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위한 투쟁 / 법감정의 형성에 대하여 - 너는 투쟁을 통해 너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루돌프 폰 예링 지음, 심재우.윤재왕 옮김 / 새물결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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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모든 법학자들이 사법 私法의 정신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읽는다는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과거 하노버 왕국의 아우리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아우리히는 독일 니더작센 주州 의 동부 프리지아 지역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는 뮌헨의 유서 깊은 대학인 괴팅겐에서 공부했고,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예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로마법에 대한 상당한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마찬가지로 법역사학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예링이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를 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명저인, 이 '권리를 위한 투쟁'이 데이비드 흄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영국인들의 경험주의 철학이 그의 법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이 글 중후반이 '법률에 대한 법률의 투쟁'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서술들이 여러 곳에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일관된 그의 논증이 풍부한 수사를 통해 진술되고 있다는 점도 법에 대한 여느 논저중에서 일반인과 사법 관료 할 것 없이 '법의 진정한 가치'를 이토록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예링의 이 저서를 무엇보다 먼저 세상에 다시 내보이려고 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예링의 이 책은 원제, "Der Kampf ums Recht'로 지난 1874년에 출간되었고, 최근에 작고한 고려대 심재우 교수의 번역과 라드브루흐가 편집한 판본(1965)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국내에는 윤재왕 교수가 심재우 교수의 번역을 이어받아, 지난 2016년 10월에 다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대학에서 교양 수업을 위해, 이 예링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오래전 기억으로는 사회와 법철학과 관련된 강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제 서가 한 켠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그때 읽었던 판본은 범우사(1997) 판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책 제목을 통해 어느 정도 내용을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이에 저자인 예링은 "국가도 역시 개인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각 개인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우리의 법의 대한 건전성을 답보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대변하는 것은,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라는 신념 어린 문장입니다. 그래서 글 서두에 예링은 자신이 권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법의 본능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측면에서의 여러 법규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권리와 맞물려 해석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법이 갖는 아주 극명해 보이는 속성, 즉 시민을 법률로 통제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를 유지시키는 야경 국가라는 의미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예링이 진정으로 밝히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의 경험에만 의존해 사회를 규명하려고 했던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이력을 같은 독일의 대중 지식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도 어느 정도는 경험주의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법에 대한 태도 전반이 세대와 세대를 거친 경험주의적 측면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각인되어 왔는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 자신들을 위한 법을 그 누구보다도 친숙하고 실용적으로 대면해야 함에도 현재는 오로지 변호사들과 사법 관료들 만을 위한 '특수한 분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링은 이러한 변화를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시민이 법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두려움을 갖지 말고 "끊임없이 법률과 대화를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이는 시민이 법제도를 이루는 근간이라는 점과 모두의 소위 공익(저의 해석이기도 합니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절대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법과 사유재산에 대한 관념이 유사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연유에도 양가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기심 자체에 대한 예링의 전반적인 불신을 이 글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명예, 윤리, 도덕적 의무를 시민이 저버린다면 예링이 특별하게 인용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다음의 피 토하는 절규와 다름 없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는 게 낫겠다."

민주 사회에서 법 자체는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링의 주장을 현 시대에 대입해 본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다투고 투쟁할 유일무이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한 것이데요. 장 자크 루소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겸허한 중재자'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부분도 중요한 맥락이고, 고대 로마법에 의해 부패한 재판관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지난날의 기록은 이처럼 법이 계층과 지위 그리고 신분을 따지지 않아야만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독일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법정의 문을 두들겼다는 사실과 상반되게 오늘날의 우리의 법정은 과도한 권위와 권력으로 덧칠해져 있습니다. 사법 관료 즉, 판사와 같은 자들이 스스로 준엄한 사법 제도의 수호자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근간인 시민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지위임은 분명한 것인데요. 대의적인 측면에서 제도의 뼈대를 제공하는 선출권을 가진 시민들이 오늘날 사법 제도 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글에서 중요하게 인정되는, "법이 수단과 목적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그것의 주체는 마땅히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공화주의의 아버지들이 사법 체계 자체가 이런 식으로 시민들에게 폐쇄적이 될지는 예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권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취급하는 "오로지 알량한 이익 만을 탐하는 자가 권리의 신성한 의무를 알 길이 없다"는 취지의 맥락은 이를 더 악화시킨 요인이기도 할 텐데요. 개인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사법 제도 자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에 대한 예링의 선견지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국가의 명예와 권리가 달린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예링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링의 진술을 소개해 드린 대로, 국가는 개인들이 모인 총합이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데 노력하는 데 들어가는 희생이 도덕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권리를 위한 투쟁과 관련해, 예링은 먼저 악법과 정치 권력의 사법 지배 상황을 상정하고 "모든 독재는 사법에 대한 공격, 즉 개인의 권리 박탈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후에 진술 되는 국민의 당당한 명예와 같은 자부심과 그에 준하는 윤리적 힘을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게 독재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법 제도가 일으킨 '사법 살인'에 대해 예링은 무엇보다 죄악이었다고 일침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법 관료라면 이미 누구나 한번쯤은 그를 일독했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예링의 경고를 그저 '있을법한 주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텐데요. 우리 역시도 과거에서 사법 제도가 독재에 지배를 당하게 되면서 숱한 '사법 살인'을 지근 거리에서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악법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있다는 것은 권리의 연장선 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그래서 우리는 예링의 글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되는 각자 스스로의 선연한 권리를 양심과 윤리의 측면에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거듭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는 그의 경고를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개인에게 사실상 '과도한 권리' 따위는 없다는 예링의 설득력 높은 논증은 여러 수사들을 통해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데요. 결혼에 대한 수사나 후반부에 로마법을 통해 전개되는 여러 인용들은 그 시대에선 나름 최선의 설득력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이기심과 사유재산에 대한 그의 논증들에 대해 일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들을 위해 오독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애덤 스미스에 관한 거의 의도된 오역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현재에 있어 개인의 이기심이 무엇보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여겨지고 있으니, 이를 의도적으로 권리와 혼용하거나 오히려 전자를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인데요. 바로 하이에크가 그런 의미에서 크게 재미를 봤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법이 보장하는 측면에서 권리를 규명해 나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의 예링이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했던 점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권리라든지 시민의 주권이라는 것들이 계몽주의에서 도출된 것이고, 그러한 몇 세기의 진보하는 역사가 또 공화주의를 잉태하게 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원초적인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의무는 법의 존재 의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권리 투쟁이 결국에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도 맞물리게 되고, 그것을 망각한 이익에 물든 국가의 국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거래하려 든다면 그 국가의 존망이 아주 위태롭다고 봐도 무방할 것인데요. 그래서 도를 넘은 권력자가 대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으려고 든다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저항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민주주의가 그토록 요구하는 시민들의 야생성인지도 모르겠는데요. 따라서 예링이 말하는 '권리' 자체를 의식적으로 가늠해 보자면 결국 이는 우리의 사활적인 민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법의 역사가 인간의 의미와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와 법은 모두 야누스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어떤 이들은 이쪽 면을, 다른 어떤 이들은 저쪽 면만 보는 나머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인상을 품게 된다

민족들에게 법은 그저 아무런 노력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얻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만 한다

이 투쟁들이 고도의 노력을 경주할 가치가 있는 재화를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아둔한 자도 얼마든지 이해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왜 양보하지 않고 투쟁하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재산을 법적으로 주장할 때 지침이 되어야 하는 유일한 동기는 내가 재산을 취득하고 사용할 때 나를 규정하는 동기와 똑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유권이 노동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아주 간단히 또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어들수록 소유권의 물줄기는 갈수록 흐려지고 마침내는 증권투기와 주식사기 같은 진흙탕에 빠져 이 물줄기가 맨 처음 시작된 원천이던 노동은 흔적을 감추고 만다

만일 어떤 삶의 철학이 그러한 안일한 심정을 설교한다면 그런 철학은 비겁함을 찬양하는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이러한 고통을 겪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설령 로마법대전을 모두 외우고 있다 할지라도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윤리적 세계질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본능 가운데 가장 고결한 본능 중의 하나를, 어떤 이들에게는 조잡한 감각적 쾌락을,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또 어떤 이들에게는 소유욕을 자극해 움직이게 만든다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부정은 곧 법에 대한 침해와 부정이며, 나의 권리의 주장과 회복은 곧 법의 주장과 회복이다

윤리적 분노는 도덕적 세계에서 나타는 우레와 같은 현상으로, 그 형태는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분출되며, 그 윤리적 폭발력은 폭풍과 같이 근원적이로 모든 것을 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 앞에 굴복시킬 정도로 강렬하다는 점에서 숭고하고 장엄하다

우리 언어가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법살인은 법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악이다. 법률의 수호자이자 파수꾼이 법의 살인자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권리를 용감하게 방어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전체의 권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바치겠다는 절절한 욕구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건강한 법감정일지라도 나쁜 법을 오랫동안 감당하지는 못하며, 점차 무뎌지고 나쁜 법이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감정은 무뎌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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