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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태어나 인근인 이베토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도시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카페와 식료품점을 운영했는데요. 그녀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에서 공부하고 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70년대 초에 그녀는 오트 사부아 보네빌의 고등학교와 아네씨르비유의 이비르 대학에서 가르치다, 그후 국립 원격 교육 센터 Center national d'enseignement à distance 에서 23년간 근무합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그녀는 특유의 자전적 소설로 프랑스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2022년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프랑스 대통령인 엠마뉘엘 마크롱은 특히 "여성과 잊혀진 사람들의 자유의 목소리"라는 헌사를 보냅니다. 다만, 그녀는 정치적 행동주의라는 측면에서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장 뤽 멜라숑을 지지했으며, 거의 공개적으로 반이슬라엘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에르노는 이란 정부에 맞서는 민중 봉기에 연대를 보내고, 이란의 '히잡 의무법'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La Place"로 지난 198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4월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아르노의 이 소설 역시, 그녀 스스로의 자전적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친을 배경으로 간단하지 않은 가족사를 그리고 있었는데요. 우선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라는 주제로 세상에는 때론 아버지를 경멸하고 멸시하는 딸들이 있는 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겁니다. 모성애 대한 지극하고 일관된 찬사와 입장에 반해, 부성에 대한 태도 혹은 그런 평가는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양가적 감정으로 다뤄지고 있기도 한 데요. 저는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1936년 이후 나치 독일의 프랑스 강점과 이후 1944년의 노르망디 지역에서 연합군 주도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그 혼란의 시기에 처자식을 건사한 '한 아버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작중의 그녀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시몬 보봐르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가졌을지는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우리들의 부모님을 빗대어 보면, 자신에게 향한 교육과 문명의 혜택이 공짜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혹은 더 나아가 아버지, 당신의 삶을 통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충분히 공감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녀가 말하는 "기초 교육 내지는 일반적인 교양과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의 열등감이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그런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항상 노력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단순히 가엽다거나 깊은 감정의 숙고가 배제된 그저 안쓰럽다는 태도로 일관해서는 어떤 한 사람의 삶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물론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해보고 그의 결핍에 대해 가늠해 보려는 노력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평범한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라는 모습 자체는 단순히 이성적인 측면에서,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다는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물론 훌륭한 고등 교육을 받은 것과 책을 항시 손에 놓지 않는 딸은 말 그대로 평범한 예는 아닐 겁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가족 간의 소소한 갈등, 그럼에도 어머니와 아버지 간의 살뜰한 애정과 서로를 향한 사랑은 충분히 감동적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삶이 어떻든 간에, 딸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아버지의 삶이 어느 정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번 숭고하게 여겨지는 모성애와 비교될 만한 주제로도 읽혔는데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탁월한 교양을 쌓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사위와도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고, 딸이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매번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며, 무엇보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나치 독일군이 초래한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에서 가족을 무사히 건사한 가장의 존재는 '어떤 자연의 혜택' 정도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에르노 자신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온 사력을 다한다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치열한 삶이 객관화 되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딸과 아버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자기 변명에 숨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불편한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못된 성질은 그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 가난을 견뎌 내게 하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웃음을 억눌렀다. 나는 커가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성적인 암시들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아버지는 뭔가 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소심해지고 뻣뻣이 굳어져서 상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똑똑하게 처진했다.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저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정중한 어조는 외부인들에게만 사용했다.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어떻게 이 순박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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