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본질 현대사상선 13
L. T. 홉하우스 지음, 김성균 옮김 / 현대미학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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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웨일즈의 센 이브에서 태어난 L.T. 홉하우스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였습니다. 위키백과에도 공공연하게 지목되고 있듯이 서구의 다수 학자들은 그를 신자유주의의 사실상의 시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가 알페로비츠와 루 데일리의 공저 역시 홉하우스를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국내에 번역된 홉하우스의 논저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른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에 인식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그가 정립시킨 자유주의 이론과 더 나아가 이를 초기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양자의 이론적 간극은 극명하다 밝히고 싶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단 몇줄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본문에서 제러미 벤담이 당시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개혁 사상에 눈을 감은 점에 실망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대체로 수용한 홉하우스는 사실상 오늘날의 기준으로 제법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와 관련된 논증은 다음에서 천천히 밝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이 책은 ˝Liberalism˝이라는 원제로 1911년 초도 출간이 이뤄졌으며, 국내에는 2006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제가 쓰는 서평의 다소간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언급해 두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소위 존 스튜어트 밀과 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홉하우스가 일반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전제는 글 초입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개인의 이익이 확실히 공동체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는 단언입니다. 뒤에 6장과 7장에서도 이에 대한 작은 단초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는 성숙된 시민의 존재 여부가 선결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진술을 더한다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공화주의 초기와 민주주의의 도래에서 장 자크 루소가 일반의지와 공동의지를 기반으로 단적으로 계약관계에 의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러한 도식으로서 후세에 규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수의 학자들과 소위 권력의 향배에 근접한 사람들은 이 무분별한 일반의지가 밀이 경고한 ˝다수의 횡포˝를 필연적으로 예측해 내고 증명하기 위한 사회학적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요. 사실 홉하우스는 앞선 것과는 별개로 견고한 민주주의에 대한 의의를 글 곳곳에서 피력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새롭게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의 건전한 공존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확립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점은 당시 초기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와의 대척점에 서는 사회학적 이론으로 여겨짐에 따라 이러한 수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현재의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와는 이론적 형태와 현실 기반이 아주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연이어 홉하우스는 이 글 2장에서 ˝자유는 평등을 포함한 것˝이라 규정하고 1장에서 간략히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권 개념을 비롯한 일반적인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를 모색하는데 그는 벤담과 밀을 인용해 내내 논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이 당시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글래드스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이 자유주의에 기반되는 도덕적 통제 혹은 도덕주의를 중요하시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굳이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 ‘도덕주의‘를 관짝에 집어넣기 위한 일련의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강조가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교묘한 논리들은 명목상 다수의 권리들을 위해 구축된 법 토대를 사뭇 인정하면서도 유명무실해진 도덕주의를 굳이 과거 계몽주의적 가치로 오늘날 다시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반대를 해왔는지 이는 아주 명백합니다.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이라는 것에 대해 이 글의 홉하우스도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관계를 전혀 무시하지 않고 양자간의 상호보완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일면으로 ˝만일 국민이 심사숙고 끝에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면, 국민은 그런 법안에 인민 주권의 이름으로 순종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권의 이름으로 불복해야 할까˝라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토대의 딜레마를 설명해 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가 분석해 내는 자유주의의 본질은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얼마나 공정한 계약에 근거한 일련의 자유 경제의 기반이 전제된 자유주의의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에 집중했던 것으로 어떻게 보면 상충되거나 존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자유주의 안의 가치에 대해 그가 고민한 흔적으로 얼마간 짐작해 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익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가설은 많은 측면에서 잘못된 가설이다˝라고 앞선 논증들을 기반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며 근본적으로 사회 부조와 다수의 이익에 근접하는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확실히 보장해주며 아무도 타인을 희생시켜 사익을 챙기는 데 경제적 기득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지했어야하는지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는 홉하우스 역시 존 스튜어트 밀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경제하에서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의 문제를 구별해 인식해 왔던 것을 비추어 보았을 때,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불명확한 부유층의 불로 소득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해보면 이러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점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부르짖는 다수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주장의 근거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이를 통해 명백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위 개인들의 자유를 소급 적용시켜 이론화 했을 때, 홉하우스는 8장의 경제적 자유주의에 이르러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동등한 계약관계에 의한 노동 계약˝만이 양자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이 당시의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밀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노동자들의 편익을 점차 증대시키는 쪽으로˝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점을 일정 부분 긍정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사익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여기에는 시장의 우월성을 근거로 정치를 배제하고 사실상 힘있는 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배타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경제적 진행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자유 확대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그 해법은 명백합니다. 이것은 6장에서 저자가 ˝자유는 개인의 권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다˝는 진술을 보이는 것은 앞선 논증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자유의 영역 자체는 성숙의 영역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주의의 확대의 여부는 개인의 선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도 홉하우스가 자유주의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글의 결말 부분에서 ˝빈자들이 사회적 자원에 대한 선취적 특권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부분에서 저역시 긍정할 수 있었는데요. 자유주의 자체는 이처럼 민주주의와 개인들의 권리내에서 상호보완적이고 가치발전적인 주제이며 이 모든 전제는 자유가 마땅히 합리적인 근거와 정확한 현실 조건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를 인식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당시 대두하고 있던 사회주의와의 대립된 이론으로 한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민주정치와 시민들의 권리에 대한 충분한 근거에 기반한 당위로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회학적 논저임에도 불구하고 역자의 훌륭한 번역은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구입한 책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문 182페이지에서 한 단어의 인쇄 누락이 있었습니다.

-종래의 자유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국가와 사회에 좀 더 진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듯 싶은데요. 자유방임과 자유주의는 완전 다른 개념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하며, 거의 40여년의 걸쳐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실질적인 자유의 구축을 위해선 사회에 성숙된 시민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마찬가지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계약의 자유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실질적인 평등이 전제될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론의 기반 요소인 권리 및 의무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자유보다 평등이 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결국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익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가설은 많은 측면에서 잘못된 가설이다

자유 계약과 개인의 책임은 모든 자유주의 운동의 핵심과 밀접한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의무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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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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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역사학이자 경제학자인 가 알페로비츠는 특히 손꼽히는 냉전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소위 원자폭탄 외교와 원자 폭탄이 냉전시기에 갖는 여러 함의들에 대한 저서들을 쓰기도 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의회의 격식있는 조언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추측하건대 최근에는 세계 경제적 상황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과 재분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위키 백과와 이 책의 소개에서도 그를 정치경제학자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위스콘신 대학과 버클리를 거쳐 캠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알페로비츠와 함께 공저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루 데일리는 영국의 유명한 민주주의 연구의 싱크 탱크인 데모스의 선임 연구원으로 주로 GDP와 관련된 연구를 지속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과의 공동 연구도 있었던 듯 싶은데 그외 그의 학력이나 주요 사항이 구글링으로 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로 사회 민주주의자로 그를 소개하고 있는 언론사들이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저의 검색 스킬 부족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8년 ‘Unjust Deserts‘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1년에 번역 출판되었지만 현재에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일독하고 나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국역된 책 제목이 다소 적절치 못하다는 소감이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번역한다면 ˝불공정한 보상˝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알페로비츠와 데일리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막대한 부를 쌓은 부유층과 기득권을 보유한 상위 계층의 그 부가 명실상부한 ‘사회적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일전에 소개한 질베르 리스트의 글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축적된 사회적 지식의 여러 산물로 인해 발생한 과학지식의 발달과 그로인한 경제적 발전에 대해 오로지 ‘경제학의 산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런 자신들의 특수성이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뭐 이들의 그러한 행동의 해석상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역사와 사회학과 괴리되어 있는 연유에는 시장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떠한 것에서도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학적인 교조주의적 관점에서 안온하려는 의도 떄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이론적 배경의 인식 개선을 위해 자주 강조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틀렸거나 잘못되었다면 언제든지 이를 철회하고 새롭게 재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가 자신들의 선에서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이 이상은 현재의 심각성을 단순히 인식하고만 있는 분배점 함의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일종의 제언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하이에크 조차 경제 성장에 대해 ˝지식이란 세기마다 진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발달에 부분적으로 힘입어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 글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만, 17세기 이후 인류가 전시기에 비해 이토록 많은 지식을 구전과 기록을 통해 후대를 위한 ‘지식 축적‘에 나선 것은 꽤 경이로운 일이며, 예를 들어 ˝양자 역학이 없었더라면 반도체가 마이크로 전자공학, 자기공명 영상이나 레이저 같은 기타 무수히 많은 기술에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그 지식의 축적을 통한 기술 발전의 일면을 이렇듯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술 진보가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이다˝ 라는 3장의 주제 또한 말하는 바도 명백한데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이 기술 진보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전은 생산 기술의 향상과 그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체계가 층층이 쌓이며 분화되고 발전되는 그 결과물이 경제 발전에 직접적으로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 진보의 산파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 거대한 축적된 지식˝입니다. 이것은 당시 평범한 개인들이 마치 ‘사과 껍질을 깎을 때는 어떻게 칼로 깎아야 잘 깎이는지‘와 같은 가벼운 것들의 경험들까지 포함한 누적된 지식의 총체적 산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에 따라 산업혁명에 따른 포드주의와 기술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경제적 계산에서 계상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진 무언가 바로 그것은 ‘잔차‘입니다. 따라서 ˝현대 경제학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식과 기술의 중심 역할을 대체로 무시했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저역시 무척 놀라울 정도였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경제학 자체는 자신들의 존립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위상을 강요하며, 경제학을 인문학의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 경제학을 역사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다, 경제학을 사회학의 수단으로 환치시킬 수 없다는 등으로 자신들의 배타적 권리를 다수의 학문군에게 집요한 태도로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경제학의 오만으로 받아들여할지 아니면 다른 학문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당위성으로 받아들여할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만 어찌됐든 이러한 배타성이 학문적 접근을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불평등 이상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낳은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저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강조했던 것은 명확합니다. 능력있고 수완이 있는 자들이 더 많은 과실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 말입니다. 아니 논리라기 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겠죠. 여기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의 ˝우리가 자신에게 매우 관대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소득의) 5분의 1 정도가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 주장할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를 전적으로 인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까지의 일련의 경제적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의 산물이 인류가 축적해 온 사회적 지식에 기반해 있으며, 이를 뭔가 손쉬운 ‘거저먹기‘로 혹은 아무 의미없는 ‘뜬구름‘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에 관련한 과학사적 증거와 일련의 논의들을 저자들이 이 글 2장과 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 논증의 의미를 떠나서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지식 자체가 일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에 동의를 하고 계신다면 4장의 ˝지식 생산의 가장 큰 투자자는 공공 부문이다˝라는 함의에 동의를 하실 겁니다. 사실 항암 치료제인 텍솔 Texol 에 대해 저자들이 언급하는 대로 정부나 공공기관들이 사회 공적인 안전과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그에 맞는 여러 투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미한 기술의 안전 투자자가 바로 정부라는 소리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겠죠. 이런 중요한 논리는 다른걸 다 떠나서 시장에서 정부와 정치는 필요없다는 소리에 반박할 증거가 되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교조주의적인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대로 하되,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의 사회적 보장 장치를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대로 ˝없애는 것은 그 자체로 손쉬운 일이었다˝는 일종의 소회가 시민다수를 웃음거리로 취급하는 것은 이제는 없어야 할 겁니다. 모든 체계는 법과 도덕이 규정하는대로 ‘경제적 인간‘ 모두가 이를 준수하고 축적된 자본과 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부유층은 어느 정도로 적당한 이기심을 발휘할 자유와 반대로 그렇지 못한 많은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면 될 일입니다.

이 책의 논의 가운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논증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생산성 효용 한계와 그를 기반으로 분배적 정의에 몰두하는 로버트 노직과 다소 다른 입장에 있는 존 롤스를 통해 이 불로 소득의 의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지식 경제 수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마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니 로드릭의 말대로 이 거대한 불로 소득의 문제는 ‘고빠 풀린 금융화‘의 문제이며,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거품 경제에 한결같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거품과 불로소득은 아주 연관성이 크기 때문일겁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활동을 하던 국내 한 소장학자가 이러한 금융화에 대한 비판 연구를 도미해서 시작했을 때, 당시 금융계와 경제학자들의 로비를 받은 로비스트들이 끈질긴 공격을 했다는 어느 짤막한 후일담을 담은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학과 전세계적인 글로벌 금융화에 대한 어떤 이념적 태도는 거의 교조주의와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이 생산품이 적정 수준까지 소비되지 않으면 강한 압력을 받고 이에 따라 재투자된 금융계 저변까지 영향을 끼치는 거의 단일대오적인 형태의 종적이면서 횡적인 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이먼 민스키가 어느 정도의 거품이 끼어야 적잖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했다는 일설이 이 시장과 행위자들의 복잡한 관계를 일견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시민사회가 수면위에 올리고 있는 불평등 문제 전반에 대한 매우 불쾌한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러한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부유층이 있어야 약탈 경제가 지속된다는 그 해괴망측한 논리들 말이죠. 그래서 종장에서 인용된 로버트 달의 마지막 유고와도 같은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해결이 가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제학적인 문제를 담은 원문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번역의 질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는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 그 점은 아쉽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술 진보는 역사적 과정 없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거나 똑똑했기 때문에 오늘을 이룩했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성공을 개인적 과정으로 보도록 길들여졌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생산 활동과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는 소유물을 당연히 사회적 부의 일종이며, 그렇게 취급 되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밀과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개인적 기여와 무관한 이들은 분배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특별히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 노력으로 기여하여 이룩했다고 보이는 것 조차도 상당 부분은 각 개인이 받은 유산, 사회적 영향, 행운이 낳은 생산물이다.

아직도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공동의 유산이라는 입장에서 제기하여 평등 문제로 다룬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고소득자들은 획득한 지식이 많고 지식 획득의 기회도 많기 때문에 고도로 교육받게 된 것이다.

현대에서 가장 눈에 띠는 현상은 한마디로 말해 총체적 지식의 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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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현상금 견인 도시 연대기 2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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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성공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매김하고 있던 한 인물이 꽤 대단한 판타지 스토리를 쓰게 되고 이 역시도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일임은 분명한데요. 이 ‘견인 도시 연대기‘ 물의 처음 1편이 피터 잭슨에 의해 영화화 된 것도 작가인 필립 리브의 명성을 높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만, 피터 잭슨의 영화팀이 원작을 거의 훼손할 정도로 스토리 라인을 바꾼 것은 분명 실망스러운 일이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와 필립 리브의 이 이야기는 뭔가 매치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이 2편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Predator‘s Gold˝라는 원제로 지난 2003년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6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서지에 4쇄가 찍혀있는데요. 예상보다는 판매량이 적긴 하지만 요즘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에서 이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만약 피터 잭슨이 다음 작품들도 영화화를 한다면 특히 이 ‘사냥꾼의 현상금‘은 꽤 기대가 될 만하다고 여겨졌는데요. 그것은 몇가지 반전과 스토리 전반이 변화되어 가는 길목에 이 2편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팀이 1편의 경우와 같이 원작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자인 필립 리브는 아주 명확한 경제사관과 정치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전작인 ‘모털 엔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해내는데 문학적 장치를 활용하는 점은 다소 색다른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들어, 약육강식의 이 시기의 견인 도시 시스템에서 개중 한 곳인 ‘아크에인절‘이 신봉하고 있는 신이 ‘대처‘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집권기에 레이건과 손을 잡으며 ˝대안 따위는 없다˝고 일갈한 영국 보수당 총리 마거릿 대처는 정부와 기업들에게 손쉬운 정책만을 일삼으며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시민들의 대량 해고와 경제적 안정성과 복지책을 그야말로 휴지조각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바로 그런 그녀를 약육강식 시스템의 전형적인 도구로서 삼고 있으니 이 내용이 들어가 있는 행간을 읽은 도중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을 통해 마거릿 대처의 행적이 드러나 현재 영국에서는 레이건의 사례와는 달리 영국내에서 비판적인 인식도 있습니다만, 아직도 그 시기의 잘못된 향수를 갖고 있는 일반 시민들이 많을겁니다. 그래서 이 ‘아크에인절의 대처신‘ 이라는 문구에서 시대의 교차되는 감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번역된 제목은 다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냥꾼의 현상금˝이 아니라 ˝약탈자의 현상금˝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약탈자의 전리품˝ 정도가 이 전 시리즈를 옳게 치장하는 제목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소설가들의 스토리라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성격과 인품의 주인공인 톰 내츠워디는 비정상적인 시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것을 쟁취하는 이 시대의 대비적인 구도로 놓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대립의 결과물입니다. 많은 견인 도시들이 내부에 노예 제도라는 계급주의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썰매도시‘ 앵커리지의 수장인 프레야가 그를 평민 수습 역사학자로 되새기는 장면의 삽입은 명백합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죠. 단호하게 계급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 사실상의 돈과 지위에 의한 계급주의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이식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수많은 지식인들만을 제외하고 다수의 시민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 뿐만 아니라 이 극이 증명하고 있는 과거의 자본주의적 시기를 과학의 뒷받침과 반대로 정치의 많은 희생이 살찌워 왔습니다. 이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도 잘 살수 있었다는 일종의 확인되지 않은 나레이션을 저자가 감행하는 점도 그 가리키는 바가 지극히 명확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과거와의 단절에 따른 소위 ‘올드-테크‘ 유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우리에게 어떤 반면 교사가 돌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선생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그 역사는 왜곡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필립 리브 역시 과거 참혹한 전쟁 이전의 꽃피운 자본주의적 문명이 어떻게 순식간에 잿더미로 끝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단절로 인한 후세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 왜곡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E. H. 카의 그 유명한 구절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일찍이 모든 윤리철학자들이나 정치철학자들이 첨단 과학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와 도덕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 견인 도시 연대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일치합니다. 이 연작 소설의 첫편인 모털 엔진에서 시장의 옥죄는 명을 받아 발렌타인이 벌인 일들은 앞선 부분과 거의 일치합니다. 고삐가 전혀 없는 과학 문명이라는 것이 어떨지는 충분히 상상할 만한 문제이고 여기에 고삐풀린 과학과 견제 없는 자본주의는 얼마나 환상의 궁합인지 이 부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이러한 저의 이해 가운데에서 아직도 일부 정치인들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폭력 혁명에 대한 경고를 운운 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찰 따름입니다. 사실 정치인들이 고삐풀린 과학과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양 손에 들고 할 일이란 것들은 모두의 상식 바깥에 있는 것들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도덕주의적인 부활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주인공인 톰 내츠워디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보면 톰과 상처받은 영혼 헤스터의 단순한 러브 라인의 수용 방식 정도로 이 둘의 영향력을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큰 의미에서 톰과 헤스터의 결합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과거와의 화해랄까요. 이 서평에서는 이 정도선에서만 언급하겠습니다.

끝으로, 개인적으로 약간 놀랐던 안나 팽에 관한 두 가지 반전이 있었습니다. 한가지는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한가지는 작가의 스토리 라인이 변화되는 분기점이라고 느껴질 만큼 대단한 장치이기도 했는데요. 살아남은 런던의 엔지니어의 연구로 인해 더욱이 다른 일도 벌어졌다면 (불행하게도 3권과 4권의 알라딘 상세 페이지를 보는 바람에 저는 스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알라딘의 페이지는 방문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냥 시리즈 4권을 전부 구입하셔서 쉬지않고 쭉 읽으시길 권유해 봅니다) 꽤 흥미진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예상되는 대결구도가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어찌됐든 저는 오늘 퇴근하고 이 연작의 3권을 구하러 중고서점에 가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페니로얄 박사의 술취해 혀 꼬부라진 대화 한토막을 역자가 꽤 재밌게 번역하셨던데, 이런 노력을 보이는 역자는 꽤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를 삽입하고 있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는 꽤 훌륭한 노력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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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엘리트 - 디지털 시대 새로운 엘리트에 관한 낙천적 고찰
로르 블로 지음, 권희선 옮김 / 인문결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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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여류 저널리스트인 로르 블로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언론지인 르몽드의 현직 기자입니다. 현재 그녀는 1950년생으로 지금도 현직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이기도 한데요. 특히 네트워크 시대와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로 프랑스 내에서 공개 강연도 활발히 하고 있고, 몇몇의 관련 서적들도 집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재런 러니어 등과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 대해 다소 비관론을 펴는 이론가들과는 달리 현재부터 앞으로의 인터넷 시대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론을 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낙관론이라 비관론은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그에대한 선결하는 인식을 먼저 갖추고 이런 소위 미래론을 가늠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원제는 ˝La deconexion des elites˝로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일전에 네트워크 시대와 인터넷 문화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아직은 정립되지 않은 이 이론에 관심을 갖느냐는 주변의 물음에 개인적으로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이 네트워크 이론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요. 이런 류의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문화를 다룬 글들은 일전의 중동에서의 민주화 바람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 그리고 인터넷 여론을 포함한 여러 온라인 공론장의 가능성들을 보며, 이런 점들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해 그러한 관심들을 다루고 있는 추세입니다. 다만, 로르 블로도 이 책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근래에 축적된 개인들의 데이터들을 과연 정부가 어떤식으로 처리하게 될지˝에 앞으로 이 네트워크 시대의 진정한 명암이 갈릴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에 소개된 프랑스의 일화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의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정보통신과 관련된 법원의 영장 집행이 무분별하게 이뤄진 경우도 있고 전반적으로 소셜미디어 업체들이 정부에 알게 모르게 협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근래 비난을 받고 있는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례는 수많은 사람들의 데이터를 수중에 쥐고 있는 이 거대 소셜미디어 그룹의 경영자들이 손쉬운 자신들의 이익을 더 따내기 위해 계몽주의 시대부터 중요시 여겨온 시민들의 권리와 사생화 보호라는 측면의 당위를 흩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의 토대는 근본적으로 어떤 시도나 사조를 대하는 일련의 태도가 상이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프랑스의 사례들은 특히 네트워크를 향유하는 시민들이 주체적인 움직임으로 여러 분야에서 발빠른 대응들을 하고 있는데요. 그녀가 소개하는 여러 사례들 중에 중고 직거래 사업이라든지, 기존의 은행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적 시도,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구축이 과연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에 관한 진지한 답변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국과는 달리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에 입각해 민주주의 가치를 그것에 서로 상충하지 않는 식으로 운영되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비추어 봤을 때, 미국과 유럽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4장인 사이버공간의 사회과학과 그 다음장인 5장 권력의 쟁취없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다룬 이 양장의 논의에 절로 눈길이 갔습니다. 4장에 있어서는 현재 위키백과 류의 집단 지성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상아탑에서의 지식 전달과 교육이 과연 어떤식으로 변화될 것인가에 대해 여기 프랑스 교수들의 꽤 진실된 진술이 눈길을 끕니다. ˝이미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대다수의 것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에 대해 약간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데요. 제가 뭐 독서를 자주하는 애서가로서가 아니라 웹에 공개되어 있는 수많은 정보들이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다수이고 위키백과 류의 편집과정과 글의 의도가 공개적인 방향성으로 인해 그런 구조적인 측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지식들이 곳곳에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그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이러한 장에서 지식이 소수 지식인들이나 엘리트들에게 독점되지 않고 많은 시민들에게 그 혜택이 이어진다는 점은 분명 긍정할 만하나, 집단 지성은 집단 지성대로 상아탑은 상아탑 대로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에 더 이롭다고 여겨집니다. 다음 5장은 ˝정치 엘리트들이 여론 형성의 메커니즘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명제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여론장에 대해 꽤 사실적으로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직업 정치인들이나 엘리트적 정치 지식인들이 선별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이 정치이론들에 대해 그것이 이 사회에 있어서는 협소한 이해라는 점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 듯 한데요. 여기에는 저명한 넷 이론가 하워드 라인골드를 인용하며, 스마트 폰의 성공이 시민과 기존의 권력간에 어느 정도의 혁명을 일으켰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앞으로 시민들이 주목해야 될 자신들의 빅데이터를 어떤식으로 이용하고 위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이러한 상업적 유혹에 놓여 있는 소셜미디어 사업가들 그리고 보다 손쉬운 통치를 위해 손을 뻗고 있는 권력의 문제에 대해 우리 대중들, 즉 시민들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논의들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일반적인 정치학적인 입장에서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회이론가들 정치이론가들이 대중 정치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정말 과도하게 토로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에서의 민주 정치와 대중의 정치 참여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대중의 정치 참여에 대해 삐딱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과거의 엘리트 지배 정치에 대한 강요와 만연된 권력 불신의 상황에서 일절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의 기득권과 그들의 권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이 배신행위들에 대해 지식인들이 고백과 사과가 없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측면은 원천적으로 지식인들이 변화된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 푸코와 뒤르켐이 강조했던 ‘지식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이기도 한데요. 이것은 변호사나 의사들이 가져야 되는 보다 직업적인 윤리의식과 비슷한 개념으로 지식인들 역시 이것에 대해 개인적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경우가 양심의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단적으로 애초에 신자유주의를 사회 균형적인 측면에서 지식이 나서서 어느 정도의 파행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따라서, 이런 자들이 대중 정치의 명암을 논하는 것 자체가 저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네트워크는 어떤 기로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초기에 마누엘 카스텔과 같이 이러한 혁명이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의심해 마지 않았는데요. 근래 다른 논저들을 계속 읽어가면서 앞서 진술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양산해 내고 있는 이 데이터들을 과연 건전하게 보호할 수 있느냐와 이것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는 거대 소셜미디어들과 더 나아가서는 정부의 손쉬운 유혹을 어떻게 하면 견제할 수 있을지에 앞으로 우리들의 기본권과 인권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시민들의 데이터들에 대한 비즈니스가 수월하게 권장되는 경향에 있어서 이것에 대한 윤리적인 제한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저들 소셜미디어들은 이것을 규제라고 취급해서 다수의 시민들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입니다. 이쯤에서는 과연 사법 체계가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려고 나설 것인지 아니면 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한정될 것인지와 사회 전반의 경각심이 어떤식으로 변화될 것인지에 대해 달려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보면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고 또 다른 면으로 보면 매우 위중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중간에 선도적인 개혁을 하고 있던 박원순 서울 시장의 사례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의 규명 문제는 이렇듯 가혹한 것이어서 어떤 때는 모든 것을 뒤집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앞선 것보다 못할때가 많지요.

-저자는 글 가운데에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어떤 연구자의 사례를 들며, 많은 과학인들이 이 분야에 사회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일부의 주장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을 약간 비판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과학기술에도 역시 사회학에의 해석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계층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시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회 엘리트 지도층들이 넘쳐나는 이런 세상에서 디지털 변혁이 시작된거죠

정치권이 확보하고 있는 인터넷 자료는 방대합니다. 다만, 그걸 어디다 써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죠

이러한 디지털 행위는 GDP와 같은 각종 지표로 수치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거시 경제적으로 쉽게 측정되지는 않습니다

금융계의 절대적 권력과 무절제한 자본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복잡하고 불투명한 메커니즘은 결국 세계 경제 위기를 초래했고, 우리는 아직도 그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우산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고학력에 사회 비판 능력을 갖춘 자들이며 민주주의 영향력 아래 성장했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화된, 동등한 발언권을 요구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인터넷 초기부터 프리즘 프로그램을 운영해 온 미국의 행위는 서구 민주주의 동맹국들이 상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용인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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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바꾼 세계 KODEF 안보총서 45
매튜 휴즈 & 크리스 만 지음, 박수민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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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매튜 휴즈는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사에 대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런던에 소재한 브루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동 역사와 팔레스타인사의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 등의 방문 교수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한 사람인 크리스 만은 매튜 휴즈와 마찬가지로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런던 서리 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 및 2차 대전사와 나치 정치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히틀러와 관련된 글을 언론사를 통해 기고하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약간 더 첨언해서, 이 책을 기획한 플래닛미디어는 다수의 전쟁사로 유명한 출판사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출판사의 손을 탄 몇몇 전쟁사의 제목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글의 원제는 ˝Inside Hittler‘s Germany : Life Under The Third Reich˝로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연대는 1920년대초부터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의 패망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은 색인을 포함해 420여페이지 정도가 됩니다만 책 대부분의 페이지를 당시의 생생한 사진들을 삽입해 본문의 내용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사진들은 그 자체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독자들이 좀 더 생생하게 히틀러의 대두에 따른 ‘국가사회주의‘의 독일 제국을 이 책으로 열람할 수 있겠다 하겠습니다. 물론 모두가 아시다시피 히틀러와 그의 파괴적 정치에 대한 글들은 이미 국내외에 많은 자료가 출판되어 왔습니다. 민중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고 자기 입맛에 맞게 다룬 히틀러의 정치적 술수에 관심 많은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히틀러의 제3제국을 반면 교사로 삼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오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자크 파월의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의 논증을 받쳐줄 여러 내용들이 이 책에도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독일 재계의 할마르 샤흐트의 행적 또한 마찬가지로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두 공저자의 논점 가운데 주목한 부분은 과연 히틀러는 언제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념으로서 주창하게 된 것에 대한 단초였습니다. 일각에 히틀러 스스로 고백한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책을 고민했다고 하는 점은 다소 불분명하고 사실상 친위 쿠테타에 성공한 이후, 본격적으로 반유대주의에 따른 유대인들의 척결에 나서게 되었다고 이를 두 저자는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만, 이 점은 다소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히틀러는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심각한 여성차별주의적인 인식을 내면화 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그 시점에 지식인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일찍이 로버트 S. 위스트리치가 그의 논저에서 밝힌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전유럽에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존재했다˝는 주장을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틀러가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있었고 2차대전에 이미 독일 내에 있던 장애인들을 비롯한 ‘아리아인의 순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즉결 처분‘했던 일로 유추해 봤을 때, 이미 이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휘둘러야 될지 사실상 그는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성문 헌법으로 삽입시킨 뒤에, 히틀러 정권이 이후 전개한 ‘유대인들에 대한 대책‘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제가 그의 ‘순수한 아리안의 혈통‘이라든지 ‘게르만 민족만의 국가‘에 대해 당연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나와 적으로 구분해 인식하는 이 ‘피아식별‘에 대해 카를 슈미트가 어디까지 조언을 했는지에 더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카를 슈미트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무혐의로 풀려놨습니다만 이러한 특단의 대책에 대한 논리적인 제공자라고 여긴다면 저의 이런 해석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일까요. 그동안 몇몇 글들을 통해 카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는 분명 나치에 대해 다른 행적을 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의심의 동물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역사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앞선 것과 더불어 한가지 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당시 로마 바티칸의 교황이었던 피우스 12세 (혹은 비오 12세)에 관한 일들일겁니다. 그는 초기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분명한 반감을 표출하고 유럽의 추기경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역에 무솔리니 정권이 대두하고 그리스 사태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독일군의 직접 개입이 로마 인근에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이 생겨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교황이 얼마간 히틀러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이미 독일 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 양자 종교가 나치와 일체화가 되면서 무력하게 굴복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일부 인사들 가운데 나치에 저항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제외한다면 그 서슬퍼런 나치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에 대해 대다수의 독일 국민이 이에 침묵을 한 것은 이 국가사회주의가 총체성을 바탕으로 단 하나의 불협화음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와도 같은 체제였던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국민들이 용기가 없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는 유대인들의 소행˝이라는 히틀러의 인종차별적인 궤변이 현실화가 되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음은 확실합니다.

패전이 가까워질 무렵인 1943년의 항구도시 킬과 함부르크에 가해진 영미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드레스덴에서의 비극, 그리고 1945년까지 무고한 독일 여성 200만이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은 당시 이 독일인들이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죄의 값은 분명 아닐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앞으로의 역사에서 히틀러와 같은 파시즘을 다시는 잉태하지 않기 위해, 이 히틀러의 역사를 계속 되새겨보고 있는 중입니다. 국가를 제멋대로 그리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권력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이제는 소수의 계층이 다수의 정치에 반하는 것을 시작으로 좀 더 복잡해지고 있는 실정인데요. 전후 냉전을 거쳐 다수의 편협하고 상식을 저버린 정치인들과 이에 동조하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깎아 내리고 폄하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에 대한 군중 정치의 망령을 계속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일면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정치인들부터 개선된 전체주의를 운운하며 이에 동조하는 극우주의자들이 현재에도 만연한 지금, 우리와 같은 많은 시민들은 이 히틀러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43년 이후 연합군에 의한 독일 도시들의 폭격이 날로 심화되면서 히틀러에게 폭격 피해를 받은 도시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괴링조차도 조언했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히틀러는 단순한 정치인의 기준을 넘어서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들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그의 논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논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에 과도하게 지워진 전쟁 배상금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독일이 재무장의 길에 들어선 이유들 중에 중요한 원인일텐데요. 다만, 루르 지대에 프랑스 군이 진주하게 되었을 때 독일인들이 분노해 마지 않았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차대전 종전의 의미는 매우 복잡한 양상이었음은 분명해보입니다

(아리안의 순수성 유지에 따른 사회적 약자들의 절멸과 같은) 이런 상황은 조지 오웰이 말한 ‘빅 브라더‘ 접근 방식으로 생물학적인 유대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대체하려고 한 것이다.

나치의 반사회적 인간들의 범주는 "노숙자, 집시,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 일하기 싫어하는 자, 유랑자, 괴벽이 있는 자"들이 이에 속했다

대중매체에 실린 나치 풍자문화는 유대인 남성을 순진한 독일 소녀를 건드리는 색골로 묘사해 왜곡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독일인들이 다소 적극적으로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히틀러가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는 부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치는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의 원료와 공장을 모두 독일이 직접 감독했음에도 연합국의 생산 격차를 결코 줄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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