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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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영국 역사학자인 래너 미터는 영국 켐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미국 하버드에서도 단기간의 체류를 통해 자신의 전공 연구를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 역사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연구로 명성이 높기도 한데요. 이를 통해 현재 옥스포드의 정치국제관계학과에서 중국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국과 관련된 이슈와 관련해 영국 정부에 조언을 하는 등 영국 내에서는 꽤 전도유망한 중국 관련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45 for publication in the US”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래너 미터의 이 글은 엄밀히 따지자면 존 키건이나 제러드 L. 와인버그와 같이 각각의 전략과 전술을 담은 전쟁사로 보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한 관점이라면 제목대로 중일 전쟁의 전쟁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장제스와 국민 정부(혹은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당시 중국의 정치와 국제 관계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의 행적과 해석이 매우 상세히 담겨 있는 복합적인 역사 서술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글 초입에는 독자가 상당히 오해가 들도록 장제스와 왕징웨이에 대한 대결 구도가 중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온전히 장제스를 중심으로 이 글은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서구의 인종주의적인 장제스의 분석에서 좀 더 탈피해 그에 관한 꽤 인간적인 면모와 정치적 갈등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시도가 장제스의 정치적 과오를 덮는데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가 결정한 여러 정치군사적 행위 중에 후안무치하고 도덕적 기준까지 내다 버린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킨 것과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지리적으로 취약해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에 도시 자체를 초토화 시킨 이 두 가지 사건 만으로도 장제스가 얼마나 자기-권력적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선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켜 84만 4489명을 수장시키고, 480만명의 이재민을 만든 것은 그가 과연 인간 백정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이후, 중국에서 등장한 많은 정치지도자 가운데 쑨원은 꽤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권모술수가 능한 인물들에 의해 속임을 당한 것을 꼬집어 그가 순진한 인물이 아니었는가에 대해 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백하게 당시 중국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정치지도자 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그가 너무 급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지고 난 이후에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장제스가 등장한 것은 결국 중국 현대사에 있어 불행했던 일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불리웠던 왕징웨이 역시 자신의 권력 욕구는 분명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하고 또한 이후 매우 잘못된 결정을 통해 한간(우리의 친일파와 같은 취급)으로 격하된 것은 국가에 통제되지 못한 채 각 지방의 군벌들의 존재처럼 일본과의 대전을 앞둔 그 시점에 지지하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은 다수의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미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한계 역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은 소위 정풍운동이라는 것을 통해 무고한 이들과 반대자들을 숙청하고 더욱이 일반 국민들에게 마오쩌둥의 사상을 암기하게 하는 등의 당시에 전혀 쓸데없는 일이나 벌인 점 역시 비판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최종적으로 1949년에 중국의 일당 지배에 성공한 것으로 인해 승자의 역사로 미화해 그의 행적들을 다소 미담으로 만든 경우도 있으나 미터가 밝히는 역사의 진실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1937년 7월 7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과 유사한 빌미가 된 루거오차오 사건 이후, 1931년 이래 만주의 실질 지배를 하고 있던 당시 일본 제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게 됩니다. 당시 중국을 통제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 정부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제력 밑으로 수많은 군벌들을 정치적으로 조율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군벌 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37년 이전까지 중국에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독일 무관들의 훈련 지원으로 장제스 휘하에 87사단과 같은 상당한 정예 사단이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각 지방의 군벌들을 제어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장제스에게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나마 장제스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으면서도 군벌들이 그의 명령에 듣는 척이라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북부와 산동 지방을 손쉽게 일본군에 빼앗겼던 연유에는 물론 일본군에 비해 장비와 훈련이 열악한 측면도 있었으나, 지방에 혼재해 있던 권력들이 스스로 딴주머니만 차려고 하는 무능과 통제력 상실이 주요한 연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애초에 장제스는 베이핑과 우한 그리고 난징을 잇는 거대한 삼각 방어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으나,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고서도 실패한 상하이 방어는 이러한 말뿐인 전략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그 끔찍한 난징에서의 비극을 뒤로 하고 장제스는 충칭으로 자신의 정부를 이전하기 까지 합니다. 특히, 이 난징에서의 학살 소위 ‘난징의 강간’을 서술한 이 책의 7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그에 못지않게 군대 양성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냅니다. 강력한 훈련과 최신의 장비 지급은 일본군이 최소한 과거 봉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던 약탈과 폭력, 강간 등은 그래도 스스로는 다르다고 여겼으나, 난징에서의 그 참혹한 사건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한가지 통찰을 보여주는데요. 분명 변명은 되지 않으나 이어지는 극심한 전투를 통해 분노가 극에 달한 일본군이 거의 조장된 분위기에 따라 민간인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무고한 젊은 청년들을 참수하고 난징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든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서구에 지원이나 도움을 바란다 하더라도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입니다. 다음 쉬저우 공방전과 황허강 제방 붕괴 이후 속속들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중국인들이 등장하고 여기에 왕징웨이의 난징 부역 정부가 들어선 것으로 장제스의 무능과 그의 곁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인간의 부재는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중국이 일본 육군 60만을 늘어지고 있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티베트와 버마를 통한 물자 지원을 확대시키고 있었습니다만, 버마에 지배권을 갖고 있던 영국의 비협조와 중국 내부에 있던 미국의 정보 조직인 OSS와 장제스에 대한 극심한 불신은 장제스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정치적 난맥상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장제스를 대신할 대안이 없다는 점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그저 일본군의 진격을 받으면서도 군벌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소련 스탈린의 도움이나 바라고 충칭에 들어 앉아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만을 바라기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물론 그가 여러 사건이 지난 이후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소회를 밝히는 것을 저자는 소개하면서 어쩌면 그의 무능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당시의 정치시대적 상황이 장제스에게 녹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처가가 권력에 나서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그가 간혹 울음까지 터트린 것을 보면 실로 그를 편만 들 수 없는 상황임은 확실합니다. 여기에다 앞선 부분에서 설명한대로 그가 저지른 몇가지의 심각한 비도덕적이고 비인도적인 결정은 과연 권력 앞에는 어떠한 것도 우선되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언급이 실로 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장제스와는 반대로 전쟁 당시 심각한 기근에 휩싸인 민초들을 설명한 14장의 허난성 대기근도 주목할 만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농촌 마을의 장정들이 자신들의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길을 가던 부녀를 납치해 내장을 드러내고 어떻게 삶아 먹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당국의 혹독한 고문을 통해) 이를 자백했던 것으로 보입니디만 이러한 사람들의 식인 행위가 꽤 뚜렷하게 있었고 이를 증언하는 사례가 이 책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런 총체적 난국이 당시 비평가인 시어도어 화이트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군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중국을 휩쓸었던 대다수 군벌들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사리사욕만 채웠떤 군벌들이 중국의 상황을 가일층 악화시켰고 이러한 실정(식인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 비로소 미국에 알려졌을 때, 장제스와 중국에 대한 동정 여론이 돌기는 커녕, 다수의 미국 지식인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혐오에 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1941년부터 전쟁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에는 장제스가 치뤘던 몇가지 정치적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군사 고문 조지프 스틸웰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틸웰은 미국 군부 가운데에서도 꽤 유명한 중국통으로 아마도 1942년 전까지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버마 작전을 포함한 전략적 실행 순간에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사건건 대립했고, 장제스의 부인 쑹메리잉이 7개월간의 미국 방문 시기에 여러 실질적 검토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 안듣는’ 스틸웰을 소환시키려 하였으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장제스 대원수는 스틸웰과 잠정적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착오의 결단은 가까운 미래에 윈난성에 쌓여 있던 비축 물자의 반출을 스틸웰이 거부함으로써 장제스에게는 또 한번의 패착으로 귀결됩니다. 특히, ‘버마의 실패’인 스틸웰을 소환시키지 않고 화해하게 된 연유에는 분명 어떤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나, 스틸웰이 자기 정치와 자기 이미지에 몰두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해보면 장제스와 스틸웰의 재결합은 결국 파국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으로, “충칭에서 동쪽 저 너머로 향할수록 국민 정부(장제스 정부)가 서류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휴지조각이 된 지폐 이상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졌다”는 14장에 나와 있는 저자의 평가는 이 불행한 시기에 또 얼마나 더 무능하고 불행한 정부가 다수의 백성들을 피폐한 삶의 고통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겪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잘 목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여기에 영국의 처칠이 주요한 거악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향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노력이 루즈벨트에게 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그저 장제스의 중국이 일본 육군의 바짓가랑이만 잡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의 내각은 장제스로부터 만주국을 승인받고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손에 이뤄졌지만) 노몬한 사태 이후 소련과의 불안한 중립과 중국 전선에서의 안정이 결국 진주만 사태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진주만 공습을 위해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확대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자마자 미국을 손바줘야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어리석은 결정을 초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명목상은 미국 정부의 일본에 대한 금수 조치이기는 합니다만, 육군에 비해 실적이 미미했던 일본 해군이 주도하는 진주만의 공습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고 말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도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글을 내내 읽으면서도 번역이 정말 탁월하여 막힘없이 술술 진도를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자들의 노력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래 재출간 된 A. J. P. 테일러의 글과 함께 래너 미터의 이 글 역시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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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의 세기 -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우디 그린버그 지음, 이재욱 옮김 / 회화나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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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우디 그린버그는 현재 미국 뉴햄프셔에 소재한 다트머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유럽사와 지성사를 비롯 냉전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자코뱅 당 연구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위키백과에서 그의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심지어 구글에 나와있는 그의 사진 조차 몇사람의 얼굴로 검색되고 (동명이인 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정보 역시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기에 이 점은 양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4년 원제 “The Weimar Centur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얼추 4년 뒤인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디 그린버그는 자신의 이 책을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점은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인들과 그 지식인들의 영향이 과연 냉전시기까지에 이르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바이마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조차도 1차대전 종전 후,독일에서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실패와 그 한계를 연설로서 밝힌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의 독재들자들에게 민주주의의 실패로 조롱받기도 하였는데요. 저들의 후안무치한 논리에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짧게 이 바이마르시대가 어떻게 독일의 정치 실패가 되었는지 곰곰히 따져 볼 이유는 되리라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맥락 어느 지점에는 바로 이 ‘바이마르 시기’에 대한 저자의 가감없는 분석을 느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독일 망명자 출신임에도 미국과 세계에 영향을 끼친 5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면면이 놓여 있습니다. 엘리트를 길러내는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카를 J. 프리드리히와 법의 지배를 유달리 신봉했던 개혁가 에른스트 프렝켈, 보수적 가톨릭 신앙의 입안과 극렬한 반공주의자 발데마르 구리안, 나치에 의해 몰락한 독일 자유주의자의 면모이자 정치인인 카를 뤼벤슈타인, 조지 케넌과 더불어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고안한 한스 모겐소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특히 5장의 한스 모겐소가 유명할텐데요. 이와는 별개로 2장에 서술되는 ‘에른스트 프렝켈’은 우리와도 매우 밀접합니다.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카를 슈미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해방 전후, 미군정과 함께 남한에 들어와 우리의 제헌헌법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독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 한반도에 정치적 실험을 시도했는데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에 기초한 반공국가 건설’이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프렝켈과 뢰벤슈타인 그리고 한스 모겐소를 중점적으로 읽어봐야 하는 장(Chapter) 으로 여겨졌습니다.

저자의 입을 빌어 표현한다면, 베르사유 체제 이후에 출범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아마도 “많은 민중들이 선동하는 정치인에게 유독 약해보이고 정치적으로 휩쓸리게 되는 부분”이 그 원인으로서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저는 기존의 대중 대 엘리트의 정치 개념으로 일반적인 공화주의 체제에서 민중 내지는 시민을 계도의 대상으로 삼아 전자의 해석 부분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근거적 이념으로 여겨 마땅히 옹호만 하는 것을 다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4장, 뢰벤슈타인에 대한 부분에서 ‘다원주의적 체제’에 대한 짧은 언급을 통해 이 권력의 분산에 있어서 얼마간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간 저는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온전히 자리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함을 여러편의 서평을 통해 밝힌 바가 있습니다. 아주 면밀히 따지자면 이 뢰벤슈타인의 ‘전투적 민주주의’가 냉전 시기의 꽤 고약한 산물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곁가지가 타협없는 반공주의가 기반했으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결단이 필요했음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뢰벤슈타인의 경우 “사회적 평등과 법의 지배,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음에도 그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이처럼 타협없는 강력한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은 일찍이 모겐소가 예견했던 것처럼, 정치 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을 아마도 간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보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이 독일 바이마르 시대가 어떠한 조각을 갖다 붙이고 수식어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의 탄생에 대한 일종의 ‘자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들었던 의문은 왜 그 시기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가에 대한 일종의 안타까움을 동반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약간의 모티브를 받았지만) 선동 정치인에 의해 다소 휩쓸리기 쉬운 대중들의 소위 ‘약점’을 단순히 열거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엘리트 지배체제가 필요하다고 논거를 확대해 - 1장의 카를 J. 프리드리히의 경우 - 공화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이론적 반대를 강화하는 꼴이라는 점입니다. 1장에서 카를 J. 프리드리히는 공공선에 집중하는 엘리트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이해했습니다만 이것이 계몽주의적 선을 신봉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오늘날의 환경에는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겁니다. 특히,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이런 사익추구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까지 갖고 있는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가 엘리트 지배체제의 또다른 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시민에 의한 권력과 법의 지배는 그것 자체로 수호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와 시민 권력의 힘의 기울기는 어디쪽에 있는지 명확합니다. 굳이 테크노크라트를 논하지 않더라도 이런 이행은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또 들었던 생각은 이들 망명객들에게는 그 배후에 카를 슈미트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오늘날 배경으로 해석한다면 최근의 네오콘 뒤에 레오 스트라우스가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역시 카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이들이 첨예한 냉전시기에 성조기를 등에 붙이고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봤습니다. 최근에 샹탈 무페는 이 카를 슈미트가 우파쪽 뿐만 아니라 좌파에게도 현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특이하다 까지는 아니고 꽤 이채로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이들이 세계의 공산주의 확대에 맞서 어떠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인지했던 점은 꽤 기시감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행에서 5장의 한스 모겐소는 베트남 개입에 대한 반대와 미국의 ‘병영국가화’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다른 측면에서 “개인적 권리와 집단적 권리는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2장, 프랭켈의 이 인식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봤습니다. 현재 독일 내에서도 이들은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식인이자 사상가들로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의 매파 역할을 했던 미국의 역사학자가 이를 분석하고 있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랭켈과 뢰벤슈타인도 이런 미국의 역할에 대해 공감하고 상당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냉전 시기에 로널드 레이건과 같은 모순적 정치인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때의 미국이 바이마르와 비견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을겁니다. 다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당시의 극렬한 반공주의가 낳은 후폭풍 또한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현명했다면, 혁명으로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극단의 공포감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지만 결국 종말에는 미소간의 권력 게임으로 비하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행한 시기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이 시기에 수많은 개인들의 권리가 대결구도에서 희생당했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이익이라는 경계가 개념상 융해 되어버렸다 해도 과장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또 생각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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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
스티븐 베이커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서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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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및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스티븐 L. 베이커는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처음 언론사 경력을 쌓은 버몬트에 소재한 주간지 블랙 리버 트리뷴을 시작으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비즈니스 위크의 멕시코 시티 지사로 파견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등 경제 전문 기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다른 언론사들에서 왕성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뉴욕 타임즈와 월 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및 보스턴 글로브지가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남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의 ‘엘리트 독식 사회’의 글 구성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두 책이 거의 동일하게 일종의 르포 취재 형식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소위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언행을 통해, 후자인 이 책에서는 저자인 베이커가 고안한 일종의 IT 전문가들을 뜻하는 ‘뉴머러티 Numerati’가 사회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앞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뜻하는 빅데이터 사회를 가늠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7년 “The Numerati”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에 초도 번역되어. 2014년 (아마도) 재개정판으로 2판이 출시되었습니다. 다만, 개정판이 나왔음에도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의 소주제별 구성과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베이커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늘날 발전된 웹 기반의 수집된 개인간의 데이터와 이를 통한 데이터 마이닝이 과연 어떤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간략한 예측과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재런 러니어를 비롯한 업계의 이론가들이 앞으로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이 구글과 같은 거대 웹기반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으로 인해 시민의 권리가 사실상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5장, 테러리스트에서도 논증하고 있듯이, “뉴머리티가 제공하는 도구를 활용하여 자체 감시를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회가 자유롭고 거침없이 돌아가고 구성원들이 나쁜 짓도 좀 하면서 살수 있을까를 알아보기 위함”을 라스베이거스의 소프트웨어 기업가인 제프 조나스의 대안으로 이를 관찰해보고 있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제프 조나스는 IBM에 소속된 전문가로 그 자신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9.11 테러 이후 미국 사법정보 당국인 FBI와 CIA의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한 방대한 이들 데이터베이스들을 통합하는데 미국 정부는 1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은 바가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정보 당국을 총괄하고 있는 NSA의 주된 임무가 데이터 수집에서 이 대상자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테러리스트를 추려내는 과정이 과연 무고한 희생을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이런 정보당국의 비대화가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는 이들 미국인들의 관심과 의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요. 후에 이어지는 백악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이들 정보 기관의 입을 중요시하고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국가 안보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배치 기조로 더 나아간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워도 과도한 해석이 아닐겁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NSA에서 일하고 있다는 수학자 제임스 샤츠를 통해 데이터 마이닝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 뉴머리티 즉, 숫자 지식 계급이라는 IT 전문가들이 일반 시민들에 비해 민감한 업계에 일하고 있는 만큼 그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준을 이들이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많은 전문가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는 ‘특별한 자신의 분야’에 비이성적으로 매몰된 나머지 다수의 이익이라는 부분에서 괴리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특별한 일을 맡은 선택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과도한 자부심을 갖고 더 나아가 본인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계급주의적 사고관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 부분이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들 전문가 그룹들을 아주 밀착해서 감시할 만한 어떤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관련 학자들이 염두해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는 법칙은 현재 웹 검색 기반의 구글이나 다른 쇼핑몰 사이트 및 신용카드 회사들이 그것이 적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민들의 여러 정보 조각들을 수집해 자신들의 이익으로 수렴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이해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수집되는 개인들의 데이터들이 어떤식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걸쳐 실제 소비 생활이나 사적인 행위 등에 쓰이는지 밝혀내는 것이 바로 2장, 소비자입니다. 이 광범위한 소비 업계에 근무하는 뉴머리티들은 일종의 소비 패턴 분석가들로서, 이를 통해 개인들의 성향과 소비 습관들을 정확히 분석해내고 이를 기업에 이용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용카드의 문제는 내가 사용한 카드의 명세서가 중앙서버에 저장된다는 점과 이것에 대한 접근권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일겁니다. 이것들은 공적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사적인 범위안에 들어가 있는 부분으로 이 사적인 정보들이 소위 기업 영역으로 여겨지는 본사 중앙 데이터에 축적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간략하게 5장에서도 분석되고 있습니다만 각 권력기관들이 여차하면 이들 신용카드 기록에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영장 청구가 과연 면밀히 고려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당연하게 시민들을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으레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은 자신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다수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일종의 인식적 책임 회피로 단순히 현재 우리가 국가 기관에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는 형식으로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며, 확실히 미국의 사례들을 고려해 봤을때도 현재 이 빅데이터 관련 문제가 전환기에 있는 만큼 애초에 이를 규정하고 제한할 법안이나 기구 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치와 관련한 3장, 유권자에서는 현재 미국 선거 운동 전반에 대한 꽤 내밀한 분석이 이번 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미 미국의 선거 운동과 관련된 산업은 꽤 정평이 나있기도 합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고, 이를 위한 전문가들의 지원과 자원 투입이 매우 원할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의 개인 정보들과 그 알고리즘 등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선거철이 되면 이를 통한 결과 예측이나 지지층 규모 등을 분석할 수 있는데요. 이 점은 꽤 공교롭게도 현재 미국의 금권 정치와 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조지 W. 부시가 엘 고어 전 부통령에게 아슬아슬하게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이것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분석을 당시 조지 W, 부시의 선거를 총괄한 이들이 수행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우드를 비롯한 당시 전략가들이 부동표 지역에 대한 공화당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기울인 것은 사실상 수백만 달러의 투자에 이른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정치자금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에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선거 형태가 돈이 없으면 사실상 해결되지 못한다는 볼멘 소리는 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차별적인 금품 살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운동 전반의 천문학적인 비용 증가와 이를 더 부추기는 정치 자금법의 유명무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현재 사소하게는 우리의 여러 정보 단편들이 이제는 거스를 수도 조차 없는 거대 웹 기업들에 의해 수집되고 조직됨으로써, 이들 업종에서 대두하고 있는 ‘뉴머러티들’과 관련 산업의 이행 과정을 꽤 객관적으로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번역 제목인 ‘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출판사의 꽤 의도적인 시도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전반적인 맥락으로 우리의 아주 기본적인 프라이버시와 권리가 이들 뉴머리티들의 손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체로 이 분야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들과 언론사들은 이러한 이행과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앞서 제가 언급하대로 이들 모두는 매우 강도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신들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밝히고 있는 이 부분은 사실상 교과서에 등장할 만한 교리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이들과 국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이들이 이러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을 써본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이것에 대해 입을 싸매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이들이 말하는 본래 자유라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취할 자유와 경제적 자유’뿐이니 일견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업계의 관계자가 쓰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 객관적으로 뉴머러티들을 통해 논증하고 있는 ‘미래 세상’은 꽤 의미가 있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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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본능 - 일상 너머를 투시하는 사회학적 통찰의 힘
랜들 콜린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미국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랜들 콜린스는 하버드와 스탠퍼드를 거쳐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과거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을 당시 그는 반전 운동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이후 하버드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하고 버지니아 대학 등을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마도 랜들 콜린스는 어빙 고프먼에 주로 탐독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지고 보면 고프먼도 역시 뒤르켐의 학문적 지류이니 콜린스 역시 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막스 베버와 비슷하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회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뒤르켐의 사회학의 기능주의적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실증적 논거를 비롯한 사회학에서의 기본틀을 마련한 그의 업적은 분명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지난 1982년 초도 출판되었으나, 이후, 1992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Sociological Insight”로 국내에는 바로 1992년판을 기반으로 지난 2014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우선 이 책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구조들을 (현실) 사회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자체는 저변의 확대를 위해 쓴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꽤 독해가 수월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총 6장의 주제로 차례대로 요약해 보자면, 1장은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의 맹신 이면의 비합리성, 2장은 사실상 종교의 공통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도덕주의, 3장은 일터나 일상생활에서 규명해 본 권력의 개념, 4장은 법과 범죄의 서로 역설적 측면에서 비롯된 사회 범죄의 의미, 5장은 전통적 성애적 권리의 변화 및 현재의 결혼 제도의 예측을, 6장은 사회학의 필연적 존재라고 여겨도 될 만한 인공지능의 불확실한 미래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6장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문맥 그대로라기 보다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일종의 사회적 실험으로 저자는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더불어 이것에는 사회학과 사회학자들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보는 듯 했고요.

이 책의 저자인 콜린스는 자신의 글을 본격적으로 써 나가는 와중에 독자들에 중요한 인식 수단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은 완벽하지 않으며,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측면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 구성한 사회는 이 개개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합리적 행동에 나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그 안에 ‘의례’와 ‘유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합리적인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측면과 의례 및 유대감을 기본 인식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가시면 글의 일관된 논지를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경제학자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들에 대해 저마다 철저히 이성으로 무장한 옹호론을 내놓는 일은 아주 흔하다”고 저자는 일반적인 경제학과 이 합리적 본성과 더불어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이 합리적인 본성 혹은 이기심과는 다른 “사회에 필연적으로 필수불가결인 도덕주의적 요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바로 이러한 합리적 본성에 의해 추구되었던 “계약주의 내지는 계약설”에 에밀 뒤르켐이 “사회 조직의 궁극적인 기반이 계약이 아니라는 점”은 사회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보는지 극명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양자간의 계약 관계를 해설하며 양쪽의 어느 한 사람이 계약 관계를 철회해 자신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이라고 풀어냅니다. 다만, 매번 모든 계약 관계가 이런식으로 될 것이라면, 사회적 합의가 무너질테니 따라서 법에 의한 강제 규정이 존재하게 된 것은 앞의 근거적 단순화를 차치하더라도 꽤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의 이익과 안정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계약을 다루고 있으니 그만큼 저자의 이론에 대한 접근이 평이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강제된 규약(사법체계)에서가 아니라 “모두가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도덕적 의무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무 조항 역시 근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유대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는 분석은 단순히 유대감의 존재 여부에 따른 사회의 구성적 요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익 추구와 별개로 도덕적 측면과 상대방을 고려하는 유대주의가 중요하다는 논법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과거 계몽주의적 도덕적 접근이라고 폄하될 수 있으나 현재의 개인들의 수많은 이익 추구에 대해 어떠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꼭 모든 경제학자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교묘히 제시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이런 인식이 내면화 된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전통주의 사회 이전과는 달리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된 기존의 사회가 생산력과 그로 인한 사회 발전에 나서게 됨으로써, 이것이 필연적으로 진행된 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죠. 물론 이러한 도정에서 우리의 도덕적 책무와 도덕주의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이 부분은 그것의 폐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 4장은 특히 현재 미국내의 범죄와 사법제도의 모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만큼 현재 미국 사회의 범죄 발생의 근원을 사회적 차원에서 규명하는데 큰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독자가 이 4장을 따로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뒷부분에 인용이 되기도 하지만, 에밀 뒤르켐은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범죄가 필요하다고 하기까지 했는데요. 이 부분이 일정 부분 이런 범죄자들을 도태시켜 건전한 부분만을 건사시킨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미국의 사법 체계에 따른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 간의 거래와 가해자들에 대한 형량 거래 등이 만연한 범죄에 따른 사법 당국의 일처리 효율을 위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매우 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범죄에 대해 그것을 일개 사람의 일로 국한시켜 이해하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자인 콜린스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인의 인식을 보이더라도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이들 범죄에 대해 접근하고 이해하면 그 결과는 분명 다르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그래서 범죄가 법의 역설적인 측면에서 조장되고 있다는 해석은 크게 공감이 되었고, 미국의 사법체계가 처벌의 엄중주의에 급급해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중범죄인들이 있는 교도소에 무차별적으로 수감시켜 갱생은 커녕, 다시 중범죄의 굴레에 옭아매는 결과를 미국 사법제도와 사회가 재생산하고 있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정독을 하다가 잠시 들었던 생각은 경찰 조직과 사법 조직을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고 시스템을 분석하는 어떤 연구 용역이나 연구부서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를테면 형법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모여서 이 조직내의 실제적인 조건과 성격을 규명하고 이것을 시민 사회에 널리 인식시키는 것이 이 자체만으로도 범죄 최소화에 기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으로 의사나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업계 정보를 가급적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소위 전문가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일종의 은폐주의와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인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와 같은 이 차별적 태도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사회 구성원들과 자신들은 다른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따라서 이들 계층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실로 명료한 해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동안 자유주의적 이성에 기반한 사회적 체제의 틀을 마련해 왔다면, 이제는 이 합리적이라는 수준의 인식을 달리 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앞선 의사들의 예를 들었듯이 우리 모두가 사회적 유대감을 갖고 아주 직접적인 권력에 의지해 사회를 유지하기 보다는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건전한 의례와 소수의 기득권층을 공통된 사회 구성원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반드시 마련하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의무이자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뭔가 통제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실 수도 있으나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합리적인 이익이라는 본성의 비합리성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학의 근본 목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실종된 현재의 도덕적 책무를 고려해본다면 분명 매우 중요한 시점임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더 나아가서 열린 다원주의의 근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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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 조커가 지배하는 시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4
안병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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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와 서울대를 거쳐 미국 뉴스쿨 대학원에서 한나 아렌트 상을 수여받은 경희대 미래문명원 안병진 교수는 국내에서 제법 잘 알려진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유명한 논저 가운데 하나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는 학계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교수가 포퓰리즘 연구를 해보면 큰 학문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는 일개 독서인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짦게 밝히는 대로 광범위한 도널드 트럼프 연구의 그리 가볍지 않은 길라잡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 책은 몇년간의 지난 트럼프의 단상을 돌아본 글이면서, 앞으로 트럼프로 초래된 미국의 정책 변화와 세계 체제에 대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작은 분량의 글이지만 몇가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의문을 다소 해결할 수 있었는데요. 또한, 꽤 객관적인 시각의 글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우선, 미국의 수장인 도널드 트럼프는 국내에서 학계와 여러 전문가들에게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도 역시 트럼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특유의 괴랄한 트위터 정치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분야이든지 통달했다는 식의 자기애적 사고를 마찬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얻게된 사실은 트럼프가 백안관에 입성 후, 전 정권이었던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TPP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오히려 아시아 태평양에 중국의 영향을 확대시킨 것과 최근에 이란의 핵합의를 과거로 돌리고 중동에 암울한 전운을 드리운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트럼프가 사실상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매우 진지한 예측과 성찰이 없는 인물이 아닌가하는 일종의 뜨악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여 상당히 기울었던 점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그 한계를 받아들여 그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포함된 중동 정세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오바마는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배경에는 미국의 쇠퇴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지만,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물론 약간 다른 논법이지만, 저자의 말대로 중동에서 제3차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란의 핵문제와 이스라엘의 과도한 대응이 미국과 동맹국을 전화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과연 트럼프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이러한 파급 가능성을 과연 이해하고 있었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 무소속이나 제3의 후보가 되는 길을 고려치 않고 공화당을 점령하는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인종적 배타성에 근거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화신”이고,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과 러스트 벨트를 비롯한 하류층 백인 남성의 지지를 얻고 당선에 이릅니다. 이러한 지지층의 파괴력으로 말미암아 공화당 내 꽤 건전한 보수주의자들 역시 트럼프에 굴복해 그의 지지기반이 된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운동”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며, 여기에 대한 미국 리버럴들의 단순한 격하한 평가와 대응 부족은 지난 3년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약간 다른 관점이겠지만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민주적 원동력을 주장한 샹탈 무페를 저자도 인용하고 있지만 인종주의와 엘리트 층에 대한 격렬한 분노 그리고 쉽게 선동되어 버리는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저자의 판단에는 불행하게도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미국의 고도화된 반지성주의적 분위기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의 출현을 예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인식을 감안하더라도 이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사생아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저자 역시 맺음말에서 이러한 위험스런 정치 변동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시민들의 중요한 당위적 행동들과 인식의 확장 등을 여러 문장들로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시민이 자신만의 왕성한 지적 욕구와 깊은 성찰과 토론을 통해 선동 정치가들의 궤변을 논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현재까지 다수의 시민들을 이러한 공론장에서 퇴출시켜 버린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그냥 몇마디 말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가 지성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언급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왠만한 지성주의 시대로 표현되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 또한 문제이긴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과 엘리트 들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이것이 과연 정치 발전을 위한 대응인지 아니면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어떤 선동 정치인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는 꽤 명백해 보입니다. 다만, 이것과 관련해 저자가 설명한 “비통한 자들이 땅 위에서의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위대함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선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앞선 부분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어떤 욕망이 내포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요. 이들이 스스로 비루함을 선택한 것은 아닐텐데, 마찬가지로 젠더와 같은 개념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비루함 또한 개인의 온전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인정하듯이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신자유주의적 영향”과 이를 레이건 시대에 양 정치 세력이 용인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끝으로, 1960년대 현재 트럼프의 아버지로 지칭해 될 만한 포퓰리시트였던 조지 윌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널드 레이건을 트럼프와 한 묶음으로 만든 저자의 결단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요.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겉으로 표징하는 이념이 보수에서도 더 오른쪽이지만 이들이 꽤 유연한 정치적 판단으로 놀라운 결과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에 대한 긴장 완화와 소련에 대한 데탕트를 초래한 것 등과 같은 사례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야한 리처드 닉슨이나 때로는 정치색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널을 뛰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인의 단일한 색깔을 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 혼란을 준 것은 분명하나, 특히 레이건과 같은 경우도 그의 업적에 비견될 만큼 과도하고 불법적인 일들을 벌인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미국 내에서 레이건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빨리 제대로 이뤄졌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또한, 트럼프 현상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기반해 해석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고, “양극화한 적대적 정치”이라는 현재 미국 정치의 일면을 어느 정도 드러낸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결론에서 많은 독자들이 오로지 얼마간의 국제 기사에 의지해 글로벌 현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제언 역시 크게 공감할 만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환경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먹고사니즘’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 먹고사니즘과 관련해 오해를 방지하고자 더 첨언하다면,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한 문제들을 모두 먹고사니즘으로 몰고가는 행위를 주요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막줄은 이 책의 서평과는 매우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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