은 태도, 신중한 언행과 같은, 자신의 모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벽히 다른 유형의 여성이었기에, 작품 대미에서도 "내가 아는 레아는 그럴 수 없다"는 표현으로 독자들의 예견을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독 자신만의 레아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극중에 '젊은 부부의 사랑, 젊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외형적으로 보이는 자신과 셰리의 관계는 어찌됐든 정리되어야만 했다고 믿은 레아는 결혼 전에 자신에게 부득불 찾아 온 셰리를 단호한 거절과 함께 신부에게 보냅니다. 그럼에도 셰리에게는 자신의 아내인 에드메가 주는 '젊음의 육체'는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냉정함이 은연 중 드러납니다. 에드메에 대한 자신의 감정, 그리고 결혼 생활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과 이러한 불편한 분위기에 셰리는 겉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는데요. 바로 그것의 배경에는 '돌이켜보니 자신이 레아를 상실했다'는 자기 혐오와 연민이 뒤섞이는 본질적인 감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모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식객이자 '가까이 두지 않았던' 지인인 데스몬드와 호텔을 전전하며, 자신의 섣부른 방황을 합리화 하기도 하는데요. 결국 이렇게 극이 진행되는 지점에서, 콜레트는 어쩌면 독자들이 몹시 기대하는 이 둘의 '재회'를 자신만의 서사로 준비하게 됩니다,

단순히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는 표면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이미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란 아마도 어려운 법일 겁니다. 그렇지만 복선과 여러 감정선을 통해, 셰리에게 자신의 아내인 에드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이란 감정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현실적 처지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애달픔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죠. 간혹 다른 문학 작품을 보면, 결혼을 앞둔 여자가 오래 교제한 전 애인을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아마 현실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제법 있을 겁니다. 너무나 내밀한 내용이어서 쉽게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뿐이겠죠. 작가인 콜레트가 이 두 사람의 재회를 저런식으로 준비한 것은 아니겠지만 '레아'가 6개월 간의 여행에서 돌아왔고 스스로 홀가분하다고 여기는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역시나 의도가 짙은 만남이었습니다. 이는 레아와 셰리에게 각자의 다른 의도와 희망으로 연결된 재회였기 때문입니다. 레어가 과거에 경험했던 '성숙한 남자'의 이야기들을 문득 잊은 것처럼, 셰리 역시 그 순간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지난 날 끊임없이 함께한 시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6개월 간의 멀어짐은 두 사람을 그만큼 엇갈린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레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작가가 레아의 눈을 통해 본 셰리의 모습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작가는 셰리라는 인물 조성에 여느 다른 소설의 등장 인물들보다 특별한 개성을 만든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다른 식으로 증명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는데요. 작가가 마련한 대미가 그 끝이 아니라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다른 재회가 예비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과거의 다른 관계에서 너무나 많이 쓸데 없는 돈을 소비해서 후회된다는 레아는 막상 셰리에게는 자신이 해준 것이 없음을 알고 몹시 놀라는데요. 극에 등장하는 애첩이라는 단어보다는 레아는 셰리에게 정부가 맞을 겁니다. 이 서사에서 정부(또는 애첩)는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한다고 했는데 이런 것이 애초에 배제된 관계라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에 가까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집사의 자제하는 시선 속에서 ‘사모님은 정말 아름다워‘를 읽어낼 여유를 가졌고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

서로를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그 오랜 습관이 세리에게는 무기력을 레아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뭘? 혹시 내가 네 입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딱한 놈, 난 너보다 더 고약한 놈들과도 키스해 봤어. 그게 뭐? 내가 네 발밑에 엎어져서 날 가져!라고 외치기라도 할 것 같아? 기껏해야 젊은 여자들밖에 모르는 놈이. 내가 겨우 키스 하나로 정신줄을 놓은 것 같냐고!"

그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이름과 "자기야..."와 "이리 와..."와 "당신을 절대 안 떠나..."를 식별해 냈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그녀는 정복당했고, 그때마다 정복욕과 고백하고 싶은 쾌락에 휩싸여 그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로 누르며 속삭였던가.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필요하면 짧은 명령으로 자신의 망설임을 위장했다.

‘애첩‘이란 대체로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받기 위해 술수를 쓰는 여인을 일컫죠, 알아들어요?

레아는 성숙한 남자는 이별을 하면 했지 명명백백히 자신을 육체적으로 평가하며 다른 남자, 미지의 남자, 보이지 않는 남자와 비교하는 눈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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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슈에 대해 말하는 법
아리안 샤비시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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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샤비시는 쿠르드계 영국인으로, 케임브리지에서 자연 과학을 전공했습니다. 또한 천체 물리학으로 동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이후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으로 옮겨, 물리학의 철학으로 두번째 석사 학위를 마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제러미 버터필드와 휴 프라이스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에 소재한 아메리칸 대학에서 철학 조교수로 일했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잉글랜드 브라이튼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의과 대학의 윤리학 강사를 거쳐, 이후 수석 강사에 이릅니다. 샤비시는 기본 윤리와 페미니스트 철학, 과학 철학, 사회적 인식론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특히, 샤비시는 도덕 철학과 페미니즘이 접목된 생명 윤리, 의료 윤리 및 이와 관련된 대학원생 지도 과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Arguing For A Better World"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이 책은 워키즘, 즉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정치적 의식과 관련된 사회 운동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분석과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구조적 불의'에 대해, 철학자로서의 비판적 의견까지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철학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본질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현재 정치적인 영역에서 극단주의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타협할 수 없는 가치(여전히 헌법적 규정에서)를 앞에 내세워,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더욱 확산된 인종주의와 그런 맥락으로 점층되어 나타난 불의에 마찬가지로 철학자로서의 고민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는 저자가 말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와 그런 양상, 그리고 그 속에서 나날이 고통 받고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연민과 얼토당토 없이 소수자들이 너무나 많은 권리를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는 식으로 오도하는 그런 허위에 대한 문제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 스스로의 이성으로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심각한 편견과 인종주의, 그리고 전통적 가부장제에 근거한 남녀 갈등 문제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마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조장한 잘못된 사회적 관습을 그저 오래된 전통과 그것을 개선하는데 있어, 만연한 대립이 우려스럽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다수에 기대어, 획책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모습은 저자가 말하는 '구조적 불의'라는 문구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선 내용이 순차적으로 논의되는 글의 2장에서,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은밀한 말"이라는 주제 의식은 근래 어느 지식인이나 학자가 쉽게 다루지 못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수전 니먼의 글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엿볼 수 있는 당면한 현실과 다소 한발 물러서 있는 듯 보이는 분석으로, 요즘 학계의 성향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특히 2장에서 인용된, "넌 날 알잖아. 난 인종차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와 같은 소위 저자가 규정하는 무화과잎은 "마치 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야. 그렇지만 내가 보는 다른 인종은 의구심이 들어"와 같은 아주 교묘하면서 지독한 인식이라고 느껴졌는데요. 찰스 다윈 이후로 규명된 인종에 대한 분류의 역사가 백인을 그 기준점으로 놓고, 흑인과 유색 인종으로 규정한 학문적 매개와 같은 사회적 관습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인식이 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과거의 계몽주의자들이 불의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노예 제도 존치를 위해, 인간이라면 마땅히 존중 받아야 될 인간의 존엄성을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에게 만큼은 인정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명한 일례이기도 한데요. 일전에 우연히 어떤 유튜브 방송에서 접한, 이 찰스 다윈의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과학적 학문'의 한 맥락으로 명시된 것은 시간상 거의 백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는 분석은 그만큼 '정당하지 못한 사회적 관습'의 깊은 뿌리를 가히 짐작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장에서. 2017년의 영국의 한 조사는 응답자의 74퍼센트가 자신이 다른 인종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다'고 답한 결과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영국 시민들 다수는 자신이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것을 거의 자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한편으로, 뒤이어 논증되는 정치적 도그휘슬 dog whistle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에 양치기가 개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이 도그휘슬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떤 정치적 인식에서, 특정 계층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교묘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가정 hardworking families"과 같이 이는 보수 유권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보수 정치인이 이런 표현을 자주 써먹는다고 분석됩니다.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세간의 터무니 없는 편견처럼 평범한 백인 가정이 대체로 열심히 일하는 반면, 흑인 가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지난 시절 로널드 레이건의 심각한 날조이기도 했던, '복지의 여왕'이 미국 내의 인종차별적인 편견 때문에 이 복지 여왕의 인종이 으레 흑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 심지어 이것을 확신하는 지식인들과 정치평론가들이 이를 더욱 조장해 왔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저자인 아리안 샤비시가 비판적으로 인식한 도그휘슬과 관련해, 누구보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소위 네오콘의 대부로 인식되었던 그의 독창적인 학문적 결과물들이, 앞선 신보수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묘하게 차용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날 미국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미국 사회 일각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했던 '백인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흑인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미국엔 인종 차별이 종식되었다는 식의 안일한 논리를 로빈 디앤젤로 역시, 자신의 논저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가 흑인에 대한 인종 문제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최근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왜 흑인의 목숨만 중요하냐?"식의 논리가 BLM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본 일부 백인들에 의해 주장 되기에 이릅니다. 즉, 이는 권력 바깥에 놓여 있는 소수 흑인들에 대한 백인 인종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의 터무니 없는 인식으로 사회를 사실상 분열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4장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와 같은 도덕적 진술은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는, 특히 이러한 맥락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정리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충분한 저자의 해석은 논증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사회에 여러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왜곡된 현실 조건과 여기에 주요 기반에 되는 인종 문제에 대한 사실적 근거 없이, 그저 흑인들이 문제라는 편견과 더 나아가 오히려 백인들이 더 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과장된 논리는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점은 명백해 보이는데요. 더욱이 4장의 논증 가운데서, "정치인들은 종종 노동자 계급의 열악함을 빈곤보다는 백인성 whiteness이나 남성성과 연관 시키려는 의도에서 '백인 노동자 계급 사람들' 혹은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들'을 들먹인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의 불안정성은 백인 노동자들이나 흑인 노동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임에도 전자의 백인들에게 '백인성과 같은 인종적 동질성'만 부여하는 같은 엘리트들의 의도는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너희는 다른 유색인종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우리와 같은 백인들이다."와 같은 발언들 말입니다. 이렇게 백인은 남들보다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같은 노동자 계급이라도 백인 노동자 계급은 그 백인성이 우월하다는 식의 인식은 극단주의 정치의 득세와 맞물려, 사회를 분열로 이끌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최신의 정치적 트렌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최근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시작, 분명한 여성 차별적 인식과 인종주의적 시각, 그리고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 대한 분명한 혐오 의식을 대놓고 표출한 이런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미국 정치의 아이콘이 된 것은 그저 계급과 정당 정치의 별다른 양태만은 아닐 겁니다. 

7장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거부감을 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이 나라의 커다란 문제가 정치적 올바름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소신 발언을 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물론, 최근에 일반인들까지 그것의 오용과 경직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샤비시는 그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적 여파를 재생산하는 보수 우파의 목소리와 많은 담론에서, 우리는 표현의 자유와 비방 slur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연중에 사회적 화자에게 차별과 배제를 조장하는 언어의 매커니즘 자체를 자제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장의 논증 가운데서, 가장 공감했던 점은 인종 차별을 포함하는 이런 비방 표현들의 위력이 충분히 모욕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더 이상 환기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분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후반부에 정치적 올바름이 단순한 미덕 과시 virtue signaling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온-오프라인에서 발생되는 '무차별적인 모욕 표현'을 정치적 올바름이 도덕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혐오 금지법이 아니라, 혐오 표현 자체를 무시와 비꼬기와 같은 표현의 자유로 제어하자는 네이딘 스트로슨의 제안과는 사뭇 다른 대안이기도 했는데요. 제 개인적인 의견 역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와 왜곡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좀 더 첨언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7장의 논증 가운데,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와 멸시, 아직도 팽배한 여성에 대한 도구적 시각 등은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한 언어 활동 이상의 왜곡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논의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표면적으로 정치가 자유와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이런 이상을 겉으로 내세우며 차별과 억압을 강조하는 행태는 그리 장려 될 만한 일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혐오에 가까운 인종 차별적 의식, 여성을 사실상 도구로 생각하는 인식, 요즘 자주 회자되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이라는 요구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는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이를 떠받치는 시민 계층의 심각한 분열과 건전한 토론의 파행으로 이어지는 이런 근본적 문제들에 있어, 여전히 실효적 대안이 시민 사회에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그저 '정치의 붕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끝으로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유인한 세계는 무엇보다 세계의 최빈층에게 극심한 피해를 끼쳤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사회의 주류가 됨으로써, 누구나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불평등 구조와 이것을 떠받치는 구조적 불의의 사례는 전세계에 차고 넘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하류 계층에 속한 백인 노동자 계층이 그저 자신이 백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을 제외한다면, 현실에서 삶의 온존은 백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누구나 성취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실효성에 기반한 민주주의와 좀 더 환경을 개선 시킬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지만 아리안 샤비시의 논증대로 극단적 정치인의 손짓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시민'이 아니라 흡사 춤추는 인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사회가 대를 이어온 인종주의와 여전히 조장된 남녀 문제, 특히 백인 남성에 대한 우월적인 권리와 같은 사회적 차별이 과연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공화당 정치인들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무산시키는 과정에서 획득한 쏠쏠한 정치적 이익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보수 정치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방향성과 함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해에서 저자가 글의 대미에 인용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잘못된 삶을 올바르게 살 수 없다"는 공언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인종주의와 타인에 대한 비방을 서슴치 않고 이런 맥락의 주장들이 옹호받는 사회 자체는 은연중에 사회적 억압이 조장되는 모습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언급처럼,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도덕적 기준의 한 요소로 발휘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 한번 고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극단주의자들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그 이면의 본질을 시민들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인간은 본디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불확실해 보이기도 한) 알량한 이익에 흔들리기 마련이고, 이러한 매커니즘을 아주 본능적으로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현실에선 분명히 가능한 일입니다.    

- 8장의 '캔슬 컬처'와 관련된 논증에서 저자는 이 캔슬 컬처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좌파 권위주의의 한 형태로 제시된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한 거부감의 표현 정도가 아니라 사회가 얼마나 극단주의적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장애인 차별, 계급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억압 oppression의 한 형태다.

따라서 억압은 그것에 영향받는 사람들이 대체로 피할 수 없다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원할한 노동 공급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노동력을 충전해주는 그림자 노동이 필요하다.

균형만 잘 맞는다면, 손바닥만 한 권력과 자유라도 조금 더 누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당하는 착취를 더 잘 감내하고 그만큼이라도 조금 더 누리게 해주는 체제를 옹호한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길을 돌아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만 봐도 구조적 억압의 영향은 명백하다.

사회적 정체성들이 상호작용하여 억압과 특권의 혼합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교차성‘이다.

현재 미국과 영국에는 인종 간 평등은 이미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사람이 인종차별적 믿음을 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많은 이가 말하고 있듯이......","모두가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내가 듣기로는......","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줬는데......" 같은 표현을 써서 자신의 인종차별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남성의 성폭력이 그토록 쉽게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회가 여성을 애초에 신뢰하지 않고 남성은 이의 제기나 책임 추궁을 좀체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발언을 들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흑인에 대해서,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정도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왜 하필이면 흑인의 생명을 콕 집어 말하는가?‘ 나아가‘내가 지금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피력한다면 어떻게 여겨질까?‘

보수주의자들이 자기네가 알던 세상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흥분하고 발작하는 사례들을 보건대, 사회 정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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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24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쟁’이란 ‘말다툼’이기에, “말로 싸워야 한다”란, 으레 “저쪽이 하는 말은 싸워서 물리치고 없애야 한다”로 기울고 맙니다. ‘민주’는 ‘대화 + 타협’이라지만, 막상 ‘논쟁’은 ‘대화’도 ‘타협’도 아닌 ‘승리·박멸’로 기웁니다.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은 “이 목소리만 올바르니까, 넌 아뭇소리도 내지 마”처럼 오히려 억누르는 담벼락으로 치닫게 마련입니다. ‘민주·대화·타협’은 이쪽이 이기거나 저쪽이 지는 틀이 아닌, 이쪽과 저쪽을 ‘잇는(소통)’ 길을 나타내려는 뜻일 테지요. 이쪽과 저쪽이 말다툼(논쟁)으로 서로 으르렁대면서 옳거니 그르거니 싸우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은 불타다가 잿더미로 죽고 맙니다. 우리는 “논쟁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 “이야기로 마음을 주고받는 부드러운 길”로 거듭나야 비로소 사람다우리라 느낍니다. “이때에는 꼭 이렇게 해야 맞아!” 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올가미·올무’처럼 차갑게 가두는 목치기(단두대)처럼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다양성’이란 ‘다름’을 나타내는데, 다른 줄 받아들이는 길이란, “나랑 목소리가 달라도 받아들이면서, 싸움질이 아닌 이야기로 마음을 나누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참다름(참답게 다름·정치적 올바름)’으로 가려면, 왼쪽은 오른쪽과 이야기하며 받아들이고, 오른쪽은 왼쪽과 이야기하며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받아들임(타협)’을 이루려고 ‘이야기(대화)’를 하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쌈박질(전쟁·증오·혐오)을 모두 멈추고서 사이좋게(민주) 어깨동무(평등·평화)로 모이고 만나서 끝없이 어울려야 이룰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모둠 주먹(폭력)은 싸움(전쟁·군대)에서 비롯합니다. 가정폭력과 학교폭력뿐 아니라 성폭력도 바로 ‘싸움·전쟁·군대’에서 처음 생겼습니다. “남자 성폭력”이 아닌 “전쟁·군대 성폭력”입니다. 싸움(전쟁·군대)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암수(성별) 가운데 수컷이어도 주먹을 안 휘두릅니다. 모든 바보주먹은 언제나 싸움이 불씨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보주먹꾼인 사내를 가르치고 타이르고 나무라더라도 싸움(전쟁·군대)부터 도려내지 않고 뽑아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논쟁·토론’은 모두 ‘박멸·섬멸·승리로 가려는 말싸움’인 바탕인 터라, 논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바보주먹을 부추기고 만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모두 걷어내고서 ‘마음을 담은 말’을 주고받는 자리인 ‘이야기’로 거듭나면서, 왼오른이 어깨동무를 하고, 왼오른발로 나란히 걷고, 왼오른날개로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을 생각해서 열 때이지 싶습니다.

베터라이프 2025-01-24 10:05   좋아요 0 | URL
남겨주신 댓글은 좀 더 숙고하며 읽었습니다.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완전 다른 양상으로 치달은 미국 정치와 그런 변형된 극단주의 정치가 사회를 분열로 내몰고 있다는 진단과 그런 생각에 저 역시 동의하는데요.

저는 미국 정치에 좌파 혹은 진보 정치가 존재하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이며, 그저 인종적 이익과 자본주의가 왜곡한 차별에 따른 계급주의적 논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자들과 반대의 소위 리버럴 간에 정치적 대립만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대치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극단주의자들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있는지 이를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샤비시의 이 논저도 바로 이러한 측면의 논증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현시점에서 사회적 암과 같은 증오의 정치는 어떻게 보면 나날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건전한 공론장에 대한 함의를 지속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선동 정치가 이미 정치를 좌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무슨 설레발 같은 진단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저 역시 누구나 마음을 열고 개방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을 외쳤으면 좋겠지만 그런 이상이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유의 정치라든지,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한 그간의 이해가 이처럼 아무 쓸모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은 저 뿐만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는 경고는 바로 이러한 본질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혁명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윌리엄 도일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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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도일은 1942년 3월,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향인 요크셔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로부터 몇년 뒤인, 1964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박사 학위 역시, 같은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 직전 보르도 의회 의원들과 구체제"에 관련된 논문으로 통과 되기에 이릅니다. 그의 이 박사 논문은 1975년에 "보르도 의회와 구체제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요. 특히 도일은 영국 내에서 프랑스 혁명사와 관련된 권위자로, 이외에도 앙시앵 레짐, 얀센주의, 혁명시대의 귀족정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요크 대학, 노팅엄 대학, 브리스톨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또한 연구의 일환으로 옥스포드, 파리, 보르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에서 방문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브리스톨 대학의 역사학 명예 교수이며, 동시에 영국 아카데미 회원 및 프랑스 역사 연구 협회 (SSFH)의 이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rench Revolution : A Very Short Introduction, Second edition"으로 제목에 설명된 바와 같이 2판으로, 이 책의 초판은 1980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4년 12월에 이뤄졌습니다.

저에게 프랑스 혁명은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과 에드먼드 버크의 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읽은 혁명과 관련된 글은 바로 츠바이크의 책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접했던 판본은 대략 1988년쯤에 출간된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이 글의 저자인 도일은 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보수주의'라 불릴만한 흐름이 탄생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유주의 역시, 인간 세상에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혁명 이전의 다소 느슨한 동맹 관계라고 볼 수 있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후에 등장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의해 서서히 서로를 향한 전쟁에 나서게 되고, 이 혁명 전쟁에 대한 결말 또한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주도한 불안정한 '구체제의 복귀'로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이 미국의 독립과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헌법을 인류 역사에 등장 시킨 소위 마중물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친애왕 루이 15세가 사실상 암군으로서 소기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전형적인 귀족들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현체제의 모순을 넘겨 받은 루이 16세 역시,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왕이었습니다.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과 내부 모순을 갖고 있던 당시 프랑스 국정을 유능한 콜베르와 같은 재상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국정을 이끌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치달은 이 암군은 후에 등장하는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몰락과 비견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저자는 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2장에서 이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는데요. 대표적으로는 프랑스 왕국의 만연된 재정 불균형과 루이 16세의 재위 시기인 1778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가 물심양면 지원에 나섬으로써 초래된 막대한 재정 지출도 체제의 불안정을 가속화했다고 논증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 법복 귀족들인, "프랑스 전역을 아우르는 파리 고등 법원의 1250명 구성원 모두가 매관매직의 결과로 그 직위를 차지했다"는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프랑스의 정치와 사법 및 재정의 붕괴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이러한 왕국의 체제적 모순들을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알량한 특권 추구와 베르사유에 대해선 일절 소극적인 태도로 행동했던 점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이에 고귀한 국왕은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가였던 자크 네케르를 '궁정의 고문'과 같은 위치로 영입하여, 오로지 왕실에 필요한 과세에만 집중했지만 이는 프랑스 정국 안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왕정의 권위와 정치력이 함께 붕괴하여 위기로 치닫던 상황에서 우박을 몰고온 거대한 폭풍우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며, 익어가던 곡식이 거의 초토화 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결과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연유로 1789년의 추수 이전 몇 달 동안은 비참한 경제적 곤경이 빈곤 계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가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그대로 실현 되었습니다. 결국 1789년 7월 14일,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은 그야말로 분노에 휩싸인 민중들의 손으로 거대한 혁명의 불길에 뒤덮이게 됩니다. 민심은 겉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정국의 극심한 악화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의 '영국식 해법'과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바로 국민의회의 기적적인 탄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루이 15세는 그동안 진행된 혁명의 업적 대부분을 비난하는 편지를 베르사유에 놓고 도주하다 동쪽 국경지역인 바렌에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결국의 이 파국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자코뱅에 의해, 왕을 단두대로 보내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극성 분자라고 볼 수 있는 상퀼로트들과 극명한 혁명의 분위기였던 그 해, 가을과 겨울 동안 지방의 특별 재판소에서 거의 1만 4000명이 사형 선고를 받아, 일부는 총살되거나 익사당했지만 대다수는 왕을 처단했던 도구인 기요틴 아래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들 상퀼로트들의 극단적인 행동과 저변의 인명 경시는 혁명을 아귀 다툼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는데요. 이런 정치적 파국에서 아주 불분명한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을 소위 반혁명의 잔당으로 몰아 이들은 피의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과거 존 듀이가 프랑스 혁명에 가졌던 그 우려의 본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4장에서 저자에 의해 인용된 루소는 "인간 사회가 절망적으로 타락했고 타락시키지만 단지 전면적인 변화만이 그것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가르친 연유에는 어쩌면 그가 인간의 불확실성을 진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결국 이것의 당면한 여파는 당시 국민공회와 정치 권력을 향유했던 자코뱅들의 업보로 돌아오게 됩니다.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 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말로 역시, 마찬가지로 비참했던 역사의 한 장면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툴롱에서 시작된 화려한 군사 경력의 시작과 함께 나폴레옹을 통한,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혁명의 변질로 이어지게 됩니다. 군사 작전과 군 통솔에 있어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인 나폴레옹은 장 란, 조아킴 뮈라, 니콜라 다부와 같은 군 엘리트들과 함께 프랑스를 유럽의 군사 패자로 이끌게 되는데요. 실질적 공화주의의 실험대가 되었던 프랑스의 영토 확장은 아무래도 이러한 현실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던 대다수 왕정 국가들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던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혁명의 수출'과 같은 과민 반응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밀라노를 비롯,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로마 교황청을 손에 넣은 뒤, 프로이센 마저 제압하여 프랑스 북부 저지대를 석권하게 됩니다. 다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의 정치적 패착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러시아 원정의 참혹한 대실패는 그의 몰락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1830년까지 정치적 혼란의 수렁으로 내몰게 됩니다. 다만 프랑스 군이 이르는 지역에 현지 귀족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공화주의 형태의 제한적인 시민 자치를 도입한 것은 실로 사회 변혁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만 북 이탈리아를 비롯한 프랑스 군의 점령지를 전제 정치의 한 형태로 황제 자신의 측근들로 채운 점은 그것이 표면적이라 할 지라도, 혁명의 정신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호 모순이 체제 안에 점철되어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군사적 비상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선 역사적 행로와 약간 구별되는 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저자인 도일은 몇가지 예시를 5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일단 제한적이긴 하지만 전제적 민주주의를 이끈 것과 무엇보다 유럽에 자유주의 관념을 현실적으로 추동한 점을 들 수 있겠는데요. 이때 잉태된 자유주의의 본질은, "투표의 자유, 사상과 신념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자의적인 법이나 세금의 부과 혹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로 크게 대표됩니다. 물론 이 시기의 자유주의 역시, '재산의 평등'은 믿지 않았는데요. 뒤에 미국의 헌법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시기의 법의 지배란, "재산 소유자들의 절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체제의 본질이 '대의제가 없는 체제'임을 감안해 본다면, 자유주의가 말하는 대의란 어쩌면 '특정 계층의 이익'이라는 측면과 맞물려, 체제의 안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여기에 한술 더 떠, 알렉시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을 민주주의와 평등의 출현이지만 자유의 출현은 아니다" 라고 역설적으로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혁명 기간의 유혈 사태와 민중들이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지향하게 되는 사태 자체가 사실상 프랑스 정치를 혼란으로 이끌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혁명의 진보는 군주제의 붕괴로 인한, 공화주의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남성 보통 선거를 채택하고 국민공회를 소집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 등은 아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새로운 정치적 모멘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진정한 법의 지배에 대한 아이디어가 바로 혁명의 시기에서 점차 규명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루이 16세로 대표되는 베르사유와 귀족 정치가 상당한 사회적 모순에 놓여 있었고, 대다수 민중들의 삶을 불안정성과 경제적 빈곤으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위기 의식 조차 없는 정치에 대해선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현재까지 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후세의 해석은 세대를 거치면서 다소 수정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이 혁명이 내포한 인권과 자유주의, 그리고 법의 지배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인 가치들이 무엇보다 피와 폭력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모순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혁명 이전, 1700년대에 불었던 종교 개혁과 그것으로 인한 신,구교의 갈등 그리고 그런 와중에 프랑스 가톨릭계가 이권화하여 민중의 삶과 더욱 멀어진 것은 귀족들의 착취 만큼이나 심각한 사회적 폐해로 가증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앙시앙 레짐 자체가 권력 바깥에 있는 민중의 삶을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만들었고 켜켜이 쌓이는 체제의 모순들이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삶' 자체를 앞선 측면에서 더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 점이,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루이 16세가 과거 루이 14세의 유산을 그 절대 왕정과 같은 '하나님이 인정한 국왕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을 수도 있고 궁정 정치에서 파리와 지방을 좀 더 개혁하기 위한 적절한 인사는 물론, 왕실 재정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점은, 1세기 전의 영국과는 사뭇 다른 현실적 파탄의 전제라고도 읽힙니다. 그럼에도 후에 등장한 프랑스의 제3 공화국은 물론, 전유럽의 점진적인 공화주의로의 이행은 민족주의의 확산 만큼이나, 그것의 본질적 가치와 정치적 체제의 변화를 이끌었던 세계사적 요인이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프랑스혁명을 대하는 영어권 대부분의 태도를 위한 기본적인 골격은 혁명의 "최악의 난폭한 행동"이 나타나기 몇 년 전인 1790년에 이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 의해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전면적인 파괴를 통해 그들이 자유라고 말한 것을 확립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요틴에 대한 특유한 공포조차도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이나 수백만에 달하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피해자들이나 강제수용소의 조직적인 잔혹성이나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의 집단적인 위협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비하면 보잘것없어졌다.

페인은 버크가 허세를 부리며 자랑했던 영국의 헌법이 연륜이 오래된 인간 지혜의 산물이기는 커녕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사법적 위계질서의 정상에서는 13개의 고등법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최고의 상소 법원으로서 중요한 모든 왕령의 법안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인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지역에서의 귀족들은 도로의 강제 노역은 고사하고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직접세인 타이유taille 납부하기를 계속 회피했다.

왕과 대신들은 프랑스가 국왕의 가장 탁월하고 교육받은 신민들의 효과적인 동의와 협력을 통해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더 받아들여야 했다.

왕실 회계를 검토하기 위한 상설 청문위원회를 두자는 명사회의 제안을 루이 16세가 거절한 뒤 명사회는 좌초했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재산가들은 봉건적 권리를 소유했든 아니든 지방이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졌다.

그것은 혁명의 패배나 존속을 국가 자체의 패배나 존속과 동일시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1789년 이래로 달성된 그 어떤 것에 대한 비판자라도 반역자라고 낙인찍힐 가능성이 컸다.

새로운 프랑스는 공격으로부터 국토를 보호하려 하기 위해서만 싸울 뿐 왕조들 사이의 사적인 맹약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고 국민의회는 선언했던 것이다.

1815년의 반발이 거든 명백한 승리 이후 100년 이내에 국민 주권은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현대 정치의 보수주의의 우익은 혁명에 대립되는 모든 것인 만큼이나 프랑스혁명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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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5
케네스 미노그 지음, 공진성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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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북섬인 팔머스턴 노스에서 태어난 케네스 미노그는 어려서부터 호주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남학생을 위한 중등학교인 시드니 보이스 고등학교와 호주 시드니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시드니 대학 (USYD) 에서 수학했습니다. 1950년에 예술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당시 시드니 대학에서 언론의 자유, 세속주의, 반공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존 앤더슨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이후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미노그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와 이집트의 포트사이드를 거치며 런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잠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한 후에 미노그는 런던 교육청에서 18개월 동안 대체 교사로 일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게 됩니다. 다만, 영국 정경대 (LSE) 에서 석사 논문을 거절 당하자 그는 좌절하지 않고 같은 대학의 경제학부 야간 과정에 등록하게 됩니다. 졸업 후, 그는 웨스트 컨트리에 있는 연구 대학인 엑서터 대학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1956년 마이클 오크숏의 초대로 런던 정경대에서 조교수로 시작해, 런던 정경대에서의 이력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후, 명백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보수주의적 맥락에서 자유주의 역사관을 신념으로 견지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런던의 우파 싱크탱크인, SAU (Social Affairs Unit)의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미노그는 채널 4에서 진행하는 자유 시장 경제에 관한 6부작 TV 프로그램에도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에 그는 호주 정부가 수여하는 '호주 연방 100주년 기념', 센터 너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6월, 갈라파고스의 산 크리스토발 섬에서 주최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의에 참석한 이후, 당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 A Very Introduction"으로 지난 199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케네스 미노그의 이 글은 원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일반인들을 위한 '정치'에 관한 개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논증되는 주요 배경은 대체로 유럽과 미국으로 한정하여 서술됩니다. 짧게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연원과 이후, 중세까지 기독교가 주도한 정치적 분화, 그리고 근대의 자유와 민주주의, 전체주의적 망령을 돌아보고, 지금의 정치가 미래에도 온전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들을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몽주의자들 혹은, 합리주의에 인도된 많은 정치적 관념들은 그것의 철학적 기원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로마의 그것도 그리스인들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고대의 인류가 한정된 사회로 구축된 '국가'라는 관념에 얼마나 신비로운 이상을 부여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아니 합리적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는 그것의 정치적 유산이 실제로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앞선 기본적 서사보다 서두에 미노그가 필연적으로 지적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과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그런 연유로 12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그에게는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설득력과 근거가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몇 세대에 걸쳐 세력을 확장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이데올로그화에 대한 미노그의 비판 역시, 스스로가 오랫동안 보수주의 (혹은 우파) 학자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논증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이성적인 판단을 보이고 있는 점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4장에서 미노그는 오늘날 우리가 여실히 인지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기독교에서 유추된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유구한 역사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독교가 종래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이성의 눈을 뜬 인간'의 관념의 시작과는 다소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 볼 수 있는 '법의 필요성'이 중세의 영주와 기사들간의 봉건 계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16세기 역사에서 극적으로 '토머스 크롬웰이 법이 어떻게 전제 정권을 초월한 시급한 문제인지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로는 비참했지만 그 파국의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정치철학적 영감'을 안겨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라는 가치는 법의 범위에서 비로소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노그는 12장 이후의 논증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자유의 본질, 즉 "자유의 역설은 자유가 오직 우리가 이미 가진 소유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주목할 만한 요점은 어쩌면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에 대해 조금 에둘러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평등은 다소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진정한 평등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하며, 그것의 이상 자체는 오늘날 우리가 구축한 사회에서 현실적으로도 가능한지 매번 상대방과 다투게 마련입니다. 특히, 개인의 선호, 선택의 자유 및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라는 이름의 지배적 체제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평등과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은 역시나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일부 세인들이 평등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누명'을 덧씌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치의 발견과 그것의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배경이기도 한, '자기 이익의 추구'는 미노그가 다소 회의적으로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철학적으로 대치되는 관념이기도 합니다. 이 글 8장에서, 정치인들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이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의 폭로와 그런 와중에 우리의 공익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 치열한 논쟁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만, 그가 말하는대로, '공정성의 관념'은 많은 변주가 존재한다는 분석 자체는 저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저자는 자유 시장이라는 큰 틀안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상이고, 그런 인식의 범위에 심지어 정치인들도 비켜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요. 다만, '인간의 합리적 이성' 만큼이나 깊게 다뤄지지 않는 아니 인간의 불확실성 만큼이나 그가 회의적으로 접근하는(소위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도덕적 본성'에 대해, 모두가 한결같이 원하는 '정의'의 존재 의미를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결부지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 자체가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대로, 보다 합리적 이성의 숙고가 전제되어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세계'의 시민들이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사회의 기본 정의 관념이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미노그의 언급은 이 지점에서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그의 낯뜨거운 표현처럼 '자유 세계의 정의는 세간에 알려진만큼 문제가 크지는 않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겁니다.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노그는 사회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쪽이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부류가 극한 갈등에 놓일 때, 어쩌면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정의를 단순히 복리에 준하는 어떤 이득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인식의 파급은 정의 담론 자체를 뒤집어 엎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장의 초입에서, "인간이 천사라면 아무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는 단언과 비슷한 그의 가정은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善)에 이르는 길은 완만하지 않다는 지난 금언과 같이, 정의 역시 우리 정치의 토대이자 근간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정치관념적인 의미로 국한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현실과 이상의 명백한 괴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에서도 심심잖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기의 미노그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홉스는 때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신중하게 펼쳐냈습니다. 물론 그의 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법의 지배하에 누리는 자유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정확한 정의라고 판단됩니다. 이에 저자인 미노그는 지난 세기의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동일시 했던 인식을 다시금 언급합니다. 우리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 역시 그러한 궤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자유와 민주주의가 가히 한 몸이라고 강조될 필요는 없겠지만,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자유'란 여러모로 '소수만의 자유'로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더욱 그렇겠죠.) 제가 몇 번이나 인용했지만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용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읽히는 10장 후반부의 논증 가운데,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일정한 종류의 이상을 누릴 있다"는 문장의 본질은 이미 전술 되었던 문화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특별한 계급'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전통의 수호자들이나 기존 사회 구조적 체제를 떠 받들고 사회를 보호하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저는 저들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경제 엘리트들과 야합하는 과두제에 대해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이해 관계를 함께한 역사를 떠올려 본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당히 뿌리 깊은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은 아마도 쉽게 예상되기도 합니다. 이미 일전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가 계급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강조했으니 말입니다. 흔히 '오프 더 레코드 상'에서 일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와 과두제가 혼합된 정치체라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는 소위 자기 이익적 관념은 어떻게 보면 힘 있는 자들의 우선 순위라는 내심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법의 지배를 뼛속 깊이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이를 전혀 용인할 생각이 없다는 점은 이 글에서,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민주주의와 과두제의 혼합은 그것이 개인의 신념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민주주의 정체와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과 사뭇 역설적인 모습이라 봐도 그리 과한 상상은 아닐 겁니다. 

끝으로 과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에 참여한 '학자'가 말하는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개인적 의문이 그동안 있었습니다. 만약 헨리 키신저를 떠올려 본다면 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굴절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정치적 관념이 지배적인 다수의 기득권 세력에게 민주주의와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도 큰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기존 정치와 과거의 유산을 다루는 많은 글들이 진실로 냉혹한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계몽주의적 유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기성 정치에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뻔뻔한 얼굴 정도는 이제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느껴지니 말입니다. 결국 미노그는 자신의 글의 결말에서, 다소 의미심장하게 도덕의 재부상과 같은 근래 학계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면 현실과 이론의 괴리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일견의 '정의', 즉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끊없는 일이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예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유 시장의 담론이 무력화되었던 2008년을 목도했을 겁니다. 아마도 앞선 그 미래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오판의 미래가 아니라, 추정컨대 '근대 정치의 왜곡된 재림'의 비극적인 미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혁명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는 것을 보니, 전통적인 의미에서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로 불릴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6장에서 저자인 미노그는, "정치적 인간은 권력에 의해, 경제적 인간은 부를 향한 이기적 욕망에 추동된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간접적으로 표현된 시장 자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정치가 도덕적이든 경제적이든 순수한 상태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 등은 그가 여느 정치학자들과는 다른 정치철학적 관념을 드러내는 증거라 여겨집니다.

-모든 측면에서 정치는 철학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비현실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의 본질적 의미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남습니다. 
    


정치는 인간의 삶의 틀을 유지시켜주는 활동이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현재에 대한 비성찰적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에 대해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길 원하는 정부여당과, 모든 나쁜 것에 대해 비난을 가하길 원하는 야당들이 좋고 나쁜 모든 것이 정책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일에 공모해 왔다.

그러므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의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확실히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

폭력과 무질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됐다. 자기의 공동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강한 도덕적 감각과 법적 감각이 타자의 중요성에 관한 어떤 감각과도 병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권리와 자유는 먼저 귀족계급과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에 의해, 그리고 보통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홉스는 그런 이상주의가 젊은 학자들을 야심 있는 사람들의 앞잡이로 만들어 유럽에 엄청난 유혈참사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사람들ㅇ이 자연법에 대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근대 정부의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핵심적인 문제에 무감각했다.

그러므로 국가는 인간화될 필요가 있다. 이 두번째 시각은 국가를 일거에 지양하려는, 그리고 정치에서 불가피한 통치자와 신민 간의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 완벽한 공화국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는 정치에서 그 무엇도 순수하게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정말로 순수하게 경제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익이 개인적 비용과 이익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익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비판하는 편과 비판받는 편이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저치학의 과학적 기획이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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