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2.0 -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임지현.우찬제.이욱연 엮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9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주간해 당시 출판계와 학계에 높은 인기를 누린 '우리안의 파시즘'의 임지현 교수가 다시 기획한 것이 이 '우리안의 파시즘 2.0'입니다. 임교수는 서강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한양대 사학과에서 연구 교수로 활동하다 최근에 자신의 모교인 서강대로 돌아왔는데요. 그는 해외에서도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고 국내에도 꽤 진보적인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학문 전반의 포스트모던 뿐만 아니라, 오랜 시기 동안 사회전체적으로 이식된 그와 같은 관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진보는 사실상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진보와 보수는 속살을 까보면 다 마찬가지로 망가져 있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논법 구사에 저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우리안의 파시즘'의 새로운 확장판으로 임지현 교수가 자신과 같은 서강대 교수들과 일부 외부의 인문사회학 연구진들을 규합해 만든 일종의 시론(時論)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은 거의 최근인 2022년 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먼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예전부터 하고 있었던 생각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 '우리안의 파시즘'과는 약간 상이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요. 오늘날 불완전하게 이식된 능력주의적 관념,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보다 좀 더 과격해진 우리의 정치 그리고 사회 전반의 소통 부재와 아직도 철이 지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적 대치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요. 앞서 제가 언급한 대로 상당히 공감했던 부분은 정희진 작가의 '민주주의가 진영을 나누는 핵심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문장이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한 폐해를 다룬 이진우 교수의 글에서 '민주사회에서도 계급이 발생한다'는 그의 인식에서 보충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민주주의가 평등과 경제적 재분배 필요성의 약화에서 초래된 결과가 지금의 능력주의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민주주의가 평등의 원리를 중요시 생각하는 원리임을 감안해 본다면 '기회의 균등' 같은 신조어는 사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닐 겁니다. 다만, 능력주의의 왜곡된 사회 이식으로 발생한 오늘날 세대 간의 극심한 반목과 이철승 교수가 언급하는 "청년 남성들이 아버지와 삼촌과 형이 누렸던 혜택을 맛도 못 본 채 구직 대열에 오랫동안 서있었다"는 얼마간의 명확한 분석은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인식을 정확히 드러내는 분석이라 여겨졌습니다.

앞선 이 교수의 명확한 분석은 다음에도 이어지는데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586의 무능과 더불어, 반대편의 국민의힘 일각에서 그들의 포퓰리즘적 속성 즉,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는 맥락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간단합니다. 그 당의 인사들은 여전히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수가 강고한 능력주의자이자 신자유주의자들인 그들 자신이 명목상이든 뭐든 간에 현재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좀 더 평등하고 모두에게 권력과 부를 획득할 확실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전반적인 체제 변혁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이철승 교수의 짐작대로 그저 청년층의 지지와 표를 위해 공언무시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것은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내재된 목적성 및 전부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가치관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보수라고 일컫는 자들의 그 면면들이 정작 흔들리지 않는 민주주의와 오래된 전통에 대한 수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 제도에 대한 안정을 위한 노력 및 종교적 윤리 의식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사익 추구로 점철된 왜곡된 정실 자본주의와 우리의 예에서 과거 개발 독재의 이익을 살뜰하게 나눈 집단 이익을 본질적 이익으로 주장한다는 것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더 강고하게 사회를 양단시킨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로 반대의 목소리를 사실상 막아버린 것이 그 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사법 살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를 무조건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곳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신자유주의가 가장 잘 이식되어 나타난 국가가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우선적으로 '이익'이라는 관념 체계와 그에 따른 결과물만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제는 모두가 명확하게 인지해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존의 여러 부침을 겪은 우리의 진보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도 인정할 만한데요. 기존의 강준만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여기에 집필진으로 참여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의 비판은 우리 역시 매우 귀담아 들을 필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권분립이라는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주권을 너무 과대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큰 가치로 치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는 박상훈씨의 평가에 저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인데요. 이것은 일반적인 시민 기본권과 함께 고찰해 볼 수 있는 사안으로 과거 계몽주의적 맥락에 기반한 공화주의 가치가 상당히 유명무실해졌다는 오늘날 현실적 측면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오로지 자본주의적 잣대만이 강화되고 강요되어 성역화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장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헌법 상의 기본권과 국민주권을 도식화하여 분류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양자는 우리 여전히 우리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 이며, 이러한 관념은 인권의 의미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진우 교수가 엘리트 중심의 능력주의가 취하는 미래가 '소위 능력으로 일어난 자들이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음울한 전망이 실로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즉, 능력주의로 일어난 저들이 사회 권력층이 되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또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도태시켜야만 한다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 사뭇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두 개의 사회를 발생시키는 것 못지않게 사회 전반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국민주권을 강조한 민주 체제가 남보다 더 많은 자원과 높은 목소리를 가진 자들의 '승자독식 정치'를 고착화 시킬 것이라는 논리적 전개가 딱히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보수 우파 일부에서 대의 민주주의를 아주 교묘하게 자신들의 이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여러 연구물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안을 연구해 볼 수 있다는 점은 명백히 직접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가능성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공상 속의 이론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토착 왜구'와 '빨갱이'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화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격멸의 대상이라는 것에는 십분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기득권을 전혀 놓지 않은 채, 권력과 부를 그대로 승계 받은 친일 세력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더욱 반응했던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과거 친일부역자들의 후손들이 해방 이후에도 호의호식하며 지냈던 것과는 반대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억울한 '용공' 누명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법정 살인을 당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설사 그것이 우리 역사가 지닌 오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자신들의 이익과 일부 계층의 소위 '20 대 80'의 사회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 및 무늬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보수주의에 반해 이익을 추구해 도덕성을 상실한 진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보여할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아예 걷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 사회에 있어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과 함께, 이데올로기는 철지난 관념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회 전반에 이익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법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일부에게는 불편한 소리로 들리겠죠. 이처럼 누구에게는 이 사회가 지상 낙원인 것 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권력의 기울기가 극명한 시점에서 그것을 가진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 시민들 간의 논쟁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씨와 윤석렬 씨 모두 박정희를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 경제와 정치에서 전두환의 업적을 언급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풍경은 참담하기만 하다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능력주의만은 힘껏 붙잡고 있다

한편에는 개인의 능력만을 사회적 자원의 분배 기준으로 삼는 능력주의가 매우 공정하다는 유토피아적 시각이 있다

엘리트 계급과 나머지 계급 사이에는 이제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공정사회라는 유토피아로 이르는 길인 동시에, 능력의 폭정이라는 디스토피아로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정치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분배와 기회의 틀은 그대로 둔 채, 피폐해진 청년층의 불만을 조직하고 표적으로 삼은 공격 대상에 불만을 집중시킨다

기본권이 시민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다, 주권이 시민총회의 결과물이라면, 기본권은 국민주권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리를 위한 투쟁 / 법감정의 형성에 대하여 - 너는 투쟁을 통해 너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루돌프 폰 예링 지음, 심재우.윤재왕 옮김 / 새물결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세계 모든 법학자들이 사법 私法의 정신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읽는다는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과거 하노버 왕국의 아우리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아우리히는 독일 니더작센 주州 의 동부 프리지아 지역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는 뮌헨의 유서 깊은 대학인 괴팅겐에서 공부했고,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예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로마법에 대한 상당한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마찬가지로 법역사학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예링이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를 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명저인, 이 '권리를 위한 투쟁'이 데이비드 흄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영국인들의 경험주의 철학이 그의 법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이 글 중후반이 '법률에 대한 법률의 투쟁'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서술들이 여러 곳에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일관된 그의 논증이 풍부한 수사를 통해 진술되고 있다는 점도 법에 대한 여느 논저중에서 일반인과 사법 관료 할 것 없이 '법의 진정한 가치'를 이토록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예링의 이 저서를 무엇보다 먼저 세상에 다시 내보이려고 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예링의 이 책은 원제, "Der Kampf ums Recht'로 지난 1874년에 출간되었고, 최근에 작고한 고려대 심재우 교수의 번역과 라드브루흐가 편집한 판본(1965)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국내에는 윤재왕 교수가 심재우 교수의 번역을 이어받아, 지난 2016년 10월에 다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대학에서 교양 수업을 위해, 이 예링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 기억으로는 사회와 법철학과 관련된 강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제 서가 한 켠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그때 읽었던 판본은 범우사(1997) 판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책 제목을 통해 어느 정도 내용을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이에 저자인 예링은 "국가도 역시 개인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각 개인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우리의 법의 대한 건전성을 답보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대변하는 것은,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라는 신념 어린 문장입니다. 그래서 글 서두에 예링은 자신이 권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법의 본능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측면에서의 여러 법규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권리와 맞물려 해석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법이 갖는 아주 극명해 보이는 속성, 즉 시민을 법률로 통제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를 유지시키는 야경 국가라는 의미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예링이 진정으로 밝히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의 경험에만 의존해 사회를 규명하려고 했던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이력을 같은 독일의 대중 지식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도 어느 정도는 경험주의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법에 대한 태도 전반이 세대와 세대를 거친 경험주의적 측면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각인되어 왔는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 자신들을 위한 법을 그 누구보다도 친숙하고 실용적으로 대면해야 함에도 현재는 오로지 변호사들과 사법 관료들 만을 위한 '특수한 분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링은 이러한 변화를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시민이 법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두려움을 갖지 말고 "끊임없이 법률과 대화를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이는 시민이 법제도를 이루는 근간이라는 점과 모두의 소위 공익(저의 해석이기도 합니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절대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법과 사유재산에 대한 관념이 유사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연유에도 양가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기심 자체에 대한 예링의 전반적인 불신을 이 글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명예, 윤리, 도덕적 의무를 시민이 저버린다면 예링이 특별하게 인용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다음의 피 토하는 절규와 다름 없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는 게 낫겠다."

민주 사회에서 법 자체는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링의 주장을 현 시대에 대입해 본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다투고 투쟁할 유일무이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한 것이데요. 장 자크 루소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겸허한 중재자'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부분도 중요한 맥락이고, 고대 로마법에 의해 부패한 재판관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지난날의 기록은 이처럼 법이 계층과 지위 그리고 신분을 따지지 않아야만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독일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법정의 문을 두들겼다는 사실과 상반되게 오늘날의 우리의 법정은 과도한 권위와 권력으로 덧칠해져 있습니다. 사법 관료 즉, 판사와 같은 자들이 스스로 준엄한 사법 제도의 수호자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근간인 시민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지위임은 분명한 것인데요. 대의적인 측면에서 제도의 뼈대를 제공하는 선출권을 가진 시민들이 오늘날 사법 제도 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글에서 중요하게 인정되는, "법이 수단과 목적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그것의 주체는 마땅히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공화주의의 아버지들이 사법 체계 자체가 이런 식으로 시민들에게 폐쇄적이 될지는 예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권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취급하는 "오로지 알량한 이익 만을 탐하는 자가 권리의 신성한 의무를 알 길이 없다"는 취지의 맥락은 이를 더 악화시킨 요인이기도 할 텐데요. 개인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사법 제도 자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에 대한 예링의 선견지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국가의 명예와 권리가 달린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예링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링의 진술을 소개해 드린 대로, 국가는 개인들이 모인 총합이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데 노력하는 데 들어가는 희생이 도덕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권리를 위한 투쟁과 관련해, 예링은 먼저 악법과 정치 권력의 사법 지배 상황을 상정하고 "모든 독재는 사법에 대한 공격, 즉 개인의 권리 박탈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후에 진술 되는 국민의 당당한 명예와 같은 자부심과 그에 준하는 윤리적 힘을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게 독재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법 제도가 일으킨 '사법 살인'에 대해 예링은 무엇보다 죄악이었다고 일침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법 관료라면 이미 누구나 한번쯤은 그를 일독했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예링의 경고를 그저 '있을법한 주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텐데요. 우리 역시도 과거에서 사법 제도가 독재에 지배를 당하게 되면서 숱한 '사법 살인'을 지근 거리에서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악법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있다는 것은 권리의 연장선 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그래서 우리는 예링의 글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되는 각자 스스로의 선연한 권리를 양심과 윤리의 측면에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거듭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는 그의 경고를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개인에게 사실상 '과도한 권리' 따위는 없다는 예링의 설득력 높은 논증은 여러 수사들을 통해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데요. 결혼에 대한 수사나 후반부에 로마법을 통해 전개되는 여러 인용들은 그 시대에선 나름 최선의 설득력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이기심과 사유재산에 대한 그의 논증들에 대해 일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들을 위해 오독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애덤 스미스에 관한 거의 의도된 오역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현재에 있어 개인의 이기심이 무엇보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여겨지고 있으니, 이를 의도적으로 권리와 혼용하거나 오히려 전자를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인데요. 바로 하이에크가 그런 의미에서 크게 재미를 봤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법이 보장하는 측면에서 권리를 규명해 나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의 예링이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했던 점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권리라든지 시민의 주권이라는 것들이 계몽주의에서 도출된 것이고, 그러한 몇 세기의 진보하는 역사가 또 공화주의를 잉태하게 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초적인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의무는 법의 존재 의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권리 투쟁이 결국에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도 맞물리게 되고, 그것을 망각한 이익에 물든 국가의 국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거래하려 든다면 그 국가의 존망이 아주 위태롭다고 봐도 무방할 것인데요. 그래서 도를 넘은 권력자가 대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으려고 든다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저항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민주주의가 그토록 요구하는 시민들의 야생성인지도 모르겠는데요. 따라서 예링이 말하는 '권리' 자체를 의식적으로 가늠해 보자면 결국 이는 우리의 사활적인 민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법의 역사가 인간의 의미와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와 법은 모두 야누스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어떤 이들은 이쪽 면을, 다른 어떤 이들은 저쪽 면만 보는 나머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인상을 품게 된다

민족들에게 법은 그저 아무런 노력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얻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만 한다

이 투쟁들이 고도의 노력을 경주할 가치가 있는 재화를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아둔한 자도 얼마든지 이해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왜 양보하지 않고 투쟁하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재산을 법적으로 주장할 때 지침이 되어야 하는 유일한 동기는 내가 재산을 취득하고 사용할 때 나를 규정하는 동기와 똑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유권이 노동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아주 간단히 또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어들수록 소유권의 물줄기는 갈수록 흐려지고 마침내는 증권투기와 주식사기 같은 진흙탕에 빠져 이 물줄기가 맨 처음 시작된 원천이던 노동은 흔적을 감추고 만다

만일 어떤 삶의 철학이 그러한 안일한 심정을 설교한다면 그런 철학은 비겁함을 찬양하는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이러한 고통을 겪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설령 로마법대전을 모두 외우고 있다 할지라도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윤리적 세계질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본능 가운데 가장 고결한 본능 중의 하나를, 어떤 이들에게는 조잡한 감각적 쾌락을,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또 어떤 이들에게는 소유욕을 자극해 움직이게 만든다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

윤리적 분노는 도덕적 세계에서 나타는 우레와 같은 현상으로, 그 형태는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분출되며, 그 윤리적 폭발력은 폭풍과 같이 근원적이로 모든 것을 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 앞에 굴복시킬 정도로 강렬하다는 점에서 숭고하고 장엄하다

우리 언어가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법살인은 법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악이다. 법률의 수호자이자 파수꾼이 법의 살인자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권리를 용감하게 방어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전체의 권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바치겠다는 절절한 욕구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는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중 경쟁과 대만해협 위기 - 남북한은 동맹의 체인에 연루될 것인가
길윤형.장영희.정욱식 지음 / 갈마바람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강대에서 정치 외교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겨레 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길윤형 국제부장은 과거 도쿄 특파원을 지냈을 정도로 일본 국내 정치에 대해 해박한 인물입니다. 더불어 중국에 의한 대만 사태가 발생했을 시 일본의 군사 외교적 대응에 큰 관심을 갖고 특강과 기고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중국 연구의 중요한 기점이 되고 있는 성균중국연구소의 장영희 박사는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중국 정치와 한중 관계에 대한 여러 강의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전쟁이 없는 평화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정욱식 대표는 여러 일간지와 방송에 출연해 군사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한반도 문제와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주제에 있어 그가 단독으로 이름을 올리거나 혹은 공저자로 참여한 여러 논저들이 시중에 팔리고 있기도 한데요. 어느 정도는 미국과 주한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한국을 진실로 지향하는 그는 한미 군사 동맹과 동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미군의 패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친미(親美)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용미(用美)가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그런 측면에서 한국이 단순한 친미국가로 대내외에 인식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상 상태가 될지도 모를 대만 해협의 위기 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현재 이 지역의 군사 지형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는데요. 많은 독자들이 대만의 위기는 우리와는 별반 상관없는 문제로 치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욱시 대표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는 미국과의 군사 동맹으로서 '동맹의 연루"라는 측면에서 국가 이익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가 우크라이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과연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5년 간의 정치적 선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은 대만 해협의 위기라는 주제로 앞선 3인의 짧은 글을 수록한 것으로서, 올해 7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을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구조로 나눠 본다면, 각각의 글들은 앞으로 위기로 격상될 지 모를 대만 해협의 사태에 있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내 정치적 상황과 군사 외교적 입장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서방 세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엔쉐퉁의 2023년은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앞지르게 되는 해로 인식되었는데요. 이 세계 패권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될 시기가 전세계적 코로나 사태와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외교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단순한 관여 engage 에서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계산적인 수순에 기인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현재 바이든 정권에 이르러 이제 미국은 중국을 '미국이 주도한 자유 민주주의 질서의 도전자'로 규정하고,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라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러한 국제정치적 변화의 흐름 속에 대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대만의 위기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중국 공산당이 주장하던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사실상 반기를 들고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 외교적인 정책을 감행하면서 발생한 것인데요. 이를 무조건 대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들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을 비롯 주변국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시진핑이 공공연히 대만과의 통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지역의 주요한 군사적 안정이 균열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터무니 없는 야욕과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의 긴장 강화도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대만인들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로 최근의 차이잉원 총통의 연임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치군사적으로 첨예한 분단국으로서 어느 정도 안보를 미국에 의존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주한미군의 존재나 좀 더 넓게 보면 주일미군의 존재 역시 한반도 안정에 기여한 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동안 주한미군의 역할론에 있어 과거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에게 정치적으로 확약한 바대로 철없는 한국을 제어하고 주일미군의 존재 역시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미국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밝힌 바가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주한미군이 지역 내의 군사 정치적 균형을 지속해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주한 미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북한에 대한 억제인데요. 이런 주한 미군의 기존 역할론이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욱식 대표가 우리의 제주 해군 기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사시에 미군이 동해로 진입하는 중국 해군의 뒤를 끊으며, 일종의 중국 봉쇄의 전진 기지가 될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한반도에 주둔한 이 미군이 대만 유사시에 지원 목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이유는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의 존재 때문일 겁니다.

이에 장영희 연구원은 중국이 대만 상륙에 대한 실효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는 2025년이 분수령이 되는 해가 될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국이 대만 침공을 본격적으로 결정하게 될 요인에는 '미국 정치 지도부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고 군사력 투입에 대한 가능성을 오판'할 시기가 좌우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길윤형 기자는 대만이 일본에게 의미하는 정치적 위상과 더불어 현재의 일본 평화 헌법을 우회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군사 협력에 힘쓰고 있는 일본 정치계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일 미군의 존재감 만으로도 일본 내의 자국 안보에 대한 미국 의존도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는데요. 대만과 자신들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열도가 해상에서 지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은 어떤 식으로든 대만 위기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본에게 있어 미국과의 미일안보협력지침의 3차 개정이 자신들의 안보와 지역 내의 군사적 지형에 큰 변화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전에 일본은 앞으로 이어질 중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에 있어 일본 국민 상당수와 자민당 내 정치인들에게도 신중한 접근과 미중간의 균형적인 노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동맹 외교에 있어 연루의 위협이 존재하는 데요. 만약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위에 나선다면 선제 조치로 평택의 미군 기지에 둥펑 미사일을 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가 엄연한 우리 국토임을 감안해 보더라도 우리가 베이징과 어떠한 관계가 될지는 대충 예측이 가능합니다. 물론 북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우리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습니다만 미국이 중국과의 전면 전쟁을 각오한다면 (여기의 필자들도 대만 사태에 있어 경제 제재라든지 외교적 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원치 않을 결정을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중국에 대한 한미일 삼각 공조가 이러한 맥락이고, 일전에 바이든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에서 백악관이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 대만 문제에 대한 언급을 공동 회견에 넣자고 압력을 넣은 것도 그러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와 일본이 여전히 미국의 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졌는데요. 앞으로 미연에 있을지도 모를 대만 사태와 중국 봉쇄에 있어 우리나라의 운신의 폭이 보기보다 좁을지도 모르겠단 우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윤석열 행정부가 과연 이 외교적 부담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대만 해협의 평화적인 항행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가 이 뱃길로 움직이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은 최소한 제 1 도련선을 봉쇄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와 일본을 경제적으로 항복시켜 미국을 이 지역 내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삼 이런 부분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역외 균형 offshore balancing' 전략이 단순히 미국의 패권 유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중입니다. 물론 정욱식 대표의 언급대로 현재 미국의 패권이 예전 같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군사력이 동아시아에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외치는 균형자적 지위가 어떠한 진정성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터 자이한의 주장대로 항공모함 전력을 비롯한 미국의 군사력이 우리와 일본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의 지금과 같은 군사력 증강과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은 자신들의 욕망대로 어느 정도 동상이몽에 근거한 것이지만 우리는 일본과는 엄연히 다른 입장에 서 있습니다. 과연 앞으로 2025년이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지 우리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정부 또한 무엇보다 가장 용미用美와 용중用中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 만을 바랄 뿐입니다.



- 몇몇 분들이 오역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지난 날 부통령 시절의 바이든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리는 한국에게 베팅하고 있으니,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일종의 외교적 수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의 보수 세력이 자신들이 친미親美 그룹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유사시 대만 해협의 위기는 국익을 위한 결단의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주도의 반反 러시아 결속이 명확해지면서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외교적,경제적,군사적 봉쇄 정책이 가시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게 큰 딜레마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적 태도가 사실상 중국 편을 드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그런 이유로 대만해협을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도 모종의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대만 사회의 연론과 민심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홍콩 문제를 다루는 방식 때문에 일국양제 방식의 가능성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대만 해협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한국의 전쟁 연루 가능성이 역시 커지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 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커트 켐벨 백악관 국가 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 등이 도쿄를 극비리에 방문해 공동성명에 대만 언급을 집어넣도록 강하게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들과 미국 쪽으로 확실히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이들 사이의 내부 논쟁에서 후자가 승리를 거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만 사태는 미중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어 일본이 섣불리 개입했다간 일본열도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처럼 미국이 필요에 따라 주한미군 전력을 한반도 역외로 전개하는 것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부른다

만약 대만 유사시 미국이 오산 공군기지 등 주한미군 기지를 대만 군수지원을 위한 발진기지로 삼는다면, 한국이 미중 충돌에 연루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즉, 중국이 미국을 선제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원조 의무는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냥꾼, 목동, 비평가 - 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졸링겐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현재 니더작센 주 뤼네부르크에 있는 공립대학인 류파나 대학의 철학 명예 교수이자 베를린에 소재한 한스 아이슬러 음악 대학의 철학 및 미학 명예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데요. 그는 독일에서는 꽤 유명한 대중 지식인이자, 철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독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2007년 출간작,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독일 내에서는 2004년까지 문학 잡지인 '리리터멘튼'의 칼럼니스트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WDR의 방송 프로그램인 '타게스자이헨'의 프리랜서 사회자로서 방송에도 얼굴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도덕과 사회'라는 주제로 여러 글을 기고하고, 몇몇 논저의 주요 소재로 자신의 철학적 관심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도 하는데요. 특히, 프레히트는 현대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지속적으로 현대 자본주의와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추인 되는 사회적 디지털화에도 비판적 인식을 갖고 꾸준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원제, "Jäger, Hirten, Kritiker: Eine Utopie für die digitale Gesellschaft"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선 저자의 소개를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점에 관해 잠시 소개를 해 드렸는데요. 마찬가지로 그의 이 책은 앞으로 높은 확률로 진행될 가능성이 다분한 기술 만능의 '사회적 디지털화'에 대해 강한 의구심과 불확실성을 논하면서, 이러한 기술경제적 진행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비판적인 논증을 수행합니다. 그는 앞선 부분과 동일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 한 가지를 던지고 있는데요. "인간이 소비 행태를 의도적으로 조종하려고 개인 정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판매하는 사람은 어떤 측면에서 국민 경제에 이익이 되는가?"라는 반문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세계의 디지털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 디지털 기업 4곳 - 구글 Google, 애플 Apple, 페이스북 Facebook, 아마존 Amazon, GAFA - 의 상대적 이익은 분명 이런 디지털화에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자 역시 기술 만능의 디지털 혁명이 소수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는데요. 더불어 이러한 디지털화를 경제적 이익만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논증을 통해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디지털화가 시장 규범을 위해 사회 규범의 범위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데요. 현재 많은 정치인들이 시장과 기업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의 앞날을 더욱 우려스럽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히트는 글 중간에서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대해 잠깐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익히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세대를 걸쳐 내려온 기존의 보수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요. 물론 많은 독자들을 위해 제가 다시 굳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많은 보수주의 정치는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소위 진보적 가치나 기존의 경제적 만능과 안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전 지구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자유주의의 적"임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저자는 아주 짤막하게 경제적 합리주의에 따른 개인주의적 사고관에 대해 그러한 역사적 맥락은 언급하고는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시장 만능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합리성과 개인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강요하고 사익 추구를 그러한 도덕적 근거로 삼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사회 재개조'에 대해 별반 진술이 없는 점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독일이 클라우스 오페의 언급대로 아직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 간의 대화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급'을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회적 디지털화가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레히트는 '레트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2040년의 디지털 시대를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자동화가 더 진행이 된다면 현재 시민이 곧 노동력이라는 수식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포드주의자들에게도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자의 우려대로 사회가 붕괴될 우려까지도 고려해야 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과거 시대의 유산이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수사를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저자도 이러한 암울한 예측에 대해 약간 상반되게 보일 수도 있는 오스카 와일드를 제법 많은 곳에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와일드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가는 수많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공장의 기계들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계는 일하고 노동자는 노래한다!"는 대목이 등장한 것이겠죠. 사실 와일드가 희망했던 계급이 없고, 자유가 충만한 사회는 결국 자본주의가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쇠퇴'라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자본주의에 걸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가 줄곧 우려하고 있는 이런 '이행'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의 우리가 맞이할 '디지털화'도 단순히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발걸음과 행동이 너무나 미적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집어 삼킬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어쩌면 아주 망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런 기술 만능의 디지털화가 초래할, 비인간화, 계몽주의의 몰락, 도덕성의 결여, 자율성의 몰락 등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데요. 따라서 이 부분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철학이 추구하고 긍정하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한 철학자의 바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거대한 디지털 시대에서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가 과연 귀환할 수 있는지는 꽤 불명확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사회가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고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부채질 했습니다.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간단하게 '저급한 이상론'으로 매도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조차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무엇을 '보수'하는지는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디지털의 범람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글 중반부에서 언급되는 시민들의 '기본 소득'에 대한 필요성은 시민의 삶에 대한 통제와 자율성을 답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민주 사회의 시민들인 만큼 앞으로 열렬한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담론 자체가 시장 우선의 자유주의가 벼랑 끝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더 이상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놔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포스트 민주주의'라는 디스토피아가 한낱 허구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로서는 발리바르보다는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가 더욱 익숙한 편인데요. 어떻게 보면 디지털화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예측도 독자들이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이 글을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지침서 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선 디지털 거대 기업들의 사업 확장은 특히, 미국 정부의 용인 아래 더욱 수월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이미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보 당국과 이들 기업들 간의 유착을 폭로한 바가 있는데요. 단순히 기업들이 정부에게 협조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라 악어와 악어새처럼 거의 공생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헌법이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 '안보'라는 문제가 이처럼 사회와 시민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와 같은 전방위적인 디지털화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와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다방면에서 소중한 정보들을 취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프레히트 역시, 디지털화를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매우 어려운 것이며, 현재로선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소 명확하지 않았는데요. 사회의 변혁이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 정치가 무능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야 하는지 저로서도 큰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저들과 결탁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은 조지 오웰의 절망보다도 더 암울한 것이기에 아직은 그런 지경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겠지요. 앞으로 10년이 우리 사회와 시민권, 그리고 주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가 '레트로토피아'라는 단어로 겨우겨우 위안을 삼고 하루하루를 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문제 많은)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후반부의 진술은 논증이 매우 명료해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제1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엎고, 예전에는 교회와 귀족이 지배하던 곳에 시민 민주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 모델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이익을 목적으로 인간들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이 비안간적이라는 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조종 가능성의 시대를 맞아 과연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정치인들은 정말 미련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고, 가능한 한 누구도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통치란 믿을 만한 숫자와 통계의 위에서만 가능하고, 정부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통계적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양극화 사회는 돈을 잘 버는 소수 계층과 경제적으로 종속된 수많은 사람들로 나뉜다

이 새로운 정보의 군주들은 강력한 친구나 우군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에 곧 지금까지 축적해 온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각자 고향 땅의 정보기관들과 상시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현재 서구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비록 자유로운 선택이기는 했으나 동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세계 혁신가들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에서 탄생한 사고 유형의 자식들이다. 이 사고는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에서 이데올로기, 즉 요지부동의 일반적인 인간상을 품은 세계관이 되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개별 국가에서 출발하고, 그 국가들의 행동이 도미노처럼 다른 나라들로 파급될 것이다

인간 존엄에 관한 우리의 복잡한 관념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그런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합적 민주주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유용민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는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하고, 연세대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저자에 대한 이력을 찾기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많은 정보가 잡히지는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김해시 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방송토론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나, 요즘 여러 방송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준희 교수와 2019년에 '미디어오늘'에서 주최한 '포스트 진실' 시대와 관련한 토론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여러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언론에도 꾸준히 얼굴을 알리고 있는 듯 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미디어학을 전공한 학자가 누구보다도 방송에 참여해, 우리의 언론 지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그의 이러한 활동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의 이 책은, 2015년 5월에 분량이 적은 소책자 형태로 출간되었고, 전문적인 전공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일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정립 시키는데 어느 정도 유익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이 책의 구성과 말하고자 하는 점을 요약해 보자면,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대안 모델로 주목 받고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 agonistic democracy'를 기반으로 그동안의 무페의 논저들을 살펴보고, 이 경합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개선점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페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연한 주장은 경합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여기서는 유용민 교수의 경합적 민주주의를 대표적 주제어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더불어, 저자의 이 글은 샹탈 무페의 최근 번역된 '경합들'의 해설서로 읽혀질 수도 있고 그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생각을 담은 다른 논저들의 개론적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보이는 논증이 전반적으로 첨예하게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개념을 숙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만큼 저자의 이 글이 비교적 실용적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꽤 오랫동안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적 원칙이 정치 전반에 있어서 무력한 상황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개념도 무엇보다 다원주의적 원칙이 우선적으로 기반 되어야 했는데요. 카를 슈미트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자유 민주주의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치부 되고, 물론 이러한 인식적 결과의 총체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나치가 사회를 인종적으로 '균일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전체주의에 이르는 길'을 정치의 개선의 어떤 방향으로 생각했던 슈미트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슈미트의 이런 인식을 마크 릴라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저 자신의 '드러낼 수 없는 과거 이력'을 학문적으로 모호하게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슈미트가 내 편과 남의 편으로 규정하는 정치에서의 대결 구도가 과연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를 전반을 이런 식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이미 이 글 4장에서는 우리 정치의 모든 문제 혹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 바로 "정치의 형식과 내용이 불일치하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데요. 이것은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소위 정치적 효능감' 제대로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이고,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 전반이 정치가들과 정치 환경에서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정치 무대에 올리는 시민들의 책임도 전혀 없을 수 없다는 식의 논리적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주장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다수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표리부동'한 태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평가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에 '겸허한 도덕적 중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엘리트 계층조차도 그 지위에 걸맞는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 치중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더 이상 겸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다니엘 코엔이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시민이 '새로운 공공선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과 유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합리적인 개인'과 반대로 민주주의가 너무나 혼란스런 상황을 잉태하기 때문에 과연 시민들에게 정치가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진 바가 있습니다. 무페 역시, 신자유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도 개인의 합리성을 너무 과신한 바가 있다고 못 박고 있는데요. 그녀가 주장하는 경합적 민주주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 전반을 토론과 합의로 이끄는 힘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적 기반이 우선 되어야 하는 증거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다른 분들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를 놓고 다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무페의 평가대로 이 자유주의적 기반이 우선시 되는 정치적 환경에서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초래된 점은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글쎄요. 이를 그저 혼란스런 민주주의의가 잉태한 정치적 후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의 모습인데요. 이들 반동 세력들이 그저 도식적으로 민주주의의 환경에서 일어난 점을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몰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무페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공화주의적 가치'가 재정립 되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우리가 너무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그동안의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회의론에 내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개념처럼 아직은 이 세계에 무엇보다 진정한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그룹들을 건전한 개방성으로 이끌 수 있는 정치는 민주주의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의 이 핵심 제안이 큰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여기에서 인용된 클로드 르포르의 단정대로, 민주적 사회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역사 속으로 밀어낼 수 없는 것인데요. 이 지점에서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점은 만약 우리에게서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그저 '과두제'이거나 아니면 히틀러의 재림을 한 번 더 눈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카를 슈미트가 자유주의적 정치를 나약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저 강력한 힘에 의한 주도적인 사회 통합을 진실로 자신의 이상으로 그려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편적인 '시민권의 붕괴'를 예상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의 대두에 따른 극단주의를 그가 살아 있다면 나약한 모든 것들의 실로 살아있는 대안으로 취급했을까 어느 정도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제가 마크 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슈미트에 대한 다수의 해석과 비평에 의구심을 갖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슈미트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민들에 의한 '반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아닌가 지레짐작을 하게 됩니다. 사실 무페가 정립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건들이 꽤 이상주의적으로 여겨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극심한 이유이기도 하고 정치가 신자유주의에 점령 당한 것은 물론 이제는 거의 '쇼비즈니스'와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티비에서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정치 논쟁이 나중에는 양 진영 간의 인신공격으로 귀결된 것은 그만큼 저 '직업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가 아닌 진실로 건전한 토론이 가능하게 되는 환경을 우리가 목도 하게 될 것인지는 거의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겠죠. 더욱이 오늘날처럼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가 없었다고 본다면, 이런 아이러니는 더욱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위르겐 하버마스는 적대하는 두 정치가 진정으로 화해를 해야만 정치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헤겔이 진정으로 원한 역사적 사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마무리 되는 이 시점에 있어 무페의 정치적 대안이 그저 철지난 이상주의로 매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치에서까지 합리적 이성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치가 쓸모없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분노와 경멸 또한 이런 분위기를 부추겨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현실 정치에 내보내지 못하고, 우리가 스스로 '진실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점'도 큰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미흡한 마음으로는 진정 건전한 경합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사회에 정착하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19세기 오귀스트 콩트와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발전한 근대적 사회관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로 간주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한다

20세기 후반 많은 사람들은 자유, 인권, 평등, 평화의 시대가 번영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에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도그마적 진리와 정의로 내세우는 한편 이념적 극단성과 선명성을 추구하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 및 집단을 근본적으로 적대시하는 정치 세력, 담론들이 난무하고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과도하게 기대하고 민주주의를 절차주의적으로 한정해 버림으로써 정치를 초정치적인 중립지대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실제 현대인들의 정체성은 개인이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성 등 다양한 영역과 조건들에 다층적으로 처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연관을 통해 구성되어 가는 것이지, 어느 한 요소로 채워지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내적 모순을 지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근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자유주의 정치 이론은 정치적 주체들을 합리적, 이성적,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슈미트는 적대하는 집단들의 투쟁으로 야기되는 사회 혼란이 의회나 선거등 대의적 의사 결정 장치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인식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열망을 품는 신념 체계에 이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논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세계에 늘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무페의 자유주의 비판은 극우파의 부활, 극단주의의 범람, 민족주의 부흥 등이 가져올 위기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