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버나드 크릭 지음, 이관후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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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사회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던 버나드 롤랜드 크릭은 런던 대학을 거쳐 런던 정경대 (LSE)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런던 정경대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수행하였습니다. 특히, 그에게서 ‘크리키안‘이라는 정치학에서의 학문적 조류를 선도했으며 영국 정치학 협회 (PSA)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영국 내에서 손꼽히는 조지 오웰의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1974년에 조지 오웰의 자선전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였는데요.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의 고문을 지냈지만 학계의 명성과 미국에서의 수많은 인용등으로 인해 여전히 영국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세계 2차 대전을 거치고 지성이 성숙되는 시기에 냉전을 몸소 체험하며, 정치와 자유에 대한 고유 이론을 확립시키다, 지난 2008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따라서, 버나드 크릭의 이 책은 냉전이 막 무너진 1992년에 ˝In Defence of Politics : Against Ideology, Democracy, Nationalism, and Technolog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간단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저자인 크릭의 이 ‘정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은 이 책의 3장.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는 ‘정치적 가치‘는 어느 정치 체제보다 중요한 관점이며, 정치 자체가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목적임을 글 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크릭의 이런 관점이 조금은 불편하게 여겨졌는데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장에서 보여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이 부분은 독자들에게 2부에서 논증하고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인식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우려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스스로 정치 행위에 있어서 강고한 윤리주의적 추종자였으면서도 4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증에 있어 사실상 시민들에 대한 도덕적 교육 내지는 도덕적 인식의 필요성을 아주 불필요하다는 관점을 내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정치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에 대한 노골적인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글 전체에서 보이는 크릭의 ‘정치체제‘ 자체 대한 회의주의가 설득력이 없다거나 개연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와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대결주의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저명한 정치학자의 논법 치고는 가벼워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체제 자체가 정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영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이 된다는 아주 표면론적인 편견과 어느 사법 관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가 군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비판적 인식을 선점하던 안하던 간에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주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냥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홉스로부터 시작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치의 역할로 이해되는 이 역사적 과정은 매우 험난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개인의 권리가 아주 쉽게 자유로 해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자유만을 위한 자유주의 시대 혹은 자유만을 위한 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을 통해 이미 실감나게 체험해 본 바가 있습니다. 사실상 루소로부터 시작된 자유를 위한 긴 여정은 루소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주의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게 했습니다. 이에 크릭은 ˝일반 의지의 무오류성에 대한 루소의 강조가, 그가 동등하게 강조했던 열성적 개인주의와 일관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합니다. 루소는 그 스스로 자발적 격리주의자였지만 그만큼 개인주의를 강조했던 점은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의지가 그가 신봉했던 개인주의를 사회발전과 정치 체제의 확립시기에 충분히 충족하지 못한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루소의 이 일반 의지가 궁극적으로 발현되는 지점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에는 저 역시도 동의합니다. 크릭이 2부에서 말하는 ˝어떤 정부가 시민들이 선택한 사적인 삶 혹은 공적 영역 바깥에서 살고자 하는 적극적 권리를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정치적 정부라고 할 없다˝는 점과 ˝민주주의란, 설령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라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제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를 싫어하는지, 심지어 운수노동조합 TGWU의 다수를 싫어한다든지 하는 발언조차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마찬가지로 옹호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 부분은 저에게 있어 아주 과도하게 해석하여, 로버트 달과 지그문트 바우만을 같은 비율로 섞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실상 정치를 왜곡한 것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는 ˝진정한 자유란 곧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라고 너무나 빈번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정치 대 전체주의, 정치 대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가치가 저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체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폭력에 대한 강조˝를 통해 모든 국민을 하나의 대오로 획일화 시킨 점은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고 반성해야 될 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말로는 이렇게 떠들고 있지만 ‘껍데기에 불과한 프로파간다‘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을 어떻게 시민들이 갖출 수 있겠느냐는 현재에도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릭은 이 글 3부에서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된다는 점을 들어 결과론으로 자의반 타의반 시민의 다양한 분별력을 거부하고 있는데요. 선동 정치를 오로지 민주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현실 회의주의적인 입장이라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선동 정치 자체를 민주주의의 약점으로 몰고가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의주의적인 주장이어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전철을 크릭 역시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진지함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 이후 경제에서 정치를 적극적으로 분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매우 통속적인 주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이 인용 또한 아쉬운 부분입니다. 차라리 한 장을 더 할애해 ˝정치 vs 시장˝이라는 부분을 새로 썼다면 앞뒤 논증이 좀 더 정교해질 수 있다고 보는데, 크릭은 로버트 달에 비견되는 인식의 확장은 이뤄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 5장,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는데요. 사회학적 발전의 법칙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은 관찰되고, 실천되고, 사회에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가 낡은 것이고 과학이 최신의 더 필요한 가치라는 세간의 인식을 약간이나마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가 이른바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다수 지식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데요. 기술 과학이 우선되어 결국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역시 우려할 부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전에 라이트 밀즈가 강조했던 것처럼 테크노크라트 자체가 과두제로 나아갈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은 헛된 공상이나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다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인 기술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에 부분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진보 자체가 사회학적 기여가 없었다면 과학 기술의 발전 또한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주도하는 사회 기반의 여러 형태가 축적된 총아로서 기본 지식의 기여가 기술로 이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기술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사회적 기여를 망각하고 오로지 기술이 홀로 일어선 것처럼 묘사하고 수긍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릭은 이에 마지막으로 ˝확실히 기술적 성취 (또는 그것의 소유) 는 주권의 근대적 상징이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이 부분도 꽤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서두에서 제가 따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홉스는 정치 자체를 개인의 권리를 일종의 보호하게 되는 어떤 장치로 여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수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홉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도 확실하고 (물론 존 스튜어트 밀도 함께였지만) 이를 근거로 정치의 확대라든지 정치적 가치라는 것이 다수의 사상가들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노정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이렇게 저자인 버나드 크릭의 정치에 대한 진실된 관점은 이후 6장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반대의 무분별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최우선인 시기가 분명 왔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이 스스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표방하여 ˝자유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해 본다는 것은 책임감을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관점을 끝내 크릭이 도출해 내고 있는 점은 그가 줄곧 내내 표방하는 ‘자유와 정치적 가치‘에 대한 일관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자유를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지양해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평등을 이념화하는 자유주의 역시 기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회의에 대해 저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으며,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름답고 고명한 어떤 고차원적인 정치 체제여서가 아니라 공화주의에 근간된 민주 정치야 말로 모두의 자유와 모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의 그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각자의 권리는 이웃의 권리와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며, 자유 역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지독한 잔혹함은 전체주의 정권에서 아주 일상적인 국가 행정의 일부였다. 그것은 드물게 나타나는 사디스트들의 황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후기 자유주의자들처럼 -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체성이) 명확한 정치적 신조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부정하는 많은 도그마적 요소들은, 사실 (정치로 해결해 할) 문제들을 정치의 외부에 두려는 바로 그 시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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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 우리는 왜 서로를 혐오하는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7
석승혜.김남옥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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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석승혜 교수는 소개된 짧은 이력으로는 현재 강원대 SSK 사업단의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그녀는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연관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 저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김남옥 교수는 중 한 사람인 석승혜 교수는 소개된 짧은 이력으로는 현재 강원대 SSK 사업단의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그녀는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연관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 저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김남옥 교수는 개인적으로 낯설지 않은 학자인데요. 예전에 서평을 쓴 컴북스스이론총서의 ‘마누엘 카스텔‘을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 현재 김교수도 역시 강원대에서 연구 교수로 일하고 있고 주로 한국 사회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지정보는 지난 2019년 4월 편저 논문의 형식으로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집의 제목은 매우 탁월하게도 현재 한국 사회의 병폐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자크 랑시에르는 유럽 내에 소외되고 인종적으로 배척되는 이슬람 청년들이 ‘외로운 늑대‘로서 이슬람 테러 단체에 포섭되어 자살 폭탄 테러에 이용된 것을 유럽의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이해했는데요. 여기에 한 사례로서 등장한 ‘일간베스트 사이트의 이용자들‘이나 이들을 밀접하게 미러링 하고 있는 메갈리안 이용자들은 혐오를 통해 일종의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표출하고자 한다는 잘 포장된 당위에 대해 물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상 외로운 사람들‘이 현재까지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누적된 모순의 근본적인 문제를 매우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 저자들의 분석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물론 저 두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끝내 극심한 여성 혐오나 처참한 남성 혐오를 이데올로기로 체화시켜 강남역이나 종각역 등지에서 폭탄 테러를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한국 사회의 고학력화를 감안한다면 저들이 일반적인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뿐만 아니라 혐오 자체에 매우 비정상적인 쾌감을 느끼는 병리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도 분명 많다는 점도 역시 감안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에 주도적으로 편입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은 혹여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해 사회 전반이 극심한 불안정성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슬라보예 지젝이 거듭 밝히는 대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아주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지배체제 하에 발생되는 부의 쏠림이나 권력의 비대화 및 노동 전반의 도구화가 일개 시민의 삶 전반을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하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무분별한 강화로 사회 전체가 변질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지점의 이해를 고려한다면 현재에 남성과 여성에 극심한 혐오를 발생시키는 무지한 차별주의자들의 논리는 그 칼끝을 상당히 잘못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의 신념이 저토록 견고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왜냐하면 말과 행동으로 토해내는 저 차별적 발언들과 혐오 표현은 일정부분 저들에게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있지 않는가 생각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좀 더 사회 구조적이고 계층적인 문제에 집중을 해 본다면, 자본주의 자체가 계급지배적인 구조를 용인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개인들이 사회에서 유용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라든지 자본 및 자원 효용성의 수단 등에서 격차가 발생하는데 특히 1990년대 이후 여성들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남성들과 비교해 활발해짐에 따라 이 책에서 저자들이 평가하는 대로 과거와는 달리 ˝무조건적으로 가정에 헌신하는˝ 여자들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각자가 전통적인 가정에서 조차 목소리를 내게 되는 변화 전반이 일부 남성들에게는 마뜩잖게 여겨진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결혼 제도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집 구입과 관련된 일종의 관습적 이해를 상대적으로 늘어난 권리 만큼 바뀌지 않고 구태연연한 기존의 입장을 보임으로써 드러난 여러 사례들에 의해 남성들이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마땅한 저축이나 가용될 수 있는 돈이 준비되지 않은 많은 남성들이 쉽게 결혼을 포기하게 되는 케이스들이 알게 모르게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수 여성들의 결혼 가치관에 대한 종래의 입장을 계속 주장하는 등의 타협불가한 문제로 치부되어 여성들의 결혼관이 강고하다는 이미지를 다수 남성들에게 심었습니다. 더욱이 결혼 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남녀간에 매우 소모적인 논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남녀 대결 구도의 사회적인 문제는 이렇다 쳐도 언론들에 의해 극우 청년들로 알려져 있는 일간베스트 사이트 이용자들과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많은 네티즌들의 오판은 민주주의의 주요한 가치 체계라 할 수 있는 다양성에 대한 옹호와 다원주의를 직접적으로 배격하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인종 차별 및 장애인과 기초 생활 수급자들에 대한 저들의 증오와 다름없는 구별짓기는 파시즘에 비견될 정도로 위험하다 여겨집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극우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북한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미 본질적으로 왜곡된 이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용인받아야 될 기존 기득권들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반공이라는 잣대로 말도 안되는 법의 심판을 받았으며 지금도 정상적인 발언과 주장에 대해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는 왜곡된 관념을 정상인 양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제도가 아니기에 저들이 기득권이나 돈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지지할 수 있어도 과연 실제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지는 실로 의문이 듭니다.

끝으로 여기에 소개된 사례와 관련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요. ˝한국 여성은 일상적으로 성폭행, 성희롱, 모욕, 데이트 강간, 살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느낀다˝는 단정적인 주장인데요. 더불어 다수 남성들에 의해 외모 품평 등을 당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미 많은 분들이 한국이 범죄 발생률에 있어서 세계적인 억제 국가임을 잘 알고 있을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누구에게나 불안 심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테죠. 다중 매체에 의해 외부로 드러나는 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과거 나치 독일이 자행한 게토 구역처럼 남자와 여자를 분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즉, 현재 미국이 자신들의 국가 안보를 위해 과도한 안보 조직을 운용하고 있는 것처럼 안보에 대한 욕구는 대체로 완벽하게 채울수 없는 것인데요. 자신의 안전에 대한 완벽한 충족 또한 이와 동일합니다. 미국의 비대화 된 안보조직은 국가 조직이 시민들을 제어하고 감시해 민주주의를 사실상 축소시키고 과두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여러 학자들의 경고를 받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안전에 대한 불안 심리를 갖고 있다고 해서 남성 전반을 주요 관찰 대상으로 어떤 법적인 조례까지 만들어 감시하자고 하는 것은 거의 병적인 일과 같습니다. 일관된 논지를 위해 저자들이 저런 사례를 대입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일정 부분 과도한 불안 심리까지 사회현상으로 용인해야 된다는 식으로 논문에 쓰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 남녀 관계에 있어서 고분고분한 여자가 가면 갈수록 보기 힘든 현상 자체를 터무니 없이 비난하거나 남자의 경제적 능력의 유무를 따지는 여자들의 종래의 조건 선호 풍조를 일관되게 지지하는 사이의 타협할 수 없는 간극들이 소수의 고소득층을 제외하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극우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종래와는 완전 다른 도덕적 프레임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 실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를 품평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는 의견에 있어서도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의 여성의 성 상품화를 먼저 다뤘어야 함에도 이것을 남성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의 결실을 분배하기도 전에 맞은 신자유주의의 파고로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상화됐다

사람들은 무시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데,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되면 그 방식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미셸 라몽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은 전통적인 부르주아나 상류 계급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뚱뚱한 사람과 못생긴 여자, 키 작은 남자나 취업 포기자 등 주관적 선호의 영역에서 차별 대상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느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상적 폭력을 보인다. 보상적 폭력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기력해지거나 불구 상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집요하고 강력하게 나타난다

극우 보수가 활용하는 도덕적 프레임 안에는 부정합이 있다. 배려 없는 공정성과 강자에 대한 충성심은 기득권에 동조하고 타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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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붐 -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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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홍호펑은 홍콩 중문 대학을 거쳐 미국 뉴욕주의 빙엄턴 대학에서 석사를 그리고 존스홉킨스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고, 2004년부터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정치 경제와 국가 형성 이론 및 동아시아 개발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관련 강의와 저작 활동을 해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홍호펑 교수가 작고한 지오반니 아리기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지 않았나 판단해 보는데요. 이 책에서도 지오반니 아리기의 자본주의 발달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인용이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번역서에 대한 한가지 소감을 미리 말씀드린다면 얼마전에 서평을 쓴 리밍치 교수의 글과 마찬가지로 중국 정치와 경제에 관한 꽤 객관적인 논저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The China Boom˝이라는 원제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굳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한 출판사가 적당한 판매고를 위해 첨부한 것으로 보이는 부제,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답변으로 서평을 시작하고 싶은데요. 이 글의 결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질서를 변화시킬 의지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 자신이 미국을 대신할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란 어렵다˝는 평가인데요. 사실 그동안 미국 패권의 쇠퇴와 그로인한 중국의 부상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은 중국이 소위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척점에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논법의 대표적인 학자는 조슈아 쿠퍼 레이모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리밍치 교수의 글에서도 거의 확실하게 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익과 중국의 경제 발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 있다는 해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 논저의 저자인 홍호펑 교수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의 논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를 좀 더 면밀하게 서술하자면 1970년대 미국 닉슨 정권에 의해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한 이후, 중국은 꽤 밀접되어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자신들의 국가 경제 발전에 대한 막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3장에서는 ˝미국은 주요한 아시아 동맹국들 (일본과 네 호랑이)이 무너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동아시아 정부들이 산업 성장을 유도하고 활성화할 수 있도록 풍부한 금융과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국과 유럽 시장을 아시아 제품에 활짝 개방했다˝고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데요. 물론 중국과는 약간 다른 경우지만 미국은 베이징에도 이러한 기회를 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 기조가 정치적으로는 중국이 세계에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됨으로써 이를 미 클린턴 행정부가 일정 부분 오판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미국의 경제적 이익과 중국의 국익이 무조건 상충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기에 사실상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 발전에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실로 이득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1장 전반과 2장 초반부에서 밝혀내고 있는 초기 중국 대륙의 자본주의 발전사에 있어서 당시 영국처럼 청나라가 다수 농민의 이익을 축소하여 국가 발전의 거름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유교 정치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서구에 비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데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농업 경제를 보호하자고 했던 애덤 스미스와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 자체가 서구와 유럽에 비해 거의 상반된 조건이었기에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가 결국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반대로 이 시기의 일본은 강력한 중앙 집권의 자본주의적 정책으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식 지배체제 및 경제 제도를 정착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쟁취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역사를 제가 긍정하는 것이 아님을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중국 국유기업의 지속적인 경제적 지배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이 주로 자본과 무역의 자유롭고 초국가가적인 흐름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가장 통합되어 있는 경제 부문에 의해 추동되어 왔음을 보여준다˝고 비슷한 맥락으로 서술하고 있는데요.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가 실로 오해하고 있는 인식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적하는 중국 경제라는 도식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6장에서 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들이 이윤을 회복하기 위해 선택한 한가지 해결책은 자본을 제조업 부문에서 금융과 부동산 부분으로 재배치하면서 투기 거품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현재 중국 경제가 채택하고 있는 부동산 보유 및 투자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전자와 같은 투자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중국 역시 막대한 흑자를 기반으로 차입된 달러를 미국의 맨하탄을 비롯한 부동산 시장에 재투자한 것은 이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이라는 국가가 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나선다? 이것은 거의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죠. 다만, 이러한 흐름에서 날로 심화되고 있는 중국 국내의 경제적 불평등 상황은 좀 더 나아가 전세계 경제 기조에 암울한 영향을 끼친다는 저자의 주장에 설득되는 것처럼 전세계적 빈곤과 지역적인 차별의 심화는 중국이 세계 경제에 호황을 선물해야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있어서 금융 자본의 자유화 뿐만 아니라 실물 경제 자체도 중국이 세계 경제에 많이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저자는 명청 시기 동안 지속되었던 조공 관계 및 조공 무역에 의한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 질서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숨은 의도나 정책 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홍콩인도 중국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광양회를 거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과거 지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내심으로 원한다고 여기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봐야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한계에 대해 저자는 꽤 명확한 이유를 들고 있는데요. 아세안 국가들과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아직도 미국의 패권에 기대고 있으며, 중국은 미국과는 달리 지정학적 지배 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지위 회복은 사실상 어려운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패권과 관련해 저자는 예상대로 비판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물론 비판은 충분히 여지가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달러로 인한 소위 안전 자산 투자와 미국 채권의 보유 등을 동맹국들을 포함한 미국의 교린국들의 관계를 그저 21세기의 조공 관계로 판단하는 것은 다소 실망스런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달러의 기축 통화를 논하기 전에 그동안 미국이 자신의 시장을 많은 개도국들에게 열어 제껴 수출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에 대해 그것 자체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축 통화국의 일부 책임을 지는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복잡한 국제정치적 환경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다만, 그점은 마찬가지로 중국에게도 거의 유사한 소득을 거두게 하였으며, 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중국이 이용해 국가 발전의 토대를 쌓은 점은 서구의 신자유주의적 이익과는 별개로 충분히 중국 국익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귀납적 추론으로 세계 경제와 중국의 경제 발전을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하고,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어떤 건설적인 구호로 치장해 더 나아가 이 질서를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중국은 현재 자신들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본가들 자체가 자본주의적 엘리트로서 고착화 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마오쩌둥이 기여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토대나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기조와는 맞지 않은 자본주의적 기업인들을 양산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농민들에게 후커우 (호구) 제도를 강요해 이들의 경제적 희생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을 꾀한 점은 이 공산 정권이 그저 독재 정권에 지나지 않음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계층의 희생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룩한다는 논법 자체가 독재자들이나 할 법한 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국유 기업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던 지도자들의 자식 혹은 손자들로 ‘태자당‘으로 알려진 당-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신봉건 엘리트들의 ‘현금인출기‘가 되었다˝는 점은 구조적 모순 자체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런 거대한 모순들을 안고 있는 국가가 전세계의 지도 국가가 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으며, 미국의 패권이 점차 축소된다 하더라도 아프리카 대륙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이나 아웃 현상‘을 보더라도 중국의 부상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한 지오바니 아리기 교수의 ‘불완전한 강대국‘으로 분화되거나 혹은 그보다 못할 가능성도 존재하기에 오늘날의 중국 경제를 감안하더라도 좀 더 현실적인 연구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의 자본주의는 중국의 특정한 사회관계, 국가제도, 지정학적 이익과 결합되어 특정한 양상을 보이는 동시에 세계 질서에 특정한 결과를 가져온다

중국의 호황은 상품과 자본의 초국적 유통의 고삐 풀린 확장에 기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의존해왔으며, 비록 중국이 이러한 배치 속에서 세력 균형의 변화를 모색해오긴 했지만, 중국의 기득권자들은 현상 유지에 힘써왔다

1989년 민주 운동 기간, 학생들과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경제적 혼돈과 부정부패가 과감한 경제 개혁과 소신한 정치 개혁 사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정치 자유화가 개혁으로 생겨난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처럼 중국은 화폐 소득의 격차가 모든 형태의 불평등, 특권, 차별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자본주의 사회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계급 불평등의 확대 외에도 농촌-도시간 불평등의 확대는 중국의 전반적인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서구가 쇠퇴하고 이와 동시에 중국의 권력이 부상하고 있다는 견해가 지속되어 인기를 얻게 되자 미국 정치인들은 서로 상대편이 미국의 쇠퇴와 중국이 이 나라를 곧 지배하게 될 것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는 정치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중국이 조만간 세계의 새로운 헤게모니가 지배 권력이 되지는 않겠지만, 개발도상 세계에서 점차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다른 개발 도상국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세계 정치의 동학을 이미 변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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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역사, 논리, 정치 레-프리젠테이션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노시내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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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출신의 정치학자인 모니카 브리토 비에이라는 정치 사상사와 정치 규범 이론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을 거쳐 현재는 영국 요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토머스 홉스에 관한 연구로 신진 학자들 가운데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한데요. 이 뿐만 아니라 자연법, 정의론, 헌법론에 관해 활발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같은 공저자인 데이비드 런시먼은 영국 런던 북부 세인트 존스 우드 출신으로 다원주의 이론과 여러 정치학 이론서들을 썼던 정치학자인데요. 그도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고 현재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런시먼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2015년부터 ‘talking politics‘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 프로에 토마스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등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국내에도 그의 두 편의 논저가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견고한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런시먼은 정치 외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발언을 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8년에 원제 ˝ Representation˝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부분은 해당 글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에서 ‘레-프리젠테이션‘이라는 소위 ‘대표 개념‘시리즈로 몇몇 논저의 출판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한데요. 특히, 한나 피트킨의 글이 번역될 예정으로 나와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만간 피트킨의 글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글은 총 3부로 구분되어 결론을 포함한 총 7장의 하위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표의 현대성을 다룬 3부가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 대표 자체가 민주주의와 함께 탄생되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대표와 민주 정치에 대한 연관성을 분석하고자 하는 여러 글들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 대표 개념은 전체적인 민주주의 역사에서 꽤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영국을 비롯한 사회 발전의 역사와 다수 정치의 이행 과정에서 이 대표 자체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다수의 반발과 거부 없이 보호할 수 있겠느냐에 따른 어떤 부산물과 같은 의미로 이미 글의 5장에서 논의됩니다. 이미 현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 형태로 사실상 다원주의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5장에서는 ˝이런 식의 다원주의는 소수 지배의 한 형태이며, 비록 다양한 소수가 교대로 정치 대표자를 압박할 수 있다고 해도, 시민 대다수가 언제든 배제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분석해 냅니다. 물론 이런 대표와 민주주의를 서로 긴밀히 연계시켜 이론화하는 글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자유주의‘ 대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대표 역시 민주주의 이념에 있어 어떤 측면에서는 그 의미 자체를 부정적으로 상충시키는 측면도 분명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고 싶습니다.

1장에서 공저자들이 다루고 있는 대표 개념의 역사에서 토머스 홉스는 대표 자체가 권력의 수단적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그가 밝히는 국가의 개념 또한 수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오늘날 홉스의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상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혁명의 언저리 시기에 거대해진 이 공중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만큼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하던 아니던 간에 대표 자체가 모두를 위해 위임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이 대표의 역사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정한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개념은 18세기 장 자크 루소에 의해 비로소 도출된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는 명목상이면서 관념적인 의미였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여기에 루소는 ˝대표 개념의 발전은 정치적 지배의 인민적 형태와 독재적 형태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를 없애 준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두드러지게 부각했을 뿐˝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하는데요. 루소가 원했던 것처럼 다수의 일반의지가 이 대표에 맞물려 그것이 진정한 인격을 갖추고 모두를 위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진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 대표 개념이 민주주의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믿으려고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직접 민주주의냐 대의제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스스로 실효적인 대표성 확립을 위해선 개인들 간의 이익 충돌의 문제, 사익과 대의와 관련된 인식적 부조화, 시민의식의 결여 등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 어떤 대표의 외형적 제도 확립과 같은 선언적인 내용들만을 강화하려는 것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건국의 아버지들은 개인들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진통 끝에 연방제를 비롯한 다방면의 국가 제한에 동의하게 되는데요. 이들 남성 엘리트들이 주도한 미국 건국의 모습에서도 슘페터는 ˝민주정치가 불가피하게 엘리트 중심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대표제 자체가 엘리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대표 개념의 탄생 자체가 어쩌면 다수의 공중을 무질서와 혼란으로부터 제어하기 위해 탄생한 개념일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시기에도 이러한 의도는 아주 명확했으며, 홉스 시기에도 ‘적절한 재산을 가진 자들‘이 다수를 통치하는 형태의 정치 제도에 대한 이해가 상위 계층에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은 분명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주권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확대된 개념으로 이 대표를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엘리트 정치 역시 민주주의의 주권 개념을 확실히 수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렇게 이론적으로 규명된 정치학 세계의 관념들이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시에 일정 부분 충돌이 일어나며 많은 학문적 차원에서 이론과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의 쇠퇴화가 거의 40여년에 걸쳐 각 사회에서 진행되어 왔고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마땅히 비판하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하지만 반대의 이상한 저항이 있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선 측면에서 장 자크 루소 이전에 존 스튜어트 밀은 ˝노동계급을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의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계급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와 권력 바깥에 있는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이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가 오늘날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지금의 미국 정치는 정당 정치 자체가 이익 단체화 된지 오래되었고 개개의 정치인들이 마이크 앞에서는 정치적 대의와 민주적 선명성을 매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동을 보이게 되는 정치 구조적인 파편화에 이르렀는데요. 그래서 저는 진정한 의미의 대표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1945년 이후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이후 진행된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거의 맹목적인 자본주의 이념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산된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파행에는 제러미 벤담이 이해했던 위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대표에서 기인해 그것이 굳어진 채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요. 샹탈 무페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을 시민들에게 요구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과거 토크빌과 존 듀이의 요구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불행하게도 대표제 민주주의 자체의 흥망성쇠는 시민들과 엘리트 정치 사이에서 권력의 지렛대가 다수의 시민쪽으로 기울여져야만 실행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는 다수의 정치를 중우 정치나 군중 정치로 몰아가는 엘리트화 되어 있는 지식인들의 공격부터 정치는 애초에 우리것이 아니었다는 만성적인 패배감에 젖어 있는 다수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배격하기 보다는 정치의 축소를 되살리기 이전에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충돌없이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욕망 충족에 분명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뭐든지 지나친 형태로 돌출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4장에서 보이는 시민의 생득적 권리와 이익이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두 공저자의 이 논저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표 개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민주주의가 헌법적인 정당성 내에서 발전해야만 하는 것처럼 반대로 정치 전반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사법으로 해결하고 사법이 이에 개입하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인식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인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적 인간이 아니며, 이질적이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들이 전부 그러하듯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홉스는 대표가 권력의 도구임을 확고히 밝혔다. 그는 만일 대표가 ‘권한 부여‘와 ‘책임 감수‘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인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절대적인 복종의 의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벤담은 영국의 기성 정치 지배충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선거권 개혁 - 보통선거, 연례 회의, 비밀 투표 등과 같은 - 을 밀어 붙여야 한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받아들였다

슈미트가 봤을 때 대실수는 다원주의와 거기에 결부된 가치 및 관행은 민주적이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은 비민주적이라고 전제하는 데 있었다. 이 같은 전제와 달리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토록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치적 우유부단과 불안정성이 자유주의의 증상이라고 믿었다

만약 정치 대표자가 피대표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대표가 아니라 그냥 온정적 간섭주의다

대표의 원리 그 자체는 집합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수파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홉스가 국가를 비롯한 몇몇 집단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며, 집합적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표자에 의존해야 할 것으로 본 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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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
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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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도메 다쿠오 (혹은 도마에 다쿠오) 교수는 일본의 명문인 게이오 대학의 경제학부를 마치고 교토대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리츠메이칸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현재 오사카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사카 대학 홈페이지에 가보니 그의 직위가 풀타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교수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그는 일본 내의 여러 경제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토마스 멜서스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고 있는데요. 대학 홈페이지에서 그의 연구를 소개하는 항목을 보니 ‘도덕적 정서와 국가 부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연구‘라는 수식어는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관념에 대해 별반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은 지난 2008년 원제, ˝アダム·スミス―『道德感情論』と『國富論』の世界˝로 일본에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0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으로 널리 유명한 지성인 애덤 스미스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본의 아니게 논란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저는 스미스가 자신이 쓴 주저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몇 편의 서평에서 짧게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스미스를 신자유주의의 교조로 만든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요. 이런 인식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신자유주의자들이 묘사한 애덤 스미스와는 달리 그는 매우 도덕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단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짧은 서문과 함께 크게 두 부분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국부론에 대한 부분만 따로 읽어보실 요량을 갖고 계실텐데요. 개인적으로는 도덕감정론에 대한 논고를 읽고, 이후 자본론에 대한 부분을 차례대로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비판한 ‘중상주의‘에 대한 의미와 왜 중상주의를 비판해야했는지에 대한 정밀한 답을 얻기 위해선 앞선 도덕감정론의 논증이 필요하며, 그가 결론에 이르러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처우에 보인 중상주의적 결정이 어떻게 영국과 신생 독립국에 해가 되었는지를 좀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와 가까웠던 데이비드 흄은 ˝계몽속에 내재된 오만함에 대해 통찰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아마도 데이비드 흄에 의해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스미스는 흄과는 약간 달리,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요. 바로 1부 ‘도덕 감정론‘에서 이러한 인식의 궤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스미스는 이 도덕감정론을 통해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선연한 목적이 인간 본연의 조화로운 질서라는 측면에서 당시 많은 지성인들에 의해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자연법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변질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특권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초기에 법의 필요성이 요구된 연유가 하위 계층에 의해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홉스를 거쳐서 우리의 사회가 특별한 계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자연상태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염두해 둔 것이겠죠. 어차피 그것이 타인을 위한 선의이든, 인간 본연의 도덕적 관념이든 간에 스미스처럼 자애심에 의지하지 않는 작게나마 서로가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필요성이 얼핏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사회 전체가 거대한 선의로 가득차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지그문트 바우만 식의 유토피아를 우선하는 것은 중요하겠습니다만 아마도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에서 적절한 단계의 사회 질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1부에서 진술되는 ˝이기심과 자애심은 의무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통상적으로 제어된다˝고 스미스는 그와 같이 믿었습니다. 즉, 인간이 구성한 사회와 세상 자체가 불규칙성을 가지며 개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은 인간이 정의로움과 지혜를 가능한 한 갖고 있어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부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유효한 방법은 덕과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재산에 이르는 길‘과 ‘덕에 이르는 길‘을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미스는 강조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저 재산에 이르는 길은 더할나위 없이 충분히 강조되고 있지만 후자에 관해서 전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가 도덕을 상실하게 된 연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1부의 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은 서로 연계가 되어 있어 따로 개별적으로 놓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와 재산을 쌓은 자를 개별적으로 인식해서는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은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어리석음과 악덕을 경멸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놓은 사람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경멸하거나, 적어도 무시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양자의 인식 문제는 사회에서 지혜와 덕은 잘 안 보이는 반면에, 부와 지위는 아주 잘 보이는 법이라면서 어느 새 부턴가 현대 사회에서는 이 양자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사실 이 지점의 진술도 저자가 왜곡해서가 아니라 후에 자본주의가 그 약탈적 속성을 드러내면서부터 부유한 자는 즉 지혜로운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부를 지키고 자식들에게 되물림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과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자들의 격언이 소위 ‘지혜로움‘으로 포장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요. 스미스는 이에 명백하게 반대되는 입장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와 정의를 논하면서 관용, 인간애, 친절, 동정심, 우정 등의 이러한 감정들에게 인간은 선호하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러한 바탕의 자혜로운 사회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스미스의 판단으로는 그것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더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정의감에 의한 정의로 인한 불의에 관한 분노에 대해 저어하고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불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주저하는 본성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스미스는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전한 사회적 질서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것이 그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2부 ‘국부론‘과 관련된 저자의 해석에 있어 가장 제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 이기심 + 페어플레이 정신 (도덕과 정의감)‘의 도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건전한 이기심을 발휘하여 모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적으로 제어될 수 있다고 강제로 주입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저 이기심에 분명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되, 전부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스미스가 비판한 중상주의 역시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어떻게든 이익을 추구하고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이 중상주의가 당시 영국 권력층에 있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사실상 착취하는 식으로 흘러갔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한 역사가 존재했지요. 아마 이 지점에서 스미스는 중상주의가 모두의 이익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계급주의적 사회를 거의 용인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중상주의는 하급 계층이나 노동 계층의 이익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스미스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도 스미스의 주장이나 사상을 오독해 자신들의 주의를 위해 써먹은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그와 같은 ‘오류 관행‘이 아직도 경제학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점은 그저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방법론과 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학문을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수단과 목적으로 공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익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굴종하는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은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도덕을 강제로 거세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연유로 도덕에 이어 다음 법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시장사회에 대한 스미스의 인식도 우리가 익히 짐작하는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시장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자애심뿐만이 아니다. 시장 사회는 페어플레이를 받아들이는 정의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교환 성향 그리고 설득 성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설득 성향은 법의 정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시장의 논리와 언어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 통행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시대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지금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더 수월하게 약탈적 경제‘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명정대한 거래가 기반하는 시장을 만들 수 있겠는가‘에 더 많은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입니다. 저들이 입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끝으로, 앞선 스미스의 진술에 대한 목표 의식을 담은 것이 2부 8강 ‘지금 이루어야 할 일‘ 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지혜로운 통치자에 대한 서술을 빼놓을 수 없겠는데요. 어떻게 보면 시장 본연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정치에 능수능란한 통치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도주의나 자혜에서 우러나온 공익적인 사람이 사사로운 특권이나 특혜를 폭력적 방법으로 제어하지 않으리라는 부분은 자기 조국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같은 진술의 요는 개인의 권리에 대해 정부가 어떠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소위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보통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시장의 분업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입장에서 어떻게 페어플레이 정신을 시장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그의 논저 전반에 제시되지 않는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요. 다수의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가 완벽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면 시장 또한 당연히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고 봐야되지 않을까요. 또한, 앞선 스미스의 사상대로 저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의 구축이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다시금 주지시키고 있습니다만, 적절한 정부와 효과적인 정치 없이 어떻게 저러한 목적이 가능하게 될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토크빌 조차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와 정치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요. 과연 시장이 그 건전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찬가치로 스미스가 중상주의와 관련해 당시 미국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비판한 연유에는 이러한 일정부분 시장의 문제점을 확인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알려지지 않은 스미스 사상에 대한 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을 통해 애덤 스미스의 진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랜시스 허치슨은 "사회의 질서는 인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감‘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의해 인도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공평한 관찰자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상상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할 만한 것이 되게끔 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또는 실제로 행위를 했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해로운 행위를 의도한 것만으로도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경우와 같은 비난과 처벌이 주어지는 사회는 매우 가혹한 사회다

사치품과 생활필수품을 전체 부의 분배라는 시점에서 보면, 지주만이 사치품을 소비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사치품을 소비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애덤 스미스가 분업이 교환의 원인이 아니라 교환이 분업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문명사회는 계급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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