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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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는 1947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인 사무엘 오스터는 저지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을 소유한 지주였으면, 모친의 이름은 퀴니 보갓으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둘의 결혼 생활은 좋지 못했고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이혼하여, 그와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 뉴어크의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1958년과 1959년 여름 동안 오스터는 야구 내야수로서 뛰어난 운동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유년 시절의 선수 재능이 미국에서 야구를 지속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만큼 스스로도 꽤 고양되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이 되자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및 비교문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문학 등을 번역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1974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에티엔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번역 작업을 지속하게 되는데요. 이런 가운데, 1982년이 되어서야 그의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이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뉴욕 3부작과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환상의 책, 브루클린 폴리스, 보이지 않는 것, 선셋 파크 등이 문단과 독자들의 큰 호평을 이끌게 되면서, 이즈음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공적인 작품 활동 이외에,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미국 민주당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라고 공개 선언하고 소위 사회주의(개량된 사회주를 포함한)를 지지하는 후보자가 정치 무대에 설 수 없는 미국의 정치 환경을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화당원들 가운데 극우, 극단주의에 쏠려 있는 지지자들을 대놓고 '지하디스트'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2년 12월에 전문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았고, 2년 뒤인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Sunset Park"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13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다만 현재 이 국내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출판 당시, 미국에서의 출간 시기와 맞물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사람들의 비틀린 삶을 작가가 절묘하게 그려내는 등의 홍보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가 처한 관계에서 사실상 실패한 사람들의 방황과 옳다고 믿는 것과 삶의 통제력 사이에서의 도덕적 갈등과 그러한 가운데, 인간 내면의 힘을 복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화해와 사소한 것으로 읽히는 단순한 관계가 정작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맥락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런 따뜻하고 뭉클한 과정도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두에 등장하는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 부자의 서사를 중심으로, 마일스의 친모와 계모, 그리고 마일스의 연인인 필라와 그의 숨겨진 벗인 빙, 더불어 빙을 매개로 모인 앨리스와 엘런 등의 인물 등을 큰 틀의 주제를 엮어가는, 일종의 서사적 가지로서 전자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각자의 서사가 따로 노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마일스의 사유와 행적을 중심으로 이들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마일스는 부친인 모리스 헬러의 짧은 첫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녀의 모친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그를 출산했기에 여기서 그려지는 봐야 같이, 그녀는 스스로가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미처 지울 수 없었고 물론 연기에 대한 소위 목마름과 육아에 매진하느라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마는데요. 한참 모성의 보호가 절실하게 필요할 시기에 그것의 중대한 결핍은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일스와 같은 아이에게는 대체로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부친인 모리스와 계모인 윌라가 경제적 안정 내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나 여전히 윌라는 그의 친모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의붓 형이었던 보비가 불행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그것에 대한 책임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일스는 스스로를 도덕적 유배에 처하게 됩니다. 명문 브라운 대학의 재학생으로서 여기에 명민한 두뇌와 통찰까지 겸비했던 그가 어쩌면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꿈같은 미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가까운 이들로부터 멀어진 것인데요. 그는 극의 초중반에서 부친인 모리스와 윌라와의 대화를 자기도 모르게 엿듣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벌주기 위한' 도피의 시작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일스의 특별한 성취와 시와 고전을 아우르는 그의 천재적 분석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매일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감수성의 폭발적 시기에 그가 얼마나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는지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돈벌이에 전혀 쓸모가 없다든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스스로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냉소를 겪어봤던 사람들이라면 마일스라는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거의 주저함이 없을 겁니다. 대학의 정규 과정은 저버릴 수는 있어도 책은 결코 손에서 저버릴수 없다는 마일스의 행동 원리 그 자체는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된 느낌, 그리고 그런 자신을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고립감 등이 다른 것들로는 채워질 수는 없었기에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던 마일스에게 글 자체는 구원이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필라라는 소녀의 등장은 그만큼 자신의 모든 걸 줄 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후반부에 모리스 헬러는 심정적으로 마일스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면서 그런 아들이 필라를 만나게 됨으로써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도 극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는 마일스와 필라의 만남과 이들의 깊어지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일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게 되는 공원에서의 장면은 그녀가 십 육세였고, 갓 성인이 된 마일스와 십대 여자 아이에게 느끼는 그만의 감정들이 솔직히 감정적으로 면밀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일스의 어린 연인인 필라 산체스는 플로리다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쿠바계 이주민으로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이 있지만 그녀의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입니다. 당시 시카고를 거쳐 플로리다로 하염없이 넘어온 마일스는 자신도 부모가 없다고 여겼기에 그녀에게 자신도 고아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상대인 십대 소녀에게 이러한 거짓말이 충분히 나쁜 점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이 어린 소녀에게 같이 부모가 없다는 동질감이 어떤 식으로 내면에 작용했을지는 거의 명확합니다. (마일스가 그녀를 향해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과 그것의 올바른 마무리는 두 사람의 약혼으로 마무리 됩니다.) 물론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일스는 십대에 놓여 있는 필라와 어떠한 스킨쉽도 자제하고 섹스 역시,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보를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또한 마일스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은행에 넘어간 집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버려진 장물들을 필라의 언니인 안젤라에게 자신과 필라를 잘 봐달라는 의미로 전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매우 위배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젤라가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게 되고 더욱이 동네 불량배를 동원해 협박하자, 눈물을 머금고 필라를 플로리다에 남겨두고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빙 네이선은 마일스의 십대 시절 일부를 공유한 친구였습니다. 물론 마일스에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전반적으로 제한적이지만 빙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일스의 아버지인 모리스와 모친인 메리-리의 '끄나풀'로 일한 것입니다. 마일스가 지난 7년 반의 시기동안 이리저리 도시를 옮기고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 마일스의 행적을 비밀리에 알린 인물입니다. 물론 빙은 모리스에게 어떤 금전적 이득을 기대하고 이러한 일을 맡은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친구인 마일스가 걱정되었기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마일스와 부모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서사에서 오스터가 그려낸 이 빙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려깊고 상대에게 대한 깊은 온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엘런 브라이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후반부 설정에서 작가가 만들어놓은 빙과 마일스의 그 특별한 물놀이 장면은 뭔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결국 이 장면의 모티브와 빙의 인물 형성의 대부분은 후반부에서 적절하게 잘 조절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일스와 빙 사이에 아주 급격한 변주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엘런 브라이스와 관련해, 그녀가 사회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중대한 결핍에 대해 그녀가 거쳐온 인생사 대부분이 설명되었을 때,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다만, 선셋 파크에서의 엘런 브라이스를 거의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은 벤 새뮤얼스와의 우연한 대면은 정말 노골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폴 오스터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우연의 마술사' 임을 감안하더라도 엘런과 벤의 재회와 "분명 사랑은 아니것 같으면서도 그에게 빠져든다"는 엘런의 대사는 문학의 서사 구조적 측면에서 너무 억지로 만든 티가 나기도 했습니다.

모리스 헬러는 윌라와의 두번째 결혼 생활에서 보비와 마일스라는 두 아들을 놓고, 이 두 부부가 다른 자식을 두지 않은 것은 윌라의 염원을 저버린 것으로 후에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나타난 파급 자체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저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들 가운데, 이 윌라라는 캐릭터의 인물 조성이 제 나름대로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모리스가 몇 번이나 그 의미없는 '질에 삽입한 페니스'라는 문구로 후회를 드러내는 불륜과 친아들 보비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모리스와 그의 전처의 아들인 마일스를 양육하고 또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던 삼 십년 이상의 시간이 그녀를 점차 무너지게 했다는 점에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는데요. 나중에 보비가 죽게된 정확한 연유를 모리스를 통해 듣게 됨으로써, 마일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윌라는 진정으로 마일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자 그의 안타까운 형편,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극의 진정한 화해와 해후는 이처럼 윌라가 마일스를 용서하게 되는 장면이었는데요. 좀 더 앞선 장면이기도 했던 윌라가 완전히 무너져, 남편인 모리스를 애타게 찾는 짧은 단막에서, 활발한 이성과 명쾌한 결단력을 지녔음에도 주변인들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항상 글을 손에 놓지 않았던 이 여성의 거듭된 고통에 저 역시 (타자지만)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마일스 헬러가 스스로 자신을 벌주고 더 나아가 모든 것에서 스스로 대면할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돌아갈 선택을 하는 대미가 한 인간의 구부러진 인생 행로를 올바르게 그의 힘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작가인 폴 오스터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마일스가 어떤 도덕적 완벽함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도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익히 알고 있으며, 지나간 그의 여러 행적이 흡사 이를 잘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모리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는 모습에서 그가 일찍 요절한 천재 작가로 그려지는 수키 로스스타인의 뚜렷한 모습을 필라에게서 찾은 얼마간의 서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라가 윌라의 모교인 바나드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하게 되었다는 서사 역시, 극명하게 대미를 더한 장면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작가의 비범함이 느껴지는 설정 장면으로 극에서 비로소 대단원의 화해가 마무리 된, 중요한 씬(sin)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소회는 오스터의 이 작품이 참으로 오랫동안 제 뇌리에 남을 것만 같습니다. 첫장부터 저를 빧아들였던 흡인력은 물론이거니와,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언급하는 극중 장치로 쓰이는 서사들과 그러한 적나라한 일부 묘사들은 간혹 이언 매큐언의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필라에게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여섯 달 만에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기 위해 이혼했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어머니가 손에 보드카 토닉을 들고 거기 서 있는 광경이, 이성을 잃고 곰탱이니 왕재수니 어린애들이나 쓰는 말로 자기를 모욕주는 어머니가 우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클럽에서 낯선 여자를 한 번도 낚아 보지 못한 재즈 드러머, 정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창녀한테 돈을 주고 오럴 섹스를 받는 얼뜨기, 어두운 침실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나 하는 섹스에 굶주린 멍청이였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각이 있는 존재로서 그의 삶은 사람들이 열린 문으로 밀고 나가는 이제는 죽은 저 시체의 일부로 시작되었다는 것, 그의 삶이 그녀의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불륜 상대와 침대로 기어들어 가던 순간에조차 후회했으면서도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는 윌라가 이번 별거를 앞으로 오랫동안 남편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일종의 시험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는 메리-리의 침착하고 동정적이면서 신중하며, 마일스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들이 한 남자로 변모해 감에 따라 자신의 삶은 점점 작아져 가다 못해 더는 신경 쓸 것도 없을 지경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설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까지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인 사고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들이 내놓은 심오한 결론에도 감동받았다.

다른 인간 육체를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한 인간 육체 안에 산다는 것은 타인들의 세계 속에 사는 것이다.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책은 위험하지 않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만을 가져다주는데. 책 덕분에 사람들은 더 살아 있다고 느끼고 서로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돼.

아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으니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닌 이상 틀림없이 언젠가는 새롭ㄱ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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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기담총서 1
헨리 제임스 지음, 임명익 옮김 / 크로노텍스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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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자치구, 워싱턴 스퀘어 인근 워싱턴 플레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헨리 제임스 시니어와 메리 월시로, 부친은 총명하고 거기에 호감가는 인물로 강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친인 메리는 뉴욕시에 오랫동안 정착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식이었습니다. 이런 헨리는 사남일녀 가운데 둘째로, 한 살 위인 윌리엄과 남동생인 가스 윌킨슨, 로버트슨이 있었습니다. 헨리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의 집을 팔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유럽으로 기한 없던 이주를 하게 됩니다. 1845년까지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의 작은 저택에서 머물던 그들은 그해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고, 헨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알바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 웨스트 14번가 58번지에 있던 집을 오가며 지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주된 직업적 관심사와 출판 사업의 향방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쉬르메르, 본,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를 오가게 되었고, 간혹 가족의 자금이 부족할 때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첫 출판물은 1863년에 출판된 연극 공연 평론으로, 첫 단편 소설인 "오류의 비극 (A Tragedy of Error)" 이 익명으로 출판됩니다. 이어지는 1869년부터 1870년까지 그는 14개월간 유럽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헨리 제임스는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지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남 및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1875년이 되자, 그는 네이션 (The Nation)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기에 이릅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그는 파리의 라틴 지구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두 번 장기간 들른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이후 30년 간의 남은 생애를 유럽에서 온전히 보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헨리 제임스의 작품 활동 역시,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요. 그해, "로더릭 허드슨"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 "여인의 초상", "보스턴 사람들"과 같은 의미심장한 장편들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그의 작품 초기, 신대륙에서 구대륙인 유럽으로 향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서 미국과 유럽, 양쪽으로 병렬적으로 경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유럽의 오래된 문학 역사에서 그도 역시, 일종의 이방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헨리 제임스는 그의 많은 작품을 통해, 각 인물 간의 의식의 변화 혹은 자신만의 분명한 인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표함과 동시에, 당시 시대와 관습이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인습의 굴레'에 대해서도 뚜렷한 비판 의식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대상과 관습에 어느 정도 얽매여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잘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Turn of the Screw"로 지난 1898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8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은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러 평론가들과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색다르고 다양한 분석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이 예전의 고딕 형식을 어느 정도 오마주한 공포 소설로 독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내면의 공포심과 그것을 부추기는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악'에 대해 일종의 작가 나름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히틀러의 나치가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부추긴 것처럼 일견 호의에 기반한 사람의 의도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반 전개부터 정확히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파악해야 될 수많은 수사와 수식어구(영문법의 표현으로)는 사건과 그에 따른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난해한 부분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작품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어린 마일스가 퇴학을 당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점은 오로지 독자들의 상상과 그에 따른 추론에 일임 되어 있어, 극의 결말의 해석 부분과 맞물려, 꽤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위 견습 작가들과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중견 작가들에게서도 이 작품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사전에 인지해 두고 극을 읽어 내려간다면 독자에 따라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이르게 되는 블라이 저택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스 부인'에 대해 본의 아니게 많은 숙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극의 서두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주인공인 여성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인물로 할리가의 아이들인, 마일스와 플로라를 적절한 지도와 정서적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블라이 저택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서사에서 잠깐 소개되고 있듯, "멸종되는 법이라고는 없는 유형인, 잘생기고 거침없고 호감형인, 소탈하고 쾌활한 독신남 할리 씨"의 크게 감화되어 (젊은 여성이 저런 축복을 타고난 귀족적 남성에게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동생의 아이들인 두 남매를 열성적으로 보호하고 가르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극에서 그녀의 수차례 언행과 바람을 통해, 이 '할리 선생'을 다시금 재회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와의 관계에 대해 꿈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의 상상과 같은 근거 없는 기대 말이죠.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신분 상승의 욕구라고 해석되기 보다는 그녀가 할리에게 받은 개인적 인상과 그로 인한 확고한 신념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특히, 어느 정도는 이 아이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할리가 그녀에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타고난 재능으로 적절한 마음가짐을 그녀에게 추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책무를 다하게 만들기 위한 약간의 술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롯이 그 책임이 할리에게 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희망적인 재해석을 감행한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녀가 이 아이들과 대면하는 가운데, 할리와의 숭고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아이들을 인도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압박과 사명감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내면에 덧씌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규명된 여러 정신병증으로 대입해 본다면,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이 어느 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연계가 아주 직접적으로 극에서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그녀가 맞닥뜨리게 되는 일종의 환시(幻視)를 초래하게 된 것인데요.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는 '영적 요소'라는 문제가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극의 전반부 서사에서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극의 중반 이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녀와 마일스와의 인식적 불협화음과 그녀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파국의 조짐이 드러납니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두 사람의 파국을 작가 스스로 이해하는 인간 내면의 악을 드러내는데 이용합니다. 십 세 가량의 어린 남자 아이가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애어른 혹은 어른아이"로 규정하고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천진난만한 소년의 그것과는 대비되어 나타나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이런 장면들을 접하게 되는 독자들은 마일스에 대해 무언가 섬뜩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아이 치고는 영악하다"는 표현을 넘어, 전형적인 캐릭터 이상의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녀가 몸소 겪게 되는 환시에 대해선 아이의 수사와 행동에 의도적으로 겹쳐 놓게 됨으로써, 극 후반부에 그녀가 어린 마일스에게 추궁하는 대화가 거의 양쪽의 분열된 인식을 표출 시키기에 이릅니다.

순결하거나 그 반대의 두려운 의미로 함께 쓰이는 영체를 경험하는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 혹은 (가능성이 높은) 환시를 겪게 됩니다. 마일스와 곧잘 어울렸다는 저택의 하인 피터 퀸트와 그녀의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이 가히 목격되는 것인데요. 그녀는 내가 '귀신'을 본 것 같다는 의미의 고백을 처음 그로스 부인에게 하게 되고, 일절 본 적이 없던 피터 퀸트와 제슬 선생의 추정되는 이미지를 부인에게 전달하게 되자, 그녀는 쉽게 '그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두 영혼의 외형상 보여지는 모습을 이 그로스 부인이 확인 시켜 준 것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그로스 부인의 행적의 분석하는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그로스 부인조차도 주인공이 겪고 있는 '현상'을 같이 경험했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와 그로스 부인이 나누게 되는 대화나 그녀를 향한 부인의 일관된 동조와 신의는 단순한 극의 함정 요소를 넘어, 해석 상 난해한 설정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이 때문에 결말에 대한 많은 해석을 낳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그로스 부인에 대해 첨언을 해보자면 그녀는 신분 상의 지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신분 상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고용인인 할리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에게 쉽게 수용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로스 부인이 어느 정도 저택 내의 주인공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저택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의 위치로 봤을 때, 갑자기 나타난 가정 교사에 대해 은연중 저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극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의도된 상황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마일스가 학교에서 퇴학 당한 이유에 대한 추궁이 마일스를 (물론 스스로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들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끌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큰아버지인 할리의 배려임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그 자신이 여동생의 안위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정신적 압박으로 지배 당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퇴학의 이유'를 추궁하는 (미처 서로 신뢰를 쌓지 못한) 가정교사의 압박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으로는 아마도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극에서는 이미 그를 향해, 영악한 어른아이로 설명되고는 있지만 일상의 어른과 같은 보편적 인식과 태도를 갖추었다고는 볼 수는 없기에, 아이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원치 않는 압력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일반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극 중반부터 이어지는 주인공의 의뭉스런 행동과 그를 향한 억측의 오해들이 중대한 압박이 되어, 굳이 영체나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는 현상을 내밀지 않더라도 결말은 어느 정도 파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구글에 떠도는 이 작품의 해설 등을 살펴보니, 어느 블로거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단편 들을 포함한 중요 작품을 일독해야만 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부 단편들은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후기에서는 주인공인 가정교사가 일종의 성적 압박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도 있었는데요. 앞의 서사에서 그러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문장들이 있어서 그런 쪽의 추론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사망한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의 아름다운 용모를 간접적으로 그로스 부인에게 구술하는 장면이나 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전임자의 외모 평가는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본문 164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의 역자는 '거시기'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원문이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를 쓰게 된 연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신선하기 보다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더욱이 번역된 작품 내에서 한자어와 같은 의도된 의미의 번역들이 여러 곳에서 보여서 저는 역자가 이 작품을 영어로 된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중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역자가 번역한 글을 재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풍채 좋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깔끔하며 건전한 아낙, 그로스 부인이 무척 반가운 나머지 너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확연히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인지하기까지는 도착 후 반 시간도 안 걸렸다.

"그 꼬마 신사에게는 정신없이 휩쓸리실 거예요."

잘 생각해 보니 나의 첫 임무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솜씨로 아이를 구슬려 나를 아는 삶으로 느끼게끔 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내가 품었던 공상은 우리가 거의 대형 표류선에 타고 있는 한 줌의 승객만큼 길 잃은 신세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소년의 학교 행실이라는 영역이 계속 알 수 없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일스에게서 이를테면 과거라는 게 없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중략) 내가 아는 그 애 또래의 누구보다 매일 인생 새출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아이였다.

"퀸트만 좋아라 했던 거죠. 도련님을 데리고 노는.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을 망치는 걸요."

그래서 나는 얼른 해당 화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이제는 거기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형태를 취하느라 난리라는 말로 부인을 안심시켰다.

부인이 그토록 친밀한 연대의 적절성을 비평하고 부조화를 암시하며 심지어 제슬 선생에게 대놓고 건의를 할 정도로 나섰던 일은 기실 매우 적합한 진상이었다.

내가 압박하자 부인이 실토하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각각의 위치를 잊지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적어도 그런 소년이 학교장에게 쫓겨났다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유의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기묘한 숙명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갑자기 무너졌는지, 틀림없이 저 애도 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시쳇말로 넘어갔는지 알리라는 생각에 떠밀려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는지.

"그 한 쌍이 그 소름 끼치는 시절에 아이들에 쏟아부은 만악 때문이죠. 또, 그 죄악을 아이들에게 계속 더 권하려고, 계속 마귀다운 짓에 매진하려고, 그러려고 다른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원래 남자가 여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은 그저 본인 인생의 낙이라는 신성한 원칙을 더욱 신나게 즐기는 식이기 일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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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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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빗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안 바이올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의 군인으로 소령으로 전역합니다. 매큐언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에서 보냈고, 그가 12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에 위치한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 (런던 소재 남학생들을 위한 기숙형 중등학교)을 거쳐, 이스트 서식스 주의 팔머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뒤이어 그는 노리치에 위치한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UEA)에서 논문 대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위탁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런 그의 첫 출판 작품은 단편 소설집이기도 한,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이는 197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에 '서머셋 몸 상'을 수상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몇 년 간의 단편집을 시작으로 문단에 주목을 받다가 1988년 이후, 비교적 성공적인 작가의 경력을 이어가게 됩니다. '암스테르담', '속죄', '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등의 작품들이 연달아 평단과 대중들에게 큰 찬사를 받게 되고, 특히 1998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그해 부커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매큐언은 지금까지 부커상 후보에 총 여섯 번 지명되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왕립 문학회 (FRSL). 왕립 예술회 (FRSA), 작가 협회 회원에 등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 인문주의자 협회의 저명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작품 활동 이외에, 매큐언은 공개적으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폐쇄적인 이슬람주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요. 여기에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인들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어 비판을 가했고, 2016년 6월, 영국 정부의 유럽 연합 회원국 자격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이러한 정치적 시도에 대해 매큐언은 "영국이 완전 변했다"며, 신랄하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sson"으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런드 베인스는 그의 부모라는 출신 배경과 자신이 태어난 연유에 있어, 작가인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요소가 작품의 틀로 덧대어 나타납니다. 특히, 매큐언의 모친의 첫 남편이 전투에서 전사한 후, 애인과 재혼했다는 설정과 매큐언 자신에게 입양된 형제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품에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여타 다른 평론에 있어, 주인공인 롤런드가 자신의 삶을 통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주목하고 이것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를 중요시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비교하여, 다소 다채로운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극중의 롤런드가 자신의 인생을 거치게 되는 시기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영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대처의 대처리즘적 신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냉전이 종식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거쳐, 최근인 2021년의 코로나 사태까지, 한 인간의 삶이 그저 온전하게 소급될 수 없는 그야말로 격동의 여러 시기를 작가의 평이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롤런드라는 인간을 다시금 우리 방식대로 재조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이 롤런드라는 인물을 반쯤 비극적으로 추동하게 되는 음악 교사 미리엄 코넬은 그가 14세가 되던 해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1959년에 왕립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로, 그녀는 쉽지 않은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십대 시절을 보내고 있던 롤런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어린 시절 가까운 지인이나 이웃을 통해, 불행하게도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이 그 기억 때문에, 평생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롤런드 역시, 그의 십대로 인해 결국 온 평생을 저당 잡히게 되는 혹독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미리엄이라는 인물은 후반부에 설명되는 자신의 불행을 롤런드를 통해 어느 정도 불식시키게 되는데요. 이는 이 두 사람이 '피아노 수업'이라는 매개로 나이를 떠나, 양자가 본질적으로 한쪽이 우선권을 갖는 소위 '권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당시 성인이었던 그녀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롤런드를 지배합니다. 이러한 부지불식간의 조건에서 롤런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면서, 내면적인 갈등으로 삶에 있어, 많은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이 이 때의 두 사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결핍'을 안고 있는 롤런드가 이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성적 충동, 성적 몰입에 몸을 맡기게 되면서, 성인이 아닌 십대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에둘러 '쾌락'과 비슷한 면모로 재해석 되기도 합니다. 물론 매큐언의 이런 묘사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닐겁니다.

그렇게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서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물론 미리엄이라는 선생을 통해, 그야말로 아주 작은 그의 '빛나는 시기'가 극의 1부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은 경제적 나락 그 이상의 충격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전하게 정립하고 통제하는 능력 자체를 잃게 됩니다. 이런 롤런드의 삶이 극적인 대비로 그려지는 '엘리사 에버하르트'와의 짧은 결혼 생활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남자'의 그야말로 비극적인 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큐언의 다른 작품인 '검은 개'에 등장하는 '준'처럼, 아내인 엘리사의 모친인 제인과 '딸보다 더 장모를 이해하는 사위'로 그려지는 듯했으나, 제인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삶에 있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그런 어머니의 '좌절된 꿈'과 단편적으로 자신이 이해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 이 두 사람을 경멸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의 파급은 꿈을 위한 '모성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제가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글쓰기를 위해, 남편과 아들을 버리는 엘리사의 그 가혹한 모성의 중단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기는 커녕 그저 매일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과, 다가오는 '엄마 노릇'에 자신이 매몰되게 된다면 더이상 자신의 꿈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 절박함은 이 작품을 다 읽은 이후에도 짐작이 되지 않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관습과 모성성을 파괴하는 인물인 엘리사와 크게 대비되어 그려지는 성실하고 사려 깊은 대프니 이 양자는 그만큼 롤런드의 사랑, 그리고 그의 어긋난 삶을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특히 대프니의 마지막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마지막 까지 노력하는 롤런드의 힘겨운 투쟁은 그가 마지막에 비로소 선택한 사랑에 대해 어디까지 지켜내고 헌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의 의도를 전부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3부에서 드러나는 롤런드가 직면한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어설픈 해후가 그렇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고 설득이 되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엘리사라는 인물이 표징하는 최악인 관점은 롤런드의 모친인 로절린드가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후에 용기를 내어 그가 결정한 제2의 결혼 생활의 상대인 대프니가 전 남편에 의해, 자행된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엘리사가 최근 내놓은 장편인 '그녀의 느린 몰락'에서 의도적인 인물 암시로 인해, 여주인공을 때리고 가정을 내팽개친 소설 속 남편을 롤런드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등치시킨 점입니다. (극에서 이미 규명되지만 롤런드는 한번도 엘리사를 향해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작가는 롤런드에 품에서 행복한 삶을 맞이하게 되는 대프니와 엘리사 에버하르트가 아주 명확히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구성되었고, 이 양자의 언행과 행위 자체가 오직 극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의도 역시,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엘리사는 그간의 작품 활동으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고, 이는 극중에서 현재의 평단들로부터 귄터 그라스와 토마스 만보다 더 훌륭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찬사도 받게 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치열한 신자유주의 시대 (엘리사가 자신의 꿈을 이뤄내기 위한 과정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이상과 부합한다면)에 자신의 자식들을 건사시키고 평생 현장에서 일을 놓지 않은 훌륭한 어머니이자 조언자였고, 그리고 롤런드에게 더할 나위 없던 충실한 연인이었던 대프니의 예견하지 못한 불행한 말로는 어찌됐든 뒤이어 등장하는 후반부 극의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물론, 그가 어느 정도 각성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저 납득하는 걸 넘어 안타까운 정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인 롤런드는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남성성이 배제된 인물이기도 한 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권력적 속성을 지향하고 휘둘렀던 캐릭터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타의 인물들과는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미리엄과의 왜곡된 성 경험과 그에 따른 피지배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노동당을 지향했으면서도 끝내는 소극적이었고 베를린이 분단 되었던 냉전의 시기에 그때 만난 어린 두 소녀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확신하는 그 찰나의 현실을 평생 안고 살게 됩니다. 여기에는 나치와 관련된 역사 약간의 팩션으로 쓰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매큐언의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들처럼 현대의 굵직한 사건과 일개 개인의 삶이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구를 엿보이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십대 시절의 롤런드가 그 당시 냉전의 핵무기 경쟁에서 어린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일상적인 삶 속의 공포'가 그저 허무맹랑한 무언가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극에서 이 핵무기라는 단어가 적잖게 등장하지만 어떻게 보면 일상적 삶이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조건의 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저 바등거리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냉소하기보다는 그때의 현실이 어땠는지, 절묘하게 이원적으로 서사를 도입하는 작가의 구성은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었습니다. 특히 냉전의 공포나 베를린에서 동독 당국에 의해 구금된 지인들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던 상황은 개인이 그러한 통제 범위 이외의 정치적 문제를 읽는 내내, "우리라면 어땠을까?"를 고민해 보게 만들어줍니다. 매큐언의 글쓰기는 이런 부분에 있어 매우 탁월하기에 아무리 호불호가 갈리는 서사의 틀이라고 할지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누구에게나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거나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 시도 자체 만큼이나 가혹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롤런드가 맞이하는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그 불완전한 해후는 이 작품의 옥의 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란 그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롤런드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선량한 인물이었고 물론 우리의 삶에서 속속들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행동이나 언행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롤런드로 투영되는 평범한 삶의 의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관된 무언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과거의 철인들의 삶을 본받아 대오각성에 준하는 어떤 개선을 작가가 바란 것은 결코 아닐겁니다. 그렇다고 거대한 정치적 대립과 이데올로기 투쟁에 놓여 있는 평범한 삶의 아련하고 안타까운 측면을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하나 만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극 후반부에 롤런드가 거의 홀로 키워낸 자신의 아들로부터 탄생한 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모두 채워버리는 진정한 '사랑'이 되었음을 롤런드가 말년에 깨달은 것처럼 각자의 인생에서 이러한 깨달음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여진다면 그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겁니다. 은연중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극중에서 로버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롤런드의 서사로 스치듯 보여주고 있는 장면처럼 모든 걸 속속들이 다 버리지 않아도 충분히 인생의 도(道)는 각자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본문 56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책 제목은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극 후반부에 드러나는 '세월의 레슨'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세월이 개인의 삶을 통해 가르치는 단련과 무뎌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롤런드가 미리엄 때문에 겪게 되는 삶의 파편들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하기도 했습니다. 


-작품 말미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감사의 말을 적고 있었는데요. 그 마지막에는 자신이 수학했던 울버스톤홀학교를 언급하며, 그곳에는 미리엄 코넬과 같은 피아노 선생님은 없었다는 강렬한 문장에서 저는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저 문장은 그것대로 큰 위미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과 제자는 죄책감을 느끼며 서로 떨어졌고, 그는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들이 이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로 묶인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은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누구나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만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런 지옥일 뿐이다.

어떤 여자들에겐 홀로 아기를 키우는 남자가 매력적이고 심지어 영웅적으로 보인다. 남자들에게 그는 멍청이로 보일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모욕적인 질문과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는 부모님과 작별한 이후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 1984년 여름에 앨리사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읽은 후 감정 기복이 심해지며 상태가 이상해졌다.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겐 오빠가 누린 대학 교육 혜택을 별다른 고민 없이 제공하지 않은 부모님에게 "섭섭하고 심지어 분노까지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폴란드 침공 이래 그곳에서 삼십만 명의 유대인이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되었다."

하인리히 역시 자신의 고압적인 태도를, 아내는 마땅히 집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기대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최고의 삶은 풍요롭고 다원적인 것이며, 의무는 불가피하고, 황홀경에 감싸여 그것을 위해서만 사는 건 불가능함을 알았다.

지난 수년간 베를린장벽에서의 돌발적인 대립으로 3차대전이 발발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롤런드가 어렸을 때 몹시도 격렬하고 소유욕이 강하고 무서운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버지는 로절린드에게 손찌검을 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 사기친 일을 자랑하고, 모든 가족 행사를 - 대개 술주정을 부리며 - 좌지우지하고, 무자비하게 자기 생각만 반복해서 주장하고, 수전의 증오를 살 말 못할 짓을 저질렀다.

앨리사에게, 리베나우에서 눈길을 걸으며, 그녀의 소설에는 그 고백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두려움에 즉각적인 성경험을 얻으러 간 건방진 어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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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서태평양 전쟁 -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을 어떻게 억지할 것인가
로버트 해딕 지음, 장성준.박남태 옮김 / 김앤김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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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로버트 해딕은 예비역 해병대 장교로서, 과거 동아시아와 인도양 및 아프리카에서 안보 관련 지원 활동을 해왔고, 특히 인간 신뢰성 프로그램에 따라 핵 지휘 및 통제 임무도 맡은 이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 공군 협회 산하 미첼 연구소의 객원 선임 연구원으로 공군, 우주군, 사이버 역량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이에 따라 미래 국가 안보 전략 전반에 기여를 하고 있는데요. 이런 그의 주된 연구 분야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경쟁과 현 지역 내의 특수 작전 등을 포함한 특수 상황이므로, 그에 따른 여러 강연 활동도 지속해오고 있는데요. 특히 그는 중국과 인도-태평양을 포함하는 지역의 미국 내 안보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이력이 녹아들어, 꽤나 암울한 전망이 그려지는 이 글은, 원제 "Fire on The Water"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해딕의 이 책은 지난 2014년에 처음 출간되어, 앞으로 직면하게 될 중국의 서태평양 위협에 대한 우려를 적시한 글로 당시 미국 내에서 큰 주목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출간된 같은 제목의 이 책은 변화된 중국 정치와 군사력 증강에 따라, 일종의 증보판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본격적인 글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번 판본의 한국어판 서문에 실린 저자의 우려섞인 진단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역량의 급격한 성장으로 촉발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점증하는 안보 경쟁은 미국이 향후 20년 동안 직면하게 될 가장 중대한 국가 안보적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어쩌면 우리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두운 미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가까운 미래의 중국이 대만 침공으로 인한 그 불똥이 한반도에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과거 냉전 시기 이후, 미 국방부의 군사적 과제이자 소위 부처의 독트린 혹은, 미 연방 정부의 군사 독트린이라고 볼 수 있는, "전세계에서의 동시다발적인 두 전쟁을 함께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저는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일전에 지오바니 아리기는 당시 대두하는 중국을 보면서, 최종적으로 이 국가가 불완전한 강대국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었는데요. 이것이 작금의 중국을 있게 한,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에 동의했던 엘리트 학자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들이 더 큰 이익을 위해, 중국을 이용했고 그것의 수십 년의 결과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중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다수 각료들은 중국을 세계 시장으로 인도해, 이 나라를 민주화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요. 물론 저자인 해딕이 자신의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덩샤오핑이 강조한 '도광양회'과 시진핑의 집권 이후, 전반적으로 철회되어, "할 말을 하는 중국", "국제 사회에 국력에 맞는 대접을 받고 싶은 중국"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넘어, 일종의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로 정치를 일관해 작금에 이르렀습니다. 시진핑 이전의 전임 국가 주석이 덩샤오핑의 사후 유지를 받들어, 지역 사회는 물론 전세계 국제 무대에서 어느 정도 자제를 하고 있었던 중국 외교 기조가 전자의 변화로 말미암아, 완전히 뒤바뀌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2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듯이, 동남 아시아의 말라카 해협은 대만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해상 교통로이기도 합니다. 뒤에서 더 논의되겠지만 이 미국인 저자의 눈으로 본, 말라카 해협의 지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원유 수입의 수송로는 물론, 각종 상품의 이동로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선험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미국과 주변의 동맹과 파트너국들로 이뤄진 '제1도련선'이 중국의 서태평양 진입을 사전 차단해왔다는 점에서, 이제는 대표적 무역국으로 올라선 중국 역시, 이 지역의 원할한 수송로 보호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군사력이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은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어쩌면 국익의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 왔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남중국해의 각종 환초와 쓸모 없는 무인도를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군사기지화에 나서, 이 거대한 바다를 자신의 영해로 주장하고 심지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까지 무시하는, 중국의 소위 막무가내식 군사력 투사는 모두에게 우려를 끼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이징의 중국 지도부가 대만에 대한 '정상화'에 나설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2025년 내지는 2026년에 대만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시작하리라 예상했지만 푸틴이 일으킨 전쟁이 그것을 유예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중국이 대만의 서부 해안에 대단위 병력을 상륙 시킬 수 있는 '대규모 상륙 전단'의 구축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평가가 대내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겨지는데요. 사실상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달러화를 고려해 봤을 때, 이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님은 명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직면한 중국의 대만 정벌과 서태평양의 교역로의 위협은 어떻게 보면 미국이 반쯤은 자초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오바마 전 대통령의 2기 시절, 중국에 대한 그 나태함을 고려해 본다면, 당시에도 중국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했으나, 그것은 자유 시장이라든지 세계화의 기조, 내지는 2009년 이후의 충격으로부터, 세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서고 있었기에 아마도 환경 자체는 그다지 녹록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대만의 안보 위협 내지는 최종적으로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정벌하는 경우, 2장에서 저자가 경고하는 바대로, "경제적 충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인 대만이 중국에 예속되는 사태는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비극이며, 미국의 위신 또한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진술됩니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이 사태는 지역 내의 안보가 쇠퇴하게 됨으로써, 주요국들과 약소국들 사이에 소위 "홉스적 투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일종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우울한 맥락의 비전에서 저자는 호주의 중국 전문가인 휴 화이트를 인용하여,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지킬 수도 없는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시도는 미국의 이익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불필요한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언급하고, 결국 미국의 한발 후퇴와 더불어, "미국과 중국, 인도, 일본이 어떤 '세력권'을 형성"하여, 지역 강대국들의 협조체제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미래의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고, 한국과 (대만)이 핵무장한 일본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같은 지역 강대국인 중국을 견제한다는 정치적 발상이기도 한데요. 물론 현실 가능성을 떠나, 우리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휴 화이트의 저런 진술은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서태평양 지역 내의 미국의 영향력이 과거와는 달리 축소되어 왔고, 이것이 지금의 '대만 위협'과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현실주의적 관점입니다.

확장된 군사력을 통한 자신의 비대해진 국력을 국제 무대에 투사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국익을 보호하려는 중국의 변화된 모습은 앞선 평가대로 미국의 군사력이 아마도 중국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이런 미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과거 전문가들과 우리가 숱하게 내뱉었던 '패권'에 대한 분석 여부를 떠나서, 미국 내의 여론 또한 행정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특히, 과거 냉전이 끝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른 미국의 역할 변화, 그런 인식에서, 최근 이십여년간 진행되어 온, 중국과의 경쟁 혹은 미국의 통제력 유지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저자인 해딕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두번째 출범을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대한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의 트럼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매우 불확실한 측면이 있기에, 과연 대만에 대한 침공 상황에서 지금의 미국 행정부가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우려스러운 입장입니다.

다만, 저자는 책의 2장과 3장을 통해, 지금이라도 미국이 서태평양 지역의 동맹과 파트너국들과 협의하여, 미군의 양적 주둔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과 일본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만으로는 중국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장비와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에 맞서, 미국이 재래식 군사력을 일선에 더 배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앞으로 중국의 대만 침공을 전제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한 실질적 자원들을 대만과 가까운 지역에 미리 배치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저자는 4장 이후에서, 현대화된 중국의 미사일 전력과 조밀하게 배치된 인공위성 전력에 매우 큰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양적으로 증대되고 있는 중국의 해군 전력 또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석들은 저와 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첨단 미사일 발사체에 쓰일 수 있는 반도체와 일부 엔진 부품들은 수출 통제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국제 공조와 특히 일부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를 미국 관료들이 설득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국 미사일의 현대화에 따른 사정거리 확대는 그만큼 미국이 자랑하는 대양 해군력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6장 이후의 논의들은 인공 위성과 같은 중국의 우주 전력 구축에 대한 함의, 중국 해군의 확장된 군사적 위협에 맞서, 미국이 어떻게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되는지를 제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후반부의 논증은 어떻게 보면 일반 독자들을 위한 목적보다는 현재 미국의 국방 관료라든지 혹은 군사 정책에 책임 있는 정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그만큼 군사 분야의 전문적인 용어들과 군사 시스템 하의 복잡한 개념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책은 여타 전문가들보다 확실하게 중국의 대만 침공을 예견하고 있고, 디가오는 이런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대비 태세를 미국 책임 있는 관료들과 더 나아가 백악관에 일종의 대비 태세를 포함한, 경각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 책에서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충분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전략 무기라고 볼 수 있는 순항 미사일을 비롯한 중국의 미사일 확충은 이웃 국가인 우리나라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게 될 경우, 이들이 북한을 움직여 휴전선의 도발을 획책한다는 가정보다, 순항 미사일로 평택 미군 기지를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중국과의 불필요한 전면전이 발생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임을 감안해 본다면) 이를 한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을지, 이 점도 크게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대만의 위협은 그저 바다 건너 나라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 저자의 설득력 있는 논증들 가운데, 그것들의 귀결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로 이어지는데요. 그것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재래식 억지력이 무너졌다"는 평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서구 연합국에 의해 형성된 기존 국제 제도와 규범은 법의 지배, 개방 경제, 모든 국가의 주권, 인권과 민주적 가치, 그리고 법과 규칙의 공정한 적용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동맹국 및 우방국들에 대한 안보 공약의 신뢰성을 지키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미국이 방어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지역의 소유권이 불분명한 몇몇 경우에도 그랬다.

무력충돌이나 자유 무역 원칙의 쇠퇴로 이 지역 소비자들에 대한 접근을 잃게 된다면, 직접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로 인해 미국의 경제와 근로자들의 삶의 수준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중국의 제1인자로 등극하기 전에 시진핑과 교류했던 서구의 정책결정자와 외교관들은 그가 자신이 열성적인 마르크주의자이자 마오쩌둥과 그 노선의 추종자이며, 자신의 중앙집권적 권위 하에 있는 강력한 중국공산당만이 중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임을 드러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장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가장 불길한 두 번째 경로는 이 지역의 안보를 유지하는 역할로부터 미국의 퇴각이 지역의 주요국과 약소국들 사이의 안보를 위한 홉스적 투쟁을 촉발하는 상황을 상정했다.

따라서 패권국들이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역내 패권국보다는 역외의 패권국과 합의를 이루기가 더 쉬운 법이며, 이 지역에서 안보 유지를 위한 미국의 주둔이 환영받는 변치 않는 이유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서 미군의 전진 배치를 유지하는 비용과 인도-태평양 지역이 자체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을 구축하도록 내버려두는(만약 그러한 노력이 실패한다면, 미국과 나머지 세계에 미치는 결과가 파멸적일 것임을 알면서)비용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중국은 미국의 동맹관계를 와해시키고, 인권을 훼손하고, 세계 경제를 중국에 유리하게 조작하고, 그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수호하고 발전시켜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폐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인근에 집중 배치된 미군은 훨씬 남쪽 지역에서 증가하는 안보 문제와 화약고들에 대처하기에는 분명 부적절한 위치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60년간 미군 전반의 경향은 장거리 타격 능력을 소홀히하면서 고도의 능력을 지닌 단거리 무기 플랫폼에 과도하게 편중되어왔다. 이러한 해로운 경향은 태평양에 있는 미군을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무력충돌이 발행했을 때, 비교전국(예를 들면, 한국)이 자국에 주둔하는 미국이 자국의 영토로부터 중국을 대상으로 한 군사 작전을 벌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그와 같은 미군 기지는 미사일 한 방 날아오지 않더라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전진 배치는 침략의 확대를 억제하는 수단이지만 또한 군사 작전에 있어 잠재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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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퓰리즘 선언! -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체성 서사
로저스 M. 스미스 지음, 김주만.김혜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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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0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에서 태어난 로저스 M. 스미스는 미국의 헌법, 정치 발전, 정치 사상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정치학자입니다. 그는 1974년 미시간 주립대학의 제임스 메디슨 칼리지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으로 넘어가, 켄트 대학에서도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이후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1978년에 석사 학위를, 2년 뒤인 1980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또한 스미스는 1980년부터 2001년까지 계량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코울스를 기념한, 예일 대의 알프레드 코울스 정부학 교수이자, 인종, 불평등 및 정치 연구 센터의 공동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현재는 펜실베이나 대학의 크리스토퍼 H. 브라운 석좌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정치학회 (ASPA)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at Is Not Who We Are! Populism and Peoplehoo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사회과학 서적들 가운데, 로저스 스미스의 이 책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이 책에서 명료하고 일관된 주장을 흔들림 없이 이어 나가면서, 그것의 논증 역시 매우 객관적이고 설득적이었는데요. 특히 극우 포퓰리즘에 대해 단순히 '시급히 처분되어야 할 문제'로 일부 학자들의 과격한 논점을 피해, 왜 이 극우 포퓰리즘이 작게는 미국 정치와 크게는 전세계 민주주의에 해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훌륭한 논리적 귀결로 이를 알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요. 대체로 국내에 학술서로 유명한 출판사의 기획 출판 치고는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일독이 나쁘지 않았고. 풍부한 역자들의 주석과 저자의 논조가 여타 불필요한 번역 문제에 빠지지 않게 사회과학 이상의 유려한 번역을 보여줘서 그것대로 역자들의 노고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역임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번역이 나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17년부터 시작된 미국 내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논쟁은 저자의 언급대로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 이후,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유지해 왔던 정체성이 이 극우 포퓰리즘에 의해 확실히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 내 극단주의적 포퓰리즘 정치가 어찌됐든 내부의 정화 작용으로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도널드 트럼프로 이해되는 극우 포퓰리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포퓰리스트라고 칭하면서 강한 반다원주의, 비자유주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운동들을 가리켜, '병리적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로 규정하기 이릅니다. 스티브 배넌과 앤드루 브라이트바트와 같은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은 미국이 처한 상황을 대다수의 시민들을 향해, 선동으로 잘못된 서사를 부채질해왔으며, 전반적으로 이들이 보이는 반엘리트주의는 앞선, 반다원주의와 비자유주의를 고려해 봤을 때, 미국 내 리버럴 정치 세력에 대한 증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과거 로버트 달의 확신과 마찬가지로 일전의 미국 정치와 시민들이 보이는 선명성은 다문화와 다원주의에 기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이후에도 미국의 헌법에 기초한, 다수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누구에게나 중요한 자유에 있어, 다수의 시민들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최근에 무분별하게 드러나는 극단적 증오 발언에 어느 정도 양심의 분별력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동안 미국이 주도하여 구축한 전세계의 자유로운 시장과 그에 따른 세계화라는 본질은 국제 질서의 중요한 기조였고 전세계인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서로 오고 가고, 경제적 거래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자체를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은 리버럴들이 주도한 미국 정부의 주요한 패착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는 과거 빌 클린턴 정부를 향한 화살이기도 했습니다. 세계화로 인한 명과 암은 미국조차도 명확한 부분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예로 보다 값싼 생활 용품들이 미국에 수입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그나마 생활 물가 안정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에 반하여 미국의 일반 제조업은 날이 가면 갈수록 경영 환경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동안 데이비드 코츠, 앤드루 갬블, 리민치와 같은 학자들이 규명해 왔던 것처럼, 이 신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는 사회의 계급에서, 중산층 이하의 시민들이 삶을 영위하기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저자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 글의 1장에서, 저자는 "현재 포퓰리즘 운동이 급격히 늘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에서, 경제적 요인인 불평등 문제와 경제적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한 상황,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이민과 성소수자의 점진적인 권리 운동 등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그 책임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가운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극단주의 정치가 등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우리가 극단적 포퓰리즘을 제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앞서 극명하게 언급했듯이, 나와 남을 가르는 이 정체성 정치는 상식과 분별력으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스미스와 같이 이 정체성 정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느냐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은 진보주의 운동을 비롯한 많은 시민 운동이 이 극우 포퓰리즘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해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저자는 일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존재로서, 진실에 기대지 않은 거의 허위에 다름 없는 '서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으로 가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거짓 뉴스나 조작된 서사의 진위를 각자의 시민이 판단할 수 있을지는 그만큼 회의적이라는 점인데요. 최근의 세대에서 높은 비율로 대학 졸업자의 비중이 늘어났지만 조작된 정보에 대한 진실을 가리는 일은 보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네트워크 기술과 그로 인해 펼쳐진 각종 SNS와 포털의 양적 성장으로 일견 이해되는 현상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개인이 접하는 정보는 그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비해 우리는 과거의 철인(哲人)처럼, 성찰과 사유를 밥 먹듯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자는 저들이 저들 만의 왜곡된 서사를 바탕으로 정치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듯, 우리는 우리 식의 '국민 정체성'의 서사를 정립하고 시민들 사이에 이를 확대시켜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를 왜곡하여 그가 '진실된 미국인'이 아님을 강조해왔습니다. 또한 트럼프는 멕시코 계 연방 판사가 과연 판결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고, 백인이 아닌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진 다른 인종, 이를테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비백인 미국 시민에 대해 여러차례 나치와 같은 발언을 일삼은 바가 있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 백인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는 분분이 선동의 배경이 됩니다. 즉, 이러한 트럼프를 상대로 그가 단순히 '정상이 아닌 인물'이라는 평가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미국 시민 스스로가 자유 민주주의에 헌신하겠다는 과거 높은 수준의 정치 참여를 기억하고 시민 개개인이 정치적 책임감을 갖고 진실로 규명되지 않은 '대안적 사실'과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의도된 서사'에 대응할 수 있는, 시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통합된 서사를 지금이라도 만드는 것이 일련의 사건들로 보아, 중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대안의 한 방법인 서사 만들기는 이 글의 3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과거 미국이 유럽의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정치에 환멸감을 가진 선조들이 신대륙에서 세운 국가의 가치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바라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다른 형태'의 정치였음을 기억하고, 그것의 유산이 얼마나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하는지 떠올려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는데요. 또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과거의 독립선언서를 통해 해석한 '미국의 거대한 서사'에서, "시민의 덕성과 의무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사상이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미국의 종교적 전통의 관점"은 이후, "시민성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고 우리의 공동 목적의식을 회복하는 데 관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건전한 덕성과 도덕적 책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민주주의의 이상, 그러니까 모두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에 기반한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민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 국민의 정체성 서사의 본질로 해석됩니다.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서술 자체가 듣는 이에 따라, 낯 뜨거운 일종의 '미국 만세'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논증된 내용은 실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미국 시민이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비롯한, 분명한 행복 추구권에 동의했듯, 그것이 실질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적 토대와 그 체제를 다시금 재인식하는 부분이 극단주의에 오염된, 자신들의 정치에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고, 이것은 현재 극우 정치에 물들어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거 유럽의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신정과 같은 구체제의 굴레에서 새로운 정치, 사회 제도를 대체한 미국의 유산은 그것만으로도 극단적 정치에 대한 일종의'다시 생각하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극단적 정치가 뿌리를 내린, 경제적 불평등과 부의 집중 문제는 재분배와 공적 투자의 미국 내 여론 형성을 뒷받침하고 세계화가 추동한 긍정적인 부분과 그 이면의 좋지 않은 문제들을 정확히 일반 시민들에게 밝히는, 여러 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을 지속해 나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는 그저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 만으로는 조금의 해결도 볼 수 없는 문제로 그저 미국의 문제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그동안 구축해 온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극우 포퓰리즘은 전형적으로 기존 엘리트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이들이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이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가 개인의 권리와 삶의 존중에 있어 중요한 체제임을 배워왔습니다. 이는 그만큼 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정치 제도임을 알게 합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우리가 포용적이고 평등지향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유의 국민 정체성 서사를 제공하는 정치인들이 우파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다른 정치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상황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현재 그와 같은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은 정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극단주의 정치에 대해 대항하는 것을 사실상 실패한 진보주의 운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인들이 극단주의 정치에 대항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면 진보주의 정치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미국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독립선언서'의 분명한 지향과 다수가 소수에 반해 이들을 억압하거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메디슨주의의 맥락은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이 어디에 기반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만듭니다. 즉 이런 유산에 기반하여, 미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나 스티브 배넌이 주구장창 외치는 서사 뿐만 아니라, 이들보다 더 나은 서사를 찾아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미국 국민의 정체성에 대한 더 나은 서사들이 있는지도 탐색해야 할 정치적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선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움베르토 에코가 정치적 논리로 점철된 주장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조언했듯이, 민주주의적 이상과 공동체의 공존, 평화로운 평등적 삶, 그리고 이것들을 망라한 건전한 정치의 온존은 미국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시민의 직면한 의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존 듀이의 경고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민주주의를 일그러뜨리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업 권력의 집중화에 대항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참여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때때로 국가 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을 확장해야 한다"


-과거 신자유주의에 지리멸렬한 태도를 보였던 진보 세력에게 저자 역시, 극단주의 포퓰리즘이 일으키는 왜곡된 정체성 서사와 선동에 대해서도 진보주의 운동 자체가 다소간 무능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많은 나라에서 진보 인사들은 자신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거나 지배집단을 온당치 않게 칭송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을 기피한다고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 점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극단주의 세력에 비해, 이는 진보주의 운동과 중도 세력의 명백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현 시점에서, 샹탈 무페 특유의 민주주의의 확실성을 위한 조언을 따로 이곳에 적어보고자 합니다. "민주주의 기획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작업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나 그들의 정체성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정체성이 사라지거나 경시되고 있다고 가장 빈번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수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종교적 전통주의자이다.

만약 우리가 정치집단이 잘 결속할 수 있는 까닭이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정체성에 관한 서사 덕분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정치는 결국 모두 정체성 정치라는 사실 역시 확실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 더욱더 완벽한 연방을 추구하는 미국의 연방 헌법 정신, 그리고 모둔 사람의 기본권을 보호할 수 있는 형태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독립선언서의 기획에 기초하는 더 평등 지향적이고 포용적인 서사들을 가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표방하는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인 국민 정체성 서사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은 기득권 엘리트에 맞서는 포퓰리즘식 반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반란은 필연적인 것도 자생적인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서사들이 가장 크게 의존하는 것은 주권자가 될 자격이 있는 국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핵심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구성적인 주제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은 이와 같은 정치적 서사들의 불협화음이 최근에 생긴 광범위한 경제적, 문화적 변화들과 더불어서오늘날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강력한 민족주의 형태의 포퓰리즘이 더 호소력을 가지도록 일조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각각의 집단들이 표방하는 가치가 여타의 도덕적 신념 가운데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지, 포함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포함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현재 실제 공동체에서 일반화된 도덕적 전통과 상식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기반으로 하되 비판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성, 기본 인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서사를 대체로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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