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선택 - 지배인가 리더십인가
Z.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역주 / 황금가지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좌관을 지낸 인물입니다. 국제문제에 있어 미국 내의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유럽간의 비정부기구로 알려져 있는 삼극위원회 Trilateral Commission 의 주요 참여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브레진스키의 대해 알려져 있는 그의 정치적 견해는 진보적, 국제적 및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주요 요직을 아우른 네오콘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국제 관계에 있어 큰 그림을 그리는데 능숙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중동과 이스라엘간의 정치적 갈등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그가 지난날의 발언들로 인해 다소 친이스라엘적인 인물로도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미국에 의한 중동 개입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비판적 의견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약간 놀랍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책이 출판된 해를 감안한다면 현재의 국제 환경과 상당히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미국의 패권과 그러한 과정에 미국이 중요하게 판단해야 될 가치들을 꼬집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크게 일독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그는 지난 2017년 5월 26일에 버지니아에서 89세의 나이로 타계합니다. 이 책은 원제, "The Choice : Domination of Leadership"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의 번역 출판도 2004년에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브레진스키에게 냉전 이후의 전세계 국제 환경의 변화라는 주제는 아마도 그에게 어떤 중요한 학문적 단초를 제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패권이 과거의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대국을 대상으로 서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생존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 시기 이후부터는 후쿠시마가 선언한대로 미국에게는 완전히 다른 환경의 조건과 더불어 어쩌면 미국의 패권이 온전히 미치는 세상이 될 가능성도 거의 배제할 수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2001년 9. 11과 그로 인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퇴색되었습니다. 브레진스키가 강조하고 있듯이, 세계를 선과 악으로만 보는 조지 W. 부시의 가장 큰 실책은 실제로 세계의 본질은 '온통 회색지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언급한 이 회색지대라는 수식이 뭔가 국제적 현실주의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인식적 배경으로도 읽혀졌는데요. 미국 내의 다수의 리버럴적인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이 회색지대가 결코 잘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따라서 브레진스키의 이 글은 앞선 중요한 관점으로 당시(2000년대 이후) 미국 패권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중요한 방향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요.

아마도 중동과 러시아 및 중국에 이르러 별로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는 미국의 전세계에 대한 리더십의 조건은 아무래도 다소 논란을 함의하고 있는 글 3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미국의 리더십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전지구적이고 포괄적인 이익을 반영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비슷한 대중적 신념과 사회적 가치를 지닌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인용된 문장의 후자에 대한 부분은 아마도 중동 전체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서 서유럽과 미국이 보이는 극명한 정치적 인식 차이일 겁니다. 서유럽은 팔레스타인의 문제가 이스라엘의 강고한 군사적 무단 점검이 원인이라고 보고 있지만 미국은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에게 이 이스라엘의 존재가 이 지역의 전제적인 중동 정권들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억측일 수도 있지만 "1974년부터 이스라엘에 800억 달러의 원조를 지원"한 것은 여느 미국의 동맹국과는 사뭇 다른 대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약간 불행하게도 브레진스키는 미국에게 있어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논하면서 미국에 있는 거대한 유대인 조직의 존재와 그들에 의한 미국 정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는데요. 이건 아주 단적으로 말하면 유대인 단체인 AIPAC의 광범위한 현금 로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티븐 M. 월트와 존 미어샤이머는 공저를 통해 이를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요. 과거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도륙된 600만의 유대인들의 존재는 매우 불행한 역사이나, 현재 이스라엘 주변의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영국과 미국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예루살렘 인근에 박힌 이 국가의 존재는 지역 안보 불안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자 지구의 불법 점거라든지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고압적 태도는 이러한 맥락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물론 하마스와 같은 자들을 잊고 잇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북아일랜드에서 IRA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테러에 맞대응을 하던 영국이 이후 관점의 전환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이스라엘도 종래의 경직된 대처에서 지역 평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나서야 하겠으나 이스라엘의 국내 정치가 복잡한 모양새도 해결의 접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종래에 조지프 나이가 인정했듯이, 중동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접근법이 주로 사우디 정권과 같은 부패한 전제적 정부를 지지하며, 지역 내에 현상 유지를 강조한 쪽으로 나선 것은 대다수의 착취 상태에 놓여 있는 해당 국가의 국민들에게 도저히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서유럽과 미국 심지어 동아시아의 에너지 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동 산유국들의 정치적인 미국 의존성이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안정적인 원유 생산은 자유 진영의 경제적 번영에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사항으로, 어떻게 보면 미국 국무부가 이들 지역의 이슬람교의 종파적 문제와 정교일치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분이 2003년의 패착에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지금도 중동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지속적인 현상유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에 대한 해당 지역 국민들의 반감은 극을 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맥락에서 테러리즘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결론에 가까운 관점에서 브레진스키가 색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실질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식은 그야말로 무신론적인 사회를 의미한다"는 분석이었습니다.이 지역은 터키를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이슬람 율법이 뿌리 깊게 작용하는 사회입니다. 브레진스키의 말마따나 율법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려고 하는 이란을 제외한다면 강고한 정교일치의 사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서 유일하게 핵무장을 하고 있는 파키스탄이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발화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섬뜩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다만, 내부의 이슬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이 자신들의 제1 우호국이라고 할 수 있는 파키스탄의 교조주의적 근본주의화에 손 놓고 구경만 할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중국 당국은 북한의 핵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핵무기도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문제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크게 간과하고 있듯이, 핵전쟁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은 가까운 미래의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재래식 교전이 될 것입니다. 브레진스키도 이를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심히 보게 될 수밖에 없었던 3장, '동맹 관리의 딜레마'는 분명 비판할 부분이 있었는데요. 세계 제1의 패권국이 국력과 그 영향력에서 비대칭적인 관계로 유지되고 있는 '비대칭 동맹'에 있어 미국의 우선주의와 이들 동맹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국 내 극우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이러한 경향이 더욱 고조되었죠. 물론 안 좋은쪽으로 말입니다. 다만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미국이 위협당한다면 해외의 민주주의는 더 취약해질 것이다"라는 브레진스키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미국의 여러 동맹들의 정치적 상황과 지역별로 이들과 미국 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 시사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중국의 대두에 맞서 일본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점이 전반적인 논증에서 읽힙니다. 중국은 일본의 재무장 자체를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본이 800 톤이나 되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중국의 봉쇄와 그 일면에 부정적으로 잔존하는 미국의 '애매한 핵우산 정책'에 실망하게 된 일본 정부가 언제든지 핵무장에 나설 수 있는 '현실적 증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통일된 한국이 핵무기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더불어 일본의 핵무장 역시 관련 전문가들과 기술이 충분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5~6개월 내에 일본이 충분하게 핵무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해당 지역의 미국의 정책 변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가늠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이 곳의 군을 즉시 철수하게 되면 19세기의 유럽 상황과 비슷해질 것이라고 보는 브레진스키의 예측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다만, 우리와 관련된 정치적 분석에 있어, 기존의 저팬 핸들러들과 아주 동일하게 판에 박힌 인식은 절로 눈살을 찌푸려지기도 했는데요.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는데요. 한국의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친미적이면서 그 이면에는 반일이 기반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대화 된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민족주의를 취급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제가 이 지점에서 반일이 터무니 없다고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반일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되었는지 저자가 일말의 고찰을 해보긴 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선 중일관계에 있어 난징학살과 같은 극악한 전쟁 범죄를 일으켜 놓고도 중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사과만 요구한다는 식으로 읽히기도 해서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역으로 만약 2차 대전 당시에 멕시코가 미국을 강제 점유해, 몇 십 년 간 인력과 자원을 빨아내면서 심지어 역사와 문화조차도 말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멕시코 당국이 움직였다면 지금의 미국인들이 과연 멕시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실로 궁금합니다.  

끝으로 4장의 '세계화의 딜레마'에서 논증되는 브레진스키의 의견은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세계화가 힘 있고 특권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은 반대의 근거를 위해 각계 각층에서 항변을 하겠지만 이 점은 달리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가 당면한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고착화의 문제를 넘어 수십 년간 정치에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5장에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봉착할 도 있는데요. 브레진스키는 4장에서 반세계화의 물결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식으로 방어 논리를 구축합니다. 분명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이 세계화의 이익이 서구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동맹국들에게 집중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지금의 중국의 번영은 신자유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끔 중국을 키워낸 결과로, 이 중국의 사례는 매우 드문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반세계화 물결과 반미주의를 도식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종래의 여러 시각과 다름 없는 것이어서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앞선 중동의 사례처럼 브레진스키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미국에 있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포함해 분명히 전세계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장 말미에 논의가 되는 '민주주의의 확대와 도덕적 근간의 외침'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에는 '자유 무역'과 '자본의 이동성'을 언급하며, 이것들이 그저 지도적 원리로 남겠지만 "개별적인 정치, 경제, 사회, 제도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나라에 그 원리들을 무차별적으로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꽤 감명 깊었습니다. 그리고 세계화가 "인간 조건의 향상을 위한 좋은 기회로 다루어야 한다"고 언급한 부분은 이러한 논증의 전개가 실로 진정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이러한 브레진스키의 후반부 논의들은 특히 미국 내의 극단주의자들이 귀를 열고 경청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또한, 세계가 그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이민과 같은 변화에 있어 각자가 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다원주의적 원칙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과 세계화에 있어 서유럽과 미국의 경험을 그렇지 못한 국가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 보는 관점도 적극 동의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매혹적인 성공이 세계화를 통해 확장되면 미국의 힘이 지닌 효율성과 정당성이 강화될 것이다"는 문법 또한 꽤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논저에 일개 독서인이 감동 운운을 언급해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글의 마지막 부분인 5장과 결론은 미국과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에 있어 꽤 훌륭한 접근과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기존의 조지프 나이의 방안들보다 좀 더 발전된 논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45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브레진스키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서유럽의 나토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일차적으로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당위로 이차적으로는 소련의 봉쇄를 위한 정치외교적 해법으로 동시에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두 지역에서의 동맹 관계의 시작은 현재의 민주주의 진영의 번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안타깝게도 냉전 이후, 나토의 확장에 있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용인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브레진스키의 예측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주장을 예시로 들어, 그 당시의 나토 확장은 낙후된 중부 유럽 국가들을 살리고 그와 동시에 시대의 소명으로까지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불행한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또래 강국의 견제를 받지 않는 정치적 힘을 소유한다는 이유로 미국은 부러움, 분노, 때로는 강렬한 증오의 초점이 된다

국무부를 통해 다른 국가들의 행동을 인준하고자 하는 미국 의회의 경향을 보면 자국의 주권에는 방어적이고 민감하면서도 다른 국가의 주권은 점차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16장에 묘사된 아마겟돈은 핵과 세균에 의한 전 지구적 자멸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안보를 위한 국가의 정당한 노력이 망상증인지 신중함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미국 의회가 유럽, 극동, 페르시아 만이라는 3대 주둔 지역에서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결정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러시아와 안정적인 상호 핵 억지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 정책 결정자들의 주요한 안보 책임으로 남을 것이다

소위 ‘불량 국가‘들도 자신을 드러낸 채 미국을 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며 미사일 발사의 경우가 분명히 그렇다. 미사일 공격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무서운 보복을 초래할 것이며, 이러한 보복으로 미국에 대한 어떠한 2차 공격도 불가능할 것이다

의회가 북대서양 조약을 승인함으로써 미국 국가 앙ㄴ보의 의미와 범위는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었다

특히 국가 간의 문제에서 증오와 편견은 동정심과 친화성보다 훨씬 더 강한 감정들이다

세계를 흑백으로 보는 시각은 대부분 회색 지대로 이루어진 전 지구적 딜레마를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의 위험한 핵 추구와 이를 확산시키려는 시도는 동북아시아의 지역적 맥락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이익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고려해야만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국내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고 싶다면 국외에서도 생명과 자유의 우월함이 지닌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 서구 민주주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볼 때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대다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연방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이 미국에 계속적으로 의존하는 안보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임재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영속화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모스크바의 노력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대신 이란의 엘리트들은 서유럽이 이란에게 지역적으로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며 조국이 성공적인 근대화와 민주화의 경로를 밟을 수 있다고 인식한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인 이유는 미국을 인권의 증진에 헌신해 온 진정한 민주 국가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 방식을 지닌 유럽인들은(사담 후세인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독단적인 결정을 두고 수면 위로 떠오른 논쟁에도 불구하고)미국의 일방주의가 미국의 독특한 안보 역할의 한 부분이며, 경제적, 법적, 도덕적, 안보적 동기를 쉽게 구획지을 수 없는 세계에서 ‘할 수 있다(can-do)‘는 미국의 자세를 보존하려면 썩 내키지 않더라도 인내하는 것이 나머지 세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임을 깊이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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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다음 세상을 위한 텐 레슨 - 개인의 운명과 세상의 방향을 결정지을 10가지 제언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권기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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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의 샤이크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파리드 자카리아는 미국의 소위 주류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일단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좌파나 혹은 정치적 중간 계층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학사를,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이후 그가 28세이던 1992년에 '포린 어페어스' 편집장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겸임 교수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는 뉴스 위크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게 되는데요. 현재는 CNN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중인데, 파리드 자카리아 GPS가 그것입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에 매주 유료 칼럼을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대부분의 경력이 언론과 싱크탱크에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스스로 이런 평론가로서의 삶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돈이나 명예 때문에 움직이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자카리아는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당시 백악관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가 있고 그럼으로 스스로를 '중도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만큼 거의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원제, "Ten Lesson For A Post-Pandemic World"로 지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자카리아의 이 책은 전세계의 펜데믹 사태 이후, 과연 세계가 어떠한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통찰을 담은 일종의 광범위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그의 분석에 따른 현재의 정치경제학적인 비평과 앞으로의 예측을 담은 논증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진술되는 자카리아의 글 자체는 일정 부분 예측의 한계와 근거의 결핍이 적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것이 리버럴적인 중도 좌파의 애매한 정치적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논점 마다 비판의 강도가 다소 약한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단 현재의 미국과 그 주변부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분석으로 시작되는 1장부터 4장은 펜데믹 사태로 여실히 드러난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것의 비판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 도널드 트럼프의 대두 그리고 노골적인 반지성주의 흐름을 꽤 일목요연하게 다루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 포퓰리스트는 기존의 체제 즉, 전문가 정치와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뒤엎기 위해 나섰지만 그는 어떠한 실질적 대안 없이 그저 자신의 인기와 정치적 경력을 위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일종의 왜곡된 수사로 점철된 그를 가리키고 있지만,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는 부패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깨끗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는 발언으로 큰 표를 얻어냈고, 결국은 이러한 미국 시민들의 표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자카리아도 거듭 인정하고 있듯이, 펜데믹 초기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물론 초기라 데이터가 전무하기는 했지만) 마스크 착용 문제부터 엇박자를 놓기 시작했던 당시 워싱턴의 행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요. 기존 체제를 불신하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미명하에 정권을 잡았던, 트럼프 집권기의 정치가 그런 실질적인 개혁에 나섰는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 큰 문제는 자카리아가 얼마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을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인데요. 하지만 우익 포퓰리즘의 해악성은 제가 보기에는 한 줌도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는 거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이 이민자 배척, 인종주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혐오는 미국 사회에 그나마 있었던 정치적 건전성을 전부 일소하는데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평론가라면 이러한 파국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의 차이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카리아 역시 스티브 배넌의 예를 들어, 우익 포퓰리즘 정치가 기존의 정치 체제를 아무런 대안 없이 구축의 대상으로 삼았고, 펜데믹 사태의 원인에 대해 숱하게 가짜 뉴스와 음모론으로 도배 되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익 포퓰리즘과 뒤에서 다루게 될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 4장은 조너선 하이트를 위시한 '동기를 지닌 추론 motivated reasoning'의 문제와 더 나아가 진실과 사실에 눈을 감고 오로지 '당파적 사고'에 물든 많은 유권자들의 행태를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앞선 장에서 인용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토크라시'가 이와 같은 맥락일겁니다. 이는 상대방의 정치적 발언이나 주장들을 백안시하면서 반대로 오로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세력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강고한 외눈박이 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머스가 강조한 '공론장의 정치'가 미국에서 가히 유명무실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무 평론가들이 레딧 redit의 사례를 들며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여기는 듯 하지만 현실은 안타까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언론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이런 유권자들의 한계를 다루는 것이 아마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히나 극우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 전반에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전문가들의 조언이나 분석을 귀담아 듣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들의 '개인적 자유'를 우월적 가치로 놓으면서 말이죠. 저 역시 이러한 계층의 지성과 다소 저학력의 상황을 끄집어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자카리아의 인용대로 지난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첨예한 정치 갈등에 있어서도 많은 저학력자들이 브렉시트를 찬성했다는 증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을 비롯한 제도권 교육의 마지막을 개인이 완벽히 수료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과 돈이 투입되어야만 합니다. 결국 미국 사회의 이러한 학력의 구분선에 따른 다소 노골적인 계급정치를 물론 완벽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전문가들의 정치와 그들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정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권의 주장들을 귀담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비판적 태도가 뒷받침되어 진실이 아닌 주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왜곡하는 주장들을 마땅히 걸러낼 수 있어야만 하지만 이것은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의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자카리아의 논증은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조선 초기 황희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데요. 비판적 논증으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든 그의 펜 끝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문제와 극단주의적 정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러한 인상을 받게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에게 라구람 라잔과 비교하여 그에게 어느 정도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기대한 부분이 조금 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글 3장에서, 시장이 정치를 인수한 것과 마찬가지인 작금의 시장 실패와 관련해 펜데믹 상황에서 시장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인정한 점은 그래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이 기존의 시장 자유와 맞물려, 펜데믹 초기 대응에 있어 미국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조치'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몰아가 결국은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자카리아는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초기 대응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이나 싱가포르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위치 정보와 같은 사생활을 얼토당토하지 않게 자발적으로 국가에 헌납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대면 체계와 같은 전통적인 동선 추적과 적극적인 관리로 초기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는 그의 관점이 실로 옳은 것이죠. 사실 개인 자유에 대한 강고한 믿음 만큼이나 미국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과신하고 있는 시장 자유에 따른 자본주의적 믿음은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위기 상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꽤 요지부동이었습니다. 2008년의 위기 때나 최근의 보건 위기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자카리아가 지적하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시장 자유라는 만능주의는 분명 개선할 필요가 있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작은 정부 역시 생각을 이 시점에서는 달리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6장과 7장 가운데, 앞의 6장의 논증 역시 대체로 평이한 논조로 어느 정도 수긍이 될 만하지만,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7장,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터'는 글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최근의 펜데믹 사태가 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규명하기 보다는 이미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화 이후, 방만한 금융 자본주의에 고삐를 채울 수 없게 되면서 사회경제적 상황은 날로 심각해져 온 점이 좀 더 명확한 사실일겁니다. 단순히 현 사태에 대한 '봉쇄와 개방이라는 대립의 관점'으로는 최근의 우려와 현실의 한계를 전부 해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미국 의료계가 직면하게 된 원격 의료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원격 의료의 수가가 대면에서 이뤄지는 의료 수가보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이미 미국 의료계가 완벽한 민영화 상태에 있기에 이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는 어렵기에, 현재 미국 사회에서 이 '시민들에 대한 실질적 보건 의료 혜택'은 앞으로 갈길이 멀다고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카리아는 이에 단순히 미국의 의료 복지 체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펜데믹은 그저 물 밑에 있던 현실을 물 밖으로 끄집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인식하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현란한 자본주의가 이룩한 미국 내의 계급 고착화는 흑인과 유색인종들이 보다 제한된 의료 접근에 따라 스스로의 생존에 이르는 길이 더욱 어렵게 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갈길이 아직도 멀었다는 뼈아픈 증거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카리아는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행태와 그로인한 도덕의 쇠퇴에 대해 그러한 관점에서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펜데믹 상황에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차이가 모든 시민들에게 마땅히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이러한 문제가 언론이나 혹은 세계에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세계화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어야 하고 이러한 자유 질서 체제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상의 그의 제언이 뭔가 힘이 없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내실을 튼튼하게 만들자는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하거나 여러 제안들을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앵무새처럼 법전을 읊는 것처럼 아직도 세계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실로 누구나 할 수 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발언들이 기존의 주장들과 큰 차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파는 자유 시장주의를 고집스럽게 주장해 왔다"는 2장의 한 문장과 더불어 "현재의 미국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그것이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자카리아의 문법이 크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미국의 문제와 세계의 불협화음은 결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심한 불평등 문제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입으로 충분히 감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축복으로 강조한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정치권의 의지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문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미국과 같은 경우는 거의 국체(國體)와도 같은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마도 기존의 기득권 체제 뿐만 아니라 시민들 일각의 저항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의 우리나라의 경제적 번영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일조한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이러한 세계 체제를 백안시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자카리아 역시 분명 이 점을 인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 좌파가 더욱 한계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대다수 리버럴 정치에 대한 비판이 이렇듯 명료하지 않은 정치적 의견에 있는 점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2008년에 오바마 행정부가 월스트리트에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한 이래로 그 이전의 신자유주의는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펜데믹 상황에서 이처럼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자카리아가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입니다.


-8장 이후의 자라키라의 논증이 다소 산만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세계화에 따른 자유주의의 질서가 무조건적으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펜데믹 상황에서 국가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격차가 여실히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재 미국 내부에서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에 대한 강고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미국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꽤나 고민이 됩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가지 단초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과거 많은 백인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됨으로써, 현재 미국에는 흑백갈등이 실제로는 심각하지 않다는 식의 이상한 관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가 극단주의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자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오히려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파 쪽으로 움직였다. 경제적 불안은 문화적 불안을 낳았고, 이민자들을 향한 적대감과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우익의 포퓰리즘이 서구 전역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미국을 정의하는 것이 "민간 부문의 풍요로움과 공공 부문의 누추함"이라고 썼는데, 이는 미국의 균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였다

이 같은 정부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 다른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번 펜데믹에 대처했다

그 실패가 세계 최강국의 좀 더 폭넓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렇다, 확실히 그것은 미국이 지닌 특정한 취약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국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국내 기관들을 수척하게 만들었고, 이제 보리스 존슨 총리에 이르러서는 전문가를 깔보고 관료들을 극심한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포퓰리스트 리더의 지배를 받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상대 정파의 정책이나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정치 행태를 "비토크라시 vetocracy"라고 불렀는데, 미국이 바로 이런 비토크라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국가주의 반대를 신봉하는 나라다. 우파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줄임으로써 국가주의에 덤벼든다

"특히 공중 보건 서비스와 인프라스트럭처 그리고/혹은 집단 기간 시설이 형편없이 뒤떨어진 나라, 예를 들자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학중이라면"

어쩌면 시장이 정치 자체를 아예 인수해 버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일지 모른다.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은 1993년에 쓴 에세이에서 거의 모든 국가가 왜 순수히 시장 주도로 국가 조직을 만들지 않고 국가에 큼직한 역할을 맡기기로 했는지 설명했다. 사회에는 가령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투표처럼 사람들이 시장의 힘에 좌우되지 않도록 떼어 놓고 싶어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고 그는 지적했다

번영하는 나라, 민주주의적이고 안전하며 훌륭하게 통치되는 나라, 부패의 정도가 아주 낮은 상상 속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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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25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라디오님께서 권해주신, 멍크 디베이트를 활자화한 책에서 짧게 접한 분인데, 베터라이프님 덕분에 이 분의 지향(?), 활동까지 조금 더 알아갑니다. 고맙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03-25 21:14   좋아요 2 | URL
오 얄라님이 저의 서재에 왔다가셨군요 ㅜㅜ 이제서야 봤네요. 넘 늦게봐서 죄송합니다. 저 위의 부족한 서평이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있다면 (아주 많겠지만요 ㅋㅋ) 자카리아가 스스로 견고한 민주주의자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보다 민주주의의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아직은 이 세계에 희망은 있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네요. 하여튼 오랜만에 와 주신 거 감사해요 ^^ 아 그리고 멍크 디베이트 말씀하시니까 알겠네요. 중국과 관련한 토론에 자카리아가 참여했었죠.
 
인싸를 죽여라 - 온라인 극우주의, 혐오와 조롱으로 결집하는 정치 감수성의 탄생
앤절라 네이글 지음, 김내훈 옮김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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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안젤라 네이글은 커뮤니케이션학 학자이자 논픽션 작가로 최근에 대안 우파 alt-right 및 인셀 incel 연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그녀는 친 샌더스적인 좌파로서 기존 우파와 리버럴의 다소 안일하고 타협적이었던 문화정치에 상당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리처드 스펜서가 주도한 대안우파에 대한 해박한 분석과 따른 비판에 있는데요. 뒤에 계속 논증하겠지만 이 대안우파가 인종차별주의 및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남녀간 가부장적 갈등을 넘어 반페미니즘과 사실상 여성의 지위를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돌리려고 하는 반지성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최근 5~6년간 이들의 대두는 극우 포퓰리즘과 다름없이 이러한 '분노의 정치'를 확대하여 도널드 트럼프를 주류 정치에 등장시키는 혁혁한 공(?)을 쌓았습니다. 네이글의 이 책은 온라인 상에서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결코 관심을 두지 말아야할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이슬람 혐오을 포함한 이민자 배척, 여성 혐오, 반페미니즘 운동 등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온라인에서 음지가 아닌 양지로의 조직화를 이루었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Kill All Nomies"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다소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여기서 인싸는 일반적인 nomie 를 가리키는데요. nomie의 의미는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하면서 건전한 인간관계를 통해 주류 관습이라든지 문화 전반을 향유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싸를 죽이자는 대안우파들은 인터넷에서 가히 사회 전체를 향해 '트롤링'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과는 완전 다른 삶의 지향을 갖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소위 매트릭스의 상황에서 노예가 되고 있다는 식의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과장론을 바탕으로 체제 전반을 거부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싸를 죽이자는 것은 대안우파들이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켜 순수 백인 남자들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꿔야한다는 내용을 은연중에 담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네이글의 이 책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리처드 스펜서(대안우파의 소위 매파적 인물)나 트럼프주의 우파의 정치를 대변하는 '브라이트바트'에 실명으로 글을 기고 하고 있는 마일로 이아노풀로스의 사례가 대안우파의 실상을 드러낸다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들을 통칭하는 대안우파 alt-right 라는 용어조차 개인적으로는 저들의 근본적인 해악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들은 파시즘에 기반한 극우 포퓰리즘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그에 걸맞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넷상으로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대안우파는 기존의 보수 정치가 그 힘을 다했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이 보수주의의 정치적 제3지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홍보하고 있는데요. 앞서 네이글의 분석을 통해 저들의 본질을 간략하게 나마 소개했는데요. 이를 좀 더 풀어본다면 대부분의 대안우파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슬람을 비롯한 유색 인종들을 배척하는데 이릅니다. 다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깡그리 거부하며 이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에 대해 좀 더 논의를 해본다면, 원래 전통적인 보수주의는 에드먼드 버크식의 기독교 보수주의에 기반한 사회와 이를 지탱하는 건강한 가족주의가 주가 됩니다. 동시에 문란하고 방만한 문화들을 비판하고 사회의 건강한 토대를 지키려고 하는 그러한 정치적 감수성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보수주의는 시장 자유 자본주의를 맹렬히 지지하는데 이르렀고 그에 반해 도덕주의를 교묘한 언설로 피해가면서 지금 시점에서는 과거의 보수주의와 달리 극심하게 변질되었습니다. 과거 보수주의에서 도덕주의적 가치관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것이 유명무실해 진지는 꽤 오래되었죠. 그래서 현재의 보수는 본질적으로 엘리트 기득권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루는 형태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일전에 노엄 촘스키는 현재 미국에 "진정한 보수는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그의 말은 이를 명확히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진술한대로 기존의 정치로서의 보수는 노골적인 자기 이익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표면적에 불과할지라도 PC, 즉 정치적 올바름을 대놓고 적대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서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올바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지금의 자본주의적 보수주의에서도 여러 진지한 의견이 나올 정도인데요. 그렇다고 보수 정치가 이 PC를 노골적으로 폄훼하거나 백안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대안 우파들은 이 PC를 극도로 혐오하는 중이죠. 아마도 이들은 "밖에 나가서 여자들을 강간하고 싶다"는 말들을 표현의 자유 안에 들어간다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는 6장, "페미니즘이 세상을 망친다"에서 남성 정치와 관련한 대안 우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폴 엘람이 사회적으로 명백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강간'에 대한 발언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 다소 요약해보자면, '당할 여자가 당한 것'이라는 그의 논법이 정상인의 범주에서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강간 당할 여자, 혹은 강간 문화와 같은 논법들이 남자의 권익 확대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하위 문화 내지, 지향들이 반문화적이자 반사회적인 행태와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PC의 정치적 의미와 과도한 존재론에 대해 물론 이견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강간하고 싶다는 저러한 범죄적 발언이 화자들 자체가 극도의 남성우월론에 젖은 채로 폭력적으로 발현되고, 심지어 여자들이 남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원인으로 강간의 당위성을 찾는 저들의 발언을 과연 기존의 우리 사회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오히려 여러분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안우파의 정치적 본질과 관련해, 글 4장 말미에서는, "대안우파는 무언가를 하겠다는 약속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부숴버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더 많다."는 저자의 규명은 저들이 자신의 입으로 정치적 대안을 외치며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알맹이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일겁니다. 거의 파시즘과 다름 없는 엄청난 주장들을 노골적으로 외치면서도 근간에는 일반 남성들의 분노를 양분 삼아 결국 기존 정치 무대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등장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즉, 여러 언론이나 심지어 학계에서 저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만약 미국 정치에서 대놓고 저들을 포용할 수 있다면 저들의 본질은 극우 파시스트와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스티브 배넌의 사례는 실질적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디 우리는 지난 양차대전의 잿더미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어렵사리 지켜낸 바가 있습니다. 계몽주의를 그저 철지난 관념으로 몰아 부치고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정신을 차려야한다" "너희들은 좌파의 음모에 빠져있다",혹은 "페미니즘이 너희들의 권리를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라고 증오의 문법을 아무런 이성의 작용 없이, 기존의 정치 무대에 소리 높여 표출하는 것이 과연 이 사회에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저는 이쯤에서 존 듀이를 인용하여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분별력이 필요할 때라고 제언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저들의 방만한 트롤링은 둘째치더라도 일반적인 여성주의 작가나 온건한 페미니즘 사상가를 온라인 상에서 공격해, 신상을 털어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는 행동이 어떻게 남성 권익을 신장시키는 방편인지, 진정으로 저들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처럼 노골적인 대안우파적 논법이나 저들의 얼토당토하지 않는 주장에 다소 생소한 독자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쉽게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텐데요. 최근 우리의 대선에서도 저런 현상을 노골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들은 트럼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포퓰리스트가 한국에서 출현하기는 정치 지형상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우리도 이미 극우와 보수의 구분자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희망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가 조만간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한데요. 펜데믹의 상황이 정치 전반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이런 인터넷 기업이 마땅히 저 밑의 음지에 있어야 할 자들을 양지로 끌어올린 매개가 된 것은 더욱 우리의 정치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순수 백인들이 주도하여 이룩한 문명의 미래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식의 대안우파들의 가증스런 논법은 파시즘과 아주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들을 정당한 정치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인셀들이 평범한 여성들에게 극도의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는 것도 대안우파의 하위 문화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안우파라는 용어는 로마제국을 참고해 미국 백인 민족국가와 범국가적 백인 제국의 건설을 주장하는 리처드 스펜서 같은 인물이 대표하는 노골적인 백인분리주의와 백인 민족주의 운동 및 온라인 하위문화의 새로운 물결만을 가리킨다

대안우파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득권 우파 보수주의자들을 대체하는 대안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서구 남성성의 쇠퇴를 우려하며 몇몇은 ‘자신의길을가는남자들 Men Going Their Own Way, MGTOW‘와 같은 남성분리주의를 옹호하는 한편, 어떤 이들은 보다 공격적인 사회다원주의적 관점으로 픽업 아티스트의 기예로서의 ‘여자사냥‘을 권장한다

이러한 반페미니스트 진영을 주 이용자로 삼는 게임들은 대체로 전쟁과 폭력, 테크놀로지를 미화했다

이들은 또한 자유지상주의와 권위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극단주의를 지양하고 사회질서와 공공선을 중심으로 하는 버크주의의 점잖은 품격과는 거리를 두고 대처주의의 가혹함을 추구하며 극우 사상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레이건과 대처 집권기에 봤던 것처럼 노동조합을 궤멸할 수만 있다면 안정된 공동체나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는 정책일지라도 언제나 환영이었다

오늘날 대안우파의 서구 문명 쇠락에 대한 집착은 유구한 보수주의 사상에 기원하는데, 이들이 주로 참고하는 문헌은 로마제국 몰락의 원인을 성적 퇴폐에서 찾는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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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그 너머 - 우리의 정치 미래를 상상하다
지지 파파차리시 지음, 이상원 옮김 / 뜰book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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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파파차리시는 그리스 테살로니카 출신으로 미국 메사추세츠 사우스 해들리에 위치한 사립 인문대학인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대학에서 석사를 마지막으로 공립 연구 대학인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뉴미디어와 정치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의 디지털 미디어와 그에 따른 정치 변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흔히 기술 발전에 따른 민주주의 변화 가능성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마누엘 카스텔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시대에서의 시민 연대와 반대로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촉발된 사회 운동에 대해 명확한 한계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도 한데요. 아마도 이는 시민들의 정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시민들 스스로의 정서적 관계와 공감대가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일전에 한나 아렌트가 "틈새 연대"의 중요성을 중요시했던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겨집니다. 바로 여기의 이 글도 그녀의 앞선 연구와 맞닿아 있는 논저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After Democracy : Imagining Our Poltitical Future"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2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마도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일반적인 학자라면 특히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할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글은 일반적인 학문적 논저와는 약간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체류했던 적지 않은 국가의 시민들과 인터뷰의 형식으로 오늘날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취합하고 정리한 일종의 '르포르타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이미 시민들도 지금의 민주주의적 한계에 대해 매우 공감하고 있었으며, 특히 각국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하려는 숨겨진 시도나 그러한 의혹들에 대해서도 각국의 시민들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많은 시민들은 선출된 권력과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을 원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명확한 목적에 있어 이 글의 4장, "권력은 지닌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쉽게 그 의미가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생각됩니다.

이곳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 스스로의 고유한 해석과 여러 아이디어들이 잘 소개되어 있기도 한데요. 저는 그중에 저자가 보인 민주주의의 가장 명료한 해석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모두 평등하게 자유롭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문장이 제겐 크게 와닿았습니다. 그렇죠. 보유한 돈이나 남보다 월등한 권력으로 사람의 자유가 차등이 되어선 안될 겁니다. 일부 계층에서 주구장창 외치는 자유와 자유주의가 과연 저런 의미인지는 지금 현실에선 극히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다시 돌아와, 앞선 장(章)들에서는 비슷한 이해로 자본주의하에 민주주의가 스스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우려스러운 점이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보다 정치인들을 포함해 무려 시민들까지 평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면 갈수록 약화된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특히 평등은 경제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거부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평등을 백안시하고 부정적인 이데올로기의 덧칠을 수십 년 간 지속적으로 해온 결과, 시민 모두가 평등을 그저 사회주의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엄밀히 따져 보면 민주주의에서 자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평등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 2장에서,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순수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타협적인 형태"라는 말이 이토록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인데요. 이 부분의 논증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도 읽히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의한 정치적 균질화'가 기득권 엘리트들에 의해 진행되면서 사실상 민주주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연유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저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는 시장에 해롭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이기심을 우선할 권리가 있다" 라든지 이를 통한 시장 원리의 우월성을 공공성의 정치보다도 더 우선하기에 이른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오늘날의 '공공성의 쇠퇴'가 민주주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모국의 정치 상황과는 관계없이 모두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자와 인터뷰에 응한 중국인조차도 말입니다. 앞선 부분과 관계있는 비판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들이 다양하지 않다는 점과 더불어 글 3장에서도, "우리의 선택 능력은 점점 더 제한받고 있다"고 여실히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좀 더 충실하고 윤택하게 영위하여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아레테 arete, 즉 행복하고 덕 있는 삶의 이상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개인이라면 누구가 원하는 마땅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흡사 존 듀이의 여러 주장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 시대의 일부 계층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계몽주의와 공화주의적 관념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에는 각 시민들의 "발언권과 평등"이 반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기득권과 정치경제 엘리트들에 의해, 소위 조정되고 적절하게 제한되어 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기득권들이 입으로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그런 측면에서 아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쩌면 저 정치 엘리트들이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면에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작금의 사회 체계가 급격한 변화를 추인하지 않아야만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왜곡된 보수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절히 제동을 가하는 것이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유로 현재 모국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일침한 한 미국인은 이미 국내 정치가 수많은 로비스트들과 기업에 의해 반세기 이상 유린되어 있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여러 국가들의 민주주의에 비교당하는 상황이라고 한탄합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이행, 그리고 그로 인한 무분별한 시장 자유에 대한 함의가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와 건전하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2008년의 월스트리트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의 투하는 정말 일반적인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대마불사 too big to fail 의 논리, 어떻게 이런 것이 민주주의적 가치와 맞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한 5장 말미의 10가지 제안은 시민 모두가 어느 정도 새겨들을 만하다 생각되는데요. 물론 이러한 결론은 저자 나름의 정치적 숙고의 결과물일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여기 인터뷰들의 훌륭한 의견들로 탄생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치적 실효성과 언론의 정상화 그리고 시민들의 지속적 정치적 관심 등은 민주주의에서 선언적인 주장들로 끝나서는 안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존 듀이가 강조한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시민이 마땅히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부분인데, 오랜 시간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이러한 정치적 역할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들을 주입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질베르 리스트가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 비판한 부분이 이러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여기에 슘페터의 논증을 더한다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점적 이익을 더욱 갈구하는 기업들의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좋지 않은 결과는 민주주의 체제에 해가 될 수 있다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합니다. 즉, 현재 우리의 정치 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결과물들이 전세계적으로 '무늬만 흉내내는 민주주의'의 일종의 단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과잉된 민주주의'를 지금도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현실인데, 실상은 이들의 주장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겠죠.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인터넷 환경에서의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포퓰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왜곡된 것은 여기에 이익만 얻으려는 인터넷 기업의 행태와 맞물려, 많은 시민들에게 전혀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에 놓여 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여기에 많이 인용되는 여러 논저들과 사상가들 중에 특히, 한나 아렌트와 샹탈 무페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은 하루 빨리 재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역시 그전부터 너무나 애타게 재간행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이러한 희망을 악용한다. 포퓰리즘은 공허한 약속을 한다. 그리하여 희망과 순환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증오발언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이지 인터넷이 아니다. 그럼에도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증오 행동을 눈에 더 잘 띄게 하고 그에 따라 더 쉽게 전파되도록 만든다

민주주의의 현재 상태가 많은 부분에서 내 연구의 동력이 되었다. 정치 이론가 샹탈 무페가 언급했듯이, 민주주의의 역설은 대중 사회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선거는 해킹당하고, 포퓰리즘은 디지털로 확산되고, 증오발언이 온라인에 횡행하고, 온란인에서 활성화 된 운동이 오프라인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인터넷은 우리를 하나로 묶지만 동시에 서로 멀리 떨어뜨린다고 말이다

장 자크 루소는 무관심한 시민이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위협한다고 불평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평등과 자유를 한꺼번에 떠올리곤 하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이 두 개념이 서로를 제약할 때가 많다는 점을 깨닫는다

게다가 풍성한 자유는 더 풍성한 다원화를 이끌지만, 반드시 더 좋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지만,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인정하거나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민주주의를 경제와 연결 짓는다

시민들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질곡 속에서 언제나 삶을 영위해 왔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주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능력은 점점 더 제한받고 있다

일반 대중의 길은 신나면서도 위험하다. 그것이 많은 이들의 소망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신나지만, 다수의 의지가 쉽게 이용당할 수 있고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망성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헤게모니는 민주주의 정권에서든 비민주주의 정권에서든 엘리트가 타인에 대해 권력을 주장하고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의 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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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X파일 - 검찰공화국을 꿈꾸는 윤석열 탐사 리포트
열린공감TV 취재팀 지음 / 열린공감TV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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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제가 540여편의 서평을 쓴 이래로, 여기 이 글은 계속 써오던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구입해, 두 번을 정독했습니다. 회사로 배송이 되자마자 단숨에 읽기 시작했는데요. 물론 대선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개표 방송을 보면서 한 번 더 읽게 되었습니다. 

글 서두에서 필자는 "기자는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자"라고 밝힙니다. 아마도 우리의 많은 기자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뭐 한번 쯤은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이 따위 책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황색 언론의 그것과 같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사건의 연도와 날짜 그리고 월 일, 더군다나 특정한 시간까지, 배경이 되는 시점이 이토록 면밀하고 상세해서 이것을 전부 거짓이라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예상으로는 검찰이 대통령 당선인을 수사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몇 건은 지금 법원에서 심리중이기도 한데 뭐 그게 뜻대로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중 저에게는 가장 충격이었던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BBK 특검이었는데요. 가슴이 먹먹한 걸 떠나서 소름끼치고 두렵더군요.

뿐만 아니라 이 글은 우리 나라 최상위 기득권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카르텔화는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한다면 거의 사법 거래에 준하는 일들을 지연과 학연을 통해 자기들끼리 끈끈하게 챙겨주는 것으로 나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검찰과 같은 권력이 어떻게 사적 권력화가 되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과 관련된 내용이 공개적으로 해명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 되겠죠.

끝으로, 이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글을 쓰기 위해 저 역시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아마도 저열한 자기 변명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대학 후배가 저와 진탕 술을 마시고 나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지요. "우리나라에서 특히 진보는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지금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발언이 진정한 양심에서 비롯되지 못하고 내면의 자기 검열을 무조건 거치게 된다. 하지만 보수는 그런 것이 일절 없다."


훗날 박현정 대표는 ‘많은 사람이 가진 위선의 민낯을 보았다. 악인도 싫지만 착한 척, 국가의 국민을 위하는 척, 예술에 몰두하는 척, 인권을 내세우며 언갖 화려한 표정과 제스처를 동원하고 뒤로는 온통 자기 욕심밖에 없는 위선자들의 모습은 정말 가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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