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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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피스터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서 슈피겔의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뮐하임의 마르크그래플러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에 위치한 루트비히 막스밀리안 대학(LMU)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엘리트 언론인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독일 저널리즘 스쿨(DJS)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DDP와 로이터를 거쳐, 2004년부터 독일의 세계적인 언론인 슈피겔(Der Spiegel)에서 기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2013년 10월, 미국 NSA에 의한 당시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도청 사건을 폭로해, 독일과 미국의 위기가 촉발했고 이에 '독일 연방 의회 조사 위원회'에 출석하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는 2012년에 독일 기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Ein falsches Wort : Wie eine neue linke Ideologie aus Amerika unsere Meinungsfreiheit bedroht"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피스터의 이 논저는 원칙적으로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가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현실 정치와 건전한 여론 형성에 사실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일관되게 평가합니다. 이는 글 서두에 "우파 포퓰리즘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 누구도 피부색이나 성별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헌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단호하게 이들 경직된 좌파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맥락은 '좌파'마저도 사실상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의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일단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앞선 '우파 포퓰리즘'을 '극우 포퓰리즘'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중 명사의 한 단어인,우파라는 단어는 저들의 범위를 너무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극우'로 고쳐 쓰는 것이 논지 확대와 설득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글로 돌아가, 저자는 이러한 좌파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위해, 로빈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의 여론 몰이를 이 글의 여러 곳에서 다루면서 종국에는 미국 민주당 정치가 기존의 '노동자들의 정당'이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고 소득이 높은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화된 것이, 현재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었다고 다시금 의미를 확장해,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일독 이유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소위 극단적인 반작용과 지속되고 있는 이러한 기묘한 현상을 미국인의 입장이 아니라, 외부인인 독일 언론인의 시점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점일 텐데요. 더욱이 피스터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르포르타주'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주제에 대한 실질적 근거 예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충분히 설득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최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던 '미투 운동'이 초래한 비극적 결말인, 헌법상의 '무죄 추정의 원칙'과 전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해 벌어진 '인터넷에서의 마녀 사냥'이 여론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성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저자 역시 동의하는 바대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될 경우, 무엇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나아가 이것의 시시비비는 법원이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가해자 (남성)-피해자 (여성)의 극단적인 구도로 일련의 페미니즘 운동이 벌였던 '부정적 여론 몰이'가 특히나 무분별하게 인종 차별과 성차별주의에 물든 극우 운동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도 이미 여러 사례로 드러나고 있지만, 과거 또는 현재에 누군가의 인종 차별 발언이나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적절한 언사가 회사 내부에서 벌어질 경우, 그 기업의 CEO나 이사회는 손쉽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그것을 그저 홍보 효과로 삼는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의 억압과는 또 다른 사회적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는 작게, 민주주의와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와 행복 추구권에 위배되는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그러한 언사를 내뱉은 사람의 사회에 대한 '영구 격리'에 준하는 (사회적 및 도덕적) 처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너무나 과도하게 '파시즘적 교만'으로 변질되었고, 앞선 일례처럼 페미니즘 또는 반인종차별을 어떠한 명확한 기준 없이 무분별하게 '비이성적 집단의 분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과도한 '정체성 정치'는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과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슈미트 식의 '피아 정치'로 몰고 가고, 이는 결국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폭력적 지지와 극단 행동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우파 취소 문화(다른 말로 캔슬 컬처 cancle culture)를 등에 업고, 사회적 주목과 경제적 이익까지 챙긴 크리스토퍼 루포의 사례를 들며, "2021년 1월 6일 스티브 배넌의 부추김에 넘어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의회 습격'에 성공한 사건에 대한 이 자의 망언인, "그 당시에 실제로 민주주의가 실제로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가 회자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에 공감하는 이들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의 여론 무대에서 이렇게 활보를 하게 된 연유에는 미국 내부의 경직된 정체성 정치를 주장했던 좌파들에게도 이처럼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인데요. 물론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인 크리스 헤지스의 말마따나 미국 정치에서 진정한 좌파가 존재하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찍이 철학자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오판으로 드러났을 경우, 이를 마땅히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했었는데요. 저는 앞선 그의 주장이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와 확실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자인 피스터 역시, 글 후반부에서,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고 자유주의적 맥락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관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인간과 그 사회의 진보를 탄생 시킨 큰 조류였음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켰고, 인간이 다른 어떤 것에 억압 받지 않고, 마땅히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의 대의'를 주지 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을 익히 알고 더 나아가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발언에 숨이 막혀, 하버마스가 주장했던 '공론장의 토론'이 거의 상실된 현실은 어떻게 보면 정치 스스로의 크나큰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제게는 앞선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논저가 어느 정도는 미국의 인종 문제와 흑백 간의 인종적 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교육 받은 백인 중산층에 대한 적대적 함의를 여론 몰이에 이용해, 자신의 이익에 소모했다는 피스터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 "거스를 수 없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비타협"의 반인종차별주의의 경직성을 공고히 한 점에 디안젤로의 앞선 논저가 그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 미국 영화인의 축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드러난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미국인들의 인종 차별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전근대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불식시키는데 있어 무엇보다 진보 좌파가 건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와 다시금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노골적으로 이익화에 매몰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배타적 사회 건설을 추종하는 극우 포퓰리즘 내지는 극단주의 정치를 좀 더 개혁하는데, '완고한 정체성 정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맹렬한 신념화 단계에 빠진 극우주의자들을 어떻게 하면 상식선의 기준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 그러한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단순히 케케 묵은 도덕성 정치 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며 이것을 선결하는 것이, 어느 누구보다 좌파의 의무임을 더 늦더라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 좌파의 재건'은 시급히 필요하지 않나 글 말미에 떠올려 봅니다.



-글을 읽다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언론에게 흔히 요구하는 '기계적 중립'에 대해 논할 때, 미국에서는 이 기계적 중립보다 대립되는 두 가치나 주장에 대해 판단을 언론이 요구 받는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각각의 주장에 있어 잘잘못을 판단해주는 것이 언론의 기본 의무로 판단하는 듯 읽혔습니다. 이 부분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 전에 서평을 쓴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이들 공저자들이, 좌파 답지 않은 좌파를 여실히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요. 실로 지금 사회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이 사실상 '변질된 좌파들들" 때문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자정 능력과 그 의지를 상실한 좌파들이 얼마나 해로운지는 이번 논저를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이 지배하는 여러 연방주가 그사이 선거법을 개정했다. 목표는 명확하다. 공화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2025년에 트럼프나 다른 우파 포퓰리스트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입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미투 운동은 어떻게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의 초석을 흔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좌파 정치 세력의 변질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결과가 두려워 일부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여기는 미국인이 84퍼센트나 되었다.

"그냥 하는 비교가 아니라, 정말이지 바이마르공화국을 약간 닮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나치를 싫어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더 증오했어요. 오늘날에는 나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트럼에게서 그리고 독단적 좌파들에게서,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벨은 이전 글들에서 백인이 흑인 차별을 반대하게 하는 힘은 도덕과 양심이 아니라 명확한 자기 이익에서 나온다는 견해를 이미 드러냈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 상황에서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데, 사이드먼은 이 발전을 재산 불평등의 수정과 "인종, 국적, 성별, 계층, 성적 지양 같은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 구조의 폐지"로 보았다.

흑인 여성 최초로 외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는 러트거스대학 연사로 초청받았지만, 학생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그녀가 한 역할을 지적하며 분노했기 때문에 강단에 설 수 없었다.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기들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견해를 격하게 공격하는 동시에, 정신적 안정을 위협받지 않게 자기들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

후쿠야마는 1980년대에도 이미 인종차별을 주제로 토론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객관적 토론이 가능했다. 반면 지금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에 있다고 보는 매우 단순한 관점이 지배한다고 한다.

로워리는 분명 ‘도덕적 명료성‘이 공상주의나 이슬람 테러에 맞선 투쟁에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하다며 미국 우파가 좌파를 공격하는 데 수십 년 넘게 사용한 용어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터다.

언론에서 편파성은 필연적으로 실수로 이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 실험실의 사고로 전 세계에 퍼졌을 가능성을 가장 먼저 얘기한 사람이 공화당 의원 코튼이었다.

트럼프는 거짓말과 언사로 나라를 약극화했지만 좌파의 독단주의도 나라를 다시 합치기 힘들게 하는 데 일조했다.

과거에 미국인이 중도좌파를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쇼어의 사례는 갈등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객관적 기준에서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직업을 박탈할 수 있는지를 표본처럼 보여준다.

나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특히 중도층과 고학력 계층에게 해롭다. 정체성 정치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의견을 강화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장착하는 특정 정치집단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작은 버블 속의 독단과 신념은 무엇보다 성별과 피부색에 무관하게 유권자 과반에 거부감을 줄 정도로 너무 견고하다.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게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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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17 2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지척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4-03-17 23:05   좋아요 2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풍오장원님~ 스포일러 땜에 글에서 보인 논증을 다 담지를 못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챕터는 꽤 좋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한번 일독해보시길요 ^^

추풍오장원 2024-03-18 18:36   좋아요 2 | URL
바로 주문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ㅎㅎ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사실상 양자는 동일합니다)은 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를 삭제해 버린다는 치명적인 해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해로움이지요. 정치가 삭제된 자리에는 소위 형식적 법치주의가 강고히 자리잡게 되지요....진보를 말한다는 사람들이 사법 엘리트에게 권력을 상납하는 꼴입니다. 대한민국도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