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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오스트리아 출신의 반극단주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줄리아 에브너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사와 관련된 석사 학위를, 중국 북경대에서도 국제 관계와 관련해, 마찬가지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 런던의 소재한 반극단주의 조직인 전략대화연구소 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 에서 상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함께 여러 국가들에서 폐쇄적인 급진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소위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적 맥락이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와 차별에 있지 않음을 신뢰하면서, 이러한 극단주의적 흐름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에 지속적인 연구를 해오고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 역시, 에브너의 지난 2년 간의 활동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구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Going Dark"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 카스 무데의 논저와 함께, 에브너의 이 글 역시 일종의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훌륭한 논저 역시, 저자가 지난 2년 동안 '대안우파'와 여러 백인인종주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극단주의 단체들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포함한 동시 잠입 취재를 통해, 현재 유럽과 미국에 불고 있는 극우주의와 초자유지상주의 운동을 거의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정치학에서의 포퓰리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시도된 것은 최근 몇 년 간의 일입니다. 아직도 포퓰리즘의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은 실정이기도 한 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극우 포퓰리즘과 우파 극단주의가 어떠한 차이를 갖고 있는지 다소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 흐름 전반이 서로 경계가 불명확하고 주장하는 바가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민주주의 정치 내에서 이들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나 다원주의적 측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의 발언대로 이들 모두가 '반민주주의 세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지난 대전大戰 에서의 서구 자유 진영의 승리는 '자유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일소'한 의미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진보에 반하는 거대한 반동을 비로소 정상화 시킨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리버럴리즘에 의한 날조라고 주장하는 저 극단주의자들을 어떤 식으로 사회가 용인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그것의 실현 가능 여부를 떠나 실로 인간의 처절한 비상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익의 차원에서 진행된 지난 날의 전세계적 신자유주의화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 오늘날 극단주의 세력의 대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건전한 토론 없이 사회 비용의 절감이라는 순전히 자기 기만적인 이익 관념의 지배가 우리의 사회 전반을 장악한 결과로써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불안을 틈타 극단주의자들의 토양이 구축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지난 미국 대선에서 몇 대에 걸쳐, 산업이 쇠퇴하고 시민 사회 조직이 붕괴한 '러스트 벨트'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불길은 도널드 트럼프를 워싱턴 D.C.로 보내는 것 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변형된 극우주의자들이 소위 '민주주의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국가와 사회에 받아 들여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역시 이 글에서 소개되는 더닝 크루커 효과 Dunning Kruger Effect 처럼, 어떤 주제에 별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판단에 지나친 자신감이 기반이 된 것이 과거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와 동일한, '인종분리주의'입니다. 미국 대안 우파의 대부 리처드 스펜서도 그렇거니와, 소위 사교적으로 세련되었다고 보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도 바로 흑백 간의 '인종 분리'입니다. 이것은 유럽의 '정체성 정치'와 마찬가지로 인종끼리 완벽히 분리되어 각자가 다른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진화론적인 입장이든, 사회 구성론적인 입장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철썩 같이 내면화시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유구한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슬람 혐오와 나치 독일이 주장한 인종적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연대에 나선 것이 실로 놀랍지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흐름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이득이 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도저히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를 그저 고귀한 관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한낱 극단주의 무리들에게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민주주의가 이용되는 상황은 참으로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영국수호연맹의 설립자이자 이슬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인물인 스티븐 약슬리레넌 (다른 이름은 토미 로빈슨)은 요즘 우리 극우주의자들이 짭짤하게 수익을 얻고 있는 유튜브 모델처럼 영국에서는 파괴적인 발언력과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저자인 에브너에 의하면, 그는 일종의 '극우 셀레브리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서 연예인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많은 팬덤을 지닌 인물입니다. 로빈슨이 후에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식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반대 입장에 있는 반극단주의 인물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강제적인 낙인 효과를 덧씌우고자 하는 점은 명백히 현대 극우의 하이브리드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저자인 줄리아 에브너 역시 이 극우 슈퍼 스타에게 단단히 찍혀 직장을 잃고 고초를 당한 경험을 이 글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저들의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충분히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협력자이자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스티브 배넌은 수차례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무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라고 부추겨 오기도 했는데요. 비상식적이고 인간의 충동적인 본능에 호소하여 순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동하는 자들이 사회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어떤 가치관 따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는데요. 주변의 정치적 의견이나 논쟁 따위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과대 포장하여 그것을 통해 오직 경제적 이익 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실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이유가 있고 그것이 사회가 억압할 수 없다는 관점은 극단주의자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자유주의가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겠느냐는 지금도 주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기도 합니다만 저들이 진정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일견 터무니 없는 일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저들과 그 궤를 같이하는 초자유지상주의자들이 사회를 어떻게 개조하고 싶은지는 이 글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급을 나누고 그리고 철지난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을 통해 인간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마땅히 구분되면서 차별이 정당하다는 요지의 주장들이 그저 보수 따위도 아닌 '반동'이거니와 그야말로 역사를 퇴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심각하게 아이러니 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대어 자신들의 그와 같은 발언에 대한 자유권을 무엇보다 쟁취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토록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마땅히 민주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이죠.
이 글 전반에 다소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극단주의 세력 전반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까운 시일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점은 믿음의 여부를 떠나 소름끼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600만이나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주의 전반과 그것에 기인한 아돌프 히틀러의 "살 가치가 없는 생명 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1939년의 연설 문구는 그것이 사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극단주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 이뤄지고 있는 '나치 콘서트'와 같은 문화 동일체적인 수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저자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지식과 사회적으로 축적된 정보들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도가 개방된 사회에서 어찌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그저 개탄스런 기분인데요. 또한 사실의 증명 여부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수많은 음모론들이 넷상에서 범람하고 확대 재생산 되어 무슨 절대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소명이 무슨 '신성한 사도'와 같이 동일시하는 저들을 보자니 과연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깊은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에브너의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인지하게 되는 것이지만 극단주의와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아마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절단날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크나큰 불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2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MI6를 M16으로 번역한 것은 실로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기본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 H. 카가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이 심각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에 팽배해 있었다고 진술했는데요. 여기에 드러나는 소위 '대안우파'식의 파시즘에 대한 낭만주의는 실로 너무나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오로지 하나의 수단으로 균질화시켜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에 당위를 갖는 그러한 반동주의가 어떻게 낭만적인 외형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파시즘에 대해 갖는 유럽 각지의 이번 세대의 낭만은 앞으로의 미래가 어떠할지 불안감을 더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이 과연 정치적 변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목격한 혐오 콘텐츠의 규모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대했고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한 젊은 사람들의 수는 낙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빨간 약을 먹는다는 말이 급진화를 뜻한단다면 대부분의 인터넷 공간은 빨간 약 공장이 되었다. 백인 민족주의자들이 내놓은 최악의 빨간 약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다.
강령에 따르면 세대정체성의 목표는 동족 사회, 즉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섞이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분열을 초래하는 콘텐츠를 퍼뜨려 중립을 취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략적 양극화‘다.
4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유사 사건에서는 엘리엇 로저 Elliot Rodger가 총기를 난사해 여섯 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저는 선언문에서 스스로를 ‘고결한 신사‘로 칭하며 자신에게서 섹스를 박탈한 모든 여성을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
로빈슨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과거에 영국국민당 당원이었으며 그의 지지자 중에는 히틀러식 경례를 하고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네오파시스트가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독일계 미국인 교수인 야사 뭉크는 저서 <사람 대 민주주의>에서 서구 민주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정치인과 정치 제도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생활수준의 침체와 다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 소셜미디어의 대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자체엥 대한 믿음까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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