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하는 삶, 소비되는 삶 NOUVELLE VAGUE 13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궁선영 옮김 / 새물결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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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유대교의 기본 원리를 추종하지 않는 폴란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의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보다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바우만은 폴란드 제1군에 입대하여 콜베르트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 참여했는데요. 1945년 5월에는 그런 공로로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시기까지는 자신이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음을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1953년에 이미 소령 계급이었던 바우만은 자신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한 그 시점에 불명확한 이유로 불명예 제대를 당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우만은 반시오니즘적 경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1954년부터 상당히 짦은 기간에 바르샤바 대학의 강사를 역임하고, 그즈음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에 비판적인 인식을 키운 바우만은 외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를 거쳐, 1970년에 영국의 리즈 대학의 사회학 교수직을 수락하게 되는데요. 그의 본격적인 경력은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되고, 왕성한 학문적 활동, 일관된 사회학적 비판 의식, 신자유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개선 요구, 유동하는 근대, 시민의 쓰레기가 되는 삶 등에 대한 특별하고 고유한 성찰을 스스로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그의 이런 평생의 노고로 비롯된 논저는총 57권이 되는데요. 이는 세계화, 근대성과 탈근대성, 소비주의와 도덕성에 관한 주제로 후학 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에게 학문적 귀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onsuming Life"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바우만의 이 책은 나날이 강화된 현대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적 이면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유동하는 근대를 내면화한 사회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인질이 되어, 그것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소비와 소비주의라는 주제로 이를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이 소비와 소비주의는 그저 단순한 '쇼핑과 구매'라는 담론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이데올로기가 모두의 삶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한데요. 그 역시도 4장에서 에밀 뒤르켐의 가히 위대한 작업이었던, '사회적 사실'의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서도, 이 노골적인 소비주의 시대가 앞선 시대적 요청과 더불어 정체성의 문제를 비롯한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이 소비와 소비주의에 기반한 우리의 삶이 모두의 이익과 삶 자체의 고유성에 이바지 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바우만 특유의 사회학적 비판 입장을 부족함 없이 접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우만의 설명이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가 이전의 '생산자 시대'라는 언급은 아마도 뉴딜 시대의 광범위한 사회적 협력이 가능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식의 정치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게리 거스틀 역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깊은 공감에 따른 특별한 인식을 내비친 바가 있는데요. 거스틀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봐도 그러합니다. 다시 바우만의 글로 돌아와, 그는 서두에서, "분명 소비는 평범하고, 정말이지 하찮은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류의 '개인의 자아 실현'과 '개인의 이기적 목적'에 대한 그야말로 찬사에 가까운 동조에 이르러, 자본주의 체제 하에 수많은 개인들은 '돈'을 통한 어떤 개인의 이상실현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강조해 왔는데요. 그런 수단적 측면에서 이 '소비'는 상당히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바우만이 인용한 메리 더글라스는 명백하게, "사람이 왜 생존의 요구를 초과한 사치품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은 바우만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결국 우리 사회는 이러한 맥락의 소비주의 시대로 이행해 왔고, 이런 소비를 주요 경제적 행위로 급부상 시키고, 모든 시민들의 마음에 내면화 하게 된 과정에는, 어떻게 보면 이 소비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장에서 바우만은 우리 인간이 새로운 요구, 욕구, 충동에 대한 중독 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이를 위해 소비주의 경제는 과잉과 낭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인식을 다소 과장했다고 볼 수 없는 현실적 사례와 그런 다양한 인식을 이번 장에서,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는 소비 자체에 대한 과도한 정보 제공과 많은 소비자들이 폭식을 일삼는 환자들처럼, 소비에 집중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는 점을 바우만은 꼬집어 강조합니다. 즉, 이런 소비를 통해, 개인의 충동적인 행복을 충족하고, 이 소비 행위에 기반한,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소위, 소비적 개성을 표면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요. 이러한 소비에 대한 욕망이 언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적극적으로 조장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메커니즘의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소비 열풍'에 동참하지 못하는 수많은 소외자들을 양산하고, 이 소비주의적 맹신은 끝내 모든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에 눈을 감게 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음 2장에서 바우만은, 이런 "유동적 현대라는 기획의 광범위한 실천'이 작용한 소비주의 사회의 일상적 삶이 모두의 인식에 자리 잡았고, 이는 더 나아가 '국가 정책의 원리'로 더 강화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종래의 자유 민주주의가 개인의 이기심 확대와 사사화에 따른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기본적인 소비 개념 자체는 즉각적이고, 소비하는 소비자의 행복과 만족에 연결되어, 일종의 정신적 충족감까지 개념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래의 '사회적 국가'라는 인식 자체가 후퇴하고, 국가는 이런 소비자들이 더 퍼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파운더리'가 되기에 이르는데요. 이것이 바우만이 진단하는 유동하는 현대의 삶을 사는 소비주의적 집단의 감출 수 없는 진면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규제 철폐와 사사화를 통한 생활정치의 상품화"가 소비자 사회를 규정하는 새로운 목록임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 생활정치라는 것은 '거짓말 정치화'와 '정치 불산'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우만은 2장의 논증을 통해, 통제받지 않는 소비주의와 그런 맥락의 사회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존 듀이와 같은 종래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조되는 '자신에 대한 책임','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이런 소비주의 시대에서는 불필요한 것이며, 오로지 바늘 귀처럼 스스로에 대한 삶에만 책임지는 것이 현재의 이상이라는 것을 역시나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3장에서, 바우만은 '소비와 개인의 선택의 자유' 그리고 그 문제를 함께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도 우리는 이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구성원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에 강하게 전도되어 있는데요. 이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무력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더 나아가 자유의 기본적 원리를 왜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식의 이런 '선택의 자유'가 우리 시대에서는 '자유의 여왕'이자, '자유의 더할 나위 없는 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통장의 잔고가 없어도 신용 카드를 통해,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그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 부분은 제가 대략 희화화 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인 바우만도 2장 후반부에서 이러한 인식을 내비치고 있었는데요. "20세가 되면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일련의 신용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 시스템적 선택의 자유는 미국의 내수 경제를 어떤 식으로 몰아갔는지, 2008년 이후, 그 붕괴의 흐름을 통해 여실히 깨달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규제 철폐 자체가 많은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사항이라고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호도해 왔습니다. "복지가 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자본주의적 규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무분별한 사사화가 과연 모든 시민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우만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비판을 받을 수 없는 사상이라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라는 함의에 있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명백한 부분입니다. 결국 2장에서 바우만이 언급하는 대로, '소비하는 것'이 이 소비자 사회의 구성원들의 자격 요건이 되었고, 홉스 식의 사회적 보장을 위해 마땅히 '인간의 충동'과 같은 요인에 대해. 때에 따라 최소한의 제한이 포함된 어떤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규제가 필요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결국 이 거대한 소비주의 사회가 개인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과대 포장하고 본질적인 이 '소비자들의 삶에 대한 행복'을 등한시 하게 된 연유이기도 한데요. 이는 거짓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이를 조정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이익을 누리는 자본주의적 구조가 나날이 변질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뮈르달이 제안한 '언더클래스'에 대한 논의로 바우만의 글은 마무리 되고 있는데요. 그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맥락으로, '범죄의 급증'과 '복지의 급증'이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결국 이런 분열된 비교의 맥락은 소위 언더클래스의 급증을 낳은, 신용카드 사회의 확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주 외형적인 관점에서의 비평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용 카드'조차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배제된 언더클래스의 탄생과 급증은 소비주의 시대 자체가 얼마나 배타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선 선택의 자유와 맞물려, 모든 문제는 오로지 개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 바우만은 이 대목에서, 오늘날의 가난한 사람들이 (나머지에게 골칫거리인) '비고용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소비자'라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강요받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체제와 그 구성원 모두에게 말이죠. 그럼에도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지만,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인정했던 바대로 우리는 상당히 멀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버리지의 복지국가 내지는 이 복지가 자유 민주주의의 안전망이 되고, 일부가 소외당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로서, 이것은 규제라는 명목으로 해체되어선 안 된다는 일련의 믿음들은 이미 과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저 역시도 더 많은 소비, 더 방대한 소비주의가 우리의 사회를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 그 점에 대해 비관적이며,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해체되는 주요 원인에 바로 이 '소비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글 3장에서, 일련의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삶'을 논하며, 성형수술이 어떤 식으로 그러한 삶에 이바지 했는지 이를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형수술을 받으려고 하거나 이미 받은 사람들이 소위 '과거의 총체적 부정'과 자신의 몸을 사실상 상품화의 단계로 위치시키고, 이러한 성형 수술 기법의 더할 나위 없는 발전은 바로 소비주의의 시대의 소비자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변화된 태도를 드러내는 일례라는 상당히 복합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소비주의 시대의 소위 '성형 수술 트렌드'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 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80년 후 그리어는 이미 "심지어 중국 북서부의 가장 먼 변방에서조차 여성들이 헐렁한 솟옷을 벗어버리고 패드 브라자와 관능적인 치마를 입고 있으며, 생머리를 염색하고 화장품을 사려고 돈을 모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유화라고 불렸다."

이상적 피고용자는 이전의 유대, 책무 또는 정서적 애착이 아무것도 없어여 하며, 새로운 유대, 책무, 정서적 애착을 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의 시장가격은 개인적 삶의 추구 대상 중 꼼꼼히 살피고, 주시하고 , 계산되어야 할 많은 시장가격 중 하나일 뿐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먼저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고는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판매 가능한 상품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능력을 끊임없이 소생시키고, 부활시키고, 보충하지 않고는 누구도 주체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소비자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소비자를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노동력‘은 소지자와 분리해 구매되거나 팔릴 수 없기 때문에 노동이 그야말로 상품이라는 인상은 실상에 대한 지독한 왜곡일 수밖에 없다.

생산자 사회를 사로잡은 상품 물신주의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사회를 사로 잡고 있는 주체성 물신주의는 궁극적으로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관계의 매력은 인간의 유대를 묶고 푸는 것이 도덕적으로 ‘관용주의적인 (무관심한, 중립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행위자에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선언에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소비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원하고,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의 본질은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소비자 사회는 과거의 어떤 사회도 도달할 수 없었을 만큼, 도달할 꿈을 꿀 수도 없었을 만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겠다는 약속에 의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비자 사회‘는 소비주의적 생활방식과 삶의 전략의 선택을 촉진하고, 장려하거나 강요하며 모든 대안적 문화의 선택을 혐오하는 사회를 나타낸다.

동일한 이유로 (즉, ‘사회적으로 적합하다‘는 쟁점을 개인의 책임과 관심사로 전기하기 때문에) 소비자 사회에서 배제주의적 실천은 생산자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가혹하고, 단호하다.

소비자 사회 구성원은 자체가 상품화의 생산물이다. 이 구성원이 규제 철폐와 사사화를 통해 생황정치의 상품화 영역으로 내맡겨지는 것이 소비자 사회를 다른 형태의 인간적 함께함과 구분해주는 주요한 차이점이다.

크루그먼은 "지난해 미국은 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인 것보다 57%를 더 지출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해올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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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 개정판
이언 매큐언 지음, 이민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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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주의 올더숏에서 태어난 매큐언은 군인인 아버지의 순환 근무 때문에 어린 시절을 동아시아, 독일, 리비아 등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영국으로 복귀한 이후, 매큐언은 서퍽에 소재한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해,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 과정을 마쳤고, 노리치에 있는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를 취득합니다. 최초로 출간된 그의 작품은 1975년의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초기 그의 작품은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활동의 중기 초기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사랑 Enduring Love'는 비록 부커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평단으로부터 열렬한 관심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듬해인 1998년에 '암스테르담'으로 그는 비로소 '부커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또한, 2001년에 출간된 '어톤먼트' 역시 좋은 평가를 받으며, 2007년에 조 라이트에 의해 영화화가 됩니다. 다음 작품인 '토요일 Saturday'도 영어로 쓰여진 문학에 수여되는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 상' 수상하게 되고,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습니다. 매큐언은 지금까지 6번이나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며, 1999년 함부르크의 알프레드 퇴퍼 재단에서 주최한 연례 '셰익스피어 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 '더 타임즈'는 이언 매큐언을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2012년에는 모교인 서섹스 대학이 주최하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받습니다. 앞선 문학 경력과는 논외로 매큐언 역시 여러 정치적 의견 피력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동성애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소위 '이슬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2016년 브렉시트에 대해서도 사실상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는데요. 그런 연유로 '정치적 의견을 내는 작가'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난을 가하는 사람들에 의해 백안시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지난 2005년 원제, "Saturda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에 초도 번역이 되었고, 이번에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3년에 출판된 2판 1쇄본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헨리 퍼론은 런던에서 저명한 신경외과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친의 슬하에서 일련의 교육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업적 커리어 역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요. 또한, 수련의 시절부터 교제한 변호사인 아내로부터 사랑스럽고 다재다능한 일남일녀의 자녀들을 두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내에서 존경받는 의사이자, 여기에 내적으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요. 이미 도입부에서 작가인 매큐언은 이 헨리 퍼론이라는 의사가 사회로부터 적절하게 (관념적으로 혹은 영역적으로) 유리되어 있고, 그의 가정과 자신의 직업이 갖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서구사회의 전형적인 의사의 삶을 표징하고 있는데요. 심지어 일부 묘사에서 서사적인 이외에, 영국의 의료 제도를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소개하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가는 주인공인 헨리 퍼론의 인물 조성을 위해, 영국 런던 퀸스퀘어에 소재한 신경과 및 신경외과 국립병원의 신경외과장에게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극에서 드러나는 헨리 퍼론의 의료인으로서의 전문성은 바로 앞선 정보를 통해 얻은 상당히 기민한 묘사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일전에 일독한 미셸 볼드린과 데이비드 K. 러바인의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는 논저에서 이들 저자들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구 의료계의 의사들은 거의 철저하게 환자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태도를 훈련받는다고 언급했던 바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저 대목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작품에서 퍼론은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딸인 데이지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지도 하에, 어려서부터 여러 소설 작품들을 접하면서, 이런 문학과 상당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아버지에게 일부 고전 작품을 추천하기도 하는데요. 자신의 딸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퍼론은 딸의 권유에 못이겨 카프카를 읽기도 하지만 스스로 이런 생각을 도출합니다. "내가 직면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의 모습은 어떤 측면에서 일개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입니다. 특히 척추와 뇌질환을 두루 살펴보는 이 의사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환자들을 의사라는 직업을 떠나 개인적인 관점에서 누구보다 생생히 접했을 겁니다. 그런 타인의 삶과 죽음의 기록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이 '토요일' 전후로 겪게 되는 치명적이면서 돌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인생과 삶에 대한 양가적이고 동시에 복합적인 고유한 성찰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소 개인주의적이고 사회 자체에 의식적인 거리를 두고 있던 한 개인이 말입니다.


퍼론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시점은 조지 W. 부시에 의해 벌어질 '이라크 전쟁' 개전의 바로 직전인 상황입니다. 당시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고 있던 이라크는 곧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의 대통령에 대한 압박의 요인으로, 곧 벌어질 상황인데요. 이 지점과 관련해, 매큐언은 극중 후반부 데이지와 주인공인 퍼론의 서로 양보하지 않는 국제정치적 대화에서 데이지의 입을 통해, 작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아빠도 과격파 네오콘이 미국을 접수했다는 건 잘 아시죠. 체니, 럼스펠드, 울포위츠, 이라크는 이자들이 애지중지하는 비장의 사업이었어요." 이것은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영향 뿐만 아니라, 이라크에 있던 원유 문제, 그리고 블랙 워터와 같은 PMC 사업과도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이미 영화화된 딕 체니의 사실적 개인 전기라고 볼 수 있는 '바이스 Vice'에서 이는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국제적 대의와 인권으로 포장된 이러한 군사 작전의 이면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었는지는 여러 글들을 통해 전세계에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쟁 위기 속에서도 헨리 퍼론은 인류의 문명이 그만큼 나날이 발전되어 왔고, 다수의 사람들이 이 정도로 풍요로움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문명이 진보'했기 때문'이라고 설파합니다. 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했던, "어떤 한 사회의 단면을 진정 살펴보고 모색해보기 위해선 겉으로만 드러나는 사건 자체만으로 가늠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란 점은 거의 자명한데요. 그동안 시장 자본주의는 개인이 보유한 돈의 유무에 따라 사실상 사회계층화가 일어났고 더욱이 이 과정은 1980년 이후,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조장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회학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거의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퍼론이 거듭 밝히는 견고한 입장과 유사한 주장의 걸게를 디드러 매클로스키의 글에서도 접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단편적인 측면에서 이런 문명사의 과정과 현재의 모습이 이들이 말하는대로 완전히 터무니 없다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중요한 사건들에는 분명 그 이면의 목적성이나 영향이라든지 심지어 경제적 이익, 집단 내지는 국가 자체의 이득이 교묘히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과 스스로가 속한 사회의 소위, 사회적 의미가 어떤 교차점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영향력 있는 의사이자, 일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안온한 삶이 어떤 기반에 놓여 있는지를 매큐언은 주인공 페론을 통해 우리에게 여실히 알리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안보, 그리고 국제적 평화, 이러한 토대 위해 함축적으로 펼쳐진 문명의 진보는 과연 일개 인간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작품을 통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주인공의 딸인 데이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가리키며, "선진화된 민주 국가에서 직업을 갖고 일하고 있는 사람의 더할 나위 없이 좁은 식견"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것은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을 앞둔, 수많은 시민들의 인상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핍박받는 이라크 주민들을 옥죄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여, 이라크에 평화롭고 안정적인 민주 국가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저들 네오콘의 발언은 그저 무지하고 책임없는 메아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게리 거스틀의 '뉴딜과 신자유주의'에서 여실히 밝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후, 퍼론과 그의 가족에게 닥치는 안온한 일상을 범하게 되는 요지의 그 사건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와 한층 가까워진 벡스터라는 돌발 요인에 의해 자행됩니다. 시내에서 다수 시위대로 인해, 경찰력의 분산과 그로 인해 벌어진 퍼론과 벡스터의 아주 사소한 갈등, 퍼론 스스로 이를 온전히 해결하지 않은 결과가 치명적인 문제를 초래하게 되는데요. 그는 자신과 가족에게 가해진 이러한 응보를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벡스터에게 (가히 신실하게) 갚게 됨으로써, 극의 대미는 보기보다 사소하게 마무리됩니다. 매큐언은 역시나 의사라는 사람들이 결코 신이나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고, 이들도 역시 내면은 평범한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그 한계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생명의 존엄을 구현하는 '의학'의 구제 자체는 어쩌면 귀중한 문명의 진보의 산물이라고 사실상 결론 내립니다. 이것이 앞서 제가 설명해드린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자신이 사회와 괴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다수의 '사회 부적응자들'과 달리 주변의 호의와 기대. 그리고 인정을 받고 있는 의사의 의도적인 '사회적 유리'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완전히 다른 사회적 개념일겁니다. 매큐언이 말하는 대로, 이 의사가 이제야 찬찬히 주변의 사회와 그것의 체제, 바로 이 속의 구성원들인 다수의 시민들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는 주제였는데요. 이미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자신의 삶 자체에서 이런 폭력과 불안정에 놓여 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과거의 톨레랑스와 같은 직접적인 사회적 관용이 고도화 된 경제적 자유주의에 의해 서서히 쇠퇴했고, 심지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전쟁조차도 허위와 위선에 마치 선물 포장처럼, 꾸며져 있다는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일전에 읽었던 데이빗 코츠의 문장들이 절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의사 '퍼론'의 다수의 평범한 삶,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불안정성을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그 특별한 장면은 우리 사회가 어떠한 문제에 놓여 있는지, 또한 동시에 철저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우리가 왜 급격히 분화되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매큐언식의 서사의 진면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극중, 퍼론이 읇조리는, "지금은 관념의 시대가 아니다."는 부분에서 다소 복합적인 감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일전에 에티엔 발리바르가 간접적으로 피력한 바와 같이, 이 시장 경제주의가 초래한 진보가 과연 어떠한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이 사소한 문장을 통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실존, 그의 야망, 가족이며 친구들과의 관계, 소중히 간직했던 모든 것, 확고하게 소유했던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목격한 죽음과 공포, 용기와 고통만으로도 소설책 대여섯권 분량은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죽음을 당하면 머잖아 그들에게 시련을 내린 바로 그 신에게서 위안을 구하는 목소리가 장례식장에 울려퍼질 것이다. 퍼론한테는 이러한 현상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윤리의 영역에선 해명이 불가한 인간의 복잡성이다.

퍼론은 신경쓰지 않는다. 탈주자는 가라. 딴 방으로든 건너 동네로든. 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신경계 질병의 바다는 넒고도 깊다.

부모가 자녀의 성격에 거의 혹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임신과 현대 유전학에서 번번히 확인된다.

환자들이 갑자기 시력을 잃거나 사지가 마비되었을 때 점차 적응해가는 것처럼 말이다. 돌아갈 수는 없다.

의사라는 직위에 통용되는 관대한 논리를 이용해 한눈팔 기회가 도처에 널렸음에도 심각하게 유혹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아니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변태에 속한다.

자신은 결코 이룰 상상도 하지 못할 작품, 비인간에 가까운 비정함, 자기 폐쇄적 완벽함을 드러내는 작품,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천재성이다.

그는 사담이 스탈린을 추종하고 따라 했음을, 그 체제를 지탱해준 것은 사담 일가와 족벌의 충성스러운 관계망이었음을, 도 그들에게는 충성의 대가로 저택이 하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에어 필터가 작동하고 하이파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비애감을 덧입히는 차 안에 앉아 이 도시를 구경하는 일을 언제나 즐긴다.

세계는 근본 바탕이 변한 것이 맞을 것이며, 문제는 서툴게 다뤄지고 있으며, 특히 미국인들 탓이 크다.

이런 생각을 확증하듯이, 벡스터는 전신을 퍼론 쪽으로 돌리더니 나긋이 말한다. "꼴같잖은 폭도들, 자기네가 증오하는 나라에 빌붙다니."

유럽이나 미국의 어느 한 도시가 공격을 받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정부의 조언은 단순히 책임 회피가 아니라 하나의 들뜬 약속이다.

그는 글 읽기는 고사하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들을 안다. 대부분 우반구 방추사회의 가운데 부위의 기능이 저하된 경우인데, 보통은 뇌졸중으로 유발된다. 신경외과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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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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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21일 영국 햄프셔 주 올더숏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의 노동계급 출신으로 군에 투신해 소령 계급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그의 가족은 매큐언이 12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매큐언은 잉글랜드 동부 지역 도시인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요. 그리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뒤이어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의 첫 출판 작품은 1975년에 출간한 단편 소설집인 '첫 사랑, 마지막 의식 First Love, Last Rites'으로 이듬해인 1976년에 '서머셋 모옴 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1978년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 소설집이 무사히 출간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초기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1998년에 부커 상을 수상한 '암스테르담'입니다. 더욱이 2001년에 출간한 작품, '속죄 Atonement'가 성공리에 영화화 되면서 원작이 큰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이후 2010년에 출간한 '솔라', 2012년의 '스위트 투스', 2016년의 '넛셀'이 연이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매큐언은 지금까지 6번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 영국 문학 협회 (FRSL), 영국 예술 협회 (FRSA)의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마찬가지로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등 작품의 성공에 걸맞는 사회적 명성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바대로 메타픽션 역사 소설로 알려진 이 작품은 원제, "Sweet Tooth"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9월에 번역 출판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같은 해에 출판된 1판 2쇄 본입니다.


소설은 주인공인 세리나 프룸이 대략 65세 전후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회상은 1969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데요. 당시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바람과는 상관없이, 사실상 어머니의 강권에 의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두번째로 오래된 여자 대학인 뉴넘칼리지에 수학 전공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원래 그녀는 지방 대학의 영문학과를 목표로 인생에서 읽고 싶은 책들과 소일하는 것을 희망으로 삼는데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진 수학과로 진로를 잡게 되어 그녀의 인생 행로 전반은 적당히 보이는 혼란과 내면의 방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1960년대는 영국을 포함한 전유럽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냉전의 갈등 시기와 맞물려, 직간접적으로 사회적 분화가 이뤄지는 시기였습니다. 60년대를 통과한 그 당시의 세대들은 다가오는 1970년대에 마땅히 꿈꿀 수 있는 희망이 불확실한 채, 국제 정세의 불안과 내부에서 노동 계층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젊은 세대의 혼란과 방황의 시대상을 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세리나는 완고한 어머니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크게 반항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소녀가 자신의 내면을 확고히 정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채, 스스로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를 그저 힙겹게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바로 이때 여느 평범한 커플처럼 교제하고 있던 남자 친구인 제러미의 소개로, 그의 지도 교수였던 토니 캐닝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녀에게 있어 52세의 교수였던 토니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극중에서 숨겨진 의미와 안배로 잘 드러나게 되는데요.) 단순히 세리나와 토니의 불륜 관계를 그저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이런 류의 스토리 진행상 어떤 예상된 결말을 짐작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21살이었던 아름답고 생기가 넘치는 세리나에게 이 토니는 첫사랑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녀의 남은 인생에서 가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작품 후반부에서는 토니와 관련된 숨겨진 복선, 그리고 토니와의 갑작스런 이별과 그로 인한 스스로의 허무함에 빠진 한 인간의 채워질 수 없는 '애정에 대한 욕망과 갈구'를 작가는 이를 진지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꼭 주인공인 세리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아직 삶의 지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그 시절의 젊은 영혼들이 결핍으로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은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대학 시절을 마친 세리나는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영국의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국인 MI5에 지원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토니의 안배이기도 했는데요. 소설 후반부에 세리나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속속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MI5를 둘러싼 영국의 정치적 혼란, 특히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신교의 극명한 대립은 심지어 런던에서의 폭탄 테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는데요. 이런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작가인 매큐언은 냉전 시기의 첨예한 진영 대결과 심지어 같은 자유주의 진영인 미국과의 문화적 각축전까지 소설의 설정으로 대입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항간에 떠돌고 있던 조지 오웰과 버틀란드 러셀의 음모론까지 약간 각색하여 이 MI5의 국내 첩보 부분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 노동 계급과 이들의 사회적 불안,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국 지식인 계급의 동향까지, 자유주의 사회 내부에서 소련에 부역하는 스파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과거 매카시즘의 음울한 그림자를 가히 '매큐언 식' 수사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주인공인 세리나에게 마찬가지로 겹쳐져,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자본주의가 우리에겐 월등하고 유일한 이데올로기이자 반대로 사회주의 진영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에서도 양자가 소모적인 체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론적인 체념까지 곁들이며, 그 시대의 자화상을 거의 맨눈으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극명한 비극처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감시하고 더 나아가 이용할 수밖에 없는 흡사 안티 테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측면에서 이언 매큐언의 냉소는 작품의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MI5의 행로를 모색하는 수뇌진에 의해, 작품의 제목과도 같은 작전,'스위트 투스'에 세리나는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로 말미암아 서구 최고의 정보국에 걸맞지 않는 행동과 처신을 정보국에 노출하게 됩니다. 여기에 당시 남성 지배 계급이 여성들에게 갖고 있던 '직업적 충실성'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과도 맞닿아 다소 문제를 키우게 됩니다. 작가인 매큐언은 이러한 점층된 문제를 비꼼과 동시에, 조직 내의 불안 요소, 혹은 조직에 걸맞지 않은 인사에 대한 조직 전체의 적대적인 태도를 흡사 냉전 시기의 노골적인 비인간성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결국 조직 내에서 의도를 가진 노련한 인간들에 의해 세리나는 하나의 소모품 취급을 받고, 이러한 쓸모없는 작전 자체는 그녀와 감정적으로 얽힌 '한 남성'에 의해 유린 당하지만 그 결과의 온존한 책임은 오로지 세리나에게 향합니다. 이 스위트 투스 작전중에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작가 톰 헤일리를 대면하게 되는데요. 물론 다소 이질적이고 냉소적인 캐릭터인 톰 헤일리 역시, 소설 대미에서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있어 상당히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극중 톰 헤일리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로도 읽히는데요. 작품 활동에 대한 주변의 기대와 그 와중에 스스로에게 갖는 불신과 체념, 그리고 이로 인한 창작의 고통 등을 작가의 입으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작품 활동에 대한 내면의 고난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그리고 후반에 드러나는 '뼈아픈 진실'을 무엇보다 위선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한 캐릭터가 결국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강요받게 되는 것은 결코 남의 일로만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가 그저 배반과 복수라는 틀에 박히 요소로 오독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바대로 '고통과도 같은 진실의 목도'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세간의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인생의 진실을 긴장된 서사의 틈바구니에서 절묘하게 드러내는 점이 바로 작가의 재능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독자들이 단순히 외면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이러한 진실을 그야말로 날것으로 목도하고 싶어하는 충동 역시 인간 내면의 불합리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든 그렇든 간에 말이죠.

따라서, 매큐언의 이 작품은 과거 그 시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당시의 숨겨진 진실을 낱낱이 드러냄과 동시에, 그 시대를 살던 세리나라는 한 여성을 통해, 자신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생'과 그런 숱한 결핍에서 비롯된 애정에 대한 열망,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이 어떻게 개인을 추락을 이끌고, 그러한 과정에서 시대의 불안정성과 맞물려, 그런 늪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불신과 비합리적인 행태가 왜 일개 개인이 쉬이 극복할 수 없는 이를 작품속에서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노년이 되어 지난 날을 회상하는 세리나에게 있어, 작품의 도입과 결말이 묘하게 대치되는 장면 또한, 매큐언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습니다. 과연 노년의 세리나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하고 굳건한 지향점을 찾았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그녀의 회상은 저에게는 다소 후련한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이렇게 작가인 매큐언을 그린 듯 보이는 톰 헤일리, 그리고 작중의 이 헤일리의 단편 3작품이 아주 절묘한 복선을 이루어 나가고 그렇게 세리나의 행적과 교묘히 중첩되는 서사 자체는 정말 탁월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작가에게 찬탄을 금할 수 없었는데요. 그가 왜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위장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매큐언은 작중의 토니 캐닝을 통해, 핵무기 경쟁에 대한 특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요. 이는 한편으론 납득할 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국제정치학자인 케네스 월츠의 '핵확산 안정론'에 기댄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통해, 영국 사회의 뿌리깊은 귀족 계급(그 잔재)과 노동 계급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영국 사회에서 상류층의 연원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 상류층의 태도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에 대해 미처 몰랐던 건 관습적인 겉모습 아래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이 깊숙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1815년 빈회의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했다. 토니는 국가들 간의 균형이 평화외교라는 합법적 국제체제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국가들의 상호 견제가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내 동생이 경찰에 체포되고 임신하도록 만든 성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이 가게들도 허용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내가 나이 많은 남자와 불륜에 빠졌던 일도 덧붙일 수 있겠다.)

우리는 결점 많은 지배 권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우리의 자유는 불완전했다.

주위의 반체제 군중이 우리가 MI5라는 ‘건전한‘ 잿빛 세계에서 온 궁극의 적임을 알게되면 얼마나 겁에 질릴까.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노동당 좌파가 급진적 노조 분자들과 손잡아 의회 민주주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모종의 비상대책이 적절할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신무기들은 오로지 힘의 균형, 상호 간의 두려움, 상호 간의 존중을 통해서만 저지 될 수 있어.

우리는 불운한 여자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행복에 주목하고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셜리는 마지막 순간 내게 맞서 노동자 계급의 고결함이라는 관념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억센 코크니 말씨를 썼다.

중도 좌파 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꾀어내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것이 지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만드는 거지.

나는 작가를 알때, 혹은 알게 될 때 독서 체험이 왜곡된다는 걸 알아가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상대였다. 데이트(이제 데이트가 되었다.) 중에 많은 남자가 드러내는, 빈번이 상대를 웃기고 싶어하거나 무언가를 가리키며 근엄하게 설명하거나 일련의 정중한 질문으로 여자를 구속하려는 욕구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소수의 팝스타를 제외하면 젊은이들은 아직 수중에 돈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손님들이 우리 테이블을 훔쳐보며 눈살을 지푸리는 것도 우리의 즐거움을 고조시켰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몇 달, 또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나는 밤중에 잠이 깨어 위안이 필요할 때면 그 초겨울 저녁을 떠올렸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는 내 얼굴에 키스하며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자기가 얼마나 미안한지, 그리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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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이론 한울사회이론 4
숀 베스트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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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학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숀 베스트는 출판사의 소개로는 윈체스터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이력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찾아보려고 구글링을 해 본 결과, 최근 윈체스터 대학에서의 강의를 그만 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동 대학에서 강사나 방문 교수 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이런 그의 전공 분야는 사회 이론, 교육 사회학, 신자유주의하의 교육 문제와 더불어,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학문적 연구 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외 그의 출생지나 유년 시절 부터의 교육 이력은 웹에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merald Guide To Zygmunt Bauman"으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엇보다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 지식인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강화한 자본주의적 체제, 그것을 기반으로 전세계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로 구축되어왔던 과정과 엄혹한 결과를 낱낱이 폭로한 사람이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인데요. 여기서 낱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 입장을 취한 세계인이기도 했습니다. 조금 이른 내용일 수 있지만 저자인 숀 베스트가 바라본 바우만의 고통스런 좌절과 가까운 인식을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액체 근대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1980년대에 대처와 레이건이 처음 제시한 '대안은 없다'라는 신자유주의적 슬로건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하여 고통과 배제,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바우만을 슬프게 했다는 글의 대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달리 해석해 보려고 하는데요. 인간이 계몽에 의해 눈을 뜨고, 억압된 권력 관계, 계급 문제, 개인의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자유, 즉 종래의 자유주의로 해결해 왔다면, 더 이상 규제가 필요 없는 시장자유적 근본주의에 왜 우리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선, '인간의 탐욕'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어찌됐든 자본주의 체제 하에, 그 자본을 축적하고 권력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규제 없는 시장'이 공공의 선을 위해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회 관념을 불필요한 것으로 몰아갔습니다. 이 부분 역시, 바우만이 비판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요 주장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를 우리가 보기에도 체제의 틀을 구축한 과거 근대 및 근대주의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쁘게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특히 4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바우만의 소위 '근대적 가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그의 '근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일견 보이는 것처럼, "근대성에 동기를 부여한 바로 질서의 추구"였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권력 지향의 속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체제의 질서 구축에 몇 세대를 거쳐 노력했던 점은 바로 앞선 맥락에 기반해 있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를 최소한 도덕적 기반의 맥락에서 재구축을 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이 자본주의가 인간을 필요한 자와 쓸모없는 자로 분류하기 전에 우리가 힘들게 마련한 민주주의적 체제가 그 '자본의 논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이기심에 기반한 개인의이익추구, 즉, 교묘한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대한 현실적 대응 논리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이미 바우만은 책임감이 없는 인간에 대한 비판을 탈근대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유지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 책임감의 문제는 그저 단순한 관념이 아니어서 동질한 사회에서 같은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타자들에 대한 서로간의 연민과 책임이 결여된 그야말로 완벽히 개인주의화된 인간들이 만든 사회를 추종했습니다. 일전에 자유주의의 시조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공익에 근접한 자유의 목적를 말하기란 매우 생경한 시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과거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직면한 경제적 문제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동일하게 연구한 학자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하는 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누구보다 상당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전세계 여느 학자들보다 바우만이 순수한 '교양인'에 가깝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데요. 이는 이디스 워튼이 묘사하는 것처럼 19세기 시대에도 '교양인'에 대한 평가는 꽤나 호의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간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대로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어느샌가 중요한 통찰에 이르기도 하지만 일관된 주장에 본질적인 살을 붙이는 과정인 '근거와 논리적 맥락'을 쌓는 일은 두루두루 많은 지식을 체화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만은 평생 독서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식인이기도 했는데요. 레비나스를 비롯, 칸트. 홉스, 그리고 그람시는 바우만에게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 분석과 근대에 있어 탈근대 논법을 언급한 것은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한대로, 바우만이 처음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당시 학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그 논리적 설득력을 그가 인정받게 된 것은 사상적 기반이 얼마나 고유하고 독창적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저 역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액체 근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근대'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일관된 논증이 기반되어 있는데요. 근대성 자체가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질서와 양가성을 동시에 생산한다는 언급과 특히, 사회에서 '우리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은 타자 또는 이방인을 근대는 위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인간 쓰레기'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근대세계 내부의 결연한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적 구조가 이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이 근대를 '나약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겠는데요. 즉, 이 점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자세히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전체주의적 시스템하의 관료들이 사회 질서를 위해, 자신의 사회에서 바깥 또는 외곽에 위치한, 그 법적 지위가 모호한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내몬 것은 이런 근대적 맥락에 기반해 있다고 바우만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저자인 숀 베스트의 첨언대로 바우만이 한나 아렌트에게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앞선 언급과 같이, 근대세계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 제한 받을 수 있다는 폭로적 인식이 그저 소설 속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텐데요. 근대세계에서 과거 권력을 성장시키고 있던 노동 계급의 쇠락 및 분절과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투쟁 자체가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강고한 권력화와 맞물려,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가이 스탠딩이 비판했던 현실인 노동자들의 '프레카리아트화'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절을 설명하는 꽤 실질적인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근대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배제된 사람들'로 분류된 많은 이들이 영구적으로 그 경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마찬가지로 영구에 가까운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민자들이거나. 빈자 혹은 권력의 그늘에서 아주 멀어진 사람들로 근대의 질서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앞서 설명한 바대로 복합적인 의미에서 배제된 상황입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이러한 '배제된 자'라는 참혹한 분류에 그 누구도 여기에 속하게 되지 않을 보장이 없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 따라 누구나 그렇게 처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치료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데요. 그래서 이 액체 근대세계라는 구조가 더욱 사람들을 개인화의 단계로 내몰고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 서사와 삶이 환경의 영향이라는 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이 개인화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삶의 고통과 가난으로 인한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것의 명백한 서사는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들의 서사'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으며, 마찬가지로 바우만도 신자유주의의 이런 의도를 명백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복합적인 - 이미 부정적으로도- 양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본디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이행과 따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급격한 사회 구조상의 변화 자체는 바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이런 근대 세계의 탈인간적인 괴물화가 결국엔 신자유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복지 국가 담론'을 무엇보다 시민들의 정치적 관념 밖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바우만은 '사회적 국가'라는 고유 용어로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정부 기구에 통합되면서 부와 소득의 공유와 분배는 일반적으로 중지된다."는 주장은 이러한 비판적 맥락에 기반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자본이 인간의 몇세대를 거치면서 노동력 착취에서 소비자 착취로 이동한 점은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 하에, 사회 구조가 이를 더욱 보장하는 상황으로 고도화 되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이 자본의 한 요소로 기능하게 된 것은 조지 오웰 식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만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가 말한 것처럼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 대한 면밀한 분석 이외에도 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추락했고 그것이 어떻게 윤리학과 차원이 다른 문제인지 그것에 천착하는데 평생을 기울인 이유일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제부터라도 타자에 대한 공감, 더 나아가 포함과 배제라는 도덕적 측면의 '분류'에 시민들이 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렇듯 바우만의 사회적 포함 개념은 "타자와 함께 그리고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레비나스의 인식과 맞물려, "타자에 대한 책임"과 같은 바우만 고유의 철학이기도 한 데요. 우리 인간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고, 내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견지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도 그들이 갖는 책임감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화와 공감, 연대와 포함이라는 우리의 사회적 선언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근대세계를 진정으로 '탈근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과거 공동체 시대에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 그 당위로써 명확히 언급할 수 있지만 현실은 바우만이 설파한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분리해야만 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분화된 몇 단계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끝으로, 저자인 숀 베스트는 9장의 '바우만 효과에 대한 현실 평가'등을 주요 골자로 현재 전세계에서 바우만이 갖는 소위 학문적 영향력을 논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지그문트 바우만은 독자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아니 관심 정도가 아니라 과장하면 어떤 '학문적 사조' 정도로 숭배 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저자의 언급대로 바우만이 어떤 조작된 출판 그룹이나 선도하는 사상적 흐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바우만 만큼 현 시대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내는 사회학자가 아마도 전무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샹탈 무페가 머릿속에 떠오르긴 합니다만 전세계의 극단주의자들이 바우만을 그저 좌파 지식인으로 평가 절하 한 것은 그저 단순한 치부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로서는 바우만이 액체 근대와 그것의 본질적 이해와 맞물려, "왜 이 세계의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공정한 사회나 공익 개념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지극히 개인주의화 된 시민들이 자본이 요구하는 자아실현이라든지, 계급 상승과 같은 허울에 인식적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기도 하는데요. 이는 최근에 간행된 로버트 퍼트넘의 논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바우만의 원천적 고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갖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우만이 자신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했던 사활적 고민들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여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번역과 관련해, 일부 문장들에게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단어를 한 문장에서 반복한다든지, 문장이 마무리 되는 어미에서 마찬가지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본성을 고찰한 바우만의 인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여러 목록들 가운데, '분별력 없는 이기심' 자체를 고유의 덕목으로 삼고 이를 원천적으로 보장한 신자유주의적 기법 내지는 그런 양태는 가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의 사회적 진행이 이미 완료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기심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내지 못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오로지 그들의 전적인 책임으로 강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 교활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그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대의와 비슷한 의미라 여겨졌는데요. 이에 저자인 숀 베스트의 바우만의 텍스트에 대한 한줄 평가를 덧붙이자면, 바우만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독자들이 그의 텍스트를 자신의 분석으로 확장하는 그 '확장성'에 의미가 있었다고 밝힙니다. 


   




        





바우만은 또한 국가의 중앙 계획에 의해 근대세계에 창출된 사회질서가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세상으로 설계되었다는 생각을 혐오했다.

하지만 코와프스키는 또한 불평등애 대한 제한과 함께 (비록 비자본주의적인 조건에 의해 유발된 것이기든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우만은 2000년 이후의 자신의 액체 근대 저술들에서 마거릿 대처가 자신의 정부의 경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대안이 없다"는 표현을 도그마적으로 사용한 것애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권력구조는 하나의 실제적 실체이고, 그러한 권력구조가 존재하는 까닭은 역사적 실천을 수행하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구조를 현실화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권력구조는 역사적 실천을 통해 작동한다.

바우만은 노동운동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적응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조절 체계라고 주장했다.

바우만은 사고 범주의 역할과 목적을 세계의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고 세계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노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은 개인적 이기심을 가진 ‘인식론적 실체 epistemological entity, 즉 사고하는 존재로, 자신에게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사회적 행위를 성공적으로 반복할 때 그들은 습관을 형성한다.

자기 인식은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의 외양과 그 사회적 관계의 본질 간의 구분을 없애고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도덕적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바우만이 보기에는, 유대인평의회 평의원들 사이에서 도덕성이 박약하다는 것보다는 아디아포라라는 달도덕화 과정이 미치는 영향이 더 중요하다.

바우만은 계몽주의가 사회적 삶을 법제화하고 규제하고 조직화하려는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배제된 사람들은 바우만이 영구적으로 경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영구적으로 놓인 것으로 분류된 삶을 살고 있다.

액체 근대인은 소비 행위를 통해 행복을 얻기를 기대하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죄 형태의 일탈 또는 범죄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불행한 소비자는 사회의 온전하고 정당한 성원이 될 자격을 박탈당한다.

바우만은 ‘사회국가‘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단지 배제된 사람들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국가 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공동체 내부의 동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액화를 보여주는 첫 징후가 바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였고, 고체 국민국가의 권력 대부분은 그러한 국가의 통제력 또는 심지어 영향력을 넘어서는 글로벌 흐름 속으로 ‘증발‘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비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타인 배려 충동을 받아들여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도덕적 중화가 일어난 것은 문명으로서의 문화가 상상력으로서의 문화를 성공적으로 제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만 프리스터에 따르면, 2011년 9월에 폴란드 주간지 <폴리티카 Polityka>와의 인터뷰에서 바우만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West Bank 장벽을 바르셔바 게토의 장벽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으며 이스라엘 국가가 홀로코스트를 불합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요소는 바우만이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가 액체 근대세계의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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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1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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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 테일러는 1906년 영국 사우스포트의 버크데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대대로 부유한 가문의 일원이었고, 특히 양친 모두 당시 영국에서 좌파에 가까운 식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곧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에 그의 모친인 콘스턴스는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그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은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특히 모친인 콘스턴스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의 조모는 오랜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1927년 테일러는 옥스포드 대학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잠시 법률 회사의 서기를 거쳐, 1848년 혁명에 대한 현실 분석을 위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하게 됩니다. 또한, 2년에 걸쳐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 외교에서 이탈리아 문제는 여러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家)와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고 이와 관련해, "1848~1918년, 유럽의 지배권 투쟁'이라는 중요한 논저를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The Origin of the Second World War)를 출판했고, 이 논저와 관련해 세인들은 그를 '역사수정주의자"로 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은 테일러에게 통상 종이로 대변되는 '신문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라디오로, 나중에는 텔레비전의 진출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는 1942년 3월, BBC에 출연한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텔레비전 역사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대중 지식인'의 한 형태로 그는 당시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대중 역사가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irst World War : An Illlustrated History"로 지난 196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되었으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제 10쇄본입니다.

테일러의 이 특별한 논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여타 글들과는 달리, 전쟁 시기 해당 국가들의 사회 및 군사적인 중요 사진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언급에 의하면, 한 주제와 관련된 대략 10장의 사진들 가운데 그가 고심하여 오로지 1장을 고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는 1차 대전과 같은 중요 사건을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대에 있어, 수집된 흑백 사진들은 무엇보다 상당한 사료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전쟁 기간 동안 사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과 전선에 동원된 수많은 병사들의 비참한 현실은 우리가 왜 지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저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히틀러의 출현과 그에 따른 독일인들의 인간성 상실의 참혹한 몰락이 예견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저마다 역사의 해석이라는 논쟁에서 '역사가'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는데요. 이에 저자인 테일러는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왜 기회를 살리지 못했는지에 대해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는 다소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언급이 보였지만 글을 전부 일독해 보니 저의 짐작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당시 연합국 군부들과 그 반대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참모부, 그리고 이들과 관계된 민간 권력의 민낯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데 상당한 지면을 투입합니다. 그가 직접 설명하는 전쟁 수행의 핵심인 민간 권력과 장성들의 직간접적인 주도권 투쟁과 대립, 그리고 그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결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동시에 역사가 본인의 흔들리지 않는 양심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914년의 복잡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어 유럽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몬 대전은 소위 민주주의 진영과 전제 정권의 대결 구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 역시, 유사한 해석을 글에서 언급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에게 있어 다소 복잡한 의미이기도 했던 독일 제국과의 연대를 영토 야욕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더욱이 평범한 게르만인들이 인접한 슬라브 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인한, 노골적인 전쟁 시도가 심각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고 보는 해석이 이 논저의 주된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이 테일러의 이 글은 패권을 지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 즉 세르비아에 대한 야욕과 세르비아인들의 후방에 있는 강대한 동토 제국인 러시아라는 존재, 바로 이들과 동맹 관계인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관리자로서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던 세력 균형의 감시자인 영국이 각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잘못된 판단이 결국 전화(戰火)를 전유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 번째 세계 대전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떤 숭고한 이상이나 인간 해방, 혹은 자유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이 아니라, 유구한 제국주의 국가가 그저 좀 더 많은 땅을 위해 손쉬운 군사력을 투영한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함정이라는 측면에서 각 행위자들의 침략 행위는 결국 전 유럽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곳곳에서 보이는 수많은 병사들의 주검은 실로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이렌 네미롭스키는 수차례 1870년의 보불 전쟁을 언급하며, 그 결과 베르사유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이 어떻게 프랑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민족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테일러도 이 글 6장에서, 전후 프랑스인들은 연합군에 패한 독일이 보불 전쟁 이전과 같이, 그저 자신들의 변방으로 국한되기를 바랐다는 분석은 실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유럽에서 강대한 육군을 지닌 프랑스와 효율성과 단순함으로 무장한 독일식의 군사주의는 이처럼 군사적 충돌을 예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데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갑작스런 대전을 맞이했으며, 과거 보불 전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그런 신중함이 배경이 되어) 자신들의 배후에 있던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영국은 자신들의 국익과 아주 밀접한 저지대 국가들에 독일이 진격하고, 그에 따른 첨예한 전선이 프랑스 북서부에 완성되어 파리 점령이라는 양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가시화 되자, 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의 중요한 관료였던 로이드 조지는 마지막까지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인접국의 '국가 총동원령' 자체를 사실상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요.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숨길 수 없는 야욕을 확인하자 마자 러시아가 '국가 총동원령'을 발동했을 때, 독일이 이를 철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 점은 단순한 내정 개입 이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한 1914년이 차츰 저물어 가자, 당시 정치권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 '대전'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에 이르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은 어떤 면에서 다음 세계 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바로 이 막대한 군수품의 국가적 생산과 예비병의 전선 투입이 매번 가능하지 않았던 독일은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어났고, 이를 민감하게 반응한 군부에 의해, 빌헬름 2세는 퇴위하기에 이릅니다. 독일의 항복과 황제의 퇴위는 그 시기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는데요. 대서양을 건너 유럽 배후에 있던 미국이 막대한 군수품을 지원하고 자국의 해상이 대전 내내 봉쇄되지 않은 영국은 막대한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병력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장성들의 고압적이고 전술적인 무능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런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물자 공급에 있었던 것인데요. 물론 학자들에 따라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을 해상 봉쇄한 것이 맞느냐, 아니냐의 치열한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 이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모든 전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테일러는 원래 독일이 대전 중에도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국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프로이센의 효율적인 군사 제도의 이력을 고려해 보더라도 초전부터 독일의 한계는 명확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1915년에는 서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국지전으로 인해, 상파뉴 지역에서만 5만 명의 프랑스인이 희생되고, 생 미엘에서는 6만 명이, 마찬가지로 아라스 근처에서는 12만 명이 희생되기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1차 대전 당시, 연합국에만 한정해 봐도 막대한 인명 피해를 매번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인 테일러는 당시 군을 이끄는 장성들이 어떤 전략적인 측면이나 이를 수행하는 전술적인 이해도 없이 그저 '승리 만을 위해' 틀에 박힌 연설로 병사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으며, 이런 무분별한 전투 행위가 곳곳에서 수많은 피해를 양산했던 것은 그 증거를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전쟁을 지원하고 자원을 분출하는 소위 선출 권력인 정치인들 역시, 알량한 군사적 업적을 위해 장성들과 심지어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테일러는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저 참모부에 기웃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영국의 총리와 프랑스의 수상은 경우에 따라서 사사건건 장성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일관되지 않은 지휘부를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저도 이런 테일러의 평가에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군 장성들이 과거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한 장군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무능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러한 군인들의 존재와 이들이 어설픈 군사적 식견으로 이들에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특히, 솜(또는 솜므)강 전투나 베르됭 전역에서의 양쪽 모두 치명적인 전술적 오판과 이로 인해 발생된 만 단위의 사상자들은 수뇌부에 일원화된 지휘 체계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 참혹한 희생으로 말입니다.   

해가 바뀌어 1916년이 되자, 많은 민간인들은 정말로 전쟁이 자신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낍니다. 같은 해, 5월에 들어서자마자 마침내 영국에서 무차별적인 병력 자원 징집이 이뤄지게 되는데요. 이는 예비 병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것에 당시 유구한 자유주의 전통을 갖고 있던 영국 정치권 조차 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국내 물가와 환율이 요동치게 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한 매점매석과 부족한 생필품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자원을 독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양산되는 가운데, 이자들은 그 책임을 노동조합의 탐욕으로 화살을 돌리게 하는데요. 실로 인간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견되는 측면에서 당시 영국 정부는 서서히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던 아일랜드를 무력 진압하게 됩니다. 소위 고귀한 이들이 숭앙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그야말로 배신하는 행태를 보인 '대영 제국의 민낯'은 '식민지를 거느린 의회 민주주의 국가'라는 그 본질로써, 저로 하여금 다시금 고심하게 만들었는데요. 이러한 비극적 과정에 대해서도 저자인 테일러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천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재판도 없이 영국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일침하기에 이르는데요. 이 때의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이라는 가치 뿐만 아니라, '공화국 아일랜드'에 대한 진심까지 드러내며 스스로 운명을 걸었지만 끝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참혹한 군사적 진압 뿐이었습니다.

1916년 이후,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의 투톱으로 행정과 정치적 안정을 찾은 연합군과는 반대로 독일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노골적인 정치 군인화와 이들이 속한 참모부의 연이은 무능과 실책으로 전선에서 쉬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더 이상 승리와 가깝지 않게 되었다고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두 개의 전선 가운데, 한 곳인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동부 전선에서 다소 숨이 트일 수 있게 되었는데요. 당시 독일 정치권은 레닌을 일부러 러시아로 탈출시켜, 정치적 혼란을 획책합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일부 성공해 전쟁을 불신 하는 '혁명 세력의 러시아'는 전쟁에서 점차 발을 빼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를 연합군 지휘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위기는 미국의 참전으로 고통스럽게 상쇄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저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이상주의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과연 유럽은 이를 호재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셰익스피어식의 논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는데요.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식민지를 분할하고 여기에 겁 없이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분할하여, 석유가 나오는 중동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영국의 의도는 겨우 절반 정도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1918년이 되자, 전쟁을 지휘하던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속에서 떨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 다소 간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떤 식으로든 종전을 대비해야만 한다고 고심하게 됩니다. 전황은 이런 그와 상관없이, 미국의 참전의 영향으로 독일제국의 배후였던 오스만 투르크가 연합군이 상륙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굴복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전황은 급격하게 독일에 불리하게 진행되는데요. 앞서 언급했듯, 독일의 군사 엘리트들은 두 개의 첨예한 전선을 자신들이 장시간 유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됨으로써,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큰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루덴도르프의 군사적 무능으로 인해 그것은 악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당시 트로츠키의 예견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심각한 파업이 일어났고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굴욕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적대적인 주변국들이 목줄을 쥐어 오자, 이들은 독일이 모르게 연합국에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연합군은 이런 강화에 초반부터 응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측면에서, 1918년 당시 독일 제국은 어느 때 보다 더 전진해 많은 영토를 획득하는데요. 하지만 내부에서 휘청이는 독일 제국은 곧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같은 해 3월,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흥분해 공세를 서부인 아라스로 집중하지만 예비 병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독일은 그 귀중한 병력을 연합국의 입으로 들이미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루덴도르프는 전술적 고려 없이, 그저 직감으로 이를 결정한 것인데요. 더욱이 독일 병사들이 영국의 풍부한 보급품을 보고 저절로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다는 분석은 독일인들이 스스로의 전쟁 수행 능력을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뒤이어 연합군 진영인 조프르와 헤이그, 니벨은 독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지만 마찬가지로 루덴도르프 역시 이에 산발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자국의 군사적 수단이 최종적으로 봉쇄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체코인들이 전쟁에 개입하여 시운을 만나 자신들의 민족이 중부 유럽에서 독립의 깃발을 꽂게 됩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출현은 바로 이런 배경에 있었습니다.

결국 1918년 8월 이후,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공세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고 이들은 결국 베르됭 남쪽 생 미엘 돌출부를 격파합니다. 테일러에 의하면 이 장면은 서부 전선의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루덴도르프는 8월 8일을 "독일군의 비극적인 날"로 회상하고 이 심리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다수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매우 요원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다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즉각적으로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빌헬름 2세의 네덜란드 망명 이후, 독일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대내외적으로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바덴의 막스 공이 재상에 임명되자 독일 정치권은 연합국과의 본격적인 강화에 나서게 됩니다. 10월이 되자 독일은 노선을 바꿔, 직접적으로 미국과 접촉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그 당시 윌슨이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던 그 유명한 '14개 조항'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것이 독일과 자신들의 몰락을 회피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한 결과는 명백했는데요. 그것은 소위 '윌슨의 승리' 내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사실상 꺾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내심 라인란트를 원했고, 영국인들은 독일의 기존 식민지를 얻기를 원했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윌슨에 의해 무산된 것인데요. 이것은 마치 처칠이 전후, 영국의 제국주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숨겨진 의도를 스탈린과 함께, 이를 획책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에 의해 사실상 분쇄된 것과 유사한 장면으로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저자인 테일러를 통해, 전후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이 영국의 방해 없이 사심없는 방향으로 독일과 협상에 나섰고, 이 협상 과정이 그간 알려진 바대로 독일에 심각하게 가혹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과연 독일인들에 굴욕적인 협상 조건과 타협 없는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후에 독일인들이 '그 문제의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존의 전형적인 분석과도 배치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오늘날 수준에 맞춰 이해한다면 당시 독일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부분을 역사수정주의로 판단해야 될지는 아마도 독자들의 몫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자는 더할 나위 없이 케인즈의 우려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독일의 민주주의가 역설적으로 당시 독일 군부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어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 역시,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전 시대의 복합적인 결과의 산물로 이상주의자 윌슨이 의회에 동의조차 받지 못한 채, "불구가 된 평화안'으로 밀어부쳤지만 결국 민족주의라는 불씨를 유럽에 살포하게 됩니다. 그것도 유럽인들만의 민족주의로 말입니다. 이러한 파국을 준비한 세계의 일각에서 우리는 히틀러의 출현을 목도 했고, 평화를 입으로만 외친 강대한 이상주의자가 스스로 실효적인 행동에 이르지 못한 채,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참혹한 두번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본문 216 페이지에 오탈자 한 곳이 있었고, 341페이지에는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전후 과정에서, 옛 동프로이센 지역의 단치히를 끝내 자유시로 만든 것은 독일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테일러는 6장 후반부에서 쉽게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어떤 서사를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따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사라지자,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민족이 통일하겠다는 데 이보다 더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중략) 그러나 독일인들은 누구의 동의도 없이 적어도 한 명의 오스트리아인을 얻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였다.

     

         

 

    




7월 25일 세르비아인들이 간신히 체면만 차릴 정도의 유보를 붙여서 통첩을 받아들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즉시 세르비아와 관계를 단절했고, 다음 날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영국 대함대가 안전하게 지켜주기에 침략당할 위험이 없었고, 명분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그 명분이란 "약소국 벨기에"의 중립과 독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어떤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는데, 이는 기계, 전차, 항공기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총포와 포탄에 있어서 그랬다.

키치너는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심은 했지만 영국이 기여하는 바가 적어 난처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극도의 충실함으로 이를 극복해보려 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민간인 각료들은 감히 장군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독립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영국인들은 5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2만 명이었다. 프랑스인들은 19만 명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12만 명이었다. 그럼에도 조르프는 여전히 기가 살아 있었다.

10월 5일 영국 사단 하나와 프랑스 사단 하나가 중립국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 상륙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마찬가지로 실행된 방식이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베르됭 방어로 페탱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령이었는데 베르됭 전투 후에 프랑스의 원수가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것도 오로지 베르됭 덕이었다.

연합국은 전쟁 전의 국경을 시작점으로 여겼고, 독일인들은 현재의 참호선을 시작점으로 생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최고 권력을 쥐게 됨으로써 런던에서 타협을 통한 강화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운 이야기가 은연중에 멎었다.

연합국에 따르면 오로지 도덕 원칙들을 확립함으로써만 앞날이 안전해질 수 있었는데, 독일의 시각에서 이 원칙들은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취리히에 망명해 있는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을 패배시키거나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정부를 전복하고 국제 사회주의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전쟁이 "윗사람들의 전쟁","경쟁하는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국민들은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전쟁이었다.

독일인들과 오스트리아인들은 러시아 점령지에서 밀을 들여왔고, 볼셰비키들과 강화 협정을 조인한 후에는 훨씬 더 많이 가져왔다.

독일은 정복한 곳들, 특히 벨기에 점령지를 보유하겠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새롭게 밝혔다.

독일 국민은 놀랍게도 독일이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는 또한 독일이 연합국 민간인들과 그들의 재산에 끼친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이 요구로 시작된 배상 문제를 놓고 지루한 다툼이 벌어지리라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라인란트에 주둔한 영국군이 지휘관으로부터 하위 계급까지 봉쇄에 항의했고, 굶주린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강화 조약이 조인되기 전에 봉쇄가 종료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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