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시대 - 정의를 외치는 극단적인 사람들
폴 하이드먼 지음, 신재일 옮김 / 이글루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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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시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고 있는 폴 하이드먼은 뉴저지 주의 연구 중심 대학인 럿거스 대학(뉴어크 캠퍼스, 럿거스 대학은 3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에서 미국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당의 역사는 물론, 더 내밀한 미국 좌파의 역사 및 지식인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강단 지식인에 머물지 않고 유튜브 등 미디어에 출현해, 자신의 논저를 설명하고, 또한 현재 미국 정치에 관한 나름의 분석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내 인종 차별과 계급 투쟁에 관련된 글을 내놓기도 했고 이러한 사회적 양상들이 어떻게 사회를 파편화에 이르게 하는지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Rogue Elephant: How Republicans Went from the Party of Business to the Party of Chaos"로 지난 2025년 11월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최근인 2026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우선 국문으로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상당히 적절치 않은 편집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 글의 내용이 어느 정도는 (아니 상당 부분) 미 공화당의 극우화 내지는 내란 세력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극우의 시대'라는 제목은 여전히 자극적인 감상을 갖게 합니다. 또한 하이드먼의 이 글은 지난 미국 정치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를 기점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 분화 내지는 뚜렷한 변모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주된 분석은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의 '이념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점과 이들의 선거 자금과 관련된 뚜렷한 '이익화'와 기업계의 일관된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자유주의화에 편승한 소위 정당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진, 작금의 변질된 공화당을 매우 면밀하게 비판적인 내용으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의 공화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드리운 그림자를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얼마나 제거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당시 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급격한 변경 시도에는 원만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글 1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듯, 첨예한 냉전의 시기가 도래할 그 시점에서도 노동자들과 기업과의 권력 싸움은 워싱턴 정가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과거 조지프 매카시가 불러 일으킨 '광풍(狂風)'을 프롤로그에서 따로 도출하여, 작금의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둘의 차이는 어느 정도는 현격한 부분이 있어 무슨 연역의 방식처럼 모두를 처리할 수는 없지만, 우선 매카시가 초래한 '매카시즘'에 대해선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날의 극단주의적 이행과 맞물려서 말입니다. 여기에선 후반부에서 논증하게 될 미 공화당의 '부정적 당파성'이 이 매카시즘과 매우 닮아 있으며, 전자의 매카시즘이 (그저 명목상 허울뿐인) 자유주의를 위해, 그런 난장판을 조장했다면 지금의 공화당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 당파성'은 반자유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맥락의 워싱턴 정치 자체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책의 주요 해석 수단으로 등장하는 '그림자 정당'과 관련해, 저자인 폴 하이드먼은 서두에 미국 경제사에서, "상공회의소"와 "전미제조협회"의 등장을 시점으로 논증을 이어갑니다. 그 이전까지 미국 내 기업 경영인들이 상대적인 노동 조합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 단체를 꾸릴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으나, 1910년대 이후 이들의 소위 권력화는 나날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역대 미 행정부가 자유시장주의 노선의 견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번 갈증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 조직은 앞서 진술된 내용이 그저 경영인들의 친목 모임이라는 것을 웃으며 넘긴다 하더라도 1979년 그 유명한 '볼커 쇼크'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에 이르자 단순히 '시장 자유'에 올인하는 것을 넘어, 노동 개혁과 이들이 언급하는 미국 내 반기업적인 (물론 이들의 말에 의하면) 세력에 사실상 맞서는 것으로 자원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는 대체로 의회 로비와 선거 자금 투입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이들의 바람대로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세법 개정안'이 요구대로 통과되고 "기업에 대한 실질 세율이 33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크게 낮아지게 됩니다. 이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가장 큰 과업이기도 했던 '헬스케어 개혁 법안'이 공화당 주도의 조직적인 반대로 무산되기까지,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정치 세력과의 강고한 연대가 사실상 통념적인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를 후퇴시킨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쉽게 동의하는 공화당원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2장에서 분석되는 바와 같이, 앞선 뉴딜은 미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게 만드는데요. 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민주당은 '도시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했고 이에 반해 공화당은 미국 기업계의 확고한 지지와 더불어, 보수 세력의 정당으로 옷을 바꿔 입게 됩니다. 저는 하이드먼의 이 글을 일독하면서, 뒤이어 나타날 공화당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민주당 혐오'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면밀히 추론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 글이 그러한 근거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상대 당에 대한 근거 없는 지독한 혐오는 '티파티 운동'이 힘을 잃은 2014년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이었습니다. 특히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다면적인 인신공격을 포함한 증오에서도 말입니다. 만약 미 정당사의 맥락에서 그 근원을 파헤쳐 본다면, 아마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위 3연임 집권과 그가 추인한 뉴딜 개혁에 이 공화당 세력이 아주 소름끼칠 정도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앞서 언급한 '티파티 운동'은 명목상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및 '자유 지상주의'를 기반으로 미국 내 리버럴 정치와 민주당 세력을 일소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자인 폴 하이드먼은 정당 정치 바깥의 다수의 의견과 반하는 그림자 정당 세력으로 이 티파티 운동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민주당이 '노동계를 포섭했다'는 정당사 과정의 소위 이익 집단화를 차치하더라도 함께 가야 할 보수 정당인 공화당이 그 저변의 여러 정치적 측면의 극단주의화를 그저 손 놓고 바라봤다는 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면에서 저자는 현재의 공화당 정치를 '이념 정당'으로서가 아니라 반자유주의 세력의 '총집합'으로 해석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자들은 저자가 어떻게 공화당을 반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마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에 간단한 설명으로 재 집권한 작금의 도널드 트럼프가 반자유주의적 기조를 통해, 무역과 경제 개혁에 나섰고 특히 통렬한 반이민주의는 세계화에 따른 자유주의 기조에 명백히 반하는 시도로,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그동안 미국에서 대놓고 볼 수 없었던, '삐뚤어진 민족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출된 논증으로 봤을 때, 이 모두의 공통된 기반은 노골적인 '반자유주의'였습니다. 저도 저자의 다음 의문인, "공화당은 왜 반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극단적 정치 세력화에 어떠한 반대 의견도 내놓지 못했는가?"에 동의하고,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논증들이 결국 공화당의 실질적인 정당성 상실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공화당 정치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가 목도하게 될 미국 정치가 그리 밝지 만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국 시민들의 삶에 그다지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의료 보험 개혁과 사회 보장 제도의 개선의 필요성은 앞서 진술된 바와 같이,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를 거치며, 정치권에서 쇠락하게 됩니다. 저자의 진술대로 이 의료 보험 개혁과 사회 보장 제도를 실질적으로 유의미하게 보장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은 미국 시민 모두에게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레이건 시대의 이인자로 여겨졌던 뉴트 깅그리치와 같은 강력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위 '반시장주의' 해법에 반대한 것은 분명한데요. 그럼에도 이렇게 확고한 정치 세력에 막대한 로비를 지속한 기업계는 "클린턴의 의료 개혁안이 자기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해 스스로 반대해 나섰을 뿐이다"라는 편의주의적인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클린턴 대통령 재임 초기부터 공화당은 클린턴을 매우 증오했고, 더 나아가 그를 경멸"하기까지 했는데요. 민주당의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를 신봉한 가히 시장 친화적인 인물임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르윈스키 스캔들'을 지렛대로 클린턴의 탄핵 시도 당시, 공화당은 "담배 산업과 기독교 우파"의 강고한 지지에 눈이 멀어, 중대한 시기에 놓인 백악관을 유명무실로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갈등 끝에 탄핵은 무산되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세계화를 이끈 자유주의 엘리트 세력이 2008년 전까지 미국에서 중심 세력으로 인정받고, 이들이 가진 생각이 최소한 레이건 행정부까지는 존중 받을 정도였으나, 공화당이 진행한 여러 법안에서 더 오른쪽으로 향하게 된 점은 지금에 와서 어떻게 보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한 민주당 리버럴들과 공화당의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들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역사학자인 딘 베이커 역시 의문을 갖고 그렇게 진술했고, 최근에 읽은 게리 거스틀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레이건의 그 개혁은 소위 리버럴의 묵인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진술대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던 공화당은 사실상 조지 W. 부시가 방조한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에 대응해, 긴밀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는 물론이고, 금융 시장의 붕괴로 현물 시장을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이 관 속에 들어갈 시점에서도 애꿎은 '자유 시장 담론'을 여기다 들이대기까지 합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더 큰 위기가 찾아오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곧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가 내부 논의 끝에, 막대한 구제 금융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의회에 통보했음에도 그리고 그 수많은 전문가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민주당 정권의 백악관이 시도하는 대책에 보이는 마뜩찮은 반응이 부정적 당파성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독한 당파주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런 편협함은 자유주의의 유산은 확실히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면에 오바마 행정부 이전의 조지 W. 부시의 막바지 임기 1년 간을 따로 레임덕으로 설명하면서, 다른 정치적 패착이었던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는 일부 사람들에게 2008년의 금융 위기를 예견할 정도로 전조 상황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연방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수습하는데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무능한 정실 인사를 내려 꽂는 인사 실패는 조지 W. 부시 정권의 패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오늘날 공화당 정치를 이렇게까지 변질 시킨 건 티파티 운동과 더불어 코크 형제와 같은 그림자 세력이 한 몫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미국 정치가 자유주의적 자정 능력을 거의 상실한 데에는 이러한 원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따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SNS로 인해 더욱 범람한, 극단주의의 파고도 이에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이행에 더욱 편승한 미국 정치의 부정적 파급, 그 자체가 되었던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자인 하이드먼은 6장의 서두에서, 특별히 "트럼프의 집권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다"고 이처럼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은 기존의 사회과학적 분석 틀을 무너뜨렸다."고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트럼프의 인기는 스스로 SNS를 통해, 정치적인 이슈 등에 즉각적인 답변을 업로드 하며, 일찍이 대중 정치의 속성을 간파한 것에 있습니다. 매우 영악할 정도로 말이죠. 여기에 그는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철저한 자기 이익과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된 그야말로 '날 것'의 소통이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외견상 공화당의 이념(혹은 정치적) 정당으로서의 몰락과 이 '트럼프 현상'이 그 궤를 같이 했다는 점에서 두 현상의 부정적 시너지 효과로 인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미국 정당 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비로소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닉슨에 반대했던 블리스를 떠올려본다면 이는 극명하게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2014년 당내 주류 세력이었던 칼 로브와 그 패거리들은 중간 선거의 승리를 바탕으로 정치적 도전들을 물리치고,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상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됩니다. 2015년 1월, 부시 일가의 젭 부시가 출마를 앞둔 시기에 당내 의원들은 이런 젭 부시가 승리를 하게 되면 당내 세력을 일소해, 진정한 통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이것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6장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2015년 초, 코크 형제는 2016년 대선에 9억 달러 가까이 지출할 계획을 잡게 됩니다. 이는 대선 캠프 전체의 지출과 맞먹는 규모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공식적으로 대선에 출마하게 됩니다. 2015년 8월에 열린 첫 공화당 예비경선 토론회 이후, 트럼프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는데요. 이때 경쟁하던 젭 부시와 테드 크루즈는 곧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하는데 특히 테드 크루즈는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를 꺽고 그의 조직을 쉽게 흡수할 것이라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당시, 공화당 지지자들은 세금과 복지 삭감 문제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이민자와 다문화 정책에는 더 적대적인 상황이 되었는데요. 이에 트럼프는 이 틈새를 완벽히 파고 들어, "매디케어, 메디케이드, 사회보장을 삭감 없이 지킬 것"이라고 약속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 같은 무역협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특히 이민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혹자들은 이런 트럼프가 단순한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아닌, 의회 바깥의 반이민, 반자유주의, 그리고 극단적 보수주의 연합과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광범위한 세력이 결집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과는 별개로, 이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초래한 중요한 것들 가운데, 공화당의 도드라진 부정적 당파성, 즉, '상대당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이 트럼프를 매개로 실질적으로 발현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럼에도 항간의 트럼프의 당선과 관련해, 저자는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주장을 언급합니다. "트럼프의 당선이 공화당이 새로운 노동 계급 중심의 유권자 기반을 확보하는 전환점이었다는 것과 인종주의 급증의 결과"라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저자는 강조하면서, 첫째로 트럼프의 노동 계급 지지 상승은 2005년 이후, 노동 계급을 포획하기 위한 공화당의 추세와 다름 아닌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또한 둘째로 백인 유권자들의 '인종적 반감'이 이때 대규모로 퍼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인용됩니다. 일례로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백인들이 인종적 반감이 깊어진 징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강조하고 이런 주장에 대한 최신 분석들도 비슷했다고 언급합니다. 그 대신 "트럼프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트럼프 캠프가 보여준 독특한 전략에 있다고 진술하는데요. 힐러리 클린턴이 정치 광고에서 자신의 인격과 자격에 집중했던 반면, 트럼프는 공화당 내 다양한 세력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메시지 전달과 각종 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선명성을 강조했던 바가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은 대중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뚜렷했고 일부 계층에게 반감을 사고 있던 점을 개선시킬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나 업적 만을 늘어놓는 자기 광고는 역시 패착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트럼프 당선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과 확대된 이민 정책과 이민 문제 자체 때문에 표가 몰린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대중들이 인식하는 힐러리 자신에 대한 문제에 있어, 캠프의 대응 실패와 실효적인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정치적 무능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트럼프의 인종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단체들과 맞물린 측면이 분명 있고,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으로 해석되는 '러스트 벨트' 지역의 산업 쇠퇴와 그에 따른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표로 트럼프에게 결집된 점도 그저 무시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티브 배넌과 그에게 영감을 안겨준 지금은 작고한 앤드루 브라이트바트의 소위 영리한 정치적 연계는 그동안 코크 형제로 대표되는 그림자 정당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을 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붕괴시킨 주요 원인으로 불릴만 합니다. 특히 스티브 배넌은 지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에서 특별한 참모로 활동하여, 전부는 아니겠지만 공화당 주류 세력이 트럼프에게 굴복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에게 일종의 카리스마를 엿본 바바라 F. 월터의 인상 만큼은 아니지만, 저자인 하이드먼 역시, 아주 일관되게 '작금의 정치 상황을 내전 상태'로 규정하고 이러한 이행에 기름을 끼얹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바바라 F. 월터 역시, 하이드먼과 유사하게 이 내전 상태에 대한 놀랄만한 정치적 분석을 도출하기도 했는데요. 저 역시도 이미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2020년의 대선 패배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충동하여, 무장한 무리들이 미 의회에 난입하게 된, 2021년 1월의 그 사건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마이크 펜스, 그리고 그들의 무리가 어떠한 사법적 처벌도 없이 넘어간 장면은 미국 민주주의의 오욕임과 동시에 미국 정치가 어디쯤에 있는지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을 자유 지상주의자라고 설명하는 마이크 펜스가 자기 이익에만 영합하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그토록 아첨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충격이거니와, 워싱턴이 일개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권력 향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닌 의회와 행정부의 면밀한 대화와 의견 도출로 타협에 이르는 과정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망각한 도널드 트럼프의 오만 자체는 이 시대의 정치가 그 세를 다하여, 붕괴를 드러내는 상징,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과도한 해석은 아닐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보수 정치가 사실상 자유주의 자체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그만큼 암담함을 넘어 그 끝이 불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과거 닉슨의 사례로 보건대, 당을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하여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공화당을 사실상 위협에 빠뜨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 역시,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철저하게 당을 장악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한 사건을 거의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진정한 값어치는 돈에 따라 움직이는 거수기 따위가 아니라, 할 말을 할 수 있는 의지와 그 선명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저자의 광범위한 분석인 "미국 정치가 선거 자금 획득의 소위 비약적인 혁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진술에 동의하며, 앞으로 공화당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점도 이 글을 통해, 분명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조지프 매카시와 도널드 트럼프) 진실과 거짓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지지자들로 하여금 적을 향한 분노를 부추기는 ‘선동 정치‘를 했다는 점도 닮았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골드만삭스에서 베들레햄스틸에 이르는 기업계 연합의 지지를 받아 당선될 때, 기업계의 최우선 과제는 세법 개정이었다.

공화당 우파는 기업 비리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에 반대하고, 대담한 세금 삭감을 지지하며, 노동조합과 규제에 대한 지속적인 적대감을 지닌 판사를 임명하는 싸움에서 믿음직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민주당 내 자유주의 세력은 일찍부터 남부 보수파를 적으로 규정하고, 1940년대 이후에는 이들을 당에서 축출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결정적으로 힘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해왔다.

1932년과 1934년의 연이은 선거 패배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많은 사람은 신중함이 용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빠르게 깨닫고, 루스벨트 행정부에 직접 도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우파를 달래기 위해 부통령 후보로 기용된 리처드 닉슨조차 1960년 대선후보로 지명을 받기 위해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넬슨 록펠러와 타협해야 했다.

닉슨은 공화당을 자신의 뜻대로 완전히 장악하려 했으나, 블리스는 이에 반대했다. 결국 닉슨은 당 조직을 무시하거나 우회하여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1994년 초 공화당이 클린턴의 의료개혁안을 강력히 반대한 것은 기업계의 여론을 반영한 결과였다.

조지 W. 부시는 미국 기업 지도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버지 조지 H. W. 부시는 오랫동안 전형적인 ‘비즈니스 공화당원‘으로 활동했다.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뉴올리언스의 심각한 피해와 행정부의 늦장 대응은 국가적 우선순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공화당이 대공황 수준의 혼란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기업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던 구제 금융 법안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볼커 쇼크‘로 인한 금융 변동성 속에서 수익을 찾으려던 은행들은 대공황 이후 도입된 수많은 규제의 철폐를 요구했고, 실제로 많은 규제가 차츰 해제되었다.

당시 코크 네트워크와 전통적 보수 단체들은 힘을 합쳐 오바마 행정부에 맞서 공화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티파티 운동가들은 이 타운홀 미팅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의원들을 거칠게 비난했다. 이런 행동은 헬스케어 개혁 반대 여론을 널리 알릴 뿐 아니라, 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오바마에 대한 지지율 하락에도 일조했다.

그 후 2년 동안 코크 네트워크의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은 티파티 운동을 지원하며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을 공격하기 위해 광고와 유세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브는 오바마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보수진영의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사람들은 우리를 거대한 우파 음모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반쪽짜리 우파 음모에 불과하다. 지금이야말로 진짜로 움직일 때다"고 말했다.

8월에는 공화당 하원 의원 마크 메도스가 오바마 헬스케어 예산 전액 삭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연방정부 예산을 인질로 삼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후 트럼프는 2012년 대선에서 롬니가 패배한 직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라는 정치 슬로건을 상표 등록했다.

티파티의 격화된 극단적인 공격으로 인해, 공화당 지지층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선전포고‘를 강하게 외치는 후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주당은 노동조합 등 연합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보호무역을 훨씬 노골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반면,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공화당 의원들은 탈산업화의 책임을 중국에 주로 떠넘기면서도 이를 가능하게 만든 미국 내 정책에는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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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독일 헤센 주, 라인-마인 지역의 프리드베르크에서 태어난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유럽의 정치 이론과 사상사를 전문으로 하는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입니다. 뮌클러는 특히 마키아벨리 연구로 유럽 학계에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이에 뮌클러는 1977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소재한 종합 대학인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에서 독일어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여, 독일어와 사회 과목의 중등 교사 자격을 취득합니다. 이후 그는 현재 유럽에서 표준 연구로 일컬어지는 『마키아벨리 : 피렌체 공화국의 위기에서 본 근대 정치사상사의 기초』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으로 학문적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후 1992년 3월에 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사회과학부 정치 이론 교수직을 수락합니다. 그는 1992년부터 1993년까지 학과장을 역임했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같은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또한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뮌클러는 독일 정치학 분기별 학술지 (German Political Science Quaterly)의 정치 이론 부문을 담당했고, 1993년에는 비엔나 고등연구소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n Vienna)의 객원 강사직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독일 외교부와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2024년까지 단극 세계 질서 시대가 끝나고 5대 강대국 (미국, EU, 러시아, 중국, 인도)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럼에도 뮌클러는 전세계에서 민주주의 확대와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2018년 은퇴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과 현실적 가능성 등을 언론과 지방 자치 단체에 이론적 초안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도 독일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더 강력한 지원을 주장하는데, 그의 의견이 중요한 근거로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omas Hobbes, Eine EinFuhrung"으로 지난 200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뮌클러의 진지한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토머스 홉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들인, 『시민론』, 『리바이어던』, 『법의 기초』, 그리고 『베헤모스』등의 원전을 통해, 홉스 사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리차드 턱의 유사한 성격의 글인『홉스』를 일독했던 바가 있습니다. 물론 턱의 논증된 글 또한, 동일하게 서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여기 뮌클러의 이 논저도 홉스에 대한 면밀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앞의 리차드 턱의 글과는 달리, 지금 소개할 뮌클러의 논저는 홉스의 여러 저서들에 대한 꽤 명료한 분석을 보이며, 그의 전반적인 삶과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입체적이면서 틀에 박히지 않은 관점 역시도 마음에 들기도 했는데요. 홉스는 이미 그의 많은 주요 저작들에서 가히 부정적으로 도출된 (무질서에 이르는 상황에서 인간이 폭력적 조건에 빠지게 되는 현실 자체) 소위 '내전 상태'와 그 순간 모든 시민들의 '자기 보존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지금도 잘 알려진 리바이어던의 '모든 사람에 대한 투쟁', 그리고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늑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야만성"을 일종의 연역적 방식으로 풀어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의 1장 4부 이후의 논증에서 결론적으로 홉스는 자유주의자들과 절대 왕정주의 혹은 절대 권력 옹호자들에게 무언의 영감을 준 사상가로 도출됩니다. 이에 필연적으로 홉스가 언급하는 자유는 이사야 벌린에게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고, 여전히 논란의 인물인 카를 슈미트와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에게까지 그는 일정 부분, 권력 집중에 대한 편의적인 이론 제공과 절대화 된 권력의 이론적 해석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우선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은, 이 책의 저자인 뮌클러가 분석하고 있듯, 후자의 소위 '절대 권력'의 목적이 다수 시민의 '자기 보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이는 과거 홉스가 살았던 영국에서의 내전 상황과 그에 따라 얼핏 인식적 연계에 따라 드러났던 '공화주의'에 대한 아이디어의 우려와 공포도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요. 심각한 내전 전후로 이어지는 공화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홉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즉, 책의 1장에서 광범위하게 언급되는 바와 같이, 홉스에게는 시민들 사이에 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보다 '인간의 합리적인 이익 추구'에 기대어, 자신이 분석하는 그 특별한 '권력'의 조율된 원칙이 기반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앞선 '덕의 부재'에 대한 관념적 해석은 이후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흄에 의해, 토머스 홉스의 합리적 이익 추구의 신민들이라는 독창적 개념이 일견 부정 되기는 했습니다만 '왕의 목을 치게 되는' 심각한 내전 상황에서의 권력 붕괴와 그에 따른 대다수 신민들이 맞게 되는 위태로운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인간의 중요한 목표이자 욕망인 자기 자신을 (야만의) 자연 상태에서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무산되는 정치적 현실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올리버 크롬웰과 연관이 있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만 신민들의 자기 보존이라는 이익에 기대어, 정치적 파행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는 그가 궁정 정치인이 아니었음에도 일종의 사활적인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의 후기 저작인 『베헤모스』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자기의 진정한 이익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의 후기 사상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홉스의 이러한 관심은 실질적인 권력을 쉽게 조망할 수 있는 '가정 교사'였다는 사실이 실체에 접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투쟁 속에서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1961년까지, 기피 되고 거부 당하는 인물이었으며, 귀환한 뒤에는 철저하게 영국 공화정에 복종함과 동시에, 런던에 살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학문에만 바치게 되었다는 일종의 타협은 홉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간접적으로 엿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리바이어던으로 통해, 드러난 홉스의 주요 관점은, "모든 권력을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과 경쟁할 수 있는 어떤 집단과 단체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는 "오직 신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통치자에게만 복종해야만 한다는 견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홉스가 '사회 계약'이라는 개념을 처음 밝히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인 뮌클러가 후반부에서 새롭게 밝히는 바와 같이, 이후에 사회 계약의 효시가 된 장 자크 루소에게 철저히 부정 되어야만 했던 역사로서의 의미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통해 개인의 권리와 사회 보장에 따른 안전과 재산권 보호를 인정하고 수립했지만, 여전히 전세계의 실효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제한적이라는 현실은 과거의 토머스 홉스가 왜 강력한 권력을 빗대어, 소위 '성서와 하늘의 권리'로 승화시켜, 절대 왕정에 부여하게 되었는지 그 노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수사와 정치적 맥락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사회에 누적된 지식 발전이 더불어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신뢰한다면 이를 뒤집어 '그 역'에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언급되는 '정치 신학'에 대한 홉스의 특별한 기여와 그가 평생에 걸쳐, '무신론자'라는 누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일화도 역시, 이처럼 인지부조화에 가까운 서로 충돌 되는 관념의 투쟁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이 글의 1장, 2부부터 3부까지의 주요 논증이 토머스 홉스의 정치 사상적 고찰에 의해, 그가 어떻게 고대 그리스 철학과 같은 전통적인 철학과 왜 단절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는데요. 홉스에게는 늑대들과의 전면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길을 달리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적 이론이 거의 '홉스식으로' 부정되기에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기도 한, "소위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극단들 사이의 중간을 지향하는 시민 관념을 포기하고, 이 시민을 복종 의무를 지닌 신민으로 대체"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불안을 심각하게 야기하는 것이 과거 그리스 전통에서의 평가와 점차 점진하는 정치인들의 명예욕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야만적인 자연 상태를 분석할 때, 모두가 평등하게 태어나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일반적인 평등 이론'이 더욱 '자연 상태'를 조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홉스는 신분 상의 차이나 계급적 차별을 수용하고 이것에 반하는 평등 관념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세에 홉스에 대한 평가들 가운데, 자유주의자 혹은 구왕권주의자와 같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수식어로 대비되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저자인 뮌클러의 고찰대로, 전기와 중기의 홉스 사상과 후기의 내용이 상당히 변화가 있었다는 것과 이중에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를 놓고 봤을 때, 전자의 주목 받는 여러 논증이 '베헤모스'에서 상당히 신중해지거나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가 발생하는 점은 앞으로 좀 더 분석이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글 1장의 2부에서, 이들 자연 상태에 적나라하게 제시되는 "가장 약한 자조차 가장 강한 자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는 계략과 음모라는 매개는 물론, 거기에 동원되는 살인 무기 등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논증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홉스는 그 시대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관념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현대의 이 세계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매장시킬 수 있는 모략(물론 심히 거창한 표현이지만)과 술수는 여전히 가능하며, 이러한 전제로 인해 인간의 선의와 도덕적 선행에 대한 인식을 매번 긍정할 수 없는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홉스의 분명한 인식처럼 수많은 개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측면에서의 이익 추구가 절대 권력의 방만과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견제할 수 있다거나)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사실상 도덕이 붕괴된 상황에서 '연계된 개인들의 합리적 이익 추구'가 과연 홉스가 그토록 바라던 사회 질서와 안전 유지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장담해 마지 않던 자유 시장의 터무니 없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홉스는 2장에서, "인격적 유대와 필요 지향적 노동의 자리에 들어선 시장 매커니즘에 사회적 통합이 고착된 것을 인간 본성의 산물로 묘사"한 귀결은 홉스가 "시장이 매개하는 사회는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그는 '법의 기초'에서 철저한 '법의 보장'만이 신민들의 방종을 방지하고 이러한 법의 토대가 결정적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안전에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는 있습니다.

앞서 강조했단 바와 같이, 홉스가 규정하는 주권자는 "시민 일반의 복지를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원칙과 그것을 지킨다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세금 문제가 결부된 영국의 찰스 1세의 처형이나, 이후의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의해 목이 잘리게 되는 점도, 자기 보존성과 연계된 시민의 복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절대 왕권의 몰락을 비극적으로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홉스는 그러한 전제 정치 내지는 왕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붕괴시켜, 한 국가를 내전에 빠트리게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못 박고, 동시에 이러한 주권적 권력의 태만에 대해서도 경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홉스가 자신의 후반부 논저에서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2장 5부에서, 그의 리바이어던을 통해, "주권적 통치자를 갖춘 정당한 권력 구조"에 대한 논증은 그의 사상이 어떤 관점으로 어떤 맹목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지, 설득은 안되지만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홉스의 시대 역시, 도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쉽게 야만에 빠질 수 있었던 정치적 위기의 순간들이었지만 그가 일관되게 서술하는 국가의 선결 과제와 그런 틀로 규정된 정치적 권력과 이 정점에 위임한, 이 '주권'에 관련된 내용은 현대에 살고 있는 저에게도 적잖은 고찰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신민들에 대한 다소 냉정한 평가와 이들의 방만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법의 단호한 대책과 같은 일련의 논리적 연계들은 '주권'을 온전히 발휘하고 그것을 권력화하여, 국가 통치에 나서는 소위 '존귀한 세력'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부분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반왕권주의적이고 친공화주의적인 결론을 피하기 위한 홉스의 노력"은 2장의 초입에서도 일관된 진술로 드러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의 논점들은 정치 구조와 그것의 행위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역설적으로 추동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요즘으로 돌아와, 홉스가 작금의 극단주의 세력에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제한적인 자유 관념과 그 정치의 목적이 오로지 사회 질서 유지와 그로 인한, 신민들의 자기 보존에 우선한다는 맥락은 그것의 서사적 전개 및 요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여, 어쩔 수 없이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글의 1장 중후반부에서 자유 평등의 상태가 홉스에게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점과 이 자유와 평등을 근본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 그리고 그 효력 범위에 대한 촉구는 여러모로 그가 전면적인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사람임을 깨닫게 만듭니다.  


- 행동의 동기를 이익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인간 행동의 여러 요인들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등의 이익 본위의 행동 원리는 지금까지도 그 역겨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익 추구'를 거의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추구만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 편인데요. 바로 여기에 왜 오늘날 도덕 관념이 불필요한 관념으로 추락하고 그것을 백안시 했는지, 이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홉스 이론의 한계는 바로 이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과 가까운 거리 덕에 그는 평범한 지방 성직자의 아들로서는 쉽게 가질 수 없었을, 정치적 사건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일찍부터 갖출 수 있었다.

홉스의 관점은 정치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 적어도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정치 분석가 홉스의 탁월한 점은 내전의 영향 속에서 이론을 발전시켰는데도 권력을 결코 폭력으로 축소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명시적이기보다는 묵시적으로) 복합적 권력 개념을 가지고 논증했다는 것이다.

홉스가 그 저작들에서 발견한 것은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불안과 갈등을 낳는 요소들, 무엇보다 선동 정치가의 명예욕이었다.

플라톤의 대답이 철인의 지배였다면, 홉스의 대답은 모든 권력을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과 경쟁할 수 있는 어떤 집단과 단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홉스는 주권자에 대한 시민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 국가의 효용, 즉 생명의 보장과 그에 근거한 부유한 삶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거기에 더해 국가와 그 꼭대기에 앉은 통치자로부터 압도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권자의 지배가 때로 억압적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내전으로 추락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이야기한다.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어떤 지위를 보유하는지가 오로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결정에 달려 있을 뿐,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를 가치라고 말하고, 과두정 지지자들은 부나 좋은 혈통을 가치라고, 또 귀족정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탁월성을 가치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불평등이 본성의 차이로부터 도출된다고 본 반면, 홉스는 불평등이 오직 주권자의 결단을 통해서만 강제적으로 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이상, 즉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극단들 사이의 중간을 지향하는 시민 관념을 포기하고, 이 시민을 복종 의무를 지닌 신민으로 대체한다.

자유, 평등, 정의가 각각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는 각각의 주권자가 그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홉스는 주권자에게 의무와 임무보다는 주로 권리와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플라톤과 마르크스보다는 딜레마에 덜 얽매였다.

몇몇 사람은 공격적이고 불의하므로 악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진술은 공화주의적 맥락에서 왕과 그의 신하가 가진 권력을 제한하거나 부수기 위해 흔히 사용되던 논거였다.

명백히 반왕권주의적이고 친공화주의적인 결론을 피하기 위해 홉스는 맹수의 성격을 부여하는 대상의 사회적, 정치적 한계를 없애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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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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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생인 서맨사 하비는 부모의 이혼 전까지,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주의 메이든스톤 인근 디튼에서 10년을 살게 됩니다. 이후 모친은 아일랜드로 이주했고 하비는 요크, 셰필드, 일본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십 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녀는 대학의 정규 교육 과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자, 영국으로 돌아와 요크 대학과 셰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바스에 있는 공립 대학인 바스 스파 대학에서 창작 글쓰기 관련 석사 과정을 수료하게 됩니다. 그녀의 첫 소설은 '황야 (The Wildeness)'로 2009년에 나왔고, 이후, 2012년에 '모든 것의 노래 (All Is Lost)', 2014년에는 디어 시프 (Dear Thief), 2018년의 '서풍 (The Westren Wind)' 그리고 2023년에는 '궤도 (Orbital)'가 출간됩니다. 그녀의 소설은 맨부커상, 베일리스 여성 소설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월터 스콧상 등 많은 상의 후보로 거론되었고, 2010년에는 '더 걸쳐 쇼' 에서 선정한 최고의 신인 영국 소설가 1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궤도는 2024년에 부커 상과 호손든 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Orbital"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도 번역은 2025년에 이뤄졌으나 제가 구입한 판본은 '알라딘 특별판'으로 리뉴얼 되어, 2026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근래 출간된 영미 소설들 가운데 하비의 '궤도' 만큼, 크게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은 없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지난 추석 때, 본가에 있는 작은 동네 서점에서 구입을 할까 망설이다 놓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시류에 이끌려 특정한 글을 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저로서는 내심 이 작품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으나, 알라딘의 상술(?)에 완전히 굴복하여 이번에 특별판으로 구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책 정면의 제목은 명품 시계의 '선레이 처리'처럼 빛의 각도에 따라 글자들이 빛나는 형태로 나타나고, 양장 역시 고급스런 코팅을 통해, 공을 들인 노력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국내에서 '특별한 판'이 나올 정도이니, 그 인기를 실감할 정도입니다.

하비의 이 소설을 완독하자마자 처음 들었던 생각은 잘 차려 입고 적잖은 돈이 있어 보이는 남녀가 이 세상에 대해 약간의 '지적 허영'을 포함한. 잘 포장된 진보적 의식를 백화점 쇼윈도에서 보는 것 마냥, 상품처럼 관찰할 수 있는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가 확연히 이 지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와 또한 인간으로 한정하여, 각자가 지니는 삶의 태도는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으며, 그 삶 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다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얄팍한 관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과학과 종교를 적절하게 얼버무렸으며, '딥스테이트와 세계 대전'을 함께 언급하는 것처럼, 앞으로의 총체화된 인간 문명의 그 끝이 어디에 있을지도 나름 경고하기도 하는데요. 이 작품에서 '잘 포장된' 오늘날 문명의 어두운 측면과 거기에 드러나는 인간 소외 및 삶의 파편화와 같은 문제들을 철학적 관념과 약간의 종교적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뭔가 마음의 의도적 평안(물론 안도감과는 거리가 있는)과 서사의 연계를 통한 포괄적인 지적인 만족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인기를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지구 위에 떠있는 우주 정거장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주 비행사' 혹은 '과학자'들인 안톤, 로만, 넬, 치에, 숀, 피에트로 이 6인의 사적인 인생과 이들이 거쳐온 삶, 그리고 주변인들의 관계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거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문명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그다지 간절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서사를 통해서 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정거장에서 생활하고 실험하는 장면에서의 풍부한 자료 제시는 물론, 우주 유영과 중력의 문제, 그로 인한 신체의 변화 등과 같은 아주 상세한 장면 장면의 묘사는 탁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특정한 SF 장르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정작 진보된 과학이 보여주는 탁월한 요소 보다는 스토리 라인에 숨겨진 핵심 주제가 "분명 소재는 SF물인데, 어느새 정치 스릴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본말전도가 쉽게 이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비의 이 작품은 고립된 이 우주 비행사들의 외롭고 절제된 삶을 조명하면서 이들이 지구에서 어떠한 삶과 어떠한 인간의 관념을 가졌는지 내밀하게 서술함으로써, 여기에 연계된 여러 일화와 대화들이 우리가 어떠한 배경 위에 삶을 영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가늠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평범한 펍에서 자신의 좁은 인간 관계 만큼이나 그 동네의 아는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하는 30대 혹은 40대 가량의 남성이 여기에 등장하는 우주 비행사를 매우 동경한다는 서사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입니다. 이는 우주에 올라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을 나사에서 전부 걸러낸다는 '우주 비행사 훈련 과정'의 대목을 드러내자마자 앞선 서술은 쉽게 대응됩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누구나 참여할 수 없는 특별한 직업은 그것의 명예나 영광 만큼이나 외롭고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뭔가 '엘리트주의적인 교조주의'를 느끼게 만듭니다. 지구에서 로켓을 쏘아, 지구 대기권의 우주를 경험한다거나, 다시 달 탐사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유인 우주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모습 자체는 일개 개인의 특출난 사명감이라든지 책임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 올린 '인류의 과학 문명이 통째로 기반이 된 시스템 그 자체'일 겁니다. 그 불행한 첼린저 호 폭파 사건을 보더라도 이 시스템의 아주 작은 단 하나의 불안 요소가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진술 자체는 인간 문명의 진보가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후반부에 언급되는 '딥스테이트'에 대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함축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오늘날 인간을 위협하는 문제로 대두 될 수 있는 '지구 온난화' 역시 이 작품은 인간들의 정치 문제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욕망의 정치'로 요약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쥐겠다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탈도덕적 태도는 마치 극중 피에트로의 딸이 아버지와 문답을 통해 밝히는 "인간의 진보가 마냥 즐겁지 않다"는 서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일본인 과학자 치에의 의미심장한 일화 가운데, 1945년 8월에 일본에 떨어진 원자 폭탄과 관련해, 할아버지의 우연한 삶의 구원, 그리고 이 위험한 원자 분리의 폭탄이 치에의 어머니의 대화로,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 지를 몰라. 언제 그만둬야 하는 지를 말이야."로 불만족스럽게 귀결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정치적 수사와 관념적인 비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상의 구조로 보건대. 적절해 보이지만 '은연중 도덕이 붕괴한 인간'을 드러내는 작가의 일관된 모습을 봤을 때, 이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서, 작가가 과거에 일본에서 체류했던 일을 적기도 했습니다만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산과 자연환경, 일본인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것이 바탕이 된 진술들은 서양인의 그것과는 매우 상이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치에와 그의 어머니는 삶과 죽음이라는 모티브로 이어져, 이 작품의 중요한 서사의 축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우주에서의 중요한 임무 때문에 어머니의 상을 치루지 못한 일본인인 치에는, 그 일본인 특유의 철저한 분리된 관념을 드러냅니다. 어머니가 지구에서 삶을 마치셨다고 동료들에게 밝혔을 때,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동료는 울음을 터뜨리지만 막상 치에는 덤덤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일본인들을 허투루 바라본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눈 대중으로 이들을 살펴본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끝으로 지구를 회전하며, 그 밑에 사는 인간들과 다른 시각과 삶의 태도 등을 새롭게 견지한 이 6인의 과학자 겸 우주 비행사들이 전형적인 '신과 인간'이라는 직렬적 배경에서 비롯된 차별적인 이해가 느껴져서, 일정 서사에서는 불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있을 인류의 화성 이주나 달 탐사에서 이 우주 공간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중력의 차이로 발생되는 문제 등을 선험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일종의 선구자적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이들을 뭔가 '선택된 사람들'로 간접적으로 규정하거나, 마치 신의 사도와 같은 교묘한 수사로 포장하는 듯 보이는 서술은 역시나,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처럼 한 작품에 과학과 종교, 그리고 인간을 적절하게 버무려, 작가 나름의 어떤 통찰을 드러내는 행위는 간혹 특유의 몰이해적 방편이나 관념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애초에 신과 인간, 그리고 거기에 맞서 진보를 이룩한 인간 문명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담백한 서사였다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소위 '이데올로그'를 증명하거나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만 하비의 이 작품은 잘 버무려진, 그렇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주제들을 적절한 SF소재로 풀어내, 그 때문에 저에게는 그다지 신선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평범한 삶과 자신이 특별한 임무를 하고 있다는 만족 내지는 우월감의 감각. 이 양자 간의 '특별한 화해'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이룩한 시스템이 인간을 거칠게 분류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러한 주제만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할까 상당히 고민했지만 한번 적어볼까 합니다. 지구 궤도에서 상행과 하행을 오가며 낮과 밤의 대륙과 도시들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유독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 심지어 북한도 언급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국은 아예 없는 것처럼 나옵니다. 밑에 타이완도 수차례 장면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저는 그저 실소가 나오기만 했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무엇이든 간에, 정말 웃기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극중에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크로노그래프 모델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도 매우 전형적으로 우주 비행사가 남성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치에가 여태 일본에 여자 우주 비행사는 없는지 묻는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집에 가기 싫어진다기 보다 집이라는 개념이 내파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하자면 그건 융합의 감정이다. 자신들이 서로와, 또 우주선과 구분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까지 버림받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기술, 지식, 지성을 탁월한 수준으로 올려놓고, 온전히 다 해소할 수 없는 성취욕으로 안달이 나고, (여전히 대답이 없는) 우주 공간을 바라보고, 그래도 꿋꿋이 우주선을 짓고, 외로운 우리 행성을 수없이 돌고, 똑같이 외로운 달에 잠시 가서 무중력 상태의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끼는 와중에 이런 생각에 잠긴다.

어느 행성의 우주선이 눈앞을 지나쳐 간다는 건 그 얼마나 예기치 못한 기이함인가.

넬은 가끔 숀에게 묻고 싶다.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그것도 천지를 창조한 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다.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겠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들은 비로소 욕망의 정치를 목격한다. 성장하고 획득하는 정치,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10억 가지의 외삽적 추론, 지구를 내려다보면 그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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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교유서가 어제의책
퀜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교유서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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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영국 맨체스터 근처의 올덤에서 태어난 퀜틴 스키너는 부친인 알렉산더 스키너와 모친인 위니프레드 스키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특이하게도 서아프리카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스키너는 7세가 되자, 7세부터 18세의 남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베드퍼드 스쿨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의 친형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곤빌 앤드 카이어스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962년 역사학과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2008년 런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스키너는 1981년부터 영국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고,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1986), 유럽 아카데미(1989), 미국 철학회(1997),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2009),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2015) 등을 포함한 여러 국가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정치사상사의 '케임브리지 학파'의 설립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정치적 글쓰기를 학문을 탐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고전 텍스트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글에 자발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한 근거에 의해, '텍스트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텍스트가 문화 및 정치 담론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그가 단순한 강단의 지식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연구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berty Before Lberralism"으로 지난 199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이 자유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와 어쩌면 정치적 신념이 투영되어, 좀 더 확장된 함의는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역사상, 과거 첨예한 냉전 시기에서 구 소비에트 연방에 맞선, 소위 자유로운 미국과 이를 따르는 서유럽의 '자유'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는 이 글의 역자와 더불어 저자인 퀜틴 스키너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바대로, 냉전 시기에 '자유라는 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이제이아 벌린 (다른 말로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를 비판의 틀로 다루고 있습니다. 벌린의 이 소극적 자유는 아주 간단히 말해, 누가 나를 방해하거나 어떤 간섭이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특히 저로서는 1980년대부터 경제적 헤게모니인 동시에 사회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내재된 신념'처럼 부르짖었던 것이 바로 이 '자유'였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우선하는 시장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의미심장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그야말로 자유라는 의미의 '확신하는 자기 결정'이 됨으로써, 이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사회학과 정치학의 구조적인 기준과 잣대로 시대에 맞게 분류하고, 더 나아가 앞선 틀로 '재의미화' 할 수 있는 학문적 가능성 마저 원천 봉쇄되어 왔던 것이 이 자유라는 가치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필립 페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역사학자' 퀜틴 스키너는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많이 경도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세한 명칭에 있어서, 과거 찰스 1세 시기에 등장했던 '신로마적 이론'에 그 연원과 한때 신로마적으로 해석된 자유가 어떻게 당시 영국 지식인들의 주제가 되었는지를 저자는 논하고 있었는데요. 도입에서 설명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그저 자신의 행동 자유, 즉 어떤 제한이나 간섭 없이 내가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것이 자유의 본질이라는 해석에 저자는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약 과거의 노예주들이 남들보다 좀 더 선의와 아량을 갖고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게 약간의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면, 이 노예는 과연, "자유로운 상태인가, 혹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보탭니다. 이는 그저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만을 강조하고 이것이 인간 자유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벌린의 자유가 명확한 인식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극적 자유에 극적으로 대비된 인식이 바로 '신로마적 자유'입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언급해 보자면, 진정한 자유란 타인은 물론, 어떤 권력이나 체제에 지배 당하거나 예속된 상황을 극복한 '대의'로서의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역사에서, 5공화국 시절에 그나마 알량하게 누려왔던 시민들의 자유,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허접한 취미,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던 것을 그 사회의 개방성이라고 지칭했던 당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답습된 발언 등을 기억합니다. 민주주의와 하등 상관 없는 정권이 시민들에게 배려하는 듯 보이는 알량한 자유란 바로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공리주의의 역사가 태동하기 전까지, 영국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계기로 아마도 진정한 자유, 즉 왕의 권리나 권의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의 본질에 대해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 시절의 논란을 일으켰던 토머스 홉스는 지금에야 대단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 괴랄하기 짝이 없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권력과 그 신민들의 자유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모두가 행하는 총체적 소산의 무언가인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법의 규제가 어느 정도 명시적으로 규명된 상황에서 소위 이 체제하에 놓인 신민들의 자유가 어떠한 맥락을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분석했던 것이 바로 홉스였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의 강제력을 부과하는 것이 일종의 자유라고 여긴 것이 확실히 그라면, 약간의 상상을 보태어, 소극적 자유와 신로마적 자유를 긍정하는 양쪽의 세력에게는 결과론적으로 악몽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되는 홉스의 또다른 결론인, "일치해야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심장합니다. 강력한 주권자가 존재하고 그 주권자가 다수의 신민들을 지배하지 않는 경우, 신민은 그의 재량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으로, 홉스 역시 이율배반적이지만 자유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가 소개하는 니덤의 사상은 그 시대의 진보적 관념을 엿보게 합니다.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민이 지배자나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서 압박과 억압 없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누리게 하여 이익과 편안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명시는 자유와 또다른 자연권에 대해 겸허히 숙고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자인 스키너가 발굴한 그 시대의 저술가들이 거의 공통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은 자유라는 본질적 의미가 결국엔 시민들(혹은 신민들)의 자연권 개념과 맞닿아 양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점입니다. 그래서 절대 왕정의 국왕의 권리 내지는 권위가 그 신민들을 사실상 옥죄게 될 때, 귀족을 비롯한 중간 계급의 헌정적 함의에 대한 요구 역시, 비슷한 강도로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개념이 그저 일개 인간의 제한적인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집중된 권력의 왜곡이 오로지 한 인간으로부터 체제적 종속으로의 폭력으로 시발되어, 결국 왕의 목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의 요구'가 역사의 어법으로 '인정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행로에서 그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지배와 예속의 굴레에서 억압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으로 '역겨운 obnoxius 조건'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누군가의 선의에 의지해야만 할 정도로 쉽게 곤경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등을 뜻하는 것인데요. 이 선의는 도덕적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겸허한 선의 뿐만 아니라, 크게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왕의 '임의적 재량권'과 같은 개념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로마적 자유의 정의는 아주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지배나 예속, 혹은 종속 상황에 놓여져 있는데도 그저 알량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만이 주어져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냐는 물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인적 자유에 대한 시대적 고찰, 혹은 사상의 분기에 따른 분석을 거쳐, '자유국가'에 대한 이미지인 "자유국가 안에서만 개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시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의 국가들은 정복이나 전쟁을 통한, 국가의 영광 내지는 승전의 열매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들로 국한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개인의 자유는 체제 안에서 확실히 부차적인 문제였을 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니덤의 진술로 보건데, 자유의 또다른 부분이 모든 사람의 시민적 권리와 수준의 향상에 있다는 것을 주지한다면, 자유 국가에서 개인이 시민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홉스적 이해는 어느 정도 그 개념적 이해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왕정 국가들은 왕이 신민을 자신의 재산으로 인식하고, 신민들은 왕의 예속된 상태로 그런 상황에서 왕은 총신의 발언에만 주목하여, 대체로 권력의 방향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국왕은 신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짐은 하늘의 명령을 받은 국왕이다"와 같은 절대 왕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조차도 폭군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왕의 임의적 재량권이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광범위한 조세 권리를 가졌던 것처럼, 국가는 어쩌면 국왕의 소유물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종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그저 제한과 강제를 빗겨낸 자유가 아니라 근본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가 그 사람의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러한 역사 과정을 헤쳐 나오는 가운데,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거나, 혹은 입법에 관여하는 수 밖에는 그 인식과 현실의 합치의 유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것이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신로마적 자유의 퇴행과 원래 신로마적 이론이 강조했던 공공선에 대한 후퇴 내지는 공공성의 상실 역시, 자유국가에 대한 맹목적 요구가 그 파급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언급하는 것이지만, 앞선 벌린의 '자유'와 대비되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공공선에 이바지하게 되는 공적인 자유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68혁명의 실패로 좌파가 지녀왔던 공공성의 가치 추구와 공공선에 대한 개념적 혹은 실제적 가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목도했습니다. 흘러간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의 애처로운 목소리 만큼이나, 공공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지리멸렬을 넘어, 실낱같은 희망도 찾아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분명하게 '역사가'로 지칭하는 퀜틴 스키너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에 대한 소위 변질된 신자유주의자들(제한된 권력으로서의 자유를 사실상 특정 계급에게만 용인하자는)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마저 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신자유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회 부조와 정부 지출을 철회한 시점에서,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금에, 과거 공화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여러 학자들과 그 중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도출한 필립 페팃이 주목 받는 이유는 이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명백한 신자유주의 이론조차도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자리를 비켜나고 있지만 그 대폭락의 2008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체제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락에서 언급한 공공성의 추구와 공공선을 통한 공적인 자유의 복귀 내지는 부활은 이만큼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선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샹탈 무페가 떠오르긴 합니다만 벌린을 위시한, 제한적이고 다른 매개로 시장 친화적이면서, 부를 가진 계급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혁명적인 진보 세력(허위의식에 사로 잡힌 자들이 아닌 알짜배기와 같은)의 부활이나 대응 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나, 앞선 자유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자유 담론은 이미 극단적 헤게모니가 된 지가 이처럼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스키너의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공화주의만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다만, 겉으로 자유주의와 자유 세계로 포장하는 국가나 사회의 자유로서, 그 한계를 명확히 한 것도 인상이 깊었는데요. 일전에 다른 책에서, 권위주의 체제에 놓여 있는 국가의 시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고 또한 자유롭다"라고 조사된 어떤 설문을 보면서, 자유의 헤게모니적 차원의 비극적 운용 방식은 정권의 차원에서 차등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스키너가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 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면서, 신로마적 이론은 시야에서 너무나 멀리 사라져 오로지 자유주의적 분석만이 관련된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정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벌린이 의도치 않게 확산시킨 '강제의 제거'로서의 자유가 궁극적인 지배와 예속 상태로서의 해방에 가까운 자유를 압도하게 됨으로써, 벌린 자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명성을 얻은 점은 분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 체제하의 자유의 본질이나, 국가가 시민들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건설적인 논쟁이 필요한 것은 거듭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권력의 분립으로 인한 분명한 이득, 혹은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체적 복귀만이 시민들에게 더 확실한 자유를 보장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론을 발굴해 내는 작업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소중한 사유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제언은 더욱 귀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91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적극적 자유가 비합리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좋은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야 된다는 목적론을 내재하고 있다면, 소극적 자유는 그러한 목적론을 배제하는 다원적 개방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자한 주인 밑에서 사는 노예는 아무런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의 재량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의 자의적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종속되어 있는 사람의 의지에 거스르는 언행을 했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서워서 스스로를 검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국가의 정부는 이상적으로는 각각의 개별적 시민들이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국가 안에서, 국가 주권의 권위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민의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홉스가 말하는 자유는 소극적 자유일 수밖에 없다.

홉스의 또다른 결론은, 일치해야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민이 지배자나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서 압박과 억압 없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누리게 하여 이익과 편안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정치체라는 메타포의 좀 더 심오한 헌정적 합의는 자유국가의 정부는 이상적으로 각각의 개별적 시민들이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헌정 제도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정치체가 의회 안에서 대표되는 국민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 상태로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론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국가의 자유였지 개별적 시민들의 자유는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자유국가에서 사는 것의 공통된 혜택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유로이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구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키아벨리는 선언했다.

단지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혹은 의존하기만 해도 그로써 정부가 생명, 자유, 재산을 강제로 혹은 강압으로 박탈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기만 해도 자유는 상실된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진지하게 과거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현대 정치학에서 자유주의 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면서, 신로마적 이론은 시야에서 너무나 멀리 사라져 오로지 자유주의적 분석만이 관련된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정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언제나 그렇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시민들이 피할 수 있도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선의에 종속되는 것을 막아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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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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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성공회 교구 목사로 재직한 아버지와 유서 깊은 가문인 리 가(家) 출신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납니다. 그녀의 부모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지향에서도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 오스틴은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인세를 통한 경제적 이득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독신인 그녀가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익명으로 출판된 "이성과 감성 (1811)"을 비롯, 순차적으로 "오만과 편견 (1813)", "맨스필드 파크 (1814)", "에마 (1816)" 등을 내놓게 됩니다. 특히 에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전에는 압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사후 "노생거 수도원"과 "설득"이 출간되었고, 다른 작품인 "샌디턴"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황이었던 가문의 지위를 계승한 유산 계급의 여성들의 삶과 연애를 다루었는데, 특히 이 여성들의 지위 추구와 경제적 안정을 위한 "결혼"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앞선 배경의 여성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세태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이런 사회적 구조 자체를 일종의 "사실주의적 글쓰기"로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여러 작품은 이미 드라마 혹은 영화화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Sense and Sensibility"로 지난 1811년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12월에 출판된 판본입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존 스펜스의 제인 오스틴 전기를 통해, 이 이성과 감성을 슬슬 손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동안 그녀의 다른 장편들을 시공사 판본을 통해 읽었던 만큼 같은 출판사의 번역본을 구하려고 했으나 알라딘에서 검색중 이 번역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수려하고 적확한 번역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역자의 상세한 주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요. 에마를 비롯,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의미부여한 단어의 상세한 설명을 첨부한 점도 역자의 큰 노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식스 지역의 존경받는 영주였던 대시우드 일가는 정상적인 승계가 어려워지자, 당시 조카였던 헨리 대시우드에게 그 유산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한 삶을 영위한 이후,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데요. 그에게는 전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와 뒤이어 새롭게 맞이한 젊은 부인의 슬하에 세 명의 딸을 얻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장남을 통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살뜰히 보살필 것을 거듭 강조했는데요. 그렇지만 원래 귀가 얇고 줏대가 없던 장남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과 셈에 밝은 아내의 강요된 조언으로 끝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이 같은 교구이지만 다른 마을인 데번셔로 이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절차에는 대시우드 부인의 체면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는데요. 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할 바턴 파크가 그녀들이 새롭게 삶을 시작할 곳이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한 여자가 의붓 아들과 같은 집에서 쉬이 지낼 수 없는 사정은 이미 짐작할 만한 부분인데요.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건대, 가정을 이룬 상속자의 일가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새어머니와의 합가가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 대시우드 부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딸이 있었는데, 맏딸인 엘리너와 둘째인 메리앤, 그리고 마거릿이 그들입니다. 미스 대시우드로 불리게 되는 첫째 엘리너는 매사가 신중하고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분별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미 작가인 제인 오스틴에게 이 '분별 sense'이라는 단어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한데요. '분별력을 잃은 인간'에 대한 오스틴의 일관된 냉소는 작중 화자의 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둘째인 메리앤은 열일곱 살로 흔한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감정적이고 또한 자신의 기준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이 대응할 정도로 상당히 자기 본위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메리앤의 매력적인 용모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보기에 여러 인물들의 대화나 행적 등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결함 자체가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 정도로 가히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이들 자매에 다소 인색한 의붓오빠인 존 조차도 메리앤의 아름다운 외모를 여러 대화에서 꼬집어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막내인 마거릿의 비중을 거의 두지 않고, 그저 어머니의 곁에 자리한 딸로 국한시킵니다. 이와는 달리 엘리너와 메리앤을 같은 비중의 캐릭터로 두고 이들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두 자매의 심경 변화와 내면의 성장 등을 이 작품에 드러난 여러 주제 의식들과 맞물려, 서사의 감정이 고조되기도 합니다. 특히 2부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내면의 붕괴와 절망을 경험하는 메리앤의 이율배반적인 성장은 쉽게 예견되지 못할 정도로 대체로 놀라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성을 잃고 감정이 무분별하게 폭발하는 듯보이는 행동의 결과로 메리앤이 겪는 그 붕괴의 서사는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했는데요. "사랑에 빠진 젋은 아가씨"에 대한 당시 문학의 치명적인 서사들은 인간으로서의 메리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됨을 쉽게 예견하게 만들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구조의 대미였다면 말이죠. 저는 그저 작가인 오스틴이 독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누구도 예상 못한 전개를 더한 줄 알았습니다. 또한 엘리너 역시, 자신이 오랫동안 흠모해 왔던 남자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기에, 어쩌면 이 자매의 붕괴를 다면적인 측면에서 부각시키기 위한 서사 구조로도 읽혔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사랑-배반-증오'의 메커니즘으로 남김없이 파괴되는 인물로 유독 메리앤을 조형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제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맨스필드 파크의 헨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불쾌한 인물인 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과 지위, 그리고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본성의 증거보다도 더 과거의 어두운 족적을 태연히 남긴 윌러비는 작품의 3부 중후반까지 개심의 가능성조차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헨리 크로퍼드가 젊은 여성(물론 유부녀를 포함해)을 매혹시키는 것을 그저 자신의 자존감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고차원적인 유흥거리로 여기는 일련의 '재미'로 점철된 인물이었다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을 위한 소비 유지와 돈 나올 때를 귀신 같이 찾는 '자기 이익의 화신'으로 대비됩니다. 그럼에도 윌러비는 3부 후반부에서 죽을 열병에 걸려 하루하루 생명이 위독했던 메리앤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엘리너를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죄를 어느 정도 회개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장면에서 엘리너의 남다른 인격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서사로 드러내는 동시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메리앤에게도 그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인정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더한 언니의 고통을 알게 된 메리앤은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은 오로지 언니와 어머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메리앤은 전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맨스필드 파크의 메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른 인물인, 스틸 자매의 둘째, 루시 스틸은 그야말로 '자기 중심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위선의 화신'입니다. "루시 스틸로 말하자면 예쁜 구석이라고 하나도 없는데 제 정신이 박힌 남자가 그런 여자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덧붙이는 것과 동일하게 외향과 내면이 부정적으로 일치하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 어느 정도 자기 혐오에 빠진, 메리앤과 마찬가지로 중요 등장 인물인 에드워드 페라스를 가히 제 손으로 옭아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오스틴이 그 비중에 걸맞는 대단한 시련을 얹기 위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에드워드와 루시를 비상식적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눈을 비빌 정도로, 엘리너를 향한 루시 스틸의 충격적인 고백의 1부 후반부와 사건이 계속 중첩되는 2부 후반부까지 더해지는 이들(엘리너와 루시 스틸)과 관련된 서사는 정말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하는 루시 스틸에게 한때, 어머니의 강압과 요구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스스로 방황하기에 이르렀다는 에드워드의 그 지독한 사연이 어떻게 루시 스틸과 같은 '천연덕을 가장한 협잡의 화신 '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는지는 극의 개연성의 측면에서 지금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루시 스틸과 같은 인물 조형에서 시골 처녀가 으레 갖는 순수성을 가면으로 삼아, 돈과 이익 그리고 평판을 교묘히 안으로 갈무리해, 주변 사람을 조정하고 이들의 언행과 지향을 자신의 사활적 이익으로 쓰이게 만드는 메커니즘 자체는 문학의 오래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 스틸의 최종 행로는 가히 충격이라고 불릴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인 오스틴이 앞선 메리앤의 인물 조성에 큰 공을 기울였던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 루시 스틸 역시, 메리앤에 준하는 극의 전환을 소용돌이 치는 비중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과 에드워드와의 약혼을 최종 국면에서 심각한 방해자가 될 수 있는 엘리너를 자신의 수중에서 '요리'하려고 했던 루시의 협잡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루시 스틸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실제 인물을 작가인 오스틴이 어디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인의 이해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던 형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서신 교환에 있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임을 고려해 봤을 때, 자기 임의대로 엘리너에게 서신을 보내는 루시의 행동 자체는 그만큼 의미심장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 루시라는 캐릭터를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자기 이익 추구라는 설명을 넘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능수능란한 수단을 본인이 적극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 이상의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루시가 대미에서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의 동생, 로버트와의 결혼으로 전환된 점은 실로 역겨운 감상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다만, 에드워드의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비롯된 충동과 그런 결과물들의 서사가 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계에 따른 근거들이 다소 부족해 보여,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일찍이 엘리너가 극찬한 그의 양식과 이해를 고려해 봤을 때, 속수무책으로 루시에게 끌려다니는 그의 모습은 약간 의문인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극의 서사가 진행될 수록 새롭게 인정되는 '두 명의 신사'와 연을 맺게 되는 엘리너와 메리앤의 해피 엔딩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과 이것에 발을 걸치게 되는 주변인들의 때론 단순하지만 그 이면의 복잡한 심상,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높낮음을 몸소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 두 자매의 생생한 모습은 이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근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메리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 '분별있는 여성'임을 쟁취하게 되는 일련의 서사들은 브랜던 대령과의 화촉으로 귀결되어, "신사는 마땅히 분별있고 조리있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는 금언을 새삼 곱씹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교훈 때문에라도 메리앤의 변신(?)은 참으로 기꺼웠는데요. 여기에 극중, 사람과 가문을 오로지 돈으로 판단하는 존 대시우드 부부와 화려한 외모는 가졌지만 그외에는 전혀 갖추지 못한 파머 부인과 결혼한 파머의 자포자기식의 불행한 일화는 결혼에 대해 숙고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한 교훈을 전해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 저는 "평범한 어머니는 딸들 가운데 자신과 가장 닮은 딸을 편애할 수밖에 없다"는 사소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 오스틴의 문장력과 이를 통해 이끌어가는 서사의 집요함에 저로서는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엘리너라는 인물의 자기 통제력에 기반한 인물됨과 분별력에 기반한 타인을 인식하는 태도는 거의 일관되었고 당장 느끼는 자신의 기분보다 일의 선후 과정을 살펴보는 (이성적) 접근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에 거듭 고민해봐도 대체로 누구에게나 회의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엘리너는 동생의 감수성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지만 헨리 대시우드 부인은 그런 면을 지닌 둘째 딸을 편애하고 끔찍이 사랑했어요.

훌륭한 지성과 반듯한 원칙이 눈에 덜 띄는 건, 순전히 그이가 수줍은 탓에 종종 입을 다물고 말을 아끼기 때문이고.

윌러비가 물려받을 엄청난 재산을 알게 된 후에도 돈을 생각하고 둘을 결혼시킨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메리앤의 어머니 역시, 주말이 오기 전 이미 결혼을 바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앤은 진짜 수치는 마음을 터놓는 게 아니라면서, 가리고 숨기는 거라면 무조건 질색했어요.

성질머리가 좀 삐딱해진 건, 아마도 같은 성별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미녀를 선호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취향 탓에 결혼했다가 자기 아내가 아주 어리석은 여자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틸 자매라는 연구 대상은 이만하면 충분했어요. 천박하게 함부로 친한 척 들이대는 첫째의 어리석음은 칭찬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게다가 엘리너는 둘째의 미모나 교활한 표정에 눈이 멀지 않았기에 진정한 기품과 교양의 부재를 꿰뚫어 보았어요.

아픔을 무릅쓰고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굴욕을 털어놓은 대향에게 가장 큰 보람은, 메리앤이 가끔 그를 지켜볼 때 보이는 연민 어린 눈빛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혹은 자발적으로 대령에게 말을 걸 때마다 들려주는 온화한 목소리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루시는 내심 엘리너가 크게 낙심하길 기대했고, 심지어 에드워드가 자기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애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 오지 못한다는 말로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파고 싶어했지만요.

자기 이득이나 기분과 상관없이,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결코 허술히 보지 않고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고요.

게다가 로버트는 명랑하고 무심한 태도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특유의 행복한 만족감에 젖은 채로 부당하기 짝이 없는 모친의 절연과 상속권 박탈을 만끽하고 있었고, 자신의 방탕한 생활 방식에 견주어 형에 대한 편견을 고집하고 있었어요.

엘리너는 움직임 없이 조용하게 정색한 채로 그 우매한 짓거리가 끝나기만 기다리면서, 치밀어 오르는 경멸을 뚜렷이 드러내는 눈빛으로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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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3-03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예쁘네요^^

베터라이프 2026-03-03 19:01   좋아요 1 | URL
이성과 감성도 번역판이 많은데 분량이 있는 만큼 양장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출판사가 표지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